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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3일 화요일

장갑

그리고 스피커는 다시 얼음광산에 있다. 루틀리지는 죽었지. 게친도 죽었어. 그는 이제 낡고 헐거운 장갑을 손목 위로 끌어당긴다. 루틀리지가 만들어 준 장갑. 이 장갑을 끼고 있는 한, 스피커의 모든 주술적 역량은 0이 된다. 그가 들은 소리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장갑을 벗어야만 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 몇 초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뜻이었다. 그 몇 초는 제법 길게 느껴졌고 종종 중요하게 작용했다. 스피커는 사형수에게 물었다. “살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형수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순간이 종종 있죠. 내게도 몇 번 그런 순간이 있었고요.”

스피커는 편지를 잘 접어 허리춤에 달린 복대에 넣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후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사후세계에서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사후세계에 있는 동안 분노와 억울함 같은 게 사그라들어서, 자신을 죽인 당신을 용서하거나 못 본 척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통은 그렇지 않고, 당신이 죽인 사람은 사후세계의 입구에서 당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과거를 잊어도, 과거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는 격언을 알 겁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인 거죠. 그런데 죽은 사람이 죽은 당신을 한 번 더 죽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나도 몰라요. 주술사들은 사후세계에 가면 그곳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이곳 지상으로 전달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일만 명이 넘는 주술사가 죽는 동안, 그곳에 대해 알게 된 정보라고는 그곳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스피커는 속으로,

게친은 아주 강했다. 게친은 공간을 당기거나 밀칠 수 있었어. 그건 게친에게 있던 사후세계 물건 중 하나의 힘이었지. 그래서 게친은 사후세계에 가서, 그 물건을 잔뜩 모은 다음 사후세계와 지상의 거리를 당기겠노라고 했어. 거기와 여기를 볼 수 있어야, 오갈 수 있어야 사람들이 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이 세계를 좋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러나 게친이 죽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세상은 얼음이 되었고 사후세계는커녕 사후세계에서 보내오는 신호조차 한참 전에 끊겨버리고 말았다. 주술사 학살도 있었지. 몇 명이 남았는가? 아무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걸 얘기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사형수가 물었다.

스피커는 대답했다.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 해서요. 아마 광산장을 죽여야 할 것 같아요.” “왜요?” “그는 내가 누군지 알아요.” “그럼 사후세계의 광산장이 당신을 죽일 것 아닙니까?” “괜찮아요. 한참 뒤일 테니까.”

그리고 스피커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무언가 해내려면, 이 편지에 적힌 것처럼 내가 하게 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야 죽게 될 거야. 과정은 몰라도, 어쨌든 내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 사후세계도 무엇인가 점유하고 있는 물질된 공간이라는 것을 게친을 만났을 때 알게 되었으니까. 그곳은 관념이 아니며, 나는 언제나 마지막이니까.

사후세계까지 한참 걸린다는 사실을 예상해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스피커에게 내려진 저주의 좋은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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