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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0일 토요일

힘 같은 것

여자는 스스로 피부를 벗기고
피부를 벗겨버린 여자가 된다
이것이 그의 결정
여기까지가 그의 결정
피부를 동그랗게 벗긴 것도 아닌데
그냥 동그란 환부 위를
뒹구는 세모난 아픔
뭐라 말할 수 없는 모양 하루
찬장의 약통을 털어서
도움이 될 만한 연고를 바른다
대부분 이삼 년씩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
이 물질을 발라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네모나게 닫힌 차마
바라는 바대로 이루어질 순 없겠지요
그는 인생이 동그랗게
아주 동그랗게 말려 있다고 느낀다
도르르 말린 인생의 양 끝을
손으로 잡아당긴다
한껏 늘어난 인생이
끊어질 때까지
끊어져도 과연
계속될 때까지
여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엔 영원한 생활이
여자의 친구입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게 만든다
모든 좋은 이야기는
여기에 반드시
죽음에서 일어난다

화가였던 金 같은 것

문을 그리기 위해 벽을 그렸다
틈이 생긴 창문을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창틀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리기 위해 땅과 하늘을 그렸다
아무도 없는 거리와 골목 풍경을 그렸는데
거길 지나갔을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다 보였다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또는 그는
24시간 영업하던 가게의
금일 휴업 안내문을 크게 그렸다
그런 건 볼수록 가깝게 느껴진다
가까이 가서 쓰다듬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회화적인 이차원 평면…
무심코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은 마음이
조만간 이루어질 듯이 다가온다
그는 성실한 은행원이었지만
자기가 진짜로 뭘 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은둔 화가였다고 한다
그런 건 아무런 문구도 적히지 않은 채
대형 빌딩의 벽면에 걸려 있는
완전 순백의 현수막 같다
순정 순수 순문학 같은 거
세상에 없어도 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표현
하고 있는 거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적 같은 것

꿈에서 손에 피를 묻힌다
알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누군가를 찾아가는데
내가 죽인 사람도 내가 찾아간 사람도 다
모르는 사람이다
현장의 사람은 나뿐, 그럼 내가 범인인가?
너는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끔찍한 꿈도 나를 흔들진 못하네,
이것이 나의 인상이다
아침에 받은 월급 명세서처럼
저녁엔 찢어버릴 수 있는…
대신 절대로 찢어지지 않는 작업복을 배급받고 싶다
넉넉한 주머니가 있으면 더 좋겠지?
일터의 넝쿨 식물이 가지 하나를 집요하게 세운다
해가 드는 쪽으로 화분을 회전시킨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그보다 자주,
새벽에 잠에서 깨면 낮의 일들이 헛기침 중이다
뒷짐을 지고 베개 밑에 도열해 있다
돌아누우면 등 뒤에서 웅성거리는 것들
어떤 원예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실내에도 풍수가 있어요 넝쿨 식물 같은,
어딘가 꼬인 것을 집 안에 들이면 좋지 않아요
내 생각은 다르다
동시대의 너도 잘 알겠지만, 그것은
이길 생각이 없는데 질 생각도 없는 겨루기다
식물을 지키는 건
작업복에 대한 소망을 좀 더
진실하게 만드는 생활…
아무도 나를 베어가지 못한다
베어간다면 너는 사람이겠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꿈에서나 보았다
꿈은 세계 속에서 펼쳐졌다

2024년 3월 24일 일요일

아침 같은 것

꿈에서
꿈으로만 남아 있는
다수의 미완성 물체를 완성했다
예를 들면 귤 하나를
귤 더미로 쌓아올렸다
희미한 귤빛 하나가
눈부신 귤빛 더미가 되어
무엇이든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
꿈에서 정신을 차리면
눈꺼풀 아래가 깜깜한데
그 안에서 빛을 보았다는 게
꿈의 거짓말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던
귤 하나
눈앞에서 딱
정지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귤 더미를 쌓을 차례라고
눈에 조금 묻어 있던
꿈이 말해주었다
이제 일어나서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2024년 3월 9일 토요일

가속장치 같은 것

안개 속을 걷듯이, 안개 속이 미어지듯이,
그러다 미어터진 안개 조각이 내
발밑에 툭 떨어져 있듯이, 그건 누가
흘리고 간 검은 증기……
그러나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 이따가 와
터진 자루를 꿰매야 하니까
얼어붙은 연못에도 양떼가 모이니까
죽은 자의 부활도 믿어버리는 마음으로
내 어금니를 내가 깨뜨린다
새벽의 검은 수박을 사서
검은 모범 택시를 잡아 탄다
나는 달린다 또
달린다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도 작고 미묘한 일들은 계속
일어나는데 너는 모르겠다,
모르겠단 말만 백 번
하는 사이에 이것도 모르겠다면
앞으로는 알아볼 수도 있는 일을 할게, 계속해서
알아봐주길 바라며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 이따가 와
아무리 해도 자루가 터지니까
여기선 잦은 안개 조심
택시에서 내릴 때
수박을 떨어뜨리고 마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산산조각나고
바닥에 검은 물이 흥건하니까
한편 안개는 좋겠다
네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안개가 다 쏟아지면
나는 빈 자루를 갖고 논다
그때쯤 너를 부를게
네가 올 테니까,
그러니까 이따가 와
그러면 네가 올 것이다

2024년 3월 5일 화요일

우리가 사는 방식 같은 것

너는 사자를 기다리는데
사자를 기다려서
사슴이 와도
사슴을 보내고 사자를 기다린다
나는 사자를 기다리는데
사자를 기다려서
문 앞에 사슴을 놓고
사자를 기다린다
높은 어둠 속에서는
잘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희박해진다
옷에는 얼룩덜룩
낮에 본 빛과 사랑을 묻히고 있다
검은 종이에
검은 글씨로
그것들에 대해 쓴다
아무에게도 안 보일 테니까
아무렇게나 쓴다
무언가 열심히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한 듯한 주말처럼 시간이 간다
너는 그동안 밝게 빛나는 전구처럼
공중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다
그 뒤로 너를 보는 일 앞에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네가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너는 흔들린다
많이 기다려서 예쁘네
서러워서 빛나네
내가 고함을 지르자
너는 깨져버린다
사자가 왔을 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자는 날카롭게 흩어진
죽은 너를 밟아버렸고
나는 도망가버린 상태였다
우리라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2024년 3월 3일 일요일

교외 식당 같은 것

구슬픈 음악이 나오는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을 먹는다 벽에는
환호하는 손흥민과 박태환의 대형 사진이 붙어 있다
진열장엔 온갖 트로피와 인삼주…
새벽 세 시
우리 중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카운터의 박하사탕 그릇 옆에는
세라믹 소재의 리트리버 가족이 놓여 있다
은은한 빛을 내는 보라색 자수정 램프가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테이블 번호는 25번 그러나
테이블이 스물다섯 개나 있는 식당은 아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가끔 한숨 쉰다
이제 나는 이들 중 한 명이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도
감히 못할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 자신이 없을 뿐
우리는 황태해장국을 먹는다
서글프고 낯선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는
알 수도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러다 절정에서 갑자기
모두의 숨소리가 멎는다
지금 뭐가 여길 지나간 것처럼
서로 눈을 마주친다
주인이 잠깐 홀에서 사라진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좋다
손흥민과 박태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사이에 뭔가

2024년 3월 1일 금요일

국립현대미술관 앞을 지나가는 개 같은 것

국립현대미술관 앞
을 지나가는
떠돌이 개

개에게는 미술관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들어갈 수 없는 상자거나
멀리 돌아가게 만드는 벽이겠지만
사람들은 ‘미술관 앞을 지나가는 개’
의 사진을 찍는다
귀여우니까
너무 보기 좋으니까

현대미술?
지나가는 개랑 저
안에 있는 것들이랑
남몰래 겨루는 전쟁술

개는 최소한
사람들의 지루함에 길을 내준다
즐거움을 보여준다
저 개는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궁금하게 만든다

미술을 전혀 모르는 개
미술이 전혀 모르는 개
그러나 미술관 앞을 지나가는 개는
미술관에 연동되어 버린다

일군의 행인들이 지나가고
아까와는 다른 이들이
개의 사진을 찍는다
개의 삶에 접근하려고

요 귀여운 댕댕이 사진을
해시태그 미술관
해시태그 댕댕
SNS에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사진 속의 개는
미술관 앞을 지나가면서도
미술관 앞에 계속 있다

‘계속 있다’는 게
계속되는 상황 속의 개
참고로 이곳에서는
《개를 위한 미술관》(2020)
이라는 전시를 연 적이 있다

이 개는 아마도
전시를 본 적이 없을 것이고
사실 미술관이 정말로 모든 것을
위할 수는 없지
않나?
웃으며
사진을 찍으며
사람들은 받아들인다

개를 아끼는 동시에
개를 멀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고 말하고 싶은
국립기관의 너무 평범한 마음을

2024년 1월 14일 일요일

괴담 같은 것

어두운 물이 흐르는 다리
한밤에 혼자 아니고
둘이 지날 때
이런 얘기 한다
몇 년 전 저기 늪지대에서
시체 하나 떠오른 적 있대
여기 사람들은 강가로 나올 때마다
아, 이 밑에서 살인난 적 있지,
떠올린대
동행은 두 손으로 주먹 말아
긴 망원경 만들고
낯선 동시에 무언가 있었을지도 모를
검은 물 한가운데를 바라본다
그 얘기, 나도 들은 적 있어
구급차도 왔었대
반쯤 상의가 벗겨져 있었대
들것으로 실려나간
물에 불은 여자의 시체
목격한 사람도 많대
조금씩 커지는 이야기는
우리가 걷기 좋은 핑계 같다
평소엔 쓸 수 없던
동행의 망원경을 빌려
정말?
정말이야?
길지 않은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만
서로 묻고 답하는 밤
너무 무서운 밤
그런데 동행이 자꾸 웃는다

2024년 1월 8일 월요일

정당화 같은 것

위험해 보이지 않으려고
조금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은 붐비고 있었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판단하고 확정할 단계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누워 있다가 일어났고
일어나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떠돌면서 더욱 떠돌았다

아무 동물이나 되고 싶었다
오늘 말한 것을 내일도 말하는 동물이

감정적 범위와 동서남북의 방향 감각을 지켜야 해
이런 건 눈 오는 주문진에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말들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계속하는 동물이

비닐하우스에 눈이 쌓이겠지
골조 위에 쌓인 눈이
모양을 확정하고 있겠지

해남에선 꽃이 피고
열도의 마지마 상은
무연한 표정 짓고 있겠지

봄이면 그는
그리운 사람 생각을 한다

그래요?
정말이라니까요...

이런 말
지금 어딘가에서
누가 또 하고 있겠지
내가 모를 소리
몰라도 좋을 소리를 하면서

눈이 녹아도
꽃이 핀대도

이젠 끝
작은 소리로

2023년 10월 3일 화요일

일기 같은 것

말끔한 개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엉망인 나의 잔디밭 사이로.
환한 낮인데도
교회의 네온사인은 망가진 믿음처럼 깜박거렸다.
이러다 죽는 것이 최선일까?
내가 발걸음을 멈춘 사이에
이 광경은 전시되고 있었다.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나를 자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말끔한 개들을 따라갔다.
죽은 풀들이 발밑에 붙어 끌려왔다.
여기저기 쓰러진 것들
그래도 나는 돌아다녔다.
이것이 내겐 산책이라고 믿어왔다.
개들을 따라다니며
점차 더러워지는 개들을 보았다.
개들은 무엇을 숨기거나
막으려는 움직임 없이
앞장서 가고 있었다.
누군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진에 잘 나오기 위해 지어진 듯한 건물들 사이를 지나며,
몸통에 죽은 풀을 붙이고, 그것은 마치
내가 한 시간씩 할애하며
줄지어 기다렸다가 보기도 하는 공연 같았다.

개들은 자주 빛나는 벽 앞에 서게 되었고
나는 그 포즈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광경이 무언가를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교회의 네온사인은 망가진 채 깜박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교회는 주로 사거리에 있고
나는 사거리를 지나쳐버렸다.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을
내가 사거리를 지나친 사건 발생일이라고 하자.
“제목: 내가 사거리를 지나친 사건 발생”
그러자 개들이 잊혀졌다.
그들의 말끔함도…
그들의 더러움도…

그러나 이 일기는 개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쓴 개들이 사라지자
내가 쓰지 않은 개들이 몰려온다.
나는 이 개들이
나를 지워줄 것 같다.
다른 것과 구별 안 되게 해줄 것 같다.

2023년 9월 21일 목요일

끝과 시작 같은 것

인파로 붐비던 거리에서 사람들이 사라진다. 비가 오던 그 자리에서 비가 그친다. 이천년이 끝나는 순간 이천일년이 시작되고 이천일년은 이천년을 돌아보게 한다. 텅빈 거리가 번화한 거리를 향하여 점등을 시도한다. 걸어가는 사람 옆에 서 있는 사람, 살펴가는 사람, 되돌아오는 사람이 서로의 일상을 진행하며 무색한 외출이 되지 않도록 준비한다. 그친 비를 바라볼 수는 없지만 마른 하늘을 바라보면 비를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젖은 것은 조금 더 젖어가고 더 이상 젖을 수도 없을 때 이보다 더 젖을 수는 없겠구나, 멈춘 자리에서 쉽게 마를 수도 없는 마음이 시작된다.

2023년 9월 10일 일요일

역사 같은 것

손바닥 위에 잘 익은 체리를 올려놓는다. 동그랗게 불타서 이내 망가진다. 체리는 재로 변하고 재는 체리로 변하지 않는다. 그대로 오그라들어서 형편처럼 굳는다. 입으로 바람 불어 재를 턴다. 재가 날아가고 남은 자리는 이후에도 여전하다. 혼자 책임질 수 없는 것, 뜨거운 철심 같은 것, 한참 쥐고 있으면 손바닥에 다 묻는다. 체리의 인상이 피부에 검게 남는다. 이것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제각각이다. 잎 진 나무라는 이야기, 다 쓴 물병 같다는 소리, 아마도 읽다 버린 회고록에 가깝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런 말은 과하다. 앉은 자리를 치우고 차가운 눈을 구한다. 눈으로 집 짓고 한자리에서 머리 묶는다. 만년설 같은 재와 재와 같은 만년설이 어깨 위로 쌓인 지 오래. 한동안 재가 흩날리면 모두가 입 다물고 걸어가는데, 그럼에도 재가 흩날려, 입 열고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우연히 내 옆을 지나간다. 나는 그쪽을 모르고 그쪽도 날 모르겠지만 서로 눈짓 인사하다가 익숙한 흔적을 그들의 손바닥에서 발견한다. 이대로 지나칠 것 같던 그들이 이쪽을 돌아보자 나는 내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2023년 8월 27일 일요일

fish 노래 같은 것

지금 듣고 있는 곡은 오래전에 죽은 포크 가수의 노래다. 그는 꼭 나 대신 죽어준 사람 같다. 그는 이 노래를 비 오는 날에만 신는 장화와 마른 담배, 그리고 약간의 황금 같은 감자들과 맞바꾸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보컬이 훌륭한 편은 아니었지만 가사를 쉽게 썼다. 대체로 나조차 이해할 수 있는 영어였다.
그는 관찰을 초년의 양식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물속의 living fish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수족관거리 앞을 걸었다. 열대어들은 수족관 유리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한없는 반복운동을 보여주었다. 오래된 벽지처럼 벗겨진 생물의 이마. 언젠가 이 거리를 그때처럼 산책할 때, 정지한 물고기들과 너무 오래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수족관집 주인의 경고를 들은 적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노래 속에서 흔들리는 fish의 기분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fish는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흔들리고 있죠.”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그리고는 노래가 뒤에 남아 그는 뜻대로 말년을 맞이하지 못했고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 있다면 이마에 열이 오를 때까지 그걸 듣는 거였다.

2023년 8월 21일 월요일

기원 같은 것

*
꿈에 못 보던 무덤 하나가 나왔다.
일어나 종이 위에 동그란 무덤 하나를 그린다.
혼자 있어 외로운 무덤.
한켠에 누군가를 그려넣었는데 나도 모르는 여자다.
그로 하여금 참배차 무덤가를 서성거리게 한다.
석물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비석 또한 그린다.
엊그제 신문에서 본 억울한 이름들을 써넣을까 하다가
내가 그린 여자의 이름조차 알 수 없어 그만둔다.
이름을 물어보기엔
여자는 피곤해 보인다.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볼까.
기다린다.
여자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
지면의 물감이 마른 뒤에도 무덤가에 있다.
그는 나와 무관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알 것 같다.

*
며칠 뒤 나는 연작에 해당하는 그림을 한 점 더 그린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무덤을 전면에 배치한다.
비석은 화면에서 잘라내고
상석에 빈 유리병을 하나 놓아둔다.
오늘도 찾아온 여자를 그릴까 하다가
더 이상 그를 힘들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대신 유리병 속에 꽃 한 송이를 그린다.
지금까지 내가 그려본 꽃 중에 가장 화사한 노란꽃 한 송이를.
조금 전 여자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것만
이곳을 다녀갈 정도로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만 그리고 싶다.
아마도 그건 꿈이겠지.
꿈이라고들 말할 것이다.
꿈이어도 좋다.

2023년 8월 10일 목요일

공포 같은 것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
그는 잠을 자고 있다.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미련이다.

그 긴 것이
왔니, 하며 눈을 뜨고 내게 무언가를 묻기 시작할 때
나의 안부는 발생하는 것이다.
동그란 주먹을 쥐고 눈을 비비듯이 시작되는 것이다.

애인은 있니, 돈은 좀 있니,
기대할 때마다 무조건 나는 알았어, 알았어, 하는 것이다.
그래도 먹다 뱉은 수박씨처럼 마음의 허벅지에 와서 찰싹찰싹 달라붙는 것이다.

너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이토록 그는 나를 걱정하지만
이런 말을 들어도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걸요.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의 불화에 대한 것이 아니다.
둘이 살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거실을 나서지 않고 나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의 불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어코 그가 방으로 들어오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아마도 나는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인데 그저 방바닥에 누워 조용히 침을 흘리고 있는 침묵이었을 텐데.

사실 침묵 속에는 조그만 독채 하나가 있어
불경한 꿈이 칩거하고 있는 것이다.
집 안에 흙 둔덕이 있고 거기에 새가 많이 찾아오고
까마귀의 등에 까치가 올라탄 것을 그가 보게 되는 순간이 있어

꺼져 있던 형광등이 켜진 것이다.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하여 나는 말을 아끼려 한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쥐 두 마리를 꺼낸 것, 그리고 쥐를 풀어 새를 쫓은 것.

그리 조용한 일은 아니었다.

쥐가 쥐의 함성을 지르고
새가 새의 박수를 칠 때,

놀란 그는 방으로 뛰어들었고 양손에 커다란 쇠망치를 들어

빨갛게
빨갛게

쥐와 새를 두들겨주었다.

다시 새로운 안부를 물을 듯한 얼굴로

팡!
팡!

두들기고 있었다.

2023년 8월 4일 금요일

원뿔 같은 것

그는 살아 있다.
찻잔에 묻은 입술 모양의 얼룩이 그걸 잘 말해준다.
적당히 잊혀질 하루의 한 조각,
조각을 만지면 차가웠다. 한 주간 한파였다.
집집마다 동파가 이어졌다.
그는 이 조각을 적당히 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세게 쥐면 망가질 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질 수도,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그는 입을 헹구러 갔다.
물을 틀면 차가웠다. 흘린 그의 일부가 역류했다.
이런 시대엔 대단히 어색하게도,
그는 이 지역에서 채취할 수 있는 돌과 나무로
손수 집을 지었는데 차돌같이 단단했던 생활은
한 조각이었다. 정말 한 조각만 남았다.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길고 새로운 원뿔 모양인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이자 마지막 원뿔이다.
그리고 그의 당부라면,
만약 여기까지 읽고 있는 당신에게,
차가운 줄도 모르고 원뿔을 만지고 싶은 당신에게,
원둘레에서 솟은 정점까지 진심으로 닦아주길.
어느 집에나 보풀 많은 수건이
하나쯤 있으리라 믿는다…….

2023년 6월 21일 수요일

상상 퇴사 같은 것

모래사장에선 숨을 곳이 없었다. 다만 갖고 싶은 밤이 머리 위에 떠 있었지.
정말로 갖고 싶은 만큼 쥐었다. 쥘 수 있을 만큼 쥐었을 뿐이지만.
그걸 한쪽 주머니 속에 넣어보려다 주머니가 터져버렸다. 아래로 검은 모래가 쏟아졌다. 있던 모래 위로 쌓인 아주 약간의 다른 모래 색.

나는 양손을 비비며 모래를 섞었다. “섞은 모래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래군.”
혼잣말하며 모래 속으로 한 손을 넣어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열화된 체제였다. 이런 체제 정비의 배경은 무엇일까……
신분을 만들고 한동안 거기에 체류했다. 숙소 주인은 조식을 제공해주었는데 그때마다 내게 한마디씩 했다. “머물다보면 변해. 변하면 여기 있게 되고.”
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진 못했는데
가끔은 묻지 않아도 사적인 얘길 잘하는 사람이 있다.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이 기억에 남지.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이미 뜨거운 변화로 물든 셈이다.
휴일에 울리는 사무실 전화기처럼, 몰래 침투한 사상범처럼. 목격한 장면들을 조용히 지나칠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이대로 내 생활이 여름 감기에 걸려도 괜찮은 체질인지 궁금하다. 맞다면 이 사건은 알맞은 날에 도착한 나의 우울일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출발한 나는 벌써 기침 중. 입을 가렸던 손바닥에서 모래알갱이가 바삭거린다. 계기가 없었나 생각해보면 그것이었다.

2023년 6월 19일 월요일

셀프카메라 같은 것

개를 보면 개를 연구하는 개가 된다. 통 속에 보관하던 개의 통속을 개봉하면 개는 급속 부패한다. 개를 공원에 풀어 놓았더니 금세 상한 발을 갖는다. 이후로는 너무 즐겁게 노는 개 취급을 받는다. 공기 속으로 다가와 공기 속에서 뒤척이는 모양을 하고 있다. 쓰다듬으면 가라앉고 가라앉으면 무너지는 모양이다.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들키는 형편. 여기에 개들이 모이면 공기에 닳고 남은 모양의 마음이, 몸이 상한 개들의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합을 가진다. 그것은 상당히 불유쾌한 공원을 이룬다. 이유 없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은 개들이 많은 상황. 종일 움직인 개들은 뜨겁고 덥수룩하다. 사랑을 나누기 전에는 잘 씻어야 하는데 시절이 어려운 탓인지 공원은 텅 비어 있다. 텅 빈 공원을 만들기 위하여 누군가 더러운 공원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나는 지금 많은 개들이 있어도 너무 없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2023년 5월 22일 월요일

갑자기 같은 것

이 작은 웅덩이는 별것이 아닌데 그가 매일 들여다보고 있어 나도 가끔은 보고 싶어진다. 보고 있으면 둔하게 일렁이거나 한없이 검은 웅덩이인데 말하자면 그가 자신의 일부를 흘려 이 웅덩이를 만든 것이라 나로선 차마 보지 않을 수 없다.
웅덩이의 일부는 어느새 내 발밑까지 흘러와 있으며 흘러와 자주 고여 있다. 이제는 거의 차오른다고 말해야 할 것 같고 결국은 나도 웅덩이를 건너고자 목이 긴 신발을 신어야 할 것 같다. 다짐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미 다짐하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그를 보았다. 그는 긴 막대를 들어 웅덩이 앞을 막고 있었다. 어떤 계기라 할 것도 없이 나는 그에게 준비됐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가 막대를 올리자 나는 뛰어들었고. 등 뒤로 웅덩이는 생각보다 깊을 거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로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늠이 안 되는 웅덩이 속으로 어깨에 바위를 진 채였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