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요일

교정의 요정

교정의 요정이 나타나 내일까지 이 원고를 다 교정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교정의 요정은 그 반대의 일을 합니다. 몇 명의 사람이 매달려 아무리 눈이 빠져라 교정을 보더라도 인쇄된 책에 반드시 하나 이상의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교정의 요정의 소행입니다. 맞춤법을 지적하는 글의 어디 한 군데는 반드시 틀리기 마련이라는 사실, 그로부터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또한 짓궂기 짝이 없는 교정의 요정의 소행입니다. 교정의 요정은 문자와 비문자 사이 틈새 차원에 살고 있습니다. 그 차원에 얽혀 있는 것은 인쇄소, 인쇄기, 출판사 사무실, 교정공과 디자이너와 저자의 컴퓨터 내부, 광케이블, 전화선, 수많은 사람들의 뇌신경, 그리고 읽힘이 일어나는 시간과 일어나지 않는 시간, 전 세계 언어문화의 흐름... 글이 책으로 되기 위하여 추상적으로 물리적으로 거쳐 지나가는 모든 것입니다. 교정의 요정은 양지바른 데서 다리를 꼬고 드러누워 있다가 내키는 때가 오면 손깍지를 쭉 밀고 활동에 나섭니다. 한 글자를 슬쩍 바꾸고, 자음이나 모음 한 개를 슬쩍 돌려놓고, 한 칸을 지우고, 두 칸을 넣고, 선과 숫자를 밀고 당깁니다. 그냥 순전히 장난으로요. 어쩌면 요정에게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교정의 요정의 개입은 불가항력입니다. 언제 개입하는지 알 수 없고 어떻게 개입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맘대롭니다. 하나의 거역할 수 없는 신비이지요. 따라서 완벽한 책 같은 것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을 적어도 우리 교정공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틀릴 수 있느냐, 도대체 왜 아무도 못 본 거냐, 이거를 도대체 왜 틀렸냐고 길길이 날뛰는 이가 있다면 교정의 요정이 그랬다고,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속삭여 주십시오.

2024년 4월 20일 토요일

힘 같은 것

여자는 스스로 피부를 벗기고
피부를 벗겨버린 여자가 된다
이것이 그의 결정
여기까지가 그의 결정
피부를 동그랗게 벗긴 것도 아닌데
그냥 동그란 환부 위를
뒹구는 세모난 아픔
뭐라 말할 수 없는 모양 하루
찬장의 약통을 털어서
도움이 될 만한 연고를 바른다
대부분 이삼 년씩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
이 물질을 발라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네모나게 닫힌 차마
바라는 바대로 이루어질 순 없겠지요
그는 인생이 동그랗게
아주 동그랗게 말려 있다고 느낀다
도르르 말린 인생의 양 끝을
손으로 잡아당긴다
한껏 늘어난 인생이
끊어질 때까지
끊어져도 과연
계속될 때까지
여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엔 영원한 생활이
여자의 친구입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게 만든다
모든 좋은 이야기는
여기에 반드시
죽음에서 일어난다

화가였던 金 같은 것

문을 그리기 위해 벽을 그렸다
틈이 생긴 창문을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창틀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리기 위해 땅과 하늘을 그렸다
아무도 없는 거리와 골목 풍경을 그렸는데
거길 지나갔을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다 보였다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또는 그는
24시간 영업하던 가게의
금일 휴업 안내문을 크게 그렸다
그런 건 볼수록 가깝게 느껴진다
가까이 가서 쓰다듬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회화적인 이차원 평면…
무심코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은 마음이
조만간 이루어질 듯이 다가온다
그는 성실한 은행원이었지만
자기가 진짜로 뭘 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은둔 화가였다고 한다
그런 건 아무런 문구도 적히지 않은 채
대형 빌딩의 벽면에 걸려 있는
완전 순백의 현수막 같다
순정 순수 순문학 같은 거
세상에 없어도 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표현
하고 있는 거

2024년 4월 15일 월요일

나의 교정 노하우들

나의 실전 교정 노하우들을 대공개한다.

  • 갈지자교정
  • 일필휘지로 썼니? 나도 갈지자로 본다. Z자로 휘저으면서 한 번의 내려감으로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본다.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2회 수행하여 문장의 뜻까지 보는 ZZ교정으로 보충.

  • 5% 샘플링교정
  • 임의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틀린 것이 있는지 찬찬히 본다. 틀린 것이 있다면 책 전체에서 해당 오류 패턴만 찾아 수정한다. 모두 수정하였으면 다시 임의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전체 페이지수에 0.05를 곱한 수의 임의의 페이지를 확인.

  • 카체이싱교정
  • 막히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교정. ‘일단 본다’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전복폭발엔딩)

  • 통일선봉대
  • 친구들아 그날은 반드시 온다! 소원은 통일, 오직 통일 외길로... 문자와 문자 사이, 벽과 벽, 선과 면, 너와 나를 지나... 차원을 건너 스타일을 통일하는 데 주력한다. 오직 숫자와 모양만 보며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

  • 해킹교정
  • 음모론에 맞서는 하나의 방법: 음모론의 논리 안에서 음모론을 해킹(예: 백신 접종 후 50분 내로 150cc의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인간 기지국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어순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사 수정·문장부호 추가 등 최소한도의 몰래 교정. 자기가 쓴 거 고치는 데 질색하는 저자의 엉망 문장을 어떻게든 ‘규범상으로는’ 맞게 만든다.

  • 메소드교정
  • 폭주하는 교정욕망을 평상시에도 풀어놓는(unleash)다. 업무 중이건 아니건 교정 ON 상태로 만사를 바라봄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어디로든 용암이 흐르듯 무엇이건 교정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모든 것이 마뜩잖다!’

  • 이빨부수기
  • 이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교정 & 쉴 새 없는 당분 공급의 투트랙 접근. 악으로 깡으로 퇴근까지 닥치는 대로 고치면서 버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죽을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탕비실 운영 관리에 대한 강력한 민주적 개입을 위한 사내 조직화에도 매진.

  • 웃는얼굴교정
  • 웃는 얼굴을 만든 채로 교정한다(거울을 보면서 사전 연습). 그 어떤 쓰레기 같은 교정지 앞에서도 웃는 얼굴로 뇌를 속임으로써, 다른 건 몰라도 정신위생 하나만큼은 확실히 챙긴다. 꼬리로 몸통을 흔드는 비책. 개인적으로 가장 애용하는 방법으로서, 기본 교정 기법으로 적극 추천.

  • 킬러교정
  • 다들 살인을 좋아한다. 요즘 세상에 재밌으려면 무조건 살인이 들어가야 한다. 자신을 킬러라 생각하며 오류를 찾아내 냉혹하게 교정, 노동으로부터 재미를 찾는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으므로 사적인 감정을 버리는 것이 중요. 피할 수 없음을 즐기는 자세. 망나니교정, 살인마교정, 전쟁영웅교정 등으로 응용 가능.

  • 방통요법
  • 나는 뇌양현의 방통이고, 지난 100일 동안 술만 마셨으며,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장비가 지금 칼을 들고 와 있다. 한나절 안에 어떻게든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별거 아니다. 나는 백리지재가 아니다... 어차피 이게 맞는지 틀린지 알아차릴 사람도 없고... ‘이 세상에 교정공은 너와 나뿐.’

  • 약물교정
  • 진통제 한 알 먹고 교정. 미신이나 헛된 기대, 머리에 힘주기 등이 아닌 의학적으로 검증된 고통 경감 효과를 노린다. 약물은 하나의 분자-기계인데 안경을 쓰는 것과 뭐가 다른가? 못 말리는 교정사이보그 되기. 해당 기법 사용 중 금주할 것. 과용에 주의.

  • 배짱교정
  • 내가 교정 개판으로 봤는데 어쩔?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어? 어?

  • 인권교정
  • ‘그들도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이다. 개들도 거리에 똥을 누면 주인이 주워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권리 옹호의 교정 정신 최대화. 하지만 저도 인간인데요...?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언뜻 오류처럼 보이는 것들도 더 깊은 뜻이 숨겨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聖人교정 단계로 심화.

  • 심안교정
  • 눈을 감고 이마 한가운데로 정신을 집중. 시간의 흐름에 몸을 기대고 마음의 눈으로 교정지를 본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응원이 들릴 때까지. ‘일어서라 교정공... 깨어나라 교정공...’ 거대한 활력이 솟아오르는 깨달음의 순간이 올 때까지... 나를 해고해 줄 때까지...

(당신만의 교정 노하우를 친구와 공유하세요!)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적 같은 것

꿈에서 손에 피를 묻힌다
알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누군가를 찾아가는데
내가 죽인 사람도 내가 찾아간 사람도 다
모르는 사람이다
현장의 사람은 나뿐, 그럼 내가 범인인가?
너는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끔찍한 꿈도 나를 흔들진 못하네,
이것이 나의 인상이다
아침에 받은 월급 명세서처럼
저녁엔 찢어버릴 수 있는…
대신 절대로 찢어지지 않는 작업복을 배급받고 싶다
넉넉한 주머니가 있으면 더 좋겠지?
일터의 넝쿨 식물이 가지 하나를 집요하게 세운다
해가 드는 쪽으로 화분을 회전시킨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그보다 자주,
새벽에 잠에서 깨면 낮의 일들이 헛기침 중이다
뒷짐을 지고 베개 밑에 도열해 있다
돌아누우면 등 뒤에서 웅성거리는 것들
어떤 원예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실내에도 풍수가 있어요 넝쿨 식물 같은,
어딘가 꼬인 것을 집 안에 들이면 좋지 않아요
내 생각은 다르다
동시대의 너도 잘 알겠지만, 그것은
이길 생각이 없는데 질 생각도 없는 겨루기다
식물을 지키는 건
작업복에 대한 소망을 좀 더
진실하게 만드는 생활…
아무도 나를 베어가지 못한다
베어간다면 너는 사람이겠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꿈에서나 보았다
꿈은 세계 속에서 펼쳐졌다

2024년 4월 10일 수요일

초월일기 14

 


오랜만에 곡물창고에 오다 


온 이유는


목적 없이 그리고 대가 없이 쓰는 글쓰기가 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대가 없이 목적 없이 쓰는 글이 꼭 좋은 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쓸 때 가장 재미있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맞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재미는 개그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요즘 기획적인 측면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고 내가 하는 발화들이 그냥 날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해야 타격률이 높을까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자유로운 글쓰기와 아무 대가 없어도 할 수 있는 말이 귀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난 엄청난 수다쟁이라 그냥 종알종알 떠들고 싶은 게 아닐까 ?

되게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자체로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블로그가 내게 귀한 공간이었던 것도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그곳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엔 또 안 그러지만


생존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생존에만 너무 몰두하면

생존하는 것에.... 오히려 의미를 잃기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도 같은 것이고 


오늘은 총선이 있었다 그래서 블로그에 정치이야기를 솰라솰라 썼다 내가 아무 말이나 할 때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 내가 아무 말이나 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고 나는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데 아무 말이나 해도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면 참 좋을 텐데 어쩌면 난 그냥


널 정말 좋아햬~~ 너도 날 좋아하렴


이런 이야기나 주구장창 하고 싶은 게 아닐까 모든 이야기는 다 이 이야기의 변용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 했을 때 


너의 망상에서 벗어나~~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더욱

어쩌라고

싶은 것임 


2024년 4월 1일 월요일

24년 3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99,994원 (0원 + 299,595원 + 418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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