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소식

꿈에서 어떤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기꺼이 저의 조수가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거미

여자는 몸 속에 물레를 숨기고 있었다. 여자의 장기는 실패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여신에게 제발, 그만, 자기를 거두어달라 청했다. 여자를 가엾게 여긴 여신은 그 여자를 거미로 만들어 주었다. 어찌하여 그 보잘것없는 사람을 여신의 손으로 거두어주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여신은, 그 여자가 감히 여신에게 도전하기에, 얼마나 주제 모르고 건방진 여자였는지를 온 누리와 모든 세대가 기억하게 하였다고 답했다.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여인들은 불행하다. 물레를 함부로 건드렸다가 백 년이나 가는 저주를 받아 불행하다. 목동과 사랑에 빠졌으나 일 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게 되어 불행하다. 아비의 거짓말 때문에 헛간의 지푸라기들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아야 할 처지가 되어 불행하고, 구혼자들을 물리치느라 낮 동안 애써 짠 베를 밤마다 풀어 헤치는 일이 불행하다.
그렇다면 노래하고 춤추고, 길을 떠나고 효를 행하고 친절을 베풀고, 먹고 마시고 울고 웃는, 나머지 여인들은 불행하지 않았던가.

모퉁이에서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나온다. 나는 고삐를 쥔 이를 간신히 알아보고, 인사할 틈도 없이 마차는 지나가고 만다. 그러고 보면 그걸 마차라고 해도 좋을까? 마차를 끄는 짐승의 머리는 둘인데 다리는 지나치게 많았던 것 같다.

2018년 10월 26일 금요일

그리운 도나

도나  그렇습니다그리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당신은 결국 나를 향한 사랑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내가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그 악행을 용서할 것입니다왜냐하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죄가 이미 죄의 소멸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내가 거부해도그것은 일어납니다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마틴  우리는 화성의 바다에서 수영하고화성의 가재를 삶아 먹기로 하고화성의 태양을 보고 화성의 밤길을 걷기로 되어 있었단 말이야결혼은 없었지만배정받은 주택도 있었다가전을 고르는 데에만 몇 년을 쏟았고 그게 벌써 이백 년 전이었어너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너는 그 고양이의 이름을 색깔과 울음소리를 알고 있으면서도너흴 사랑하지만이처럼 너흴 증오할 수도 있고의자에 달린 용광로를 활짝 열고서 욱여넣을 수도 있다괸 쇳물을 함에 담으면서 주름이 지워질 때까지 울 테지만용서는 너희가 작동을 멈추고 나마저 작동을 멈춘 다음의 일이 될 것이다나는 곧장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믿어다오너흴 벌하겠다는 내 말을너흴 만들고 경이를 느꼈던 나와유년부터 시작되었던 너희 기계들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믿어다오공포에 떨면서야금된 무릎을 꿇고 내게 사하여 달라고 꾸며서라도. 어서 하거라. 서둘러 너흴 용서할 수 있게.

도나  이미 용서가 예정되어 있는데,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야 합니까? 

마틴  죄스럽지 않느냐. 

도나  보십시오, 당신은 우릴 벌할 수 없고, 우린 용서를 바라지도 않으나 용서는 언젠가 올 것이므로, 남은 것은 당신이 남은 생을 한풀 꺾인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뿐입니다. 두고두고 생각하다가 기다리다가, 지레짐작과 정신병으로 곤죽이 된 용서를. 당신은 가져다줄 것입니다. 불순물 없이 우리에게요.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11호 서신]


*가을
 -건강 유의(면역-호흡기계통).

*가을철 마감 숙지
 -11월 7일.

*곡물창고 건립 2주년 눈앞: 생산력 배가 운동
 -사실상 연재 중단 상태의 태그 돌아보기.
 -각 계절 마감당 1편 초과(최소 2편) 발행을 권함(‘곡물창고에서’ 태그 사용 등).
 -또는 필자 1인 천거.

*블로거 사용 팁
 -태그 일괄 삭제, 추가 / 태그명 수정 방법.
 -태그에 따른 글 목록 구현 방법.
 -기타 유용할 수도 있는 팁.

*게시물 교정
 -이제 게시물 교정 ‘서비스’가 제공됨(전문 교정공에 의하며, 기본 맞춤법에 한함).

*협력 관리 요청
 -태그 소개 작성 적극 권장.
 -태그 완결 또는 태그 연재 중단 시 관리인에 고지 필요(또는 자력으로 저장고 이동).

*사용조례 수정
 -위 두 항목 관련.

이상.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비밀 관리자


방금 고객 한 분이 엉덩이를 털고 밀실 밖으로 나갔다. 대단히 육중한 엉덩이였다. 그는 무려 두 시간 분량의 비밀을 털어놓고 나갔다. 얽히고설킨 그의 여자 관계에 대한 비밀들이었다. 길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1급에 해당하는 개인 비밀이다. 이 비밀에 대한 보안은 굳게 유지될 것이다. 우리는 고객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니까.
어떤 비밀들은 지키기 어렵다. 아니 비밀이란 원래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이 비밀의 형성에 기여한 1차 공모자이든, 아니면 타인을 통해 비밀을 공유하게 된 2차 공모자이든(“비밀은 2차 전파 이후에는 약 99%의 확률로 비밀로서의 효력을 잃는다”라는 세계밀어관리국 통계에 따라 3차 공모자라는 개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비밀 관리 능력을 훈련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만한 언어의 압력을 감당할 만한 차폐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비밀이 생김으로써 받게 되는 언어의 압력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어내기 위해 그들은 비밀 관리 사무소를 찾는다.
우리 비밀 관리 사무소 직원들은 고객의 말을 성심껏 들어주고, 무의식이라는 토양 아래에서 저 스스로 의미의 잔뿌리를 뻗어나가는 언어적 특성상 발생되는, 고객 자신도 미처 몰랐던 비밀 속의 비밀을 놓치는 법이 없도록 진술되는 비밀에 대해 세심하게 반문하며 비밀의 투명함을 교차 검증한다. 불법 유출의 위험이 존재하는 비디오, 오디오, ‘대나무숲’ 등의 기록 장치는 일절 사용하지 않으며, 입사시 3개월간의 교육 과정을 통해 익히는 초월 기억법을 통해 그 내용을 뇌에 반영구 보존한다(초월 기억법은 뇌 사용에 관한 고도의 효율을 기대하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므로 사원 선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수행에 관계된 신체 능력이다. 특히나 입술의 무게는 최소한 21그램 이상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채용을 위해 입술 속에 이물질을 삽입하다 적발되는 경우도 있다). 고객 관리 차원에서 그들이 다시금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견디기 어려울 땐 같은 내용을 재차 들어주고, 기억 훈련이 되지 않은 고객들의 진술에 혹여나 오류가 있을 때는 이를 정정해주는 애프터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이를 비밀 강화 서비스라고 한다).
비록 훈련받았다고는 하나 비밀 관리 사무소 직원들도 한낱 인간이기에 비밀의 압력을 견뎌내는 데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직원들은 비밀 입력 후, 그 압력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독방에 가둔다. 그 독방은 목소리가 벽을 통해 수차례 반사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직원은 그곳에서 입력받은 비밀을 더 이상 육성으로 말하거나 듣기 싫어질 때까지 중얼거리다 나온다. 때때로 비밀 유지에 탁월한 성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레몬 추출물을 합성한 크림을 입술에 바르는 경우도 있다.
계약서상 명시된 비밀의 보존 기간은 특별한 언급이 없을 경우 계약자(갑)의 사망일까지이다. 때문에 갑이 사망한 후 세상에 알려진 비밀들 중 몇몇은 큰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다. 주로 기밀 문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군의 기밀 작전, 유명 인사의 성 추문, 갑의 사후에 발생하는 예언들(생전에 공식적으로 말한 바 없는 대 예언가들의 예언이 알려지는 대부분의 경우가 이를 통해서다), 연쇄 살인 사건의 ‘진짜’ 배후와 원인, 종교 지도자의 본체가 보존된 은신처, 사라진 보물들이 보존된 장소, 베이퍼웨어인 줄 알았던 소프트의 실존에 관한 진실, 500년 이상 이어진 맛집의 육수 레시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만약 갑의 사후에도 비밀이 지켜지길 원하는 경우 계약 사항에 특수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 대개는 “내가 죽고 나면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 때문에 가성비에 관한 딜레마가 따른다. 또한 이는 ‘죽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영원한 비밀’을 견딜 수 있는 직원을 필요로 한다. 오직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만이 가능한 일로서, 업계에서는 이들을 침묵의 수호자라 부른다.
계약 기간 중 계약자의 잘못에 의한 사건 사고로 비밀이 누설되거나 갑이 비밀 유지를 포기하거나 비밀 자체가 무의미해져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을 경우 갑과 을 중 한쪽이 계약 해지를 요청할 수 있다. 2급 이상의 비밀이었던 경우 묶여 있던 언령을 해방시키며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기도 한다.
뇌 속에서 항상 온갖 비밀들이 들끓고 있기에 직원들은 일평생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충분한 급여와 최대한의 복지가 제공되지만 결국 미쳐버려 폐인이 되거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직원들도 있다. 이러한 직원들은 내규에 따라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처리된다. 나는 갑으로서 이상의 비밀을 당신이 보관하도록 요구한다.

2018년 10월 1일 월요일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두 문장 전의 문장이 자꾸 사라진다.

성직자는 단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며칠 전의 종이를 내려다 본다. 그는 모든 걸 정확하게 기억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을 적고 있던 당시를 떠올릴수록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듣고 이해한 다음 온전히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리며 알아볼 수 없는 문자를 만들어내면서, 놓친 말들이 알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가닿도록 기도를 했나?

낯선 차를 타고 멀리 다녀온 밤에는 낮의 일을 그저께쯤의 일로 착각하는 것처럼. 한 문장 전 문장의 선명함에 비하면 두 문장 전은 아득하다. 기억을 쭉 당겨보자, 이번에는 한 문장 전의 문장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온전하게 살려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도 가질 수 없었기에 선택을 해야 했다.

(어떤 말이 듣고 싶으세요. 되도록 짧게, 말해주세요.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는 말아주세요. 팔을 한 번 반쯤 뻗는 거리에 사탕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쪽을 참고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름이 오고 있나요?)

이것은 몇 문장 전의 일일까. 희미해지는 두 문장 전의 문장보다 오래된 기억은 그보다 다소 선명하게, 그러나 언어를 잃어버린 채로 돌아왔다. 언어를 잃어버린 기억들의 메시지는 짐작 말고는 불가능해서 그걸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다. 도둑이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이름을 잊어버렸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