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0일 수요일

음모론 교정

언젠가 배우자님이 이런 아이디어를 냈던 적이 있다. 음모론 속에 ‘백신-허구’를 섞어 음모론이 음모론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교정하는 시리즈를 써보면 어떨까? 음모론의 문법으로 음모론을 해킹한다는 것이다. “백신을 맞은 뒤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정부의 주파수 조종을 예방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처럼. 아주 넓은 의미에서는 그런 것도 교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바른 모양으로 인쇄만 되면 그만’이다?

음모론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향한 픽션의 역류다. 다 그렇듯 메이저가 있고 마이너가 있다. 만약 우리가 진실로 음모론에 개입해야 한다면 누구나 쉽게 욕할 수 있는 마이너한 것보다는 그 뭔가를 함께 욕하고 있는 최대 다수가 신봉하는 메이저한 것에 대해서부터 개입하는 쪽이 더 끌리기 마련이다(‘多와 少’라는 긴장감으로부터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진실의 속성상 그렇다). 음모론을 중심에 두고 말해 보자. 픽션이란 ‘소화된’ 음모론이다. 어떤 음모론들이 문학화되지 못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뭔가를, 뭔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이렇게 막돼먹고 무책임할 리가 없다는 생각... 이 세계가 합리로써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합리가 독점 가능하다는 생각, 그런데 그 합리가 적들의 것이라는 생각... ‘적들’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재하는 적들. 음모론은 이해의 한계선에서 받아들일 수 없음이라는 밧줄을 붙잡고 미지로 뛰어내림이다. 미지의 적들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적들을 향해.

현시대 최고의 메이저 음모론을 꼽자면 단연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와 역사의 최후 형태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자본주의 얘기는 진짜 지겹다. 그리고 그 지겨움까지가 자본주의 음모론을 구성한다. 온당하게 말해, 이 자본주의라는 음모론은 이미 너무 예전에 파산했는데도 너무 오래 작동 중이라는 점에서, 또한 多와 少라는 개념 그 자체를 다루는 음모론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시대 음모론들을 자본주의의 빗나간 파훼로서 키우는 양분이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적극적으로 음모론들을 독려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음모의 현현인 지배층이다. 더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지배층은 음모론을 자동화·상설화·산업화하는 데 이르렀다. 한 번 더 공정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지배층들마저 자신들의 음모론에, 과대망상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 조잡스런 사실 조각만을 던져주며 그 파편들을 음모론의 형태로 갖고 놀도록 장려하는 피투성이 먹이 공급 장치를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고 들어앉은 셈이다.

좀 갑작스러운 것 같지만 사주팔자 얘기를 해보자. 한국에서 사주팔자가 유행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 어째 갈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그에 맞춰 AI들도 아주 대단한 사주쟁이들이 되어 가고 있다. 얼마만큼의 불안이 꾸준히 세대를 이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기술봉건주의의 신자유노예들에게 제공되어야만 하는 경험일 것이다. 시험 삼아 사주를 교정해 보면 어떨까? 적절한 자리를 주기 위해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사주는 [문학]이다. 그것은 ‘캐해생성’이라는 장르의 중세문학이다. “재미로만 보라”는 말이 그 뜻이며, “어? 이거 내 얘긴데”가 바로 그 뜻(문학)이다. 한편 사주의 본이 되는 주역은 [세계관집]이라는 장르의 고대문학이다. 따라서 주역, 오행, 사주, 풍수, 수상, 작명 등등으로 이어지는 이 극동아문학복합체는 일종의 TRPG 룰북으로 보면 정확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타로는 [상징학]이다. 착상 제공에 특화되어 있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미술비평]이다. 와꾸에 대한 판단이 와꾸의 의미를 만든다. 신점은 [비과학적 상담심리학]이다. 상담가가 과학무당이듯 그렇다. 그간 나는 “별자리 성격이 바로 [과학]”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 왔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아기로서 1년 동안 겪는 기후와의 상호작용이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아기를 키워 보니 역시 확신이 든다. 색깔을 구분하고 눈을 마주치고 옹알이를 하고 몸을 뒤집는 그 모든 정해진 발달단계와 계절이 무관할 리 없다! 물론 남반구의 경우 반대로 작동하며, 고위도나 저위도 지역의 경우에도 잘 맞지 않는다. ‘심리점성술(Psychological astrology)’로도 불리는 이 별자리 성격이 70년대부터 태동했다는 것으로 보아 냉난방 사정이 달라진 요즘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고, 기후에 대한 문화권별 계층별 상호작용 방식에서 기인하는 차이도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나? 거기다 기후위기까지 고려하면... 그러니까 애초에 행성들의 위치 같은 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아다리가 맞은 것뿐. 물론 농담이다.

지금은 가장 핫한 음모론은 부정선거다. 자본주의 위기 가운데 민주주의는 위협당한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한 명의 인간 키워내기를 수없이 실패시키면서부터다. 부정선거 음모론의 밑에는 자본주의-실패에 대한 공포감이 자리한다. 그게 민주주의든 중공이든 가정이든 하나님이든 인생이든 뭐든... 그런 면에서 사주팔자와 별반 다르지도 않다. 위정자들과 자본가들이 점술이나 종교에 자꾸 기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여러 형태의 ‘뽕맛’ 산업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황과 최근 이룩된 다중-대량-소통 환경에서 피해망상과 편집증, 증오가 증폭·집단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중-대량-소통을 일으키고 그것을 다루어야만 했던 어떤 역사적 운동이 안 그랬냐마는, 현대의 특징은 방향이 반대라는 점, 즉 대중의 주된 경험 세계를 다중-대량-소통 자체가 대체하려 든다는 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첫째로, ‘믿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신화적 금언이 악몽판으로 도래한다. 집단은 믿음당하는 바로 그것이 된다.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서로가 서로를 만져주고 만들어주면서다. 극우파가 되고 공산당이 된다. 부정선거나 전체주의 같은 것도? 서로의 한마디에 대해 한마디를 더하면서, 서로로부터 벽돌을 하나씩 빼주면서 와르르 도래한다. 일테면 부정한 것과 부실한 것을 서로가 구분하지 않게 되면서다. 부실하기 때문에 부정하고,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실하지 않다. 부정하다고 하기 때문에 부실함은 눈감고, 부정하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부실함은 눈감는다. 각자에게 가장 유리한 뭔가를 눈에 불을 켜 찾아내고 집요하게 편집한다. 누군가 뭔가를, 어쩌면 자신을 제발 좀 해쳐주기를, 간절히 은연히 여럿이 바라면서다. 자유주의자가 파시스트 되고 리버럴리스트가 전체주의자 된다. 다름 아닌 적들을 위해서, 적들에 대한 증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면서다. 자신들이 무엇이 되는지는 아무 상관 없이, ‘스스로 완전히 정당하게’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는 둘째로, 모든 진실한 것의 실체인 표현 불가능성이 크게 위협받는다. 진실은 속성상 신비로운 것이다. 아직 표현되지 않은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신비다. 신비는 즉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뭔가, 표현으로부터 소외된 뭔가다. 많은 것이 적은 것 되고 적은 것이 많은 것 되도록 이끄는, 이 신비는 오늘날 억압당한다. 강제된 침묵이나 마찬가지인 너무 많은 말들 속에서다. 아무것도 ‘되질’ 않는다. 나쁜 일들만, 가장 다행인 경우라도 쓸데없는 일들만 일어난다. 문학은 표현으로부터의 소외를 공전하며 진실을 양각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반면, 읽기의 총체적 실패인 음모론은 운명을 독점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우스움을 향해 대가리부터 돌진한다. 망상적 진지함으로, 자포자기의 도박 유희로, 둘의 뒤섞임으로. 과연 우리가 어떤 백신-허구를 투입할 수 있을까? 증오에 대한 이 뜨거운 사랑을 버릴 수 있을까? 거짓으로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진실은 거짓을 이기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극우파의 지구적 대두는 진정한 행성사회주의 도래를 앞당기려는 자연의 설계이고 공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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