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길 주인

박스 안에 앉아 있다. 길을 지나는 차량으로부터 도로 요금을 징수하기 위해서다. 말해두지만 나는 요금 징수원이 아니다. 나는 이 길의 주인이다. 이 길은 먼 조상 때부터 집안의 길이었다. 이 길은 할아버지의 길이었다가, 아버지의 길이었다가, 지금은 내 길이다. 먼 조상 중 하나는 둘도 없는 로맨티스트로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다른 조상에게 청혼할 때 자신과 결혼해준다면 그를 위한 길을 사주고 그 길에 그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때 지어진 길의 이름은 더 이상 전하지 않지만 길은 유산으로서 전한다.
명절이지만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박스 안에 앉아 있다. 명절은 나에게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니까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만날 가족도 없다. 더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형제도 없다. 아버지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친인척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려 부모 외에 내 핏줄이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집이 없다. 원래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도 귀찮고, 귀찮게 돌아가도 반겨줄 이도 없어서 그냥 팔아버렸다. 나는 이 박스 안에서 생활한다. 박스 안에서 자다가, 밥을 먹다가, TV를 보며 웃다가, 차를 보며 요금을 징수한다. 이 길을 물려줄 자식이 나에게 없으므로 나는 이 길과 함께 죽을 작정이다. 아니면 영원히 살거나.
이 길 안쪽에 땅이 있긴 하지만 밟아본 적 없다. 저 땅은 주인 없는 맹지(盲地)다. 그 땅을 둘러싼 모든 길은 나의 길인데, 대대로 우리 집안에서 도로 이용 허가증을 내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출입할 수 없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그 땅으로는 풀과 벌레가 무성하게 번식한다. 푸서리를 지나 정중에는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있다. 조사원들조차 그 땅을 밟지 못해 그 나무의 나이도 모른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