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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일 금요일

문지기와 남자의 대사

문지기는 그를 향해 깊숙이 아래로 몸을 숙인다.
“대관절 아직도 무엇이 더 알고 싶은 겁니까?"
문지기는 묻는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
그 남자는 말한다.
“그런데 어째서 수년 동안 나 외에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라고 누가 말한 걸까?* 그 앞에 바로 ‘문지기는 묻는다.’라는 지칭이 있다. 이 ‘문지기는 묻는다.’라는 지칭의 위아래로 세 문장의 대사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누가 말한 것인지로 보는 것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어 보인다. ‘대관절 아직도 무엇이 더 알고 싶은 겁니까?’는 문지기가 말한 것으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바로 그다음 ‘문지기는 묻는다.’라는 지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래로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와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가 있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라는 대사를 문지기가 아닌, 쇠약해진 남자가 말한 것이라면 어떨까? 이렇게 보면 그 답답하고 어수룩한 남자는 끝에 와서 특별한 앎을 얻게 된 것이다. 남자가 문안으로 들어가려고 문지기의 상세를 계속해서 관찰해왔던 것이라면, 그 관찰을 통해 문지기에 대해서 뭔가를 알게 되었다. 바로 남자가 쇠약해지는 것이 문지기가 바라는 것이며, 이렇게 쇠약해진 후에도 더 쇠약해지길 바라고 있는, 바로 문지기의 그러한 점을 남자는 말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라는 말 또한 남자가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 보인다. 남자는 끝내 죽음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법을 따라 죽는 것’이다. 그것은 문지기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진실이다. 이 <법 앞에서>의 세계는 시간이 흐르지 않거나 비선형적인 곳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이 전부가 문지기가 남자와 마주 앉아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시간은 남자에게만 흐르는 것 같고, 남자는 점점 쇠약해진다. 맨 마지막의 ‘이제 나는 문을 닫고 갑니다.’라는 문지기의 말을 보면 남자에게는 죽음이라는 안식이, 그리고 문지기에게도 일의 종료라는 안식이 찾아오게 된 것이겠으나 이후가 그려져 있지는 않다. 어쩌면 문지기가 문을 관리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최후의 진실(당신 외의 누구도 입장 허가를 얻을 수가 없었던 바로 그곳이 여기)로 미루어보아, 문지기에게도 이곳은 법 앞에서의 관문들이다. 법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그 어수룩한 남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자는 ‘법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접근 가능해야 된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것이 어쩌면 문지기보다 남자가 뛰어난 점이다. 문지기의 경우 이미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여기에 나오는 남자보다 문지기가 더 인간적이다. 어쩌면 이 세계관은 남자가 쇠약해진 뒤에 문지기가 되어서 다시 다른(혹은 같은) 남자에게 입을 굳게 다물고 법 앞에서의 문지기를 재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까 ‘문지기는 묻는다.’의 뒤로 두 문장의 대사가 남자가 내뱉은 말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이렇게도 볼 수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 수년 동안 나 외에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오?’라는 말은 사실 남자가 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 혹은 그 특별한 인식을 얻게 됨과 동시에 마치 연극의 정해진 대사를 내뱉는 것처럼, 아니 내뱉어주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도 알고 있고, 혹은 그 너머의 어떤 진실까지 알고 있다. 이런 관점이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와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라는 말을 문지기가 내뱉은 것이다. 이 경우 쇠약해진 남자는 문지기에게 아직도 뭔가를 만족하지 못하고 있고, 문지기는 그런 사실을 담담히 말한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라는 말은 문지기가 쇠약해진 남자를 조금쯤 동정하면서 내뱉은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두 대사를 쇠약해진 남자가 한 것이라면 좋겠다. 정리해 보자면 ‘문지기는 묻는다.’와 ‘그 남자는 말한다.’ 사이로 두 문장이 있고, ‘문지기는 묻는다.’의 위에 한 문장, 그리고 ‘그 남자는 말한다.’ 아래에 한 문장이 있다. 중간에 있는 ‘문지기는 묻는다.’라는 지칭에 따라 위의 세 문장이 전부 문지기가 말한 것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내 해석에 따라 아래의 세 문장(맨 밑은 그런데 어째서 운운)을 남자가 말한 것일 수도 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할 수 있어 보인다. 그것은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와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를 남자와 문지기가 각각 말한 것이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를 문지기가 말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라는 말을 한 남자는 문지기에게 있어 끝없이 뭔가를 갈망하는(자기처럼) 법이라는 국면에 있어서의 상위자이다. 즉 반대로 문지기에게 문지기 역할(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혹은 법에 대해)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 일종의 역-안내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쇠약해진 남자는 문지기보다 먼저 죽지만 문지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 반대의 경우(당신은 만족할 줄 운운이 남자, 모든 사람들 운운이 문지기)라면 문지기는 일종의 살아 움직이는 법 그 자체가 된다. 그 법의 진상은 사실 ‘악의를 갖고 있는’, 혹은 ‘인간을 적대하는 법’이다. 이것을 따라가자면 ‘그런데 어째서 수년 동안 나 외에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오?’라는 질문의 뉘앙스는 ‘어째서 나에겐 이 바보 같음을 알고 나서 법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는 것이오?’라고 읽힐 수도 있다. 이렇게 고려하다 보면 문지기는 이전의 남자(문지기로부터 뭔가를 배운)이고 남자는 그 이전의 문지기(법은 차등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언젠가 만났던 남자를 따라 하고자 애쓰는 사람)일 수 있다. 혹은 방금 말한 것처럼 이전의 그 문지기가 남자(정해진 운명을 오시하며 따라가는 입장에서, 점점 몸이 쇠약해짐을 받아들이는, 그러나 정공법으로 나아가는)고 어쩌면 죽기 전의 그 남자는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닫혀 있지 않은, 열려 있는 ‘법’의 시대를 열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남자는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나, 그것은 이 글의 진행에 따라 시간이 빨리 지나가게 된 것이지 일반적으로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지는 않는다. 느린 시간을 사람들은 살고 있다(고 이 글은 말하는 것 같다). 아직 이 남자처럼 쇠약해지지 않은 몸으로.

*<법 앞에서>, 323p~3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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