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1일 화요일

파다한 ― 30


앞뒤가 없는 바지를 입고 앞뒤가 같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받으면 앞뒤가 없는 말을 뱉었지 저는 미련이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내비두세요 뭐 기획? 당신한테나 기획이겠지 최근에는 멋진 수염을 길렀다 그리고 알았다 수염에는 땀이 차고 비듬이 생기고 흰 털이 자라고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세수를 하면 수염은 물을 머금고수염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수염은 삐죽삐죽 입술을 찌른다 그건 그렇고 나는 약속대로 앉아서 쓰고 있다 비록 다리를 꼬고 엉덩이도 쭉 빼고 있긴 하지만, 이 역시 앉음의 한 형태이니 이 또한 두서가 없구나
 
좋아, 그러나 좋다고 말한 후의 절망적으로 돌변하는 기분을 아는가? 그만 쓰고 싶다, 할 말이 없다,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잘 하려면 기분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면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그 즉시 기분은 딴청을 피운다. 기분에게는 실체가 없으므로 언제든 의견을 바꿔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비열한 놈.
이렇게 말하면 기분은 기분좋아 한다 자기를 향하는 말이 아님을 알기에 무턱대고 깔깔대는 것이다 기분을 골탕 먹일 방법이 없다 그러니 나와 같이 죽자
 
아니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째야 했을까요?
저도 터닝슛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나는 기분파 무위주의자다 다소 고전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분노도, 슬픔도 없으니 기쁨이라 할 만한 게 없지 나는 이것을 누워서 쓰고 있다 기분이 좋아하고 있다 이 연작의 목표는 A4 한 페이지 분량(윤명조330, 10포인트, 줄간격 180%)으로 카운트다운을 해나가는 것이다 졸면서 쓸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자 기분이 지겨워하니까
 
꽃이나 나무에 대해 써볼까 그러나 그것들에도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재미가 없다 아름다움과 경건함만 있을 뿐 그들은 좀처럼 웃기려고 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래된 공무원 같다
 
다시. . 그래. 당신의 기분을 의식 없이 좋게 하고 싶다 얍

2018년 8월 19일 일요일

미완성


우주의 성들을 완주하려던 계획을 취소한다. 아무래도 주제를 잘못 잡은 것 같아. 그러나 주제가 어떤 것이었든 이쯤 되어서는 그만뒀을 것 같기도 하다. 중도하차 전문. 끈기 없음. 사주를 보러 갔을 때, 사주쟁이는 내가 어떤 일을 하든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왠지 괘씸한 마음이 들어(누구에게?) 당시 하던 일을 3개월하고도 2주일 더 버티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또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주쟁이는 딱 잘라 ‘3개월이라 말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3개월 정도, 3개월 근처, 3개월 내외, 아무튼 딱 3개월은 아니고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음, 을 의미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졌다. 룰을 잘못 이해했고, 그렇지만 그쪽이 똑바로 알려준 것도 아니니 내가 완전히 진 것은 아니다. 이 정도로 말하고 물러나겠다.
 
라고 말하고 보니 우주의 성들을 연재한 지 아홉 달이 지났다는 사실. 몰아서 올렸다가 드문드문 올렸으나 열 세 편이니 적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게 일인가? 대가는 없었다. 일이라고 하기 힘들다. 그러면 다시 물러나야 하나? 그럴 수 없다. 글쓰기는 물러날 수 없는 장르다. 전사해야 하는 장르. 혹여나 생환에 생환을 거듭하여 천수를 누린다면 김지하나 김승옥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장르. 비장하게 말해 봤다. 그런데 이게 글쓰기인가?
 
우주의 성들. 처음에는 우주 곳곳에 있는 행성들에 자연적으로 지어지거나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성()들에 대해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많은 상상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었고, 정말 일처럼 느껴졌으므로 처음부터 관뒀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거의 아무도 안 볼 글을 쓴다는 게 정말로 자유로운 글쓰기인가? 더 제약이 많은 것은 아닌가?
 
내가 속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가타부타 말해준 적 없으니까. 나 혼자 느꼈고, 나 혼자 그리 여겼고, 나 혼자 판단했다. 나 혼자 썼다. 나에게는 연대감이 없다. 나는 나에게도 연대감을 느끼지 못한다. 불행한 자라고 불러주세요. , ‘우주의 성들은 거의 누워서 썼다. 다음부터는 앉아서 써보도록 노력하겠다. 어깨가 많이 상했다. 뭔가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어깨를 받겠다.
 
그럼 여기까지. 보다 지엽적인 주제를 들고 다시 찾아오겠다. 그동안 죽지 말고 계시기를.

2018년 8월 6일 월요일

네이티브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라는 말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소식은 한 가지뿐이다. 방금 내가 이 방으로 들어오기 직전 골목에서 본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렘린, 우리말로는 무엇으로 옮겨야 할까? 파물귀(破物鬼), 망깨비 정도의 대체어를 쓸 수 있겠다. 그렘린이라는 이름은 서양에서 최초 발견된 장소에 고블린이라는 명사를 합성해 만든 것이다.

즉 좋은 소식이란 박물학자인 내가 마침 머무르던 곳 인근에서 저 유명한 괴동물을 직접 발견했다는 것. 물론 나쁜 소식은 지금 이 소식을 전하는 도구를 비롯해 많은 기계들이 더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파물귀가 기계를 파괴하는 이유와 그들의 생태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쉽게 말해 그들이 기계를 먹고 산다는 세간의 믿음은 오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파물귀를 좋아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오로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그들은 기계의 고장을 유발한다.

러다이트 운동의 발화점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 질문을 조금 바꿔야겠다. 러다이트 운동을 시작한 것이 인간일까?

고장난 기계가 그들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인간이 불편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런 생각은 너무도 인간중심적이어서 낯이 뜨거워질 정도다. 일반적으로 파물귀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이다. 고장낼 기계를 만들어주는 존재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기계고장을 직접 막으려 할 경우에는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므로 최대한 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비행기 엔진을 물어뜯을 수 있는 턱힘을 지닌 존재와 대치하는 것은 조금도 용감한 행동이 아니다.

추정컨대 파물귀들은 기계의 멈춤 자체에서 크나큰 쾌감을 느끼는 듯하다. 크고 구식일수록 좋아하며, 무릇 ‘스마트’라는 수식어를 지닌 현대의 기계들을 미워한다. 인간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듯 느껴질 수 있다. 너무 좋아서 고장내기도 하고 너무 싫어서 망가뜨리기도 한다. 예방 삼아 개인용 기기 주변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한두 개 놓아두면 좋다. 안타깝지만 윤전기나 사다리차의 고장은 그따위로는 막을 수 없다.

현재 내가 체류중인 곳은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상권이 조성된 소도시로 파물귀를 흔히 볼 수 있을 만한 환경이 아닌데, 현지인의 안내에 따르면 인근에 공장 지대가 있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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