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7일 토요일

신발을 끄는 녀석들이 있다

우리는 집중을 요하는 종류의 노동을 한다. 우리의 일에는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대화는 방해에 더 가깝다. 키보드와 마우스, 프린터, 어쩔 수 없는 전화통화 소리 등을 제외하면 사무실은 조용하다. 말 시키지 마세요... 그런데 이 조용한 일터에서 신경을 매우 거슬리게 하는 소리를 내는 딱 세 사람이 있다. 오갈 때마다 슬리퍼를 끌며 귀를 긁어놓는 그 셋,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관리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신기할 정도로 그 셋만 한 사람처럼, 지금 이 소리를 잘 들어 두라는 듯,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다,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 두라는 듯 군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과 우리는 나이로도 성별로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관리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인가? 그저 발이 무거운 사람들이 우연히 관리자가 된 걸까? 아니면 발이 무거운 종류의 사람만이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걸까? 발의 무거움과 관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성향 사이에 어떤 유전자적 연관이 있는 걸까?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움직임을 알리기 위함일까? ‘발 끌기’는 필요에 따른 관리 업무의 일환일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수긍할 수도 없다.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힘에 맞설 힘... 일테면 그들이 무릎을 더 높게 들도록 만들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어떻게? 칙 칙 칙 칙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한 문장씩 떠올려 나는 다음과 같이 쓴다...

어쩌면 이 신비에는 보다 미묘한 역학이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실체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신발을 끄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만 ‘눈치를 보는 이들’만이 관리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발을 끌지 않는 거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끌지 않는 묵약이 우리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게 아니라, 혐오스런 녀석들과 스스로 구분되기 위해, 혐오스러움을 양각하기 위해? 이런 상태는 작지만 고약한 불행이다. 우리에게나 그들에게나 그렇다. ‘나한테 일 시키는 사람’이 무조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좀 움직일 방도가 필요하다. 그게 내가 느끼는 사태다. 괜찮은 일터를 위해서다. 내가 여기에 몇 시간을 있는데... 괜찮은 일터라는 건 뭔가? 임금, 노동 강도, 노동 시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참여가능성으로 나는 정리하고 싶다. 일이라는 총체와 나 사이의 관계가 종합적으로 수긍할 만한가? 나의 수긍 여부가 일터의 요소들 중 하나로 주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가? 너와 내가 어떤 직무와 직급을 맡고 있더라도? 너와 내가 어떤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관리자들의 신발 끌기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있건 우리에게 있건 그렇다. 나의 이 의견은 적어도 그들의 보행 습속의 지속보다 주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터에 참여해야 한다... 일터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나의 정신을 좀먹는... 일터는... (칙 칙 칙...)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잘못만으로 둘 수는 없다. 그들이 잘못을 독점하게 둘 수가 없다. 관리자들도 일터의 동료다. 동료가 아니라면 동료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어떤... 지금 무슨 방도가 있지? 공공에 호소? 디지털대자보 같은 것을 쓴다...? 관리자... 신발끌기... 철폐? 캠페인...? 킹론화(인민머법원)는 우리의 최종심급이다. 이 사안에서 그럴 수는 없다. 그 바로 밑의 하급심은 아마 노조를 통한 협상과 쟁의, 또는 어떤 종류의 법적인 신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큰일이다.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정도라면 그 아래에 뭔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가장 낮은 단계로 가보면? 일터에서의 잡담이나 한숨, 우정보다는 가벼운? 동료애? 같은 것들일까? 어쩌면 신발을 끄는 녀석들에 대한 뒷담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속은 좀 시원해질지 몰라도 녀석들이 신발을 그만 끌게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가장 위와 가장 아래 사이가 비어 있다. 일터를 위한 규약이랄지 구조랄지 뭐라 할지... 진실로 필요한 바로 그 부분이 비어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비어 있음이 위아래로 문제를 뻗치며 위아래로도 문제를 만들고 있다. 적어도 여기서는 그렇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평등한(즉 상향식) 의사 표현 구조일 것이다. 그래, 분별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양식이. 회의 시간? 하지만 그걸로 정말 되나? 아닌데... 회의는 고통인데... 건의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평등한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건 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두 말높임/말낮춤 같은 소리는 말고, 또 개개인들의 능력으로 치환되지 않도록 하면서...

의사소통이 평등하려면 실제로 평등해야 한다. 그렇담 ‘실제로 평등’이라는 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실제로 평등해질까?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힘이 나눠져야 한다. 어떻게 힘을 나눌 수 있나? 진실로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임금 평탄화다... 직무 순환이다... 선출 대표다... 그거면 되나? 그 정도면? 하지만 사내에서만 그래서는 곤란에 빠진다. 그것은 전염되어야 한다. 평등은... 사내와 사외의 경계는 더 흐려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악의 버전과 최선의 버전이 동시에 존재한다. 경계의 흐려짐도 그렇다. 발을 끈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관리자들이 신발 끄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외주 교정자가 되어야 하나? 고치려면... 이걸 고치려면... 우리는 이미 곤란에 빠져 있다. 진실로 고쳐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들의 바로 위와 아래에, 앞에, 뒤에 있다... 무릎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건 더 높이 들게 만드는 힘이건 힘이 구성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면? 아니면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좀 뜬금없지만, 노인성 질환으로 발을 끌던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지금 납골당에 계시고... 명절 때가 되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칸칸이 들어찬 함들 앞에 서려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 다 관계가 있어... 나 교정공이 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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