2017년 11월 25일 토요일

소실수

방이 너무 좁다고 여겨져서 씨앗을 주문했다. 일종의 담쟁이 덩굴같은 것인데 벽 가운데 박으면 자라면서 벽을 장악해 소실점을 만든다. 공간의 너비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좁지 않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역할로는 충분하다.

흙에 심는 것도 아니고 수분이나 양광을 취하는 것도 아니어서 키우기 쉽지 않을까 하는 오해를 받곤 하지만, 사실은 발아시키는 것부터가 큰일이다. 식물의 즙으로만 자라는데 어째서인지 열매나 뿌리에서 난 즙은 통하지 않는다. 샐러리 따위를 갈아서 면포로 즙만 걸러 붓으로 발라주면 좋다고 한다. 완전히 자라 벽에 정착하기까지 이 공급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즙은 상온보관하되 신선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발라주어야 한다. 자연상태에서는 수령이 오래된 큰 나무에 박혀서 자라는 것이 보통인 듯하다. 숲에서 나무 하나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는 사람을 발견한 적이 있는지? 그 사람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감싸며 자란 소실수에 마음을 빼앗긴 것일지도 모른다.

4~5년에 한 번 개화하고 열매를 맺는데 제 가지의 꽃끼리는 수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가내에서 거둔 씨앗은 발아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다만 개화기에서 결실기까지는 벽 하나에서 여러 개의 소실점을 관측할 수 있다고 하니 상당한 장관이겠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현상에 멀미가 일어나는 경우도 왕왕 있는 모양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더욱 열심히 샐러리즙 같은 것을 발라주어야 한다. 쓰다보니 역시 짜증나는 식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주문을 취소할까 한다.


특기할 만한 점 하나를 잊을 뻔했다. 소실수가 자라는 구역에서는 버섯이 나지 않는다. 필자에게는 중요한 장점 중 하나지만 이 방에서는 원래 버섯이 안 나기 때문에 방이防茸 목적으로 소실수를 키울 필요까지는 없겠다.

2017년 11월 15일 수요일

[7호 서신]


*겨울철
 - 건강 관리 유의.
 - 입하 관리 철저.

*관리권한 변경
 - 필진 권한이 관리자에서 작성자로 일괄 변경됨.
 - 관리자 권한은 창고관리인 계정만이 가짐.
 - 구글 계정(창고관리인) 공유 기조는 유지.
 - 위 변경에 맞게 사용조례를 개정함.

*필진 모집
 - 추천제로 항시 진행.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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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7년 11월 2일 목요일

10월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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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를 갖고 싶다. 더 정확히는 묏자리를. 숲속에 반듯 널찍한 구멍을 파놓고 싶다. 이 나라엔 산뿐이고 숲이랄 건 없지만서도. 파놓고서 가끔 가 주변을 매만져두고 싶다. 부장품들을 미리 가져다 둔다. 전혀 쓰지 않지만 버리지도 않을 물건들이다. 내가 여생을 비참히 보내지 않는다면 아마 보물함이 거기 들어갈 것이다. 호박, 흑단, 산호, 물총새깃이 들어 있는 작은 나무함이다. 작은 금붙이나 터키석이 추가될 수도 있다. 청금석도 좋다. 도기나 조약돌 따위. 그리고 그들을 닦을 수 있는 천. 개다리소반도 가져다 둘 것이다. 개다리소반을 주우러 동네를 쏘다녔던 기억이 난다. 결국 줍지 못하고 샀었다. 만 원을 주고. 상인은 다리 하나에 이천오백 원이라고 했다. 묏자리에는 이제 죽을 때까지 읽지 않을 두어 권의 책도 들어간다. 묘를 만들며 쓴 도구들도 함께 묻어야 한다. 물이 차지 않게 지상 둘레에 얕은 흙담을 올리고 천막을 친다. 20년 정도만 소일하듯 해도 진시황 부럽지 않게 될 것이다. 개 무덤도 그 안에 만들면 되고, 후손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거기 앉아서 내 벽들과 함께 살다가, 그냥 거기 누워 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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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북은 상당히 관심사다. 포켓북을 만들고 싶다. 포켓북이라는 형식에 맞는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가져와서. 시집, 단편소설, 유머집, 소사전, 논문, 저작권 풀린 옛 고전의 한 부분, '무엇을 할 것인가', 마오 어록, 박근혜의 산문, 김재규 일대기, 우주세기 연표, 야인시대 64화(심영 에피소드)의 각본, 한국의 시·군 목록, 그런 잡다한 것들을 같은 시리즈로 하나씩 만들고 싶다는 얘기다. 안주머니나 손가방에 쏙 들어가는, 손바닥만 한 종합 문고다. 번호가 있어야 수집욕을 자극할 수 있다. 표지가 예뻐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씩 띄엄띄엄 나오면 안 되고 와장창 쏟아져 나와야 한다. 순서대로 나오면 안 된다. 이 형식에 내가 쓴 것을 슬쩍 끼워 넣는다는 것이 당연한 핵심이고, 그 참에 네가 쓴 것도 슬쩍 끼운다는 것이 두 번째 핵심이다. 협동농장총서. '***문고' 같은 이름도 좋겠는데 적당한 ***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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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점대 갖기. 주역점에 쓰는 점대를 말한다. 산가지, 서죽이라고도 불린다. 주역을 배운 것은 대학생 때 교양수업에서였다. 몇 없었던 만족스런 강의였다. 주역점을 쳐서 해석해 오는 것이 과제였던지라 나무젓가락을 깎아 점대를 만들었다. 한동안 그걸 갖고 점을 쳐댔다. 축제 때도 치고 엠티 가서도 치고 이거 위험해지는 거 아냐? 싶을 때까지 쳤다. 그때 만든 점대를 계속 갖고 있다가 한 개를 잃어버렸다. 본래 50개 중에 한 개는 빼놓고 치므로 점을 치려면 칠 수는 있으나 법에 맞지 않는다. 하나만 새로 만들기엔 이전 것들에 든 길 탓에 너무 튄다. 사려고 하면 값이 보통이 아니다. 아마추어 주역쟁이들은 이것저것으로 자작해서들 쓰는 모양이다. 김발을 사다가 끈을 풀어서 쓴다는 사람도 있다. 나도 이제 나이도 적당히 찼고, 새로 한 세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좋게 해 가지고. 얼마 전 꿈에서도 거짓말처럼 이 생각을 했다. 꿈속의 대밭을 보면서 저걸로 서죽을 만들면 어떨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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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차 말했지만 이제는 中化시대다. 중화시대가 온다. 나는 그럴 필요가 있는 단어에서는 언제나 한자를 병기하고 있는데, 다 중화시대를 대비하는 차원이다. 한 자라도 더 써두고 더 봐두면 좋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중국어 스터디 그룹를 만들고 싶다. 중국어를 배웠으면 배웠지 왜 굳이 그룹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것 같다. 정말로 갖고 싶은 것은 뭐 무슨 그룹인 것 같기도 하다. 그놈의 그룹... 벽 같은 것이다. '한계가 있어야 전진이 있다'라는 식으로. 서로의 한계가 되어 주는... 주역을 통해 중국어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너무 오래되었나? 협동농장총서에 주역해설도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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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다니기 좋은 시기도 끝나 간다. 바퀴 달린 탈것을 갖고 싶다 노래를 부르고 다니기도 했다. 바퀴는 세 개 이상, 승객을 한 명은 태울 수 있어야 하고,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인력이라도 괜찮다. 세발 자전거가 그나마 현실적이다. 장은 잘 보지도 않지만, 그걸로 장을 보러 다니면 좋겠다. 좋기로는 짐마차가 가장 좋다. 마차면 마구간도 있어야 한다. 마구간도 물론 갖고 싶다. 마구간 정도는 있어야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마부를 하기는 싫다. 나로서는 그런 크기의 큰 짐승을 감당할 수 없다. 나귀 정도라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지만. 나귀 마차. 오토바이라면 사이드카다. 오토바이는 너무 좁다. 자동차라면 다마스 정도가 귀엽다. 라보도 괜찮다. 그런 것들을 끌고 다니기다. 버스도 전철도 아닌, 개인적인 이동 방안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이동 방안을 위한, 개인적인 이동 방안의 계류지가 필요하다. 아니면 개인적인 이동방안 속에서 잘 수 있어야 한다. 그쪽이라면 내 것이 아닌 역들이 있어야 할 것이고, 아니다, 그런 것은 필요가 없다! 외양도 포장마차도... 그런 것들은 필요가 없고 가질 수도 없다. 무덤이 그러한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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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옷을 입은 관리인은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나왔다. 튼튼하고 우아한 철제 의자. 그는 내게도 차를 따라 주었다. 어두운 빛에 구수한 향이다. 그는 '좋은 거'라고만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툼하며 묵직한 그의 컵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소반 위에 있다. 그는 내 메모를 하나씩 읽고 내게 돌려준다. 나는 나의 메모를 하나씩 받아 불 속으로 던진다. 그 화는 빛날 화 자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 말고 다른 말은 없었다. 메모들은 곧 다 탄다. 속절없다. 땔나무 구하기는 제법 힘들었다. 차는 별 도움이 안 됐다. 다음엔 지게를 지고 산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관리인은 지게가 있다 말하고, 차에 대해 묻는다. 만든 것이냐고. 주운 것이다. 훔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고친 이는 나다. 새 왼쪽 바퀴를 구하고 아주 기뻤던 이야기를 했다. 관리인은 산에 대해 말한다. 옛날에는 저 산에 나무가 없었다. 산 이름을 묻자 알려주었다. 노인들이 다 죽어 놔서... 지금 그의 무릎에는 보란 듯이 이사야가 올라앉아 있다. 그는 쥐잡이를 만지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는다. 이사야는 그곳에서 편안해 보인다. 저번 주부터 내게 쌀쌀맞게 군다. 쥐무덤을 찾아낸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통조림은 먹었고, 그곳에서 졸고 있는 것이다. 관리인이 뭘 적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것도 그에게 보여준다. 그는 이것도 태우는 거냐고 묻고, 나는 그렇다고 답한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