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4일 월요일

침묵을 위한 시간


과거의 일기 중, 남아있는 인상에 비해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문장이 있었다. 두 달 전에 공연을 하고 돌아와 쓴 일기의 일부였고, 무대 위에서의 어떤 순간을 ‘기쁨도 슬픔도 아닌 제로가 최대치로 확장된 감각’이라고 적어두었다. 하지만 기쁨이나 슬픔은 감정에 속하며 감각과는 다르지 않나. ‘기쁨도 슬픔도’, ‘확장된 감각’ 둘 중 하나는 나오는 대로 적다 보니 실수한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실수했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다시 잘 생각해보자. 당시에 약간의 기쁨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니, 기쁨은 나중에 왔던 것 같다. 제로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쁨과 슬픔을 대조되는 단어로 적었다는 건 감각에 감정이 딸려온다는 것을, 혹은 반대의 경우도 의심 없이 전제했다는 말이다. 이 경우엔 어떠한 감각 후에 그로 인한 감정이 왔다고 생각하며 적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건 어떤 감각이었나.
소리를 담은 공기가 머리의 중앙으로부터 외부를 향해 먼지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감각에서도 감정에서도 평행에서도 뷸균형에서도 제로에 가까웠다. 형체 없는 것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 중 한 가닥이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고, 그것은 또한 전부가 빠져나가는 소리와도 동일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소리. 나는 일전의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나만이 진입할 수 있는 가청의 영역에서 그 안에서만 허용되는 기준으로 노래를 고칠 때의 외로움이 있다 그걸 사랑함’
이 문장에 사용된 모든 단어들의 오차율은 제로에 가깝다. 당시 무대에서의 감각은 이 문장과 가장 가깝게 닿아 있다고 느낀다. 그걸 감정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불안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정적의 정중앙에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 온 몸은 물론이고 피부가 공기를 긁어내는 감각 또한 최고치에 오른다. 쌓인 감각들의 무게 때문에 꼼짝할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 때, 온 힘을 다해서 손가락을 움직인다. 숨을 들이쉰다. 이 과정에서 감각을 일으켜 낸 것, 그리고 감각의 이후 내내 머물러 있는 것은 불안함이다. 불안함이 있었다. 모든 걸 딛고 제로에 닿았을 때, 그 순간에 닿았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시공에서 기쁨과 슬픔과 불안함과, 온 몸의 감각, 고개를 움직일 때 밀려오던 공기의 저항까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소리가 있었다.
여전히 제로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제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로가 아닌 모든 세상을 끌고 와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로를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이 왔고, 여기에 있었고, 제로를 위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왔다. 그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 세상의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바라는 것도 같다. 그러나 동시에, 단 하나의 소리는 그 순간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이기도 했다.

*제목 인용 : 침묵을 위한 시간 」 패트릭 리 퍼머

2018년 5월 1일 화요일

행진 구경

이사야는 아침부터 종일 지붕 위에 올라가 있다. 바람도 불고 날도 흐린데 위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관리인은 오늘 나오지 않았다. 무슨 날인가? 귀를 기울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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