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6일 수요일

파다한 ― 29

결혼보다 정략결혼이 보기에 좋다.

식장에서 든 생각이다. 단상 앞에 선 이들은 합동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누가 누구의 짝인지 알기 어렵게 그들은 태극 문양으로 서 있다. 어떤 각도에서 찍어야 하나... 그렇다고 안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차피 식장에서의 사진이란 수천 장 찍어놓고 전부 다 보내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골라내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상 촬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주례가 종전을 선언할 때까지 끊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나는 이크,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며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벼랑처럼 건너고 있다. 나는 혼잔데, 누가 누굴 찍는 건지 거참... 

포크가 날아다닌다. 이런 음악이 듣기 좋지는 않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생각을 비우고 다시 생각을 시작한다. 요즘엔 인육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다. 어디다 발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발표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포브스 신년 특집? 월간 쓰리랑? 헛간인지 곡물창고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곳에서, 주례는 기관총을 등 뒤에 맨 채 신변잡기를 늘어놓고 있다. 덕분의 나는 그의 생년월일과 본적, 본명, 이사 예정일, 택배 품목과 체류지를 알게 되었다. 이 정보는 훗날 그에 대한 암살 지령을 받게 되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이런, 지금 내려왔네. 하지만 나는 일의 선후관계를 분명히 하는 쪽을 선호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결혼 당사자들은 우측으로 조금씩 이동해가며 서로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있다. 서른 한 명이니(정확하지는 않다) 총 465회의 입맞춤이 발생할 것이다. 웬만한 로맨스 영화도 이보다 많지는 않을 텐데. 그러면 그것을 다 보고 있어야 하나? 보는 건 또 어때서? 입맞춤의 의미를 나는 모른다. 당사자들은 알고 있으려나? 그러나 이런 생각만으로는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겨우 몇 초 남짓 지속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 나는 생각의 범위를 식장 밖까지 넓힐 필요가 있겠다. 그것이 여러분이 원하는 바, 나도 끊임없이 인지하고 있다.

고원이 있다. 고원은 평평도보다 고도를 중시한 개념이다. 고원은 무언가를 기다리기에 좋은 공간이다. ‘시간과 정신의 방’의 배경이 고원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비군 부대도 대개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별 관련이 있나 모르겠지만... 고원은 식을 올리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애초에 뭔가 거창한 것을 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체조 같은 것을 하기에 최적화된 이 고원에, 뜻밖에도 헛간이 있고 농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데도 헛간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마치 하늘에서 헛간뿌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연결고리 없이 놓여 있다. 두서없이 자라고 있다. 다 큰 헛간은 지붕을 베어내야 맛이 좋다고 한다. 거기 누가 살고 있는지는 개의치 말고 혹시나 나한테 물어보지도 말고... 

라면 물이 끓기가 무섭게 주례는 종전을 선언했다. 와! 좋은 날이니까 세레머니는 하지 말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는 주례의 말인지 안내 음성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는데 잘 들어보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나는 필름이 들어 있었는지 확실치 않아 귀에 대고 카메라를 흔들었다. 무언가 꽉 조여진 채로 덜컹거리고 있었다.

2019년 1월 4일 금요일

우리 아이 창의력 교육 제6장


H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오후부터 시작과 종료의 시기를 알 수 없는 사건의 후일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상상 속에서 사건은 이미 시작됐거나 영원히 시작되지 않기도 했다. 어떤 경우를 고려하더라도 지금쯤은 분명히, 라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시간을 지날 때, J와 잠깐 마주치게 되어 본격적인 대화를 시도해볼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H에게는 J에게 전할 특정한 화제가 있었고 그건 둘이 공유하던 오랜 고민의 결말이었기 때문에 말을 걸어 이야기를 시작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적절한 타이밍이었고 내용도 충분했다. 대화에 임하는 어투도 쉽게 상상되었다. 좋아하는 J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만족감을 느낄 터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던 건, 오후부터 내내 계속된,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상상이 끊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한 번 끊긴 후 보류된 고통과 함께 다시 시작되는 상상은 흐름이 끊기지 않은 경우보다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그는 흐름을 끊을 만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흐름을 효과적으로 끊을 수 있는 타인과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 대신 H는 혼자, 작업 중이던 일에 집중하여 성과를 내려고 노력했다. 상상에서 적당히 빠져나오기. 빠져나온 만큼의 몸으로 성과를 내어 방어벽을 쌓기. 고통의 순간에도 쌓아 올린 방어벽으로 이후의 고통에 대비하기. 공포에 대비해야 한다는 공포를 피할 수 없는 사람은 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투사가 된다. 익숙하게 싸우면서, 사건에 선행되고 따라오는 모든 감정을 예측하면서, 소식을 접한 당시 충격의 강도 이상으로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장소와, 참여자와, 현장에 구비된 물체와, 여러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에 대한 상상이 멈추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 이상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이 과정에 막힘이 없었던 어떤 날들에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진맥진한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가끔 꿈에서는 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곳에서, 상상도 못했던 장면들이 H의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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