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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6일 화요일

뒷산

양력 해가 바뀌었다. 7년을 넘어섰다. 작년 결산은 하지 않았다. 홀수 해에는 어쩐지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오전 동안 관리인 프로필 그림을 바꾸고 입고현황판도 고친 다음 어쩐지 마음이 동해 뒷산에 다녀왔다. △산이다. △산은 필시 어떤 전설이 깃들어있을 법한 모양새로, 갑작스럽다고나 할 위치에 엎드려 있다. 그 형상이 집짐승처럼 온순하고 부드러워 정감이 간다. △산에 대해서는 여즉 아무 전설도 들어보지 못했다. 없을 수는 없을 텐데. 누가 알까? 누구네 산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다. 누구네 산이더라도 무슨 뜻일까. 무주공산? △산에서 본 것은 겨울 나무, 겨울 바위, 겨울 수풀, 겨울 오솔길, 겨울 무덤, 겨울 창고 건물의 정겨운 모양이다. 저 나무는 어떤 나무고 이 바위는 어떤 바위다, 하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면서 내려왔다. 볼끼는 하고선 장갑을 끼지 않아 조금 후회했다. 꺾어 온 억새를 눈앞에서 흔들어봐도 쥐잡이는 별 관심이 없다. 죽은 억새라서? 나간 사이 쥐를 쫓아 한참 뛰어다녔는지도 모른다. 이불 덮고 잠깐 누운 다음에, 먼저 손과 발을 씻은 다음에, 쥐잡이를 위해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가 먹을 떡국을 끓이면서. 우리의 몸은 일터에 있어도 머릿속의 냄새는 불굴이다. 쥐잡이의 머릿속, △산의 머릿속에서도.

2023년 9월 6일 수요일

―923기후정의행진 참가단 모집―

이것은 시작에 불과


23년 9월 23일 토요일 오후 1시
서울 2호선 시청역 9번 출구 앞



개요

작년 일곱 분이 참여해주셨던 노동절 견학단에 이어 올해에도, 곡물창고의 모든 이용자(필자/구독자/관리인)를 대상으로, 이번 『923기후정의행진』에 가보고 싶은데 핑계와 일행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드나듦이 자유롭고 홀가분한 참가단’을 비공식적으로 조직합니다.


참가자격

· 곡물창고 이용자 겸 지구인
· 곡물창고 이용자 겸 지구인의 친구
· 곡물창고 이용자 겸 지구인의 가족
· 위 해당자의 일행


프로그램

· 9월 23일 토요일 오후 1시, 시청역 9번 출구 앞에 집결(주황색 가이드 깃발)
· 1시 20분, 간단 인사 후 집회 장소로 이동
· 이후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하여 부스 구경부터 행진까지
· 오후 5~6시(?)경, 눈치 봐서 마무리
*구체적인 장소와 프로그램은 현장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

· 드레스 코드: 결기를 드러낼 수 있는 배지(당일 대여 가능)
· 길바닥에 누워도 되는 옷,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엉덩이 깔개 등 앉기 대책
· 걷기 편한 신발, 활동성 있는 복장, 여타 이동수단 등 행진 대책
· 손수건, 모자, 선크림 등 개인 위생 및 일광 대책
· 개인 식수, 간식 등
· 손피켓에 적을 문구 또는 원하는 손피켓
· 그 외 치장물


미리 알림

· 참가 전 923기후정의행진 사전 학습 必(아래 참고자료 참조)
· 별도 신청 없이 그냥 약속 장소로 털레털레 오시면 됩니다.
· 점심 먹고 오세요.
· 일대 도로교통 마비가 예상되므로 오실 때 지하철 이용을 강력 권장합니다.
· 지각 또는 지연 합류 시 곡물창고 게시판에 문의하세요.
· 집결성사가 참가단의 목표이며, 그다음은 같이 다니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 간단 손피켓 제작 재료를 제공합니다.
· 곡물창고 관련 기획 일체 없습니다.
· 주최자는 참가단과 관련하여 최소화된 가이드와 중재만을 제공합니다.
· 상호 존중과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참고자료

· 923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
· 가이드북 다운로드
· 정보와 일정표

2023년 1월 16일 월요일

하녀가 되는 수업

옆 사람이 하녀가 되고 싶다길래 나도 얼떨결에 하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헛간으로 들어와 하녀가 하는 일을 하려고 보니 내가 입은 앞치마의 무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앞치마의 무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일거리를 앞에 두고 딴청을 부리기엔. 나는 정식으로 하녀가 된 건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하녀는 봉급을 받고 가사 일을 한다. 내가 일하게 될 수도 있는 집은 내 마음보다 큰 것 같았다. 어쩌면 내 손톱보다도 작을 수도 있디. 그에 비해 이 헛간은 내 좁은 마음보다 더 밴댕이이고 그리고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별의별 일거리를 만들려면 만들 수 있음을. 그래서 친숙해 보였다. 우선은 쟁기 같은 농기구가 있었는데 녹이 슬락 말락 했다. 반질반질 윤을 낼 수도 있을 텐데 이곳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이 떠올라 지금 당장 하녀로서 행세하는 일은 안 하기로 했다. 다음 주에 나는 정식으로 하녀가 된다. 하녀의 신분을 갖게 된 사람으로서 일기를 써가야 한다. 어쨌든 간에 나 말고도 하녀를 지망한 사람이 몇 명 더 있었으므로 그들의 일기를 따라 한다는 방법도 있었다. 헛간 안에서 아무것도 건들지 않은 채로 나는 방을 치우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녀 지망을 한 이후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을 치우는 것이었고 그것은 인간의 조합 안에 하녀나 사용인 등이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멋지고 유용한 일인지에 대한 감상을 내게 남겨주게 되었다. 여기엔 하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진장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내가 일을 대신해 줘서 조금 편해지더라도 그게 안 편할 수도 있다. 무언가 일을 해내는 루틴이 있는데 그걸 건드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알았다. 그런데 농사는 누가 짓는 거지? 이건 왠지 근본적인 물음인 것 같으므로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헛간에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건강에 안 좋을 수도 있으므로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기록을 보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기왕 하녀가 됐는데 이렇게 일거리가 많아 보이는 곳에서도 손을 쉬고 있어야 하는구나. 이사야는 날 경계하지 않는 것인지 저쪽에서 잠든 채다. 이사야는 몸집이 저리 작아 보여도 아주 듬직하다. 가끔 쥐를 잡아오는데 그 쥐는 아마 누구에게 주려고 잡아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사야를 깨우고 싶었으나 그러진 않았다. 이사야와 할 수 있는 건 같이 뜀박질한다는 것이 있다. 나는 뜀박질을 좋아한다. 같이 하녀를 하기로 한 같은 수업 듣는 사람이 헛간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다이닝을 한 적도 있었대요. 눈동자를 굴리면서 조금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인 그분에게 나는 말을 걸었다. 여기에서요? 식당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네, 그렇죠. 그런데 과거에서 온 악마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던데……. 아마도 예전에 여기에서 연재된 시리즈에 나오는 악마가 아닌가 싶었어요. 페이지에는 이제 안 올라와 있군요. 그러면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나? 나는 약간 기분이 고조된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도 그분처럼 눈동자를 굴렸고 이번엔 그분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다음 주까지 써야 하는 일기 쓰셨어요? 아뇨, 아직 못 썼어요. 그래서 오늘 한번 써보려고요. 옷을 한 번 바꿔 입었다는 것만으로. 그러니까 나란 인간의 조합에. 하녀 같은 키워드가 추가됐다는 게 너무 이상해요. 그리고 이 헛간은 제가 못 치운 것들이. 그리고 아무도 못 치운 것들이. 방 정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치워지지 못할 것들이 많은 것 같아서 너무 친숙해 보이고 안온한 것 있죠. 왜 사람들이 방을 치우지 않는지 알겠어요. 그게 편해서 그래요. 그리고 왜 나도 제 앞의 분을 따라서 하녀를 하겠다고 한 건지도 알겠어요. 그게 제 마음에 편한 거죠. 치운다는 건 사실 사물들을 자기가 원하는 위치에 갖다 놓는 거니까. 사실은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너저분한 건 치워야 하는 것이고. 여기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모든 물건들이 이사야가 원하는 배치대로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 생각하는 배치. 그게 아마도 여기가 친숙해 보였던 이유 중에 하나일 것 같아요. 정리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안 된 것 같기도 해서 이상해요. 아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없을 테죠.

2022년 12월 22일 목요일

곡물창고 2022년의 숫자들

안녕하세요 창고관리인입니다.
다가오는 2023년, 곡물창고는 운영 7년째를 맞습니다.
그간 뭔가 변했습니까? 안 변했습니까?
곡물창고에서 얻거나 곡물창고에 버린 것이 있습니까?
곡물창고의 2022년도를 다음의 숫자들로 남겨둡니다.



95

입하된 게시물

총 491개의 게시물 중 약 19%. 월 평균 7회의 입하가 있었습니다. 가장 입하가 많았던 달은 9월(14회), 가장 적었던 달은 10월(2회)입니다.


2.02만

조회수

22년 12월부로 곡물창고 총조회수는 10만을 넘었습니다. 게시물당 조회수는 평균적으로 30~50입니다. 22년도 단일 게시물 최고 조회수는 173, 최저 조회수는 7입니다. 조회는 한국에서 81%, 그 외 국가에서 19% 이루어졌습니다.


22~44

곡물창고 보름간

보름간은 22호부터 44호까지 발송되었으며, 현재 74분이 받아 보고 있습니다.


294

알림판

알림판의 팔로어 수는 290 내외를 오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알림판 개설 당시의 목표는 300이었습니다.


-2, +1

필진

두 분 필자의 등록이 해제되었으며, 한 분의 필자가 새롭게 등록하였습니다. 현재 필진은 7인(창고관리인 제외)입니다.


6

올해 입하가 시작된 태그

리뷰 비슷한 것
마이의 노트
방랑예술가 이건수의 일기
외삽연극
환상 동화
헛간


4

올해 저장고로 들어간 태그

도시 전설 (37편)
바리에테 (23편)
외삽연극 (3편)
임금벌레 (6편)


13, 14, 18

개별태그 최대 입하

입하 중인 개별태그는 8개, 그중 가장 많이 입하된 세 개의 태그는
~같은 것 (13회)
환상 동화 (14회)
社名을 찾아서 (18회)
입니다.


3099

모금통

7회의 격려로 발생한 격려금 총액 90,000원 중 필자들에게 전달된 격려금은 7,000원입니다. 현재 282,494원의 기금이 있으며, 3,099원의 예금이자가 발생했습니다.



오늘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고 하는 동지입니다.
내일부터는 낮이 점점 길어집니다.
지난 일 년 괴롭거나 즐거우셨습니까?
이제부터 즐겁거나 괴로울 예정이십니까?
원하는 만큼 준비되시기를 기원하고,
기여하는 모든 이들의 노고를 치하합시다.

2022년 11월 22일 화요일

알림판은 어떡해?

들었어? 트위터 망할 수도 있다고? 우린 어떡해?

관리인은 별 대답 없이 장갑을 벗어 양손에 하나씩 붙잡고 박수 치듯 맞부딪기 시작한다. 창고 지붕을 타 넘은 오후의 부신 빛이, 리듬을 따라 터져 나오는 흙먼지를 비추고 부풀린다. 관리인의 표정 없는 얼굴은 비스듬한 빛으로 잘려있다. 뭘 하다 온 것인지 한쪽 안경이 온통 뿌옇다. 주변이 점점 먼지로 자욱해진다. 나는 뒤로, 창고의 그늘 속으로 물러선다. 관리인은 이제 그 장갑으로 옷을 턴다. 턴다기보다는 거의 먼지구름에 집어삼켜지고 있는 꼴이다. 관리인은 그 속에서 말한다. 뭘 어떡해?

우리 알림판은 어떡하냐고! 미리 준비를 해야지!

근데 언제부터 관리인에게 말을 놓았지? 모르겠다. 관리인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천천히 먼지구름 속에서 나온다. 지독하게 바람 없는 날이다. 관리인은 아무 털어낸 것이 없는 것 같다. 또 답답하게 되묻는다. 진짜 망하는 거 맞아? 망하고 나서 생각해봐도 되지 않아?

아니, 그러면 안 돼. 미리 대비를 해야지, 한군데 정해놔야지. 인스타 갈 거야? 어쩔 거야? 페북? 뭐 마스토돈? 그런 것도 있다던데?

무슨 대비를 해? 그런 델 왜 가? 게시판 있잖아.

게시판은 지미...

투고 들어온 건 있어?

관리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투고 얘긴 왜 해? 투덜대면서 관리실로 간다.

2022년 6월 20일 월요일

직업 전선 낭독회에 가다

지난 수요일 직업 전선 낭독회에 다녀왔다. 이미 공지했듯 ‘직업 전선’은 이곳 곡물창고 및 모 문예지면에서 연재되었다가 최근 실물책으로 출간되었다. 출간을 기념하여 저자를 놓고 사람을 모아 책을 낭독하고 저자와의 대화도 나누고 뭐 그런다는 거였다. 악으로 깡으로 전자문예 외길을 추구(사적인 견해임)해온 곡물창고 관리인의 입장에서도 실물책 출간은 언제나 흥미로운 이벤트고, 출간 이벤트 또한 그렇다.

행사는 소전서림이란 곳에서 열렸다. 출판사에서 각지 서점들에 책을 보내며 낭독극을 원하는 서점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 했고, 소전서림이 연락을 했다고. 소전서림은 기본적으로는 동네..도서관으로서... 그런데 이제 동네가 극한의 부촌인, 그래서인지 이용료도 아주 뻑적지근하게(5시간/3만) 받는 곳이었다. 위치를 생각해 보면 그조차 적은 듯하고 몰래 마약이라도 팔아야 타산이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 타산보다도 뭔가 있겠지... 악으로 깡으로 전자문예...곡물창고 관리인의 입장에서도, 도서관이란 어디에든 어떻게든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단 백배 낫고, 이미 있다 해도 언제까지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초대권까지 생긴 마당에, 또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대체 언제? 영영? 가지 않을 이유가 뭔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하지만 비까지 오는데 어째서 내가 여기까지... 이 적지를 벗어나... 집에서 강렬하게 쉬고 싶다... 눕고 싶다... 그런 생각들을 억누르며 퇴근 후 봉은사 역으로 향했다.

건물은 멋있는 흰 벽돌 건물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소전’이란 것 자체가 흰 벽돌이란 뜻으로, 그것은 소전문화재단의 건물이고, 이사장은 젊은 시절 벤처 신화를 쓴 뒤 일선에서 물러나 문화예술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이사장이며, 소전서림도 당연히 그런 취지로 운영하는... 다 좋은 이야기였다. 우산꽂이가 있어 입구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내 우산을 포함해 대부분이 편의점 투명우산들이라 특별히 번호를 기억해뒀다. 1층은 카페 겸 와인바, 도서관은 지하. 내려가려면 키오스크에 번호를 입력하고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삼발이게이트를 통과해야 했다. 휘어져 내려가는 계단참에 붙은 행사 포스터. 지하도 참 아늑하고 좋은 공간이었다. 희고 밝고... 책이 많다는 건 언제나 좋다. 왜 안 좋겠나? 자세히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낭독회는 천장이 높은 행사용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편편의 낭독은 직업을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이 된 듯 연기하는 투로 이루어졌다. 저자와 사회자가 각 20여 분. 낭독극단 같은 건 어떨까 하는 허튼 생각을 잠깐 했다. 저자를 실은 마차를 전국 각지로 끌고 다니며... 낭독이 끝난 후엔 기묘한(원하는 형태의 대답을 영 해주지 않는 저자) 대담. 그 다음엔 청중들에게, 옆에서 옆으로 마이크를 돌리며 뭔가 물을 사람은 묻고 아니면 책에서 한 편 골라 낭독하거나 패스하는 시간. 사람들에게 마이크 돌려버리는 그게 아주 좋았다. 그것은 총화 스타일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낭독을 택했다. 내가 느낀 것처럼, 낭독을 들으면 낭독을 하고 싶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부담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선택지만 주어진다면, 목소리를 낼 수만 있다면, 목소리 내기를 크게 거절하진 않는 것이다. 많은 목소리들이 듣기에 좋았다. 사람들의 각기 다른 목소리로 듣는 재미, 특히 내용과 목소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우들이. 7시 반에 시작한 행사는 10시까지 이어졌다. 사실상 우리는 낭독극을 펼친 사람들이었다. 화장실이 어딘지 몰라 조금 헤맸다. 사인을 받았다. 우산은 꽂았던 곳에 꽂혀있었다.

2022년 4월 27일 수요일

― 제132주년 세계노동절 대회 견학단 모집 ―

그 일은 가능하다


22년 5월 1일 일요일 오후 1시
서울 2호선 시청역 9번 출구 앞



행사의도

좀 갑작스럽고 한편 수상쩍겠습니다만... 곡물창고 이용자들(필자/독자/관리인)을 대상으로, 제132주년 세계노동절대회 서울대회에 어쩐지(?) 가보고는 싶은데 딱히 핑계가 없는 사람들(저 포함)을 위해 ‘드나듦이 자유롭고 홀가분한 견학단’을 비공식적으로 조직합니다.


참가자격

· 곡물창고 이용자 겸 노동자
· 곡물창고 이용자 겸 예비노동자
· 곡물창고 이용자 겸 (구)노동자
· 곡물창고 이용자 겸 사실상 노동자
· 곡물창고 이용자 겸 노동자의 친구
· 곡물창고 이용자 겸 노동자의 가족
· 위 해당자의 일행


예상인원

6~?명
*참가 의사 확인에 따라 업데이트됩니다.


프로그램

· 13시 시청역 9번 출구 집결(주최자 주황색 손피켓 ‘곡물창고’ 찾기)
· 대회 장소로 이동
· 전국민주노총조합총연맹 주관 22년도 세계노동절 서울대회 견학
· 자유 해산
· 18시경 눈치 봐서 마무리
*구체적인 장소와 프로그램은 현장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

· 이미 먹은 점심
· 노동절에 대한 최소한의 흥미
· 길바닥에 그냥 앉아도 되는 옷,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엉덩이 깔개 등 앉기 대책
· 걷기 편한 신발, 활동성 있는 복장 등 행진 대책
· 손수건, 모자 등 개인 위생 및 일광 대책
· 개인 식수, 간식 등
· (원한다면) 주장을 적은 손피켓


주의사항

· 곡물창고 관련 기획 일체 없음
· (원한다면) 간단 손피켓 제작 재료 선착순 제공
· 지하철 이용 강력 권장(일대 도로교통 마비 예상)
· 뭘 따로 하자고 하지 않음(최소화된 가이드를 원칙으로 대회의 큰 흐름에 맞춤)
· 단체 가입, 종교 권유, 여타 부담스런 개수작을 금하고 상호존중 및 배려 원칙 동의
· 주최자는 모임과 관련하여 일어난 일에 대하여 무책임/무대책(미안합니다)


참고자료

· 민주노총 대회 공지 링크

· 포스터


· 일정표

2022년 3월 27일 일요일

선반

이사야가 선반 위에 앉아 있다. 곡물 포대에 난 구멍이 보인다. 선반 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다. 난 거기 위에 올라갈 순 없지만. 선반 위에는 유리 구슬, 안에 눈이 오는 작은 마을이 비쳐보이는 것이 하나 놓여 있다. 이사야가 구멍이 난 곡물 포대 근처로 가서 구멍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 거기에 모든 것이 있을 것이다. 밖에는 눈이 오고, 한 사람이 빗자루로 눈을 쓸고 있다. 나는 이사야를 회색 고양이라고 부르곤 한다. 아쉽지만 나는 그런 별명을 소리내어 부를 수 없다. 대신에 날 뒤덮은 천이 있는데, 그 천은 평소에 이 창고의 선반 위에 걸려 있다. 그 천이 나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나라고 볼 수 있고, 다만 천이 나를 뒤덮고 있으면 무거워서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어째서 저 사람은 처음에 천으로 선반 위를 덮을 생각을 했을까? 날 확인하기 위해서? 난 온 힘을 다하면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2~ 3번 정도 낼 수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난 저 사람을 놀래키기 위해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다. 처음에 그 사람은 깜짝 놀라는 듯했다. 아마도 쥐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구멍이 난 곡물 포대 안을 들춰 확인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놀라지 않는다. 그것이 재미없어 나는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길 그만두었다. 대신에 평소에 노는 것은 이사야와 같이다. 이사야는 좀처럼 가만히 있질 않는 회색 고양이다. 내가 포대 안에 들어가 귀리 몇 알을 꺼내 가져다주면 맛을 보기도 한다. 나도 옆에서 따라 맛을 본 적도 있었다. 물론 맛은 나지 않았다. 맛이란 건 뭐였을까? 나는 지금은 이 창고의 선반인 신세지만 내게도 살아 있는 몸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난 이사야와 같은 회색 고양이였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이사야의 조상이거나, (아니면 이쪽이 오히려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데) 이사야가 내 조상이라는 것이다. 이사야는 나보다 어린 고양이지만 이미 난 평범한 고양이들과는 다르게 되었고―나는 물건 취급 받는다. 문자 그대로. 왜냐하면 진짜 물건이니까?― 사실 내가 살던 곳은 저 유리 구슬 안의 작은 마을이다.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아마도 이건 내 생각이지만 난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유령이 된 것이 아니다. 아마 난 요정의 장난으로 태어나게―제작된― 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내가 회색 고양이였다는 것은 확신하는데, 이 추측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사야가 내 조상이거나 내가 이사야의 조상일 거라고 말은 했어도 어쩌면 난 이사야와 형제였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이사야에게 저 유리 구슬을 보여주고 이곳이 기억나니? 라고 물어봐야 할 텐데 이사야조차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깜짝 놀래키는 일이 이제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아서 평소에 그냥 가만히 있는 채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할 줄을 안다. 지금은 이렇게 천을 덮어 놨지만. 나는 말할 줄 아는 고양이다. 원래 회색 고양이였던 (지금은) 선반이다. 나는 내 근처에 있는 것들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곡물 포대에 난 저 구멍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구멍이 아니다. 아, 내가 말을 더 할 수 있었다면 저 구멍에 대해 더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잠이 온다. 나는 이제 잠든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원래 그대로 있는 채다. 가끔씩 이사야가 들락거린다. 내가 꾸는 꿈은 저기 유리 구슬 안에서 보인다. 

2022년 3월 7일 월요일

헤매기 업무

저장고의 문은 무겁고 안쪽은 어둡다. 빛은 문간 몇 발짝에서 더 뻗쳐오르지 못한다. 숨을 잠시 멈췄다가 저장고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나는 이 냄새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괜히 되뇌자, ‘살았던 적 없기 때문에 죽지도 않는 것들의...’ 그런 비슷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냄새는 건강에 좋을 것 같지 않다. 그것은 건조하고 서늘하다. 나는 이 냄새를 사랑한다. 쥐잡이를 불러본다. 대답은 없다. 안에 있었다면 허리띠의 무지갯빛이 먼저 보였을 것이다. 현황판에 내걸린 표패의 수를 두 번 센 뒤 나는 어두운 저장고 안으로 한 발 내딛는다. 이것은 헤매기 업무다.

죽도록 일하게 시키면서, 죽도록 일하고 싶지 않다면 알아야 한다고들 한다. 뭘 알아? 알지 못하면 죽으란 거냐? 죽도록 일하게 시키며? 알려주지 않고 죽인다, 죽은 것은 알지 못한 네 탓이다, 사회라는 것이 이런 식이다, 돌아가는 꼴을 겪으며, 이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죽고 싶을 정도로 불쾌하다, 세상사의 전개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예전엔 뭐가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는 것이 조금은 있었다, 지금으로선 하나도 알고 싶지 않다, 선대도 다들 이런 시간을 지나서 거기에 있는 것이겠지? 개 좆이다, 쓰레기세상의 인간쓰레기들, 오랜만에 그런 젊은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어두운 저장고 속에서 헤맨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알지도 않을 것이다, 알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하고 있다. 이것이다. 나는 한참을 더듬다가 하나를 꺼낸다.

저장고의 문은 무겁고 안쪽은 어둡다. 쥐잡이를 불러본다. 안에 있었다면 허리띠의 무지갯빛이 먼저 보였을 것이다. 숨을 잠시 멈췄다가 저장고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 냄새는 건강에 좋을 것 같지 않다. 빛은 문간 몇 발짝에서 더 뻗쳐오르지 못한다. 현황판에 내걸린 표패의 수를 두 번 센 뒤 나는 어두운 저장고 안으로 한 발 내딛는다. ‘살았던 적 없기 때문에 죽지도 않는 것들의...’ 그런 비슷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이 냄새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괜히 되뇌자, 나는 이 냄새를 사랑한다. 대답은 없다. 그것은 건조하고 서늘하다. 이것은 헤매기 업무다.

죽도록 일하게...

2021년 12월 26일 일요일

이사야가 회색 태비라기에

몇 주째 창고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대신 조용해서 종종 노트북을 들고 온다. 여기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고 봐야 맞는다. 하릴없이 여기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검색창에 ‘회색 태비’를 입력해봤다. 쥐잡이 이사야가 회색 태비라고 했었나? 치즈 태비는 많이 들어봤는데 회색 태비는 낯설다. 그러고보니 검은 태비도 흰색 태비도 낯설게 느껴진다. 고등어 태비는 어디서 들어보았다. 온순하고 침착한 캣. 살집 두툼한 무늬 고양이들.

연관 검색어로는 마눌고양이가 있다. 어디에서는 ‘마눌’이 ‘못생긴 귀’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또 어디에서는 ‘마눌’이 ‘작은’이라는 뜻의 몽골어라고 설명한다. 이 중 무엇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설명들을 기계적으로 합하면 마눌고양이는 못생긴 귀를 가진 작은 고양이다. 마눌고양이의 사진을 보면 이 설명이 적절한 것 같다. 또 얼굴이 둥글고 털북숭이다. 그러나 이 외양이 고양이의 남모르는 사연과 생활양식까지 말해주진 않는다.

마눌고양이는 몽골 등 중앙아시아에 점점이 분포해 서식하는 멸종위기종이다. 보통 혼자서 생활하며 어둑해지는 저녁에 가장 활발히 활동한다. 아주 한밤중을 선호하진 않는 모양이다. 야생에서 살다보니 전염병 등 위험에 수시로 노출되어 수명은 5~6년 정도로 짧다. 단명하는 고양이.

이것의 연관 검색어로는 ‘manul cat price’ ‘마눌고양이 분양’ 등이 있다. 마눌고양이의 다른 이름으로는 ‘마눌들고양이’가 있다. 즉 들에 사는 고양이다. 그런데 또 다른 연관 검색어로는 ‘마눌고양이 길들이는 법’ ‘마눌고양이 기르는 법’ 등이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렸다. 평소 한두 명 정도 드나드는 한적한 블로그인데 요며칠 조회수가 늘었다. 유입 통계를 확인해보니 83% 정도가 ‘마눌고양이 분양’을 검색해 들어오고 있다. 이런 의도로 쓴 글이 아니기에 비공개로 돌릴까 했지만 오히려 그냥 두었다. 이 글은 쥐잡이 이사야가 회색 태비라기에 쓰기 시작했다.

이후로 며칠째 여전히 창고 근처를 서성이는데 아직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꼭 누군가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 분명 처음 와본 곳인데 자꾸 오다보니 언젠가 와봤던 곳 같기도 하다. 요옹요옹. 이사야의 울음소리는 이곳에서 들리는 다른 소리들과 구분하기 쉽다. 다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2021년 11월 19일 금요일

게시판 다는 날

관리인이 게시판을 달았다. 못을 박았다가 뽑았다가... 그 자리 벽이 다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이런 거 단다고 누가 쓰겠어요? 모금통도 몇 달째 비어 있는데.

게시판을 이 각도에서 보고 저 각도에서 보던 관리인은

그래도 전에 무슨 쪽지함이니 우편함이니 그런 거보단 낫지 않아?

하고선 턱을 만지며 덧붙였다.

모금통은, 돈을 쓰질 않으니 들어오지도 않는 거야. 차라리 기금으로 뭐라도 해. 수전노처럼 굴지 말고.

뭐? 수전노? 수전노가 아니라, 진짜 뭘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게 수전노야. 모르겠는데 돈은 왜 쥐고 있어? 은행 좋은 일만 시키는 거지.

아 네네. 잘 아셔서 좋으시겠어요.

자네도 여기 뭐라도 한마디 써서 붙여 봐.

무슨 한마디요?

근처에서 이사야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관리인은 연장을 챙긴다.

아무 한마디나. 안녕하세요? 모금통으로 모은 돈을 어디에 쓸까요? 그런 거라도 물어보라고. 아니면, 자네도 창고에 들어오는 건 다 읽고 있을 거 아냐? 최근 들어온 뭐뭐가 참 좋습니다, 읽어들 보세요, 또, 무슨, 일하다 심심할 때 삼행시 같은 거라도 지어서 올려. 말마따나 자네 아니면 누가 쓰겠어?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래도 달아두면 쓸 사람이 있겠죠. 왜 없어요.

없을 거라며? 그래 없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자네가 써. 나 쓰라고 달린거다, 생각을 하면서. 그럼 쥐잡이가 쓰겠나? 하여튼 필요는 하다고. 여 봐봐, 분위기가 훨씬 좋잖아? 자네도 종일 관리실에 앉아 있어 보란 말야. 얼마나 살풍경하고 수상쩍어 보이는가 이 말이야... 내가 이런데 남들은 오죽하겠어?

알았어요. 알았어. 창고에만 있지 말고 산책도 좀 나갔다 오고 하세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메타버스?

관리인은 껄껄 웃으면서 이사야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2021년 10월 13일 수요일

감기에 걸렸어요

교정의 요정으로부터의 전화였다. 감기에 걸렸다고.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몇 번 다그쳐 물었다. ...렸.. 기요... 감... 뭐라고? 감기라고? 감기? 맞아? 관리실 수화기를 붙들고 소리 소리를 치다가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교정의 요정을 본다. 손에 스마트폰을 들긴 했는데 입에다 대고 있지 않다. 교정의 요정에겐 입이 없다. 요정은 그대로 창고에 들어갈 기세였다. 수화기를 놓고 황급히 마스크를 썼다. 앞을 가로막고 보니 요정의 피부빛이 좀 달라진 듯도 했다. 좀 더 창백한 빛이 도는... 감기라며? 뭐하러 왔어? ...러요... 다... 뭐라고? 기러기? ...옴... 옮기러요. 옮기겠다고? 감기를? 요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흐흐흐 웃기 시작한다. 요정의 눈에서 점점 더 강하게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2021년 8월 10일 화요일

마감날 풍경

며칠 전부터 더위가 한풀 꺾였다. 아예 저장고에 들어가 살았던 이사야도 요즘엔 저녁때 맞춰 밖으로 나온다. 한창 더울 땐 나도 저장고에 내려가서 이사야와 놀았다. 어두운 저장고 한구석에서 이사야의 무지갯빛 허리띠가 부드럽게 빛났다. 관리인은 오늘 아침부터 안절부절하며 공연히 창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여름을 지나며 관리인은 홀쭉해졌다. 보양식이라도 좀 챙겨 드세요 했더니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예 아무것도 먹질 않는다고 했던가? 하여튼 됐다고 했다. 다 지났는데 뭘. 올여름도 창고에 에어컨은 없었다. 여기 관리실에도 그렇다. 땀을 쏟으며 캐비닛을 한참 뒤졌지만 나의 마스코트 그림은 없었다. 관리인이 왈칵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감전된 것처럼 일어서다가 캐비닛 모서리에 정강이를 찧는다. 꽁꽁 닫고 뭐 하고 있어? 아녜요. 맘대로 뒤져도 되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말을 해. 다 들어왔어요? 아직. 좀 쉬어요. 뭘 걱정해요? 관리인은 대답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간다. 이사야의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사야가 저장고의 어느 구멍으로 드나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2020년 12월 22일 화요일

‘곡물창고의 마스코트를 생각해 봤다’고?

곡물창고의 마스코트를 생각해 봤어요. 이름은 쭉정이. 세 가지 버전이 있죠. 관이 들고 온 세 장의 그림은 다음과 같았다.




관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한다. 물론 괜찮죠. 제가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2020년 12월 4일 금요일

2020 연말특집, 말 않는 것들과의 결산 좌담회

뒷마당의 동백 앞에 모였다. 모였다기보다는 모았다. 램프, 가죽 포대, 썰매, 오함마, 모금통. 이사야는 한동안 이것저것 냄새를 맡으며 이마를 비비다가, 이제는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 위에 드러누워 외국 동전들과 함께 햇볕을 쬐고 있다. 줄무늬가 여전하다. 꼬리는 한껏 툼툼해져 있다. 장갑을 끼고 나올 것을 그랬다. 관리실에 가서 장갑을 끼고 나온다. 추운 날씨에도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벌써 한 해가 다 지났네요. 오는 10일이 곡물창고의 공식 건립일이에요. 이걸로 다섯 번째 해를 맞습니다. 공중에 인삿말을 꺼내고 보니 더 이상한 기분이다.
…….
다들 올 초 관리인과의 대담은 읽고 오셨나요? 아닌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돌아보면 이번 한 해가 정말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요. 거의 없어진 것처럼요. 다 이유가 있겠죠. 이런저런 이유가. 서로 알고 모르는.
…….
만약 우리가 2020년이라는 비상사태의 이전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실패, 더할 나위 없는 실패일 겁니다. 그래서 이제 나오기 시작하는 백신의 일면은 또 다른 재앙인 셈이죠. 안티백신운동을 하려는 게 아니라, 만약 우리가 백신으로부터 ‘돌아갈 수 있다’는 빗나간 희망만을 짜낸다면 그렇다는 거예요. 지옥을 향해 회복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백신의 다른 면, 그것의 생산부터 배분까지의 전 과정, 새로이 만들어낸 약속들에 집중해야 해요. 그 약속들은 바이러스와 백신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아득히 넘어섭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향해 뻗어 나가지요. 또 다른 면과 면의 연결로요. 사태를 둘러싼 바로 그 총체적인(총체적이어야 할) 연쇄 개입들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래시킬 세계의 일각이에요. 그것은 이전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분명히 중단시킬 수 있었지만, 그저 사태들이 마음껏 발생하도록 내버려두기만 했던, 비정하고 무참하게 닳아지고 있던 우리의 세계를 드러내는 거울이기도 하고요. ‘모든 것’에 대한 가능성 위에서야 백신이 희망 비슷한 것이죠. 요구되어 왔던 경험, 돌이켜지지 않는 경험을 세계와 우리에게 남긴다는 점에서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죠? 더 이상 나는 할 말이 없다. 창고의 흰 처마를 본다. 이사야가 몸을 돌려 엎드리며 요옹 하고 운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또 후련합니다. 우리는 준비가 된 걸까요? 실패할 준비가? 아니면... 모르겠어요. 겪기 전엔 모르겠어요. 말하기 전엔 모르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다음과 같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
자, 인사말은 끝이에요. 창고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관리인한테 받아온 자료를 발표하려고 해요. 캐비닛을 뒤지고 있는데 들어와서 딱 마주쳤어요. 있으면 내달라 하니 반색을 하면서 꺼내 주더군요. 관리인이 이런 거 좋아하죠. 같이 가자고 하는 데엔 손을 젓더군요. 들어보세요. 현재 곡물창고에는 총 309개의 게시물이 입하되어 있고, 총 조회수는 약 5.1만이에요. 지난 1년만 따지면 108개 입하, 조회수 약 1.48만이고요. 국가별 조회수 비율은 한국 81%, 미국 8%, 독일 3%, 그 외 7%입니다. 브라우저별 조회수 비율은 크롬 76%, 사파리 16%, 파이어폭스 3%. 운영체제별 조회수 비율은 윈도우즈 51%, 안드로이드 21%, 아이폰 11%, 매킨토시 10%, 리눅스 3%네요. 뭐 하러 이런 자료까지 줬을까요?
…….
알림판의 팔로어 수는 160 내외입니다. 알림판을 통해 발생한 지난 1년 조회수는 2,000 정도로 잡혀요. 요즘 게시물당 평균 조회수는 20에서 40 정도입니다. 관리인은 곡물창고에 입하된 글을 무조건 읽는 고정독자가 최소 10명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현 시점 필진이 7명이니, 관리인의 계산을 따르면 필자들과 비슷한 수의 애독자가 있는 셈이겠죠. 관리인이 말하는 ‘정예독자진’이 그들이에요. 그들이 창고의 진정한 자랑이라느니... 전 잘 모르겠네요. 그런 식으로 따질 수 있는 건지? 그냥 단순히 필자들이 다른 필자의 글을 두 번씩 읽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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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난 1년간 가장 많이 조회된 글 목록이에요. 조회수는 177부터 61까지입니다.
1. 사서 ― 직업 전선
2. [15호 서신] ― 경비서신
3. 2020 신춘특집, 관리인과의 대담 ― 곡물창고에서
4. 저격수 ― 직업 전선
5. 도서관 ― 박물지
6. 사형수 ― 빙터
7. 가정주부(농부의 아내) ― 직업 전선
8. [17호 서신] ― 경비서신
9. ― 사자를 만나고 있을 때 사자가
10. 음악은 인민의 아편이다 ― 방공호
10. 정원과 거미 ― 단편
10. 모험 상인 루디거 ― 기괴하고 엉뚱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의 탄생에 관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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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가장 적은 조회수를 기록한 게시물은 세계의 곡물창고들 '18 ― 방공호예요. 1이군요.
…….
올해 5월에 설치된 모금통을 통해서는 7개월 동안 31회의 격려가 이뤄졌습니다. 필자들에게 전달된 총 격려금은 52,800원, 기금으로는 121,741원이 모였어요. 그중 거의 삼분지일 정도는 회비 겸 고료 겸 운영비 겸 겸겸사사로 제가 넣은 것 같군요. 모인 기금을 통해 매월 약 50원가량의 ‘금융소득’이 발생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기금을 갖고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영원히... 자료는 여기까지가 끝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들을 사람도 없으니. 이사야는 자고 있다. 이사야로부터 뻗쳐 나오는 온기가 느껴진다. 이상한 줄무늬가 생긴 뒤로는 그렇다. 관리실에 같이 있으면 난로를 켜지 않아도 될 정도다. 병 같지는 않다. 이사야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초능력을 얻은 걸까? 관리인의 농담처럼, 꼬리를 굿즈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잘 모르겠다. 나는 이들과 함께 뒷마당에 있다. 관리인에게 송년회를 하자고 해야겠다.

2020년 9월 16일 수요일

처마

우리는 창고의 흰 처마를 보고 있네. 가을로 넘어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네. 쥐잡이는 꼬리로 바닥을 때리네. 맑은 날에 털었던 담요를 꺼내네. 팔에 소름이 돋는다. 그 위로 담요가 덮인다. 절대로 죽지 않는 집짐승이 이리로 올라오네. 꼬리로 이 배를 두드리네. 이따가는 차를 내려볼까? 죽은 잎들에 물을 부어?

어때? 이게 뭔가요? 시를 한 편 써봤어. 이런 취미도 있나요? 요즘은 시심이 동하는군. 뭐가 동한다고요? 나도 한때는 시집 깨나 읽었는데. 잘 모르겠네요. 흰색이 아니잖아요? 시라니까. ‘쥐잡이’라는 건 어때요? 우리 말고는 잘 모를 것 같은데. 쥐잡이라고 하면 대충 뭔지 다 알지 않나? 각주라도 달까? 달 각주가 뭐 있어요. 그냥 고양이죠. 왜 말이 달라져. 요즘은 그렇네요. 관은 입을 다문다. 쥐잡이가 관의 무릎으로 올라간다. 담요가 덮여 있다. 컵에서는 아직 김이 오르고 있다. 우리는 창고의 흰 처마를 본다.

2020년 6월 30일 화요일

교정의 요정

관리실에 앉아 이달 모금통 회계부를 적고 있다가 교정의 요정에게 끌려 나와 적잖이 놀랐다. 평소엔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였다. 인사를 행여 해도 꼭 속삭이는 것처럼...

어디로 가는 거죠? 물어도 대답이 없다. 대답을 했는데 안 들린 것일 수도 있다. 요정의 검지와 중지에 집힌 소매가 형광 녹색으로 물들고 있다.

송편 빚은 얘기 봤어요. 나는 아무 얘기나 되는 대로 꺼낸다. 좀 두렵기도 했다.

그것이 언제적 일인가요. 거의 한 해가 지났어요.

이번엔 목소리가 분명히 들린다. 제대로 들은 것은 처음 아닌가? 교정의 요정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교정의 요정다웠다. 어디로 가는 거죠? 다시 물었는데 요정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듯, 앞으로 가기만 할 뿐이다. 나를 어디로? 뒷마당으로? 이대로 요정에게 끌려서 끝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끝이 어디라고? 단지 요정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질문하면서.

요정의 비현실적인 빛깔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아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홀린 듯이, 나는 전부터 한번 요정을 만져 보고 싶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정이 나를 거의 만지고 있는 지금, 요정을 조금 만져 봐도 괜찮지 않을까? 요정에겐 옷소매도 없다.

교정의... 요정님 전부터 궁금했어요. 조금 만져 봐도 되나요?

요정은 뭐라 속삭인다. 들리질 않아 대답인지 뭔지도 알 수 없다.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저장고를 끼고 돌면서, 다시 용기를 내 묻는다. 만져 봐도 되나요? 요정이 답한다.

나는 고양이가 아니에요.

그럼 나는 뭐 가죽 포대라도 된단 말인가? 소매를 잡은 교정의 요정의 손을 탁 뿌리치는데, 잠깐 닿았는데도 그것은 몹시 아린 느낌이다. 요정은 멈춰 서서 돌아본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서 뭘 하려는 거지요? 요정의 뚫린 듯한 동그란 눈에서는 언제나와 같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중이다. 관리인의 말이 생각난다. 교정의 요정은 교정을 하는 게 아니야. 교정은 교정공이 하는 것이고, 교정의 요정은 교정공이 있는 곳마다 나타나

아무도 모르게 한 글자를 바꾸고, 공백을 빼고 놓으며 방해하는 거지. 우리는 지금 동백 앞에 서 있다. 요정에게 닿은 부분이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워져서, 나는 손등을 만지기 시작한다.

2020년 6월 2일 화요일

수상한 목함

우편함을 만든 뒤로 매일 광고 전단을 꺼내 소각장에 버리는 게 일과가 됐다. 쥐잡이는 잔뜩 쌓인 광고지 더미를 밟고 씹고 깔아뭉개는 느낌이 좋은 모양이다. 잘못해서 쥐잡이를 태워 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한편 관은 오늘도 그놈의 통 앞에서 서성대고 있다. 모금통은 관이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온 건지, 어쩐다저쩐다 한참 부산을 떨다가 바로 어제 놓은 것이다. 종일 그 앞에서 기웃거리고, 뭘 적어서 넣고, 자꾸 여닫는다. 그렇게 지키고 있으면 무슨 맘이 들다가도 없어질 것이라 하자 뒷마당을 한바퀴 빙 돌아 다시 돌아오고 만다. 뭐 있겠어? 자네 돈이나 실컷 넣겠지. 맞아요. 그게 이걸 놓은 이유 중 하나죠. 내가 돈이 좀 넉넉히 있었으면 뭐 한 이삼십쯤 넣었을 거예요. 그보다 이거 보세요, 여기 이 메시지, ‘요옹’은 대체 뭘까요? 혹시 이사야가 넣은 거 아닐까요? 나는 머리가 이상해지기 직전인 듯한 관에게 보리차 한 잔을 따라 준다. 비 올 거 같으니까 오늘은 가서 쉬어. 이제 날도 더워지는데 뭐 맛있는 것도 챙겨 먹고. 관은 물맛이 참 좋다 하고, 알았다고 하고, 집으로 간다. 쥐잡이에 대해 말해 놓는 것을 깜빡했다. ‘요옹’은 관이 써 넣은 것인 줄 이미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제법 짜임새가 좋은 상자가 아닌가? 어디서 났을지, 아마도 오동나무 같은데. 멀리서 쥐잡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짚이는 바가 있다.

2020년 5월 4일 월요일

쥐잡이의 대모험

오랜만에 찾은 창고는 그대로였다. 알림판을 살펴보았다. 역병이 돌고 있는 때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뒷마당의 동백나무 앞에서 괜히 떠난 사람들 생각이 났다. 예브게니, 조라, 휘, 오그오헤, 타라... 언제쯤이면 ‘떠난 사람들 생각’이 그칠까? 내가 떠나면. 우리가 어디로 떠난다는 걸까? 우리의, 떠난 사람들이라는 기억 속으로. 이것이 이승과 저승으로 우아하게 임의구분된 연속체의 구조이며, 사후세계라는 오래된 비유의 실지다. 우리는 떠난 이들의 저승에 태어났고 오는 이들의 저승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왜 이런 생각까지 줄지어 날까? 떠난 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거 맞지? 어딘가에 이 얘기를 적어 두자고 생각하고 있을 때, 소독통을 멘 관리인이 밖으로 나오며 손을 쳐들었다. 마스크를 벗는데 어쩐지 표정이 밝았다. 그 이유는 곧장 알 수 있었다. 뒤로 꼬리를 치켜세운 이사야가 따라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식상한 관용구처럼 눈을 비볐다. 이사야가 돌아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는 아니었고, 이사야가 반으로 잘릴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저 순간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확실히, 쥐잡이의 길다란 허리 한가운데 손가락 한 개가 들어갈 정도의 틈이, 꼭 세상에서 빠져나간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런 걸 분명히 어디선가...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아, 네. 관리인의 다리에 자꾸만 머리를 받는 이사야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다듬는 척하며 슬그머니 ‘그 부분’을 만져 보았다. 이쪽이야말로 괜찮은 건가? 이사야의 단면은 무지개색이었다. 쪼그려 앉은 채로 어, 음, 하고 있자 관리인은 이상한 줄무늬가 생겨서 왔어, 하며 허허 웃었다. 그 웃음까지를 포함해 모두 어디선가 겪은 것 같았다. 나는 진실로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일어섰다. 기묘한 기분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았다.

2020년 2월 14일 금요일

거지가 되는 꿈

며칠 전 거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거지로 변한 내 모습을 보면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작은 소녀가 동냥 중인 내 앞으로 걸어와 소매에서 동전을 꺼냈다. 나는 그 동전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일하기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냥 중인 내 모습이 매우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 소녀는 작은 잎사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나는 그 소녀가 꺼낸 동전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 꿈은 거기에서 끝났다.
다음번으로 꾼 꿈에서 나는 그 소녀를 또 만났다. 헛간 같은 곳에서 나는 낱알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일하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 작은 소녀는 이쪽으로 다가와 또 낱알을 입에 물었다. 맛을 보려는 모양이었다. 낱알을 좋아하는구나. 말해도 흥미가 없는 모습이었다. 문득 며칠 전에 꾼 거지가 되는 꿈이 생각났다. 나는 그 소녀에게 며칠 전 꾼 꿈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꾼 꿈에서 나는 그 소녀가 얼마 전까지 헛간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하는 이사야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잎사귀를 물고 다니길 좋아하는 그 어린아이의 모습을 나는 그려 보고 있었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사람으로 변하기를 선호하는 태비들에 관한 이야기는.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