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요일

교정의 요정

교정의 요정이 나타나 내일까지 이 원고를 다 교정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교정의 요정은 그 반대의 일을 합니다. 몇 명의 사람이 매달려 아무리 눈이 빠져라 교정을 보더라도 인쇄된 책에 반드시 하나 이상의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교정의 요정의 소행입니다. 맞춤법을 지적하는 글의 어디 한 군데는 반드시 틀리기 마련이라는 사실, 그로부터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또한 짓궂기 짝이 없는 교정의 요정의 소행입니다. 교정의 요정은 문자와 비문자 사이 틈새 차원에 살고 있습니다. 그 차원에 얽혀 있는 것은 인쇄소, 인쇄기, 출판사 사무실, 교정공과 디자이너와 저자의 컴퓨터 내부, 광케이블, 전화선, 수많은 사람들의 뇌신경, 그리고 읽힘이 일어나는 시간과 일어나지 않는 시간, 전 세계 언어문화의 흐름... 글이 책으로 되기 위하여 추상적으로 물리적으로 거쳐 지나가는 모든 것입니다. 교정의 요정은 양지바른 데서 다리를 꼬고 드러누워 있다가 내키는 때가 오면 손깍지를 쭉 밀고 활동에 나섭니다. 한 글자를 슬쩍 바꾸고, 자음이나 모음 한 개를 슬쩍 돌려놓고, 한 칸을 지우고, 두 칸을 넣고, 선과 숫자를 밀고 당깁니다. 그냥 순전히 장난으로요. 어쩌면 요정에게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교정의 요정의 개입은 불가항력입니다. 언제 개입하는지 알 수 없고 어떻게 개입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맘대롭니다. 하나의 거역할 수 없는 신비이지요. 따라서 완벽한 책 같은 것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을 적어도 우리 교정공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틀릴 수 있느냐, 도대체 왜 아무도 못 본 거냐, 이거를 도대체 왜 틀렸냐고 길길이 날뛰는 이가 있다면 교정의 요정이 그랬다고,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속삭여 주십시오.

2024년 4월 20일 토요일

힘 같은 것

여자는 스스로 피부를 벗기고
피부를 벗겨버린 여자가 된다
이것이 그의 결정
여기까지가 그의 결정
피부를 동그랗게 벗긴 것도 아닌데
그냥 동그란 환부 위를
뒹구는 세모난 아픔
뭐라 말할 수 없는 모양 하루
찬장의 약통을 털어서
도움이 될 만한 연고를 바른다
대부분 이삼 년씩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
이 물질을 발라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네모나게 닫힌 차마
바라는 바대로 이루어질 순 없겠지요
그는 인생이 동그랗게
아주 동그랗게 말려 있다고 느낀다
도르르 말린 인생의 양 끝을
손으로 잡아당긴다
한껏 늘어난 인생이
끊어질 때까지
끊어져도 과연
계속될 때까지
여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엔 영원한 생활이
여자의 친구입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게 만든다
모든 좋은 이야기는
여기에 반드시
죽음에서 일어난다

화가였던 金 같은 것

문을 그리기 위해 벽을 그렸다
틈이 생긴 창문을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창틀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리기 위해 땅과 하늘을 그렸다
아무도 없는 거리와 골목 풍경을 그렸는데
거길 지나갔을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다 보였다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또는 그는
24시간 영업하던 가게의
금일 휴업 안내문을 크게 그렸다
그런 건 볼수록 가깝게 느껴진다
가까이 가서 쓰다듬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회화적인 이차원 평면…
무심코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은 마음이
조만간 이루어질 듯이 다가온다
그는 성실한 은행원이었지만
자기가 진짜로 뭘 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은둔 화가였다고 한다
그런 건 아무런 문구도 적히지 않은 채
대형 빌딩의 벽면에 걸려 있는
완전 순백의 현수막 같다
순정 순수 순문학 같은 거
세상에 없어도 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표현
하고 있는 거

2024년 4월 15일 월요일

나의 교정 노하우들

나의 실전 교정 노하우들을 대공개한다.

  • 갈지자교정
  • 일필휘지로 썼니? 나도 갈지자로 본다. Z자로 휘저으면서 한 번의 내려감으로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본다.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2회 수행하여 문장의 뜻까지 보는 ZZ교정으로 보충.

  • 5% 샘플링교정
  • 임의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틀린 것이 있는지 찬찬히 본다. 틀린 것이 있다면 책 전체에서 해당 오류 패턴만 찾아 수정한다. 모두 수정하였으면 다시 임의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전체 페이지수에 0.05를 곱한 수의 임의의 페이지를 확인.

  • 카체이싱교정
  • 막히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교정. ‘일단 본다’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전복폭발엔딩)

  • 통일선봉대
  • 친구들아 그날은 반드시 온다! 소원은 통일, 오직 통일 외길로... 문자와 문자 사이, 벽과 벽, 선과 면, 너와 나를 지나... 차원을 건너 스타일을 통일하는 데 주력한다. 오직 숫자와 모양만 보며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

  • 해킹교정
  • 음모론에 맞서는 하나의 방법: 음모론의 논리 안에서 음모론을 해킹(예: 백신 접종 후 50분 내로 150cc의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인간 기지국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어순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사 수정·문장부호 추가 등 최소한도의 몰래 교정. 자기가 쓴 거 고치는 데 질색하는 저자의 엉망 문장을 어떻게든 ‘규범상으로는’ 맞게 만든다.

  • 메소드교정
  • 폭주하는 교정욕망을 평상시에도 풀어놓는(unleash)다. 업무 중이건 아니건 교정 ON 상태로 만사를 바라봄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어디로든 용암이 흐르듯 무엇이건 교정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모든 것이 마뜩잖다!’

  • 이빨부수기
  • 이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교정 & 쉴 새 없는 당분 공급의 투트랙 접근. 악으로 깡으로 퇴근까지 닥치는 대로 고치면서 버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죽을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탕비실 운영 관리에 대한 강력한 민주적 개입을 위한 사내 조직화에도 매진.

  • 웃는얼굴교정
  • 웃는 얼굴을 만든 채로 교정한다(거울을 보면서 사전 연습). 그 어떤 쓰레기 같은 교정지 앞에서도 웃는 얼굴로 뇌를 속임으로써, 다른 건 몰라도 정신위생 하나만큼은 확실히 챙긴다. 꼬리로 몸통을 흔드는 비책. 개인적으로 가장 애용하는 방법으로서, 기본 교정 기법으로 적극 추천.

  • 킬러교정
  • 다들 살인을 좋아한다. 요즘 세상에 재밌으려면 무조건 살인이 들어가야 한다. 자신을 킬러라 생각하며 오류를 찾아내 냉혹하게 교정, 노동으로부터 재미를 찾는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으므로 사적인 감정을 버리는 것이 중요. 피할 수 없음을 즐기는 자세. 망나니교정, 살인마교정, 전쟁영웅교정 등으로 응용 가능.

  • 방통요법
  • 나는 뇌양현의 방통이고, 지난 100일 동안 술만 마셨으며,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장비가 지금 칼을 들고 와 있다. 한나절 안에 어떻게든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별거 아니다. 나는 백리지재가 아니다... 어차피 이게 맞는지 틀린지 알아차릴 사람도 없고... ‘이 세상에 교정공은 너와 나뿐.’

  • 약물교정
  • 진통제 한 알 먹고 교정. 미신이나 헛된 기대, 머리에 힘주기 등이 아닌 의학적으로 검증된 고통 경감 효과를 노린다. 약물은 하나의 분자-기계인데 안경을 쓰는 것과 뭐가 다른가? 못 말리는 교정사이보그 되기. 해당 기법 사용 중 금주할 것. 과용에 주의.

  • 배짱교정
  • 내가 교정 개판으로 봤는데 어쩔?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어? 어?

  • 인권교정
  • ‘그들도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이다. 개들도 거리에 똥을 누면 주인이 주워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권리 옹호의 교정 정신 최대화. 하지만 저도 인간인데요...?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언뜻 오류처럼 보이는 것들도 더 깊은 뜻이 숨겨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聖人교정 단계로 심화.

  • 심안교정
  • 눈을 감고 이마 한가운데로 정신을 집중. 시간의 흐름에 몸을 기대고 마음의 눈으로 교정지를 본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응원이 들릴 때까지. ‘일어서라 교정공... 깨어나라 교정공...’ 거대한 활력이 솟아오르는 깨달음의 순간이 올 때까지... 나를 해고해 줄 때까지...

(당신만의 교정 노하우를 친구와 공유하세요!)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적 같은 것

꿈에서 손에 피를 묻힌다
알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누군가를 찾아가는데
내가 죽인 사람도 내가 찾아간 사람도 다
모르는 사람이다
현장의 사람은 나뿐, 그럼 내가 범인인가?
너는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끔찍한 꿈도 나를 흔들진 못하네,
이것이 나의 인상이다
아침에 받은 월급 명세서처럼
저녁엔 찢어버릴 수 있는…
대신 절대로 찢어지지 않는 작업복을 배급받고 싶다
넉넉한 주머니가 있으면 더 좋겠지?
일터의 넝쿨 식물이 가지 하나를 집요하게 세운다
해가 드는 쪽으로 화분을 회전시킨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그보다 자주,
새벽에 잠에서 깨면 낮의 일들이 헛기침 중이다
뒷짐을 지고 베개 밑에 도열해 있다
돌아누우면 등 뒤에서 웅성거리는 것들
어떤 원예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실내에도 풍수가 있어요 넝쿨 식물 같은,
어딘가 꼬인 것을 집 안에 들이면 좋지 않아요
내 생각은 다르다
동시대의 너도 잘 알겠지만, 그것은
이길 생각이 없는데 질 생각도 없는 겨루기다
식물을 지키는 건
작업복에 대한 소망을 좀 더
진실하게 만드는 생활…
아무도 나를 베어가지 못한다
베어간다면 너는 사람이겠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꿈에서나 보았다
꿈은 세계 속에서 펼쳐졌다

2024년 4월 10일 수요일

초월일기 14

 


오랜만에 곡물창고에 오다 


온 이유는


목적 없이 그리고 대가 없이 쓰는 글쓰기가 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대가 없이 목적 없이 쓰는 글이 꼭 좋은 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쓸 때 가장 재미있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맞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재미는 개그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요즘 기획적인 측면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고 내가 하는 발화들이 그냥 날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해야 타격률이 높을까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자유로운 글쓰기와 아무 대가 없어도 할 수 있는 말이 귀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난 엄청난 수다쟁이라 그냥 종알종알 떠들고 싶은 게 아닐까 ?

되게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자체로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블로그가 내게 귀한 공간이었던 것도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그곳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엔 또 안 그러지만


생존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생존에만 너무 몰두하면

생존하는 것에.... 오히려 의미를 잃기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도 같은 것이고 


오늘은 총선이 있었다 그래서 블로그에 정치이야기를 솰라솰라 썼다 내가 아무 말이나 할 때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 내가 아무 말이나 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고 나는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데 아무 말이나 해도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면 참 좋을 텐데 어쩌면 난 그냥


널 정말 좋아햬~~ 너도 날 좋아하렴


이런 이야기나 주구장창 하고 싶은 게 아닐까 모든 이야기는 다 이 이야기의 변용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 했을 때 


너의 망상에서 벗어나~~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더욱

어쩌라고

싶은 것임 


2024년 4월 1일 월요일

24년 3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99,994원 (0원 + 299,595원 + 418원)

2024년 3월 30일 토요일

건물과 구조

 

건물은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다. 건물 한가운데 홀이 있고, 홀이 지붕까지 향하고, 지붕은 유리 같은 , 비닐하우스에 쓰이는 비닐 같은 걸로 덮여있다. 홀을 둘러싸고 방들이 있다. 방들의 창문은 쪽으로 있다. 그래서 홀에서 나는 모든 소리는 공간에 울려 퍼지면서, 방으로 들어온다. 창문을 닫았는데도 홀에서 나는 모든 대화 소리가 들린다. 홀에서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단체로 듯하고, 단체가 아니면 사람이 같이 듯하다. 나는 왠지 주인에게 속은 듯한 기분으로, 그가 나에게 어딘가를 추천해 주고, 그곳에 갔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돌아왔는데, 왜냐하면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니 다른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고, 나는 배가 아프다고 해서 아침을 먹고 지금까지, 저녁까지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에 앉아서, 사람들이 식사하면서 하는 소리, 주인이 그들에게 아첨하는 소리(나에게는 그렇게 들린다) 듣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만약 프랑스 사람들이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프랑스어로 말한다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왜냐하면 자신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로 말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들의 백인성, 하지만 그건 사실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백인이 되고 싶어 하는지, 피부가 하얀 것이 백인이 아니다, 그들의 백인성을 닮고 그들처럼 되려고 하고 그들처럼 말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백인성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백인성, 너무 당연한 듯이 자신의 식민지였던 곳에 가서 이곳은 저렴하구나 하면서 프랑스어를 하면서 프랑스에서 하듯이 바게트를 먹고, 왜냐하면 자신들의 식민지였으니까, 그곳에도 내가 매일 먹는 바게트가 있겠지, 그곳에도 내가 좋아하는 와인이 있겠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는, 너희들의 입맛에 맞춰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모로코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고, 나는 모로코에 가서 자랑스러운 모국의 언어를 것이며, 바게트를 먹을 것이고 저녁에는 와인을 마실 것이며,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것이며, 모로코 사람의 농담에 재미있는 사람이군 하며 웃을 것이며, 그를 친절하다고 생각할 것이며, 좋은 리뷰를 남길 것이며, 모든 것이 당연하게 생각된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2024년 3월 26일 화요일

수발자본주의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는 뜻하지 않은 원고청탁을 받고 쓴 것이었다. 매호 하나의 주제를 정해 다양한 필자들, 주로는 젊은 연구자들로부터 원고를 받는 잡지였다. 그 호의 주제는 ‘대학’이었다. 편집자님은 내가 블로그에다 써 올린 어떤 부주의한 글을 재밌게 읽으신 모양이었다. 교정공으로서 교수들의 한심스런 원고에 대해 한탄하며 쓴 얘기를... 잡지에 나 같은 사람의 잡문은 격에 맞지 않는 거 아닌가도 싶고, 노동 외 뭔가 원고를 써야 한다는 것이 또 다른 괴롬이기도 하고... 그러나 편집자님께도 나름의 공감과 결단이 있으셨겠거니... 나 자신의 부주의함에 대한 책임으로, 한편으로는 출판산업의 가려진 하청노동자로서 우리 웬수 같은 교수님들에 대해 성토할 공적인 기회가 왔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유수의 출판사로부터 지급되는 고료를 빨아먹을 기회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일념으로, 꾸역꾸역 썼다. 썼는데, 쓴다는 일이 늘 그렇지만 아무리 뭘 써도 불만족스럽기가 짝이 없고, 왜 더 낫게 쓰지 못했는지 후회가 남고, 뭐가 정리 정돈이 되기는커녕 내면 낼수록 더 내고 싶은 화만이, 더 쓰지 못한 아쉬움만이 남는 것이다. 나는 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다 하지 못한 얘기가 뭔가?

내가 못다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지금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본다. 내 친구들은 지금 Y랜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거기 얘기는 잊을 만하면 나온다. 웃기는 데라는 거다. 모 지방도시에 있는 Y랜드... 나도 이야기에 끼어든다. 나는 거기 실제로 가봤다. 정말 재밌는... 콘텐츠가 많은 곳이다. 특히 외적 몰아내기 체험이 재밌었다. 심청이 체험도 진실로 기가 막혔는데... 없어지기 전에 다녀와야 할 곳으로 보여 다녀온 지가 벌써 6년이 지났고, 아직도 안 없어졌다는 게 대단하다. 따지자면 지나간 때의 유행이었을 Y랜드는 이제 진정한 밈으로, 웃음거리로 남았다. 안쓰러운 우리의 지방 도시들이 스스로 관광지화 외에는 활로가 없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기획력과 집행력이 태부족한 상태로 어떻게든 돈 버는 용도로만 돈을 쓰려다 보니 그런 쓰레기-관광지가 자꾸만 만들어지고, 그런 실패작이 지나간 뒤 빈자리를 채우는 ‘검증된’ 유행들―물 있는 데마다 흔들다리, 산 있는 데마다 케이블카, 무작정 둘레길, 닥치고 데크, 이 악물고 축제, 눈물 나는 마스코트... 그런 것들이 꼭 복제되는 밈 모양으로 지방 구석구석을 채워 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너무 즐겁고 팔짝 뛰겠다. 왜 안 즐겁겠나? 유행을 읽어라! 더 이상 관광지에 아무 글자도 쓰지 말고 아무 뜻도 담지 마라! 관광객 모두의 손손마다 들린 스마트폰에 사진으로 남겨짐으로써, 그 구조물들은 그 자체로 글자가 되어야 한다. 이 또한 언젠가 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같은 것을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틀리고 마는 저자들 같고, 내 눈 사이로 빠져나가 인쇄되어 버린 오자들 같다. 이미 인쇄되어 버린 것들을 보며 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냥 웃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너무 좋죠. 나는 그것들을 더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다! 더! 더 만들어라! 더! 빼곡하게 채워라!

우리 대가리만 남은 좌파의 저작물들(존경과 감사, 안쓰러움을 담아)의 제목에도 돌고 도는 유행이 있다.
  1. ‘선언’ 앞에다가 땡땡 붙이기 → 욕심쟁이 스타일
  2. ‘사회주의’ 앞뒤에다가 땡땡 붙이기 → 세미나 스타일
  3. ‘공산주의’ 앞에다가 땡땡 붙이기 → 도발적인 스타일
  4. ‘자본주의’ 앞뒤에다가 땡땡 붙이기 → 조심스런 스타일
나 같은 필부도 못할 거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수발자본주의’를 제시해 본다. 어떨까? 모든 것에는 악몽 같은 버전이 있다. 수발자본주의는 이른바 돌봄선언의 악몽 같은(=현실의) 버전이다. 돌봄 대신 수발이다.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동인인 한, 90% 인간의 삶은 그저 위쪽 10% 정도 인간의 수발을 들기 위한 것으로 격하된다. 자본이 그대로 힘 그 자체를 상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사회구조도 힘의 논리를 따라 상향 수발식으로 재편된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남반구가 북반구를, 여성이 남성을, 약자가 강자를, 종들이, 여전히 양반들을 수발 들어야 한다는 식이다. 지방의 관광지화도 그 일환이다. 지방은 이제 그냥 수도권에서 관광하러 가는 곳일 뿐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관광부로 전락한다. 왜 관광하는가? 누가 관광하는가? 어떻게 관광하는가? 수발 드는 존재로 격하된 자신들을 잊기 위해서... 내가 그러했듯. 나는 그냥 평생 원청 수발 들어주는 사람이다. 원청은 교수 수발 들어주고... 노동이 쟁취한 권리들을 하나둘 무장해제시켜 온 과정을 거치며, 이제 산업은 원하청과 특수고용, 비정규직의 형태로 정렬되어 그 자체로 사회적 연쇄수발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제 경영활동이란 노동력을 뽑아내면서도 노동권을 우회하는 기발한 술수의 고안에 다름 아니게 되었고,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수발의 정점에 오르는 것이 곧 자유와 해방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수발 그 자체인 산업에 발맞춰 수발 스트레스를 다루어줄 산업들, 나 대신 진정한 인생을 살아줄 영웅들을 우리는 찾아 헤맨다. 수많은 종류의 셀렙들이 인간의 이상으로 부상한다. 그들이 우리의 수발을 들어주는 듯이 우리가 그들의 수발을 들어주고... 기업 광고 부서의 수발을 들어주고... 조회수를 따라 기업으로부터 예산을 분배받고... 이건 문자 그대로 수발 중독이다. 우그러지는 중인 대의민주주의다. 착취를 넘어 착즙이다. 착즙이 아니라 복수가 필요하다. 수발이 아니라 돌봄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에겐 필요하다. 돌봄으로서의 복수, 복수로서의 돌봄이. 그것은 무엇인가? 심청이 정신...?

2024년 3월 25일 월요일

말하는 책

 


이 책은 아는 사람이 준 책이다. 아니다, 아는 사람이 나에게 준 책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준 책을 빌리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혼자 출판사 등록을 하고 혼자 책을 썼다. 그런 경우 가운데 어찌어찌 잘 알려지게 되는 책도 있지만,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게 된 그런 책이다. 나는 갑자기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왜냐하면 이 사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읽자마자, 첫 문장을 읽자마자 그 사람의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몇 번 듣지 않은 목소리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를 생각하지 않고 책을 읽기가 어려웠다. 이 책이 그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한 건 아니다. 그냥 궁금했고, 억지로 읽을 생각도 없고, 하지만 책을 읽기가 어려운 건 책이 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책과 너무 가까운 기분이 든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그 책에 쓰인 모든 것을 내 일처럼 읽을 수 있다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언젠가 시간이 지난 뒤에 집에 있는 일요일 같은 날 문득 다시 읽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024년 3월 24일 일요일

아침 같은 것

꿈에서
꿈으로만 남아 있는
다수의 미완성 물체를 완성했다
예를 들면 귤 하나를
귤 더미로 쌓아올렸다
희미한 귤빛 하나가
눈부신 귤빛 더미가 되어
무엇이든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
꿈에서 정신을 차리면
눈꺼풀 아래가 깜깜한데
그 안에서 빛을 보았다는 게
꿈의 거짓말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던
귤 하나
눈앞에서 딱
정지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귤 더미를 쌓을 차례라고
눈에 조금 묻어 있던
꿈이 말해주었다
이제 일어나서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2024년 3월 19일 화요일

교정의 골짜기

이 개새끼들은 대체 뭐가 문제냐? 목줄을 채우고 싶은 두 가지 유형의 쓰는 이가 있다. 하나는 ‘나는 절대 안 틀려’다. 무조건 자신이 맞는다고 아득바득 우긴다. 어디서 뭘 잘못 보고 온 게 있는지, 어떤 감각의 혼란이 있는 건지... 아니면 이상한 신념이 있는지... 하여튼 절대적으로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는다는 식이다. 물론 그는 틀린다. 당연하다. 틀리지 않는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이런 일은 꿈에도 없으며 결단코 없다). 이 경우 뭔가를 틀린다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자신은 틀리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 아득바득 우김이 나를 돌게 만든다. 뭐가 됐든 일단 우기고 보는 그 자세가.

다른 하나는 ‘나는 틀려도 돼’다. 그는 자신이 무조건 틀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걸 고쳐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거의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았’다. 그의 원고는 하나의 불모지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돌보지 않고 떠나간다. 애초에 돌본 적도 없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돌봐야 하는 녀석은 따로 있다. 혹시 그게 나냐? 그는 죽이고 싶은 땅주인처럼 돌아와 검수에 나선다. 이 경우에도 뭔가 틀린다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똥무더기를 줘 놓고 열매만을, 오직 자신의 열매만을 기대하는 그 무책임함이 나를 돌게 만든다. 쓰기에 가담 중인 우리 모두가 이렇듯 골짜기의 들개들과도 같다.

2024년 3월 13일 수요일

등장인물

 


지난주에 그 영화를 다시 봤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본 영화다. 정확한 수치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어떤 인물을 눈여겨보면서 영화를 보았다. 그런 식으로 계속 다른 인물을 눈여겨보면서, 영화를 끊임없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의 모든 사람이 다 되어볼 때까지 말이다. 물론 그러려면 영화를 처음 보는 것처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되어본 뒤에는 A길로 돌아갈 수도 있고 B길로 돌아갈 수도 있다. A길은 도로와 가까워서 차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건물의 열린 창문들로는 울리는 전화벨을 들을 수 있다. 걷다 보면 그곳에 나무가 많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고, 정신을 차려보면 그곳이 여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걷다 보면 매연에 숨이 막힐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 사람은 이름은…… 아마도 상자와 비슷한 종류의 이름이었다. 아무튼 그 이름을 듣고 병을 담는 상자가 생각난 건 사실이다. B길은 조금 더 외진 곳에 있다. 그곳으로 가면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 B길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 B길을 지양하기도 한다.

2024년 3월 11일 월요일

벽장 속의 드래곤

어젯 밤에는 벽장을 잠근 자물쇠가 달그락거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잊을 만하면 있는 일인데, 가끔은 며칠 동안 저러기도 한다.

요부에나와보시카는 영원히 벽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이야기하려 정리해보았지만 마음처럼 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너무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요즘은 새로 입사한 회사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이들에게 적응해야 했다. 겨우 퇴근 후 몇 시간을 낼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찾은 것도 입사 후 반 년이 지나서였다. 요부에나와보시카는 모처럼 돌려받은, 아니면 요부에나와보시카의 생에 처음으로 얻은 여유를 도려내어 방 안의 벽장에 대해 정리하기 위해 쓰기로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이제 그 일은 영원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번에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매번 조금씩 가까워졌는데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지금은 손에 잡힐 것 같다. 그 모든 이야기가.

2024년 3월 9일 토요일

가속장치 같은 것

안개 속을 걷듯이, 안개 속이 미어지듯이,
그러다 미어터진 안개 조각이 내
발밑에 툭 떨어져 있듯이, 그건 누가
흘리고 간 검은 증기……
그러나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 이따가 와
터진 자루를 꿰매야 하니까
얼어붙은 연못에도 양떼가 모이니까
죽은 자의 부활도 믿어버리는 마음으로
내 어금니를 내가 깨뜨린다
새벽의 검은 수박을 사서
검은 모범 택시를 잡아 탄다
나는 달린다 또
달린다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도 작고 미묘한 일들은 계속
일어나는데 너는 모르겠다,
모르겠단 말만 백 번
하는 사이에 이것도 모르겠다면
앞으로는 알아볼 수도 있는 일을 할게, 계속해서
알아봐주길 바라며 내 마음은 가속,
지금 말고 이따가 와
아무리 해도 자루가 터지니까
여기선 잦은 안개 조심
택시에서 내릴 때
수박을 떨어뜨리고 마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산산조각나고
바닥에 검은 물이 흥건하니까
한편 안개는 좋겠다
네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안개가 다 쏟아지면
나는 빈 자루를 갖고 논다
그때쯤 너를 부를게
네가 올 테니까,
그러니까 이따가 와
그러면 네가 올 것이다

2024년 3월 7일 목요일

무명용사

애초 혼란한 원고를 준 녀석에게 교정을 보시라고 뭘 줘 봤댔자 혼란한 교정을 해 올 뿐이다. 대체로 봤을 때 제대로 고칠 능력이 있으면 애초에 그렇게 쓰지도 않는다. 사장은 ‘그냥 교수가 해 달라는 대로만 하라’ 하지만, 그런 것은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나는 대체 뭐 하러 있나? 오늘은 옳은 로서를 틀린 로써로 죄 고치라 표시해 놓은 끼새수교 때문에 위가 쓰리다. 자신감 있으셔서 좋으시겠어요... 나는 위장에 빵꾸가 나려 하고 있는데... 제발 좀... 그런 거는 내가 할 테니까... 사전 한 번만 찾아보면 다 아는 그런 거를 왜... 왜 모르면서 아는 척하니 왜... 제발... 너네는... 지성의 담지자가 아니고... 이런 거는 그냥 아가리 쌉치고 있어... 제발... ㅅㅄㄲ들 진짜... 그만... 단도 들고 찾아가기 전에...

뭐 그런 험한 생각을 속으로만 하며, 도대체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까, 나는 나의 직업적 특성상 증오해 마지않는 그들의 얼굴(신기하게도 꼭 얼굴들이 어디 내걸려 있는데)을 들여다보며 단서를 찾아보려 하지만, 그저 보통 사람의 얼굴이 있을 뿐, 사진으로 알 수 있는 건 없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뛰어난 학자이며 좋은 이웃사람일지 모른다. 아주 개차반 같은 녀석이라고 욕하는 글도 가끔 찾지마는, 어디 다 그렇다고 할 수야 있겠는가. 문제는 분명 그들의 존재양식에,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안 된다. 내가 견딜 수 없다. 그들도 피해자입니다! 암요! 이건 다 그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지 않으려는 내 잘못이다. 그렇다. 내 탓이다!

내가 입사하기 전, 어떤 교수 녀석이 □□□이라고 틀리게 쓰려는 걸 끝까지 □○□으로 고치려다 대판 싸우고 퇴사한 교정공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다. 그는 단 하나의 자음, ㅇ을 ㄱ으로 옳게 고치기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노동 그 자체를 걸었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은 그의 불굴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로써와 로서 따위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의 얼굴은 물론이요 이름도 모르지만 그는 오늘 무명용사 되어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잘못된 교정을 다시 옳게 되돌리며, 나는 그 무명용사가 왜 교수와 대판 싸웠는지 이해한다. 내가 겪은 일인 것처럼 이해한다. 그것은 글자의 옳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2024년 3월 5일 화요일

우리가 사는 방식 같은 것

너는 사자를 기다리는데
사자를 기다려서
사슴이 와도
사슴을 보내고 사자를 기다린다
나는 사자를 기다리는데
사자를 기다려서
문 앞에 사슴을 놓고
사자를 기다린다
높은 어둠 속에서는
잘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희박해진다
옷에는 얼룩덜룩
낮에 본 빛과 사랑을 묻히고 있다
검은 종이에
검은 글씨로
그것들에 대해 쓴다
아무에게도 안 보일 테니까
아무렇게나 쓴다
무언가 열심히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한 듯한 주말처럼 시간이 간다
너는 그동안 밝게 빛나는 전구처럼
공중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다
그 뒤로 너를 보는 일 앞에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네가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너는 흔들린다
많이 기다려서 예쁘네
서러워서 빛나네
내가 고함을 지르자
너는 깨져버린다
사자가 왔을 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자는 날카롭게 흩어진
죽은 너를 밟아버렸고
나는 도망가버린 상태였다
우리라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2024년 3월 3일 일요일

교외 식당 같은 것

구슬픈 음악이 나오는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을 먹는다 벽에는
환호하는 손흥민과 박태환의 대형 사진이 붙어 있다
진열장엔 온갖 트로피와 인삼주…
새벽 세 시
우리 중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카운터의 박하사탕 그릇 옆에는
세라믹 소재의 리트리버 가족이 놓여 있다
은은한 빛을 내는 보라색 자수정 램프가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테이블 번호는 25번 그러나
테이블이 스물다섯 개나 있는 식당은 아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가끔 한숨 쉰다
이제 나는 이들 중 한 명이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도
감히 못할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 자신이 없을 뿐
우리는 황태해장국을 먹는다
서글프고 낯선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는
알 수도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러다 절정에서 갑자기
모두의 숨소리가 멎는다
지금 뭐가 여길 지나간 것처럼
서로 눈을 마주친다
주인이 잠깐 홀에서 사라진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좋다
손흥민과 박태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사이에 뭔가

2024년 3월 1일 금요일

국립현대미술관 앞을 지나가는 개 같은 것

국립현대미술관 앞
을 지나가는
떠돌이 개

개에게는 미술관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들어갈 수 없는 상자거나
멀리 돌아가게 만드는 벽이겠지만
사람들은 ‘미술관 앞을 지나가는 개’
의 사진을 찍는다
귀여우니까
너무 보기 좋으니까

현대미술?
지나가는 개랑 저
안에 있는 것들이랑
남몰래 겨루는 전쟁술

개는 최소한
사람들의 지루함에 길을 내준다
즐거움을 보여준다
저 개는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궁금하게 만든다

미술을 전혀 모르는 개
미술이 전혀 모르는 개
그러나 미술관 앞을 지나가는 개는
미술관에 연동되어 버린다

일군의 행인들이 지나가고
아까와는 다른 이들이
개의 사진을 찍는다
개의 삶에 접근하려고

요 귀여운 댕댕이 사진을
해시태그 미술관
해시태그 댕댕
SNS에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사진 속의 개는
미술관 앞을 지나가면서도
미술관 앞에 계속 있다

‘계속 있다’는 게
계속되는 상황 속의 개
참고로 이곳에서는
《개를 위한 미술관》(2020)
이라는 전시를 연 적이 있다

이 개는 아마도
전시를 본 적이 없을 것이고
사실 미술관이 정말로 모든 것을
위할 수는 없지
않나?
웃으며
사진을 찍으며
사람들은 받아들인다

개를 아끼는 동시에
개를 멀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고 말하고 싶은
국립기관의 너무 평범한 마음을

24년 2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99,595원 (0원 + 299,177원 + 418원)

2024년 2월 20일 화요일

침대

 

어두운 방에 앉아 있다. 날씨가 흐려서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지경이다. 이 집은 2층에 있다. 창문으로는 맞은편 건물이 보인다. 아주 가까이 있다. 그래서 불도 안 켜고 앉아 있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밝은 곳에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아니다. 내가 지금 이런 문장을 썼다고 해서 말이다. 아마도 그 문장은 평행하게 계속 살아갈 것이고 나는 내 길을 간다. 


빈혈이 있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빈혈 때문에 침대로 들어간다. 지금은 오후 한 시이고, 그런데 집 안이 어둡고, 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바깥이 어둡다. 하지만 지금은 불을 켤 수가 없다. 그냥 일단은 누워 있자. 얽히고설켜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말이다. 한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B는 힘없는 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B는 오히려 힘 있는 사람들 쪽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가운데, 가난하기 때문에,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인생에서 엄청난 불운을 겪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오히려 그런 일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힘든 일을 겪었기 때문에 세상에 똑같이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 빈혈 때문이 아닌 것 같다. 그냥 누워 있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고 사실 빈혈이 있긴 하다. 거짓말을 하고 집에 왔다. 사실 거짓말을 하고 일을 관두고 집에 왔다. 내가 잘하는 거짓말은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는, 그런 거짓말을 하고 일을 그만뒀다. 사실 아버지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갑자기 집을 나갔고, 집을 나간다고 하고 집을 나갔지만, 누구도 아버지에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다음 날은 평화로웠는데 왜냐하면 가족들은 아버지가 이 집의 평화를 위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없었고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내가 집을 나갈 때 가족들은 나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바로 그 집의 평화를 위협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들이 지키고 싶었던 평화가 뭘까? 서로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만 살아남는, 그건 왠지 독재하의 평화와 비슷하다. 

2024년 2월 18일 일요일

초월일기 13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내가 

잘하는 

화법을 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감정인지까지 말을 해야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요즘엔 그렇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존재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을 통해 말을 보는 게 아니라 노력을 본다고 쓸 수도 있다 우리는 말을 하고자 하는 

내게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그 사람의 성의를 그 사람이 하는 말보다 더 높게 친다 그런데 그 성의를 알아채기 위해선 그 말을 듣는 사람 역시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게 내가 내린 모종의 결론이다 결론이라고 하니 좀 이상한 것도 같지만 

나는 계속 힘을 내야 하는 상황에 

조금

지치기도 했고 그럼에도 힘을 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


그녀는 몹시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지만 그건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녀가 원하는 일에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노력'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노력을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그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써내려가는 순간이었던 것도 같다. 혹은 어떤 의도나, 해석에서 벗어나서 뭔가를 써내려가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을 써내려가는 순간에도,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고 그 방식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 피로함을 느꼈으며 그리하여 곧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같은 상태에 직면해 베개를 팡팡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몹시 불안했고

어쩌면

우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뒤통수에 달라붙은

악령 같은

어떤 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쓰고 또 애썼던 걸지도 모른다. 어떤 이? 그녀는 문득, 왜 자신이 그 사람을 '어떤 이'라고 지칭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10분 간격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지만, 자신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알았나. 안다고 해도 그녀는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몹시 지쳐버렸고, 그러나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신이 지쳤음을 자각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쳤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2024년 2월 17일 토요일

신발을 끄는 녀석들이 있다

우리는 집중을 요하는 종류의 노동을 한다. 우리의 일에는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대화는 방해에 더 가깝다. 키보드와 마우스, 프린터, 어쩔 수 없는 전화통화 소리 등을 제외하면 사무실은 조용하다. 말 시키지 마세요... 그런데 이 조용한 일터에서 신경을 매우 거슬리게 하는 소리를 내는 딱 세 사람이 있다. 오갈 때마다 슬리퍼를 끌며 귀를 긁어놓는 그 셋,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관리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신기할 정도로 그 셋만 한 사람처럼, 지금 이 소리를 잘 들어 두라는 듯,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다,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 두라는 듯 군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과 우리는 나이로도 성별로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관리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인가? 그저 발이 무거운 사람들이 우연히 관리자가 된 걸까? 아니면 발이 무거운 종류의 사람만이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걸까? 발의 무거움과 관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성향 사이에 어떤 유전자적 연관이 있는 걸까?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움직임을 알리기 위함일까? ‘발 끌기’는 필요에 따른 관리 업무의 일환일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수긍할 수도 없다.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힘에 맞설 힘... 일테면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도록 만들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어떻게? 칙 칙 칙 칙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한 문장씩 떠올려 나는 다음과 같이 쓴다...

어쩌면 이 신비에는 보다 미묘한 역학이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실체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신발을 끄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만 ‘눈치를 보는 이들’만이 관리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발을 끌지 않는 거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끌지 않는 묵약이 우리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게 아니라, 혐오스런 녀석들과 스스로 구분되기 위해, 혐오스러움을 양각하기 위해? 이런 상태는 작지만 고약한 불행이다. 우리에게나 그들에게나 그렇다. ‘나한테 일 시키는 사람’이 무조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좀 움직일 방도가 필요하다. 그게 내가 느끼는 사태다. 괜찮은 일터를 위해서다. 내가 여기에 몇 시간을 있는데... 괜찮은 일터라는 건 뭔가? 임금, 노동 강도, 노동 시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참여가능성으로 나는 정리하고 싶다. 일이라는 총체와 나 사이의 관계가 종합적으로 수긍할 만한가? 나의 수긍 여부가 일터의 요소들 중 하나로 주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가? 너와 내가 어떤 직무와 직급을 맡고 있더라도? 너와 내가 어떤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관리자들의 신발 끌기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있건 우리에게 있건 그렇다. 나의 이 의견은 적어도 그들의 보행 습속의 지속보다 주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터에 참여해야 한다... 일터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나의 정신을 좀먹는... 일터는... (칙 칙 칙...)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잘못만으로 둘 수는 없다. 그들이 잘못을 독점하게 둘 수가 없다. 관리자들도 일터의 동료다. 동료가 아니라면 동료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어떤... 지금 무슨 방도가 있지? 공공에 호소? 디지털대자보 같은 것을 쓴다...? 관리자... 신발끌기... 철폐? 캠페인...? 킹론화(인민머법원)는 우리의 최종심급이다. 이 사안에서 그럴 수는 없다. 그 바로 밑의 하급심은 아마 노조를 통한 협상과 쟁의, 또는 어떤 종류의 법적인 신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큰일이다.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정도라면 그 아래에 뭔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가장 낮은 단계로 가보면? 일터에서의 잡담이나 한숨, 우정보다는 가벼운? 동료애? 같은 것들일까? 어쩌면 신발을 끄는 녀석들에 대한 뒷담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속은 좀 시원해질지 몰라도 녀석들이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가장 위와 가장 아래 사이가 비어 있다. 일터를 위한 규약이랄지 구조랄지 뭐라 할지... 진실로 필요한 바로 그 부분이 비어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비어 있음이 위아래로 문제를 뻗치며 위아래로도 문제를 만들고 있다. 적어도 여기서는 그렇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평등한(즉 상향식) 의사 표현 구조일 것이다. 그래, 분별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양식이. 회의 시간? 하지만 그걸로 정말 되나? 아닌데... 회의는 고통인데... 건의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평등한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건 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두 말높임/말낮춤 같은 소리는 말고, 또 개개인들의 능력으로 치환되지 않도록 하면서...

의사소통이 평등하려면 실제로 평등해야 한다. 그렇담 ‘실제로 평등’이라는 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실제로 평등해질까?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힘이 나눠져야 한다. 어떻게 힘을 나눌 수 있나? 진실로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임금 평탄화다... 직무 순환이다... 선출 대표다... 그거면 되나? 그 정도면? 하지만 사내에서만 그래서는 곤란에 빠진다. 그것은 전염되어야 한다. 평등은... 사내와 사외의 경계는 더 흐려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악의 버전과 최선의 버전이 동시에 존재한다. 경계의 흐려짐도 그렇다. 발을 끈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관리자들이 신발 끄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외주 교정자가 되어야 하나?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우리는 이미 곤란에 빠져 있다. 진실로 고쳐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들의 바로 위와 아래에, 앞에, 뒤에 있다... 무릎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건 더 높이 들게 만드는 힘이건 힘이 구성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면? 아니면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좀 뜬금없지만, 노인성 질환으로 발을 끌던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지금 납골당에 계시고... 명절 때가 되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칸칸이 들어찬 함들 앞에 서려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 다 관계가 있어... 나 교정공이 보기에는...

2024년 2월 14일 수요일

역전

세계관은 자신이 가진 잔혹의 정도로 당신에게 말을 건다. 과학이 인간을 별로 좋게 보지 않음에 따라 밀려나고 별다른 주거가 없는 사람들은 안주할 수 있는 가상 공간에 대한 눈높이가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까다롭다는 것은 그 욕구 불만이 지속되는 경우 각 문화 산물들의 내용에 대한 감식안, 민감한 정도가 아니라 그 까다로운 기준을 어떻게든 무마, 후퇴, 폐기시키려는 어떤 성급한 활동을 추진하게 되기도 하는데 결국 돈은 유한한 자원이니만큼 그들의 생각 깊숙이에 그 불만족스러움은 쌓여가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잘 만족하지 못했는데 예전처럼 다수의 게임들을 사버린 뒤 몇 날 며칠이고 플레이하면서 자신의 만족과 불만족에 대해 뭔가를 알아가기에도 경제 불황으로 돈이 떨어져 버렸다. 사람들은 뭔가를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무지향적으로 자기 자신을 어떤 국소한 분야에 투신시켜 훈련하는 일을 즐겼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과학을 애호했다. 과학이 이토록 심각해진 뒤에도 과학이 심각한 위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에는 논쟁적인 여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의 존재 탓도 있었다. 아키라가 성년이 된 이후로 현실에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그 일에 환호했다. 조금 기이하게도 현실이 게임을 닮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간 게임에서 괴물들을 베어버리는 기술을 연마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적절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태를 위험하고 심각한 것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이 이미 작성했었던 이념이 작동하기 시작한 탓이다. 사회적 분위기의 변혁 주기가 빨라짐에 따라 다분히 레저 활동에 가까워보였던 길드들이 이번에는 앞질러 권위를 갖고 이익 집단이 되어 신입 공채를 진행하기도 했고 아키라도 한 집단에 소속되어 거기 소속될 만한 이들을 주변에서 찾는 일을 했다. 그들은 앞지른 것이었지만 아키라의 경우 이미 뒤늦은 느낌도 있었다. 그는 이 시대에 적합한 것 같기도 했다. 현실에 괴물들이 나타나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일차적 해명이 끝난 상태였으며 그 조사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한다. 각국의 기관들을 통해 권력자들은 그런 일이 실제로 현실에 일어나기 전부터 예측된 사실이었음을 아는 상태로 정책을 만들었다. 놀랄 일은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현실에 나타난 그 괴물들에 원더Wonder라는 이름을 붙였고 각국의 군대들은 그 괴물들을 배제하며 조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각국의 권력자들에게 괴질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며 때로는 공포의 감정으로 진전되기도 했다. 세계는 분명 이전보다 더 잔혹스러워지고 있었고 그것은 과학이라는 체제가 인간을 적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어떤 컬트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컬트가 아닐지도 몰랐으며 주로 뒤에서 암약하고 있는 과학 쪽의 부정적인 뒷이야기에 대한 세계관이 뒤늦게 그려지기 시작했고 언론에 뿌려지는 보도 자료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지금껏 출시된 대부분의 사이버 펑크 게임이 그렇듯이 출시 초기에는 인기를 끌었으나 컨텐츠의 종료가 도래하는 시점이 빠른 탓에 금방 사그라지는 그런 부류들과 현실은 동일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후퇴할 곳 따윈 없었던 것이다. 의외로 사람들은 게임을 즐길 땐 완고한 면이 있었다. 지금껏 불감증이던 사람들이 현실에 일종의 게임 클리셰적 사건이 생긴 일에 몰래 기뻐하기도 했고 그런 이들은 그 일의 확산에 기여했으며(소문이나 풍문의 방식으로) 그런 사람들끼리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일도 빈번했다. 어떤 사람들은 물론 괴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존재는 임의적으로 산재해 있었는데, 현시점 괴물에 대한 보도 자료들은 전부 경제의 원활한 범지구적 선순환을 위한 인간 배제적 체제, 일종의 소비재들에 대한 강압적 홍보 및 각 국가별의 통제 수단이라 주장하며 그것을 믿지 않음에 몸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꽤 많았고, 이 문명은 괴물을 시민에게 접근시킬 정도로 퇴락하진 않았다는 점이 그런 아젠다를 부추기는 데에 일조했다. 혹은 그 괴물이 실제로 그들의 말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그러한 입장에 대한 찬반 쪽의 입장들은 일반 시민이 접근 가능하게 하는 데에 신념을 가진 위키 문서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다소 피상적이거나 혹은 이르게도 괴물 사냥꾼들이 등장함에 따라 그들이 갈아끼울 강화형 의수, 인체 파츠 등을 실제로 현실에서 판매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이베이 옥션에서 거래되었는데 그것은 호들갑인 걸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진지하며 냉엄하였고 가차가 없었다. 마치 재난에 대비하는 특정 국가의 자가 주택 보유자들처럼 말이다.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눈높이가 까다로워져 있던 사람들은 경제 상황이 불안정한 쪽으로 치달음에 따라 과학이라는 거대하고 위압적으로 작용하는 체제에 대한 팔자 좋은 관념화를 잠시 그만두고 그나마 익숙했던 일에서 생계 수단을 구하게 되었다. 어떤 순박한 게임사는 지금 이 사회의 분위기를 다분히 취재하는 방식으로 이 현실의 체제와 아젠다, 문제 사항들을 기삿거리처럼 만든 게임을 출시하기도 했는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새로운 게임이 출시되었다. 그 게임의 경우 앞서 말한 까다로운 눈높이의 사람들을 거의 만족시킬 정도였다. 아주 방대하고 구체적인 볼륨들의 가상적 공간을 주거 공급하듯이 전 인구에 필적하는 단위로 서비스하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가상적 공간은 현실을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이 즈음에 게임 산업 속의 컨텐츠 경쟁이 잠시 냉각된 채 시대를 다년간 지배할 만해 보이는 이 게임에 같이 머리를 맞대고 대항 IP와 원천기술들에 대한 논의들이 시작되었다. 아키라는 지금껏 알고 지낸 지인들과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의 어떤 과열화 양상 속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한 뒤 그 거대 게임에 대한 게임 접속용 이어셋을 구매하고 그것을 생계 수단으로 삼을 작정을 했다. 그들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엄숙한 기미까지 있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도 전부터 정기적으로 보육원에 후원을 하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고, 그 액수는 여러모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그들은 수입원을 찾아낸 뒤 점점 잔혹스러워지고 있는 세계의 어떤 분위기에서 휘발성의 음악들을 즐겨들었다. 그 세대의 메이저한 취향이기도 했다. 그 게임은 흥분의 요소뿐만 아니라 안주하고 안온한 휴식의 느낌을 줄 수 있는 기회 및 장소들을 제공하는 데에도 성공적이었고, 그들은 점점 그 게임에 익숙해져 가며 여러 가지 전투 기술들을 배웠다. 그 세계관에서는 전투 또한 아주 중요했다. 다른 게임들처럼 말이다. 아키라는 대형 기업으로 도약한 그 게임사에 대한 감사함까지 들기도 했다. 그들은 그 게임을 하는 데에 비교적 아주 적합했던 것이다. 과학의 잔혹을 그 세계관 내에서 과장시켜 보여주는 것의 반대는 과학이 보다 덜 잔혹함을 어떤 세계관 컨텐츠 내에서 보여주는 것도 있었고, 혹은 현실이 게임보다 더 잔혹스러워지면 된다는 것도 있었다. 후자의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대의 범인이 과학 체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한 과학 체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나 수상쩍게 그들이 쥐고 있었던 권력 조건들에 대한 강력한 감찰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놓는 주의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 경제 상황 때문에 현실이 보다 더 잔혹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익숙했던 사이버펑크라는 어떤 세계로의 변화, 도약이 이뤄지기에 적합한 상황이 되고 있는 듯했다. 시대의 그런 변화는 낯설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젠 과학 기술이 시대 정신의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기민했던 것이다. 어느 독재 국가에서는 이 시점에서 죄질이 있는 과학에 대해 총력을 기울여 원천 기술을 서둘러 발전시키려 한 탓에 국제 사회로부터 아주 심각한 수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런 사항들에 대한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접근은 이미 효용을 다했다는 데에 아키라는 어쩐지 재밌기도 했고 흥분과 희열을 느꼈다. 게임 안의 생계활동을 위해 현실에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도 했다. 그것은 인맥 쌓는 일과 어느 정도 유사했다. 게임에서 나온 아키라는 이어셋을 낀 뒤 잠을 잤다. 현실은 벌써 어떤 악의나 범인의 존재 없이도 그가 바라고 염원하던 것과 유사해지고 있었다.

2024년 2월 1일 목요일

24년 1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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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99,177원 (0원 + 298,664원 + 513원)

2024년 1월 31일 수요일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後)

이건 어떨까. 실험용 쥐 rat을 ‘랫드’라고 부르는 과학계의 해괴한 표기법에 대해 황당해하는 이야기를 봤다.
가장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과학용어 중에 실험용 쥐 rat를 “랫드”라는 해괴한 표기로 쓰는 전통이 있음. 왜 이걸 랫드라고 쓰는지 아무도모름. 근데 교과서 같은데도 저렇게 쓴 책많음. 심지어 국가 법령같은데서도 저렇게 씀. 그냥 단체로 이상한 표기인걸 다 알면서도 그냥 다같이 틀리는거임
@JaesikKwak. 2022년 10월 6일, 오후 10:38. Tweet.
‘랫드’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신비에 대해 약간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직업적으로 이런 일에는 나도 약간의 책임감을 느낀다. ‘랫드’는 물론 일하다가 종종 마주치는 단어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말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또한 책의 바깥과 안의 말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정해진 규범을 따르거나 규범을 정해 고치는 것이 우리 교정공의 일이다. 기본적으로 ‘랫드’ 같은 게 나오면 표기법에 맞도록 다 고쳐야 맞는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거를 왜 맘대로 고쳤느냐고 따지는 교수님이 계실 수 있고, ‘학술적’ 영역이므로 무엇이 표기법에 맞는지부터가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그 누구도 나 대신 싸워 주지 않는다). 실상을 말하자면 교재 한 권에서 rat 하나를 놓고 그 번역어로 ‘랫드’, ‘래트’, ‘랫트’, ‘랫’, ‘시궁쥐’, ‘쥐’ 등등으로 다 다르게들 쓴다. 아예 rat이라고 그대로 쓰는 사람도 있다.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한국어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 이게 교수님들끼리만 통일을 못 하고 있는 거면 그래도 행복한 경우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한 교수님이 맡았다 하는 한 장 안에서도, 분명히 한 사람이 썼어야 하는 한 문단 안에서도, 심지어는 바로 옆 문장에서도, 나로서는 다르게 쓸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는데 다르게 쓰시는 (자연히 얼굴을 찾아보게 되는) 분들이 적잖다. 즉 대부분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해 아예 처음부터 쥐털만큼의 관심들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책 한 권에서 ‘랫드’로 통일되어 있기라도 하다면 그나마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rat은 ‘랫드’라고 옮긴다고 하는, 어쨌든 이 책 안에서만은 통하는 약속을 세우려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교정지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달아 물어봐야 한다.
‘rat’의 번역어가 ‘랫’, ‘랫드’, ‘래트’ 등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요?
만약 전체 감수를 맡아 끌고 가는 교수님이 없다면, 그 메모를 본 교수님들이 다 같이 모이려 들 수도 있다. 모여서 회의한 끝에 어떤 결과가 나오기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하고, 그 결과가 나오면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 어쨌든 출간일은 정해져 있고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책은 한 권이 아니다. 시간이 정 부족하면 나 외에 다른 외주 교정자를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구한다 해도, 그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 하는 것은 결국 내 일이다. 해 달라는 대로 그가 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멋대로 고쳐도, 또는 전혀 안 고쳐도 아무도 신경 안 쓴다. 나는 항상 그런 유혹에 시달린다. 어쨌든 그 시점에 전체를 읽어 본 사람은 나 혼자다. 그럼에도 각자 자기 생각들이 있으신 여러 교수님들 사이에서, 무슨 교통정리 비슷한 것이라도 가능한 나이 지긋하신 교수님으로부터 교정공이 받은 답이 ‘랫드’라면, 이 구조 속에서, 그것은 그냥 랫드면 그만인 것이다. 랫드라고요? 왜죠? 이렇게 되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전에는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사장님은 그냥 교수들이 해 달라는 대로만 하라고 말한다. 네가 입씨름을 하려고 들지 말고, 교수들이 해 달라는 대로만 해라. 너는 시간만 맞춰라, 너의 업무보고에 따르면 너는 지금 하루에 몇 쪽을 보고 있는데, 어쨌든 네가 하루에 몇 쪽 이상 봐야 우리가 수지타산이 맞고…….

자, 사장님은 나를 왼쪽으로 당기고 동료님들은 나를 오른쪽으로 당긴다. 원청업체는 앞에서 나를 당기고 교수님들은 뒤에서 나를 당긴다.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나를 아래로 당긴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위로 당긴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교정지를 양쪽으로 동시에 당기고 싶다. 이것이 내가 만들고 있는 책이 당하고 있는 얼차려의 구성이고 가련한 예비-책들이 처한 상황이다. 말 못하는 책들, 그러나 만들어져야만 하는. 내가 교정 보고 있는 원고 외의 모든 것이 내 눈과 손과 마우스 포인터를 당긴다. 나도 당연히 업무시간에 몰래 트위터 합니다! 랫드가 어쩌고 하는 얘기도 그러다 본 것이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쉼 없이 교정만 봅니까? 내가 항상 하고 싶은 말: 당신이 한번 해 보세요, 네가 해 보세요! 눈앞이 깜깜해지도록 아침부터 밤까지 한번 봐 보세요! 그리고 항상 하는 생각: 이래서는 어떤 책임 비슷한 것이 나올 만한 구조가 아니다. 무슨 책임? 최선의 의사소통을 시도할 책임? 나와 교수님 사이에, 책과 학생들 사이에, 말하고 싶은 사람들, 책과 책들, 화면과 화면들 사이에?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말해 보라 하면 다들 저마다의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장님에게는 사장님의 이유가, 편집자에게는 편집자의 이유가, 교수님에게는 교수님의 이유가, 교정공에게는 교정공의 이유가, 없을 리 없다. 어떤 분들은 한마디도 더하실 필요가 없는 분들이신지도 모르지만, 한 말씀에 필요한 값이 다른 분들이신지도 모르지만, 학문에 열심이시라 언문의 필요를 등한시하시는 분들이신지 아니면 그 반대이신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바로 그런 필요들의 분배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데에 누구를 탓할까? 다 나의 탓이다! 내가 그 분배들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인 한 이 오류들은 바로잡히기 어렵다. 그러면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 답일까? 내가 더 수준 높은 교정공이 되는 것이? 아니면 교정공보다 나은 것이 되는 것이? 나 교정공의 눈에, 여기에서 분명하게 틀린 것은 우리가 우리 되기에 실패하고 있는 이 사태다. 책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정공처럼 말하자면, ‘모양이 어색하다’. 사랑하는 교수님들, 내가 우리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내가 부르면 그렇게 됩니까? 내가 분배될 수만 있다면 나는 사라져도 좋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는 데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맞게 했나? 내가 내게 주어진 지면에, 일생에 있을까 말까 한 기회에, 필요한 말을, 해야만 하는 말을 적절히 늘어놓은 게 맞나?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한 게 맞나? 내가 매일 보고 있는 어떤 원고들과도 같이, 헛되이 글자로 똥칠을 해 버린 건 아닌가? 아니, 지면이 굳이 나에게 필요한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 나 교정공이란 이를테면 사라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교정공이 개입할 수 있는 지면은 오늘날 점점 좁아지고 있다. 또는, 교정공이 개입할 수 없는 지면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아와 어의 다름도 점차 사라지는 듯, 아와 어가 다르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들과 어와 어가 다르다고 우기는 사람들 사이의 다름도 사라지는 중인 것만 같다. 가끔 우리가 견딜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 합쳐졌던 적이라고는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으니 이상한 생각이다. 대체 어떻게 감히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겠니? 말하는 얼굴들을 보면 그야말로 박살이 나 있다. 전에도 이랬던가? 이러지 않았던가? 우리 산산조각의 양상이 과연 바뀌는 것이라면 산산조각을 대하는 우리의 양상도 분명 바뀌는 것이겠다. 내가 지금 맞게 대하고 있나? 글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살 난 우리 사이에 쌓이고 녹고 쌓이기를 반복하며 서로 합쳐지려고 이어지려고 이를 악문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틀림없이 그렇다.

2024년 1월 30일 화요일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前)

나는 절망한 교정공이다. 정확히 쓰자면 절망했던 교정공이다.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나갔다. 이 일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결딴이 나 버렸기 때문에 이젠 괜찮다. 우리 사랑하는 교수님들의 원고를 교정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아무 탓할 것이 없다. 다 나의 탓이다. 교수님들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의 탓! 만약 교수님들께 한마디 전할 수 있다면 뭐라고 할까? 지난 몇 년 동안 여기에서 일하며 그런 순간을 자주 상상해 봤다. 교수님들께 감히 한 말씀 올리는 순간.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슨 간절한 말씀 한마디 드리는 건가? 잘 모르겠다. 말이 왜 필요하지? 교수님들께 얼차려를 드리고 싶을 뿐 아닌가? 오, 교수님들,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여기 줄 맞춰 보세요! 하나에 교수도, 둘에 사람이다! 그 왜 요즘은 다들 누군가에게 얼차려를 주고 싶어하지 않나? 안 된다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되뇌는 말. 하나에 교수도, 둘에 사람이다! 나는 무슨 신세 한탄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내가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책들은 대개 대학 학부의 교재다. 번역서도 있고 저서도 있다. 이걸 정말 교재로 쓰는지 어쩌는지는 모른다. 머리말에서 쓴다 하니 쓰는가 보다 할 따름이다. 쓴다고 해도 안 쓴다고 해도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내가 교정한 책이 책꽂이로 들어가 몇 해 묵은 다음 중고로 팔리거나 폐지로 버려질 때까지 절대 펼쳐지지 않는 상상을 가끔 해 본다. 그것은 고통스럽다. 학생들이 책에서 말도 안 되는 오류를 발견하는 쪽이, 그래도 그보다는 낫다. 그 학생은 교수님께 이 책의 여기 이 부분이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면 교수님은 출판사 탓을 하면 된다. 나라도 출판사 탓을 할 것이다. 너무 짜릿한 상상, 강단에 서서 이 책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틀렸는지 설명하는 우리 교수님들에 대한 상상! 내가 눈에 특별히 불을 켜고 교정해야 하는 역·저자 소개를 보면, 이분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옮기셨고 무엇을 쓰셨고 무엇을 받으셨고…….

그런 훌륭한 우리 교수님들, 자신이 쓴 원고에 마땅히 전문가 대여섯 정도가 일거에 달라붙어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리라 여기시는 듯한 우리 훌륭한 교수님들 일부의 상상과 달리, 나 한 명의 교정공은 보통 두어 권의 교재를 동시에 본다. 짧은 거 한 권이 500쪽쯤 된다 치면 50쪽씩 10개 장, 대여섯 교수님들이 두 장씩 나눠 맡으므로 나는 열댓에서 스무 분 교수님들의 원고를 한 번에 늘어놓고 보는 셈이다. 그렇게 늘어놓고 보면 교수님들 사이의 문장 수준에 차이가 있다. 아마 A부터 F까지 점수를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정녕 이 문장을 한국 최고의, 뭐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양 지성인이라는 이가 썼단 말인가 싶은 그런, F조차 아까운 경우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나라 학문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교수님이 보내는 이메일이나 메모 따위를 함께 살펴보면 이것은 이 교수님의 문장이 분명하다. 아마도 한국어에 원래 서툰 분이시거나, 원래 학문과 문장은 아주 별개인가 보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고, 그래서 내가 있는 것이다, 내 일이 있는 것이고, 하여튼 내가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된다, 어떤 개떡이 앞에 놓여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보다도 긴 장탄식이 나오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봐도 한 인간의 문장이 아닌 경우다. 어떤 교수님들의 원고는 아무리 봐도 거기 적힌 이름보다 많은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것을 모를 수 없다. 도대체 교수님 아닌 누가 그 원고들을 썼단 말인가? 그것은 모른다. 대학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아실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이 썼다면 그나마 다행?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게 분명한(읽어 봤다면 인두겁을 쓰고서 그걸 그냥 보낼 수야 없으므로), 번역기의 일차 생산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뭔가를 원고라며 넘기는 교수님들도 있다. ‘번역 엔진이 역자 서문을 써야겠다’와 ‘차라리 번역기라도 돌려줬으면’ 사이에서 나는 입을 다문다. 이 학부 교재라는 것은 아예 별거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들 하시는 걸까? 더 중요한 책은 이렇게 안 하실까? 아니면 이 교수님의 원고는 일괄적으로 다 이런 식인데, 단지 책의 중요도에 따라 교정공의 수준이 달라지는 걸까? 여러모로 봤을 때, 적어도 교재를 쓰는 일에 있어서는, 이 교수님들이 노고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도대체 얼마를 드려야 노고에 합당하다고 여기실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좀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를 유독 고통스럽게 하는 교수님들의 얼굴은 한번 검색해 본다(하여튼 스무 교수님들 중 두엇의 얼굴은 꼭 검색해 보게 된다).

대충 번역기 한 번 돌린 것을 원고라며 보내는 등의 일이 있으면 교수들끼리 서로 싸우기도 한다.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차라리 다행이고, 대개는 서로에 대해서든 책에 대해서든 큰 관심도 없다. 아니, 다행인 게 맞나? 교수님들이 책에 세세한 관심을 갖는 편이 좋나? 저마다 나서서 이 교수님은 이렇게 해 주세요, 저 교수님은 저렇게 해 주세요, 이러면 내 일이 두 배 세 배가 될 뿐……. 어쨌든 출간일은 정해져 있다. 내가 교수님들과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상사 또는 원청업체의 편집자가 대신 싸워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잠깐, 원청업체라니? 말 그대로 나는 이 일을, 출판 편집을 대행하는 회사에서 하고 있다. 원청업체인 출판사들로부터 일을 받아서 한다는 이야기다. 교수님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어르고 달래고 일정을 조율하는 편집자 역할은 그쪽 편집자와 내 상사가 나눠서 맡는다. 내 상사는 원청업체와 교수님들에게 그때까지는 이래서 저래서 안 된다 하소연한 다음에 우리 사장님한테 깨지는 사람이고, 원청업체 편집자는 이때까지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한 다음에 이것도 제대로 못하느냐고 핀잔주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하도 화가 나서 찾아본 원청 홈페이지에는 무슨 해외 굴지의 교육 계열 어쩌고의 자회사라 적혀 있던데…… 입맛이 달아나며 더 알고 싶지도 않아졌다. 그러니까 내가 만드는 책의 출판사명 자리에는 원청업체의 이름이 들어가고, 책에 이름이 올라가는 사람은 역자 또는 저자인 교수님들 그리고 원청업체 쪽 편집자다. 나 교정공은 힘써 만든 것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있다. 애당초 몇이나 되겠나? 나는 무슨 신세 한탄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해야 하는 말은 무엇인가?

계속

2024년 1월 28일 일요일

실명

 내 본명은 김거울이다. 사실 그건 내가 예전에 만난 어떤 사람의 이름이다. 잘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다. 그 사람은 13년 전에 잠깐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노랗게 탈색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자신의 취미가 잘 잊어버리는 거라고 말해서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그 뒤에 내가 내 소개를 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재미있게 소개를 해서 사람들을 웃기면 좋았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지금 침대에 누워 있고 잠을 자려고 애쓰는 중인데, 갑자기 그 사람이 생각났다. 13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을 말이다. 그냥 한 번 스쳤을 뿐인 그런 사람을 갑자기 생각하게 되는 건 왜일까. 그냥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 본명은 김거울이다. 저녁에 A의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어떤 협회의 대표인데, 나는 그 사람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고, 하지만 좋은 인상을 갖지는 못했고, 하지만 그 사람은 실력 있는 사람이며, 그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볼 수 있고, 근데 그 최고라는 건 누가 붙여주는 건지? 아무튼 그 사람은 일을 잘하기로 소문이 났으며, 자신의 일에 대한 홍보도 적당히 하고, 아무튼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똑 부러지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그 좋지 않은 인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이 나와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대화를 중단하고 사라져버려서 그렇다고 했다. 중단을 하기 전에 어떤 말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사라져버리면서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인상을 받았다. A는 그 사람이 단단한 사람이라고 했고, 나는 단단하다기보다 배려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A는 그런 단단함이 없으면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가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단단한데 배려가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게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A는 그 사람이 그 순간에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을 수 있고,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 수 있으니, 한순간의 태도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을 평가하는 건 아니고,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인상이라는 건 바뀔 수 있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일 이후로 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건 사실이다. 사람들이 칭찬하는 그 사람의 업적 같은 것에 말이다. A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업적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게 왠지 모르겠지만 힘들다고 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는데, 대화가 끝난 뒤에 정신을 차려보니 접시가 비어 있었다.

2024년 1월 26일 금요일

오직 네 독자를 위한 여덟 성물 이야기 후일담

― 22년 8월 7일부터 24년 1월 21일까지의 플레이로 완결된,
TRPG팀 『너드트레인 1호선』 언리미티드던전 캠페인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은 후일담


신앙을 버린 알료샤
폐허가 된 로시야로 돌아가 마을 재건에 힘씁니다. 부서진 성당을 고치고 이뤼가레의 눈을 다시 전시합니다. 로시야는 여덟 성물 이야기의 시작점이자 프리예로의 기착점으로 부흥합니다.

전대의 대마녀 미르지요
로시야에 약초상점을 개업하고 죽은 혼들을 달래줍니다. 알료샤에게 악마학 지식을 가르쳐줍니다. 가끔 대삼림에 찾아가 따부 등 요정들과 만납니다.

안내인 셰르
로시야에서 미르지요를 도와 약초꾼으로 일합니다. 테베의 세 기사의 발자취를 따르는 별의 순례객들을 위해 로시야-대삼림 가이드로도 가끔 나섭니다. 가정을 이루고 예레흐 남작의 표장을 가보로 간직합니다.

대삼림 요정 따부
미르지요가 떠난 요정 마을에서 자치위원장으로 뽑힙니다. 리더십을 발휘하여 서슬멧돼지 및 달혈족 등과 대삼림평의회를 조직, 프리예-로시야의 마법오솔길을 관리합니다.

고블린 키엘키엘
프리예에서 자라며 공용어를 배웁니다. 동서부를 두루 다니며 쓴 고블린여행기로 유명해지며 훗날 만자트의 조수가 됩니다.

천사통역 무하필
마법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었음을, 아니면 적어도 반은 인간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대드루이드 수호자가 되어 수은의 오아시스를 지킵니다. ‘수호단’ 드루이드 제자들을 양성합니다.

어린이 드래곤 가나슈
혹시 있을지 모를 동족들을 찾아 북쪽으로 모험을 떠납니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심연지기 이그라디
오펜에게 감화되었습니다. 오펜을 따라가 마이라에서 살며 마술을 배워 새로운 마술사 길드장이 됩니다. 인-엘 우호에 힘씁니다. 오펜의 연인이 됩니다.

궁기사 탈타미쉬
가나슈와 함께 북쪽으로 떠납니다. 도중에 가나슈와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마술사왕 만자트
운명성 마법진에서의 경험은 만자트의 지식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습니다. 공중섬으로 돌아가 보석내장을 연구하며 언데드 조수들과 함께 저술에 힘씁니다. 지나치게 많은 장서량으로 인해 공중섬은 그냥 섬이 됩니다. 도서관왕 만자트로 불립니다.

율리아-폴라
본스테드를 도와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난민구제에 힘씁니다. 테베의 성녀로 알려지며 테베 대주교를 거쳐 중심교회 추기경까지 오릅니다. ‘알료샤와의 문답’이 뭇 종교인들의 전설적인 필독서로 전해집니다. 운명성의 마법진에 의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성인의 눈’으로 지정됩니다.

이방도둑 쁘라쳇
얼마간 키엘키엘과 함께 여행합니다. 먼 남쪽 고향 섬으로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테베의 테시우스 공
율리아-폴라에게 청혼하나 거절당합니다. 끝까지 남부를 평정하지는 못합니다. 생의 마지막 즈음에는 수정구로 지옥의 공주와 대화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유능하진 않았지만 호인이었던 군주로 기억됩니다.

마술사 길드장 오펜
마법을 잃은 후 마술사 길드의 명예 고문이 됩니다. 세계는 평화롭고, 이그라디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베라의 자리도 있습니다.

바드천하일 라다가마
모든 일이 끝난 뒤 얼마 가지 않아 영면에 듭니다. 죽기 전 중심교회에 마이라의 새로운 군주로 본스테드를 추천합니다.

와젠의 마담 루왈라
와젠이 순례객들로 북적거릴 때 수완을 발휘합니다. 와젠의 장로가 됩니다.

코룸의 짐꾼 마치
자신이 만들진 않았어도 ‘여덟 성물의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로 인정받습니다. 대륙 곳곳에서 쇄도한 공연 요청에 응하며 한동안 바쁘게 산 다음 코룸으로 금의환향하여 다시 짐꾼이 됩니다. ‘역시 음유시인은 적성에 안 맞아.’

피조물의 전당 박물관장 헬가
서부군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집념과 불굴의 의지로 전 대륙으로부터 수장고 파괴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냅니다. 파괴된 수장고를 보존하여 ‘테베의 세 기사와 금강석 두개골’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순례객들의 필수 코스를 만듭니다. ‘저주받은 서슬멧돼지 어금니’는 피조물의 전당 최고의 전시품 중 하나입니다. 죽은 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박물관장으로 방부처리되어 유리관에 안치·전시됩니다.

미우-미우
북쪽에서 전설의 붉은 새 한 쌍에 대한 목격담이 전해집니다. 그냥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당지기 베르감
아들과 화해합니다. 베라에게 에피르단 사당지기 자리를 맡깁니다. 잠시 린천에 살다가 죽기 전에는 돌아옵니다.

어부왕 바바 우르즈
크루즈 사업이 생각처럼 잘 풀리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린천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버지와의 크루즈 여행은 즐거웠습니다. 조선소는 협동조합이 됩니다.

묘인 낚시꾼 한지
서부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지하실에 숨겨주었습니다. 평화로운 세계에서 별일 없어도 행복하게 살며 천수를 누립니다. 안탈리아에는 한지가 낚은 최대어 실물 크기의 대리석 조각이 남았습니다. 운명성의 마법진에 의해, 그의 낚싯대들이 ‘어부왕의 왼손들’로 지정됩니다.

천재마법사 카롱
어느 날 갑자기 감옥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행방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던전도둑 누야
오펜의 소개로 마르타의 마술사 길드 지부장이 됩니다. 본스테드로부터 받은 본스체인 지분 절반 덕에 이미 부가 차고 넘치지만 가끔 익스트림 던전 탐험을 즐깁니다. 보물은 남몰래 좋은 곳에 사용합니다.

렉상의 엉터리마술사 조른
렉상의 마술사 길드를 펍으로 개조합니다. 사업을 크게 벌릴 수도 있겠지만 만족을 압니다.

갱염의 공주 예레흐
지옥에서 여전히 지상으로의 재기를 노리며 일을 꾸밉니다. 어찌어찌 테시우스에게 수정구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그 이야기가 예레흐전서로 남겨집니다. 지상에 약간의 숭배자들이 생깁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유령요정 예언자 셸라
긴 세월이 지나 고향숲은 다시 살아납니다. 셸라와 유령요정들 역시 다시 몸을 얻습니다. 로프의 손가락뼈를 깎아 뼈 구두를 만들고, 셸라가 그걸 신고 추는 만남의 춤 의식은 그들 사이에 대대로 전해집니다. 운명성의 마법진에 의해, 그것은 ‘대마녀의 발목’으로 지정됩니다.

2024년 1월 18일 목요일

부채

굉장히 불편한 자리에 앉아 있다. 큰 책상에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는 구조다. 이런 자리에서는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내가 불편해하는 것은 내가 뭘 쓸 때 누군가가 보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내가 뭘 쓰는지 궁금해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누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 줄도 쓸 수 없다. 그걸 의식하면 말이다. 누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평소에도 굉장히 대답을 시원시원하게 빨리 하지 못하는데, 글을 쓸 때도 굉장히 고민해서 쓰게 된다. 그런 일기는 나중에 읽어도 별로 감흥이 없다. 너무 멈추면 말이다. 요즘은 밤에 자꾸 잠을 설치게 된다. 잠을 설치게 되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부채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그는 예쁘고 글을 잘 쓴다. 그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머리를 말리는 데 아침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자를 생각은 없다. 머리카락 말이다. 그는 헤어드라이어를 끊은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아침에 특별히 맛있는 원두로 커피를 만들었다. 이 원두는 어느 나라에서 왔다. 그는 그 나라에 가 본 적이 없다. 헤어드라이어를 끊은 이후로 그는 많은 색과 모양의 부채를 사용했다. 처음에 그는 특정한 부채를 선호해서 썼는데, 접을 수 있고 펼칠 수 있는 그런 부채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는 그냥 아무런 부채를 쓰기 시작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채로 머리를 말리는 행위이지 부채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가 지금 쓰고 있는 부채는 길에서 나눠주는 부채이다. 영어학원 광고가 적힌 부채. 그는 머리를 말리면서, 그가 한때 알던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영국에서는 맥주를, 미국에서는 독한 술을 마시며, 주로 두바이나 파리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영국을 오고 가던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영어학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는 갑자기 로마 제국의 부흥과 멸망이라는 세계사를 배우던 때에, 사실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런 문장이 떠올랐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예전에 아끼는 부채를 들고, 고대의 유적지 같은 걸 보고 갔을 때, 그는 유적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고, 한동안 유적지 구석에서 마음을 추스려야 했는데,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영어학원 부채로 머리를 말리며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말린다.

2024년 1월 16일 화요일

뒷산

양력 해가 바뀌었다. 7년을 넘어섰다. 작년 결산은 하지 않았다. 홀수 해에는 어쩐지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오전 동안 관리인 프로필 그림을 바꾸고 입고현황판도 고친 다음 어쩐지 마음이 동해 뒷산에 다녀왔다. △산이다. △산은 필시 어떤 전설이 깃들어있을 법한 모양새로, 갑작스럽다고나 할 위치에 엎드려 있다. 그 형상이 집짐승처럼 온순하고 부드러워 정감이 간다. △산에 대해서는 여즉 아무 전설도 들어보지 못했다. 없을 수는 없을 텐데. 누가 알까? 누구네 산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다. 누구네 산이더라도 무슨 뜻일까. 무주공산? △산에서 본 것은 겨울 나무, 겨울 바위, 겨울 수풀, 겨울 오솔길, 겨울 무덤, 겨울 창고 건물의 정겨운 모양이다. 저 나무는 어떤 나무고 이 바위는 어떤 바위다, 하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면서 내려왔다. 볼끼는 하고선 장갑을 끼지 않아 조금 후회했다. 꺾어 온 억새를 눈앞에서 흔들어봐도 쥐잡이는 별 관심이 없다. 죽은 억새라서? 나간 사이 쥐를 쫓아 한참 뛰어다녔는지도 모른다. 이불 덮고 잠깐 누운 다음에, 먼저 손과 발을 씻은 다음에, 쥐잡이를 위해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가 먹을 떡국을 끓이면서. 우리의 몸은 일터에 있어도 머릿속의 냄새는 불굴이다. 쥐잡이의 머릿속, △산의 머릿속에서도.

2024년 1월 14일 일요일

괴담 같은 것

어두운 물이 흐르는 다리
한밤에 혼자 아니고
둘이 지날 때
이런 얘기 한다
몇 년 전 저기 늪지대에서
시체 하나 떠오른 적 있대
여기 사람들은 강가로 나올 때마다
아, 이 밑에서 살인난 적 있지,
떠올린대
동행은 두 손으로 주먹 말아
긴 망원경 만들고
낯선 동시에 무언가 있었을지도 모를
검은 물 한가운데를 바라본다
그 얘기, 나도 들은 적 있어
구급차도 왔었대
반쯤 상의가 벗겨져 있었대
들것으로 실려나간
물에 불은 여자의 시체
목격한 사람도 많대
조금씩 커지는 이야기는
우리가 걷기 좋은 핑계 같다
평소엔 쓸 수 없던
동행의 망원경을 빌려
정말?
정말이야?
길지 않은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만
서로 묻고 답하는 밤
너무 무서운 밤
그런데 동행이 자꾸 웃는다

2024년 1월 9일 화요일

아키라

오토바이를 타고 도심을 달리고 있다.

커다란 배기통과 높이 솟은 손잡이,

검은색 가죽의 레이싱 슈트를 입고

아키라는 어느 카페에 들어선다.


자주색 테이블과 의자,

검은색 커피 머신.

아키라는 커피 머신 앞에 가서 커피를 내린다.

곧이어 다 내린 커피를 들고 테이블에 앉는다.


가죽의 삐걱이는 질감이

불편해 보이지만

아키라의 몸짓엔

주저함이 없다.


석양이 든 저녁,

창밖은 강렬한 소음과 배기 연기가 희끄무레하게 나고 있고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스마트폰을 꺼내

그것을 들여다본다.


조금 뚱하고

무미건조한 표정이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스마트폰을 본다.

이빨로 껌을 질겅이며.


아키라도 용병이 될 수 있어?

아키라가 지닌 브로치 안의 여아가 묻자

될 수는 있지만 안 할 거야, 그런 일은.

아키라가 답한다.


폭력에 대한 암순응들이 자주 보이는 시대.

그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사이버펑크의 느낌은

아직 나지 않는다.

2024년 1월 8일 월요일

16

  

카페에 왔다 카페는 처음 오는 카페다사실 지나가면서 많이 봤는데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들었다그런데 오늘 이상하게 여기를  지나가보고 싶었고지나가다 괜찮으면 들르고 싶었고지나가다가 보니 괜찮은  같아서 들렀다오늘은 그냥 집에서 나가서 목적지로 가는 동안 아무렇게나 걸어보고 싶었는데아무 곳이라고 해봐야 사실 그렇게 아무 곳은 아니다 주변은 이미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자리를 바꿨다 자리는 정말 맘에 든다내 마음에 드는 자리는 항상 쪽이 벽이나 유리창이어야 하는  같다구석 같은  말이다그리고 정면은 바깥을   있는 쪽이면 좋다카운터와 등지거나 멀리 떨어진 곳이면 더욱 좋다왠지 고립된 느낌이 드는 곳이면 더욱 좋다하지만 그런 자리라고 해도 실제로 앉아보면 계속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수도 있고왠지 불편할 수도 있다그러니까  자리에 앉아 보기까지는 전혀 모르는 것이다이상하게 사람들과 시선이 교환되고 그래서 불편한 기분이  수도 있다지금까지 많은 카페에 앉아서 조용히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를 꺼내 글을  적이 많다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그게 불편했던 적도 있다어느 카페에서는 책이  읽어지고 어느 카페는 커피가 맛있다사실 커피 맛있는 곳은 많이 아는데그냥 편하게 앉아 있을  있는 카페는 최근에  적이 없는  같다 주위에 그런 카페가 없기도 하고돈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마신 적도 많다하지만 이제 다시 그런 카페를  찾아볼 생각이다카페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이다결국 커피를 마시러 가는  아닌  같다그냥 카페에 가는  행위 자체카페까지 걸어가고 혹은 자전거를 타고 가고그렇게 가는  자체가 이미 시작인  같다무엇의 시작그건  모르겠다어떤 생각을 새롭게   있을지도 모르고어떤 일기를   있을지도 모르고카페에 그냥 앉아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오늘도 카페에 가려고 나오면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나도 모르게 챙겼다하지만 노트북이나  크다고 생각되는 것은 챙기지 않았는데거창하게 무언가를 하러 가겠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한 카페에 가고 싶고괜찮으면 거기 앉아서 홍차 같은   마시고 싶고 분위기가 괜찮다면 이렇게 일기를 쓰게  수도 있으니홍차에 설탕이라고 생각했지만 소금인  같은  가루를 넣었다홍차가 짜다그래도 맛있다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하루인데올해 들어 가장 햇빛다운 햇빛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그래서 그냥 걷고 싶었고  햇빛을  쐬고 싶었지만 건물들에 가려져 거의 그림자만 지나서 왔다여기 있으니 편안하다아니다사실 불편하다하지만  불편함은 내가 좋아하는 불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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