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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6일 월요일

로버트

부스의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켜고 앉았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충분히 밝아질 때까지 조명을 켜두어야 했다. 이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이 시간에 불을 켜지 않고 앉아 있다가 일찍 출근하는 연구원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대답하기 귀찮은 질문을 받는 것보다 잠깐의 거부감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불을 항상 켜두기로 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경비원으로서 연구원의 안위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다른 정보를 줄 필요는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난로를 켰다. 난로는 내가 오기 전부터 있던 것으로 잠깐만 켜놔도 금방 뜨거워져 오래 켜 둘 수 없었다. 나였다면 좀 더 유연한 설정을 가진 난로를 샀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여기에 여덟 시간 머무를 것이고 난로는 이따 끄면 된다.
매일 오랜 시간을 작은 부스 안에서 보내다 보면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지게 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매일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오는 산책을 할 때마다 굴뚝들을 살폈다. 어떤 집의 굴뚝이 고장 난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도 그였다. 나는 그와 항상 산책을 함께 했지만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대화에는 대체로 무심했지만 누가 어딜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부스에 앉아 있으면 그가 자주 생각난다. 사람들은 보통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한다. 지각하는 사람이 정문을 통과하는 시간도 거의 일정하다. 테이블 위 전자시계가 12시로 바뀌기 8초 전에 점심 종이 울린다. 의자 뒤에 있는 작은 냉장고의 엔진이 웅웅거리기 시작할 때는 속으로 3분 정도의 짧은 노래를 다 부르면 웅웅거림이 멈춘다. 이런 것들이 부스 안에서 알게 된 사실들이다. 그때 그 마을에 내가 잠시 머무는 이방인이 아니라 정착민으로 남았다면 그처럼 굴뚝이든 뭐든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눈이 오면 걷기 힘들고 미끄러지기 때문에 싫다는 그의 말이 무엇보다 확실한 기호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의 입을 통해 들었다. 그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그와 있는 것을 즐겼지만 그가 좋았던 것인지, 그 이야기들이 좋았던 것인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와 앉아있는 걸 좋아했던 것인지, 그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좋아했던 것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한번 일상적인 흐름에 익숙해지고 나면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에 민감해진다. 연구원의 시설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사람들이나 연구원 내부에서 약속이 있는 사람들의 방문이 종종 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면 그만이다. 정문 밖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조금 더 재미가 있는데, 어제는 점심 때쯤 어떤 사람이 정문을 향해 걸어오다 나랑 눈이 마주치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내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싶어 거울을 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연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보통 작업복이나 정장차림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어 미리 알아채곤 하는데 그 사람은 그것도 아니었다. 무엇이 그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을까? 연구원에 용무가 있다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해 기다려 보고 싶었지만 오후에 다른 경비원과 자리를 교체하는 바람에 그 사람이 되돌아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어제 내가 돌아가는 집이 내가 이방인이었던 그 마을이었다면 그에게 들러 이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 말을 듣기는 할까? 어쩌면 엉뚱한 곳에서 내 말을 끊고 굴뚝 얘기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끊기지 않을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몇 주 전 새벽의 일은 어떤가?
그날은 밤 근무였다. 보통 밤 근무일 때는 순찰을 돌고 나서 숙직실에서 잠을 자는데 그날 같이 숙직실을 쓰는 동료가 코를 심하게 골아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달아나는 걸 느꼈고 도서관 반납기한이 내일까지인 책이 부스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 웃옷을 입고 나가자 새벽공기가 차가웠다. 부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지 않고 서랍에 있는 북라이트를 꺼낸 후 난로를 켰다. 책갈피 대신 사용하는 영수증이 끼워진 페이지를 찾아 책을 펼쳤을 때였다. 고요한 시야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연구원 건물과 직각으로 맞닿아 있는 기숙사 입구에서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그는 손전등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가 향하는 곳은 연구원 맞은편에 있는 작은 철문이었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높지 않아 한 걸음에 충분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는 문을 넘었다. 문을 넘어가면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있었다. 그는 오솔길을 걸어 숲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지만 이내 거리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시 고민을 했다. 그의 뒤를 쫓아가 볼 것인가? 숲은 크지 않았고 평소에 산책로로 이용되는 곳이었다. 밤이 되어 작은 짐승이 나올 수 있지만 크게 위험한 동물이 있다고 들은 적은 없었고 불안한 마음이 약간 가라앉았다. 나처럼 잠이 오지 않아 밤 산책을 나왔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숲을 바라보자 먼 숲의 경계가 검은 하늘과 맞닿아 흐려져 있었고, 그가 숲의 입구로 되돌아오는 길을 걷고 있을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해 이쪽과 멀어지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밤중에 기숙사에서 나와 숲으로 들어간 사람? 나는 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있었다 해도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들고 있던 책은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동료를 깨워 의논해 볼까? 하지만 만약 단순한 산책이라면 괜한 소동을 피우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확인해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며 그가 얼른 다시 나오길 바랐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그가 숲에 들어가고 한 시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옷을 껴입고 손전등을 찾아 쥐었다. 그때, 한껏 민감해진 시야 안에 그가 등장했다. 그가 숲에서 나오고 있었다. 움직이는 속도는 들어갈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전등을 손에 쥐고 일어나던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가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갈 때까지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 이야기를 굴뚝 얘기에 대한 보답으로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장면을 쭉 상상해보니, 굴뚝이 고장 난 것보다 인상 깊은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밤 산책을 나왔고 나는 그의 의도를 알지 못해 불안했다. 그뿐이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 그가 밤의 건물을 나와 숲으로 가는 것을 보았지만 그의 산책을 처음 발견한 날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가 숲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 예상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자주 고개를 들어 숲의 입구를 살펴보게 되었을 뿐이다. 그때 그 산책은 내가 발견한 첫 산책일 뿐 그의 첫 산책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는 일부러 모두가 잠든 시간을 택해 나왔을까? 나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겪고 있었을까? 숲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사십 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잠시 어디 앉아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뜻 생각하기에 재미가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굴뚝 이야기보다는 시시했다. 굴뚝이 고장 났던 것은 완벽한 사실이었다. 그는 그것을 그의 눈으로 보았다. 우리는 그의 발견 후에야 굴뚝의 고장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의 완벽함을 나는 아무래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제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던 그 사람도 어쩌면 이미 여러 번 이곳을 지났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와 내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직접 보거나 겪지 않은 일들로 내가 어떤 자신을 가질 수 있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 사실을 시계의 숫자로 확인했다. 남은 시간에 맞춰 남은 업무의 우선순위를 확인하고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할 일을 내일로 넘기기로 했다. 시간이 되자 동료와 교대하고 퇴근을 했다.



Remembering Nov. 2014 ~ Dec 2015

2019년 1월 4일 금요일

우리 아이 창의력 교육 제6장


H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오후부터 시작과 종료의 시기를 알 수 없는 사건의 후일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상상 속에서 사건은 이미 시작됐거나 영원히 시작되지 않기도 했다. 어떤 경우를 고려하더라도 지금쯤은 분명히, 라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시간을 지날 때, J와 잠깐 마주치게 되어 본격적인 대화를 시도해볼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H에게는 J에게 전할 특정한 화제가 있었고 그건 둘이 공유하던 오랜 고민의 결말이었기 때문에 말을 걸어 이야기를 시작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적절한 타이밍이었고 내용도 충분했다. 대화에 임하는 어투도 쉽게 상상되었다. 좋아하는 J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만족감을 느낄 터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던 건, 오후부터 내내 계속된,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상상이 끊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한 번 끊긴 후 보류된 고통과 함께 다시 시작되는 상상은 흐름이 끊기지 않은 경우보다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그는 흐름을 끊을 만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흐름을 효과적으로 끊을 수 있는 타인과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 대신 H는 혼자, 작업 중이던 일에 집중하여 성과를 내려고 노력했다. 상상에서 적당히 빠져나오기. 빠져나온 만큼의 몸으로 성과를 내어 방어벽을 쌓기. 고통의 순간에도 쌓아 올린 방어벽으로 이후의 고통에 대비하기. 공포에 대비해야 한다는 공포를 피할 수 없는 사람은 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투사가 된다. 익숙하게 싸우면서, 사건에 선행되고 따라오는 모든 감정을 예측하면서, 소식을 접한 당시 충격의 강도 이상으로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장소와, 참여자와, 현장에 구비된 물체와, 여러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에 대한 상상이 멈추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 이상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이 과정에 막힘이 없었던 어떤 날들에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진맥진한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가끔 꿈에서는 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곳에서, 상상도 못했던 장면들이 H의 눈앞에 펼쳐졌다.

2018년 10월 1일 월요일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두 문장 전의 문장이 자꾸 사라진다.

성직자는 단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며칠 전의 종이를 내려다 본다. 그는 모든 걸 정확하게 기억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을 적고 있던 당시를 떠올릴수록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듣고 이해한 다음 온전히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리며 알아볼 수 없는 문자를 만들어내면서, 놓친 말들이 알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가닿도록 기도를 했나?

낯선 차를 타고 멀리 다녀온 밤에는 낮의 일을 그저께쯤의 일로 착각하는 것처럼. 한 문장 전 문장의 선명함에 비하면 두 문장 전은 아득하다. 기억을 쭉 당겨보자, 이번에는 한 문장 전의 문장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온전하게 살려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도 가질 수 없었기에 선택을 해야 했다.

(어떤 말이 듣고 싶으세요. 되도록 짧게, 말해주세요.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는 말아주세요. 팔을 한 번 반쯤 뻗는 거리에 사탕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쪽을 참고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름이 오고 있나요?)

이것은 몇 문장 전의 일일까. 희미해지는 두 문장 전의 문장보다 오래된 기억은 그보다 다소 선명하게, 그러나 언어를 잃어버린 채로 돌아왔다. 언어를 잃어버린 기억들의 메시지는 짐작 말고는 불가능해서 그걸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다. 도둑이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이름을 잊어버렸다.

2018년 6월 25일 월요일

콩 이야기


콩은 시간을 두고 충분히 볶아야 했다. 먼저 살짝 삶은 다음 볶기 시작하면 시간이 절약되지만 그러면 맛이 덜하지.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날콩을 충분히 볶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덜 볶아진 콩을 식탁에 차려낸 것은, 불앞에 오래 서있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스승의 약한 턱 때문이었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한 스승의 입안에서 덜 익은 콩이 우드득거렸다. 스승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선 다시 시선을 접시로 돌리고 먹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접시를 다 비우지는 못한 채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이 콩을 왜 이렇게 덜 익혔냐고 물어보면 대답해 줄 변명을 콩이 거의 날 것일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질문 없는 대답은 존재할 수 없었고 찝찝한 마음으로 식탁을 치웠다. 어쨌든 치우는 것도 내 일이었다.
밖으로 나간 스승이 정원사에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고의적으로 덜 익힌 콩을 내놓았다는 것인데, 순박한 정원사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어린애가 미숙해서 잘못 익힌 걸 가지고 그러냐며 스승을 타박했다. 스승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이게 먹힐 만한 투덜거림인지 확신이 없었을 스승을 생각하자 측은함과 동지애가 밀려왔지만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동지애 정도는 남겨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동료와의 사이가 꼭 좋을 필요는 없지. 서로를 완벽에 가깝게 이해한다는 점에서 서로 이외에 적합한 동료를 찾기 어려울 우리였다. 변명을 생각해내야 했던 나의 마음도 스승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겠지. 그래도 제대로 식사를 마치지 못한 것, 혹은 질문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 밖으로 나가 투덜거렸을 것이다. 너무 멀리 나가지는 않고 내 귀에는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우리가 같이 사랑하는 정원사에게.
나이 든 사람의 턱이 덜 익힌 콩을 얼마나 더 견뎌낼 수 있을지 아무런 정보도 확신도 없었다. 가끔은 잘 익힌 콩을 내놓아야 그동안의 실수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그 주기가 너무 빨리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접시를 말끔히 비워내는 스승의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했다. 사실 모든 행동과 말이 꼴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콩을 볶고 식탁을 치워야 했다. 수행자의 감정을 돌보지 않는 의무 때문에 가끔 짜증을 내며 울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았기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욕을 하거나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나는 순박한 정원사를 두고 떠날 수 없었고 그건 스승도 그랬다. 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원사를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2018년 5월 14일 월요일

침묵을 위한 시간


과거의 일기 중, 남아있는 인상에 비해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문장이 있었다. 두 달 전에 공연을 하고 돌아와 쓴 일기의 일부였고, 무대 위에서의 어떤 순간을 ‘기쁨도 슬픔도 아닌 제로가 최대치로 확장된 감각’이라고 적어두었다. 하지만 기쁨이나 슬픔은 감정에 속하며 감각과는 다르지 않나. ‘기쁨도 슬픔도’, ‘확장된 감각’ 둘 중 하나는 나오는 대로 적다 보니 실수한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실수했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다시 잘 생각해보자. 당시에 약간의 기쁨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니, 기쁨은 나중에 왔던 것 같다. 제로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쁨과 슬픔을 대조되는 단어로 적었다는 건 감각에 감정이 딸려온다는 것을, 혹은 반대의 경우도 의심 없이 전제했다는 말이다. 이 경우엔 어떠한 감각 후에 그로 인한 감정이 왔다고 생각하며 적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건 어떤 감각이었나.
소리를 담은 공기가 머리의 중앙으로부터 외부를 향해 먼지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감각에서도 감정에서도 평행에서도 뷸균형에서도 제로에 가까웠다. 형체 없는 것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 중 한 가닥이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고, 그것은 또한 전부가 빠져나가는 소리와도 동일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소리. 나는 일전의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나만이 진입할 수 있는 가청의 영역에서 그 안에서만 허용되는 기준으로 노래를 고칠 때의 외로움이 있다 그걸 사랑함’
이 문장에 사용된 모든 단어들의 오차율은 제로에 가깝다. 당시 무대에서의 감각은 이 문장과 가장 가깝게 닿아 있다고 느낀다. 그걸 감정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불안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정적의 정중앙에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 온 몸은 물론이고 피부가 공기를 긁어내는 감각 또한 최고치에 오른다. 쌓인 감각들의 무게 때문에 꼼짝할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 때, 온 힘을 다해서 손가락을 움직인다. 숨을 들이쉰다. 이 과정에서 감각을 일으켜 낸 것, 그리고 감각의 이후 내내 머물러 있는 것은 불안함이다. 불안함이 있었다. 모든 걸 딛고 제로에 닿았을 때, 그 순간에 닿았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시공에서 기쁨과 슬픔과 불안함과, 온 몸의 감각, 고개를 움직일 때 밀려오던 공기의 저항까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소리가 있었다.
여전히 제로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제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로가 아닌 모든 세상을 끌고 와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로를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이 왔고, 여기에 있었고, 제로를 위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왔다. 그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 세상의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바라는 것도 같다. 그러나 동시에, 단 하나의 소리는 그 순간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이기도 했다.

*제목 인용 : 침묵을 위한 시간 」 패트릭 리 퍼머

2018년 4월 25일 수요일

루돌프 슈타이너

한참 후에 영화관을 나온 아이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2차원으로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세상이 실제로 평면인 것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움직이는 몸이 자꾸 면으로부터 입체로 눈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무게감에 멀미가 난 아이는 횡단보도에 멈춰 설 때마다 눈을 감았다가 주위 인기척의 움직임이 느껴지면 눈을 떴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들만 밀려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 또한 눈알에 와 부딪히고 있었으며, 과민해진 눈 때문에 그들이 입체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움직임으로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앉기로 결정했다. 결정을 내린 아이는 언제 멈춰야 할지 몰라 계속 걸었다. 세상이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감았다가 뜨자, 아이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괴물의 얼굴 모양으로 튀어나온 벽처럼 느껴지던 울렁임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멈춰 설 이유가 없어진 아이는 계속해서 걸었다.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2018년 4월 18일 수요일

기억해야 할 사항들

1. 필명은 ‘조’로 한다.

2. 연습과 훈련을 위한 글을 올린다.

3. 새 글은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여 올린다. 다만 한 달에 두 번 이하의 빈도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한다.

4. 파일의 저장 위치로는 <바탕화면-기타자료(본명의 이니셜)-delrow-sec>의 경로로 들어갈 수 있다. 같은 폴더에 들어 있는 카드 납부내역도 자주 확인할 것.

5. 띄어쓰기 검사를 할 것.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