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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7일 월요일

방랑예술가 이건수의 일기 ― 2022년 4월 10일 일요일, 여전히 순천

 • 안목해변에 갔다. 사람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드넓은 갯벌! 사방이 시원하게 탁 트였다. 제방 비스무리 생긴 곳에 앉아 이상우 <프리즘>을 꺼내 들었다. 읽히지 않았다. 도로 집어넣었다. 갯벌에 발을 살짝 디뎠다. 발이 푹- 빠졌다. 갯벌은 못 걸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 춤을 추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 오 분간 춤을 추었다. 크고 과감한 스텝을 밟아가며, 팔을 마구 내지르며 제방 비스무리 생긴 곳에서 춤을 추었다.

• 시를 써야 한다. 요즘 시가 써지지 않는다. 괴롭다.

• 아침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먹었다. 베이컨과 싱싱한 야채를 먹었다. 맛있었다.

• 아니, 소설을 써볼까? 소설을 안 써봐서 좀 무섭다. 소설은 뭐고, 시는 뭘까.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내 생각으론 아무런 차이가 없다!

• 엄마랑 전화했다. 밥을 세 끼 잘 챙겨 먹으라고 말했다. 두 끼를 먹고 간식을 챙겨 먹고 있다고 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다.

• 하이쿠를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이상우가 하고자 하는 건 기표들의 춤이다. 기표들에 머무는 거다. 형식과 내용이 합해지는 거다.

• 시 비스무리한 것을 썼다. 시는 아니다.

• 방이 걷는다 방은 자기도 모르고 문을 열고 나오던 가난한 거주자를 밟았다 밟힌 가난한 거주자가 꿈틀댄다 방은 미안하다 자신이 밝은 거주자 목록에 한 명을 추가한다 방은 계속 걸어간다 하지만 아까 밟은 가난한 거주자가 생각나고 자꾸자꾸 미안해진다 방의 발걸음은 힘이 빠진다 보폭이 줄어든다 방은 가만히 선다 방은 자신한테 살고 있던 거주자들을 계속 생각한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 방은 점점 더 죄송하고 미안해하며 서서히 자신의 평수를 줄인다 방은 자신의 팔로 자신의 각진 어깨를 감싸 안고 울기 시작한다 사방이 적막하다 방은 전체다 하나의 전체가 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은 새 가게를 연다

• 방금 쓴 건 시다.

• 송광사에 갔다 왔다. 미적 감각 없는, 크기만 큰 괴물 같은 절이다.

• 법정 스님이 머물던 불일암에 다녀왔다. 아담하다. 법정 스님은 이제 없다.

• 씻고 침대에 누웠다. 넷플릭스에서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봤다. 내일 본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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