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8일 금요일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이언주 (17년 7월 넷째 주)



좀 사리겠거니 했던 이번 주에도 한마디(공동체...의식...)를 더한 데에는 정말이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헛소리 던진 다음에 나서가지고 해명을 하는 것은 참 묘한 일이다.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줘야 할 위치인데, 뭔 말만 하면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고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 해명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서 언론이 어쨌느니 슬쩍 걸고넘어진다? 자연스레 그가 어떤 이들을 대표하려 하는지 어떤 생각을 대표하려 하는지 따져보게 되는데, 이런 정치인이 아직도 여당에 있었다면 어땠을지 참 아찔한 일이다. 그렇게 보면 혹시 일전에 아리송한 타이밍에 탈당했던 것은 자신을 버려 차기 정권을 위하는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과연 그의 정치 패턴이 그런 것이라면, 그러면 지지난 주의 그 수수께끼도 자연히 풀린다. 내용이며 타이밍이며 도대체가 전혀 이치에 닿지도 않고 납득도 안 되는 이야기(밥 짓는...미친년들...)를 했던 그것도 역시 조작 사태로 위기에 빠진 당을 위해 결연히 혼자 독박을 쓰려 나선, 자신을 버려 당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사회를 살리는, 김종인에게 배운 대하 스케일 정치감각이 발동한 결과였음이 틀림없다. 현재 그의 이미지 제고는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차라리 더 힘껏 밀어붙여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악역을 맡은 자의 깊은 슬픔을 좀 더 표현해 주는 편이 좋겠다. 솔루션으로는 역시 검은 옷이다. 검은 베일, 검은 망토도 괜찮을 것이다. 차도 물론 검은색으로. 누가 죽었나보다 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벨트는 반드시 금색이어야 한다. 예산이 된다면 차에 미사일이나 뭐 터보엔진 같은 것도 달고... 여름엔 더워 보일 테니까 겨울부터 그러고 나오면 된다. 겨울이 되면 킹핀이 되어 나타날 안철수와 함께 협치 이미지까지 어필하면서 아다리가 딱 맞는다. 햐 이거 뭐 완전...

2017년 7월 24일 월요일

보이지 않음에 관한 주석

보이지 않음과 보기 힘듦이 동의어였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저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기 힘든 것들, 가령 너무 멀리 있어 관측이 어려운 어떤 별,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어떤 균 ―따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히 보이지 않는다.

한편 보이지 않음은 없음의 동의어 또한 아니다.
우리의 문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방향으로 발달해 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미치는 힘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막기 어렵다. 인류가 겸손을 배울 수밖에 없게 만든다.

위의 서술들을 배반할 가능성을 무릅쓰건대,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후세에도 절대로 보이지 않으리라 호언할 수는 없다.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으로 한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 몇몇이 보기 힘듦의 지위로 강등된 것처럼. 박물학의 참된 목표는, 박물학자의 진짜 일은, 스스로는 확인할 수 없을지언정, 기록된 박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는지 <없는 것>이었는지 검증해줄 것을 후대에 요구하는 것이다.

흰 꿈개미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라는 인간적인 접근과 별개로, 나는 꿈의 성질이 식물성이라는 주장에 매료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씨앗이 뇌를 양분으로 발아한다. 잠든 인간의 정수리 바깥으로 보이지 않는 뿌리가 만발한다. 신체 사지 말초를 향해서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뻗친다. 잠든 인간이 팔다리를 뒤챈다. 꿈으로 꽉 찬 인간의 모습이다.

꿈의 씨앗은 본래 식물의 망령이다. 꿈의 시점이 이상하다 여긴 적이 있을 것이다. 배경은 익히 알던 등교길, 생활관, 회당, 벤치, 승강장이지만 너무 바닥에 가깝거나 너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감각, 이 감각은 그러니까 외래된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전염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때로 전혀 상상해본 적 없거나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경험해본 바 없는 공간이 꿈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꿈의 씨앗이 ―그러니까 식물의 망령이― 생전에 꿨던 꿈이다. 반복되는 꿈들은 같은 종의 식물이, 아주 튼튼한 식물이, 인간의 의식에 휩쓸려 죽거나 시들지 않고 세대를 거듭해 번성하는 증거다.

식물로서의 꿈의 연구에 가장 훼방이 되는 존재는 물론 꿈의 천적이다. 그것들은 꿈을 속부터 파고들어 인간이 꿈을 잊고 피로감만 느끼게 만든다. 병든 꿈이 무의식 아래로 침잠하는 광경이 꿈 연구자들에게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한때 익충으로 개량해 악몽을 먹게 만들어보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그것들이 좇는 것이 꿈 그 자체보다는 꿈에 배는 인간의 정서인 바, 무용한 일이 되고 말았다. 악몽에 스미는 인간의 정서는 주로 공포, 후회, 열패감, 무력감 등인데 이런 것들은 전혀 달콤하지 않기 때문에 개미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2017년 7월 21일 금요일

교정자

모든 것이 너무 많다.
모든 것은 너무 많고 모든 것은 불완전하며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다.
불완전한 것들을 더 완전한 것들로 만들려는 노력은 시기와 불확실성이라는 제약하에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결국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제약이 고려되지 않는 가장 불필요한 것들뿐이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을 손보는 사람, 사람들의 필요와는 상관없이 스스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말 그러한지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착란에 빠져버리고 마는 사람. 보통 사람들이 별반 신경 쓰지 않는 정서법 하나하나에 연연하고 위법 사항을 보면 거슬리고 화가 나 견디기 어려운 사람. 언어 법은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며, 언어가 있다면 언어 법도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보다 차라리 법 기계에 가까운 자. 마감하기 위해 원고를 쓰는 자들의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 쓰는 자의 마감을 기다리는 자. 즉 그러한 잡다하게 필요한 불필요의 장인.
그것이 나라는 사람이다.
나는 산업의 그늘 속에서 존재하고 한 번도 그 그늘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나의 노동은 흔히 무시된다. 사장에게, 소비자에게, 업계 관계자에게, 학자와 교수에게, 또한 수많은 편집자에게. 나는 편집자로 불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가장 은밀한 단계의 감독자라는 욕망조차 없으며 나는 나의 노동이 포괄적으로 분류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낀다.
나는 온갖 텍스트라는 숱한 소세계들을 교정하고 있으나 사실 세계라는 건 딱히 교정될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회의 또한 품고 있다. 하지만 내가 회의한다고 해서 교정되어야 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교정되어야 할 것이 내 손에 들어오면 나는 그것을 즉시 교정하거나 혹은 이런 식으로 교정될 만한 것이라는 제안을 전달한다. 세계가 딱히 교정될 필요가 있든 없든 내가 교정한 것이 반영되든 안 되든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다만 교정할 것이 눈에 들어오면 교정할 뿐이다. 곧 이러한 나의 노동은 넓게 보자면 산업적인 맥락뿐만 아니라 법과 시선 사이에서 발생한 신경질이 낳은 전기 신호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업무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교정되든 교정되지 않든 사람들은 대개 그 차이와 변화를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이것이 인간이기에 극도로 낮은 빈도로 저지르는 내 실수가 자학에 그치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교정이라는 것은 가시적 효과보다는 비가시적 증강과 관계된 기술이다. 내가 당신의 척추를 접는다면 그것은 교정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이며 혁명이다. 하지만 내가 당신이 자세를 바꾸도록 만들어 점차적으로 척추 원반 탈출증, 다시 말해 디스크를 앓게 만든다면 그것은 교정이다.
나는 교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교정하고 싶기에 당신 또한 교정하고 싶다. 가령 이런 식의 교정 말이다. 내가 교정한 책을 구입하시라.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당신의 서가에 꽂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보기에 좋을 것이다. 어차피 오랜 출판 산업의 역사 속에서 책을 읽기 위해 책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는 근래에 책이 아닌 다른 읽을거리를 찾는 풍조로 인해 나타난 급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19세기 말에 출간된 어느 소설책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어차피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내 책 또한 벽을 장식하는 데나 사용될 뿐이다.” 세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봐야 뭣하겠는가? 출판 산업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탄식만 숱하게 접할 것이다. 그것은 구텐베르크 이후부터 심화되어온 문제이다. 물론 최근에는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말 대신에 이미 죽었다는 말을 더 많이 쓰기는 한다. 나는 시체가 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 중에서도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시체로서 나는 할 말을 하노니, 당신이 책을 구입하기를 바란다. 이는 나의 사후를 연장시키는 길이니 개인적인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주변을 여러 소세계들로 가득 채우는 일이며, 결국 세계를 좀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시원찮은 벌이를 하면서도 온갖 글들을 교정하는 이유이다. 하찮아 보이는 나의 교정이 세계의 교정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나는 버리지 않고 있다. 어리석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나는 진즉에 자살했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더는 혁명을 통해 변화할 수 없다. 오직 교정될 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나의 철학이며 내 노동의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부한다. 정기적으로 책을 구입하기를 바란다. 책이 쓸데없는 것이라면 그 쓸데없는 것들을 당신의 주변에 두길 바란다. 온갖 불완전하고 쓸데없는 것들로 인해 당신의 영혼은 끝내 구원받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나를 믿어도 좋다. 일단 책을 구입한다면 그다음 교정 단계를 내가 알려주겠다…….

고기안주: 없음 (17년 7월 셋째 주)


(이번 주에는 화제의 정치인이 없었다. 최저임금 인상, 탈원전, 증세 등의 의미 있는 화제들이 정치인들의 얼굴을 밀어낸 것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정치는 바로 이래야 한다. 정치는 개성 가득한 영웅들이 설쳐대는 뭔 역사 드라마처럼 좆같게 되면 안 된다. 일개 정치인 따위가 잘했냐 못했냐 어쩔 거냐 저쩔 거냐 진지하게 따지는 일은 정치엘리트들, 정치엘리트-워너비들이나 충혈된 눈으로 찾아 헤매는 것이고, 사실 정치와는 별 대단한 관련이 없다. 시선을 좀 끌자고 무슨 혼자 어디 쓸데없이 가서 장화를 신고 벗고 그런 쇼를 해봤댔자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런 것은 그야말로 짐승의 정치다. 우리 민중에게 그런 따위는 술자리의 고기 안주 정도 되는 일에 불과하다. 오늘은 고기를 먹고 싶다.)

2017년 7월 14일 금요일

중량감 확충: 안철수 (17년 7월 둘째 주)




7월 둘째 주는 안철수다. 추미애 이언주와의 경합 끝에 그로 정했다. 그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끝났다는 게 중론이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정치인에게 있어서 시선이 모인다는 것은 무조건 기회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야말로 곧 기회다. 그는 명분에 조심스럽고 참 신중하게 구는 게 특징이다.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겠지만, 한참 고민을 한 끝에 결국 대단히 획기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은 또 아니라서, 보다 보면 좀 쫄보 같다는 느낌을 준다. 한마디로 중후함이 부족하다는 것. 그러니 간 본다는 이야기가 계속 따라붙는 것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대선 때의 강철수 어쩌고나 발성 바꾸기는 낯이 좀 뜨거워지기는 했어도 신선한 시도였다.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하는 모습은 어쨌든 보기 좋은 것이다. 어떤 식으로 열심히 하든 간에. 그를 위한 나의 냉철한 이미지 메이킹 솔루션은 바로 중량감 확충이다. 중량감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 체급을 더 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어차피 이제 한동안 할 일도 없을 텐데 매일 술을 퍼마시든가 헬스를 다니며 프로틴을 먹든가 둘 다 하든가 해서 근수부터 늘려야 한다. 중절모는 어떤가?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뿌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 담배를 배워야 할 것이다. 사장님 이미지(원래 사장님이니까)를 다른 측면에서 어필해 본다는 감각으로 하면 된다. 잡스 같은 느낌이 아니라 킹핀 같은 느낌으로. 머리를 미는 것도 괜찮다. 잡스라도 머리는 밀어야 한다. 그래 거기서부터 하는 게 좋겠다.

2017년 7월 12일 수요일

소리생물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는 빛이 있으라, 라고 한 다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소리도 있으라, 하고 덧붙였다. 번개가 친 다음에야 천둥소리가 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물론 농담이다.

빛은 그 자체로 위대하지만 생명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빛이 생명에 기여하는 바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빛이 생명을 번성케 하고자 하는 의지같은 걸 갖고 있으리라는 착각 또한 금물이다. 손을 들고 질문하고 싶어하는 청중이 보인다. 그렇다면 소리는 살아있습니까? 모든 소리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이따금 그것들 중 죽지 않는 개체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살아있는 소리는 살아있지 않은 빛보다 우월합니까? 이런 건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다.

소리가 어떤 조건에서 불멸성을 획득하는지는 여전히 연구대상이다. 여기서는 소리생물에 대한 논란보다는 지금까지 관찰, 보고된 바만을 다루기로 한다.

죽지 않는 소리는 음의 주광성을 띠고 잽싸게 어두운 곳으로 도망친다. 그 상태에서 일체의 생리활동, 즉 섭취하고 배설하고 활동하고 수면하는 등의 활동 없이 주변에서 완전히 인간이 사라질 때까지 버틴다. 구전된 바에 따르면 30년 된 소리생물이 발생한 장소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더 오래 버틸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소리생물들은 번식의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몹시 희귀하여 동종의 개체를 발견하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게다가 소리생물들은 대개 생식능력이 없다. 노새처럼.

소리생물들의 최후에는 사망이라는 말보다 소멸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러나 그들의 소멸은 생물이 아닌 소리들의 방식보다는 작은보호탑해파리나 해삼과 같은 해저생물들의 방식에 가깝다.

소멸 직전의 소리생물들은 인체에 침투하려는 습성이 있다. 약간 성가실 수는 있으나 건강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브루스터(1781-1868)는 소리생물을 관찰하고 잡아 가둘 수 있는 도구를 고안하다가 만화경을 발명했다. 이론적으로 만화경은 소리생물 덫으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으나 다른 쓰임새가 더 두드러지는 바람에 만화경kaleidoscope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희랍어에서 아름다움을 뜻하는 칼로스kalos, 형태를 뜻하는 에이도eido에 유리와 거울로 만든 안외 보조도구를 의미하는 어미 스코프scope를 붙인 것이다.

소리생물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19세기에는 이명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만화경을 귀에 대고 자라는 처방을 주는 경우가 흔했고, 실제로 이 처방은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2017년 7월 7일 금요일

소년에서 남자로: 김정은 (17년 7월 첫째 주)



PIMPS의 첫 번째 타자는 지난 4일 ICBM 발사로 세계의 이목을 모으고 있는 젊은 정치인 김정은이다. 요즘 세상에 가문의 이름을 걸고 정치를 하는 보기 드문 정치인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체를 본받은 친필 명령서 공개에는 참으로 찡한 면이 있었다. 글씨를 보면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렇게 백지를 기울여 놓고서 글씨체를 연습하고, 망원경으로 먼 것 구경하기를 좋아하고, 드론을 날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연일 뭔가를 폭발시키고 발사하며, 농구 잘하는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그는 하여간 뭔가 소년적인 이미지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좀 마른 소년이었으면 먹혔(내가 보기엔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닮아 잘생긴 편이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 상태로는 그냥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선 안 된다. 그래서는 강성대국이 될 수 없고, 승냥이 같은 미제도 무찌를 수 없다. 그를 위한 나의 솔루션은 바로 소년에서 남자가 되는 것이다. 체중을 감량하고, 몸을 만들고, 얼굴은 더 각지게, 더 제대로 된 수트를 입고, 구레나룻과 수염을 길러 다듬어야 한다. 취미도 드론에서 자동차로, 폭죽에서 시계로, 농구에서 낚시로 바꿔야 한다. 종이를 기울여 놓고 쓰는 못된 버릇도 물론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다들 고개를 기울여서 읽어야 하잖아?

PIMPS를 소개한다

폴리티션 이미지 메이킹 파워 솔루션. 매주 금요일, 화제의 정치인 한 명을 선정하여 그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파워 솔루션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보는 회심의 코너이다. 철저히 인물 중심으로, 외형과 이미지에만 집중해서. 최악의 저속한 방식으로 정치를 다룰 것이다. 3개월 동안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 한국 정치 화이팅, 세계 평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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