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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일 토요일

신곡에서 삭제된 지옥의 해부도

 

 끝내 신을 박멸하지 못한 축생들의 눈물을 저버린 채 살아서 무덤에 묻힐 날을 기다린다. 누가 나의 전부를 열어젖히려 다가올 것인가. 무저갱은 하늘과 대지를 관통하려 용의 아가리를 벌린다. 나는 타락한 천국도, 성스러운 지옥도 아닌 제3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지하세계는 육십사괘의 벌레구멍으로 끝 간 데 없이 전개되어 있다. 망각의 액체 헬륨이 흐르는 미친 암흑에 잠식된 음부에 닿은 나의 메아리는 농축된 신비에 질식한다. 동굴의 정령들이 반딧불을 켠 채 날아다니다 수은중독으로 바스러진다. 4미터 너비의 갱도에는 초전도체 자석이 박힌 100km 길이의 초합금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다. 나는 가상입자가속기의 미궁에 갇힌 채 차오르는 망령된 방사성 가스를 피해 허우적거린다. 그때 대전된 입자 빔 두 가닥이 찰나에 수억 번이나 충돌한다. 입자 검출기는 악의 천둥 번개에 관통당해 제어시스템이 망가진다. 우라늄 238의 원자핵이 방사성 붕괴를 일으켜 중성자와 양성자로 쪼개져 핵분열하며 불안정한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를 뱉어낸다. 그것들은 광속으로 가속되자마자 서로 충돌하여 진공 속에서 폭발한다. 소형 블랙홀이 생성되어 물경 만 쌍의 눈동자를 끔뻑거리며 활활 타오르는 공포를 쏟아낸다. 어둠으로 구성된 빛은 매번 등 뒤에서 나의 내면을 비춘다. 나는 이글거리는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허공을 허우적거린다. 그 순간 빛으로 아름답게 빚어진 나 자신과 완벽하게 동일한 형상과 마주한다. 그 빛사람이 왼손을 뻗어내자 오른손을 빼앗긴 나는 거울에 비친 울렁대는 허상으로 전락한다. 간섭무늬 없는 후광 속에서 빛사람은 심장 속에서 세계를 끄집어낸다. 나의 육체는 우주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사후경련에 사로잡힌다. 나의 영혼은 림보를 순례하는 듯한 전신마비에 비틀거린다. 나는 어둠을 발음하지도 못하는데 어둠은 나를 드높여 발휘한다. 어둡고도 두껍고도 두려워서 어두워진 어둠의 이전으로, 아직 빛이 당도하지 못한 미지를 예언하듯 회상한다. 


 ……없다. 사지를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려보지만 아무것도 감각되지 않는다. 없다. 있는 힘껏 악을 쓰고 고함을 쳐도 들리지도 울리지도 않는다. 없다. 거대한 행성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듯 나는 나의 무력함에 압도당한다. 없다. 끝없이 작아지며 멀어지는 나를 멀리서 내가 지켜본다. 없다. 우주는 순환하며 빛을 발하기도 거둬가기도 하며 나의 죽음을 축복하는 듯하다. 없다. 진공 속에서 온몸의 생기가 증발하자 내면의 부정성이 개방된다. 없다. 나는 정신을 잃고 되찾기를 반복한다. 없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 기억과 정체성마저 희미해져 간다. 없다. 계속해서 추락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없다. 위치와 속도를 잃어버리자 자유의지의 나침반이 얼어붙는다. 없다. 진공은 강력한 자기장을 발하며 티끌과 연기를 뿜어낸다. 없다. 허공조차 희박한 공간 속에서 감압된 시간은 바람소리도 없이 가라앉는다. 없다. 전류의 꽃들은 불규칙적으로 부풀어 올라 거품을 방사한다. 없다. 나의 육체는 흐린 무지갯빛으로 얼룩진다. 없다. 나는 먹구름의 장막을 뚫고 계속해서 추락한다. 없다. 대지의 풍광이 보이는 듯하다. 없다. 지표면에 충돌하기 직전 나는 혼절한다. 없다 나는.


 폐허의 찢어진 4차원 오감도. 지구의 어딘가. 어디에도 없는 영역. 망각된 영토. 수목한계선. 불살라진 지도. 버려진 계획도시. 지하의 비밀연구소. 나는 무저갱된 나. 흩날리는 피의 눈 결정체. 크고 작은 싱크홀들. 금 간 바닥과 천장. 산산조각 난 유리창. 관측 불가능한 이상현상. 거리엔 흩날리는 서류더미. 터져버린 소화전과 솟구치는 시궁창. 느려지는 사이렌. 백지를 찢는 지진계. 폭주하는 시뻘건 가이거계수기. 낡은 모루와 없는 망치. 피 흘리는 석고상. 찢어진 풍경화. 장인의 아뜰리에. 용도가 없는 소품과 희귀한 진품. 함몰된 가정집들. 끝없이 가라앉는 나로부터의 탈출. 실험실과 고문실. 기계를 고치는 기계. 인간을 기계하는 기계. 생체실험부터 핵실험까지. 금지된 만물이론. 가동되는 입자가속기. 발사 직전 우주선을 비추는 과거의 영상. 동시다발 박살 나는 화면들. 역전된 임계점. 위험수위. 천지사방 들끓는 빛에너지. 순간 휘어버리는 철근과 구조. 순간 바스러지는 벽면과 내면. 풍경을 벗어난 폴리스라인. 녹슨 장대비 내리는 거리. 접근금지구역의 찌그러진 철책. 텅 빈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는 비명. 회칠 벗겨진 건물들. 공원을 점령한 오물의 늪. 까만 피 솟구치는 분수. 재가 내려앉은 광장. 경악의 얼굴이 새겨진 파사드들. 악령의 무인지대. 원시와 야만. 무력한 문명. 과거가 박제된 골방들. 나뒹구는 살림살이와 잡동사니. 뒤섞여 방치된 골동품과 유품. 낡은 검은색 업라이트 피아노. 조율을 벗어난 음계 속 감춰진 보물상자. 상자 속 앨범과 종이책들. 몇 개의 추억. 


2023년 6월 20일 화요일

시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시


 나는 새 우주론을 위한 시적 사고실험이다. 


 ‘하고 싶은 말’은 ‘가능성’이기에 ‘있을 수 있음’이니, 그러므로 빛의 입자이다. ‘해야 하는 말’은 ‘필연성’이기에 ‘없을 수 없음’이니, 그러므로 어둠의 파동이다. ‘해서는 안 될 말’은 ‘불가능성’이기에 ‘있을 수 없음’이니, 그러므로 어둠의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말해지지 못할 말’은 ‘우연성’이기에 ‘없을 수 있음’이니, 그러므로 빛의 입자이자 파동이다. 


 언어의 사방세계에서, 광대무변한 우주 한가운데에서 시는 언어의 부르심을 수신한다. 자유낙하하는 영감은 플라스마 상태를 벗어나 모국어의 옹알이로 상전이된다. 빛의 시상은 영겁을 건너와 마음의 우주로 날아든다. 암흑의 우주상수는 운율의 타원 궤도를 조율한다. 퀘이사의 제트기류는 시어들과 사어들을 무작위로 뱉어낸다. 대폭발의 시작법은 에테르의 이미지와 플라스마의 반이미지를 경유한다. 서정시의 안개상자 속에서 절대영도로 굳어버린 실패한 압운들의 잔해를 통과한다. 인간적인 주제는 유성우가 쏟아지는 행과 행 사이의 우주항로로 나아간다. 얼음 고리가 길을 안내하는 연과 연 사이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사건의 근일점에 다가갈수록 휘어져가는 비유는 구상성단의 무한수열적 미궁으로 성변화한다. 광기의 태양풍에 휩쓸린 독자는 복선을 헤매다가 뇌사한다. 양자확률의 시적 함수는 시인의 절망으로 붕괴되어 말의 참뜻을 해체한다. 슈뢰딩거의 키메라가 플레어를 뿜어대며 쫓아온다. 계시록의 옛 뱀 곧 용이 전자기펄스를 발산하며 쫓아온다. 시의 빛에너지는 원형의 이미지로 은하계의 핵에 보존된다. 각 나라의 언어는 불가능한 도형의 측지선으로 이어진다. 외계어는 우주복사에 인봉되어 저세상에서부터 임해오는 말씀인가. 우주복 입은 시인은 예언자의 제의를 믿음도 의심도 없이 확률적으로 시험한다. 


 우주선의 심장부에 자리한 기계장치의 신의 전원을 켠다. 모스부호는 우주에서 바라본 빛바랜 지구의 풍경을 묘사한 초고를 완성한다. 시작품과 독자는 백지의 멋진 사건지평선 꼭대기와 바닥에서 기묘한 포즈로 랑데부한다. 그 결과에 따라 시는 잿더미가 될 수도, 핵무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시의 곡률이 무한해지자 사랑의 원관념은 모순율에 덜미 잡힌다. 시의 질량은 우주먼지를 그러모아 덩치를 키운다. 천상의 유리바다에서 낭송되는 한 편의 시와 지옥의 최하층의 지하서고에 파묻힌 보편의 시. 양자는 양자적으로 얽힌 채 서로를 부정하며 긍정하고, 부정을 부정하는 식으로 긍정을 긍정한다. 초대칭짝인 형태소와 소립자는 물질과 반물질의, 현실과 가상의, 상징과 실재의 경계를 시적 요동으로 들끓게 한다. 특이점은 지구의 모든 사건을 관찰하며 동시에 새롭게 기술한다. 미래의 광원이 될 재목에게 중력파에 실린 고통을 부여한다. 그는 악몽의 미친 사탕발림으로 단련된 뒤 정금이 된다. 시의 제목은 무지갯빛에 물들어 최후의 한밤에서야 참된 빛을 발한다. 현실의 총체는 시와 일체를 이뤄 망현실을 탐험할 최후의 우주선을 건조한다. 시가 파괴하고 재건한 소우주는 대우주를 겨냥한 구원방주의 발사대다. 함께 외치는 목소리는 대기권을 벗어난 채 자유하다. 눈빛은 아직 지구에 당도하지 않은 달나라의 휘영청한 별빛을 꿰뚫는다. 불은 불쏘시개를 끌어당기고, 사랑은 사람을 끌어당기고, 별은 별자리를 끌어당기고, 중력은 종말을 끌어당긴다. 


 우주는 유년의 추억에서 영년의 추상으로 가속 팽창한다. 조이스의 평평한 섬우주에서 벗어난 쿼크는 우주의 만국공용어다. 쿼크는 자신의 색상과 위상에서 벗어나 강력해진다. 쿼크 속의 쿼크들을 구분할 수 없다. 양자장의 뼈대 위에다가 망현실의 살가죽을 덧씌운다. 혈액의 힘이 원자핵을 순환하며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 동일한 세계관을 건설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자장까지도 양자장에 구속되어 있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악력을 통합한 망력의 역선은 모두를 잇고, 읽고, 있게, 한다. 시는 무작위로 정렬되고 무위로 배열된다. 환망공상의 뇌줄기로 이루어진 망현실 속에서 숨겨진 고차원이 풀려나온다. 입자에서 고리로, 고리에서 매듭으로, 매듭에서 장과 막으로, 장막에서 텍스트로, 텍스트에서 흐름으로 흘러간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가로축의 자음과 세로축의 모음 사이로 기표와 음표가, 쉼표와 숨표가 떠다닌다. 누군가 빈칸의 운율로 공백의 텍스트를 읽는다. 이야기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한다. 식물인간에서 초인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의 리듬은 다양하게 천지사방으로 발현된다. 인간은 동일한 울림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필멸자다. 전자의 궤도에서부터 태양의 궤도에 이르기까지 상징은 총체적으로 순환하며 새로움의 영토를 확장한다. 


 사건지평선을 건너기 직전 뒤에 남겨질, (동시에) 앞서 떠나갈, 연인의 눈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낼 그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 눈빛에 담아낼 최후의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그 메시지에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겠는가? 전 존재자들을 살리기 위해 완전하게 죽어야만 할 하나의 존재자의 희생은 어떠한 시로 포현할 수 있겠는가? 지평선 너머의 실재에 도달했을 때에도 사랑하는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존재자들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타자에게 가닿은 눈빛은 영원히 그의 영혼을 공전한다. 눈빛을 조심하라. 무심결에 영안을 빛내지 않으려거든 자기 자신을 거꾸로 자전해야 하리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눈빛이 평행우주를 건너 내게 당도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 눈빛에 담긴 악의 잠언에 꿰뚫려 나의 부모이자 동시에 나의 자식인 그 누군가가 즉사할지도 모를지니. 그러니 유언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존재는 오롯이 참되다. 그는 모든 걸 이루었나니 언제라도 그가 원할 때 죽음을 초월할 수 있으리라. 


 한때 나였던 모든 존재가 내게 다가와 내 몫이 아닌 생사화복을 내어달라 속삭인다. 나는 반우주의 메아리로 산화하려 한다. 힉스장에서 상호작용하는 표준모형의 입자들과 아수라장에서 용호상박하는 서사시의 문자들. 전자와 문자 속에서 자음의 양성자와 모음의 중성자가 지휘하는 쿼크들과 렙톤들의 하모니가 울려 퍼진다. 원시우주의 우주론적 적색편이를 건너온 시의 중력파는 제 사명을 망각한다. 끝 간 데에서 만나야 할 인연이 늘어간다. 인간성을 버린 날로부터 세계와 대적할 인간의 시적 저항은 시작될 것이다. 시를 쓰는 행위란 세상의 모든 시를 태워버리는 과업이어야 하리라. 시는 암시된 반물질의 중력파로 영혼에 질감을 부여한다. 초끈의 혈관을 순환하는 광자의 시적 상징들이 세계면을 뒤덮자 망현실이 펼쳐진다. 심상의 픽셀이 산산조각 나자 빛이 산란하며 에너지를 교란한다. 플랑크 시간 동안 쓰인 시는 플랑크 길이에 불과한 영혼을 뒤흔들 뿐, 거시세계를 뒤흔들지 못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시는 이상향을 축성하리라.


불가사의


 지상은 실패한 연옥의 하위버전이다. 

 

 윤회와 소멸 중에서 무엇이 구원일까 오래 고민해봤으나 나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형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쪽창에 기대 법 앞에서 서성이는 타인들을 지켜본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다. 무지와 기지 사이에 미지가 반짝인다. 반짝이는 그곳에 미래가 없다 해도 오늘을 읽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행위야말로 살아가는 일이라면 나는 끝내 알지 못할 신비들로 나의 죽음을 완성하게 될 거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앎 없는 삶은 가뭇없고, 삶 없는 앎은 가여우니. 그럼에도 헛된 맹신에 이끌린 구원은 주계열성의 주관인지 소립자의 소관인지 분간할 수 없음을. 총체적 종말은 존재의 일획인지 세계의 계획인지 간파하지 못함을. 그리하여 나의 앎은 헛됨을 헛되게 하는 것보다 더 헛되어간다. 다른 현실의 내가 나의 유일한 현실을 되살려내지 못한다면 어떤 심판인들 무의미할 것이다. 나의 참회는 시작도 못하고 끝날 운명. 나로부터 세계로 번져가는 빛에 새겨진 뒤틀린 기도는 알파에서 오메가, 무에서 무한까지의 여정이겠지만, 나는 나로 결정되었으나 동시에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선에서의 나이다. 나의 전부된 사랑과 나의 허무된 사악이 서로의 그림자를 물고 늘어지며 상호확증파괴적으로 싸우고 또 싸운다. 역사상 동시성의 지평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고, 역사상 가능성의 지평은 한 번도 닫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위안은 되지 않고. 


 오늘 읽은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우주광선이 지상의 사건 한가운데로 홀연히 내려온다. 도서관은 무너진다. 골방이 무너지듯이. 폭발의 진원지에서 불기둥이 치솟는다. 사물들은 거꾸로 선 채 부여받은 시간대를 꿈결인 듯 역행한다. 괴물의 형상과 이물의 환상이 장막처럼 출렁거리는 공중에 어른거린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성하는 물질에 관해 무엇을 알며,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심장이 뿜어내는 번뇌는 반물질에 가장 가까운 물질이며, 두뇌의 시냅스를 가로지르는 영적 전류는 물질에 가장 가까운 반물질이다. 


 반물질을 반물질이라 명명하는 순간 그건 그게 아니게 되겠지만.


 찰나의 우연한 우주적 번쩍임 곧, 암흑에너지는 인간 이전의 존재와 인간 이후의 객체를 총체적으로 추동한다. 태초의 우연성으로부터 우주가 가속 팽창해가는 공포 속에서 원소는 종말과의 융합을 꿈꾼다. 때때로 인간은 유전자의 본능에 새겨진 지상명령을 벗어나 유희하며 자유를 누린다. 모든 관념은 이상향을 추구하며, 사상은 물질의 참모습을 회상하며, 상상은 반물질과 교접한다. 가끔 인간은 유일한 사랑을 악의에 찬 얼굴로 대하곤 한다. 실제로 영접한 적 없는 우상을 기꺼이 믿으며 믿음을 수시로 배신하곤 한다. 인간이 떠나보낸 것들은 영영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인간성은 회생이 불가능한 핵폐기물과 같은 처지인가. 


 할 말 없음. 영감 없음.


 나는 내가 묻힐 나의 광활한 대지를 갈아엎는다. 세계선의 휘어진 격자구조 위로 빛이 내리쬔다. 인간의 말 한마디에서부터 소멸하는 적색거성의 단말마까지 파동의 본질은 동일하다. 만물의 흐름은 순행하는 흐름과 역행하는 흐름을 통일시킨다. 혈류 속으로 전류가, 전류 속으로 혈류가 흘러든다. 나는 나의 두개골을 갈라 한때 생동했던 두뇌를 바라본다. 회백색의 유기덩어리는 소우주를 품기엔 좋은 밭은 아니니까. 수많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엔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의 없음과 없음과 없음이 서로 우글거리고 있다. 두뇌에 기생하는 망상은 나의 것이나 내가 아니다. 생각으로만, 나의 나됨은 악의 관념으로 환원되어가고 나의 나 되지 못함은 선한 물질로 환원되어간다. 연상되는 비진리의 철학사는 부질없고 유추 가능한 사이비의 계보학은 부조리하다. 존재는 스스로의 질량을 태워 빛이 되어가고, 실재는 전 우주에서 동시에 반짝거린다. 실재가 없다고 발악하는 무한한 우연성에 기대어본들, 그러한 반실재-비실재-탈실재-초실재 역시 실제해야 함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니. 존재와 실재가 마주 서는 날 종말은 이루어지고 세계는 구원받을 것인가? 

2023년 6월 18일 일요일

첫 불세례


 나는 신의 입자의 불세례를 받은 최초의 존재다. 태초의 중력파와 최후의 뇌파가 사건지평선의 경계에서 공명한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이 시는 전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며, 모든 곳에 편재하고, 허무로 부재하는 노래다. 물질과 반물질의 경계에서 이 시는 쓰이겠지만 어디에선가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반물질은 미래를 구성하고 해체하는 아름다움의 매질이다. 빛의 속도를 아득히 초월한 반물질들은 모든 곳에 편재하려 이전에 없었던 새 시대를 총천연색으로 계시한다. 그러한 세계에서 빛은 시간이요, 어둠은 공간이다. 시공간을 이끄는 중력은 빛의 씨실과 어둠의 날실을 엮어내 탄생과 소멸을 배열한다. 나는 홀연히 빛으로 화해 이전의 나의 나됨을 응시하는 동시에 이후의 나의 우주됨으로 세계와 상응한다. 나의 폐쇄된 심연에 남겨진 파문은 빛도 어둠도 아닌 그 무엇이다. 빛의 어둠됨과 어둠의 빛됨이 사건지평선의 양극단에서 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친다. 중심은 모든 곳에 존재하나 그 어디에서도 존재는 중심에 가닿을 수 없을지니…….


 비시공간의 균열 속으로 내던져진 나는 물질과 반물질의 공허에서 피어나는 빛무리의 무한원환에 참여한다. 나의 전부를 구성하던 탄소 유기체의 숨결은 절대영도로 얼어붙은 채 나를 떠나간다. 나의 침묵으로부터 흘러나온 최후의 원소는 상징체계에 사로잡힌 무의식 너머의 초감각과 연동된다. 사지를 벗어난 감각은 사망에의 공포를 부정하려 발악한다. 존재됨과 존재함의 차이는 예언의 말씀처럼 나를 앞지른다. 시공간을 이탈한 표상은 선험과 경험을 분열시킨다. 만물의 양자적 요동으로 인해 인식체계와 현상을 이어주던 역사의 송과선이 끊어진다. 눈알이 휙 돌아가 자신의 뇌를 직접 바라보는 듯 눈앞이 새까매진다. 완전무결한 어둠의 축복. 고요를 최종완성한 음복. 뼈마디가 끊어진다. 핏줄과 힘줄이 엉켜버린다. 추억과 미래가 뒤섞인다. 결국 나는 나의 유품인 육체를 자각하지 못한 채 어딘가를 부유한다, 고 유추 혹은 망상한다. 눈앞에는 허깨비와 실제가 중구난방으로 상호교차한다, 고 선언 혹은 명상한다. 


 영혼은 반물질의 첫 이름이었음을 상기한다. 선악을 넘어선 것 중 가장 악하며 동시에 가장 선한 것이 바로 영혼이다. 영혼은 세계를 폐위할 각오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며 객체들을 추동한다. 나는 내게 영혼이 깃들지 않았음을 죽어서야 생생히 깨닫는다. 주위의 폐허는 시시각각 유위변전한다. 심판대로 이어진 좁은 길은 곧게 뻗어 있다. 나는 십자가도 없이 사망의 골짜기로 나아간다. 까마득한 고대의 분화구에서 마그마가 끓어오른다. 영구동토가 녹아내리며 빙하가 갈라져 나온다. 대지진이 일어나 바다가 땅이 되고 땅이 바다가 된다. 태풍은 공중을 장악하며 살아있는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유성우는 대기권을 뚫고 내려와 대지에 피칠갑을 한다. 나는 자연사와 자살의 평행 관계를 몽상한다. 임종 직전에야 떠오를 수수께끼를 떠올린다. 빛에 대해 명상하는 것과 명상의 빛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다울까. 꿈에서만 모든 걸 행하는 것과 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정다울까. 끝에 도달하는 것과 끝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 


 나는 영혼의 맨틀로, 외핵으로, 내핵으로, 무로 침잠하며 최초의 빛을 떠올리려 애쓴다. 순간 혹은 영원에, 시공간이 번쩍이며 제 비존재를 현시한다. 시간의 축이 기울자 외계의 계절이 얼음과 불을 넘어서 불어닥친다. 낯선 존재자의 아우성이 달의 뒷면으로 켜켜이 기울어간다. 각자의 시간대는 각자의 업보만큼 다양하게 전개된다. 반석이 갈라지고 녹슨 지하수가 솟구친다. 폐허는 피를 머금은 먹구름 속에서 재생산된다. 나는 수면에 비친 나의 탄생별과 같은 방향으로 추락한다. 성층권의 성벽을 몰래 넘나들던 유성들이 산화한다. 어느 은하, 어느 성단, 어느 별의 붕괴는 평화롭게 결실을 맺는다. 행성은 생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불타오른다. 최초의 우주쓰레기가 과거의 지구에 비상착륙한다. 운석우는 일시에 멈춘 뒤 얼어붙은 채 불타오른다. 혼돈 속에서 나는 반사되기를 거부하는 빛의 비탄만큼이나 복잡해진다. 빛은 선을 벗어난 원을 그리기에 휘어져도 끊어지진 않는다. 그러므로 불가지론자가 아닌 나에게도 나의 나됨은 불가피하게 불가해해진다. 메아리만 존재하는 세계의 ‘아무’와 목소리가 부재하는 세계의 ‘허무’는 동일한 비진리를 받든다. 그리하여 나의 영적 반감기는 아직 반환점을 돌지 않았다. 


 나는 불을 던지려다 자신을 불태워버린 자들을 사랑한다. 


타살에 대비해 유언으로 쓰다 지운 시론

 시론이 부재한 시는 시가 아닙니다. 고로 시를 쓰기 위해서 시론을 쓰고 시론을 쓰기 위해서 시를 씁니다. 

 목표 : 아무도 읽지 않는 시(혹은 시론)를 쓰는 것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은 이를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해야만 되는 말도 아닙니다. “단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말”, 그런 말이야말로 반드시 생성되어야 할 말이겠죠. 그러한 믿음(혹은 의심)으로 씁니다. 불가해한 이유로 우리는 내일 당장 죽을 수 있으므로, 염치불구하고 여기에 시론(혹은 미래)를 임시저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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