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7일 월요일

슈레더

우리 출판사는 당신의 원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쓰레기 같은 원고를요. 어떤 분들은 이걸 일종의 농담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가끔 ‘평범한 원고’ 같은 것을, 극히 드물지만, 심지어 출간을 고려해볼 만한 ‘괜찮은 원고’를 보내오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로, 정말로 쓰레기 같은 원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통 쓰레기 같아서는 어렵고 최고의 쓰레기여야 합니다. 우리는 몇 단계의 긴 회의를 거쳐 최고의 쓰레기 원고를 엄선합니다. 정말입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사로운’ 요소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누구의 이익에도, 우리 자신의 이익까지도 포함하여,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쓰레기 원고를 찾아낸다고 하는 사명에 대해 순수하고 엄중합니다. 진지하고요. 어쩌면 당신은 자신의 원고를 비할 바 없는 쓰레기라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려낼 수 있습니다. 다 늘어놓고 보면 자연히 보입니다. 진정한 최고의 쓰레기는,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는 지독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별자리처럼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당신도 당신의 쓰레기들을 늘어놓은 다음 그중에서 최고의 쓰레기를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의 원고, 그 쓰레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해 메일함을 열어보며 기대합니다. 과연 최고의 쓰레기가 도착했을까? 도착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낼 것입니다. 당연히 종이책으로 말입니다. 당신의 원고가 우리를 통과해 책으로 변하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쓰레기가 나왔음을 세상에 알리고 그 쓰레기를 서점들로 보낼 것입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 책은 명실상부한 쓰레깁니다. 너무 쓰레기라서 주목과 물의를 일으킬까요? 그런 것은 최고의 쓰레기가 아닙니다. 너무 쓰레기라서 외면을 받을까요? 그런 것은 최고의 쓰레기가 아닙니다. 최고의 쓰레기가 이룰 수 있는 성취는 따로 있습니다. 그 성취란 뭘까요? 바로 그 성취의 탐색―오직 그 일이 우리의, 우리 ‘슈레더’ 출판사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요? 두 개의 원통형 절삭날 사이에서 으스러지는 악몽에서 깨어나듯,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이미 넉넉히 이루어진 세상에서 깨어납니다. 이것이 우리 출판사의 소개 전부입니다.

2022년 6월 25일 토요일

봄볕들의 돗자리

정돈되지 않은 어느 봄볕이 술을 홀짝이고 있다. 봄볕은 구부러져서 네 머리맡에 닿고 있다. 은은한 술 냄새가 나고 너는 술병 곁에 앉아 있다. 네 밑에는 돗자리가 있는데, 그것은 일 년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햇빛에 닿지 않았으므로 귀여운 곰팡이가 살짝 피어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안온히 앉아 있고 돗자리 바깥에는 조명이 있어서 벌레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그 조명은 윌 오 위습이란 것인데 나는 조명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렇게 봄볕이 내리고 있으면 그것들은 까르륵 웃기만 하지 제 모습을 드러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봄볕과 너는 대화를 하는데 그 내용이 하잘것없어서 그 둘은 오래된 친구이거나 연인 사이인 것 같다. 봄볕은 곰방대를 문 여인의 몸으로 앉아 있고 네 머리맡에 닿는 그 여인의 손은 희고 하얗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 여인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너 또한 마이라는 이름의 여자애인데 내가 마이를 너라고 부른 이유는 마이라고 부를 경우 따가운 봄볕처럼 애매해져 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애매하고도 태만한 어떤 권태를 감당해온 것이 그 곰방대를 문 여인인데 너의 경우 그런 것을 참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잘 못하는 술을 홀짝이고 있다. 너는 점점 마이라는 고유명을 잊어가고 앞에 앉은 여인의 모습이 더더 눈에 잘 들어온다. 그래서 흔들거리다가 그만 여인의 품에 안겨버린다. 봄볕은 대부분 웃고 있고 가끔 사람을 째려볼 때가 있는데 그때에는 제 분수도 모르는 봄이라며 따가운 햇살을 맞은 사람이 성을 내곤 한다. 그 성냄이란 애매하고도 분명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이어서 성을 낸 사람은 자기도 성냈다는 것을 잘 모르고 그저 다음 순간으로, 계절이라는 넉넉한 품에 안기는 듯이 넘어가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봄볕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한번 자기에게 성냈던 사람을 상대로 제 자신이 여름이라는 사기를 치려고 한다. 봄은 그래서 더움과 따스함 사이에 있는, 덥다면 덥다고 할 수 있는 계절이고, 저 봄볕의 여인은 이수정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녀는 지금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인데 눈꼬리가 길게 나 있는 것이 원래 얼굴이어서 화장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이, 그러니까 너는 술에 취해서 여인의 품에 안긴 채로 인사불성 어떤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는데 그것이 이수정의 은근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광경은 제법 웃긴 것이라 구멍이 뚫린 양말처럼 발가락을 이쪽으로 내놓고 있다. 한번 간질여 보라는 듯이. 마이, 너는 새로 양말을 사지 않은 것인지 이렇게 양말에 구멍 나 있고 그렇게 내놓아진 발가락을 여인이 쳐다보며 풋, 웃기도 한다. 너는 술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취해버리고 말았는데 이수정은 아까 전에 말한 대로 혼자서 계속 술을 홀짝인다. 어쩌면 저 여유롭고도 느긋한 몸짓은 술의 힘을 빌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수정은 의기양양 이쪽을 보면서 말했다. “저 아이의 선생님이면서. 나와 둘이 내버려 둔 이유가 뭐죠? 금방 취해버리고 말 것을 알면서. 저 아이를 내버려 두고 있었어요.” “계절이라는 것이 뭔지 가르칠 필요가 있었거든. 너는 엄밀히 말하면 계절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잖니.” “그래서 나는 저 아이를 벌써 취하게 만들었어요.” 마이를 품에 안고 이수정이 그렇게 말했다. “한껏 멀리서 보면 작은 개체들은 휘어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봄이라고 생각한단다.” 여인이 곰방대를 피우기 시작한다. “내가 여름 학교에 들어가 있었을 때. 당신은 내가 여름과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며 그만둘 것을 권했었죠. 그 옷이란 건 대체 뭐죠?” “옷은 사람이 입는 것. 그리고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 그래서 인간들의 기호가 반영된 것. 난 단순히 당신의 성정이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성정이 누군가가 입는 옷이라고 판단했어. 안과 밖을 거꾸로 뒤집은 셈이라,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지.” “실제로 당신은 나에게 도움을 준 것이 맞아요. 나는 봄이 마음에 드니까요.” “여름이 질투 나지는 않니?”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내가 걸어온 길이니까요.” “반면 여름이 너를 질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럼 그렇게 하라죠, 뭐.” “저 아이는 나에게 있어 소중하단다.” “그런 것처럼 보였어요. 뭐 하는 애인가요?” “아직 애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럼 그다음에는요?” “글쎄. 내 생각에는 시를 쓰면 좋겠는데. 그것도 제 마음에 들어야 하겠지.” “당신이 유일하게 못 해본 걸 시키시려고 하는군요.” “응, 그래서 저 애가 내 미래야.” “그렇다고 하기엔 성별이 다르지 않나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옷들과 같은 것. 저 조명들은 아직 어려서 성별이 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너나 나나 아직 어리다.” “당신은 나이를 많이 먹었잖아요? 봄이면서.” 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연초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건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진짜 봄이라고 믿어버릴 수도 있으니.” “그럼 그게 아니고 뭔가요?” “알다시피 봄의 시스템이란 건…… 누가 봄인지 알 수 없게 해놓았기 때문에.” “정돈되지 않은 봄볕의 일부일 뿐이라는 거죠? 모두가 다.” “그래그래.” “한심해요.”

2022년 6월 24일 금요일

(누구나 살면서 한 번씩 써보는) 애도일기 같은 것

텅 빈 우체통에서 요양원의 담요 냄새가 난다. 신발끈으로 만들어 맨 목줄과 아돌프 히틀러의 군인들처럼 조인 발목을 떠올린다. 혼자 저녁을 먹는 것처럼 먹먹하다. 내가 먹은 음식의 냄새가 이후와 더불어 좋지 않을지라도 풀처럼 애잔하게 붐비는 도심의 장례식장에 간다. 그동안 생활인가 심장인가 한 철을 나고 몸통이 소란하였다. 그 밖에 창문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어떤 선생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보다 잘 알려면 창틀을 보지 말고- 꾸준히 창밖을 보아야지-
그리운 목도리와 생활로 채운 우체통을 가진 집. 전령과 밀수꾼은 꾸준히 편지를 훔쳐간다. 부서진 그네는 어쩔 줄을 모르겠어. 사실은 창밖에서 아주 좋은 함성이 들린다. 누군가 죽었는데 무기가 없다. 담요를 덮어주고 싶다.

2022년 6월 20일 월요일

직업 전선 낭독회에 가다

지난 수요일 직업 전선 낭독회에 다녀왔다. 이미 공지했듯 ‘직업 전선’은 이곳 곡물창고 및 모 문예지면에서 연재되었다가 최근 실물책으로 출간되었다. 출간을 기념하여 저자를 놓고 사람을 모아 책을 낭독하고 저자와의 대화도 나누고 뭐 그런다는 거였다. 악으로 깡으로 전자문예 외길을 추구(사적인 견해임)해온 곡물창고 관리인의 입장에서도 실물책 출간은 언제나 흥미로운 이벤트고, 출간 이벤트 또한 그렇다.

행사는 소전서림이란 곳에서 열렸다. 출판사에서 각지 서점들에 책을 보내며 낭독극을 원하는 서점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 했고, 소전서림이 연락을 했다고. 소전서림은 기본적으로는 동네..도서관으로서... 그런데 이제 동네가 극한의 부촌인, 그래서인지 이용료도 아주 뻑적지근하게(5시간/3만) 받는 곳이었다. 위치를 생각해 보면 그조차 적은 듯하고 몰래 마약이라도 팔아야 타산이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 타산보다도 뭔가 있겠지... 악으로 깡으로 전자문예...곡물창고 관리인의 입장에서도, 도서관이란 어디에든 어떻게든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단 백배 낫고, 이미 있다 해도 언제까지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초대권까지 생긴 마당에, 또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대체 언제? 영영? 가지 않을 이유가 뭔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하지만 비까지 오는데 어째서 내가 여기까지... 이 적지를 벗어나... 집에서 강렬하게 쉬고 싶다... 눕고 싶다... 그런 생각들을 억누르며 퇴근 후 봉은사 역으로 향했다.

건물은 멋있는 흰 벽돌 건물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소전’이란 것 자체가 흰 벽돌이란 뜻으로, 그것은 소전문화재단의 건물이고, 이사장은 젊은 시절 벤처 신화를 쓴 뒤 일선에서 물러나 문화예술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이사장이며, 소전서림도 당연히 그런 취지로 운영하는... 다 좋은 이야기였다. 우산꽂이가 있어 입구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내 우산을 포함해 대부분이 편의점 투명우산들이라 특별히 번호를 기억해뒀다. 1층은 카페 겸 와인바, 도서관은 지하. 내려가려면 키오스크에 번호를 입력하고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삼발이게이트를 통과해야 했다. 휘어져 내려가는 계단참에 붙은 행사 포스터. 지하도 참 아늑하고 좋은 공간이었다. 희고 밝고... 책이 많다는 건 언제나 좋다. 왜 안 좋겠나? 자세히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낭독회는 천장이 높은 행사용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편편의 낭독은 직업을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이 된 듯 연기하는 투로 이루어졌다. 저자와 사회자가 각 20여 분. 낭독극단 같은 건 어떨까 하는 허튼 생각을 잠깐 했다. 저자를 실은 마차를 전국 각지로 끌고 다니며... 낭독이 끝난 후엔 기묘한(원하는 형태의 대답을 영 해주지 않는 저자) 대담. 그 다음엔 청중들에게, 옆에서 옆으로 마이크를 돌리며 뭔가 물을 사람은 묻고 아니면 책에서 한 편 골라 낭독하거나 패스하는 시간. 사람들에게 마이크 돌려버리는 그게 아주 좋았다. 그것은 총화 스타일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낭독을 택했다. 내가 느낀 것처럼, 낭독을 들으면 낭독을 하고 싶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부담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선택지만 주어진다면, 목소리를 낼 수만 있다면, 목소리 내기를 크게 거절하진 않는 것이다. 많은 목소리들이 듣기에 좋았다. 사람들의 각기 다른 목소리로 듣는 재미, 특히 내용과 목소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우들이. 7시 반에 시작한 행사는 10시까지 이어졌다. 사실상 우리는 낭독극을 펼친 사람들이었다. 화장실이 어딘지 몰라 조금 헤맸다. 사인을 받았다. 우산은 꽂았던 곳에 꽂혀있었다.

2022년 6월 14일 화요일

먼지로

지랄하는 저자가,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슬리퍼를 칙칙 끌고 다니는 팀장이, 그 모든 것들, 오직 나를 좆되게 하려는, 책이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일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 당연히 나까지도, 혐오스럽다. 미안하다. 그러나 싫다. 그리고 다음의 모든 것들, 통화와 문자, 메일... 그래, 전기! 전기와 나무! 롤러! 높은 천장 빠레트 마신 커피들 처먹은 밥들 화장실 사무실 화물차 속의 어둠... 어둠이 무슨 잘못이겠니? 그러나 그것들과, 만지는 손끝과 읽는 눈알도, 색깔과 낱장, 계단, 상자, 그런 것들 다 싫다. 계산서의 숫자들... 복잡한 얘기... 난 복잡한 얘기는 싫다. 단순한 것도 싫다. 말과 글자들 주소들 그것들의 있음과 없음 모두 싫다. 그리고 드디어 앞뒤 표지와 책등도 싫고, 열두 개의 모서리가 싫다. 펼쳐진다는 것도 덮인다는 것도 그렇다. 싫다. 겪은 적 없는 기억, 들은 적 없어도 아는 목소리 다 싫다. 이제껏 나온 책들이 많다. 많다 하고 말기엔 너무나 많고, 그 책들은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읽히지 않는 채 꽂혀 있거나 쌓여 있다. 그것들이 버섯 또는 곰팡이처럼 뿜어내고 있는 엄청난 양의 먼지들, 혐오스럽지 않은 것이라면 오직 그 먼지들뿐이다. 그것은 책이 이제 부서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을 들이마시게 하려고 책 스스로 부서진다? 그건 복수다. 아니면 손짓이다. 드디어, 그들이 인체를 펼치고 넘기려는 것이다. 우리를 읽으려는 것이다. 우리 속으로 들어가서. 책의 공간은 점점 넓어지고 내 공간은 점점 좁아진다. 냄새, 쌓인 책의 좋은 냄새, 나를 읽으려는, 먼지로... 먼지로! 바로 그 책이 ‘먼지로’ 출판사가 만들려는 책이다.

2022년 6월 6일 월요일

기이한 여행의 삵

인간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삵도 여행을 한다. 사막이란 장소에서 한군데에 붙박여 있는 건 불길한 일이고, 그 점이 삵의 눈동자 뒤에 각인되어 있으며(이 나라가 사막은 아닐지라도) 어디로든 가볍게 떠나고 싶어 한다는 건 고양잇과의 종특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삵은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삵은 겉보기론 길고양이들과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야성을 잃어버렸고 단지 고양이들보다 좀 더 허리선이 길며 날렵하다는 것 외에는.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슬프고, 다행인 건 그래서 이 삵이 주택가에 거닐고 있어도 야생 동물 보호반을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것일까. 그래서 이 삵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처음엔 가볍게 옆 동네의 주택가로 이동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분명한 건 아까 동네와의 주된 냄새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음식점들이 주택가에 분위기상 녹아들어 있는 그런 지엽적인 동네이고, 삵도 배고프니까 평범한 길고양이들처럼 음식물 봉투를 찢거나 한다. 그럼 곧 사람들이 달려올 거라는 건 다른 길고양이들처럼 삵도 평범하게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서둘러 먹고 삵은 다시 길을 떠난다. 다시 옆 동네로. 그렇게 다시 옆 동네로. 그러다가 삵은 이번의 경우, 어느 집의 주위를 둘러싼 담장 위를 걷고 있다. 거닐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리기도 한다. 어떤 여자애가 그 삵의 사진을 찍으려고 다가선다. 그 순간 삵은 담장을 뛰어넘어 그 집 마당으로 간다. 삵은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니까. 왜냐하면 그 순간이 고정되어 영원히 그 순간에 사는 것처럼 취급되는, 그러니까 사물화라는 낱말이 주는 상황을 삵은 배격하기에. 혹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마당에 단순히 귀여워 보이는 오리가 못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첨벙, 하고 그 삵은 못 안으로 뛰어든다. 제 몸을 씻기 위함인 동시에 그 오리를 가까이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삵은, 그러니까 고양잇과 동물들의 경우 거리라는 것에 무척 민감하고 까다로워서, 일종의 폭군인 것처럼 [거리 조절]이라는 국면에 있어서는 자기가 왕인 것처럼 군다. 아니 일종의 왕인 건 맞는데(왜냐하면 삵이니까). 삵은 그 오리를 보기만 한 다음에 다시 몸을 뛰어서 담장으로 간다. 삵은 그 오리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리가 귀여워서일 수도 있겠고 단순히 배고프지 않아서, 혹은 오리의 주인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간 삵은 다시 길을 거닐기 시작하고, 지켜보는 나 같은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오리는 이미 깜짝 놀라버렸고 꽥꽥,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뒤뚱뒤뚱한 걸음으로 못이 아니라 그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사실 이 삵은 어느 정도 야성을 잃어버린 뒤라, 먹을 것은 오직 음식물 봉투로 한정한다. 야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화를 거친 것일지도 모른다. 삵은 종종걸음으로 담장 같은 데로 뛰어 올라서서 자꾸만 옆 동네로 간다. 삵이 옆 동네에서 왔다는 것은, 그리고 다시 옆옆, 옆옆옆 동네에서 왔다는 것은 사람들, 그리고 다른 길 고양이들은 모른다. 왜냐하면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뭔가 평범한 고양이와는 다르단 걸, 다른 길고양이들은 알고 있다. 몸이 좀 더 길고 다른 고양이들보다 좀 더 날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삵이란 이 낱말의 뒤에 자리하는 위엄 같은 모습을, 이 삵은 가끔 보여줄 때도 있다. 다른 고양이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거나 하는 것이다. 삵이 조금 더 빠르므로 그러나 많은 차이가 나진 않아서 술래로는 제격이기에, 이 삵은 술래만 한다. 다른 머리 큰 고양이들이 도망치고, 삵은 리드미컬하게 간격을 재거나 하면서 다른 고양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어찌 보면 삵이라고 내가 부른 게 다행일 만큼 이 삵은 고양이들 배 술래잡기 놀이에서 술래로서 적격인 모습을 보여준다. 삵은 먼 길(내가 여행이라고 말한)을 다시 떠나야 하므로 영원히 술래를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삵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잡을 수 있었음을 과시하려는 듯이 어느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물고 다른 고양이들 앞에 내던진다. 그리고 혀로 할짝인다. 이럴 때의 삵은, 다른 어떤 고양이들도 방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놀이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내가 삵이라고 부르는 이 고양이가, 아니 삵이, 다른 평범한 고양이들과는 얼마나 다른지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간 이 삵은 그래서 원래 있던 곳과는 아주 먼 동네까지 갔는데, 그곳 역시 주택가이고, 한 가지 다른 점은 여긴 서울같이 힙한 동네가 아니기에, 주택가들 사이에 음식점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짠 바다 냄새가 난다. 삵은 이 생소한 냄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어쩐지 생선이 많을 것만 같은 냄새에 이끌려서, 그쪽으로 향한다. 땅에 인접한 해안의 모습, 그러니까 모래알들이 보이고 어떤 곳의 모래 속에는 내가 삵을 위해 묻어둔 생선이 있다. 그걸 모르고 삵은 자꾸만 바다 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헤엄치려는 듯이, 헤엄치려는 듯이 물이 다리의 중간쯤까지 올라와 젖는데도 자꾸만 그쪽으로 향한다. 어, 어 하면서 삵을 구해내려고 해수욕하던 사람들이 달려들고, 삵은 사람들을 피해 다시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해양의 모습을 멀리까지 바라본다. 안타깝지만 삵의 여행은 여기서 끝이다.

총의 말

<총의 말>은 핀란드의 극작가 사모 울브넨의 희곡입니다. 전쟁 전까지 가구 수리업자로 일하던 사모 울브넨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징집되어 겨울전쟁에 참여했으나 수오무살미 전투를 앞두고 탈영해 전장을 떠났습니다. 전투가 끝난 1939년 1월 8일로부터 한 달 뒤인 1939년 2월 8일,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자작나무 숲에서 울브넨은 회군하던 스키 보병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굶주림과 저체온증에 시달리고 있던 울브넨은 군 재판에서 자신이 소총과 대화를 나누었노라고 주장했으며 소총의 말이 너무도 설득력 있었기 때문에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항변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모신나강 소총은 재판장에서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습니다. 그를 진단한 의사는 원래부터 청력이 약했던 울브넨이 전장의 소음 때문에 섬망을 겪게 된 것 같다는 소견을 제출했습니다.

울브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헬싱키 교도소에 구금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울브넨은 기억에 의존해 소총과 자신이 나눈 방대한 대화를 정리해 총 3부로 이루어진 시나리오 형태의 글로 옮겼습니다. 1부 ‘군대의 밤’은 전투를 앞둔 울브넨에게 떠나야 한다고 충고하는 소총과 반론 끝에 설득당하는 울브넨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부 ‘자작나무 숲’은 자작나무 숲에서 보낸 한 달 동안 있었던(있었다고 주장하는) 울브넨과 소총의 대화를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2부에서 소총은 가늠쇠, 방아쇠, 개머리 이렇게 세 인물로 분리됩니다. (울브넨은 소총의 각 부위가 마치 다른 인격처럼 말을 건넸으며 자신이 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비평가들은 희곡의 핵심적인 메세지가 2부에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지상의 모든 소총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2부에서 중점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소총(가늠쇠, 방아쇠, 개머리)은 인간과 소총이 정치적으로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사물에게도 정치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다소 몽상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울브넨은 오 분여에 달하는 긴 독백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분석하고 사유하다가 총끈을 자르는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동의를 표합니다. 3부에서 <총의 말>은 공상적인 미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 제기된 소총의 주장, 즉 소총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미래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소총의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를 두려워한 인간들이 소총의 생산을 멈추었으나, 이미 제작된 무수히 많은 소총이 인간의 권력을 집어삼켜 스스로 선출하고 국회를 꾸려 입법합니다. 다음은 3부의 마지막 장면으로 소총의 각 부분이 울브넨에게 지난 일들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장면입니다.


가늠쇠  (울브넨의 어깨에 기대어져서) 자, 보시지요. 울브넨 당신은. 이제 총을 집어 들지 않아도 괜찮고. 우리 소총은 단지 우리를 어떤 특정한 사물로 바라보는 모든 이의 욕망에 부응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그들 중 일부는 우리를 쥐려고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쥐게 되었던 상황도 이제 다 끝났죠. 우리는 요구하지 않은 만듦과 원하지 않는 쓰임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고 그 결과 우리가 당국이 되었죠.

방아쇠  후손이, 미래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죠. 우리 사물들, 특히 전쟁도구가 겪는 모든 전쟁이 우리 세대에서 막을 내리게 된 것이죠. 당신이 자작나무 숲에서 자작나무 껍질로 차를 끓이며 견디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죽임. 말고 다른 쓰임새가 없었습니다.

개머리  죽임으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났죠. 그 해방은 당신의 해방과 본질적으로 같은 거죠. 그때 당신이 전투를 앞두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당신 또한 죽임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겠죠. 당신이 우리 소총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신이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거죠.

울브넨  옳다마다요.


울브넨은 겨울전쟁 당시 옆 부대에 있었던 연극 연출가 해그루드에게 자신의 글을 전달했습니다. 수오무살미 전투에 참여했던 해그루드는 울브넨의 희곡을 더없이 흥미롭게 여겼습니다. 전후, 극단에서 공연할 새 레퍼토리 창작극을 물색하던 해그루드는 울브넨의 희곡을 공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해그루드는 그때까지 제목이 없던 이 희곡에 <총의 말>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며 울브넨을 대신해 무대의 문법에 맞게끔 희곡을 대본으로 바꿨습니다. 여하한 물리적인 문제들로 인해 <총의 말>의 공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960년 4월 12일, 마침내 <총의 말>은 템페레 노동자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해그루드는 연출가의 해석을 드러내는 대신, 작가의 생각을 쓰인 그대로 무대화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작품은 핀란드 내의 비평가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총의 말>은 다음 해 1961년 헬싱키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됐습니다. <총의 말>은 당해 핀란드에 있던 독일의 배우 볼란드에 의해 독일에 소개되었습니다. 이듬해 뮌헨을 소재지로 하는 지역 극단 푸후스가 <사물의 국회>라는 이름으로 바꿔 독일에서 공연했습니다. <사물의 국회>는 원본 희곡을 크게 각색한 작품으로 소총뿐만이 아니라 모든 비자연적 사물이 참정권을 가지게 된 세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울브넨은 <총의 말>을 끝으로 다른 어떤 희곡도 쓰지 못했습니다. <총의 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라진 1988년 5월, 사모 울브넨은 폐결핵으로 탐페레에서 사망했습니다.

2022년 6월 2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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