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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8일 금요일

프로듀서 멤버

아이돌 멤버 중에 프로듀서가 있고 없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이돌을 하면서 프로듀서를 하라는 건 너무 어려운 요구이다. 근데 그걸 실제로 이룬 경우가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직접 만든 좋은 곡들로 그 그룹의 인기를 견인하게 된다. 

다른 멤버들은 그 프로듀스를 겸하는 동료를 우러러 보게 될 수도 있다. 이 프로듀서 멤버란 예술에서의 영감과 같은 것으로 비유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싱어송라이터도 그와 같은 결로 이해될 수 있을지도. 근데 아닌 것 같다. 자기가 만든 노래를 직접 부르는 그들과 프로듀서를 겸하는 아이돌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싱어송라이터는 극작가가 배우를 겸하는 것에 가까울 수 있다. 반면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아이돌이란, 모든 면에서 검증된 엔터테이너가 되는 일이다. 아이돌들이 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이돌이 완벽한 대상으로 되고 있는 것을 암시해준다. 친근하거나 섹시한 컨셉 같은 건 이제 먹히질 않고 있다. 세련되고 신비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그들은 재현하고 있다. 

게다가 프로듀서의 능력이 있다면 그들은 나중에 소속사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된다. 

싱어송라이터가 어느 정도의 다중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실력 있는 아이돌이란 조금 과하게 능력이 한 사람에게로 집중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화 산업의 트렌드를 맡긴다는 것은 그러한 상황에 담긴 어떤 감정을 우리가 반복해서 듣게 되고 따라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예전만큼 노래들은 우리들에게 있어 친근하지 않게 되었다. 감정이 가장된 형식이 주를 이룬다.

아이돌로 시작해서 소속사까지 만들 능력을 갖추게 되었듯 우리는 어떤 종류의 우로보로스적인 형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하게 능력이 있는 것은 뭔가 좀 기이한 상태이다. 전달 방식에 있어 그것들은 세련되었고 내용 또한 독창적일 때가 많다. 다른 것들도 이견을 가질 부분 없이 무언가 완벽하고 딱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노래를 사람들은 즐겨 듣게 된다. 사람들은 아이돌이라면 믿고 신뢰하게 되고 그런 믿음과 신뢰를 주지 않는 대상들은 아이돌이 아니라 여기게 된다. 근래 르세라핌의 코첼라 공연에 대한 댓글들이 날이 서 있던 것은 라이브 실력이 아이돌답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버튜버의 스트리밍 콘서트를 볼 기회가 있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반응들이 많아서 나도 그 같은 감정에 빠지게 된 그런 적이 있었다. 버츄얼 아이돌이란 허술한 매력이 많아보이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더 가혹한 것일 수도 있다. 버츄얼 아이돌은 스스로의 얼굴을, 현실의 직업을, 편안하게 펼쳐지는 평소의 어조를 그들로 향하는 컨셉으로 만들라는 요청에 있다. 그렇게 한다면 약간의 지어낸 티쯤은 모르는 체해주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할 만한 그러한 대상들에 사람들의 눈은 너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아이돌보다 버츄얼 아이돌에게 더 가혹한 것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보고자 하는 데에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기획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쓰기도 전에 작품의 개요에 접근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는 이유는 그 인간을 천천히 알아갈 그런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인정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타인들을 놀래키는 그런 재주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 시대적 경향에 가장 들어맞는 것이 좋은 곡에 대한 강압적 요구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좋은 노래가 아니면 안 보고 듣겠다 외친다. 각 기획사들은 그래서 좋은 노래를 내는 데에 시키는 대로 따르는 듯이 보인다. 그거만 해주면 일종의 낙차가, 금전적 보상이 뒤따르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이돌이 말을 가려서 해야 하듯 버츄얼 아이돌들은 자기 컨셉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하츠네 미쿠가 기획적인 존재라는 표현을 썼었다. 아이돌 멤버 중에 프로듀서가 있단 것은 결국 인간의 뼈에 관절이 있어서 그것을 적시에 구부릴 수 있는 그런 특성과 맞닿는다. 이는 일종의 자발성인 것이다.

그러한 자발성의 착시가 인형극에 있는 우아함이다. 하츠네 미쿠는 하츠네 미쿠가 인형에 실을 걸고 그 모조된 것을 우아하게 일련의 춤 동작을 시키는 장면을 보고 있다. 인형극은 인형사의 손만 등장하는 것이라서 하츠네 미쿠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그 무대의 꼭대기가 버츄얼 아이돌이라면 아래 있는 구체 관절 인형은 현행 아이돌들이다. 기획의 결과가 그런 자발성과 맞닿는 점은 무언가 시사해주는 것이 있어보인다. 인형의 춤 동작을 지시하고 창조하는 윗사람은 그 동작 중 어느 부분을 인형의 역할로 맡기게 된다. 몸의 중심에 실이 걸려 있는 그 인형은 그래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면을 갖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가 인정할 만한 자발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형은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을 인형극이란 숨기고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과장하는데, 이는 인형이 보이는 동작의 유려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우리들은 점점 디테일을 보지 않고 내용을 외면한 채 그것에 담긴 사고를 보고 있게 된다.

그것은 기획이다. 사람들의 호오와 취향을 결정짓는 바로 그것이다. 인간에게 취향적 자유가 있어서 그 노래들을 찾아 듣는 것이 아니다. 이미 먼 섬 저편에서 그들에게로 보내진 그 편지를 읽는 재미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노려지는 일에 취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러한 시대적 경향성이 판단해주고 있다. 챗지피티도 그런 대중 음악과 꼭 같은 것일 수 있다. 우리는 판단을 외부에게 맡기고 있다. 우리는 노래하고 춤추지 않을지라도 생각으로는 부르고 춘다. 우리는 보다 심원한 영역에서 자신의 몸의 중심에 실이 걸려 있다. 우리는 춤추는 인형들이다. 운명적인 대상을 만나지 못한다. 이쪽의 생각과 저쪽의 기획이 맞닿는 한에서 그렇다. 반면 문화 산물들과 우리가 빚어내는 인형극은 점점 우아스러워지고 있다. 이 인형극의 꼭대기에 있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사실로 소속사들의 사장들이 아니다.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아이돌 멤버 중 하나는 결심하게 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앞날은 자신의 기획으로 결정하고 싶다는 그 결심 말이다. 하츠네 미쿠의 기획이란 매력이란 요소 중 핵심적인 것들을 선택해 한 대상에게 집중시켜본 데에 있었다. 지금처럼 자발성이 핵심적인 키워드는 아니었다. 미래를 자기 손으로, 아니 자기 생각으로 도모해보고 싶은 바로 그런 시행착오들을 지금도 버츄얼 유튜버들은 빈번하게 겪고 있다. 자신을 가둘 자신의 컨셉을 스스로 만들어야 되기에 그들은 팔을 뒤로 하여 몸의 중심점에 스스로 실을 매단다. 그들은 실로 인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몸을 움직인 다음 실로 인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데에 자신의 자유로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명랑한 일일 수 있고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일 수 있다.

하츠네 미쿠를 보면 나는 느낀다. 뭔가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을. 원본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이면의 실체가 없이 오직 보여지는 대로의 딱 그대로니까 존재 층위의 신경질적인 강압과 압박, 연기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불만과 만족이 삭제된 것처럼 느껴진다. 버튜버의 그 콘서트가 그와 비슷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는 일견 거추장스러운 부분이 없었지만 그런 걸 과감히 생략해도 좋은 듯했다. 보여지는 그대로의 것에게 있어서 고민이나 그 순간의 망설임은 없는 듯이 보인다. 자신의 움직임을 취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에게 있어서마저 환호를 지르는 것이 즐거운 것과 함께하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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