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7일 금요일

적기투항: 민주노총 (17년 10월 넷째 주)



마지막 PIMPS는 청와대 만찬 보이콧 건으로 진흙탕 화제에 오른 민주노총이다. 원래 디폴트로 보수반동들에게 까이던 것에 더해, 탄핵과 대선 국면을 거치며 여기에서 저기에서 좌우 노소 안팎을 가리지 않고 나날이 더 욕을 먹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정도로 욕을 들어 처먹는다는 것은 민주노총이 이제는 자의든 타의든 명실상부 한국의 주요 정치 주체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가 있겠다. 거짓말 약간 보태서, 요즘 나는 자나깨나 민주노총 걱정뿐이다. 그간 내가 그들의 여러 노력들을 보아 알고 있으며 항상 응원 지지하는 입장임에도, 금주의 그 결정은 참 마음이 아프다.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꽤 역사적인 시점을 지나고 있고, 이런 때일수록 침착함이 필요하다. 뭘 해도 공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무조건 여기저기서 욕은 먹고, 이러면 당연히 심사가 꽈배기가 되기 마련... 이런 건 재미없는 이야기다. 지금 민주노총에 필요한 이미지 메이킹은 바로 이미지 메이킹 그 자체의 시작이다. 재작년 민중총궐기 즈음을 기점으로 민주노총의 디자인 역량이 매우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이미지를 한번 바꿔 보려는 이런저런 산발적인 기획들(별 반응은 없었지만)도 봤다. 여전히 부족하다. 전격적이고 종합적인 기획, <토탈플랜>이 필요하다. 부족한 역량을 짜내면서 찔끔찔끔 하지 말고 팀을 제대로 꾸려서 돈을 한 번 크게 쓰자. 어차피 다 노동자들이니 못할 일이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지 않은가? 먼저 TV광고 집행. 두산의 뭐 사람이 미래다 이런 느낌으로, 그윽하게 나레이션(노동자는~ 어쩌고) 깔면서 건물 한번 보여주고 도로 한번 보여주고 각종 일터 여기저기 훑고 뭐 이래저래 일하는 사람들 쫙, 웃다가, 뭐 사장 새끼들 용역 새끼들, 데모 장면 따닥 보여주고, 로고 빵,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이러면 그만이다. 안에서 뭘 하는지를 밖에서 모르니 자꾸 데마고기가 퍼지는 것이다. 그런 건 티브이가 직격이다. 대체 언제까지 옆에서 남들이 만화 그려주고 영화 만들어 주고 글 써주고 해야 되나? 메인 스트림에 공격적으로 진출을 해야 한다 이 말이다. 합정에 상균아 사랑한다 D+얼마 지하철 광고 붙이고 홈페이지에서 굿즈, 뭐 뱃지도 팔고 조끼 머리띠도 팔고 손수건, 소책자, 티셔츠, 뭐 또 이것저것에 이래저래 긁어 모아서 현카처럼 아예 집회 신고를 염병땡땡 콘서트로 해서 티켓도 팔고 얍티비 좆같은 데에 광고 때리고 종합적으로다가 하여튼 개좆같은 자본주의 문화 세계에 한번 온몸을 던져 보라는 얘기다. 어차피 망한다 망한다 하는데 못할 일이 뭐 있나? 안 그런가? 위기가 기회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며, 이것으로 PIMPS를 마친다. 그간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2017년 10월 20일 금요일

TK목장의 결투: 유승민 (17년 10월 셋째 주)



저번에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진보 정치인을 다루겠다고 했는데 막상 쓰자니 딱히 인물도 없고, 파워이미지메이킹은커녕 눈물과 한숨뿐... 원래 진보 정치는 이념과 연대로 하는 것이지 인물로 하는게 아니다! 애초에 그렇게 난 인물들이었으면 왜 그러고들 있겠나? 그런 의미에서 금주의 PIMPS는 큰 액션 보여주며 큰 인물을 꿈꾸는 유승민으로 정했다. 탄핵 때부터 줄창 연기만 피워대던 정계 개편 헤쳐모여를 이 주에 정식으로 들고 나왔다. 낚이는 쪽이 유승민인지 안철수인지 하여튼 빨리 좀 정리들을 했으면 좋겠다. 유승민에게 아직 뭔가 야심이 있다면, 일전에 내가 한반도에서 안경잡이는 절대 안 된다고 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제 와서 안경을 벗기에는 너무 빈상貧相인 면이 있지만 그래도 벗어야 한다. 안경만 문제가 아니다. 입술이 얇고 어깨도 좁지 않은가. 거기에다 전부터 사람들을 잘 추슬러서 가기보다는 꼬장꼬장하게 뻗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맞물려, 한마디로 그릇이 작아보인다. 보면 미 공화당 같은 걸 하고 싶은 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지금 그 딸깍발이 꼴로는 절대 못한다. 선비의 시대가 아니다. 유승민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무武, 전례가 없는 무력이다. 어차피 마동석 정도로 벌크업을 하지 못할 거라면 간단한 액세서리로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 내 말은, 총을 갖고 다니라는 얘기다. 그 뭐,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 안경을 벗은 김에 잔뜩 찌푸리고 다녀도 좋다. 표정에서부터 상대를 제압하고, 술이 달린 바지, 챙이 넓은 모자, 계절감 있는 판초, 그런 것도 모두 잘 어울릴 것이다. 관을 끌고 다니는 것까진 너무한가? 하지만 말은 타고 다녀야 한다. 말이 좀 그러면은, 김무성, 그래, 김무성을 타고 다니면 되겠다.

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길 주인

박스 안에 앉아 있다. 길을 지나는 차량으로부터 도로 요금을 징수하기 위해서다. 말해두지만 나는 요금 징수원이 아니다. 나는 이 길의 주인이다. 이 길은 먼 조상 때부터 집안의 길이었다. 이 길은 할아버지의 길이었다가, 아버지의 길이었다가, 지금은 내 길이다. 먼 조상 중 하나는 둘도 없는 로맨티스트로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다른 조상에게 청혼할 때 자신과 결혼해준다면 그를 위한 길을 사주고 그 길에 그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때 지어진 길의 이름은 더 이상 전하지 않지만 길은 유산으로서 전한다.
명절이지만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박스 안에 앉아 있다. 명절은 나에게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니까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만날 가족도 없다. 더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형제도 없다. 아버지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친인척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려 부모 외에 내 핏줄이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집이 없다. 원래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도 귀찮고, 귀찮게 돌아가도 반겨줄 이도 없어서 그냥 팔아버렸다. 나는 이 박스 안에서 생활한다. 박스 안에서 자다가, 밥을 먹다가, TV를 보며 웃다가, 차를 보며 요금을 징수한다. 이 길을 물려줄 자식이 나에게 없으므로 나는 이 길과 함께 죽을 작정이다. 아니면 영원히 살거나.
이 길 안쪽에 땅이 있긴 하지만 밟아본 적 없다. 저 땅은 주인 없는 맹지(盲地)다. 그 땅을 둘러싼 모든 길은 나의 길인데, 대대로 우리 집안에서 도로 이용 허가증을 내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출입할 수 없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그 땅으로는 풀과 벌레가 무성하게 번식한다. 푸서리를 지나 정중에는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있다. 조사원들조차 그 땅을 밟지 못해 그 나무의 나이도 모른다.

서재극

클로짓 드라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연을 전제로 하지 않은, 오로지 읽기 위해 쓴 극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네요. 한자어로 다시 쓰면 서재극. 이 분야의 유명한 작품 제목을 따서, 우리말로는 ‘안락의자 연극’이라 부르기도 한대요.

상당히 근사하게 들리는 얘기죠. 이 형식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번영했습니다만, 연출가의 역량에 따라 어떤 텍스트라도 무대에 올릴 수 있다 -는 전위・실험적 연출 사조의 등장에 밀려 서서히 저물었다는 모양입니다.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은 듯도 합니다만 곱씹어보면 조금 역설적이기도, 하지 않나요. 희곡 작가가 무대라는 제한을 벗어나 최대한의 자유도를 추구한 결과, 상연되지 않을 극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연출가가 추구하는 극단적인 연출적 자유에 밀려 결국 다시 사라지게 되었다는… 그런 얘기는. 

송출되지 않을 라디오의 대본을, 그것도 오프닝만 쓰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이런 형식이라면 무슨 이야기든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런 것을 쓰기로 했습니다만, 언젠가 이것이 더이상은 클로짓 오프닝이 아니게 되는 날도 올 것 같은 예감도 벌써부터 들고, ‘최대한의 자유도를 보장하는 형식’, 바로 그것에 오히려 걸려 넘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도 느낍니다.

그럼에도 일단은, 이렇게 시작해 보겠습니다. 열린 옷장 방향으로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옷장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으로. 


말난 김에 안락의자를 하나 살까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당신은, 내 집에 아직 안락의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심상정이 아닌: 이정미 (17년 10월 둘째 주)



PIMPS의 마지막 한 달은 (재미없게도) 진보 정치인을 다루기로 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언제나 진보 정치인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여러분 거기 있지요? 그들은 보이지 않고, 그들은 들리지 않으며, 그들은... 오늘은 이정미를 다룬다. 이정미가 누구냐, 박근혜 탄핵 당시 선고문을 읽은 헌재소장 권한대행과는 동명이인으로, 현재 정의당 당대표다. 그가 진보정당 후보로서 대선 최고 득표율을 찍었던 전임 대표 심상정의 자리를 이은 지가 3개월이다. 이 순간까지도 그의 존재감은 퇴임한 법조인에게 밀리는 실정이다. 현재 이미지로 따지자면 이정미에게는 이모적인 데가 있다. 어머니의 여자 형제 말이다. 이름조차 어머니의 여자 형제 같다. ‘이정숙의 매(妹) 이정미’인 식이다. 이대로라면 뭔가? 추미애의 사이드킥밖에 안 된다. 공세적인 이미지 메이킹으로 난세에 중량감을 키운 심상정은 자신의 노하우를 전해주지 않았던 걸까? 이정미를 위해 준비된 오랜 솔루션 하나는 일단 귀를 좀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중앙이 그렇게 하고 사진을 찍어준 적이 있다. 바로 그거였다. 실망스럽게도 곧장 전으로 돌아갔지만. 귀를 보여준다는 것은 잘 듣는다는 의미다. 농담 같지만 전혀 아니다. 야심을 품고 한국 정치사에 유례없는 이미지를 한번 노려본다면 포니테일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목이 길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더불어 의외의 장신인 점도 어필해야 한다. 동안형 외모와 구부정한 자세에 키가 묻히고 마는데 그래서는 곤란하다. 키가 크다는 것은 눈에 띈다는 의미다. 눈에 띄어야 한다. 전처럼 해서 뭐가 되는 그런 한가한 때가 아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이용해야 한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동안에는 허리를 펴고 턱을 당기자. 엄중한 세계 정세를 생각하자. 기아와 전쟁... 웃는 상이지만 웃어 주지 말라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다른 당대표들과 함께 사진 찍자고 어디 불러내도 한번 껴 보려고 기웃거리지 말고 차라리 팔짱을 딱 끼고 있어야 한다. 팔짱을 딱 끼고 사진을 찍히자. 결혼하지 않는 신비의 이모 간지를 밀어붙여 폭발시켜야 한다. 철없는 조카들을 홀려 좌경화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게 답이다. 답은 차세대에 있다. 이정미의 짐이 무겁다... 피를 토하는 심정을 누르며 쓴다... PIMPS는 언제나 정론직필이다...

2017년 10월 2일 월요일

9월 더미 태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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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펜이 아니라 검은 펜으로 글씨를 쓰고 싶다. 써서 붙여 놓기다. 쓰는 행위를 하고 싶다는 얘기지만 뭘 쓸 것이냐가 실은 중요하다. 오래된 소설의 유서 깊은 부분이 좋을 것이다. 아니면 오래된 팸플릿. 포이어바흐 테제 같은 것. 버리기 아까워 붙여 놓겠다는 얘기지만 실은 붙여 놓는다는 행위가 중요하다. 나는 벽에다 뭘 그려 붙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벽이 비어 있는 게 이상한가? 벽 보기를 좋아하는 것일 테다. 말도 모르는 아기 때부터 누워서 멍하니 벽을 보고 있곤 했다. 기억이 난다. 거짓말이지만. 하여간 그렇게 했다. 그랬던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벽이 좀 허전해 보였음이 분명하다. 저 벽에다가 뭘 좀 붙이면 좋겠군, 했던 것이 분명하다. 조금 자란 다음에는, 침대에 누워 벽지의 패턴이나 벽과 천장이 모이는 구석을 한참 보았던 기억이 난다. 벽에다 처음 뭘 붙였던 건 초등학생 때였다. 그림 같은 걸 그려서. 내가 그린 것을 계속 들여다 보곤 했다. 아기 때의 다짐을 떠올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글자를 붙인 적은 없다. 언제나 그림이었다. 그림 쪽이 획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볼 것도 많다. 더 좋은 글씨를 쓰고 싶다. 종합적으로 필요한 것은 족자 모양의 화이트보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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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꿈 얘기가 보통 아무 재미가 없는 것과 같이 내 꿈 얘기도 써놓고 보면 별 재미없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일기보다 더 재미없는 정도다. 꿈은 글로 남길수록 더 많이 꾸게 되는데, 꿈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즐거운 일은 아니다. 꿈은 감각과 감정과 상황과 이미지의 뒤범벅일 뿐이다. 서랍을 정리하기 위해 쏟았을 때의 혼돈 같은 것이다. 그 재료를 가지고 아무리 조리 있게 말을 만들어 봤자 뭔가의 뒤범벅일 뿐이다. 꿈이 조금이라도 재밌다면 꿈의 이전 때문이다. 꿈 이전의 맥락이 점점 흐려지면서 꿈의 재미도 점점 떨어진다. 꿈 자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종류의 것, 문자로 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기 때문에, 꿈 기록하기는 언제나 구미가 당기는 계획이다. 모으기 좋은 허망한 것이니까. 그것은 나의 것이 전혀 아니면서도 나만의 도록처럼 보일 것이다. 굳이 하겠다면 공개되지 않아야 하겠다. 재미가 없다는 사실이 들통나지 않도록. 그러나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일은 해봤댔자 금방 질리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꿈 이야기가 자신의 뒤쪽, 미래와 관계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어떤가? 말하자면 꿈 해몽 일지의 형태라면? 요셉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비록 지금은 이사야를 택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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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하는 일은 대개 바보 같은 일이고, 그래서 혼자서 하는 일은 정말로 진지한 일이다. 하지만 최고로 혼자 하는 일이라도 교류에의 열망이 거기에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교류회, 가상의 교류회를 혼자서 만들기, 이것은 오래된 기획이고 주제다. 이 가상의 교류회는 마음대로 소집되며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한다. 사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제한된 자원을 놓고 합의할 필요도 없다. 무제한 완전 갖춤의 교류회. 하지만 그래서야 무엇을 왜 교류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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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아름다움의 필수 요소인 균형과 긴장감과 어려움은 결국 '통제할 수 없는 바깥'과 '복잡해지려는 안쪽'의 경계면에 깃든다. 그것을 가리켜 형상이라 한다. 나는 그렇게 본다. 기획들의 외부 접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된다는 얘기다. 실루엣만으로 그 뒤에 선 군중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는, 인도자 같은 것을. 그 인도자는 리듬을 안다. 스케일을 안다. 참과 거짓이 자리를 바꾸는 순간을 안다. 그렇지, 자꾸 이런 이야기는 쓰지 말자. 형상을 만들자. 형상으로!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고! 시리즈는 쉬운 형상에 속한다. 시리즈 내 리듬이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스케일 큰 것이 필요하다. 리듬은 리듬의 없음을 통해서만 있다. 요는 시리즈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단발의 뭔가를. '특별 기획'을! 내가 원한다면 이 취미를 위해 월에 1만원까지는 지출할 수 있다. 고료로 만 원을 주고 글을 하나 받는다. 받아서 특집입고 태그를 붙이고, 관리인 계정으로 올린다. 접촉 가능한 주변의 필자와 주제도 짧게 생각해 봤다. [가을특집] "수염과 커피", "초등학생을 위한 인술강의", "기회의 땅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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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르날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독자투고를 받을 수도 있겠다. 메일로. 자유주제로. 또는 주제를 정해서. 한 번 보고 치울 만한 짧은 공짜 글을. 게재 심사는 아마 관리인이 할 것이다. 일단 윤리 심의 기준을 만들어 적용하고 그 다음 제비뽑기나 사다리타기, 심사-추첨제다. 하지도 않을 텐데 벌써 귀찮다. 지면상의 제한이 없는데 추첨이 왜 필요한가? 제한은 만들면 그만이다. 아니 그보다 도대체 누가 투고를 한단 말인가? 그와 관련해서는 절대로 오지 않는 투고를 언제까지고 기다리는 이야기나 할 수 있을 것이며, 기적적으로 온다 해도 관리인이 대부분 쳐낼 것이다. 하지만 투고 자체는 나쁘지 않다. 최근 많이 읽힘 가젯을 독자투고란으로 바꿔도 된다. 일주일에 하나를 받아서 매주 바꾼다면...? 그런데 어차피 관리인이 올리는 거면 그냥 자기가 직접 써 버리면 그만 아니겠나? 투고도 관리인이 하고 심사도 관리인이 하고... 필진에게 최대한의 자유도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못할 것도 없는 기획이다. 나 자신에게 최대의 자유를... 하지만 그래서야 무엇을? 왜? 여기서 나 자신의 운신 폭은 더 좁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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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 굿즈의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손수건은 가볍고 얇고, 그걸로 할 수 있는 일도 적지 않다. 일테면, 뭔가를 닦을 수 있다. 보관도 배지에 비해 훨씬 쉬운 편 아닌가? 매듭법을 배워 유행시키자. 스카우트처럼. 손수건대도 만드는 것이다. 손수건대에 손수건을 달아서 백팩에... 옛 일본의 족경대처럼. 두껍게 만들면 핀버튼이나 배지 따위를 달 수도 있다. 이건 완전 러브라이버구나. 곡물창고의 굿즈를 만든다면 역시 삼베 손수건이겠다. 이걸 벽에다가 붙여 놓으면... 또 벽인가? 벽이 아주 많이 필요하겠다. 아주 많은 내 몫의 벽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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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마자는 죽은 쥐 한 마리가 제법 멀쩡한 상태로 놓인 것을 봤다. 분명 어디 멀리 있는 건 아니다. 이사야 말이다. 재가 앉을까봐 밥그릇으로 캔을 덮었다. 가릴 것 같진 않지만. 메모들과 함께 타고 있는 것은 의자가 되려다 만 나무토막이다. 연장을 꺼내 준 관리인에게 미안하다. 지금 앉은 의자는 주워 온 것이다. 싣고 온 것. 약간 높다. 다리를 좀 잘라 볼까 하다 그만뒀다. 내가 만들었을 리 없는, 낡고 야무진 의자를 보고서도 관리인은 별말 없이 연장을 받았다. 관리인에겐 그런 세심한지 무심한지 모를 구석이 있다. 혼자서 좀 그런 기분이 들어서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언제 음료수라도 하나 들고 갈 것이다. 짐승도 답례를 아니까. 이럴 때 관리인도 불러 차라도 같이 마시는 건 어떨지? 좋은 생각이다. 아까 관리실에 들렀을 때 찻주전자 같은 걸 본 듯도 하다. 수돗가에서 뜬 물을 끓이면 된다. 허름하게 생기긴 했어도 지하수를 쓴다. 그러면 내 컵을 가지고 다녀야겠다. 양철컵. 매달 수 있게 끈을 달고. 차에 고리를 달아야 할 것이다. 어디에 달까? 차는 창고 건물 옆에 대어져 있다. 덮어 놓은 호루도 관리인이 내어 준 것이다. 그도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며 뭘 싣고 오거나 간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이다. 뭘 싣고 오가는지. 불을 보며 앉아 함께 차를 마시면서. 나무가 들어가선지 타는 냄새가 좋다. 다음엔 땔나무를 좀 해올까? 방금 이사야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다. 요옹... 그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인 줄을 안다. 그쪽으로 간다. 쥐무덤은 소각장에서 울타리 쪽으로 4보 앞이다. 쥐잡이가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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