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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4일 화요일

창고 안 탐험

옛날엔 집에서 나를 포함하여 3명과 숨바꼭질을 한 적도 있었다. 우리 집은 형편에 비해 꽤 넓었다. 지붕 층을 포함하여 2층 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 지붕 층에 많이 숨었는데 지붕 층을 다 뒤져봐도 친구가 보이지 않으면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여기에 숨을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서 다시 지붕 층을 뒤져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활 공간인 아래층에는 숨을 데가 없는 것 같았으니까. 집에서 하는 숨바꼭질은 예상이 가는 장소들에 숨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날 찾았을 때 술래를 놀래주어야만 했고, 나이에 비해 유치한 감은 있었으나 여기서 숨바꼭질을 했다고 혼난 적은 없었다. 아마 그 사실을 들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제일 의표를 찌르던 장소는 아래층의 안마 의자 뒤편의 커튼 속이었다. 그랬을 것 같다. 거기 숨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거기 숨었어야 했는데. 사실 안마 의자는 그 후로 샀다. 그래서 그때엔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숨는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이란 건 분명했다. 이 창고 안에서 딱 그런 데에 숨은, 인간 말을 할 줄 아는 도마뱀을 찾아냈다.

도마뱀: 여긴 어떻게 찾아냈지?

나: 숨을 데가 그곳밖에 없었으니까.

도마뱀: 날 왜 찾아낸 거야?

나: 그냥 이리저리 열어보고 있었어. 그러면 재밌거든.

도마뱀: 난 너의 친구가 되어줄 수 없어.

나: 바란 적 없어.

도마뱀: 잠깐만. 소리 들려?

나: 무슨 소리?

도마뱀이 왕, 하고 내 손가락을 물고 도망간다. 다 자란 것은 아닌 모양인지 이빨이 물렁물렁했으나, 아프다는 느낌이 들기엔 충분했고 이 만남을 길어지게 한 것은 도마뱀의 쪽이다. 나는 이 안에서 2시간 동안 다시 도마뱀을 찾아다녔고 시간이 길어지며 도마뱀을 왜 찾고 있는 건지 하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도마뱀이 다시 보고 싶어서는 아니었고, 찾아냈다. 이제 도마뱀이 술래였다.

나: 네가 이제 술래야.

도마뱀: …….

나: 손가락이 많이 아프진 않았는데.

도마뱀: 여긴 어떻게 찾아냈지?

나: 글쎄. 그냥 아무 데나 열어봤어. 혼날 수도 있겠지.

도마뱀: 넌 이름이 뭐야?

나: 난 미아. 미아야.

도마뱀: 날 찾아냈으니, 나에게도 이름을 지어줘. 난 이름이 갖고 싶어.

나: 음……. 그럼 우리 친구가 되는 거니?

도마뱀: 아니. 나에게 이름만 지어주면 돼.

나: 넌 남자야? 아님 여자?

도마뱀: 비밀이야.

나: 그렇군.

도마뱀: 난 너랑 놀기 싫어.

나: 아니, 왜?

도마뱀: 넌 인간이잖아.

나: 그게 어때서?

도마뱀: 내 외양의 신기하고 귀여운 점 때문에 접근한 거겠지.

나: 반쯤은 맞는 말이야. 넌 어디에서 왔니?

도마뱀: 저쪽 언덕 풀숲에서.

나: 거기가 네 고향이야?

도마뱀: 응.

나: 고향 주위의 건물인 이곳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아?

도마뱀: 글쎄.

나: 이 건물은 너무 커다래.

도마뱀: 네 덩치도 커다래.

나: 그리고 이 건물은 조금 어두운 편이지. 내가 이때껏 둘러본 바로 너 같은 존재들을 위해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 인간의 말을 왜 할 줄 아는 거야?

도마뱀: 어떤 요정이 가르쳐 줬어.

나는 도마뱀을 품에 안고 창고 안을 나서기 시작했다. 창고 안은 크기가 가변적이었고 늘어날 때도 줄어들 때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보는 사람, 접근하는 사람,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랬다. 햇빛이 조금 시리게 비쳤고 날씨가 추웠다. 이제 겨울로 접어든 듯했다. 나는 요즘 방학이었고 그래서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이곳 안을 탐험하려고 마음먹었다. 숨바꼭질은 숨는 이들이 던전 끝의 보물을 흉내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던전은 어릴 때의 숨바꼭질의 경험을 여러 가지 물건들, 통로, 건물들의 조합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던전에 대한 경험은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숨바꼭질은 지금 하기엔 꺼려질 수도 있다. 현대의 탐험은 그런 던전 같은 데서 이루어지고 그러한 테이블 위의 모험을 부르는 말도 있다. 결국 숨어 있을 보물과 미리 합의하게 된다면, 탐험의 장소가 그리 넓을 필요는 없어진다. 어떤 종류의 긴장감을 느낄 때 나는 창고 안 이곳(포대자루 근처)으로 숨는다. 그것은 내 습성과 같은 것이다. 그때엔 둘 중 하나다. 내가 찾아내지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나는 안심이 하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건물의 크기는 줄어든다. 숨을 데가 별로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며 도마뱀에게 접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 미아라고 하는 인간과 접시라고 하는 도마뱀은 이 창고 안을 시간을 들여 탐험해 보기로 했다.

2023년 10월 4일 수요일

선인장 꽃

1

모르는 단어나 개념인 듯이. 선인장 꽃들이 뜻 없이 피어 있구나. 아름답기도 하고 참 많기도 하다. 누군가의 정원인 듯한데 아마도 이건 꿈일지도 모르겠구나. 지금 이 순간 선인장 꽃을 보고 있는데 희미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그것이 갑작스레 핀다. 그렇게 피어나다니. 나 때문인지도 모르겠구나. 보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아주 다른 일이지. 지금 날 보고 있는 사람. 내가 그에겐 여기 피어 있는 선인장 꽃들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꿈이 날 이 자리로 인도했다곤 해도. 낯선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소명할 필요가 있는 건 내 쪽일 터였다. 왜 선인장 꽃들을 이렇게 많이 피워냈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쪽을 봤다. 꿈이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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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인장 꽃을 이렇게 많이 피워낸 건가요.


3

옛날 사람들이 밭을 매고 있다. 나는 그중 섞여 함께 밭을 매고 있다. 지금은 옛날. 옛날 사람들을 옛날에 있다고 알아볼 수 있는 건 나도 옛날 사람이라서였다. 그들의 이름을 알고 생김새를 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어려졌다. 중년에서 시작하여 청년이, 사춘기가, 7~8살 즈음이 되었다가 그만 포대기에 감싸여 있는 아기가 된다. 나는 그렇게 어려져서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장례인지 돌잔치인지 모르는 것을 했다고…… 서신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서신은 엽서같이 생겼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씩의 선인장이 되었고. 나는 남들과 같이 나이를 먹고 싶었다. 나에게만 반대로 작용하는 시간이 싫었다. 어떤 수상한 노인이 나에게 펜과 종이를 줬다. 이것으로 내가 받을 나에게 보내는 서신을 적으라고. 나는 거기에 이렇게 쓴다.

선인장 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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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슨 뜻인 걸까요. ‘선인장 꽃은 아름답다.’ 내가 넌지시 정장 입은 남자에게 물어보자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먼젓번 선인장 정원의 주인과 약속한 암호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암호를 알면 어떻게 되죠? 암호로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이 암호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저쪽에 있는. 그는 그렇게 말하곤 희끄무레한 안개에 감싸여 있는 저쪽의 저택을 가리켰다. 저택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저것은 당신의 소유입니다. 하지만 난 말을 소유할 수는 없는걸요. 저것은 말이(선인장 꽃은 아름답다) 아닙니다만. 난 말이라고 생각해요(선인장 꽃은 아름답다). 당신도,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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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가짜로 당위가 있는 것 같고 엉뚱한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서 이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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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꿈이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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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꿈이 아니라면 뭘까. 저쪽에 보이는 선인장이 선인장이 되기로 했던 아이리였다. 저기는 매번 같이 참을 먹던 이샨테가 있었다. 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젠 선인장이 된 그런 사람들. 난 여기에서 선인장이 되어야 하는 걸까? 정장 입은 남자의 말로는 이 정원에 있는 선인장들은 모두 이전에 선인장 정원의 주인, 그리고 저택이라는 곳의 주인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얼마나 외롭고 권태로웠을까. 꿈의 몽롱한 느낌 외에는 없는 이곳은 얼마나 감옥인가. 실제로 이곳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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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인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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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아름답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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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와서 ‘선인장 꽃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에 음을 붙여서 허밍하고 있었다. 나는 잊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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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을 피워냈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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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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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없이 잠들어 있었다. 옛날 사람들과 같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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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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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에서 그랬다. 나는 학생이었는데. 그 꿈을 꾸기 전까진 학생이었는데. 학생이기 전까진 그 꿈을 꾸고 있었는데. 무슨 꿈이었을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수업하고 있는 선생은 내가 모르는 개념을 칠판에 적어놓고 있었다. 뜻 없이 학생들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필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름답기도 하고 참 많기도 하다. 여긴 다시 누군가의 정원인 듯한데……. 라고 생각하다 그만 나는 분필을 맞는다.

2023년 10월 3일 화요일

분신사바

1

폐허가 된 도시에서 왜 이 도시가 폐허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꿈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느 비디오의 세트장이라거나. 도시에는 우리를 제외한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거대한 암석이 지상으로 하강하고 있다. 네가 땅에 손을 대고 하얀색 도마뱀(거대)을 소환한다. 그 도마뱀은 암석을 향해 눈부신 브레스를 뿜어낸다. 암석은 파괴된다. 그 도마뱀을 보자마자 그것이 나의 푼크툼(만들어낸 가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영상은 곧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나는 자꾸 그 도마뱀 기억만 났다.


2

물웅덩이를 세차게 밟아서 신발과 바지 밑단이 젖는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불가능한 것 같고 비 내리는 오늘 도시에는 물웅덩이가 심하게 많았다. 하나하나 보고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그러지 못했다. 나는 부바르와 페퀴셰를 구분할 줄 모르고, 그건 다리 밑이 젖은 지금 별로 중요한 상념은 아니었다. 부바르와 페퀴셰가 마주 보고 앉아서 분신사바를 한다면. 거의 차이 나지 않는 숫자의 땀방울들이 두 사람의 이마에서 내려오고 있다면. 내가 문턱 옆에 서서 몰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면. 우연히 발밑에 떨어져 있는 펜을 밟아 넘어지고 넘어지는 소리에 두 사람이 깜짝 놀란다면. 그런 식으로 의도치 않게 함부로 중단된 분신사바가 더 위험한 것이라면. 분신사바를 권한 건 나였지만 왜 지금 이 시간에 나를 빼놓고 했던 건지를 묻는다면 부바르와 페퀴셰는 나에게 미안해할지도 모른다. 타인이 내게 화냈던 것을 떠올린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분신사바는 진짜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백과사전을 읽는 대신 두 사람이. 서로 같은 브랜드의 내의를 입은 두 사람이 나에게 관심 가져주고 미안해했으면 좋겠다. 내리던 비가 그쳤고 나는 약간 침울해졌다.


3

읽고 있던 <부바르와 페퀴셰>를 구석에 덮어두고 나는 하품을 했다. 하늘에는. 잘 모르지만 적란운이 떠 있는 것 같다. 비 내리고 난 다음에 떠 있을 확률이 높은 구름이란 건 내 거짓말이다. 난 잘 모르니까. 잘 모르는 구름들 위를 걷는다. 당연히도 난간이 없는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 옆에 보인다. 그 계단을 오르기는 무섭다. <피를 마시는 새>에서 똑같은 하늘 계단이 나온다. 역시 난간은 없다. 천국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조금 있다. 지금은 저녁이고 나는 아침이나 낮의 구름보다 저녁이나 밤의 구름이 더 마음에 든다. 분신사바는 왜 하는 걸까? 같이 난간 없는 계단에 올라 위험한, 위험한 느낌이 나는 동행을 하고 싶어서일지도. 공부하다가 서로에게 연애 감정이 싹튼다는 것은 들어봤어도 분신사바를 하다가 서로에게 반했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건 왜냐하면 아마도 분신사바를 하는 도중에 느끼는 설렘이나 불안감이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계단의 3칸 위에 올라서 있다. 가위바위보를 너와 한다. 자꾸 이기고 져서 나는 계속 2, 3, 4칸을 왔다 갔다 한다. 너도 그렇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10칸 이상 올라가면 안 된다. 여길 지옥이라 생각하고 마주친 사람들에게 분신사바를 권하는 당신은. 저소공포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신은 10층 즈음에 있다. 우리가 멀찍이 떨어져서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는 이유는 휴대폰 덕분이다. 우리는 동시에 소셜 게임을 켜고 있다.


4

소셜 게임은 가볍게 이기고 지고 순위가 나온다. 친구들의 순위를 볼 수 있다. 멀어진 사람도 가끔 눈에 띈다. 그것도 한때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옆 나라는 어떨지 모르나. 부바르와 페퀴셰가 만나는 것은 우연이었을지 모르는데, 만나서 친해진 건 서로의 성격과 취미, 취향 같은 것들의 일치 덕분이었다. 그게 고마운 일이었으면 ‘덕분’이라고 하고, 그게 부정적인 것이었으면 좀 더 먼 거리에서 ‘때문’이라고 한다. 플란넬 셔츠 덕분에 그들은 친해졌고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대로 쭉 갔으면 했다. 그들이 백과사전을 탐식하며 읽어들일 때, 그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꾸 실패했는데 머릿수가 적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분신사바의 정원은 4명까지지만(이것도 잘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성공하는 광경도 보고 싶었다. 머릿 수가 많다고 꼭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다. 소셜 게임은 순위를 정해놓음으로써 사람들을 가둔다. 그들은 미니 게임, 간단한 퍼즐 게임을 수감자들에게 배급한다. 당연히 거기서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이 싹틀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감옥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이상, 주변인들의 존재(근황은 알 수 없다) 자체에 위로받는다. 그들은 위로 때문이 아니라 수감 상태에 가볍게 중독되어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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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탐식하며 백과사전을 읽어들일 때. 그들이 할 일을 찾고 싶어서 그랬다는 걸 난 떠올리고 있다. 분신사바는 하지 않을 일을 찾고 싶어서 하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경멸하는 동년배들과 그것의 불안한 결과까지를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옆에서 연출한 적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분신사바를 믿지 않았다. 믿지도 않는 것을 왜 하는가? 분신사바를 할 때에는 어느 정도 그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생기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나중에 생긴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고 있다. 사랑할 때 일어나는 일은 분신사바에도 있다. 마찬가지로 분신사바를 할 때 일어나는 일은 사랑에도 있다. 안도하는 것이다. 아무도 분신사바를 믿지 않으므로 다 끝나고서 아무 일도 없을 때 안도하는 일 또한 없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그것을 느꼈다. 집에 가서 잘 때 뒤숭숭했어야 한다. 그것을 할 때 떨리던 손은, 앞에 앉은 아이의 떨림인지 내 떨림인지 모르는 그 손떨림의 경우는, 대개 아무런 일로 치닫지 않음으로 기울어지고 그리고…… 그 기욺은 재미없다. 그것을 먼저 믿었기에 그 믿음에 배반당하여 안도한다는 그런…… 것은. 마치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앉아 있듯.


6

그래서 난. 아직도 난. 방 안에 앉아 있다. 실내는 조금 따뜻하고, 서양식의 벽난로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아쉬운데. 아쉬운 게 많은 몸이지 난. 저편에서 부바르나 페퀴셰 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난 서서히. 플란넬 셔츠 내의를 입고서 난. 잠들고 있다. 잠은 일시적인 죽음이고 난. 죽음은 영원한 잠이고 난. 난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서양 식의 고성이 아닌 곳에서 난.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문예부를 만들었다. 원래의 문예부도 있었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학교 끝나고 분신사바를 같이 하자고 했다. 나는 하기 싫었다. 그들이 안 믿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불을 끄고서. 그들은 그런 분위기만을 내고 싶어 했다. 난 그 상황 자체가 두려웠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고. 그래서……. 난. 아직도 난. 벽난로를 켜고서 그런 꿈을 꾼다. 분위기만을 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둘이서 분신사바를 했다. 내 손이 떨리고 있는 건지 앞에 있는 아이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건지 잘 모르는 채로 손을 잡고 있으니까, 어쨌거나 손을 잡고 있으니까 난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은 분신사바를, 한쪽은 사랑을 하고 있는 일. 분신사바를 좋아하는 그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됐는지를 모른다.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도.

2023년 9월 9일 토요일

정오의 담장

나는 담장이다.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내 죽음은 아닌 것 같다. 사실 뭘 바라고 기다리는지는 모른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지금 내 안에서 무언가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저 아이들은 아닌 것 같다. 한 명이 앉아서 엎드리고 다른 한 명이 위에 올라간다. 나는 꽤 높으므로 그것이 내 높이와 같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뒤에 있는 장미 나무를 잠깐 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뭐가 보였어?” “나무가 있었어.” 장미 나무는 자기가 잠시 보여진 것이 불만인 듯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경향이 있다. 나는 여기서 움직이지 못한다. 경험하고 체험하고 관조할 수는 있지만 인간사에 개입하지는 못한다. 일정 부분 나와 닮은 아이들의 용도는 커서 어른이 되는 것이고 만약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면 다시 이곳을 찾을까? 가려져 있고 넘보기 어려운 것을 아이들은 보고 싶어 하고, 나는 그것을 방해하는 인공물로서 저 아이들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나는 내 뒤의 저택에 사는 이들보다 저 아이들이 좋았다. “그때 기억해?” “응, 기억나. 네가 엎드리고 난 그 위에 올라가 나무를 봤지.” “그 나무는 뭐였을까?” “장미 나무.” 그렇게 말한 내 목소리에 저들은 깜짝 놀랐다. 그간 있었던 일은 별다를 게 없었다. 나에게 달라진 점은 있었는데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들은 아니었다. 나는 목소리를 내서 저들과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 너희들 키가 커졌구나.” “담장 님이에요?” “그렇단다. 이젠 한 명이 숙이지 않아도 내 너머를 볼 수 있겠어.” “관심 없어졌어요. 키가 자라는 일은 곧 멈출 거예요.” “그거 아쉬운걸.” 과연 그 소년들의 말은 맞았다. 다시 봤을 때 그날의 키와 거의 엇비슷한 듯했다. “그때 기억해?” “응, 기억나. 담장이 말을 했지.” “난 그 안의 장미 나무를 다시 봤으면 좋겠어. 담장이 알려준 그 나무 말이야.” 그들은 중년이 되어 있었다. 나도 조금 낡고 돌 부스러기가 있게 되었다. 아마 저들이 세 번이나 여길 찾은 건 날 위해서는 아니었으리라. 내가 기다리던 것이 저들이 아니었듯이. 그러나 나는 저들이 좋았던걸. 이제 다시 날 찾을 때에, 내 뒤의 장미 나무를 다시 궁금해할 때. 그 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바라던 것이, 기다려왔던 것이 뭔지를 알았다. 그건 내 뒤에 있는 저택을 내 눈 안에 담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때의 중얼거림으로 장미 나무도 내 욕망을 알게 됐다. “그때 기억나?” “응, 기억나. 담장이 다시 말하는 일은 없었지. 왜 우리는 이 주택에 관심을 가졌던 걸까?” 저들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내가 둘러진 이 주택은 사는 사람 없는 빈집이 되었다. 나는 무너져내리는 것을 참고 있었다. 다음번에도 나는 저들을 보고 싶었다. 내가 기다리는 이들은 아니었을지라도. 내 앞으로 다가와서 서로의 기억을 꺼내보던 그 아이들. 나는 지금 무덤으로 들어간 이들이 그립고 보고 싶었으므로 시간을 역순으로 가게 하기 시작했다. 다시 아이들이 된 그들이 보였다. “그때 기억나? 너희들이 날 찾아왔지. 그때 난 기다리고 있었어. 아직 정의되지 않던 무언가를. 난 내 뒤의 저택을 보고 싶어 했단 걸 뒤늦게 깨달았어. 그것을 이제서야 본다. 너희들의 눈동자 안에 있는 광경으로 말이야. 정말 아름답군. 내가 둘러져야 했던 게 이해가 갈 정도야. 정말 아름답구나…….” “하지만 그건 아저씨가 매여 있는 곳을 멀리서 본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니? 난 그래도 상관없었단다.” “난 매여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걸. 넌 내게 매여 있다.” “담장 아저씨,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싶지 않아요?” “그렇단다.” “그럼요, 조금만 기다려봐요. 다른 것이 마이너스가 될 때 혼자서 0 이상으로 움직여봐요.” “그런 일이 가능한 거니?” “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니?” “그건 내가 당신이 기다리던 사람이니까요.” 감았던 눈을 뜨자 병실 천장이 보였다. 얼마 후 그 사람이 와서 기뻐했고 오열했다.

2023년 9월 8일 금요일

저승사자

문을 등 뒤에 이고 있는 것을 연습한다. 나는 지붕 수리공이므로 사다리 위로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을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가끔은 지붕에도 문을 달아줘야 한다. 커피숍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그 사람은 등 뒤에 문을 이고 있었다. 아니, 지붕 수리공도 아니면서, 왜 저런 연습을? 연습이긴 한 건가? 너무 내 사정으로 비춰본 것이 아닐까? 연습이 아니라면 뭐지? 형벌……인가? “형벌입니까?” “아니요. 연습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컵을 들어 올려 커피를 마셨다. 저건 혹시 내가 꼭대기로 올라가서 달았던 문일까? “그것은 내가 달았던 문입니까?” “아니요. 아무도 이것을 달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건 왜 생긴 건가요?” “이상해 보입니까? 어느 정도인가요?” “평범한 사람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티가 나요.” “그렇군요.” “실례지만, 그 문을 열면 뭐가 나옵니까?” “아무것도.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나는 지붕에다 문을 달아달라는 요구가 이상하게 느껴졌었는데, 저 사람의 대답을 듣고 이해가 갔다. 그 욕망이나 욕동은 저 사람이 원본이었다. “천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질병.” “그 문은 여기서도 잘 보입니다.” “그렇군요. 그런 사람들은 이 문을 보고 궁금해하는 대신 판단을 하더군요.” “그런 일을 많이 겪었을 테니까요.” “당신도 겪었습니까?” “나는 겪은 게 적어요.” 지붕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사수가 하는 말이었다. “거긴 위험해!” “괜찮습니다!” “그건 왜지?” “이미 떨어졌으니까요…….” 아까부터 나와 마주 보고 있었던 사람은 혹시 자신도 지붕 수리공이 될 수는 없겠느냐고 물어온다. 그건 아마도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고 있는 문을 (개인적으로) 현장에 남겨두고 가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으니까. 저 사람은 무게가 무거운 문을 다른 데에 내려놓기만 하고 싶어 할 뿐이다. 사실 지붕 수리공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 보였다. 나는 잘 발달한 내 어깨 근육을 내보이며 말했다. “이런 게 있어야 하지요.” “예, 아마도 안 될 테지요.” 그 사람은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합시다.” “그러죠.” “우리 집의 지붕을 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지붕 수리공입니다. 멀쩡한 지붕을 뗄 순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난 방법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용달을 부를 겁니다.” “그런다고 해서 왜 멀쩡한 지붕을 당신이 이고 있는 문 안에 낭떠러지로 처박는다는 말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난 지쳤어요.” “차라리 그 문 안에 들어가 살 사람을 구하시죠.” “당신이 그래주겠습니까?” “이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군요.” “자, 그럼 들어가시죠. 한번 이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좀 슬픈 것이긴 하지만, 예, 그것은 당신의 죽음이군요.” “그러겠습니다.” “정말 그러겠습니까?” “아니…….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당신은 조심해야만 할 겁니다. 난 이만 갑니다. 또 이렇게 문턱으로 오진 마세요.”

2023년 8월 22일 화요일

유리철장

옛날엔 모두 여기 모여 놀았지. 유리철장은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만든 카페였다. 아이 하나가 커피를 내리고 아이 하나가 설거지를 한다. 밖은 한창 전쟁 중이다. 아직도 아이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커피를 내리던 아이의 몸이 커지고 목소리가 굵어져 성인이 된다. 설거지를 하던 아이의 정신이 어리지 않게 되고 유머의 여러 유형을 습득하여 성인이 된다. 옛날엔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만 입장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성인들이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장소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이제 성인이 된) 잊혀졌다. 다만 유리철장이라는 이름이 남았을 뿐이었다. 커피를 내리던 사람은 들어오는 나를 보고 까닥 고갯짓을 한다. 나를 알고 있지는 않은 모양. 이곳을 찾던 꽤 많은 수의 아이들이 서로에 대해 잘 알았다. 나는 그 예외의 경우에 속한다. 이젠 밖의 전쟁도 멈춘 것 같다. 어린 시절을 장식했던 그 전쟁에 대한 기억은 이런 말도 내놓는다. ‘아이였을 때 한창 전쟁 중이었다. 이제 성인이 되자 그 전쟁은 뇌리에서 잊혀졌다.’ 난 어릴 때보다 지금이 행복한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잠들기 전에 세었다. 이제 난 어른이 되었는데, 아마 스무 살 이후라고 하더라도 어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건 최근의 일이거나 아니면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그렇게 느낀다. 유리철장의 회벽은 낡았고 보수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나는 일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오랜만에 와보는 곳입니다. 당신의 집도 과거에 화목하지 못했나요?” 이 말을 하면서 나는 눈물이 났다. 화목하지 못했던 게 뭐라고 아이들이 모여 돈을 걷고 카페까지 만들었던 걸까? “저의 경우엔 그렇습니다. 아마 그랬던 아이가 꽤 많았겠죠. 그 시절의 컴퓨터 게임이란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도 있는 걸로 압니다.”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도 돈을 걷은 건 동정 때문이었을까요?” “그럴 리가요. 이 카페는 전쟁의 반대항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요. 그저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선 견딜 수 없기에 단순히 놀 장소가 필요했던 것뿐이죠. 그 아이들이 돈을 낸 이유는 아마 같이 놀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어린 나이에 어린 아이들의 그 성향을 일부 이용했지요.” “그렇군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잠시 주억거리더니 설거지를 하고 있던 사람을 불러왔다. “내가 알기로는. 서로 안면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잘은 모르지만요.” “글쎄요. 그 시절에도 얼굴을 본 적은 없어서.” “여기서 아는 사이였다고 밝혀지면. 만일 그때 많이 친했더라면.” “조금 어색하고 곤란하겠죠. 그리고 그것은 어른이 피하는 것이랍니다. 그쪽은 어떠시죠?” “마찬가지입니다.” “좋습니다.” 무엇이 좋다는 건지 모르는 체로 그렇게 말했는데 내 앞의 두 명이 웃었다. 나는 그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든 뒤 카페를 나섰다.

2023년 7월 13일 목요일

도시 전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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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물에 젖고 있다. 조용히 여기서 보고 있으면 도시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도시에 비가 내린다. 도로에 있는 자동차들의 배기음이 빗소리에 묻히고 있다. 빗소리에 묻히니까 나는 여기서 노래 부를 수 있다. 우산을 쓰고 있다. 흰 신발을 신었다. 별이 떠 있다. 나는 옥상 위를 걷고 있다. 조금 빨리 걷는다. 내 끝머리에 물이 조금씩 묻는다. 바람이 세차게 불다가도 잦아든다. 비의 차가움이 우릴 사랑하고 있다. 비의 미적지근함이 너흴 사랑하고 있다. 당신은 뒤에서 우산을 쓰고 있다. 조용한 음정으로 당신은 말하고 있다. 빗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금 더 크게 말해줄래요?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단지 도시에 비가 내리고 있다. 도시가 물에 젖고 있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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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얼굴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 동아리실의 문 너머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을 떨어뜨리고 있다. 당신도 얼굴을 떨어뜨린다. 그걸 보고 익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안이 아늑하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알맞은 분위기를 찾은 것이다. 대부분의 것이 다 분위기지만 그 이상의 것도 우리는 글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른 이상한 말이 없는 것이다. 여기는 누구나 환영하는 동아리이고 얼굴이 없는 것은 감수해야 해요. 조용히 책을 읽던 부원이 옆에서 말한다. 안경을 코에 걸고 있는 부장이 당신에게 질문한다. 여기에 사람이 부족한 건 왜라고 생각하나. 오후 6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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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동아리 부원들이 모이고 있다. 뒤편에는 믹스 커피 박스가 있다. 지금 이 시간이 주로 모이는 때다. 여기서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거나 한다. 페이스리스라는 조금 특이한 이름은 부장의 주장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차분한 동아리가 갖고 있는 ‘등록만 해두고 동아리 활동을 안 하는’ 부류에 의해 곤란을 겪고 있다. 이 동아리에서는 세계관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고 또 권장되고 있다. 그 세계관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세계-관념이라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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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선배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학교에 미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꽤 당연한 일이다. 나도 그랬으니. 우리는 졸업반이고,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그림을 그리는 어떤 선배가 우리 학교에 와서 그 직업에 대해 40분 정도 알려준 적이 있었다. 되게 재밌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는 커서 뭐가 되는 걸까? 여기가 소설 속 세계라면 재밌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세카이계나 뭐 그런 거. 세카이계가 소설이 맞나? 부기팝……? 어쨌든. 여기가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면 나는 재미없는 직업을 갖게 되거나, 아니면 백수가 되겠지. 어쨌든 이 세계선이 소설 속 세계인지 아닌지는 비밀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아마추어 세계관 창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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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동아리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그다지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루히 같은 일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건 많은 사람들의 연습이 필요하니까. 밖을 보니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닌다. 동아리실은 여러 가지 세계관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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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다. 도시가 물에 젖고 있다. 단지 도시에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그러니까 조금 더 크게 말해줄래요? 빗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아요. 조용한 음정으로 당신은 말하고 있다. 당신은 뒤에서 우산을 쓰고 있다. 비의 미적지근함이 너흴 사랑하고 있다. 비의 차가움이 우릴 사랑하고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불다가도 잦아든다. 내 끝머리에 물이 조금씩 묻는다. 조금 빨리 걷는다. 나는 옥상 위를 걷고 있다. 별이 떠 있다. 흰 신발을 신었다. 우산을 쓰고 있다. 빗소리에 묻히니까 나는 여기서 노래 부를 수 있다. 도로에 있는 자동차들의 배기음이 빗소리에 묻히고 있다. 도시에 비가 내린다. 조용히 여기서 보고 있으면 도시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도시가 물에 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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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도시가 바다 아래에 있다는 듯이. 

2022년 2월 23일 수요일

별빛 나무

오래된 나무가 빛을 발하며 서 있습니다. 나무의 죽음이 가까워져 온 것이죠. 나무의 명예는 오랜 기간 동안 흙 속에서, 제 자신의 뿌리 언저리에서 자리를 지키며 있었답니다. 그런데 서기관 또한 이 자리에 서 있군요. 군밤 모자를 쓴 서기관은 나무의 길지 않은 생애(서기관은 이 나무보다 오래 살았습니다)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합니다. 주로 이 나무의 생존과 관련된 일들이었죠. 한 차례의 대위기가 있었던 이후로 이 숲에 사는 나무들은 약 300년 동안의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중에서도 이 나무는 평화로움을 사랑하는 성향이 짙었다고 하는데요. 주변의 다른 나무보다 이르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은 그러한 성향 탓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 또한 서기관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에 얽힌 주변 다른 나무들의 가지와 뿌리들은 빛나지 않고 잠시 몸을 떠는군요. 그것들도 오래된 나무들이지만 아직 죽음의 때가 가까워져 오지 않은 것이죠. 나무가 별을 닮아 스스로 빛을 내기도 한다는 것은 이 숲에 사는 이들에게 알려진 지식입니다. 더 할 말은 없군요.

(멎는다)


지금 별빛 속에서 새로운 나무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선 나무의 인명부에 등록을 하고, 나무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폴리에틸렌 보온재를 밑동에 감싸줍니다. 그 자리에 있어 온 제멋대로인 나무들도 뿌리가 닿는 교신을 통해 어린아이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새로 나무가 태어나는 자리와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군요. 아무래도 초조한 모양입니다. 나무의 현자들, 아주 오래 살아 온 9명의 나무들이 숲 깊숙한 곳에서 제각기 다른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무들의 회합’을 하고 있습니다. 회합 자리에는 성별이 모호한 미형의 인간이 가장 상석에 앉아 있고 좌우로 네 명씩, 각각 노인, 젊은이, 사제, 우두머리 등이군요. 듣기로는 이들의 외형을 담은 카드들이 알음알음 퍼져 인간들 사이에서는 점을 보는 물건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 중에는 서기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다섯이고, 나머지 넷은 서기관과 안면이 없다고 합니다. 우선 그 아이를 감싸고 있는 별빛, 그 별빛의 문제가 거론됩니다. 문제는 없느냔 식입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사람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말을 듣고 나머지 나무들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입니다. 한 나무가 뒤이어 말합니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나무 또한 말을 섞습니다. “우리들은 나무들의 전쟁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의 현자들 중 가장 어린, 그리고 온건파에 속해 있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무들의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이 사회의 족적에 상흔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의례화된 문구이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계는 크게는 서기관을 지배자로 여기는 인간들의 사회와, 이 9인회로 대표되는 나무들의 나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는 해도, 예전에 한 번 전쟁이 일어났으니만큼 각종 알력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겠죠. 그러나 지금 전쟁이 벌어진다면 인간 진영과 나무 진영의 싸움이 아닌, 각종 이권에 엮여 있는 인간, 나무 연합 진영이 혼잡하게 섞인 아전 투구의 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아전 투구라. 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멎는다)


새롭게 태어난 나무는 전에 죽은 나무의 명예를 이양받아 평화로움을 중시하는 성격입니다. 온몸에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처럼, 마치 야구경기장의 7판 조명인 것처럼 별빛에 둘러싸여 있군요. 생후 15년 정도까지는 이러한 별빛이 나무를 뒤따르게 됩니다. 이 별빛을 자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인간 사회의 값비싼 보석임과 동시에 자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소속 여부야 나무에 달린 것일지라도, 지금 인간의 어린아이의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나무가 인간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나무의 뒤를 따르고 있는 고용인이 빵칼로 별빛을 잘라내 그릇에 담고 나무에게 먹이고 있군요. 대부분의 나무들은 이렇게 자신을 뒤따르는 별빛을 잘라내 먹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멎는다)


명예라는 말이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군요.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명예와 그리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 인간들이 붙인 말이니까요. 우리는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사소한 외양 하나는 낚아챘다는 그런 자부심이 드는 언어 사용을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말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이 나무는 이유식보다는 별빛을 잘라낸 치즈를 더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귀여움이 큰 화젯거리가 되고 이목을 끄는 것은 저 나무들의 양식에도 다르지가 않아서, 여기저기 기생뿌리가 이 자리에 지금도 닿고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저것은 사진을 찍는 요식 행위와 비슷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니까 이 나무들의 사회의 의사 소통망은, 파란 색의 새를 배경으로 하는 것과 유사한 데가 많다고 말해두지요.

(멎는다)


나는 명예관리국의 일원입니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마법 적성이 요구되죠. 나는 예언 쪽이었습니다만 동료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실 예언가들의 외양에 대한 잘못된 소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중요한 세미나가 열린다고 해서, 그곳엘 찾아가는 중입니다. 그곳에는 어린나무들도 몇 찾아올 거라고 하더군요.

(멎는다)


어린나무들은 대학 생활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멎는다)


나무들이 자신의 가지로 숲에 쌓인 담배꽁초들을 주워서 한군데로 모으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꽁초를 버려선 안 되지만, 문득 이런 광경으로 부모를 채근하여 관광 오게 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답니다.

(멎는다)

2022년 1월 19일 수요일

유곽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유곽, 그곳에서 일하는 아이들과 책 읽기 공부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낮에는 각종 심부름으로 바쁘기 때문에 새벽에만 시간이 된다. 미감을 흩뜨리지 않는 단정한 긴 머리, 헤살을 놓는 듯한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이 보이고, 그 여인은 곰방대를 물고 있다. 방 안 상석에 앉아 관망하는 투로 내게 이렇게 말한다. “한 대 피워보시겠소?” 그렇게 말하며 나전 서랍을 열어 다른 곰방대 하나를 꺼내 든다. 지금 여인이 피우는 것보다 더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 “언제 닦은 것이오?” “닦지 않은 지는 한참 오래되었지. 그러나 원체 닦지 않는 것이 당연한 듯한 물건이라.” “그렇군요.”라고 말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권하는 것을 사양하다니.” 곰방대를 든 여인은 나와 어릴 때부터 친구인 것처럼 군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스스럼이 없어서야. 내가 그대에게 말한 도리를 모두 잊은 것이오?” 여인은 빙그레 웃는다. “도리랄 게 있겠나. 어차피 배를 곯긴 싫고, 난 그런 배곯는 일로부터 도망친 지 오래인 몸인데.” 나 또한 곰방대를 든 여인에게 이런저런 도리를 말해주긴 뭐했으나, 그러나 배운 것이 그런 쪽인지라 그것 아니면 딱히 입에 담을 말들이 없었다. 이런 사람을 남들은 학식이 높다고 칭송해주긴 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건 하나의 군식구로서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으로였지 뭔가 대우를 받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침이면 난 유곽의 마당을 쓸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저쪽에선 꽤나 좋게 받아들여진 듯했다.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은 당신의 미덕이라오.” “그렇다고 그 미덕이 온전히 내 것인 양 굴려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오.” “미덕은 주인 된 자가 그것을 소유하길 피하려 하기에 더 귀찮고 사람을 그럴듯한 반석에 올려놓는 것이라오.” 가끔 이 여인은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의 연쇄를 내보일 때가 있었다. 나는 그런 걸 이해하는 일이 귀찮기도 했고 어찌 됐든 저 여인보다는 잘 배운 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권력을 가지는 것이 싫소.” “그 또한 하나의 서생이로군.” 뭐, 난 서생이 맞았다. 아무튼 간에 여인은 지금 좀 심심한 듯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곤 하는 것처럼 생각거리가 될 만한 물음을 던졌다. “태양이 뜨면 달이 한밤 중의 권세를 잃고 어둠 속으로 기울어지듯, 이 유곽의 방만한 경영은 온전히 그대 손에서, 마치 달이 태양 빛을 반사하듯이 순간적으로 바로 잡히는 것에 지나지 않소. 낮에는 건물들 사이사이에 그림자가 지게 마련인데 이 그림자들을 잡아 뜯거나 강제로 축출하게 되면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소. 그리고 그러지 않는 것이 당신 마음의 반석이오, 또한 경영자로서의 냉엄함이로다. 하지만 앞날을 장담하는 것은 그리 안전하고 생산적이라고도 말할 수 없소. 하지만 그러한 장담으로 인해 꽃피는 그곳에서 당신의 세상살이의 태만함이 기인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드오.” “길군.”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걱정과 근심거리를 늘리는 것은 소위 나처럼 배운 자들의 몫이오.” “그렇게 늘려진 것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 또한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하지만 베개에서 지푸라기가 하나 튀어나와 있으면 얼굴이 찌푸려지지 않소?” “지금 그대가 하는 말에선 일종의 도가 보이질 않고 내 마음 안의 근심이 될 만한 싹을 틔우려는 듯한 의도가 엿보이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어찌, 적성에 맞는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적성에 맞지요. 일이 한가해지면 한번쯤 한적한 곳에서 그런 일을 해보는 것이 내 꿈이었소.” “하지만 한적한 것과는 거리가 있지 않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처럼 한적한 곳도 드무오. 난 곳이라고 하며 장소를 말한 거지만 그러나 내가 말한 장소에는 시간대도 포함된 것이라오. 그저 밤낮이 뒤바뀐 것이 부담이라면 부담이지만 그러나 장소와 시간을 벗어나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오. 이 또한 내가 정하게 된 약속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소. 인간은 약속과 계획에 능하다면 그걸로 갖출 것은 갖춘 셈이지.” “누가 제일 똑똑하오?” “한령이가.” 내가 이어서 말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셋, 그 너머의 넷을 넘보는 수준이라오.” “그럼 한령이가 제일 기특한가?” “가장 기특한 것은 정인이오.” “어째서인가?” “셈을 느리게 하지만 그사이에 다른 생각을 넘보고 있소. 글을 쓰면 아주 잘 쓸 것이오. 아직 시켜보진 않았다만.” “그걸 어찌 아는가?” “내 경험상 그러하오.” “그렇다면 아무래도 맞겠군.” “그런데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나뿐만은 아니오.” “누가 그러한가?” “바로 당신이 그렇소. 어차피 나한테서 뭘 배울 것도 아닌데 학사 취급은 왜 해주는 것이며 그리 한가하지 않은 시간대에 붙잡고 뭘 하는 것이오?” “바로 재미있기 때문이지.” “그럴 것이라 짐작하곤 있었소. 뭐가 재밌는 것이오?” “인간들은 역할들을 갖기 마련이고 거기에 이율배반이니 하는 것들을 따지는 것보단 그저 제 눈을 믿고, 상대방이 가진 역량의 순도에 순종하는 것, 그런 것이 나름 길지 않은 인생 동안 내가 세운 법칙 중에 하나라오.” “역할들이 지루한 것이오?” “그저 그렇게 말한다면 재미없는 것이 되지. 하지만 반쯤은 맞는 말이오. 맞소. 나는 역할들이 지루하오.” “그건 왜오? 이유가 짐작 안 가는 것은 아니나 당신의 말로 한번 들어보고 싶군.” “개중에 첫째는 인간이 자기 역할에 너무 깊게 몰입하는 것을 들 수 있겠군. 특히 그것은 여자를 상대하는 남자의 말투에서 잘 드러난다오. 그들은 어떤 부담감이나 겪기 싫은 상황 등을 매번 여자와의 만남에서 마주하는 듯하오. 그리고 그것을 상황의 명료함이나 권세의 우위로 미묘하게 찍어누르는 듯한 그림이 발생되지. 나라는 사람이 배운 것은 그저 그들이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면 그들이 잘 모면할 수 있도록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자는 것이오. 이것만으로도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 같더군.”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로 그들의 역할들이 지루한 이유는 역할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군다는 것이오. 이것은 첫 번째 이유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르오. 아마도 거기에도 어떤 이성이 작용하는 듯한데, 무슨 종류의 이성인지는 잘 알 수 없소.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여인을 상대하는 남자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그림이라는 것이오. 하긴 지나온 일들이 그런 것뿐이 없었지만 말이오. 사람의 심성에 단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손바닥으로 하늘을 다 가릴 수 없고, 내가 날 때부터 그러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아니라 배움으로 딛고 선 이들을 더 대우하는 것은 그 때문이지. 나는 인간들의 선택을 신뢰한다오. 선택이란 것은 당신이 말하는 시간과 계획, 그리고 임기응변과 제각기 지닌 마음씨 등이 내가 역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굳어져 현상된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배움을 청하고 있는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는 것은 그 때문이지.” “뭣 때문이라는 것이오?” “한마디로 말해 그대는 좋은 선생이라는 것이오. 그리고 그런 선생 밑에는 제자들이 여럿 붙어 있는 게 보기 좋은 광경이지. 내 아래의 아이들이 그러한 그림을 그리겠다는데 어찌 기꺼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들은 나만큼이나 훌륭한 학생들이오.”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덕이로다.” 그렇게 말하며 여인은 곰방대를 뻐끔, 피웠다.

2022년 1월 13일 목요일

프로듀서

○○ 뮤직에 소속된 나기는 ○○○ 차트에 올라온 뒤 이전과 달라졌다. 가령 카페에 가서 작곡을 할 때 음료와 케이크를 같이 시킨다든지. 그러려고 집에서 밥을 안 먹고 온다든지. 나기는 음반 프로듀서였고, 그가 작업한 곡들은 뮤직비디오 작업 담당의 아키하가 다시 작업하곤 했다. 그들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가끔 만나 같이 맥주를 마실 때도 있었으며, 뮤비 제작자의 고충을 잘 아는지라 음식값은 나기가 계산하곤 했다. 둘은 같이 OO 뮤직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계약서 갱신 문제로 이젠 어느 정도 반석 위에 오른 그들의 위치가 계약서 안에 적용되어야 하니 같이 변리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전혀 문제없고, 오히려 ○○사에게 불리한 조항까지 몇 있는, 아주 멋진 계약서라며 그렇게 그 둘은 ○○사와 재계약하게 됐다. 원래 노래의 보컬은 ○○○ ○○라는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소녀-기계의 목소리였는데 나기의 곡이 어느 정도의 반향을 끌자 실제 보컬을 구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 문제로 나기와 아키하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아키하는 ○○○ ○○의 목소리가 실제 인간의 목소리엔 가닿진 않지만, 기계음의 목소리가 이상향에 가깝도록 만져내는 나기의 실력이 아깝다고 했다. 하지만 나기의 경우 더 유명한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 했는데 지금처럼 보컬로이드의 목소리만으로 곡을 만들어내는 프로듀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둘의 고민은 금방 사라지게 되었는데 바로 17세의 여고생 보컬의 합류를 통해서였다. 보컬로이드가 갖고 있는 온전히 소녀-기계의 음성만이 낼 수 있는 매력, 그것에 대해서도 뒤지지 않는 정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청명한 쪽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니나의 닉네임을 정할 때는 곤란했다. 이름을 생각해오라고 했는데 약속 당일이 되어도 그녀는 이름을 못 정해왔기 때문이다. 처음 데뷔하는 것이니만큼 이름은 중요했다. 그녀는 말하자면 키레이 계열보단 카와이-계에 가까운 매력적인 용모를 지녔기 때문에 그녀의 합류는 그들애개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뒤 아키하의 머리에서 나온 안나 카레니나에서 니나만을 남겨 그녀의 닉네임으로 정했다. 나기는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으나 따로 떨어진 단어들의 배열인 니나라는 이름은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처음 녹음실에서 작업을 할 때 나기와 아키하는 탄성을 질렀다. 아, 이건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촐하게 마련된 첫 작업 기념회를 했다. 니나가 집에서 써 온 멘트가 그대로 활용되기도 했고 그녀를 배려해 술을 좋아하는 나기와 아키하가 알콜이 아주 조금만 들어간 하이볼을, 그리고 니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얼마 후 그들이 작업한 곡이 ○○○ 차트 상단에 위치하고 있었고 니나에게 들어온 예능 제의를 다 함께 고민한 뒤 거절하기도 했다. 이미지 소비의 우려도 있었고 나기와 아키하는 자국 예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기는 말하자면 어린애 같은 성격이기도 했는데(가령 집에 츄러스를 쌓아놓고 먹는다든지) 니나가 들어오면서부터 그녀를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다 보니 성격이 어른같이 되는 것 같았다. 아키하는 원래 어른스러웠고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가족은 아니지만 친밀한 사이가 되어갔다. 물론 그들은 어떤 유용함으로 묶인 관계였을 터이다. 나이가 어릴 때 갓 출시된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만지면서 곡 작업을 시작하게 됐던 것도(나기의 경우) 지금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정신없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은, 그리고 이것이 돈을 벌 수 있다는, 그리고 이것이 예술적인 일임이라는 사실 등이 나기에게 가져다주는 어떤 베일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키하의 경우 뮤비 제작과는 관계없는 학과의 학생이었는데 관심을 갖게 되어 이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니나의 경우 친구들이 권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 뮤직에 소포로 부쳐온 것이었고 지금 생활이 꿈만 같다고 했다. 물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수학여행도 못 갈 수도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큰 상관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자신의 마음에 들기에……. 나기에게 여자친구가 생겼고 곡 작업에 쏟는 시간이 이전보다 덜해졌으나 오히려 이전보다 통통 튀는, 멜로디 라인의 짜임새가 놀라울 정도라는 평의 댓글들이 달리기도 했다. 니나야 목소리가 워낙 독특했고 아직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안 든다고 했다. 아키하의 경우 원래 연애에 잘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그들은 연말에 송년회, 신년회 등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니나는 다른 프로젝트 그룹에 참여해 독자적인 활동 노선을 잠시 걷기도 하고 나기는 그사이 곡 작업에 몰두했다. 아키하는 그 파일럿을 듣고 이건 무조건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기의 실력은 갈수록 올라오는 듯했다. 아키하와 니나의 실력 또한 처음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발전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그들은 처음으로 싸우기도 했다. 니나의 생일날 나기가 아무것도 준비 안 하고 갔다가 아키하가 나기에게 화를 낸 것이었다. 나기는 자신의 잘못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번 니나의 생일에는 선물을 준비해서 갔다. 포장지를 뜯어 보니 참외 무늬가 그려진 찻잔과 함께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와 언젠가 셋이서 바닷가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이미 유능해졌고 그것은 그들이 각자 바랐던 바였다. 나기가 니나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말도 적혀 있었다. “널 만난 건 내게 두 번째 행운이야. 첫 번째 행운은 보컬로이드를 시작했던 거였고.” 니나는 그 편지를 읽고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기 님과 아키하 님을 만난 건 나한테 첫 번째 행운이었어요.” 아키하는 어땠을까? “너희를 만난 건 첫 번째 두 번째 가릴 것도 없이 내게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이었어.” 셋은 이런 말을 하고 조금 부끄러워져서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의 송년회 자리는 무르익고 있었다…….

2022년 1월 5일 수요일

마스커레이드

나는 구술하고 있다. 춤추기 위해 마련된 봇들의 개인적인 설렘이나 떨림의 그 개괄적인 순서들을. 샹들리에 있고 그 밑에서 연미복을 입은 소년 하나가 바이올린의 불을 켠다. 바이올린이 타오르고 있다. 도시를 타오르는 그림자가 뒤덮어 가고. 그 타오르는 색은 붉음인데 자세히 가까이서 보면 파란이라는 꼬리가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도시가 검은 태양이 뜨는 것 같기도 하고 그 태양이 다시 검은색으로 물들어 가다가, 지고 마는 것을 밑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일부. 컬트라고 말할 수도 있을 터이고 아무 사심 없이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무대 뒤에서 곧 나가러 가는 한 명이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들고 있다. 충족하기 위해 알약을 집어삼키는 그런 문화가 손끝에서 빛을 발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재가 민들레처럼 날린다. 그것이 운명적인 사랑이기에 한 자루의 권총을 손에 들고 있기만 하지 격발로는 가닿지 않는 그러한 성정이 이목을 끌기도 했고 작은 영역의 절대적으로 보호되는 필드를 일순간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영역이 노래처럼 분명함을 갖고 이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었지만 난 그것이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들었다. 바이올린을 켜는 음색과는 다른 그런 사람 목소리가 하나의 포크송이 된 그런 광경. 우연히도 거기에서 1Q84를 쓴 작가와 마주쳤다. 그 만남은 웃기지만은 않았고 그러나 진지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것을 말하고 있고 받아 적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비밀 같은 것은 입에 담지 않았다. 봇 하나가 다가와서 정해진, 말 되어진 것들에 따라 잠시 나에게 춤추는 것을 권했다. 잊지 않고 나는 수수하게 장식된 가면 같은 것을 갖고 와 손에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불이 붙고 있었어서 어둠과 유리된 채 그보다는 좀 더 위인 단계로 타오르며 점차 격상되고 있었다. 마치 한차례의 위기가 다가온 듯 나는 웃으며 그것을 거절했다. 봇이 가진 종이에는 춤추길 권유하는 때의 요령 같은 것도 없었다. 정중히 인사한 뒤 서로 두 방향으로 멀어지고 찢어지는 그런 애착이 희미하게 지워져 있는 것 같았다. 도시가 있었고 그 안에 아주 작지만은 않은 크기의 무도회장이 있었다. 지금 이 안에서는 바깥의 검은 태양이 보이지 않았고(지금은 저녁이었으므로) 대신에 테라스로 나가보면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사람들의 종교에 기대지 않고서도 가장 그럴듯한 색깔로 빛나는 그 위성을 쳐다보며 나는 봇의 은쟁반 위에 놓인 하이볼을 누군가를 따라 마시는 행위를 하는 것처럼 명랑한 어조로 그것을 입에 댔다. 그 물속에 혀를 담갔다가 빼 보기도 하는 나는 장난기가 있었다. 무대에선 배우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고 나는 납작한 스카프 같은 것을 두르며 누군가 다시 나에게 춤출 것을 재차 권하는 그런 일어날 만함 직한 정경을 떠올렸다. 어차피 거절할 거였지만. 아까 말한 1Q84의 작가가 사람들과 봇들 속에서 파트너를 데리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나 번들거렸다. 줄리아 스톤이라는 성명을 가진 봇이 나에게 다가와 춤을 권했다. 춤추기에 좋은 날씨였고 음악이었다. 그리고 문예이기도 했고 붉은 달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까 말했던 대로 거절했으며 대신 그가 가진 은쟁반에 담겨 있는 유리컵을 들고 무슨 액체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 입에 털어 넣었다. 어쩌면 나는 당황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마음이 내 행동에 반영되었다. 여기에 있는 봇들은 모두 누가 만든 것이다. 나는 여기서 citrus라는 가명 배지를 매단 채로 홀에서부터 테라스까지 기다랗게 난 길을 평온한 듯 걷기도 했다. 물론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많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은 텁텁한 공기가 있는 곳에서 춤을 췄고 나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탁 트인 테라스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친교를 나눌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떨리고 설렜다. 그러나 이렇게 마스커레이드라고 이름 붙여진 이 가면무도회는 전혀 숭고하지 않았기에 등골이 짜릿할 정도의 전율은 나는 느끼지 못했다. 숭고했다기보다는 어쩌면 카니발처럼 불안한 것이었다. 그런 불안함은 나를 다시 한 사람의 개인으로 만들었고 붉은 달은 누구도 셈에 넣기 어려운 궤적을 그리며 다음 날까지도 이어졌다. 달이 지지 않았다. 그것은 태양이 패배했다는 것을 뜻하는 거였고 이 사람들의 얼굴에 붙은 가장 가면들이 영원히 떨어질 일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점점 더 이곳을 알게 된 사람들이 찾아와 사람들이 더 붐비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대 명부에 없었던 사람들은 돌려보냈다. 이곳에선 나의 역할이 내 손에 들린 가면에 상세하게 적혀 있지는 않아서 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것에 대해 짐작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베일 뒤에 가린 사람의 얼굴은 언제든지 상상할 수 있는 법이라, 이 재미 없는 무도회에서, 그러나 아직 떨림과 설렘을 간직한 채로 서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웃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상설 무대예요. 누군가 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 보였으며 이야기의 알력이 있는 듯했다. 이 누군가는 나에게 말을 건 세 번째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그에게 춤을 추자고 권했다. 춤을 추면서 나는 부끄럽기도 했다. 왜냐하면 비적비적 웃음이 흘러나오는데, 그것이 내가 이곳의 주인이자 모멸하는 이라는 걸 자꾸 말하고 있는 듯해서. 사람들이 아주 완벽히 바란다고 해서 검은 태양이 뜨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가면무도회는 언제나 시작되곤 한다. 달이 붉거나 이미 붉게 된 달이라는 것 근처에서. 저 멀리서 줄리아 스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위로 열고 있었고 아까 상설 무대의 ‘그’가 음료를 내 입으로 부어 넣어 주고 있었다. 어쩌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만들어진 걸지도 몰랐다. 저렇게 붉게 된 달이 나는 어쩐지 즐거웠으며, 여기까지 있다가는 곧 배우들이 연극을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내가 손동작을 하자 이사야라는 성명을 가진 아까 그 봇이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아까 내가 거절했던 줄리아 스톤에게 천천히 걸어가 춤출 것을 청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다 거짓된 것이다’라는 정도의 합리화를 거친 이후에 나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예전부터 나는 거절하는 것을 잘 못했다. 그런데도 오늘 내가 몇 번이나 거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도회가 가진 마력이 내 손안의 한 줌 같은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으리라. 헐벗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보기에 고아했고 오히려 더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달이 붉게 된 것보다는 검은 태양이라는 것을 더 불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을 만드는 데에는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다. 아까는 부정했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다 거짓된 것일 리는 없었다. 아까 손등에 키스한 것.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 붉은 달 아래에서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여러 사건들을 거쳐 가는 가운데 서서히 이 마스커레이드가 끝나가기 시작했다. 나와 거의 동일하면서도 또 다른 복장과 가면을 한 인파가 듬성듬성 사라졌다. 사람들이 사라질수록 나는 환희에 차올랐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비밀을 여기에 하나씩 잊고 두고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의 색깔이 점점 정상적으로 변해 가고 아직도 밖에는 검은 태양이 뜨고 지길 고대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종교가, 그런 컬트가 나는 조금씩 무서웠다. 다음번에도 가면무도회가 열린다면 나는 베일 뒤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정해진 시각마다 한 번씩 고개를 끄덕이리라. 저쪽에서 줄리아 스톤과 이사야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라고. 이쪽으로 와서 여기에 끼라고. 가면무도회가 폐장하는 가운데 나는 그것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걸어갔다. 그랬더니 그들이 함께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2021년 12월 31일 금요일

카페라떼

커피 맛 우유인지 우유 맛 커피인지 분간할 수 없을 카페라떼가 3/4쯤 채워진 잔을 앞에 놓고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의자 좀 가져가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곧이어 의자를 가져갔고 그곳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도 전부 카페라떼를 시킨 듯했다. 곧 나는 거기서 눈길을 지웠다. 저쪽을 보면 노트북을 선으로 연결해 충전하고 있는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하면 유모차를 테이블 옆에 붙여 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시 시선을 돌리면 환기 때문에 정문을 열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여기까지 추운 공기가 들어온다. 나는 펜촉을 돌리며 3/4쯤 채워진 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꿈을 잃고 이곳으로 걸어온 것일지도 몰랐다. 저쪽을 보면 공용 주차장이 있고 차들이 꽉꽉 차 있다. 이 카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카페라떼를 시킨 듯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나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연한 갈색의 음료. 섞지 않으면 밑에 흰 우유 부분이 가라앉아 있다. 사실 이 카페에서는 카페라떼밖에 팔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 장소 안에서 모두 같은 음료를 마시고 있다니. 어쩌면 거기에서 피어나는 동질감 같은 게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용무와 상념으로 바쁜 것 같았고 어쩌면 멍청해 보이는 자기만의 웃음을 짓는 사람도 건너편에 있었다. 나는 잔에 채워진 카페라떼를 조금씩 마셨다. 아껴가며 마셨다. 왜냐하면 여기 오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까 직원에게 음료를 받던 때를 상기했다. “맛있게 드세요.”라고 했는데 나는 그만 대답을 하지 않고 말았다. 시럽을 7번 눌러서 카페라떼에 붓고 난 뒤 나는 이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곳을 꿈이라고 생각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곳의 정경이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꿈은 아닐 것이다. 아니겠지.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실감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것은 권태였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종류의 권태를 느꼈고 그것이 실감 났다. 나는 달콤한 카페라떼를 좋아했다. 내가 마시고 있는 카페라떼에서는 충분한 단맛이 났다. 그것은 연유 라떼라고 하는 것들과 맛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다 같이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는 이 광경 속에서 나와 옆 사람, 옆옆 사람, 옆 사람들과의 차이가 덜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예전에는 꿈을 꾸곤 했는지도 몰랐다. 요즘에 나는 꿈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꿈과 가까웠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지금은 꿈을 잃은 것인지도 몰랐다. 거기에는 이전의 관성이 남아 있고 기록되어 있어서, 지금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한번 가까웠던 것은 운명의 실이 그것을 매단 채 놓아주지 않고 있다. 내게 있어선 그런 것이 거리이다. 아무리 멀어져도 금방 닿을 수 있고, 가까이 있어도 먼 그런 귀속들. 그런데 난 여기에서 무엇이 그리운 걸지도 몰랐다. 나는 무엇이 그리운 걸까? 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거리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한번 가까웠다가 이제 멀어지게 된 것들의 생각이 난 듯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과 일종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거미줄과 모양이 엇비슷했다. 거리가 먼 것 같아도 휴대폰과 SNS 등을 통해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반면에 이곳의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거리가 가까운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볼록 렌즈 너머로 보는 세상이 볼록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처럼. 나는 그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한 느낌이 나를 이 자리에 붙박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이 내가 느낀 권태의 전말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이동할 수 있으나 이동하기 어려웠고, 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카페라떼는 아직도 정확히 3/4이 잔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오래 있으려고 너무 조금씩 홀짝인 것일지도 몰랐고, 나는 여기에서 잘못된 전언을 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도 오목하게, 거리가 가까운데 나에게서 거리가 먼 듯했다. 어쩌면 안경을 안 닦아서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지금 내가 두 눈으로 흘리고 있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인지도 몰랐다. 나는 왠지 눈물이 났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굉장히 안타깝게 느껴져 울었다. 나는 이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울었다. 하나둘씩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어쩌면 내가 어릴 적에 꾸던 꿈은 카페에서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카페라떼를 마시는 일에 가까운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때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021년 12월 29일 수요일

부랑자 이야기

그의 내력을 설명하자니 길고, 용모에 관해서 눈여겨보자니 간단한 것이었다. 그는 부랑자였다. 땅 아래의 땅이라는 곳에서 올라온. 전신에는 티끌들이 묻은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이마 아래의 눈은 형형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함께하는 사람이 없이 시내를 걸었다. 혹시 아득히 멀리 닿은 운명의 실이 이 시내를 걷는 사람들 중의 하나와 그를 묶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아무와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걷기만 했다. 지상의 사람들과 아직 접점이 생기지 않은 채로 그는 설족 노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옆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눈빛이 형형한 쥐들이 경계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여기서 인간의 육신을 갖고 있는 것은 사방에 가득한 쥐들의 무리 중에서 그와 노인뿐이었다.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그대는 가진 게 없군.” “이 붕대뿐이오.”라고 그가 말했다. 그의 붕대 사이사이에는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흰 가루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그 자리에 남는 눈물 자국에서 발견되는 흰 가루들인 것 같았다. “일부러 찾아온다면 이곳에 닿을 수 없소.”라고 노인이 말했다. 그가 대답했다. “정처 없이 걷고 있던 중이었소. 머무를 곳이 마땅치 않은지라.” 그와 노인 사이에 몇 마리의 쥐들이 난입해서 끽끽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노인의 손을 타고 어깨 위에 올라와서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말했다. “이곳에 머물길 원하시오?” 그가 대답했다. “그렇소. 만약 이곳에 삼주간만 머물게 해준다면 내 붕대를 조금 나눠주겠소.” “그대는 그대가 닿은 땅의 이름을 물어보고자 하지 않는가?” “관심 밖의 일이오.” “이곳은 설주라 하네.” 그 말을 끝으로 노인과 일련의 쥐의 무리들이 빛이 닿지 않는 저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몸을 뒤덮은 붕대의 끝을 손가락으로 다시 만져보았다. 그 감촉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가 온 행성에서 그는 왕자였는데 그 행성의 크기가 작았다. 어느 날 정원에 핀 한 송이의 장미를 눈에 담았고 그는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장미가 시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행성들에 피어 있는 장미들을 보아왔고 영원히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만 같은 권세들의 장미부터 아주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장미까지 그 모든 것들을(장미에 관해서라면) 눈에 담아왔다. 그러나 그가 있던 행성에서 본 것과 같은 장미는 이후로 보지 못했다. 멀어서 시야가 닿지 않는 저편 어둠으로부터 아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붕대는 귀한 것이오. 우리들이 가진 자원은 값싼 것뿐이라 그대에게 붕대를 받을 수 없소.” 그 말을 끝으로 어둠 속에서는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음을 지어야 하는지를 잠깐 고민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랑자가 된 이후로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적인 웃음을 지을 수 없게 된 지가 오래였다. 쥐의 시비들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그라고 깨끗해지지 않길 원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가는 행성마다 마땅한 교환 자원을 구하기가 어려웠던지라 그러한 일이 마음속 깊이부터 질려가게 되면서 그의 말끔한 의복은 헝겊이 되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으며 점점 사람들이 피했다. 그는 장미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고립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택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그런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도중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가 고향에서 마지막 교류를 택하길 그만두었던 그 장미가 별로 아름답거나 독특한 장미는 아니었단 것이다. 각종 고생을 하며 그가 알게 된 것은 다만 그 장미가 아주 고유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결말을 피했던 행동에서 어쩌면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장미가 너무도 사랑스러웠기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옆에는 쥐의 시비들이 쥐가 좋아하는 치즈를 담은 접시를 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여기서부터 시작된 이곳 설주라는 곳에서 그가 받은 대접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설주의 자들은 분명 그들이 가진 자원의 커다란 일부를 떼서 삼 주 동안 그를 정양토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진 붕대의 내력과 이들은 상응하는 데가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 설주 노인의 종족의 운영 정책과 맞닿은 데가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얼마 후 고향별로 돌아간 그 부랑자에게서 지구에 있는 설주로 막대한 양의(그가 있는 별은 귀한 광석이 많이 묻혀 있는 별이었다) 치즈로 교환 가능한 자원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는 샤워를 마치고 나가 시드는 모습을 보길 피했던 그 장미가 있던 자리에 다가섰다. 한결 깨끗해진 몸이었고 누구도 부랑자라 생각하지 않을 만한 정결한 모습이었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이젠 그리 꺼려지지 않는 듯했다. 그 장미는. 

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낡은 마법사의 꿈 (2)

의자 위에는 깔개가 덮여 있다. 벽난로를 앞에 두고 나는 손으로 가위나 보의 모양을 만들며 장난을 했다. 벽난로 속에서는 장작이 불타 없어지고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실내의 어떤 권태를 느꼈다. 내 다리가 온기로 인해 따듯해지고 있었다. 나는 거의 더웠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고 나는 집 바깥의 추위와 유리되는 따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앉아서 졸며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멀리에 있는 교실에서 한 인물이 가만히 앉아 빈 교실 안에 있는 정경들을 눈에 담았다. 나는 깨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것이 어느 정도 꿈의 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미망이 나는 즐거웠다. 꿈은 단순히 소비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다분히 앞날의 일을 의식하는, 그런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될 수도 있다. 꿈은 평소에 해볼 수 없는 생각들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권위적이다. 그것은 왕의 침소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도자기들이나,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앞으로 손을 내뻗을 수는 있으나 그 손은 닿지 않는다. 벽난로에도 손을 넣어볼 수 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잠시 간의 조응된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일어나서 주전자 안에 있는 물을 컵에 부었다. 김이 나고 있었다. 고양이 몇 마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와 한껏 몸을 늘리고 있길래 나는 다시 꿈에서 깼다. 나는 고양이들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벽난로 안에선 장작들이 불타 없어지고 있었고 나는 자기가 태어난 도시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 말을 배운 쥐에 대한 생각을 했다. 쥐 곁에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었다. 쥐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만났고 서로 동료가 되었을까? 나는 의자 위에 덮여 있는 깔개를 치우고 그 위에 물컵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저쪽으로 가서 믹스 커피를 가져와 그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런 양이 왠지 나는 기분 좋았다. 가루들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액체 안으로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컵 안에서 숟가락을 빼낸 뒤 그것을 입으로 물었다. 실내가 조금 건조한 것 같았다. 나는 방의 중앙으로 가서 가습기를 틀었다. 수증기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증기가 뿜어 나오는 정경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앞으로의 대한 일을 생각했다. 이 집에는 나 이외에도 몇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오늘은 때가 맞아 이 공용 거실에 앉아 졸고 있기까지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올라가거나 내려오는데, 나는 그때마다 이 공동 거실 안에 자리하고 있거나 않기도 하다. 나는 그들과 안면을 나누지 않은 사이였다. 대충 그들이 내려오는 시각을 잰 뒤에 나는 이 공동 거실에 나와 있곤 했던 것이다. 마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서 그저 마음에 들기만 한 '틀린' 쪽을 무수하게 고르며 나아가는 것처럼. 이 미궁 끝에는 괴물이 살고 있을까? 나는 틀린 쪽만 제법 골라왔으니, 그런 괴물은 없을 법도 했다. 대신에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단지 중앙이 있는 의자 외에는. 그 의자 위에 앉으면 그것으로 게임이 끝나는 것이었다. 하나의 엔딩으로서. 그러나 잘 만들어지지 못한 그런 엔딩. 손을 많이 거친 게임은 아니라 엔딩도 이렇다 할 만하게 꾸며져 있지 않다. 그저 조용할 뿐이다.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러한 게임에 대한 생각은 실내의 권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은은한 온기가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일종의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내가 느끼고 있기 전까진 그 존재가 위태롭고 불확실한 것이었어서 시인들이 쓴 시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장들이 지닌 지위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곧 크리스마스가 올 것이다. 카페에 가 보면 계속해서 캐롤이 흘러나올 것이고. 인형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아 그 현실, 방 안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것처럼 12월의 막바지로 가다 보면 그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이틀의 전야제는(한 날은 전야제이고, 한 날은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날이다) 12월 23일이고, 그날의 전야제는 12월 22일이고, 이렇게 해서 계속 전야제가 길어진다. 어쩌면 12월의 전체가.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러한 사람들의 장소와 멀지 않은 곳에 혼자 우둔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고양이 몇 마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고, 고양이는 뛰어올라 내 미망이 장난감이 된 것처럼 나를 그 의자 위에 붙박혀 있게 할 것이다. 나는 혼자 앉아서 소원을 빈다. 부디 그 예수가 태어나지 말기를. 그로 인해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늘어지는 전야제들이 이쪽을 호도하지 못할 미망과 같게 해달라고.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다. 사람들은 12월의 이틀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실내에 트리 나무 장식을 우두커니 서 있게 한다. 나는 실내의 어떤 조짐도 느껴지질 않았고, 내 두 다리는 끝없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더운 공기는 벽난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고 나는 이것의 엔딩을 보길 바랐다. 지금 나는 앉아서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었고 꿈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꾸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다음 번에도 고양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고양이들은 안면이 있든 있지 않든 이쪽으로 뛰어 올라와 겹겹이 내가 꾸고 있는 꿈을 끝냈다. 소프라노의 음성으로 된 회선곡이 흘러나오며 나는 벽난로 안으로 내 발을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 사이 고양이들은 나에게로 뛰어올라 온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한껏 몸을 편 채로 걷고 있었다. 저쪽에서 저쪽으로. 마치 그곳으로 걸어가면 그 두 날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양이가 쥐 잡고 놀듯이 성탄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야제들로 지루한 야간 기차 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난다는 마음에 나는 왠지 즐거웠다. 그 고향은 내 생각 속에서 벽난로 안에 있는 장작들처럼 몸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것이 회선곡이라면, 나는 지금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 이 실내 안에서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노라. 카드 스프레드와 별점들. 그리고 배움. 나는 이러한 것들의 꿈을 꾸고 있었다. 레버를 당겨 슬롯머신을 작동시키듯이 어떤 매력으로써 내게 그런 꿈을 강요한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이 내게 별점 보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가 몹시 그립다. 그 기술이 그리운 건지 성탄의 전야제가 천천히 내려오는 작은 마을이 그리운 건지 혹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알지 못하고 나는 다시 미망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다시금 누군가 이곳으로 내려왔다. 나의 낡고 오래된 꿈을 끝내러.

2021년 11월 11일 목요일

음영

전기 모터를 단 배가 퉁퉁거리며 물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 위에는 낙후된 지역에 사는 주민 둘이 타고 있다. 이 배는 주민 둘이 같이 돈을 모아서 산 중요한 자산이다. 햇빛이 이 위로 따뜻하게 내려온다. 강 유역에는 물푸레나무들이 자라 있고, 처음 보는 식생의 장소가 펼쳐져 있다. 이 둘은 모험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니다. 모험에는 긴장감과 비교적 안전하다는 느낌, 그리고 그 나라의 화폐가 들어 있는 멋진 벨트가 함께하는데, 이 둘에게는 화폐가 없다. 생계를 이어나가는 몸짓에는 어딘가 조용하며 고즈넉하고 하나의 그림 속에 있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가 있다. 둘은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배를 조종하거나 하며 옆얼굴을 이쪽으로 비추고 있다. 그 얼굴은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둘은 대화를 한다.

주민1: 기다려야 하는군.

주민2: 맞아.

주민1: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주민2: 글쎄.

별은 관측 장치가 나오기 전까진 항해하는 사람들의 길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민 둘이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이 하고 있는 것은 시계공들의 낡고 오래된 작업대처럼 하는 일이 정해져 있고, 그 순서와 리듬에 몸을 맞춰야 하는 직업적인 활동에 가깝다. 한 사람의 키는 꽤 큰 편이며, 나머지 한 명은 그보다 좀 더 작다. 둘의 성별이나 생김새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러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인상을 남겨준다. 주민 둘은 도중에 담배를 피운다. 이번에는 주민2가 먼저 말한다.

주민2: 맞아.

주민1: 응?

주민2: 기다려야 하는군.

주민1: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글쎄. 달이 차고 기우는 것에는 별로 중요한 의미가 정보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들의 위치에 대한 것은 전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달의 모양을 보고 날짜를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이 둘은 날짜를 세지 않는다. 이 둘은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둘도 궁금해하고 있듯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이 둘은 다시 전기 모터를 단 배로 이동하고 있다…….

이동하던 도중, 둘은 이 낙후된 지역, 나아가서는 이 낙후된 나라의 정치 현실에 관한 걱정이 담긴 대화를 나눈다. 이 나라에는 두 가지의 세력이 있는데, 둘 중 어느 쪽에도 이렇다 할 비전이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물론 낙후된 지 너무 오랜 기간이 흘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 노력할 것 같은 쪽과 방향이 조금 어긋났지만 잘할 수 있어 보이는 쪽 중 어디를 지지하면 좋은 걸까? 전자인 후발 주자는 기세를 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현실에 부합하는 정당한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지층의 한 표 한 표가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었다…….

한 명이 엽총을 발포한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새였던 걸까? 그 자리에 있던 새는 추락하여 배의 밑판으로 떨어진다. 한 명이 서둘러 새의 손질을 한다. 이동하는 배의 위에서 원거리 발포로 새를 잡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다. 추락하는 새가 물 위로 떨어진다면 그것을 건져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언가를 그만둔다는 것은 그런 정확한 위치나 타이밍이 중요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오래전에 그만두었던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도 때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새를 잡기란 요원한 일이다…….

둘은 강가에 배를 정박하고 나뭇짐들을 그러모아 불을 피운다. 그리고 꼬챙이에 꿰어진 새를 나눠 먹는다. 둘은 등 뒤에 엽총을 한 정씩 걸고 있다. 이곳은 야생의 큰짐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곳이다. 문득 햇빛이 다른 쪽으로 드리워져 한 명의 얼굴에 음영을 만든다. 그 음영이 걸린 쪽이 말한다.

음영이 걸린 쪽: 그 얘기 들어봤어? 이 글은 다분히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고려되었다는 것…….

음영이 드리워지지 않은 쪽: 들어봤지.

음영이 걸린 쪽: 그렇군.

전기 모터를 단 배가 시동이 꺼진 채로 미동도 없는 것 같다……. 둘은 조용히 새 구이를 먹는다. 모닥불이 꺼지고 한숨과 함께 그들 뒤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 글은 무엇을 상징하려는 것은 아니다.




2021년 10월 29일 금요일

낡은 마법사의 꿈

낡아 해진 마도구 상점에서 나는 서류철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사실 마도구 상점들은 다 낡고 해졌죠. 롤랑이 지난번에 갖고 온 고블린의 바지는 우리 중 누구에게도 맞지 않습니다. 노예 감독은 문 쪽에 서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한 명의 마법사이고, 나는 그 밑에서 봉급을 받는 처지입니다. 노예 감독은 그가 만든 골렘인 셈입니다. 간단한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복잡한 의사 결정은 누군가 대신 내려줘야 하죠. 우리는 한 사람씩 교대로 보울 안에 담긴 액체를 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좋은 향이 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끓어도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한 원료이지요. 겉으로는 투박해 보여도 끓임 솥은 주기적으로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마도구입니다. 이스마엘의 향은 향긋한 식물 계열의 것인데, 마치 단정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디퓨저와 비슷하게 지금도 얌전히 끓는 중이랍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온전한 서류들ㅡ두 장 받침의ㅡ을 작성하며, 각자 꿈을 꾸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키보다 높은 서류 보관실에서 체류합니다. 꿈은 동물이 잠들었을 때 꾸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의미로는 먼 미래의 목표 같은 것을 말하기도 하지요. 우리들은 꿈속에서 서로 만날 수 있고, 만나서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에 약속 시간을 정해두고 잠드는 일도 빈번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잠들어 있는 것은 누군가의 꿈인데요. 누구의 꿈인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사무실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가면 창문에 우주의 풍경이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생각보다 드넓고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꿈속의 이 장소는 지상에 세워진 건물이 아니라 우주의 특정한 한곳에 정주해 있는, 추진 기능이 사라진 왕복선의 잔해입니다. 정확히는 그렇다고 하죠. 현실에서나 꿈속에서나 우리들이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한 소문들은 무성하고, 그것은 특히 세기말 시점의 도시에서 그 영향력을 키웁니다. 마치 걸어도 받지 않는 전화번호처럼. 조용한 새소리의 알림이 울리는군요. 탕비실에서 한 사람이 잠에서 깨어났다는 뜻입니다. 담당자는 서둘러 그 방문을 열고 아직도 이곳이 꿈의 안임을 그에게 알리고, 납득시켜 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손바닥들을 그의 눈앞에 들이밉니다. 다행히 익숙하게도 그가 손바닥으로 손바닥들을 마주치고 다시 잠드는군요. 꿈속에서 잠들 수도 있다는 점은 꽤 웃긴 일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는 ‘걸어 올라왔다’라고 표현한답니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로 ‘미끄러진다’라고 말하는 것도 있죠. 말 그대로 미끄러지는 것인데요. 누군가의 꿈속에서 램프의 연기가 밖으로 새 나가는 것처럼 이탈되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드나들 수 있는 비로소 진짜ㅡ원래의? 아니면 본래적인, 응당, 평범히 그러한 성격의ㅡ 의미의 꿈으로 층계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누군가와 만났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만난 것이 아니므로 업무의 분담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달 뒷면의 돌로 벼려낸 간이 공간 안에서와는 달리, 우리들은 여기에서 천체 관측의 업무 또한 하고 있지요. 사실 천체 관측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꿈의 위계가 매지컬하냐 아니냐를 가릴 수 있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여기ㅡ기록원ㅡ에서 천체 관측을 할 때에는 객관적이고 지루한 천체 정보의 나열 말고도, 개인적이고 사적인ㅡ어쩌면 비밀의ㅡ 관측자의 정한의 기록이 바로 뒤에 있는 시트지에 적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우지 않는다면 잊히고야 말 그러한 정보들은 이 세계에서 소용이 다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숨을 몰아쉬고 있네요. 어디엘 다녀왔냐고 물으니 고블린의 빈집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카이브에 등록되어 있는 생물 종의 꿈입니다. 아카이브에 등록되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그곳에 잠들어서 다녀올 수 있죠. 여기는 위계가 높은, 상위의 꿈의 세계인 덕분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창밖에 실제 우주가 있는 이유도 누군가의 자의식을 감추기 위해 정교하게 엮어 놓은 공간ㅡ공간이 아니라 ‘틀’이나 ‘약속’, 아니면 ‘타자’에 가까운 것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ㅡ이라는 환상을 주기 위한 목적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세계에서 번역 및 편집이라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통계적으로 장편 소설 한 권ㅡ약 250kbㅡ의 분량을 손보기 위해서는 유능한 이라고 할지라도 약 스물 네 번의 꿈의 이탈, 층계로의 진입, 테라스에서의 휴식, 엘레베이터의 이용, 그리고 마지막에 송고하기 위한 목적에서의 이 ‘꿈’으로의 진입이 필요하다고 하니까요. 이 마도구 상점에서는 이름과는 달리 서류철의 분류 작업이 주된 업무입니다만, 가판대엔 그렇게 번역된 책들이 있고, 콘센트도 팝니다. 이 세계에서도 전기를 사용하지요.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것관 달리, 한 사람에게 묻어 있는 전기를 ‘털어내는’ 것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가끔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해요. 예를 들어 아까는 ‘박력분 밀가루가 있어요?’라는 어떤 여성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요, 사실 이곳에서 전화로 그 사람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굉장히 까다로운 일입니다. 위의 전화도 사실 어떤 남성분이 건 전화였을지도 모르고 박력분 밀가루가 아니라 중력분 밀가루를 찾고 있었는지도, 아니면 과일 캔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분포’라고 배우는데, 수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많이 헷갈릴 수도, 적게 헷갈릴 수도, 아니면 의외로 안 헷갈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여기에 대해서 적게 헷갈리는 경우까지만을 상정하도록 교육받는답니다. 그러니까 위의 경우에는 박력분, 중력분, 부침 가루, 베이킹파우더 등의 재고까지 정도를 확인해 주는 것이죠. 그 여성분은 잠시 후 여기에 와서 고블린의 안 맞는 바지를 입어 다리의 모양이 비쳐 보이는 나의 차림을 보고 그거 벌칙 같은 것인가요? 라고 묻습니다. 이런, 시간대가 헷갈리는 모양이군요. 이 세계에도 잠은 필요합니다. 시간대가 헷갈리는 것은 잠이 필요하다는 표지이지요. 나는 이곳을 세계라고 부르기가 껄끄러운데, 왜냐하면 잠이 안 오고, 잠이 안 오는 세상은 세계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것 같기 때문입니다. 더 낫게는ㅡ트여있더라도ㅡ ‘사무실’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담배 피우러 테라스에 나갑니다. 테라스 또한 별다를 바 없는 장소이지만, 가끔 담배 피우러 ‘달려온’ㅡ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미끄러진ㅡ 사람들이 있고, 나는 물론 그곳까지 천천히 걷습니다. 노예 감독의 관리자로서 천천히 걸어야 ‘품위’가 있을 테니까요. 노예 감독은 그 골렘에게 우리가 붙인 별명 같은 것입니다. 아무튼 테라스에 나가면 시인들이 쓴 시가 있는데, 그 시들은 음악처럼 계류적이죠. 여기에 시인들의 시가 있는 이유는 그들의 시의 전문을 기억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다시 여기로 오지 말라고ㅡ그러니까 기억 속에서 잊히기 전에 이곳으로 다시 오라고ㅡ 하는 당김줄과 비슷한 것이죠. 다시 사무실로 내려가면 중요한 것을 기억하기 어려워서, 계속 그곳에 머물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익숙해진다면 괜찮지만, 그렇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무급 봉사를 하게 될 위험이 있지요. 물론 이곳을 만든ㅡ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잠든ㅡ 마법사의 입장에서는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죠.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이 말은 이곳에서 당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을 기억하라는 인삿말로 쓰이곤 한답니다. 이것이 당신의 기억 속에서 잊힐 수도, 내 기억 안에서 다시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그럼 평안하세요. 낡고 해진 마법사의 꿈처럼.

2021년 9월 23일 목요일

검사

콜록콜록. “왜 그러니, 어디가 아파?” 나는 공책을 꺼내서 폈다. 그리고 몇 문장을 적어서 언니에게 보여주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언니와 대화할 수 없어. 그런데 집에서 마스크를 쓰기엔 갑갑해. 언니, 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할까? 그런데 같은 반에 검사를 받은 아이에게 들었는데 면봉을 코 깊숙이까지 찌른대. “검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자, 여기 마스크. 오늘은 이따가 검사받으러 갈까?” 나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응.” “밥 먹고 갈까?” “아니, 먹고 싶지 않아.” “그럼 좀 누워 있으렴. 이따가 언니랑 같이 가자.” “그런데 나 TV 보고 싶어.” “안 돼, 네 생각대로 나한테 옮길지도 몰라.” “콜록콜록.” “감기약이 있긴 한데 먼저 먹을래?” “응.” 언니가 감기약을 들고 왔다. 나는 그것들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다음 한 번에 물과 함께 삼켰다. 예전에 어릴 때는(지금도 어리지만) 한 번에 한 알씩만 삼키곤 했다. 언니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약을 잘 삼키네.” “응.” “그럼 좀 누워 있으렴.” “언니, 그런데 나 심심해. 핸드폰 하고 있어도 돼?” “응. 아마도 될걸. 그런데 눈 나빠지지 않게 조심해.” 시간이 몇 시간이 지나야 병원에 갈까? “언니, 병원에 몇 시에 갈 거야?” “나 지금 나갔다 와야 돼서 이따 1시에 가자.” 오랜만에 언니와의 외출이었다. 언니가 방을 나가고 나는 장롱문을 열어 개어 놓은 옷들을 꺼냈다. 이따가 입고 갈 것이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동영상 어플을 켜서 맨날 보는 그림 방송을 봤다. 그리고 난 잠이 들었다.

*

콜록콜록. 멍하니 누워 있는데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언니인 모양이었다. 언니는 내 방문을 노크한 다음 고개를 올리고 일어난 나에게 캐미솔을 덮어주었다. “몸은 좀 어떤 것 같아?” 창밖으로는 비가 오고 있었다. “으응, 그냥 그래.” “아직도 밥 안 먹고 싶어?” “응.” “그럼 지금 병원에 갈까?” 나는 언니의 손을 붙들었다. “그런데 정말 면봉을 코 깊숙이까지 찌를까? 그럼 아플 텐데.” “그렇게 깊게는 안 찌를걸.” 나는 약간 두려웠으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꺼내 놓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는 언니를 따라갔다. 언니는 근사한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왼쪽 주머니에 핸드폰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그런데 검사는 무료야?” “만 원 정도 든대. 그렇게 걱정하지 말렴.”

*

콜록콜록. 언니와 나는 택시를 타고 근처의 검사를 시행하는 큰 병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언덕길을 오를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의 밑에 안내원이 서 있었다. “언니, 나 그런데 정말로 그 병에 걸린 거라면 어쩌지? 지금도 이렇게 나란히 서 있잖아. 그리고 아까 택시 아저씨랑도 같은 차 안에 있었고. 아저씨에게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고 있음을 밝혀야 했던 게 아닐까?” “마스크를 썼으니까 괜찮을걸. 그래도 밝히는 것은 그래야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생각을 못 했어.” “으응.” 언니는 뭘 깜빡할 때가 많았다. 검사소는 병원 건물 밖에 마련되어 있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언니는 검사지를 쓴 다음에 안내원에게 건넸다. 나는 그 옆에 서서 멀뚱멀뚱 그것을 바라보았다. “의자에는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구나. 안 힘드니?” “콜록콜록.” 난 괜찮아, 라고 말하려는데 기침이 나왔다. 감기에 걸린 것은 분명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난 괜찮아. 그보다 언니. 그 병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만약 그 병이 맞다면 지금까지 제일 많이 같이 있었던 언니가 그 병에 걸릴 위험이 많은 거잖아. 그걸 뭐라고 했더라? 맞아, 리스크가 커.”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돌아올 때는 언니와 같이 걸어왔다. 그리고 코 깊숙이까지 찌른다던 같은 반 아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코 깊숙이까지 찔렀다. 그래도 못 참을 정도까진 아니었고, 언니가 옆에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코가 찔린 직후엔 코 속이 매웠다. 집에 와서 침대에 눕고 다시 동영상 어플을 켜서 그림 방송을 봤다. 그리고 멍하니 그렇게 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까 난 장화를 신고 가서 양말이 젖지 않았다. 그렇게 있기를 몇 시간. 언니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림이 왔구나. 음성이래.”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콜록콜록. “병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렇지?” “응, 정말 다행이야.”




2021년 9월 7일 화요일

흡혈귀

벨벳 나무 앞에 여자애가 손 흔들고 있다. 나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듯하다. 나는 그 여자애의 연원을 생각한다. 문지른 책받침에 머리카락이 떠오르는 걸 여자애는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그녀의 뒤에 있다. 앞에는 벨벳 나무가 있다. 이 언덕까지 올라오느라 나는 옷감이 상했다. 벨벳 나무의 그늘이 이쪽으로까지 뻗어 차양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내 몸에 가려 햇빛이 여자애의 몸까지 닿지 않는다. 나는 책받침을 들어 다시금 그 여자애의 머리카락에 대고 문지른다. 머리카락들 중 일부가 올올이 책받침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여자애는 앞에서 손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거대한 그림이 있다. 황야의 풍경을 누군가가 거대한 화구로 그려 놓은 듯한 그림이다. 그 그림은 현실성이 있어서 사진일 수도 있고 실제 풍경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미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재현해 놓은 것임은 분명하다. 여자애가 입을 연다. “저기에 가 보고 싶어.” 나는 말한다. “안 돼. 저곳까지는 멀어서 안 될 거야.” 여자애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커터칼을 꺼내 익숙한 몸짓으로 벨벳 나무의 표면을 긁어낸다. 그녀는 하늘소처럼 벨벳 나무의 수액을 채취해 음용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여자애는 허리춤에 빈 병을 매달고 있다. 그 빈 병에 흘러내리는 수액을 가득 채운다. “나무에는 통각이 없다고 해. 자기가 받은 고통.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거겠지. 나무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 그리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나 다른 것들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거기에는 아무 차이점도 없을 거야. 난 나무가 상처 입을까 봐 표면을 긁어내는 게 아냐. 그저 나무의 중심부까지 닿을 힘은 없어서 이렇게 긁어내는 거지. 나무에게도 실감을 주고 싶어. 고통은 실감을 동반하는 것이니까. 난 권태로워.” “벨벳 나무는 좀 다를 수도 있을걸.”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벨벳 나무와 다른 나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그러나. “잘 모르겠군. 네가 옆에 있다는 거 아닐까.” 여자애는 수액이 반 정도 담긴 통을 흔들며 말했다. “이걸 마시면 잠이 잘 와. 졸리지 않을 시간에도 잠이 와. 어쩌면 나에게 어울리는 것은 그 점일지도. 벨벳 나무가 분비하는 물질은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 평화롭다는 것은 곧 행복한 일이 아닌가? 나는 그녀의 말에 답했다. “평화롭다는 것은 곧 행복한 거 아닌가?” “네 말이 맞아. 여기에서 난 행복해. 이 장소의 주인은 이곳을 가장 먼저 발견한 나이지, 나는 이 장소를 이렇게 불러. 벨벳 나무의 그늘이라고. 그늘은 나, 그리고 너.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지. 하지만 내가 권태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나에게 언니가 없기 때문이야. 있었을지 몰라. 하지만 잊어버렸어.” 나는 작은 경멸을 담아 말했다. “그렇다면 이 벨벳 나무를 언니인 셈 치면 되겠네.” “넌 날 경멸하니?” 나는 약간 당황했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나니 마음이 불편해져서 곧이어 “응.”이라고 정정했다. “이유는 많을지도 몰라. 감정이란 그런 것이거든. 종합적인 거. 그리고 일의 사후에서야 나오는 거. 나에게 경멸을 가지는 건 잘못된 게 아냐. 나에게는 현실성이 없으니까.” “부족하니까가 맞는 표현이겠지. 어찌 됐건.” “그래, 난 살아 있어. 부족한 게 많은 몸이지. 그런데 저쪽을 봐.” 아까 봤던 황야의 풍경이 보였다. “저게 그림이라는 건 잘못된 소문에 불과해. 저것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냥 떠돌아다니는 것들과 비슷해. 잘못 걸려온 전화, 받고 나서 무슨 메세지인지 너무 명확하고 하잘것없기 때문에 바로 끊어버리는 전화. 그런 전화는 하루에 몇 통씩이나 오기 마련이지.” “소문이라고?” “내가 설명한 것들은 다 소문이라고 부를 수 있어. 도시 전설에 대해서 들어봤니? 그냥 도시 안을 떠돌아다니는 소문. 이천년대 초쯤에 가장 세력을 얻었던. 그런 것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내는 이익 단체들도 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어쩌면.” 나는 소녀의 그다음 말이 짐작이 갔다. “어쩌면 우리가 그 소문의 주인공일지도 몰라.” 그녀는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소문의 주인공이라기엔. 특별한 것도 없고. 결여된 게 있을 수도.” “그래. 하지만 일의 진행 상황 중에는 아무래도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는 이익 단체의 눈을 끌어야 할지도 몰라.” “어째서?” “어째서긴. 여기를 벗어나기 위해서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애의 머리카락은 정전기로 인해 반쯤 공중으로 떠오른, 자고 일어난 직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제 자러 갈 시간이야. 사실 난 흡혈귀거든. 밤과 낮이 뒤바뀌어 있어. 넌 뭐 할래?” “나는 특별한 사람 할래.” 그녀가 웃음을 지었다. “어딜 봐서 특별하다는 거야.”



*조연호, <서적>

2021년 8월 31일 화요일

바이닐

아직도 난 해진 바이닐을 틀고 있다. 방 안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가구들이 가득하고,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나는 코르타사르의 공원에 다녀왔다. ‘담배 피우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든 그곳에서 사라질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 위에서 상관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생각 속의 공원이었으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바이닐을 틀고 나오는 음악을 듣는 것은 하나의 실제적인 일인 것 같다. 음악은 실제적이다. 음악은 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것을 경험하게 해준다. 바이닐이 해진 것은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여러 번 틀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생각이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가끔 음악 듣는 일이 괴로운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도 나는 틀고 있는 바이닐을 치우지 않곤 한다. 바이닐은 내가 인생의 여러 감정들에 보내는 경의 중 하나다. 훌륭한 작품들을 접하고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보내게 되는 경의처럼. 경의에서 ㅡ자 하나를 빼면 경이라는 낱말이 된다. 나는 경이를 좋아했다. 요즘 내가 접하는 것들 중 경이를 느끼게 하는 것은 별로 없다. 일종의 의문감을 품고 나는 TV를 켰다. TV에서는 오늘 아침 발생한 재난에 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아마 며칠간은 이 재난에 관한 보도로 TV 프로그램들이 채워지게 될 것 같았다. 바이닐을 틀고 있는 지금, 나는 그런 재난과는 거리가 멀다. 바이닐은 사람이 도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가? 그렇다기보다는 자신만의 방과 공간을 만들어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것 같다. 바이닐의 앞에는 문지기가 있는데, 문지기는 졸고 있다. 그가 졸고 있는 이유로는 아무래도 해진 바이닐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그 공간, 방에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이다. 디지털 음원 파일이 아닌 바이닐이라서, 그 문지기들은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 섣불리 손을 대기 어렵다. 왜냐하면 문지기가 존재하는 이런 상황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어떤 바이닐의 출입문은 내 방의 가구들과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이고, 어떤 바이닐의 출입문은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안이 환하게 비쳐 보이기도 한다. 가끔씩 그 안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 있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보다 먼저 당도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나보다 더 품위를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옆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 나는 그들이 얘기하는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래서 출입문을 열지 않고(방해가 될까 봐) 가끔 귀를 대고 있기만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바이닐에서 나오고 있는 음악 소리가 커진다. 그 때문에 내가 안의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실 나는 그런 일이 모두 재미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이닐들은 마들렌처럼 여러 겹으로 구성된 내 책장들 사이에 꽂혀 있고, 그 광경은 나로 하여금 안정감을 들게 한다. 코르타사르의 공원에 가는 일은 문지기도 무엇도 없고 그저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 나는 창문을 열지 않은 채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이내 나는 코르타사르의 공원 안에 서 있지만(아직 켜지지 않은 대낮의 가로등이 보인다) 방 안은 점점 자욱한 연기로 차게 되어 바닥을 보면 그 연기들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만일 누가 방문을 열고 이곳으로 들어온다면 당장 쉴 수 있는 푹신한 쇼파에 가서 몸을 뉘기도 전에 자욱한 연기로 인해 기침을 하게 될 수 있다(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 혹은 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나처럼 귀를 문밖에서 대고 있을 수 있다. 물론 지금 해진 바이닐에서 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릴 것이다. 아쉽게도, 혹은 경이롭게도 내 방문 밖에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문지기가 없다. 따라서 이 방 안에 앉아 있는 나는 내 방 바깥의 문지기이기도 하다. 지금 문지기는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린다면 서둘러 옷을 입고 나가 이 방 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얘기를 나누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고 쟁반 위에 놓인 마들렌 과자와 그것을 찍어 먹을 수 있는 커피를 들고 오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이 저택 안에는 그런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아쉽게도 난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2021년 8월 24일 화요일

미니어처

거리에는 비가 있다. 비가 내린다. 나는 차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 내 손바닥으로 비가 오게 했다. 차는 멈춰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다시 움직였다. 차가 움직일 때에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지 않는다. 나는 차를 몰고 권투 클럽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약 30분 정도가 걸린다. 권투 클럽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권투 클럽 밖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미니어처로 된 이곳 풍경 밖으로 도시의 경관을 내려다보는 사람들 중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권투 클럽까지 차로 30분이 걸리지만 만약 바깥에 있는 사람들 중 마음씨 착한 사람이 내 차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권투 클럽 앞에 놓아준다면 거리는 영이 될 것이다. 거리는 영. 거리는 영. 나는 주문처럼 그 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이곳 도시에도 미니어처를 다루는 가게들이 있다. 이곳이 미니어처의 세상이니까 어쩌면 랜드마크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곳을 다니는 전철과 열차들은 모두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손끝에서 완성된 것이므로 뭐랄까 견고하며 더 품위가 있다. 불행하게도 정확한 재현을 위해 역사적인 모델 이름까지 그대로 새겨져 있으므로 제작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나 또한 만들어진 모형이다. 내 얼굴을 만드는 데는 몇 사람의 손이 거쳐 갔을까? 만들어진 나는 최후에 조립되었으며 그 점은 인간처럼 사고하고 웃을 줄 아는 기계 로봇들, 안드로이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안드로이드들이 서로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이곳 도시에서의 만남은 딱히 제한되어 있지 않다. 우리들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므로 산아 인구수 제한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후손은 전부 사람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초기 모델과 후기 모델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후손이 아닌 동료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물론 우리들의 얼굴은 인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 미니어처 도시 안에는 날씨까지 재현되어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도시에 있는 식물들은 전부 바깥세상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점이다. 이끼류를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그 크기가 아주 거대하다. 그것들은 바깥 인간들의 손으로 빚어낸 것들이 아니다. 바깥세상에서 돌보다가 관리되었고 씨가 추출되거나 묘가 파종되어 이곳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들이다. 바깥세상에서는 비 오는 데 이유가 없을지 모르나 이곳에서만큼은 그러한 식물들을 관리하기 위해 비를 뿌리는 것일지 모른다. 엄밀히 말해 이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왜나하면 우리들은 자신의 생김새 그대로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차를 몰고 권투 클럽으로 가고 있지만 차는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다. 내가 ‘거리는 영’이라고 주문처럼 중얼거린 이유가 그 때문이다. 우리들은 영화 속의 스틸컷처럼 그 순간 그대로의 인물들에 조형이 갖춰진 것이지 아직도 걸음걸이가 어색하나 그래도 꽤 잘 걷는 현세대의 인간형 주행 로봇과는 다르다. 그들이 과학적이라면 우리는 예술적이며, 그들이 이과에 가깝다면 우리들은 문과에 가깝다. 우리들은 심장이 없는 앙철 나무꾼과 비슷한 신세이고 그들은 새가 비웃는 허수아비와 비슷한 신세이다. 물론 우리들은 허수아비 신세들인 그들보다는 처지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떤 점에서 우리는 우리들을 만든 바깥의 사람들보다도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들은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노동은 동결되었다고나 할까. 노동을 구성하는 핵심에서 동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일하는 모습의 미니어처가 있다면 단지 겉보기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사실은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한 소리 듣고 있어도 우리는 상사에게 한 소리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로 우리들의 사진이나 그림, 비디오, 그리고 우리들의 실제 모습에는 원색적인 데가 있다. 우리들은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란 그런 것이다. 물론 우리들의 시선에는 시간의 경과가 느껴진다. 때때로 비가 오며, 외계의 식물들은 생장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시간의 경과는 우리들 중 아주 감이 좋은 이들이나 머리가 똑똑한 자들이 간신히 개념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바깥세계의 근본 원리에 가깝다. 우리들은 모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아마도 우리들과 다른 평행 세계에서는 점토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분사 마커로 색칠을 하는 것은 우리들의 제조에 있어서 막바지 작업인데, 우리들은 그 순간을, 마치 아이가 태어나서 우는 것처럼 최초의 색조가 그렇게 새겨진 기억을 사랑하는 편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랑의 개념이란 친숙하다. 우리들은 그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에서 사랑은 더 잘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안다. 우리들이 처지가 어떤 외계 사람의 열렬한 애호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는데, 사실 우리는 외계 사람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편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그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마치 진공 속에서 울려 퍼지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아, 참고로 나는 차창 너머로 옆모습이 비치도록 앉아 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든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