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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6일 화요일

오물분수

오물분수야, 너는 붙잡은 잠을 놓치게 한다. 세상의 찌꺼기들 그러모아 천국 향해 솟구친 뒤 엊그제의 속마음처럼 박살이 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울컥거리는 폭주는 언제나 즐거울 거야. 최대한 움켜쥐고 있던 건강이나 미래와는 무관하게, 내 안으로 안착하는 너의 물줄기에는 삶의 분변 덩어리가 거대한 발사체처럼 자리 잡고 있고

빛을 등진 영혼의 파편들 짊어진 채 아래로 쏟아지며, 지체 없이 흐르고 있다.

계속해서 작동하는 잡동사니 마음들에 24시간 하방 압력이 커지는 것을 오래 견디고 있다. 이를테면 대형종 난초를 지탱하는 화분 속 돌멩이의 무거운 정적부터, 작은 어미 문조가, 자기보다 더 작은 새끼를 키우느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내가 들을 수 있는 어떤 주파수의 오물에서도 함부로 살 만한 냄새가 난다.

그렇게 살다가도 죽어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게 자연이라며—

오물분수야, 너는 쏟아지고, 죽는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새롭게 쏟아지고, 죽는다.

2025년 4월 24일 목요일

좋은 경험

강변을 걷다 보면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 모를
종이 하나를 줍게 돼

별거 아니야
그냥 종이로 된 운명 같은 거야

처음엔 지도인지, 편지인지 알 수 없는데
펼쳐보면 모르는 나라의 젖은 산맥이지

거기 살던 사람들은
수용성 육체인가봐

흔적도 없이 조용해져 있다
나는 주운 것이 마음에 든다

집으로 가져와서
드라이어로 말려보게 돼

마른 종이 위에서 돋아난 얼굴들이
촛불 켜고 외치기 시작하지

우리는 불을 가지고 물속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물속에서도 불을 피우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종이에서 흘러넘친 그들이
나를 둘러싸고 말해

하지만 나는 그대로 항복해버리고 싶고

사실 조용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나한테 얼마든지 그래도 돼
그렇게 무너지면 황홀하잖아

나는 모르는 나라의 젖은 산맥에 올라
서서히, 함부로 미끄러지는 걸 좋아한다

이다음에도 누가 흘린 종이를 보면
또 집으로 가져오고 싶겠지

아니면 물에 잠긴, 풀어진 나라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종이질의,
얇은 인기척을 듣고 있거나

2025년 2월 23일 일요일

코끼리하우스

이 방에서 나는 존재하고
동생은 유령이다.

출근할 때는 사람이지만
열네 시간을 일한 후 퇴근할 때는
발을 잃고 허공에 붕 떠서 들어오니까.

나는 하루 종일
여기에서 시를 쓰거나
라면을 끓여 먹고 있을 테니까.

오후 한 시쯤 되면
동생이 밥은 먹었을까,
오늘도 어떤 환자가
간절히 팔을 붙잡았을까,
짐작한다.

동생이 환자를 보고 있을 동안
나는 방 안에서 시를 써야지.
한없이 슬픈 시를.
—나는 매일 결심하지만
왜 시일까.
왜 굳이 슬퍼야 할까.

물으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좁은 방 안에서
홀로 다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일까

어제 죽은 사람의 이름을
환자 명부에서 지우고 돌아온 동생에게,

사망 보험금을 놓고 다투는 가족들 사이에서
모른 척 스테이션에 앉아 있어야 했던
동생에게.

나의 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병원 주위를 일곱 번 돌며
이 병원이 불타길 기도해야 할까.

아니다,
시인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근로 감독을 신청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시
빈 공책을 연다.

“흰 것과 만나 흰 것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첫 줄을 쓰고,
모두가 ‘시’라고 인정할 만한 문장을 이어간다.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은
존재해서 슬프다.

동생이 이 시를 어떻게 읽을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동생은 이 시를 읽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너의 환자들을 돌보느라,
돌아올 수 없는 이 방에서
밤새 허공이 되어가느라.

2025년 2월 16일 일요일

조심스러운 사람들

돌을 많이 보고 만지고 밟고 다니며. 돌한테 얼쩡거리고 발로 차고 시비 걸고 그래도 같이 술 마시자고는 안 해보며. 시간이 흐를수록 남의 종교 보듯 했다.

금요일 밤 해장국집에 모인 중년들은 서로의 밥그릇에 국물 떠주며
혼자 못 먹어? 애기야? 서로 업신여기는, 가학-피학 관계로 절묘하게 구성된 뜨거운 사랑의 모임을 잘만 하던데,

우리는 왜 조금이라도 친한 척 안 해봤는지. 어차피 다시 만나자고도 안 할 거니까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층층이 서로를 쌓아올리기만 했는지. 다들 하는 것처럼 탑 만들고 다시 무너뜨리고 나 아니어도 바람 불어서 와르르 무너질 것을,

사실은 바람이 제일 비겁했다. 보이지도 않는 것이 번번이 때리고 갔다.
대신 너는 아침부터 바빴다. 너의 잘못 말하기를 행하느라.
오해인 줄도 모르고 너는 그 행위가 오로지 너라는 듯이, 바람 같은 건 꿈에도 모르고 다녔다.

그랬던 너는 참 용감하지. 언제까지 자신처럼 행동할 참인가.
이제야 나는 내 몸 하나지만 돌은 저 멀리 펼쳐진 데까지 다 돌들이란 점을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그대로 너 될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대신에.

2025년 2월 10일 월요일

silo

이번 여름에는 서울시 은평구 봉산의 대벌레 무리 일원으로 위장해볼 생각이다. 직박구리나 인간을 속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햇볕에 널어 온몸이 두루 갈색이 될 때까지 최대한 바싹 말린다. 안감에 체취를 흡수하는 활성 목탄을 댄 옷을 입고 모든 이음매에는 덕테이프를 붙이는 게 좋다. 좀 더 효과적인 위장을 위해서는 옷 안에 열어놓은 암모니아 캡슐을 붙이는 게 상책이다. 이것도 저것도 귀찮다면 소나무 기름과 여우 오줌을 몸에 바를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 냄새를 완전히 가리는 데 성공했다면 주변 환경에 맞는 색깔의 스프레이를 골라 몸에 골고루 뿌린다. 단 무미무취한 제품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작은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붙여 위장한다. 몸통과 팔, 다리를 최대한 길게 뻗어 대나무 비슷한 것처럼 군다. 그러면서 자신이 도처에 창궐하는 대벌레라고 생각한다.

참고:『감각의 박물학』(다이앤 애커먼)에서 이 방법을 알려주었다. 저자는 ≪필드앤드스트림≫이란 잡지에서 알게 된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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