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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0일 일요일

광장의 김밥 같은 것

둥근 밥알들 성채 되어 단무지 느슨하게 수호하면
이 광장의 강자는 나라고 착각하게 된다

흔들리는 삶 베어 물며
든든한 믿음을 한입 가득 우물거리고 싶다

세상에 김밥은 흔하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간절해질 수도 있다니

그럴 때 시금치와 계란을 준비하고
결이 고운 생김으로 감싸
미래의 참기름을 간간하게 바른다

바라는 크기를 마음껏 낭비하며 먹음직스럽게 말아 놓는다

슬쩍 삐져나온 흐트러진 맛살들은
있는 그대로 좋은 생각이다

옆구리가 좀 터져 있는 것도 누가 발라놓은 햄 조각도 그냥 다 괜찮다

그러니까 김밥집 단체주문식으로 말하면:

햄X
당근X
오이X

은박 포장지 위에 빨강 매직으로 표시된
피로한 희망과
까다로운 체질의 사람들 다

나와 다르게 싸우며 살고 있겠지만

모두에게 통깨가
솔솔 뿌려져 있다

틀어놓은 뉴스에선 금방이라도
세상이 행복을 다 체포할 것처럼
허공 향해 주먹다짐 중이어서

우리의 김밥은 풀 죽은 패퇴의 꿈을 꾸기 쉽다 그렇지만
김밥은 고소한 확신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줄 안다

나는 김밥의 단단한 둥긂을 자랑할 것이다

김밥에게 자유발언권을!
김밥에게 행복추구권을!

믿음을 여러 줄 포장해 나눠 먹는 맛
그 맛을 세상이 알 리 있나

그러니까 김밥 같이 먹읍시다
각자 많이 먹읍시다

오늘 밤엔 우리가 강자 합시다

2025년 2월 2일 일요일

붕어빵 같은 것

*
붕어빵에는 잘 삶은 팥이 들어있다
반드시 혓바닥에 기록해야 할 사건들도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플라스틱을 주워 먹은 비둘기들이 불임을 한탄하는 수다를 듣거나 만능칼의 칼집에 속한 만능칼이 이것이야말로 사랑임을 알려주었을 때, 걸인들이 어느 곳에서나 오줌을 누느라 여기는 꼭 화장실이 없는 나라인 것만 같다고 시위를 할 때, 그런 겨울에는 도로의 한구석에서 연방공화국처럼 정연한 필체로 혓바닥에 기입할 사실들을 정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
달군 틀에
잘 반죽한 혀를 가둔 채로

산을 본다
산이 무너진다

바다를 본다
바다가 물러난다

붕어빵을 본다
붕어빵이 부지런히 뒤집히고 있다

여기까지 견딘 눈으로 본다
석양이 붉은 팥을 흘리고 있다

*
최근에는 어느 사막에서 발견된 화석에도 차가운 붕어의 선조가 기입되어 있다 약국을 가득 채운 색색의 종이상자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우리는 산 정상에서 식은 붕어빵을 먹어도 좋겠다

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다정 같은 것

죽어 있는 짐승이었다
다시는 그 무엇과도 싸우지 않아도 되는
영원히 자고 있는 듯한
짐승 일부

머리는 남아 있어
다시 깨어나 입 열면
다 꿈이었습니다
잘 놀다 갑니다
무릎 탁 치고
일어날 것 같았는데
아주 일어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전면적으로 눈을 질끈
감게 하는 짐승
약간이었다

나는 커다란 장정 아니지만
마치 그런 사람인 듯
거대한 물러터짐이
가슴께에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한쪽 어깨에 메고
설산을 내려왔다

강추위 속에서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고
너무 죽어서
살아 있었다
털과 이빨이 내게도
있었고 우리의 공통점
조금이었다

숨 쉴 때
옆에 있으면
아주 커다랗게
따뜻하겠지
하지만 숨
안 쉰다는 차이

나는 너무 무거워서
아니 이걸 어떻게
흘려보낼 수 있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 넣어둘까 하다가
제일 아래 칸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 안에서 짐승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라고
푹 죽어 있으라고

매일 나는
일 마치고 돌아와
씻고
옷 갈아입고
서랍을 열어본다

오래도록 안쪽
모서리에 끼어 있는
먼지 같은 짐승 죽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죽어도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적극성 같은 것

인터넷에서 사진 하나를 주웠다
모스크바 개념주의 사진이라고 했다
미술 노동을 하는데
가끔 미술에 역정 내는
e님의 추천이었다
e님은 모스크바 개념주의 사진을 볼 때마다
울고 싶어진다고 했다
(이유는 모른다)
(묻지도 않았다)
(모스크바 개념주의란 무엇인가?
묻고 싶었지만 알고 싶진 않았다)
크기가 너무 커서
그림판에서 축소한 뒤
화면 가운데에 깔았다
나무들에 흰 현수막이 매여 있고
그 위에 빨간색 키릴문자가 적혀 있었다
나무들이 온통 검은색이어서
빨간 글씨가 더 강렬해 보였다
배경은 검은색으로 설정했다
이제는 검은 배경 속의
검은 나무들 사이의
흰 현수막 위에 쓴 빨간 글씨가
훨씬 더 강렬해 보였다
그 위에 한글문서와 피디에프를 화면분할로 깔아놓고
타닥타닥 작업했다
(e님한테는 이렇게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지는 9개월 정도 되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나
하던 작업창을 닫았을 때만
사진을 볼 수 있고
바탕화면은 그런
아무렇지 않은 느낌이다
나는 바탕화면 속 사진을 보기 위해
작업창을 전부 닫기도 한다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024년 10월 14일 월요일

종이배 같은 것

눈앞에서 마음이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한다
불시에 찾아온 종이배
각진 접은 모서리로 발목 언저리를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는 아무리 느리게 지나가도 날카롭다
아무리 조용히 지나가도 혼자 외롭고 피가 난다
지나가는 것들 사이엔 자연사가 놓여 있다
자연사의 얼굴은 희미한 인상
내가 갖고 싶은 이미지
벽에 붙여 놓은 영원 포스터
유력한 회복은 어디에 뒷짐 지고 서 있나
마음의 종이배는 맑고 높고 날카롭다



*김일두&moc의 노래 <몰아치는 비>를 여러 번 듣고 씀.

2024년 9월 13일 금요일

관광객 같은 것

여기는 관광지 안에서도
유난히 북적이는 골목

아무 식당에 들어가
가장 낯선 이름의 음식을 주문하면
황금 같은 감자들과
자유로이 풀 뜯는 소들이
식탁 위로 펼쳐진다

올림픽 선수처럼
활달한 기분은
앞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그러나 목적지 없다
진짜 마음도 없다

마음에도 없는 건
어디서 나오나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2024년 8월 27일 화요일

새를 위한 집 같은 것

가게 주인이
어깨에 새 한 마리 앉혀놓고
말한다

말하는 새 이백만
말 못하는 새 팔만
날 수 있는 새 오만
못 나는 새 십만
앞에 있는 새 삼백만
저 끝에 있는 새 삼만

각양각색의 새들 사이에서
주인의 새는 말할 줄 안다

나는 이백만!
나는 이백만!

사 오지 못한 새는
며칠 전부터
앵무
앵무
앵무
내 머릿속에서 떠들고

새와 함께하는 삶은
해보지 않아서 몰라
종이새 접는다

말을 시키면
말을 하고
날게 하면
날고자 하고
이걸 다
못해도 여전히 새인
종이새

어깨에 새를 올려놓으니
그의 삶
날아갈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새의 집 같아
마음에 난로 켜고
이불을 깐다
불은 꺼줄까?
좋다

나는 이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집이 되어본다

2024년 8월 20일 화요일

예술 생각 같은 것

팔레트 나이프로
불타는 커튼을 푹 떠서
전면에 바르기
시원하게 바르기
그리고 커튼
사라지기
현실은 이렇게
흔적 없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가설극장에 틀어놓은 순수예술 비디오는
벌써 삼분의 일 재생 중이다
아무 논쟁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는 침묵이
객석을 점령,
임시 거처에 방치된
너무 많은 꿈들이
젖어서 천장 높이에서
흐느끼며 떨어진다
이 지겨운 누수 사건!
프레임 속 멍한 인물이
개선될 수 있을까
시대에 뒤떨어진 잿더미에서
어떤 비밀이 드러날까
가장 가까운 것은
현장에 완연한
무겁고 갑작스런 앞사람의 뒤통수
화면을 가릴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스크린에
앞사람을 틀어놓았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중지되는 예술이 가능하도록 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진 말자.
조금 전까지 사용된 나이프를
스크린에서 꺼내자.
눈앞의 정수리를 세게 두들기자.
이윽고 그의 두개골이 열리고
축축하고 흥건한 생각들이
쏟아져
쏟아진 걸 전부
보았다고 말하기.
이런 식으로 좀 더
볼만해질 장면을 상상하지만
이렇게 하는 건 예술이 아니다
시에서 한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나도 쉽고
예술적인 이야기이고
예술적인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2024년 8월 5일 월요일

시민을 위한 워크숍 같은 것

작가님,
저는 작가님만큼 많은 단어를 알지 못해요
평소에 국어사전을 가까이하지도 않구요
거의 TV만 봐요, 유튜브 아니구요,
여기에 왜 왔는지도 까먹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 참석해보니
작가님이 권유한 대로 상상,
그런 걸 해보자면 가끔은
자연이, 야간 광역버스처럼 저한테 돌진하는 것 같아요
그 앞에서 겁이 났던 적은 없어요
밤에 버스 많이 타본 분들은 알 텐데
아니라면 제가 하는 말. 이해가. 가시나요
너무 나만 아는 얘길.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저는 상점에서 그릇, 컵, 이런 걸 팔아요
제일 잘 나가는 건
한 손에 쥐기 좋은 파이렉스 유리컵인데
저는 그 상품을 다른 이유로 좋아해요
설명이 필요 없거든요
있는 그대로 전시만 해두어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가거든요
제 삶의 어떤 순간은
그런 무렵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점심시간, 가끔 배회하는 손님들 있어요
딱히 뭘 사려는 건 아닌데
그냥 매장 안을 돌아다니죠
그 손님들을 위해 타임세일을 외쳐요
가끔 제 확성기가 유리 확성기 같은데,
외쳐봐도 아무도 모이진 않거든요
손님들은 그냥 마음대로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참, 저 너무 길게 말하죠?
혼자 너무 말이 많은 건 아닌가요?
제가 이렇게 두서없이 말해도
다들 들어주시다니
참, 좋네요…
꼭 작가님이 된 기분이에요
그냥 요 앞을 산책하다가
사람이 많아서, 재밌어 보여서,
이 멋진 공간에 불쑥
들어왔던 것 같네요
한번 들러보길 잘한 것 같아요
상상, 저도 좋아하거든요
오늘을 꼭 기억하게 될 것 같거든요

2024년 8월 2일 금요일

살수차 같은 것

너무 더운 사람들이 막
뜯어진 실밥처럼 걸어가는데
마침 시청에서 보낸
살수차가 지나간다
도로가 식으며
엎질러진 냄새가
총체적으로 아마
여길 지나간 것들의
전부 냄새일 텐데
깨어나 일어나
죽은 사람들이 죄다
묘지에서 부스스 일어난 듯한
풍경이 폭염과 어울린다
살수차는 아무 생각이
아니면 책임만이
너무나 부피 큰
파란색 그 임무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
이어지는 냄새
평소 내가 알던 도로는
잠깐 듣고 지나가는 로고송처럼
아무 냄새도 분명
잠잠했었는데
내가 처음 본
오늘 시청에서 나온
살수차는 아주 잠시만
역할을 다해도
지금까지,
지금까지 그러하다.
나는 지금 팔 걷고
살수차의 뜻밖의
영향력 아래에서
풍부해진 저질러진
도로에
털썩,
여름의 석유를
마시며 돌연
큰불 되고 있었다
다시 살수차
내게로
기다리고 있었다

2024년 7월 22일 월요일

마네킹 같은 것

시내의 쇠락한 상점가를 지나다보면 허물어지기 직전의 마네킹들을 보게 된다. 지금은 없는 상점 주인들은 입혔던 옷을 가차 없이 벗겨놓았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가로등에 의지해 몸을 빛내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도 마네킹인 걸 알아볼 수 있다. 어떤 자세로든 조금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옷을 입고 있는 몇 안 되는 마네킹들은 최상의 멋진 자세를 하고 있지만 옷이 벗겨진 마네킹들은 뭐든 벗겨내기에 최적의 자세이다. 그러고 강박적으로 서 있다. 지능이 없어 중립인 채로, 할 일 없는 채로. 그들이 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할 것이다. 하지 않는 채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 그들도 노동자다. 어떤 얼굴들은 경직된 표정이고 대충 화장한 듯한 얼굴도 있다. 행복한 얼굴은 없고 아무도 그런 경험을 원하지 않는다. 표정 연습, 그런 걸 할 뿐이다. 그런 걸 잘할 수 있다면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마네킹 인구총조사를 한다면 남녀 숫자가 비등비등하겠지, 그런데 하반신이 밋밋한 애들도 많이 보인다. 그런 애들까지 다 뭐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이런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니, 제발 말들 좀 해라! 명령이다...

2024년 7월 1일 월요일

생활 같은 것

너는 벽난로 가까이에 앉아
옷깃을 데웠다고 한다
종일 털로 된 닭 인형을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인형들은 한결같이 슬픈 모양을 하고 있었고
창밖에선 누가 심었는지 모를
사과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몸이 크지 않은 이들이 모여서 기도하듯이
입으로 웅얼거리는 소망이
새잎처럼 돋아나듯이
너는 매일의 생활을 반복하며
이 모든 현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가을이면 사과들이
달아오른 얼굴 되었다
나무 수레 가득 실려 나갔고
그중 몇 알은 수레가 덜컹거릴 때마다
개울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사과들은
사과들끼리
이별하고
그 뒤의 일은 서로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바깥에서 살아가다
오랜만에 방문한 나는
이제 정착하겠다고 다짐하기 전에,
사과처럼 부푼 꿈들이 썩어가는 장면을
숱하게 보고 왔다고
풀 죽은 얼굴로 말하기 전에,
늦은 밤 너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지금은 인형들이 자고 있으니
말소리를 낮춰달라는 너의 부탁을
우선 듣고 있는 것이다
들으며 자작나무 향이 나는
너의 집 서가를 찬찬히 둘러본다
아름다운 삽화들로 가득한 동화집이 꽂혀 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과의 인기척이 들린다
너는 인형을 팔아 번 돈으로
한 철 휴식기를 보내며
이 책을 구상하고
쓰고
그렸다고 했다
그때마다 지난 계절의 사과들이
눈에 밟혔다고……
나는 아주 집중해야만 들을 수 있는
너무 조용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2024년 5월 8일 수요일

산업단지 사람 같은 것

공장으로 향하는 카고트럭과
시청에서 나온 분뇨수거차 사이로
걸어가는 남자는 필연일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일 것이다
저 퉁퉁한 존재
가무잡잡한 존재가
이 구역의 신일 리 없다
실속 차리고 싶은 인생일 뿐이고
분명히 죽을 것이다
그는 일터까지 매일 7킬로미터씩 걷는다
걷는 동안 신을 발명한다
자신을 여기서 구해줄 신을
그에게 당장 값어치 없는 것은
어쩌다 잔돈으로 받은 동전들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튕겨
차도를 향해 날린다
동전을 차례로 밟고 달려가는
밟은 줄도 모른 채 달려가는
그래도 10원짜리 동전은 의기양양
남자가 길거리를 따돌렸기에
차들이 더듬거리며
이 좁은 길을 달려간다
예고했듯이 남자는 결국 죽겠지만
이 도로 위에서 죽진 않을 것이다
그가 따뜻한 집 안에서 죽길 바란다
희망도 기원도 허망한 채로
주행 중 조심스럽게.
오늘은 졸지 말자고.
자기 안위를 다짐하는
방금 지나간
졸음껌 씹는 운전수처럼

2024년 4월 20일 토요일

힘 같은 것

여자는 스스로 피부를 벗기고
피부를 벗겨버린 여자가 된다
이것이 그의 결정
여기까지가 그의 결정
피부를 동그랗게 벗긴 것도 아닌데
그냥 동그란 환부 위를
뒹구는 세모난 아픔
뭐라 말할 수 없는 모양 하루
찬장의 약통을 털어서
도움이 될 만한 연고를 바른다
대부분 이삼 년씩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
이 물질을 발라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네모나게 닫힌 차마
바라는 바대로 이루어질 순 없겠지요
그는 인생이 동그랗게
아주 동그랗게 말려 있다고 느낀다
도르르 말린 인생의 양 끝을
손으로 잡아당긴다
한껏 늘어난 인생이
끊어질 때까지
끊어져도 과연
계속될 때까지
여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엔 영원한 생활이
여자의 친구입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게 만든다
모든 좋은 이야기는
여기에 반드시
죽음에서 일어난다

화가였던 金 같은 것

문을 그리기 위해 벽을 그렸다
틈이 생긴 창문을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창틀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리기 위해 땅과 하늘을 그렸다
아무도 없는 거리와 골목 풍경을 그렸는데
거길 지나갔을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다 보였다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또는 그는
24시간 영업하던 가게의
금일 휴업 안내문을 크게 그렸다
그런 건 볼수록 가깝게 느껴진다
가까이 가서 쓰다듬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회화적인 이차원 평면…
무심코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은 마음이
조만간 이루어질 듯이 다가온다
그는 성실한 은행원이었지만
자기가 진짜로 뭘 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은둔 화가였다고 한다
그런 건 아무런 문구도 적히지 않은 채
대형 빌딩의 벽면에 걸려 있는
완전 순백의 현수막 같다
순정 순수 순문학 같은 거
세상에 없어도 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표현
하고 있는 거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적 같은 것

꿈에서 손에 피를 묻힌다
알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누군가를 찾아가는데
내가 죽인 사람도 내가 찾아간 사람도 다
모르는 사람이다
현장의 사람은 나뿐, 그럼 내가 범인인가?
너는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끔찍한 꿈도 나를 흔들진 못하네,
이것이 나의 인상이다
아침에 받은 월급 명세서처럼
저녁엔 찢어버릴 수 있는…
대신 절대로 찢어지지 않는 작업복을 배급받고 싶다
넉넉한 주머니가 있으면 더 좋겠지?
일터의 넝쿨 식물이 가지 하나를 집요하게 세운다
해가 드는 쪽으로 화분을 회전시킨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그보다 자주,
새벽에 잠에서 깨면 낮의 일들이 헛기침 중이다
뒷짐을 지고 베개 밑에 도열해 있다
돌아누우면 등 뒤에서 웅성거리는 것들
어떤 원예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실내에도 풍수가 있어요 넝쿨 식물 같은,
어딘가 꼬인 것을 집 안에 들이면 좋지 않아요
내 생각은 다르다
동시대의 너도 잘 알겠지만, 그것은
이길 생각이 없는데 질 생각도 없는 겨루기다
식물을 지키는 건
작업복에 대한 소망을 좀 더
진실하게 만드는 생활…
아무도 나를 베어가지 못한다
베어간다면 너는 사람이겠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꿈에서나 보았다
꿈은 세계 속에서 펼쳐졌다

2024년 3월 24일 일요일

아침 같은 것

꿈에서
꿈으로만 남아 있는
다수의 미완성 물체를 완성했다
예를 들면 귤 하나를
귤 더미로 쌓아올렸다
희미한 귤빛 하나가
눈부신 귤빛 더미가 되어
무엇이든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
꿈에서 정신을 차리면
눈꺼풀 아래가 깜깜한데
그 안에서 빛을 보았다는 게
꿈의 거짓말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던
귤 하나
눈앞에서 딱
정지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귤 더미를 쌓을 차례라고
눈에 조금 묻어 있던
꿈이 말해주었다
이제 일어나서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2024년 3월 9일 토요일

가속장치 같은 것

안개 속을 걷듯이, 안개 속이 미어지듯이,
그러다 미어터진 안개 조각이 내
발밑에 툭 떨어져 있듯이, 그건 누가
흘리고 간 검은 증기……
그러나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 이따가 와
터진 자루를 꿰매야 하니까
얼어붙은 연못에도 양떼가 모이니까
죽은 자의 부활도 믿어버리는 마음으로
내 어금니를 내가 깨뜨린다
새벽의 검은 수박을 사서
검은 모범 택시를 잡아 탄다
나는 달린다 또
달린다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도 작고 미묘한 일들은 계속
일어나는데 너는 모르겠다,
모르겠단 말만 백 번
하는 사이에 이것도 모르겠다면
앞으로는 알아볼 수도 있는 일을 할게, 계속해서
알아봐주길 바라며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 이따가 와
아무리 해도 자루가 터지니까
여기선 잦은 안개 조심
택시에서 내릴 때
수박을 떨어뜨리고 마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산산조각나고
바닥에 검은 물이 흥건하니까
한편 안개는 좋겠다
네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안개가 다 쏟아지면
나는 빈 자루를 갖고 논다
그때쯤 너를 부를게
네가 올 테니까,
그러니까 이따가 와
그러면 네가 올 것이다

2024년 3월 5일 화요일

우리가 사는 방식 같은 것

너는 사자를 기다리는데
사자를 기다려서
사슴이 와도
사슴을 보내고 사자를 기다린다
나는 사자를 기다리는데
사자를 기다려서
문 앞에 사슴을 놓고
사자를 기다린다
높은 어둠 속에서는
잘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희박해진다
옷에는 얼룩덜룩
낮에 본 빛과 사랑을 묻히고 있다
검은 종이에
검은 글씨로
그것들에 대해 쓴다
아무에게도 안 보일 테니까
아무렇게나 쓴다
무언가 열심히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한 듯한 주말처럼 시간이 간다
너는 그동안 밝게 빛나는 전구처럼
공중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다
그 뒤로 너를 보는 일 앞에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네가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너는 흔들린다
많이 기다려서 예쁘네
서러워서 빛나네
내가 고함을 지르자
너는 깨져버린다
사자가 왔을 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자는 날카롭게 흩어진
죽은 너를 밟아버렸고
나는 도망가버린 상태였다
우리라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2024년 3월 3일 일요일

교외 식당 같은 것

구슬픈 음악이 나오는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을 먹는다 벽에는
환호하는 손흥민과 박태환의 대형 사진이 붙어 있다
진열장엔 온갖 트로피와 인삼주…
새벽 세 시
우리 중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카운터의 박하사탕 그릇 옆에는
세라믹 소재의 리트리버 가족이 놓여 있다
은은한 빛을 내는 보라색 자수정 램프가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테이블 번호는 25번 그러나
테이블이 스물다섯 개나 있는 식당은 아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가끔 한숨 쉰다
이제 나는 이들 중 한 명이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도
감히 못할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 자신이 없을 뿐
우리는 황태해장국을 먹는다
서글프고 낯선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는
알 수도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러다 절정에서 갑자기
모두의 숨소리가 멎는다
지금 뭐가 여길 지나간 것처럼
서로 눈을 마주친다
주인이 잠깐 홀에서 사라진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좋다
손흥민과 박태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사이에 뭔가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