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8일 화요일

앞서가는 마음 같은 것

네가 알려준 서점에는 파본이 없다.
그 사실을 나는 A부터 Z까지 모든 서가를 둘러보고야 알았다.
무오류의 서가 사이를 나는 이제 막 잠에서 깬 얼굴을 하고 돌아다닌다. 한 페이지 존재하고 난 뒤에 다음 페이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 이렇게나 쉽다. 마지막 페이지엔 이것을 지은 사람과 묶은 사람, 찍어낸 사람의 이름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뒤표지엔 책에 걸맞은 값이, 당연한 사실이 검은색 잉크로 인쇄되어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놀랍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등들. 등을 돌린 듯하지만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열어보면 유익한 마음들이 쏟아지겠지. 그걸 모두 접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끌리듯 다가간 곳은 악곡집으로 가득한 서가. 이곳을 알려준 너에게 악곡집에 실린 노래 하나를 불러주고 싶다. 신나는 거 말고, 너무 슬프거나 편안한 거 말고, 너한테 맞는 거. 너한테 맞을 것 같은 거.
악곡집 한 권을 사서 서점을 나선다. 집에 돌아가 혼자 곡을 고르며 시간 보내야겠다. 시간 들여 고른다 해도 절대 고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오히려 좋을 것이다. 멀쩡한 생각은 저 뒤에서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 너를 다 알고 싶은 마음은 나를 한참 앞질러 갔고.

2023년 3월 24일 금요일

9

 



그는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길을 몇 번 잃었으며, 가까운 슈퍼마켓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는 지방에서 왔고, 그가 살던 곳도 도시는 도시지만, 이 도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이다. 이 도시 사람들은 어쩐지 진중하고 심각한 톤으로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을 들어보면 별거 없다. 반대로 그가 진중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그의 억양 때문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일요일에 도서관에 간다. 그것이 그의 종교이다. 가는 길에는 눈이 온다. 그는 도서관 책상에 엎드려 낮잠을 잔다. 그게 그가 하는 일이다. 가는 길이 너무 피곤했으므로, 너무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고, 너무 많은 가게들을 지나왔으며, 눈이 왔으며, 눈이 피곤했으며,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일단 앉아서 낮잠을 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낮잠을 자는 사이 시대가 변한다. 그는 자신이 뒤처지는 기분이 자꾸만 든다. 낮잠을 사는 사이 많은 게 변해있다. 새 카페가 생겼고, 비건 케익을 파는 카페이고, 비건 가죽 자켓을 입은 사람들이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는 커피를 주문한다. 커피값이 비싸다. 이 동네가 이제는 유행이다. 그가 커피를 마시는 사이 누군가 다가와 그의 조끼가 멋지다고 말한다. 그는 이 조끼가 자신의 할머니의 친구가 아는 사람에게 우연히 선물받은 것인데, 그걸 할머니가 달라고 졸랐고, 그래서 할머니 친구가 하는 수 없이 줬고, 할머니는 그걸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한테 선물했고, 내가 집에서 나오던 날, 가족들 몰래 가려고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거나 쑤셔 넣은 그 가방에 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걸 물어본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2023년 3월 15일 수요일

여덟

 




카페에 왔다. 덥다. 왜 덥지. 오늘은 날씨가 좋다. 영상 5도다. 티셔츠에 스웨터 비슷한 걸 하나 입었는데 앉아 있으니 덥다. 아무튼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 사람이 많아서 구석에 앉은 것인데, 사실 나는 사람이 많이 없었어도 구석에 앉았을 것이다. 내 옆에는 벽이 있다. 날씨가 좋아서 사람들이 햇빛을 쬐러 야외 테이블로 나가고 있다. 나는 계속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이 카페에서 몇 주 전 수요일에 뭔가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내가 수요일에 쓰는 사람인 건 아니다. 오늘이 우연히 수요일인 것은 사실이다. 우연히 그 사람이 왔던 카페에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은 아니다. 갑자기 하품을 했다. 갑자기 할 말이 없다. 어제 우연히 남의 뒷담화를 하다가 뒷담화 할 게 없어지자 할 말이 없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인데, 내가 없는 사이 나에 대해 뒷담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내가 이상하다고 했고, 내가 화장을 하지 않으며, 머리숱이 없고, 입술에 색깔이 없으며, 말투는 왜 저렇게 어눌하며, 내가 그들이 믿고 있는 한국인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얘기를 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상대방도 더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나는 정적이 깨지기를 기다렸고, 그들은 한마디 말 없이 자신이 원래 하던 일을 했다. 나도 한마디 말 없이 내가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늑대가 나타났다 (이랑, 2021)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마녀가 나타났다

부자들이 좋은 빵을 전부 사버린 걸
알게 된 사람들이 막대기와
갈퀴를 들고 성문을 두드린다
폭도가 나타났다

배고픈 사람들은 들판의 콩을 주워
다 먹어 치우고
부자들의 곡물 창고를 습격했다
늑대가 나타났다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이단이 나타났다

도시 성문은 굳게 닫혀 걸렸고
문밖에는 사람이
도시 성문은 굳게 닫혀 걸렸고
문밖에는 사람이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포도주를 담그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
내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소

마녀가 나타났다
폭도가 나타났다
이단이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2023년 3월 10일 금요일

팸플릿

도대체 실물책이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것은 존재하고 있으므로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 의미는 점점 옅어지고 있나? 그 뜻은 사라지기 직전인가? 그것은 ‘실제로’, ‘어떻게’ 있나? 우리는 나름의 답을 찾아냈다. 책에는, 그러니까 실물책에는, 어떤 사건의 부속이나 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보기에 그거 하나는 분명하다. 책을 통해서 사건을 향해, 이벤트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책이란 즉 이벤트의 일부다! 출간기념회니 낭독회니 저자 사인회니 뭐니, 그런 짓들을 괜히들 하는 게 아니다. 바로 그런, 이벤트를 위해 책은 존재해온 것이며, 존재할 것이다. 이건 냉소가 아니다. 실제가 그렇다. 책이 다만 읽히기 위해서나 장서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가죽으로 마감된 칼손잡이를 쥔 채 칼이란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점점 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히고 있다. 전자문자의 대폭발 속에서, 책은 원래부터 사건과 관계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책 그 자신이 이벤트가 되건 이벤트의 건더기가 되건 그렇다. 어떤 이벤트에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면, 책은 첫 다섯 자리의 안쪽에 놓일 만하다. 그것이 책의 의미다. 책은 이벤트에 고유한 성질을 부여할 수 있는 물건이다. 바꿔 말해 고유한 성질이 요구되는 이벤트라면 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벤트가 있는 한 책도 있다. 이런 시대에 실물책을 대체 왜 만드느냐고 묻는다면, ‘이벤트를 위해서’라고 하면 된다. 그게 우리의 결론이다.

이벤트는 무엇인가? 자꾸 주인공 행세를 하려고 들면서 영 방해가 되는 저자들을 잠시 치워놓고 보면, 여러 형태의 독서모임을 그런 이벤트의 대표격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려고 모이는 동시에 모이기 위해 읽는다, 감상회부터 세미나까지. 우리는 모임에 나가기 전 어떤 책을 읽거나 책을 읽은 다음 어떤 모임에 나갈 수도 있다. 여기서 이벤트는 집합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차점이다. 책은 어떤 이벤트가 지나간 후 그 연장으로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벤트에 대한 기다림일 수도 있다. 그 이벤트가 까마득히 오래되었거나 사실은 없었더라도 그렇고, 이 생 안에든 영영이든 아주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렇게 이벤트와 엮이는 여러 방법들을, 책은 동시에 종합할 수 있다. 책이라는 종족을 통해서다. 그런데 책이 아니라 전자문서라면, 적어도 이 측면에서 그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교실에서 실물 교과서가 사라진다면 그것이 목표로 했던 이벤트의 성질도 바뀔 수밖에 없다. 시험이든 졸업이든 시절이든. 그것은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영영 끝나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당신 집의 그 책, 그 책이 왜 거기에 있는가, 그 책이 가리키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이벤트가 있기에, 심지어 당신의 뜻이나 책의 내용과도 무관하게,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그 이벤트의 표지가 실제로(시공독점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서전이 반드시 실물책이어야 하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자신의 삶을 사건으로 만들고 싶다면... 즉 이벤트 아닌 채 지나갈 시공을 이벤트로 만들고 싶을 때에 책은 유력한 방도다. 우리가 무슨 소릴 하려고 했지?

이런 식의 이야기는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의 몸뚱이가 하나이고 생이 한 번이고 모든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고 영원한 세계가 영원히 한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있다가 없어지는 세계에 여러 인간들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태생적으로 이를 거스르려는 문자와 관련된 영역에서 이상한 구석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이상한 구석의 적층, 쌓여있는 책들이 구조상 이벤트의 부속물로 기능한다는 점, 이벤트를 위해서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으며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 이것이 우리가 이해한바 물성 타령의 번역이다. 과연 실제의 출판사들은 점점 더 큰 공간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벤트를, 행사를, 사건을 벌일... 덩달아 서점들도 그런 공간을 자처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출판사가 행사기획사를 겸하고 서점이 공간대여업을 겸해가는 것은 총문자문화 영역의 업무분장 변화에 따른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자본 아래서 책이 목표로 하는 사건이 다만 구매의 발생으로, 마케팅이나 프로모션 정도로 왜소해지고 구부려진다고? 그것은 우리가 신경 써서 어떻게 될 일도 아니고 우리가 알 바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왜 이 일이 여전히 가능하고 왜 이 일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어쩌면 우리만 몰랐던 것도 같다.

우리 ‘팸플릿’ 출판사는 아예 처음부터 사건을, 이벤트를 먼저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벤트를 먼저 기획한다. 책을 만들기 시작한 다음엔 늦는다. 어떤 이벤트가 지금 필요한지를 먼저 이야기한 다음 그 이벤트에 필요한 책을 찾는다. 우리가 꾀하는 출간기념회, 저자와의 대화, 낭독회의 목표 인원수는 만 단위다. 우리는 강조한다. 만 단위로 모을 생각을 해라, 만 단위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므로, 아쉬운 대로 우리 쪽에서 만 단위의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 간다. 나갈 때마다 우리는 책을 만든다. 변화무쌍한 상황에 맞추자면 기동성이 필요하므로 부피와 무게는 최소화한다. 책등과 표지 디자인을 수집성 있게 만드는 건 필수다. 가장 도전적인 부분이다. 원고는 어떻게 하지?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그렇다면 낱장들이 있을 필요도 없다. 1페이지로 끝장을 낸다. 만 명에게 주려면 5박스 정도로 될 것이다. 여러 사정들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가 원고를 구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책은 종족이라고 했다. 우리의 책에는 책들의 목록만 적혀있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2023년 3월 6일 월요일

일곱





외출을 어렵게 생각하는 A는 어제 외출하는 데 실패했다. 어제의 외출 준비는 너무도 까다로웠다. A는 이미 신발을 신었고, 외투를 지퍼를 잡아 올렸다. 하지만, 신발을 신는 자세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외투의 지퍼를 올릴 때 감촉은 그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신발과 외투를 제자리에 놓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종료했던 컴퓨터를 켰고 커튼을 걷었다.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었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외출은 쉬운 문제일 수 있지만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A는 시험에서 한 번도 좋은 성적을 받은 적이 없다. 그의 시험 성적은 대학 진학을 불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대학교에 갈 생각도 없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집 주변에 있는 성당이다. 그는 종교가 없지만, 천장이 높은 곳을 좋아한다. 천장이 높고 소리가 울리는 곳. 더운 여름에도 왠지 시원한 곳 말이다. 여름에 그곳에 앉아 있으면 조용하고 시원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일어나면 누군가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사라졌는데, 그 사람은 갑자기 사라져 연락이 두절된 그의 친구를 닮았다. 

2023년 3월 5일 일요일

하늘 끝을 잡았으니까

이 일련의 넘버들은 규산과 강철의 혼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거푸집 안에 들어 있는 칼들은 대장장이에게 있어 마주 다가온다. 시선을 거기로 향하면 자세히 들여다 보이고 결함품은 부러뜨려 녹인다. 칼을 부러뜨릴 때는 주의해야 한다. 칼을 돌 사이에 넣고 발로 밟아 부러뜨린다. 그러면 잘 만들어진 칼만 진열할 수 있다. 너무 많이 만들지는 않지만 불이 식도록 적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래 만들어오고 있다. 이 도시의 직업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루어지고 대장장이는 7년 동안 도제 생활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무뚝뚝했는데 장인들은 무뚝뚝해도 된다. 오히려 그런 장인들에겐 믿음이 간다. 말이 너무 많은 대장장이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쇠에게는 자주 말을 걸어야 한다고 스승은 말했다. 대장장이의 스승은 그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했는데 언젠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은 하늘 끝을 잡았노라고. 그때부터 대장장이는 하늘 끝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가령 이 칼은 하늘 끝을 잡을 수 있는 칼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부러뜨리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잘 만들어진 칼인 것은 분명하기에. 대장장이는 하늘 끝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 말을 위주로 칼을 만들었다. 어쩌면 스승도 뭘 알고 한 말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스승은 그렇게 말하고서 1년 동안 칼을 만들다가 이젠 더 이상 칼을 만들지 않고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만화 그리기였는데 스승을 만나러 가면 타츠키라는 만화가에 대한 얘기만 했다. 자기는 지금 행복하며 타츠키의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스승은 칼 만드는 일이 막힌다면 재료의 비율을 처음부터 바꿔보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내가 칼 만드는 일이 막혔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대장장이는 그러나 스승의 조언대로 비율에 관심을 갖고 변경해 봤다. 이제 그다음의 넘버들에는 흑수정이 조금 들어가게 되었고 만들어진 후의 칼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칼은 조금 더 매끄럽게 되었다. 그렇담 이것은 하늘 끝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하늘 끝을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의외로 지상에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야 하늘의 끝은 지상이니까. 하늘 끝을 잡으면 스승처럼 칼 만드는 일을 이내 그만두게 될까? 지금 칼을 안 만드는 스승은 그의 말대로 행복한가? 칼을 부러뜨릴 때마다 대장장이는 점점 더 무감하고 칼을 진열할 때마다 대장장이는 점점 더 무뚝뚝해진다. 하늘 끝을 잡는 것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서커스에서 기수들이 눈에 안 보이는 줄에 의지해 공중을 유영하고 있다. 지상과 실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하늘 끝을 잡은 것이었던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대장장이는 알 수 있었다. 저게 아닌 것은 분명하다, 대장장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맞는 것은 뭐지? 칼은 가죽을 무두질하는 도구가 될 수도, 만든 이의 심상을 구현하는 캔버스가 될 수도 있다. 스승이 하늘 끝을 잡았다고 말한 이후의 넘버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 칼들은 판매되지 않고 협회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냥저냥 만든 칼은 아니었나 보지. 그곳으로 가보니 ‘하늘 끝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대장장이가 만드는 칼들과 경향이 비슷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있었다. 물론 칼이 우주의 심처에서 색이 혼합되는 듯이 미묘한 반사광을 냈지만 그런 기술은 대장장이도 할 줄 알았다. 더 복잡한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대장장이는 칼을 보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느꼈다. 그건 단순히 뭐가 뛰어나고 장점은 이렇고의 문제가 아니라, 칼끝에 천사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들어보니 천사는 다소 민망한 불협화음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미세한 불협화음이기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그것만을 의도한, 파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알아채는. 그러니까 하늘 끝의 정체는 이 경우만 보자면 불협화음을 구성해 천사를 그곳에 붙잡아 두는 것이고 천사의 성격을 알 수 없으니 그건 거의 운에 달린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늘 끝을 잡는다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된 대장장이는 좀 황당했다. 민망함과 황당함, 제임스의 시집에 자주 나오는 감정인 이것은 교양과 예술의 관계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든다. 저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아이들은 다소 민망하게 한 사람을 지향하고, 다소 황당하게 서로들 대화를 나누므로, 하늘 끝을 잡았다기보단(천사를) 하늘 끝에 닿은 이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늘 끝을 잡았으니까. 내가 산 책의 귀퉁이에 접혀진 페이지가 보인다. 이것은 천사가 접은 것일 수도 있다.

2023년 3월 3일 금요일

눈보라산장

‘눈보라’ 출판사가 버려진 산장에 들어앉은 지도 어느덧 삼 주째. 아직까지 손님이라고는 몇 마리 장님거미밖에 없었던 이곳에, 드디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파묻어버릴 기세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에서, 드디어 불 켜진 산장, 아니 출판사로 발굴되듯 들어온 이 사람은, 머리털과 어깨 눈썹에 가득 달라붙은 눈도 털지 않은 채, 지고 온 배낭부터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뭔가를 꺼내려 한다. 빵빵한 배낭 깊숙한 곳에서. 어쩐 일이십니까? 물으니 그는 안녕하세요, 한다. 목소리가 이상하다. 잘 보니 그는 울고 있다. 눈가부터 뺨까지 그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얼어붙어 있다. 얼어붙은 눈물 위로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다. 괴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광경이다. 그는 추위로 빨개진 얼굴을 찡그렸다 풀었다 한다. 얼어붙은 눈물이 우수수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멈추질 않네요. 정말 그랬다. 한참 배낭 속을 헤집던 그가 드디어 건넨 것은 두툼한 서류봉투인데, 그토록 깊숙한 데서 나왔음에도 얼음장처럼 차갑고 슬프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까지 이렇게 찾아올 사람들이란. 그의 눈물이 멎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그를 난로 앞으로 안내한다. 막 켜진 난로의 요란한 소음도 이제 잦아들고, 우리는 오랜만의 온기에 목소리가 난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의자에 몸을 묻고 눈 감은 그에게 우리는 수건을 준다. 바짝 마른 수건은 거의 바스라질 것 같다. 그걸로 얼굴을 닦으면 피가 날지도 모른다. 당신이 우리 후손들의 자매나 형제입니까? 우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는 여기까지 왔고 우리도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난로 속의 일렁이는 불꽃, 매캐한 석유 냄새, 미친 바깥으로 비집고 나가려는 소리, 들어오려는 소리, 농담 유령들이다. 그의 원고를 읽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다. 우리의 일이다. 그의 원고는 읽을 필요도 없다. 창밖엔 눈보라다. 우리는 피눈물을 흘리며 읽는다. 헷 헤 웃음이 난다.

2023년 3월 1일 수요일

여섯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일이 끝난 뒤 동료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과 함께 무언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고, 그것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녀는 항상 일이 끝나면 짐을 곧장 챙겨서 달아나듯이 간다. 동료들은 남아서 그녀가 오늘 무슨 실수를 했으며,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가끔은 재미있고, 그래서 동료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가끔은 그냥 그렇다. 특히 그녀가 무언가를 잘했을 때. 그럼 딱히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는 사람처럼 자신의 자전거 자물쇠를 연다.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면서. 그녀는 오늘 동료로부터, 왜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냐는 질문을 들었다. 동료들이 뭔가 물으면, 그녀는 그것에 대해 한참 생각해왔고, 마치 물어주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혹은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사람처럼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한마디를 몇 년 동안 생각해 온 사람처럼. 마치 자신이 하려는 말이, 자신의 마지막 말인 것처럼. 마치 연설하듯이. 마치 수백명의 관중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동료 중 누군가와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녀는 나비가 나무가 되고 나무가 두부가 되는. 많고 많은 신발과 신발로 피클을 담그는.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하철 안에서, 서로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서 그렇게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 말이다. 그녀의 자전거 왼쪽 손잡이에는 작은 거울이 달려 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한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녀는 거울 안으로 멀어져가는 동료들을 본다.  





23년 2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6)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84,097원 (0원 + 283,602원 + 495원)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