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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4일 월요일

월요일 아침

월요일 아침이 제일 팍팍하다. 모름지기 컴퓨터도 전원 꺼뒀다가 켜면 정신 차리는 데 오래 걸린다. 사람이라고 별로 다를 바 없다. 윤회와 같은 순환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풀면,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것이나 진배없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아기처럼 약해져 있는 것이다... 응애. 하지만 진실된 아기라면 커피 따위 탐하면 안 된다. 나는 기계가 내려준 카페인 국물을 갈망한다. 그것을 꿀꺽 들이삼키면, 머잖아 내 전신의 피는 회전을 가속하기 시작하고, 불현듯 나는 과거생의 기억을 모조리 되찾게 되며, 삽시간에 몰락한 아저씨로 삭아버리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내 존재의 자기동일성, 생활의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감사한 메커니즘이다...
그렇지만 프로 아저씨에게도 사무실은 삶을 영위하기 적합한 공간이 아니다. 끝없는 고난과 절망의 판도를 뒤집어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기 위하여, 사무실 동료에게 DULTON사의 알루미늄 바인더 하나씩 장만하자고 꼬셨다. 물론 사무실은 본디 철저히 기능주의적 공간이다. 판때기가 종이만 받쳐주면 되지, 무슨 재질이 철일 필요가 있냐... 합판도 감지덕지다. 아니 그렇게 협소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사람아, 받침판이 고급스러우면 똑같은 종이도 더 있어 보이는 거야! 어차피 비품 구매 및 관리는 그의 업무이므로 나는 입만 놀려대면 그만이다. 과연 그는 나의 팍팍한 직장생활에 한 줄기 설렘을 보태줄 것인가...

2021년 12월 20일 월요일

감성 속세 에세이

삶을 동시에 두 가지 목표에 헌정할 수는 없다. 단독자인 동시에 범부대중의 일원으로 살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애초에 이것은 선택의 문제조차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허덕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수를 깨닫는다. 직업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먹어치운다. 무의미한 사무에 몰두할 때면 확실히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이제 대충 노동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노동은 점차 존재를 사라지게 만드는 테크닉이다. 희미해지고 희미해지다 보면 말 그대로 대중, 모래알, 장삼이사 따위 텅 빈 기표들만이 곁에 남는다. 우리의 진정한 이름은 바로 이런 것들뿐이다. 노동은 우리에게서 한 줌의 색채마저 앗아간다. 존재를 박탈당한 자들은 투명한 유령이 되어 속세를 배회한다.
내가 그저 생업이라고 부르는 것, 단지 먹고살기 위해 몸을 담그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그나마 세간에서는 유일하게 나를 대표해준다. 그 당연한 사실을 여지껏 모르는 척 해왔다. 하지만 이조차도 영원히 내 존재를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차라리 자기기술을 한껏 토해내고 나면, 잠시나마 희미해짐의 속도를 늦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것이 순전한 기분일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덧없는 자기환상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허탕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자기환상에 대한 환멸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차라리 모래알 속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방법을, 비존재나 다름없게 느껴지는 저 광활함 속에 자신을 내어주고도 긍정할 수 있는 태도를 터득하고 싶어진다. 떠밀리듯 범부대중으로 태어났고, 떠밀리듯 그것을 수행해야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행로다. 변변한 이름조차 없이 등 떠밀리며 여기까지 온 것은 사실이지만, 걸어온 발걸음 중 무엇도 되물리고 싶진 않다. 이곳에 남기를 자처할 것이다. 사라짐을 견디면서. 사라짐과 싸우면서. 그리고 완전한 사라짐을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바다에 던져지면 되느니…”

2021년 12월 9일 목요일

체념의 좌파

소위 ‘오피스 하이퍼리얼리즘’이 흥행하는 양상을 보고 있으면 대충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화이트칼라는 어떻게 리얼리즘을 탈취했는가?> 이제 그런 식의 리얼리티야말로 우리의 흥미를 끌고 몰입시킨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블루칼라는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비국민화되고 있다(외국인 노동자와 기계 따위). 외국인은 국가가 그 권리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시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로보트는 더더욱 아니겠지요?(아이로봇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들이 우리의 공론장에서 갖는 목소리는 거의 없는 수준이나 다름없다. 글로벌/자동화된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위험을 그런 식으로 축출한다. 그들의 존재에 대한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언어부터 축출한다. 그리고 리얼리즘이라는 남겨진 어떤 전리품...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라는 소시민적 존재를 떠올린다. 나는 관료제적인 것의 실효성을 믿지 않는다. 누가 믿고 싶겠습니까. 본격 관료들조차도 그런 거 안 삽니다. 행정주의가 유발하는 너무 많은 불필요한 과잉들에 다들 치이며 산다. 그러나 일터에서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보통의 관료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요즘은 관료로서의 적성을 발굴하는 재미가 쏠쏠하기까지 하다. 사람이 해까닥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이런 거구나. 니가 선택한 관료제다. 그야말로 악으로 깡으로 버텼습니다. 매너리즘 한 봉다리에 관료정신을 배웠고. 피어오르는 무사안일주의와 더불어 그만 꼴까닥... 흐흐흐. 큭큭큭.
마크 피셔가 말한다. “쾌활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종의 비판적 성찰성을 거의 완전히 결여하고 이 관리자가 그랬듯 관료 기관의 모든 지침에 냉소적으로 순응할 수 있을 때 뿐이다. 물론 순응할 때 보이는 그 냉소주의가 핵심이다. 가령 그는 감사 절차를 아주 성실하게 이행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댐으로써 60년대 스타일의 자유주의적 자기 이미지를 보존한다.” 그런 식으로 냉소하면서 나는 이 현실 저 현실을 옮겨다니는 중이다. 그러나 그 모든 심적 반란에도 불구하고, 외적으로 나는 마치 그러한 절차들을 믿는다는 듯이 행동(해야)한다. 그 대가로 나는 최소 소시민적 생활수준을 보장받는다. 그러한 수준에 미달하는 경제적 생존을 상상하는 것은 확실히 공포스럽다...
그야말로 공포에 길들여진 똥개가 되어버렸구나. 뭐요. 기만적이라구예? 똥개로 안 살아도 되는 니들이야말로 기만적이다(똥개 동지분이셨다면 죄송ㅎㅎ). 이렇듯 좌파의 병리 현상을 온몸으로 증빙하고 있지만. 섣부른 낙관엔딩 같은 것은 절대로 구사하고 싶지 않다. 응애 아기좌파 혁명줘. 그런 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줍니다. 일전에 돗자리 말고 본진에다가 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이 좋다고 썼다. 체념이야말로 우리 똥개들이고 고통받는 중생이며 범박한 민중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체념의 좌파 같은 것을 자처하고 싶다. 체념하는 좌파 아니구요. 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좌파입니다. 뭐요. 악질 반동이라구예? 니맘만 있고 내맘은 없냐???

2021년 12월 4일 토요일

성골 프롤레타리아를 찾아서

여러분과 나 자신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급격히 악화된다. 그러면 또다시 뭔가 쓰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재차 이러고 있다. 이건 뭐 내가 일간 이슬아도 아니고. 국수 뽑아내듯이 뭘 자꾸 뽑아내요? 에휴 하여튼. 곡물창고에 돗자리 깔면서 특정한 주제를 생각해둔 것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노동 에세이를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도 근무시간 내에서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약 하에서. 오늘은 주말이다. 출근 안 하는 날이라고 해서 노동자가 노동자 말고 다른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쓴다.
하지만 쁘띠 부르주아로 추정되는 작자가 징징거리는 이야기 같은 것을 누가 읽고 싶겠는가. 나조차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배부른 소리 따위의 꼬리표를 모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에서는 누가 무슨 말을 하건 그렇게 되기 십상이다. 말할 자격을 갖춘 자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성골 프롤레타리아를 찾아서. 아니 사실 별로 찾고 싶지 않다. 나야말로 출신성분 좋은 혁명집안 출신이다. 가까운 가계도를 뒤져봐도 아주 그냥 농부랑 노동자 말고는 뭐가 안 나와요. 우리 세대에 오면서 일부 대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일부 사촌들 때문에 우리 집안의 순수성이 망가졌구나. 언제 한번 날 잡고 자아비판 씨게 때리겄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얘기 나온 김에 말 좀만 더 얹어보자.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랑시에르는 소위 ‘평민 철학자’라고 불리는 루이 가브리엘 고니(Louis Gabriel Gauny)에게 관심을 갖는다. 노동자는 무엇에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하는가. 고니에 따르면 그것은 다름아닌 시간의 박탈이다. “시간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에겐 노동 이외의 다른 무언가에 몰두할, 달리 말해 빈둥거릴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시간은 오로지 부르지아지에게 속한다. (그렇다면 고니는 도대체 어떻게 글을 쓰고 남겼는가. 밤잠을 유예시켜 시간을 마련하는 방법이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빈둥댈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살아간다. 확실히 과거에 비하자면 나은 처지인 것이다. 심지어는 정통 노동계급인줄 알았던 내 부모 및 일가친척들도 맨날 텔레비전 보면서 빈둥거린다. 그렇다면 이제 다함께 (최소한) 쁘띠 부르주아라는 정체성을 확인받고 만족하면 되는 문제인가.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쁘띠 부르주아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니들끼리 해라. 이를테면 이러한 상황들이야말로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불유쾌하게 만든다. 끝없는 자격 확인 절차라는 머저리 같은 장난질. 그럼 뭐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아주 그냥 옛날 운동하시던 분들처럼 공장으로 침투합니까? 아니면 이럴 바에 차라리 룸펜 인텔리겐치아로 눌러앉아서 돈 없다고 맨날 징징거려요? 말하자면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 성골 프롤레타리아 따위는 찾아다니지 맙시다. 차라리 히로빈 찾아다니는 마크 초딩이 더 영양가 있을 듯. 달리 말해, 이제 우리는 모두 배가 불러서 배부른 소리밖에 못한다고 인정을 해야 뭐라도 한다. 하층민의 걱정거리가 배고픔이 아닌 비만이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덧붙여야 하겠습니까?

2021년 12월 3일 금요일

사골 끓이기 왜케 힘듦

작성해야 하는 문서가 있는데 글이 안 풀려서 뻘글이나 쓴다. 문서 작성에 할당하는 시간이 10이라면 보통 9는 고통받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다. 님은 로동을 통해 무엇을 생산하시는지? 에 저는 말하자면 창작의 고통을 생산하는디요 하여튼 그러고 있으면 사업주가 저한테 돈을 줍니다. 벌써부터 말문이 막혀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이래서 글을 위한 글은 쓰면 안 된다. 님들 저가 뻘글만 쓰면서 헛소리만 주구장창 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 뭐시기냐... 아디다스 뱅크입니다. 뻘글 하나 제작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아이템 구상하고 농담 궁리하고. 님들은 아무것도 몰라!!!(흑흑) 예 뭐 그렇습니다... 나는 레퍼런스 딱딱하게 읊어대는 거 진짜 싫어하긴 하는데. 그럼에도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로는 역시 잘 말하기 어렵다. 사무실에 쥘 만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일단 마우스가 있고요. 볼펜이 있고요. 업무수첩이 있습니다... 아이고 삭막해서 사람 못산다. 돌잡이 때부터 어른들이 뭐든 쥐어보라고 난리부르스를 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그런데 사실 레퍼런스 없이 제일 힘든 것이 바로 업무다. 선례 없는 업무가 떨어졌을 때 그 더러운 느낌 아시는 분들은 아실 텐데. 작년꺼 재작년꺼 찾아보고 아 다르고 어 다르고 하여튼 어?!! 해서 갖다바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레거시가 하나도 없고 님한테 주어진 게 그저 hwp의 영롱한 <빈 문서 1>뿐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야말로 사람 미치는 거예요. 그만큼 페이퍼워크에 있어서 레퍼런스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저가 전문용어로도 하나 만들어봤는데요. 네 글자로 컴팩트하게 절대참조...(절대적으로 참조하라는 깊은 뜻) 레거시라는 게 무슨 먼지 쌓인 구석탱이의 골동품이 아니라. 회계연도를 기점으로 자기갱신을 되풀이하는 영구 기관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그 과정에 끼어들어서 아 다르고 어 다르게만 손봐줍니다. 비유하자면 보고서님 네일아트 해주시는 분 정도밖에 안 돼요(네일아트 종사자분들 사랑합니다). 그런데 큰 틀에서는 동일하되 디테일만 살짝씩 바꿔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몇십 년째 똑같은 사골을 쓰고 있는데 매번 새로운 포인트를 주래요. 그래서 포인트 주면 예전 같은 맛이 안 난다고 화냅니다. 저보고 뭐 어쩌라는 건지???

2021년 11월 30일 화요일

임금벌레

뻘글은 원래 근무시간에 쓰는 게 가장 재미있다. 거창한 기획 같은 것은 없고요. 근무시간에 살살 눈치 봐가면서 분량 뽑아내는 것이 곧 기획이죠 흐흐. 일 참 편하게 한다고 생각 드시는지. 저가 이렇게 마음만큼은 항상 누구보다도 불편하다. 학창시절에도 한 교시 50분이면 30분은 해찰했는데. 근무시간 풀가동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딩초 시절부터 해찰 1분도 안 해본 사람만 저에게 돌을 던지라. 관리자의 감시를 교란하는 감동적인 회피기동. 사업장의 억압장치를 무력화하는 능수능란한 리스크 헷징. 예 거의 뭐 써커스단이나 다를 바가 없죠. 저가 맨날 이렇게 똥꼬쇼 하면서 산다. 뻘글 하나 빚어내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여러분. 규율권력 및 어쩌구저쩌구에 빅엿을 날리는 충격쇼크 감동실화. 이제 아시겠습니까? 앞으로 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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