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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3일 화요일

장갑

그리고 스피커는 다시 얼음광산에 있다. 루틀리지는 죽었지. 게친도 죽었어. 그는 이제 낡고 헐거운 장갑을 손목 위로 끌어당긴다. 루틀리지가 만들어 준 장갑. 이 장갑을 끼고 있는 한, 스피커의 모든 주술적 역량은 0이 된다. 그가 들은 소리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장갑을 벗어야만 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 몇 초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뜻이었다. 그 몇 초는 제법 길게 느껴졌고 종종 중요하게 작용했다. 스피커는 사형수에게 물었다. “살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형수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순간이 종종 있죠. 내게도 몇 번 그런 순간이 있었고요.”

스피커는 편지를 잘 접어 허리춤에 달린 복대에 넣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후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사후세계에서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사후세계에 있는 동안 분노와 억울함 같은 게 사그라들어서, 자신을 죽인 당신을 용서하거나 못 본 척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통은 그렇지 않고, 당신이 죽인 사람은 사후세계의 입구에서 당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과거를 잊어도, 과거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는 격언을 알 겁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인 거죠. 그런데 죽은 사람이 죽은 당신을 한 번 더 죽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나도 몰라요. 주술사들은 사후세계에 가면 그곳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이곳 지상으로 전달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일만 명이 넘는 주술사가 죽는 동안, 그곳에 대해 알게 된 정보라고는 그곳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스피커는 속으로,

게친은 아주 강했다. 게친은 공간을 당기거나 밀칠 수 있었어. 그건 게친에게 있던 사후세계 물건 중 하나의 힘이었지. 그래서 게친은 사후세계에 가서, 그 물건을 잔뜩 모은 다음 사후세계와 지상의 거리를 당기겠노라고 했어. 거기와 여기를 볼 수 있어야, 오갈 수 있어야 사람들이 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이 세계를 좋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러나 게친이 죽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세상은 얼음이 되었고 사후세계는커녕 사후세계에서 보내오는 신호조차 한참 전에 끊겨버리고 말았다. 주술사 학살도 있었지. 몇 명이 남았는가? 아무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걸 얘기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사형수가 물었다.

스피커는 대답했다.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 해서요. 아마 광산장을 죽여야 할 것 같아요.” “왜요?” “그는 내가 누군지 알아요.” “그럼 사후세계의 광산장이 당신을 죽일 것 아닙니까?” “괜찮아요. 한참 뒤일 테니까.”

그리고 스피커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무언가 해내려면, 이 편지에 적힌 것처럼 내가 하게 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야 죽게 될 거야. 과정은 몰라도, 어쨌든 내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 사후세계도 무엇인가 점유하고 있는 물질된 공간이라는 것을 게친을 만났을 때 알게 되었으니까. 그곳은 관념이 아니며, 나는 언제나 마지막이니까.

사후세계까지 한참 걸린다는 사실을 예상해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스피커에게 내려진 저주의 좋은 점이었다.

2021년 1월 16일 토요일

까마귀

스피커는 호흡을 가다듬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자신의 경험으로, 힘을 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우발적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게친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마침 어디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잘 됐다’고 스피커는 생각했다. 스피커의 손바닥이 하늘로 향했다. 스피커가 손을 움켜쥐자, 천천히 움켜쥔 손으로부터 붉고 찐득한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른 한 손이 오그라들었다. ‘아차.’ 작고 약한 새알을 터뜨린 듯이, 스피커의 손으로부터 붉은 것이 터져 나왔다. 끈적거리는 방울진 것이 게친의 로브에 튀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까마귀 두 마리가 시차를 두고 떨어졌다.

게친은 그것을 심각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어쩐지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스피커는 오므린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리고 기이한 일이 일어났는데, 게친이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허공을 당기자 스피커의 손이 앞으로 당겨져 게친에게 내보여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피칠갑을 한 손을 보며 게친이 물었다.

들은 소리로 죽일 수 있다고 스피커가 말했다.

다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는 않았구나.

누구를요?

모든 사람을.

게친은 스피커의 손을 이끌어 까마귀가 떨어진 곳으로 갔다. 둘은 작은 구멍을 파 까마귀를 묻고 돌로 덮었다. 게친이 또다시 허공을, 왼손이 밀고, 오른손은 당기자 스피커는 흙 묻은 손을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네게는 장갑이 필요하겠어.

다음 날, 게친은 루틀리지를 데리고 왔다.

2020년 11월 9일 월요일

시녤펜

게친은 스피커에게 읽어주었다. 동화책을 읽듯이.

강령0  가능한 모두를 구한다.

강령1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구한다.

강령2  현실세계에서 사후세계를 가꾸어 놓는다.

강령3  더 이상 세계가 나아지지 않을 때까지 세계를 낫게 만든다.

강령4  신을 찾아낸다.

강령5  오래 살아 되도록 많은 일을 한다.

“모를 소리뿐이에요.” 스피커는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저 문장들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전부 말 그대로의 의미야.” 게친이 말했다. “지금은 모르겠지. 내가 그랬듯. 하지만 알고 있으면, 하고자 하면 자라나듯이 알게 될 거야. 알아내는 것은 도무지 제각각의 몫이라, 내가 네게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여기 쓰인 모든 것이 얼토당토않은 별세계 얘기가 아니란 것. 우리들의 활동으로 증명되고 있어. 아주 느리고 미약하지만, 우리는 꾸준히 가까워지고 있어.” 그리고 게친은 강령이 쓰인 종이를 스피커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주는 거야. 좋은 종이란다. 치명적인 손상은 입지 않도록 만들어졌어. 시녤펜이라는 주술사가 했단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함께하는 한편 모든 것을 제각기 해내. 제각기 해낸 걸 세계가 수렴케 해서, 점점 더 모두의 시야에 들어오게끔 하는 거야. 이제 네가 가진 주술이 뭔지 보고 싶구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눈 다음 네가 마을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보자.” 

스피커는 끄덕였다.

2020년 10월 18일 일요일

게친

그 주술사는 스피커의 어머니뻘 되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목맬 태세를 늦추지 않는 스피커와 거리를 좀 두고 서서, 주술사는 스피커에게 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죽을 필요가 없다?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술사가 손등을 내보이며 다가왔다. 스피커는 밧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주술사의 손등은 화상과 자상과 검은 멍이 수두룩했고 손목을 지나 팔까지 이어져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온갖 상흔들이 팔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도 있었다. 이내 자신을 괴롭힌 제약의 존재가 떠오르며,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어떤 것을 겪은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상하게도, 스피커는 마음 한켠에 감당하기 어려운 아련한 감정이 북받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끌어올려져 이제 그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처음 만나며 샘솟은 감정으로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연민이었다. 연민을 얻게 되면서 스피커는 천천히 다가오는 저 사람 또한 지금 자신을 연민하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충격에, 또는 눈알이 쏟아질 것 같아서, 스피커는 악 악 소리를 지르며 그를 등지고 도망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참혹한 팔이 다가왔고 거기 달린 손이 스피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주술사의 이름은 게친이었다. 게친은 스피커를 둘러싸고 있는 힘과 그 역인 주술과 제약을, 주술사들의 커뮤니티를, 그들의 강령을 말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처음의 말, 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증명하고자 했다.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야. 게친은 입고 있던 자색 로브의 안주머니에서 이상한 물건을 하나 꺼냈다. 그것을 무어라 말할지? 스피커는 그가 꺼낸 물건을 곧잘 해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에 꽃줄기처럼 몸이 가늘었다. 그것의 온몸은 검은색으로 광택이 났다. 게친이 그것의 툭 튀어나온 엉덩이를 누르자 그것의 주둥이에서 금색 창날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게친이 그 창날을 손에 찌르자 손에 새까만 피가 찍혔다. 게친은 그 새까만 피로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게친은 말했다. 이것은 사후세계의 물건이다. 사후세계? 게친은 자신이 사후세계의 물건을 가져올 수 있는 주술사라고 말했다. 그것이 내 주술이다. 잘 모르겠어도 사후세계라는 말을 듣자, 스피커는 죽을 의욕이 뚝 떨어졌음을 느꼈다.

스피커도 알기는 안다. 어느 민족에게나 죽은 다음의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떠난 마을에서 종교서적을 주워 읽기도 했다. 쓰여있기로 사후세계는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 가려면 삯을 지불해야만 한다. 입장권을 사려면 충분한 양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거기 가려면 아주 오래 아프고 그 아픔이 낫지 않아야 한다. 거기 가려면 허덕여야 한다. 그래야 거기서 행복한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스피커는 믿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상의 어떤 것들, 슬픔과 외로움 괴로움 같은 것은 겪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인간은 고통을 반겨야 한다. 반기다 반기다 더 달라고, 더 내놓으라고 죽어버릴 때까지 애걸복걸해야 한다! 그것은 나어린 스피커가 보기에도 참 역겨운 일이다. 스피커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게친이 사후세계의 물건을 내보이며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게친은 말했다. 사후세계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잖니. 얼른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스피커는 반문했다. 그럼 사람들이 죽는 건,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좋은 점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들, 안감이 뾰족한 쇠꼬챙이로 되어 있는 옷을 입고 있는 듯 깨어있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죽는 거, 제 풀에 죽고 싶은 사람들, 어쩌면 나와 당신이 그곳에 가는 거. 그거야말로 좋은 일 아닌가? 게친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곳은 이곳보다 좋지 않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여기보다 나쁜 곳에 가기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네가 말한 사람들 또한 죽을 필요 없다. 살란 얘기가 아니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죽지 말라는 얘기다. 아직은.

2020년 10월 8일 목요일

스피커

스피커는 종이를 한참 들고 여러 번 읽었다. 그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스피커는 어떤 위대한 목적 때문에 광산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주술사 공동체에 몸담고 있었고, 그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벌써 그 일의 실행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제약이 너무나 괴롭고 피곤한 것이어서 의지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위해 실천하는 일 같은 것은 평생 불가능하리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제약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자신은 언제나 마지막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의 삶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제약에서 뜻하는 장소라 함은 예컨대 고유한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가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제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스피커는 아무 생각 없이 잡화점에 들어갔다가 다음 날 주인 내외가 모두 죽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주인의 안부를 살피러 들어간 이웃도 다음 날 죽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마을 사람 다섯 명이 죽었다. 그가 태어난 이래 나가는 사람만 있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주민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 주술과 제약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에 의해 스피커는 지목됐다. 주민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내쫓으려고 하였으나 내쫓긴 곳에서 사람이 죽어 나올 것이므로 내쫓을 수가 없었다. 스피커는 고립되었다. 한편 주민들은 스피커가 가진 주술에 기대를 걸었다. 유식한 사람은 말했다. 제약이 강력할수록 주술의 힘도 강력하다고. 주민들은 스피커의 손에서 토실토실한 암망아지가 히힝 하고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피커가 제약의 대가로 얻은 주술은 역시 위험한 것이어서, 주민들은 이제 그를 진짜 악마로 여기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하나둘씩 다른 마을로 떠났고 그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는 부모도 그를 떠났다. 스피커가 머무는 장소에는 방문자도 재방문자도 영원히 없고 억지로 가려고 하면 그다음 오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 그것이 그의 제약이었다. 그는 주민들이 남기고 간 것들로 연명했다. 몇 년이 지나자 남은 것이 없었다.

잡화점에서 조악한 지도 몇 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제약을 이해하고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근방의 지명을 샅샅이 외웠다. 스피커는 이름 없는 길이나 절벽, 숲만을 골라 돌아다녔다. 마을 근방을 서성이기도 했지만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만 스피커는 멀찍이에서 마을이 내뿜고 있을 활기를, 그들이 누리고 있을 웃음이나 마음 같은 것들을 상상으로 헤아려 볼 따름이었다. 

스피커는 그가 걷는 길들에 이름이 붙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피커는 거지처럼 길과 길을 떠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구했다. 마을을 떠난 주민들에 의해 스피커의 이야기가 퍼졌다. 스피커는 돌팔매를 맞거나 기껏 얻은 것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주술사 하나가 그를 만나러 왔을 때 그는 열세 살이었다. 스피커가 목을 매달기 직전이었고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이기 전이었다.

2020년 6월 11일 목요일

사형수는 스피커에게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가져다 주었다. 만져보니 익히 아는 종이였다. 시녤펜이 만든 거야. 반가움이 살짝 일었다. 스피커는 천천히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가 알게 된 것을 자네에게 알려주어야만 해.
자네가 누구인지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만.

내가 알아낸 것은 우리가 찾아 헤매던 신이 이곳 광산에 있었단 거야.
불분명하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에 불과하니까.

신이 친절하다는 것을 미리 말할게. 신은 뭇 인간보다 잘 듣는 존재이며 뭇 인간보다 인간을 좋아해. 그래서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준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가 무시한 세계의 법칙은 우리에게로 온다. 우리 주술사들이 대속하는 것은 바로 신이 행하는 기적만큼의 불합리야. 저주라고도 하고 제약이라고도 하는 그거 있잖아, 우리를 죽고 싶게 만드는.

그리고 신은 언제나 99년 전에 있어.

신이 언제나 99년 전에 있기 때문에, 신이 언제나 우리의 뒤에 있기 때문에 그에게 소원을 빌면 99년 뒤에 이루어진다. 신이 여기 오는 데 99년이 걸리는 거야. 알겠지. 초목이 얼음으로 뒤덮이고 대지가 얼어붙어 우리 인간들이 이곳 학살지 시체 매장지에서 나오는 사람 고기로 연명하게 된 것은 언젠가의 99년 전에 누가 빌었던 소원 때문인 거야. 그것은 신의 잘못이 아니야. 따져보면 우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떤 사람이, 세계가 다 얼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대지가 땅이 인간에게 먹을 것을 쉴 곳을 제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야. 어떤 이유에서건 그를 탓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잘 공헌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야 돼. 수습하는 수밖에 없어. 손 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겠어? 나도 먹었고 자네도 먹었겠지만, 학살 피해자를 식량 삼는 일을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는 없어.

신은 소라게의 모습을 하고 있어. 밟아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은 소라게. 그것은 내가 옛 나라의 어떤 노인에게서 들었던 거야. 그가 지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 노인은 그가 지고 다니는 소라에 희끄무레한 오각별 하나가 그려져 있노라고 말해주었지. 자네가 할 일은 그를 찾아내는 거야. 어떻게든 신과 우리 사이에 있는 시간을 좁혀서. 신을 찾아. 99년 뒤에 이루어질 소원을 빌어. 다시 되돌려. 모든 것은 자네의 역량에 달렸어. 왜냐하면 자네는 분명 마지막으로 올 사람일 테니까.

2020년 4월 19일 일요일

짚이지 않는 사람

“길을 잘 외워둬야 해요. 파이프 구간은 이제 끝나요. 깊어진다 싶으면 뭐라도 주워서 새겨놓으세요. 아무튼 많은 것을 숙지해두세요. 죽을 때까지는 살게 되니까요.” 사형수를 따라가며 스피커는 조심스레 물었다. “인부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사형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글쎄, 유형지니까 죄만큼, 사건만큼은 있겠죠.”

사형수가 주술을 걸어주었다. 스피커는 다시금 더워진 몸으로 사형수와 함께 걸었다. 간단한 만큼 효력은 짧았다. 주술이 소용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 몸을 덥힐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물어볼까 했으나 어쩐지 꺼려졌다. 둘은 꽤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앞장 서 걷던 사형수가 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5분 정도를 걸어가자 바닥에서 미세하게 다른 소리가 났다. 사형수가 곡괭이를 휘두르자 죽은 사람의 팔이 드러났고 이내 서넛의 시체가 얼음에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사형수는 곡괭이와 얼음 송곳으로 고고학자처럼 시체를 파냈다. 스피커는 곧잘 따라 했다. 시체가 가진 옷과 물품은 폭이 깊은 대야에 담았다. 유품은 광산장의 소관이었다. 

둘은 갓 캐낸 시체로 고기 빙수를 만들어 먹었다. “당신 맞지요?” 어느새 사형수가 스피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 “마지막에 올 사람.” “뭐라고요?” “생각보다 아주 젊네요.” “마지막으로 올 사람이라고요?” ”누가 내게 부탁하고 갔어요. 당신을 도우라고요.” “누가 말입니까?” “형장에서 만난 사람이요.” 스피커는 들은 바가 없었다. “당신이 확실하네요.” 확신이 서지 않아서, 스피커는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온다는 게 무슨 얘기죠?” 사형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술사에게는 어떤 저주 같은 것, 세계가 강제하는 고집 같은 것이 있다고 들었어요. 제약이라고 한다죠. 개중 한 사람은 어디로 가든 반드시 마지막에 도달해야 한다는 제약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그 사람이 도착한다면 거긴 절대 누구도 새로 올 수 없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는 미움받는다고 들었지요. 새로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곧 쇠락이니까.” 누가 그렇게 떠벌린 거냐고, 스피커가 물었다. “당신은 그를 모를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말하지 않으렵니다.”

스피커에게는 짚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들, 예컨대 강령은 사형수가 전한 말을 있을법한 일로 생각하게끔 했다. “내가 맞아요.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사형수는 축축한 손을 입에 넣고 후벼대다가 대답했다. “여기엔 죽어나는 사람이 많지요. 그리고 나는 죽여봤고요.”

2020년 3월 12일 목요일

사형수

갈림길 여럿을 지나고 나자 제법 큼지막한 공간이 나왔다. 

“여기가 출구와 가장 가까운 쉼터지.” 바닥에 조잡한 짐승 가죽 몇 장이 대충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흙밥처럼 꾀죄죄한 남자가 드러누워 있었다. 광산장이 그의 두 뺨을 연거푸 때려 갈기지 않았다면 스피커는 그를 시체라 여겼을 것이다. 남자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모아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는 천천히 키 작은 몸을 일으키고서는 스피커를 올려다보고 한마디 했다. “형을 살러 온 사람 같지 않구려.”

광산장은 그를 사형수라고 불렀다. 사형수는 맞은 뺨을 긁적이더니 입을 죽 찢어 웃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반쯤 뜨고 감은 그의 눈이 스피커를 보았다. 그의 목 둘레를 타고 둥글게 이어진 검푸른 피멍이 보였다. 그것은 꼭 목 매달기 위한 밧줄 자국 같았다. “이 친구는 자원해서 여기 왔어. 살인죄로 여기 온 너와는 다르지.” 사형수가 입을 길게 벌렸다. “자원했다고요?” 그리고는 잠깐 웃었다. “가끔 오지요. 도둑놈들 말입니다. 포대에서 감자를 찾듯 얼어 죽은 몸을 뒤적이고는 하죠. 하지만 뭐든 가지고 나가는 사람을 못 봤어요. 여긴 넓고 시체도 많으니까.”

광산장은 사형수가 오래된 사람이라고 했다. 광부 중에서는 나이가 제일 많다고. 그에게는 몸을 덥히는 주술이 소용없다고 했다. 광산장은 규칙 비슷한 것을 몇 가지 일러주고는 증발하듯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스피커는 조금 당황해서 사형수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사형수는 아래로 가는 얼음계단을 걷고 있었다. 여전히 찢어진 듯 이죽거리며.

2018년 11월 8일 목요일

광산장

“이렇게 큰 구덩이를 어떻게 팠는지 궁금하지 않아?” 

광산장은 스피커에게 로프를 쥐여주었다. 둘은 벽에 붙은 파이프에 갈고리를 걸고 몸에 줄을 감았다. “광부마다 의견이 다 달라. 거인을 부렸을 거라고도 하고, 포악한 옛 마술이 그 흔적을 남긴 거라고도 하는데, 글쎄. 정확한 건 아무도 몰라.” 둘은 미끄러지듯 얼음계단을 내려갔다. 멈추고 싶을 땐 신발에 달린 뾰족한 징을 바닥에 처박으면 됐다. “여하튼 여긴 사람을 묻는 장소였어. 왕인지 괴물인지 몰라도 엄청나게 많이 묻었는데, 고맙다고 해야겠지. 여기가 아니었다면 대부분은 굶어 죽었을 테니까.” “거부감은 없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시체를 광물인 양 파낸다는 거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꽁꽁 언 시체를 먹기 위해 파낸다는 거 말입니다.” 광산장이 소리 내 웃었다. “아, 전혀! 오히려 희열을 느끼지.” “왜요?” “여긴 원래 우리 땅이 아니었으니까.

광산은 싸늘하고 단조로웠다. 감상할 만한 것은 없었다. 갈림길마다 갈림길이 있었고 갈림길로 들어서면 또다시 갈라졌다. 광산장은 광산의 식생활에 대해, 냉동육의 맛과 조리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스피커는 언제 작업을 시작하게 될지 궁금했다. 다른 인부들은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내려가도 보이지 않았다. “명심해. 작업할 때는 반드시 두 명이 함께 움직여야 해. 효율을 따지거나, 협업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야. 언제나 서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 광산장은 입구에서 걸었던 주술을 다시 걸어주었다. 스피커는 한 번 더 온기를 느꼈고, 그 정도는 알고 왔다고 대답했다. “이 주술은 남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 자칫하면 인부들이 자넬 맛있게 먹을 수도 있어.” “얼어 죽은 인부가 실제로 있습니까? 광산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몸을 덥히는 주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눠줄 수 있는 주술이라니 흔치 않군. 누가 가진 주술일까, 이 광산장일까? 하지만 정말 좋은 주술이야. 모두가 추위로 곤혹을 치르고 있으니까. 여기가 바깥보다 훨씬 더 춥지만.

“난 누구와 조를 이룹니까?”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광산장은 털주머니 속에서 광선 다발 중 하나를 꺼내 스피커에게 주었다. 스피커는 그것을 목에 둘렀다. 얼음 갱도의 깊은 곳은 심해처럼 어둡다고 했다.

2018년 11월 7일 수요일

빙터(바리에테에서 독립)

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이미 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연대체-주술사들의 이야기입니다. 태그:바리에테에서 떨어져 나오며 제목을 다시 붙이고 내용을 정비했습니다. 오직 곡물창고에서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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