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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5일 수요일

개, 오각별, 수도원 ❶

이 작은 수도원에는 비옥하고 기름진, 무기질의 영양소가 풍부하게 섞인 넓은 농지가 딸려 있었다. 농지는 수도원을 한 바퀴 두르며 지나가는 작은 강과 맞닿아 있었고, 배수가 원활한 덕에 어떤 작물이든 기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땅을 섬기는 마음과 신을 섬기는 마음이 크게 다를 수 있을까? <포도장 수도원>의 수사들은 사랑과 노력을 합치시킬 줄 알았다. 그들은 기도와 노동이 같은 종류의 일임을, 감사에 할애하는 시간과 밭일에 할애하는 시간이 같은 종류의 것임을 온몸으로 이해했으며, 이해를 오롯이 실천할 줄 알았다. 농사는 언제나 가장 좋다고 생각될 정도의 결실을 맺었고, 다음 해면 그보다 좋은 결실을 맺었다. 가장 좋은 포도로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법. 포도장 수도원은 해마다 가장 좋은 와인을 만들어 보관했으며 좋은 값에 팔렸고 좋은 사람들에게 선물됐다. 

포도꽃 여무는 여름을 지나 계절 내내 불어올 서풍에 옷깃 여밀 때가 오면, 화답하듯 검게 익은 장과는 통통한 수사들의 복스러운 입꼬리를 치근대며 간질였다. 철별과 짐승 신, 왜가리, 여우, 패각 신, 그리고 루스 말라와 같은 초월자들의 존재가 드러난 지금에 와서는, 인간을 사랑하는 신에 대한 논의가 짓무른 포도알처럼 끈적거리는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이들의 믿음을 존중하지 않지만, 수사들은 저 초월자들을 밀어 움직인 단 하나의 시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삶이 준거였고 자연이 간증이었다. 따라서 자연은 초자연이었다.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는.


*


소렌샤는 눈을 떴다. 잠을 잃은 지 일 년째 되는 날이었다. 불 꺼지지 않는 삶 속에서 소렌샤는 매 날 매 밤을 온전한 정신으로 혼절하고 있었다. 완전히 피로한 소렌샤, 밀빛 머리칼을 가진 오각별 마술사 소렌샤는 일그러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침방에 스미는 빛과 눅눅한 공기가 정오를 일러주었다. 왜 아무도 짖지 않았지? 뭉툭한 벽돌로 뇌를 후비는 듯한 격통. 신음하며 침실을 나왔어도 수도원은 텅 비어 있었다. 개들, 내 개들. 그녀의 벗, 친구, 부하, 남편인 개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반란이 일어났거나, 마술이 힘을 잃었거나, 침입자가 있거나. 네 번째 가능성이 있을 수도, 내가 이미 죽었다는. 히죽이고 나니 두통이 심해졌다.


*


수도원에 도착한 고더린은 밭부터 살폈다. 고르게 자라지 못한 묘목들이 꺾인 허리로 죽어 있고, 시체를 내놓으라는 듯 녹갈색 잡초들이 손을 뻗고 있었다. 고더린은 길게 신음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는데, 오는 길에 마주한 대부분의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황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고더린 또한 약탈을 행해본 적이 있다. 타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스럽지 않아 놀랐던 기억. 고더린은 칼칼한 목을 더듬으며 침을 퉤 뱉고 몸을 일으켰다. 수사들의 행방도 행방이지만, 진짜 문제는 포도주가 남아있느냐는 거였다.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바심을 참기 어려웠다.

‘저게 뭐지?’ 문득 고개를 들어올리자 수도원 지붕에 걸쳐진 넓고 긴 천이 휘날리고 있었다. 끝면의 팔랑이는 움직임을 따라가듯 고더린은 천을 중심으로 한 바퀴 빙 돌아 걸었다. 제대로 보니 그것은 낡고 우울한 보라색 휘장이었다. 그것은 마술사가 <여기 마술사가 머물고 있다>를 알리는 신호였다. 휘장 가운데 새겨진, 자수로 된 별의 갯수는 머물고 있는 마술사의 힘의 수준을 나타냈다. 자수 별은 새하얗게 네 개가 놓여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강렬한 붉은색이었다. 오각별?

"컹!" 어디선가 개들이 달려들었다. 별에 정신 팔린 고더린의 반응이 늦었다. 개들은 용감하게 몸을 부딪쳐 고더린을 자빠뜨렸다. 올라타서는 입이 닿을 정도로 가까움에도, 뚫고 지나가겠다는 것처럼 아래로 아래로 코를 들이밀고 있었다.

북슬한 털, 펄럭이는 귀, 쳐들고 내리 까는 발들이 투구를 치면서 지나가니 정신이 사나웠다. 하나뿐인 손으로 주먹을 휘두르자 개들은 오히려 좋아라 했다. 개들은 맞으면서도 몸을 핥고 코를 들이밀면서 외팔이 포도 기사를 반겼다.

“휘익!” 찌르는 듯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몸을 물린 개들이 소렌샤의 몸 뒤로 일제히 모였다. 그녀가 몇 걸음 걷자 고더린의 머리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소렌샤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전장을 놓고 보면, 그곳에서 그렇다고 여겨지던 것들은 대개 어디서든 그렇다고 여길 수 있었다. 강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인간은 발휘할 수 있는 폭력의 강도만큼의 광기를 가지고 있다. 오각별을 수놓았다는 것은 이 여자가 미쳤으며 아주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단숨에 나를 세상에서 지워낼 수 있어. 남아있는 팔과 다리를 잘라 몸만 남은 기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지. 아마도.

시선을 땅에 붙박은 고더린이 답지 않게 다리를 떨던 찰나였다. 고운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거리는 자주색 장치마 아래로 살짝 드러나보이는 소렌샤의 맨발은 거무칙칙한 땅과 다르게 하얗고 깨끗했으며 앙증맞게 작았다. 고더린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소렌샤는 조용히 미소 지어 보였다. 소렌샤는 미인이었다. 떨림이 역설적으로 멈추고 나니 일어서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고더린은 소렌샤의 다뜻한 손을 잡고 거뜬하게 일어선 다음, 투구를 벗고 가볍게 목례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개들이 참 듬직합니다.”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개들이 고더린 주위로 몰려들었다. 지금 보니 일곱 마리나 됐다. 그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개들을 외팔로 쓰다듬으면서 곧잘 짓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숨길 수 없는 범박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웃음. 소렌샤는 “그렇죠?”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좀 해줄래요?”

미인의 얼굴이 꺼진 빛처럼 급격히 어두워졌다.


*


“뭐가 됐든 인간에게는 쓰다듬을 것이 필요해요. 간단하게는 부드러운 천이나 폭신한 인형 같은 것이 있을 거예요.”

앞서 걸으며 소렌샤가 말했다. 수도원 안은 조용했다. 근면이 묻어나오던 예전 그 거룩한 분위기는 완전히 종적을 감췄고 지금 이곳은 폐가만 같다. 뒤따르며 고더린은 언제 사라졌을지 모를 수사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는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기사였고, 수사들은 나름대로 친구 비슷한 거였다. 엉망으로 넘어진 촛대들과 먼지로 뒤덮인 선반들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같다. 그래서 뭐? 사실 그는 수사들 생각 따위는 그다지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공과 사를 그다지 구별하지 못하는 기사였으니까. 그의 눈은 계속해서 소렌샤의 뒷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아내 혹은 남편, 애인이 그 대상이라면 참 좋을 테죠. 바보 같은 주장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결혼이라는 게 그저 서로를 영속히 쓰다듬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쪽이에요.”

불안한 매혹을 깊숙히 느끼면서 고더린은 몇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했다. 하나, 수사들이 죽거나 떠난 이 수도원을 이 숙녀께서 우연히 발견했을 가능성. 둘,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수사들을 죽이고 수도원을 차지했을 가능성. 어떤 것이든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개들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으로 여기 들렀을 때 수사는 여섯이었고 한 명이 더 올 거라고 했다. 고더린은 개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수사일까? 이 여자는 사람을 개로 만드는 마술사일까? 그러나 개들에게는 어떤 신앙도 없어 보였다. 아무렴 어때. 고더린은 수사들 생각을 멈췄다. 이 정도면 충분한 의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와인이 있어요.”

와인이란 말에 고더린이 움찔했다.

둘은 어느새 주방에 들어와 있었다.

와인과 미인......

“비록 한 병밖에 없지만요.”

뭐라고!

그 큰 와인 저장고가 텅 비었단 말인가?

소렌샤가 벽면에 붙은 나무 선반의 미닫이 문을 열었다.

고더린이 소렌샤의 손목을 붙잡았다. 돌격하듯.

2024년 9월 20일 금요일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❷

 



“당신은 언제나 새로운 최악을 보여주네.”

치니언이 쏘아붙였다. 유스프는 담담했다. “당신은 나를 떠나겠다고 했어.” 그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죽은 나무껍질을 꺼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뒷말 없이 떠났어.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이었지.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던 거야. 누가 칼로 찌르려고 할 때, 황급히 몸을 틀어버리는 그런 거.” 그는 아직 울지는 않았다. “첫 번째로 시간을 되돌렸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뭔지 모를 묵직한 것이 몸 안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고 아주 그랬고 사방으로, 그래서 당장은 그걸 어떻게 해야 했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당신에게 당해보라는 듯 욕부터 내뱉었지. 거기 있는 의자를 집어 던졌는데. 맞으라고 던진 건 아니었지만 맞아도 된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맞았지. 당신 머리를 맞췄어. 피하지도 못하고 넘어진 당신은 피 흘리면서 죽을 듯이 떨고 있었고..."

먼저 울기 시작한 것은 치니언이었다.

당한 사람이 먼저 울다니 억울한 일이었다.

“당신은 여길 빠져나갔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았어. 알어줘, 치니언. 그때의 내 기분은.”

“그래봤자 죽고 싶었겠지.”

치니언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알고 싶지 않아.”

잠시 조용했다. 한참을 머리챌 만지고만 있던 치니언이 내뱉었다. “계속 말해. 어쨌든 이걸 끝내야만 하니까.” 유스프가 말을 고르려는 듯 침을 삼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말을 쉬다가 그는 말을 재시작했다. “며칠을 그저 보냈지. 그리고 두 번째로 시간을 돌렸어. 당신 마음을 돌리고 싶었으니까. 당신 말을 듣다가 듣다가 참기 어려워져서 무릎을 꿇고서 우리에 대한 모든 것, 모든 것을 다 얘기했어. 순례를 가서 보았던 수정의 바다. 비를 피해 성주 몰래 마굿간에서 껴안고 잤던 일. 처음으로 입을 맞췄던 성인의 축제 같은 거. 묵묵히 듣고 있는 당신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슬픈 미소를 입에 올리고 여러 번 힘에 겨워하면서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의 당신은, 당신은 어떤 끔찍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어떤 죄악과 참상의 이야기라도 어떤 끔찍한 학살이라도 전부 다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너그러워 보였지. 그러나 당신은 앞서처럼 떠났어. 같은 일에는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듯이.”

유스프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렇게 세 번째야.”

계속해서 매만졌다.

“세 번째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약속할게. 당신이 이 집을 떠나고 나면 두 번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오지 않을게.”

꽤 오랫동안 치니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묘하고 복잡한 상념들이 치니언을 몸 속을 조였다가 풀었다. 잠시 후 의자가 일어섰다. 다리를 모아 앉으며 치니언은 안면을 무릎에 부볐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점심을 거르고 왔었지. 웃음이 나왔다. 배고프고 피곤하구나. “알겠지만 어리석은 짓이었어, 유스프. 당신은......” 치니언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사용한 거야. 그 마술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킬 수 있는 힘이야. 무고한 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힘이고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힘이고 아이와 여자, 어쩌면 세계를 구해낼 수도 있는 힘이지.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될 수 있다고 입 닳게 말했는데. 마지막일 수도 있는 기회를 이따위 일에 낭비하다니. 이렇게 지친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정말로.”

“작지 않아. 내게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어.”

유스프가 구걸하듯 말했다.

“당신만의 생각이잖아.”

치니언이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 필요에 따라 모욕 당해야 하는 사람이 아냐.”

“당신이 아니면 안 돼.”

“......오.”

마지막 말에는 날이 서 있었다.

“예전에는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어. 당신이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다고. 그러나 진실은 아니었지.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다시금 피어오른 적개심에 유스프가 움찔했다. “이런 얘길 듣고 싶었던 거지? 다 말해줄게. 뭐가 듣고 싶어?” 치니언이 잔인하게 웃었다.

“어제까지도 나는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은 나를 본 게 아니야. 게으르기 때문에 익숙한 것들만 골라내서 본 거지. 진짜 내가 아닌, 실루엣이나 커튼 그림자 같은 무언가를. 지금까지의 일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있다고,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믿고 믿고 또 믿었을 뿐. 한참 전부터 난 그랬어. 침대가 모래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여긴 사막이었어. 그리고 말이야.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돼......”

질끈 치니언이 눈을 감았다 떴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흘렀다. 뺨을 타고 가서 쇄골에 모였고 유스프도 울었다.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두 사람은 악에 받친 동시에 상처받고 있었다.

“몰랐을 리가 없었다고 생각해. 우리 여기서 죽어가고 있었잖아, 안 그래?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는 방. 여긴 말이 죽어버린 공간이야. 공간 자체가 죽어가고 있었다고. 그 죽음에, 내가 기여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진지함을 잃어버린 당신이 밖에서 불쌍한 어린아이나 죽이고 돌아다니는 동안...”

“그럴 이유가 있었어!”

“우리가 거둔 아이였잖아!”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자 큰 소리가 났다. 상체를 탁자에 얹다시피 한 치니언은 몸을 들썩여가며 흐느꼈다.

“내게도 물론,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이 있지만 당신처럼 하지는 않아. 불쌍한 그 아이. 우리한테 풀잎을 접어주던 그런 아이를 죽여가면서까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손에 잡힐 리도 없고. 잡고 싶지도 않은데. 당신은 변했어!”

“먼저 변한 건 당신이잖아.”

“미친 여자라고, 부정한 여자라고 했잖아. 은연중에 하는 그런 비난도 아니었지. 무릎 꿇고 빌라는 듯이. 알아서 조아리길 바라는 듯이. 부응하지 못하니까 화를 내는 것도 모, 모자라서.”

치니언이 으르렁거리고 이를 드러내며 손목을 어루만졌다. 가장 싫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유스프는 비겁하게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치니언이 싸늘한 조소를 보냈다.

“왜? 못 보겠어? 봐, 보라고. 보라고!”

치니언이 유스프의 얼굴에 손목을 들이밀었다. 피하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아내가 남편의 뺨을 후려쳤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났다. 남편은 뺨이 돌아간 모습 그대로 흐느꼈다.

“노력하려고 했지. 당신을 믿으려 했어. 그 믿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진창에 박혀 당신이 죽인 어린애 시체랑 굴러다녀! 당신이 겹겹이 저버린 내 믿음들과 함께!”

수치심에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스프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어 눈을 숨겼다. 그러나 눈을 가리면서 귀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치니언의 말이 꼬챙이처럼 유스프를 찔렀다. 그럴 때마다 뿌옇고 축축한 것이 가슴 위를 흐르면서 죽죽 떨어졌다. 하기사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죽여야만 하는 아이에 대해서. 그 아이가 죽지 않으면 세상 전체가 불행해질 역사가 있다고. 그런데 정말 그것뿐인가? 홧김에 아내를 때린 일에 대해서는? 노력하는 아내를 가혹하게 대했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사죄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대체 누가 누구를 설득하고 앉아 있는 건가? 대체 왜 시간을 돌렸단 말인가? 이 모든 걸 왜 뒤늦게 깨닫는단 말인가?

봐!

치니언이 달려들어 유스프의 손을 낚아챘다. 뜨겁고 축축한 손으로 치니언은 유스프의 턱을 붙잡아 강제로 돌렸다. 두 사람은 마주 봤다. 직면한 충혈된 눈이 원망의 신인 것처럼, 원망이 유일한 권능인 신의 눈처럼 유스프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을 보란 말이야! 시간을 되돌려서 한다는 게 겨우 이런 짓이야. 당신이 돌아올 때마다 난 계속 모르고 있을 거고, 당신은 다 알면서도 미안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겠지. 난 대체 무슨 죄야?”

“치니언, 제발.”

“한때는 내가 아주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 덕에 말이야. 당신을 떠올리면 외롭지 않았고 마음이 알싸했고 두 뺨이 화끈거렸어. 당신은 박식하면서도 섬세한 남자였지. 내 행복에 천을 덧대는 사람이었어. 부정할 수는 없어. 사실이지만 끝났어. 이제 남은 건 당신이 공들여 선물한 냉담뿐이야.”

치니언이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마지막 신호처럼 느껴졌다. 다급하게 유스프는 필요도 않고 쓸모도 없는, 누구에게도 공해만인 말을 되는 대로 꺼냈다. “다른 사람이 될게.”

벙찐 치니언이 유스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늦었어.”

“늦었다니?”

“당신이 하나 맞춘 게 있어.”

다음에 올 말을 알 것 같았다. 알고도 남았다. 흔한 이야기였다. “거짓말이지?” 아찔했다. 어딘가를 어루만지려던 치니언의 손가락이 멈칫하고 뒤로 숨었다. 유스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믿을 수 없어. 어찌나 얼얼한 고통인지 유스프는 다 끝났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단 한 번 쓸 수 있는 시간 마술을 왜 지금 써버렸는지 모르겠네. 이제 중요한 것은 치니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치니언의 새 남자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순간 얼음장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자세히 말해줘?”

이해한 치니언이 사악하게 웃었다.

“세네카는 용병이야. 범죄를 저지른 마술사들을 추적하고 처리하는 전문 용병. 거기서 가장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었지. 공적이 아주 많은. 나나 당신 같은 사람을 수도 없이 굴복시킨.”

젖어있던 치니언의 옷 앞섶이 어느새 말라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를 혐오했어. 다른 마술사들, 친구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젠가 나를 죽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지만 어떡하겠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데. 학회로 날 찾아왔었지. 자문을 구할 게 있다면서. 마술사가 되고 싶었는데 액운이 깃들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게 무슨 생각 없는 소리냐고 쫓아냈지만 아랑곳 않고 찾아왔어. 조금씩 호기심이 생기더라. 자신의 일을 싫어했고 세네카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 일을 그만두고 마술사들 편에 서라고 매몰차게 얘기했거든? 그 다음 날 전부 때려치우고 내게 와서 웃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는 게 놀랍고도 황홀했어. 곰처럼 커다란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니까 귀여웠고 기다려졌어. 글도 곧잘 쓰더라. 날 그린 그림과 함께 편지를 주고는 했는데 열 번째 편지를 받고 나니까 알겠더라. 내가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또 뭘 말해줄까? 그 사람에게는 꿈이 있어. 책을 쓰겠다는 꿈.”

유스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부족하지, 여보? 더 말해줬으면 싶지?”

“그만해. 제발 그만.”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당신이 만들어 낸 내 모습, 당신에 대한 최악의 인상만을 가지고 영원히 나가는 이 모습을 제대로 기억해. 경고하는데 다시는 이 순간으로 돌아오지마. 만약 또다시 시간을 되감는다면...”

마지막 말을 뒤로 하고 치니언은 그를 떠났다.

“기다리고 있다가 머릴 찔러 죽일 거야.”


*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되감아진 시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술의 주인인 유스프뿐이었기 때문이다. 유스프가 시간을 되감는 순간, 이전까지의 모든 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있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할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른 마술이 간섭할 수 없는 유스프 고유의 작동 방식이었다. 몇 번을 되돌아간들, 치니언은 조심스럽게 유스프의 고통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고, 나름의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불어오는 바람에 치마 윗단을 붙잡을 것이고, 함께 만든 이 집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올 것이었다. 그러니 기다렸다가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상처 주기 위해 지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말은 유스프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이 순간 무언가 왔었다...... 여기가 하강나선의 종점이었다. 미끄러지며 저주하듯 함께 도달한 이 순간에는 진실이 있었다. 깃들어 있었다. 먼 훗날 세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덕분이다. 저 말이 단지 불가능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는 불가능한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칼을 들고 기다렸다가 죽여버리겠다는.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생각할 거리다.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어둑한 밤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유스프 혼자 쓰러져 있었다. 일어서다 휘청이던 유스프의 발에 무엇인가 툭 채여 문 쪽으로 날아갔다. 자수 주머니였다. 약간의 금화와 함께 치니언이 두고 간 작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무심코 서 있던 유스프는 바람이 거슬려 문을 닫았다. 비는 아주 그쳐 있었다. 침입을 성원하던 빗방울들이 매가리 없이 창틀에 모여 있었다. 창의 크기를 두고 밤새 고민하던 때가 떠올랐고 당장은 그 생각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틀을 자다 깨며 유스프는 삼일째가 되고서야 더 잘 수 없었다. 치니언이 놓고 간 주머니를 들고 빵집에 갔는데, 미친 사람처럼 중얼대다가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빵을 사버렸다. 마실 것도 없이 퍽퍽한 빵을 온종일 먹으면서 유스프는 외로운 중독자처럼 마술 반지의 예쁜 고리를 계속해서 매만졌다.

언젠가 유스프가 시간을 되돌릴지. 네 번째, 다섯 번째, 백 번째의 치니언을 보게 될지. 하다가 그만두는지, 아니면 약속을 철저히 지키며 살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유스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했을 수 있고, 그렇기에 그는 안 했을 수 있다.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 하루가 지났고, 한 달, 일 년, 십 년이 지났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처럼 좋은 사람이 됐다. 부분적이지만 달라졌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것을 바꾸는 데 성공했으며, 모든 부분에서 예전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이미 고정되어 있었지만 잘라낸 자리에 다른 손가락을 붙여 다른 마술을 익혔다. 많은 사람을 구했다. 절망하던 누군가를 절망에서 꺼냈다. 감사를 받았다. 선물을 받았다. 새로운 사람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다르지 않고 그대로였다.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누구로도 스스로도 그 자신을 지옥에서 구해내지 못한다는 사실. 그래서 그는 애도했다. 사후세계에서도.

2024년 8월 8일 목요일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❶

 


치니언.

하고 유스프가 치니언을 불렀다. 깜짝 놀란 치니언이 고개를 쳐들었다. 유스프가 보고 있었다. 슬픔과 절망이 무작위한 비율로 뒤섞인 표정이었는데, 밑바탕은 또 성직자의 얼굴처럼 신중하고 간절해 보였다.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눈밑이 까맸고 움푹 꺼진 볼을 보자니 굶은 사람 같았다. “괜찮아, 당신?” 충분한 시간을 주었지만 유스프는 답하지 않았다. 치니언도 더 물으려다 말았다. 여기 온 건 할 말이 있어서였고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얘기를 좀 하고 싶어서 왔어. 우리에 대한...” 하지만 다음 단어는 뻑뻑해 잘 나오지 않았다. 치니언은 퍼지고 없는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오래되지 않은 집. 둘이 함께 몇 년을 지은 집이었고 직접 만든 가구 몇 개에는 아직도 좋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아주 먼 미래와 아마 없을 노년까지 생각하며 준비했는데 이제는 모두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

하고 치니언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버드나무로 만든 아기 요람. 거기에는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마중 나온 아픔이 쓰라렸다. 정신을 차려야 해. 치니언은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매만졌다. 이제 저것은 어떻게 될까 하는, 시답잖고 우울한 생각은 관둬야 했다. 오늘은 끝을 위한 날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어수선하지? 갑자기 들린 빗소리에 치니언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인데도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억수로 쏟아붓고 있었다. 들여보내달라는 듯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이 거셌다. 걸어올 때 치마 윗단을 부여잡았던 게 떠올랐다. 묘한 풀향을 풍기던 그때의 바람은 어쩐지 괴상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되뇌다가 치니언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고 말았다.

앗.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슬퍼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미련이 있어 보이면 붙잡을 것 같았으니까. 머뭇거리면 안 돼. 홀가분해지는 것을 정말로 원했다. 목전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인지, 마음을 압도하는 위화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치니언은 주위를 둘러봤다. “당신도 들려?” 말하면서 치니언은 귀를 움찔했다. 방 어딘가에 규칙적이고 미세한 소음이 있었다. 무의식을 살살 긁는 건 빗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였다. 무심코 치니언의 눈길이 유스프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같은 보석을 셋으로 쪼개 만들었던 유스프의 마술 반지. 어? 빠른 몇 초가 느리게 지나가는 동안, 의식 밑바닥에서 옴짝대던 치니언의 불안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왔다. 왜 갑자기 오한이 들었는지, 왜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 진실은 솟으면서 뜨거워지는 마그마처럼 분노로 변했다. 내가 할 말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유스프는 우두커니 죽은 나무처럼 서 있었다. 아는 거야? 치니언이 캐물었다. 당신 아내가 묻잖아, 알고 있냐고! 마침내 유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니언은 벌떡 일어섰다.

쾅!

하고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래도 한때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믿기지 않네.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이 아닌 건 아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꼬리가 죽 올라간 치니언의 입으로 노여움이 흘러나왔다. 기가 찼다. 그래서 치니언은 헛웃었다. 하! 그러나 유스프는 보기만 했다. 그는 거리낌 받아 마땅한 처지임을 아는 사람처럼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치니언의 눈밑이 가늘게 떨렸다. 게워낼 것 같은 분노를 억눌러가며 치니언은 물었다. 확실히 말해. 여기 쓴 거지? 유스프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을 살짝 감았던 치니언이 악몽을 파하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따졌다.

왜?”

하고 물었지만 유스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렸어? 유스프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치니언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묻는 말에나 답해. “세 번.” 세 번이라고? 순간 치니언의 모든 것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2024년 8월 6일 화요일

포도 기사 ➌


폭죽처럼 솟은 고더린의 손목이 붉은 원호를 그리며 멋지게 돌았다. 기사들이 함성을 내뱉었다. 이내 그것은 바닥에 툭하고 떨어져 꿈틀거렸다. 대장이 짓이겼다. 발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기사들의 눈알이 고더린에게 모였다. 손을 잃었으니 끝난 싸움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고더린은 거뜬히 서 있었다. 기사들은 무슨 말을, 저 비열한 자식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내뱉을지 눈여겨보고 있었고 기대도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는 킥킥 웃으면서 왼팔 견갑을 벗어던졌다. “뭐 하나 내놓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왼손 정도면 꽤 값싸네요.” 기사 몇 명이 침을 삼켰다. 과연 우리가 아는 대로의 고더린이구나. 저 나쁜 자식. 이상하게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더린도 마찬가지였다.

한 손 검술도 좋지. 이 나름의 장점이 있으니까. 그는 검을 한 손으로 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옆으로 몸을 틀어 검과 자신을 일직선으로 만드는 형태였다. 팔이 처졌다. 한 손으로 든 장검은 무거웠다. 목숨이 걸린 것이니 당연한 건가? 그는 아린 통증을 외면하며 이렇게 말했다. “검을 처음 쥔 게 여섯 살 때라고 하셨던가요?” 노기 어린 눈이 고더린을 쳐다봤다. 순간 무섭게 빛이 어른거렸다. 대장이 얼굴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가까스로 쳐낸 고더린이 반격하려는 순간, 가슴 밑으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급급하게 검격을 쳐내고, 손목을 틀면서 내려 베었는데 힘이 실리지 않아 속도가 느렸다. 비웃음 같은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대장의 공격은 간격이 짧으면서도 묵직했다. 어떤 점, 혹은 선, 또는 면을 보고 있다는 듯 대장은 도망치기 어려운 궤적으로 찌르고 휘둘렀다. 고더린은 악 소리를 질렀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는 중이었다.

“여섯 살 때 난 아버지 밭에서 포도를 따 먹고 있었어요.” 뒤로 굴러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고더린은 턱과 귀, 코끝이 보기 흉하게 잘려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죽일 생각이 아니로군.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하던 고더린이 갑옷을 벗었다. 처참하게 죽이려는 거야. 추한 모습으로. 기사들이 목을 길게 뺐다. 갑옷을 벗다니 무슨 생각이지? 자살? 투구만 남기고 다 벗은 고더린은 제자리에서 통통 두어 번 뛰고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다. “좋은 놈들만 골라서 따 먹었죠.”

“그때부터 야비했구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대장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대장 주도의 공세가 이어졌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고더린은 맞받아치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장이 여섯 번을 휘두르는 동안 고더린은 한 번도 먼저 휘두르지 못했다. 그 사이 대장은 강경한 진압자처럼 점점 더 고더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평민이 기사들 박력에 맞설 수는 없는 법이라고 고더린은 생각했다.

“야비했다니, 틀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족을 이겨 참수된 평민에 대한 노래를 알았다. “사실 맞출 거란 기대도 안 했어요. 무식하단 건 미리 알았으니까.” 그는 그 노래를 좋아했다. 돈을 내고 청해 듣기도 했다. 뒷맛이 안 좋은 얘기이지만, 좀처럼 찾기 힘든 통쾌함이 있었다. “아버지가 시킨 거였어요. 어떤 게 좋은 녀석인지 알려주려고 그랬던 거였죠.” 어쩔 수 없군. 고더린이 손가락 하나를 내주며 물러났다. 그는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린 항상 제일 좋은 것만 먹었어요. 그런 게 가족이고, 그런 게 사랑이겠죠.” 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 방정맞은 입 좀 닥칠 수 없느냐고 그가 물었다. 고더린은 대장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나와 내 가족은 황제보다 좋은 포도를 먹었다 이겁니다. 아셨어요?” 대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더린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고더린의 경우에는 쓰고 있는 투구 때문에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여튼 한계였다.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여간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지겠지. 죽을 수밖에 없을 테지. 죽음을 감지한 뇌가 넘쳐흐르도록 생각을 짜냈다. 돈으로 기사 작위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얘기에 홀렸고. 말도 안 되게 비싼 값이었음에도 기회라고 여겼다. 뼈저리게 후회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지. 그게 기회가 아니었다는 걸. 그건 단지 기사라는 계급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지. 그들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신화가 큰 바람을 맞은 구름처럼 흩어졌다는 것을 의미했어. 작위를 사는 데 필요한 액수가 점점 더 낮아졌고 이제는 돈을 주며 애원해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나는 제일 비쌀 때 샀고... 나를 기사로 임명한 왕국은 사라졌구나. 그때 하던 전쟁을 아직도 하고 있구나. 나는 그저 부유한 자가 되고 싶었어. 커다란 밭 수십 개를 가지고서 내 이름으로 된 포도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홧병을 앓던 부모는 전쟁통에 죽었고 기사란 모름지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의 이야기는 평민에 대한 높으신 분들의 통념을 강화할 뿐이겠군. 쓰레기 노래에 나올 법한 지극히 어리석은 평민의 이야기잖아.

“그러니까 내가 황제보다도 대단한 거죠.”

대장의 귀가 쫑긋했다. 씩씩거리며 코를 벌름거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분을 삭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반응을 고더린은 놓치지 않았다. 다음의 말, 가장 좋은 말을 찾아내야 했다. “이해 못했어요?” 그 말로 생각할 몇 초를 벌었다. 머릿속에서 피가 격렬하게 돌았다. “검을 버리고 이 대단한 강도 밑으로 기어라, 이 말입니다.” 막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진 듯 대장이 고함치며 달려들었다. 무섭게 전진하며 든 상태 그대로 검을 휘두르는 그는 쇠로 된 풍차 같았다. 고더린의 장검이 대장 것을 맞고 튕겨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우와, 지는 건가. 고더린은 납득한다는 식으로 품을 내주며 대장의 장검을 내려다봤다. 쇄골과 가슴이 무참히 갈려나갔다. 뿜어지는 피가 보기 좋았다.

‘졌다.’

그 순간을 비집어 고더린은 대장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대장이 내미는 검을 제 가슴 깊이 움푹 박아 넣었다. 검의 뿌리가 몸에 닿는 것을 느꼈다. 아팠다. 그러나 별로 아프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깨에 턱을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바싹 붙어 있었다. 혀로 과일을 굴리듯 고더린이 달콤하게 말했다.

“투구를 안 쓰고 계시네요.”

고더린이 대장의 귀에 괴성을 질렀다. 크고 또 악에 받친 괴성을. 대장이 비명을 내질렀다. 검을 놓은 그가 허겁지겁 귀를 막자, 고더린은 한껏 물려둔 단단한 투구를 대장의 턱에 내질렀다. 내던져진 그 벼락이 대장의 턱뼈를 박살내고 박살냈다. 박살나고 박살난 많은 것들이 대장의 입 안팎으로 무자비하게 뛰쳐나갔다. 이제 두 번 다시 무언가를 씹고 다질 일은 없다는 듯. 고꾸라지며 대장은 공주에게 씌워주었던 자신의 투구를 떠올렸고, 머리에 쓰고 있을 것을 괜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진 것이 아니라 당한 것뿐이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을 때에는 이미 쓰러져 정신을 잃은 뒤였으므로, 그 모든 것들은 했다고 생각됐을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고더린은 피범벅이 된 투구를 벗어던졌다. 깨진 머리통의 머리채를 움켜쥐고서 고더린은 잘린 손목을 불로 하듯 흰자뿐인 대장의 눈알에 지졌다. 그것은 정말이지 오줌이 새어나올 정도로 통쾌한 일이었다. 그는 온갖 천박한 욕설을 대장에게 내뱉었다. 그는 삶의 한 부분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았다. 다시 평민이 되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자신만의 이야기를 얻었음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해방했음을 알았다. 자신을 옭아매던 직업윤리가 보기 좋게 부서졌음을 알았다. 민중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벌떡 일어난 고더린은 자신을 둘러서 있는 기사들을 매서운 기세로 돌아봤다. 다들 입을 벌리고 얼치기처럼 서 있었다. 나서야 하는지 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장검을 주우러 그들 발께에 다가가자 놀란 그들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고더린이 말했다. “저 새끼도 나를 죽일 생각이었을 거야.” 힘이 다 빠져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주워 든 그에게, 대장은 뭉개진 포도알처럼 보였다. 마저 뭉개기 위해 악귀처럼 걷던 그에게 누가 외쳤다.

“받아!”

발치로 반들거리는 동그란 약병이 굴러왔다. 높은 수준의 장검보다 비싼, 사람들의 희생이 모이고 모여야 만들어지는 고급 물건. 멈칫한 고더린은 멍한 얼굴로 묵묵히 보다가, 문득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강도가 될 건 아니지?” 무스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고더린은 싱글벙글 웃었다. 저 앙큼한 자식. 귀여운 공범. “몰라, 이 개자식아.” 고더린은 빈 약병을 발로 터뜨린 다음 대장을 내버려두고 말에 올랐다. 죽지도 지지도 않았지만 또 한 번 누군가와 싸운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몸으로. 하지만 그조차 확신해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뭐가 다른지.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아니면 마술인지. 어째서 자신에게 그같이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 것인지. 누군가는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고더린은 마지막으로 한 번 기사들을 눈으로 훑었다. 맹렬한 적의와 맹렬한 존경이 섞인, 선망과 원망이 반쯤 섞인 눈빛이 투구 속에서 빛나고들 있었다. 그래, 너희가 알 턱이 없지. 고더린은 전우였던 개새끼들의 이름을 하나씩 전부 불렀다. 그리고 결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승자는 폭군처럼 강해지도록 하소서!”


*


멀어져 가는 강도를 기사들은 바라보았다. 따라가고 싶다는 욕망에 몇 명의 기사가 제풀에 놀라 두리번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망해도 왕은 하나 있어야지.” 그러나 무스트는 말했다. “찾아내자. 왕에 어울리는 사람을.” 기사들이 하나둘 말에 올랐다. 아직 죽지 않은 대장이 쓰러진 자리 그대로 뉘어 있었다.

2024년 6월 29일 토요일

포도 기사 ➋


기사들 싸움에는 언제나 세 개의 국면이 있었다. 탐색과 공세(수세), 그리고 종막. 그것은 하나의 발레 또는 연극 같은 것이어서 기질과 성격, 선호에 따라 다르게 연출되었다. 중요한 것은 계산이었다. 지상전이란 오후 내내 걸어야 하는 뻘밭 같은 것이어서 갑자기 끝나거나 물리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앞선 이를 죽이면 다음 이를 죽여야 했다. 그 작자를 쓰러뜨리고 나면 저 작자를 쓰러뜨려야 했다. 전력을 다 할 지점은 어디인가? 마지막 싸움까지 몇 번의 싸움이 더 남아있는가? 그들 몸은 그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생산한 문법이었고 정답을 구해낸 순간이 전부 있었다. 따라서 기사란 밖에서는 예술가였고 안에서는 수학자였으며 안팎으로는 군인이었다. 하지만 고더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수학자라고, 군인이라고, 그 집체인 기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한낱 평민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을 어디 두고 내리는 것이 걸리적거렸을 뿐 아니라 굳이 두고 올 필요도 못 느꼈다. 그에게 싸움은 무언가의,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만큼은 절대로 아니었다. 농가 출신으로 입신양명이라는 헛꿈 때문에 가족을 배신한 저 자신에게 그 같은 생각은 애들 놀음이었다. 그에게 싸움은 거머쥐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일확천금에 대한, 완전히 다른 삶에 대한 조바심이자 발판이었다. 그것이 다른 기사들과 고더린의 차이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적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겉돌았고 무기력했고 남들이 이길 때 혼자 무너지고는 했다. 그의 스타일은 바로 그 부분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발레는 그가 줄곧 경멸하고 조롱해온 것들, 의무와 고결함, 그것에 대한 리액션이었다. 전투의 세 가지 국면 따위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기사 고더린의 싸움에는 딱 두 가지만이 존재했다.

도발과 살인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이 싸움을 통해 자신을, 적확하게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이 그를 구제불능이라고 여겨왔듯, 자신 또한 그들을 구제불능으로 생각해왔음을. 그는 웃음과 함께 뜸들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잘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

“이 시시하고 멍청한 것들에 복무하는 일이 드디어 끝났어요, 대장.”

오른발을 한 걸음 뒤로 물리며 고더린은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 저것들은 진작 다 죽어 없어져야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것들, 세상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함에도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쥐고서, 우리를 헐값에 쓰던 저것들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기사가 된 이래로 단 한 번도 저들에게 충성한 적이 없어요. 저들은 내 마음을 산 적이 없어요. 그러려고도 안 했고요. 그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으니까, 저들은 왕이고 우리는 신하이니까 따르라는 말에 따르고 있는 척했을 뿐이에요. 난 돈을 벌고 싶었어요.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하고 앉아야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가, 뭐 그런 것만을 생각했죠. 그리고 난 지금 늙은 기사인 당신을 봐요.“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다. 다들 고더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장은 미간을 움찔거리며 장검을 쥔 손을 옴짝거렸다. 그의 마음이 죽은 공주와 죽일 고더린 사이 어딘가를 맴돌았다.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흉터와 관절통과 후유증, 지키지도 못한 왕국 말고는. 당신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그것마저 어떠한 고난으로, 기사의 삶의 맹렬한 한 부분이라며 비탄에 도취되겠죠. 불가에 앉아 슬픈 얼굴로, 누군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기를 기다릴 거고요. 내 말년이 그런 것이길 바라지 않아요. 비아냥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니까요. 당신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솔직합니까? 동지들은 나를 물욕에 미친 강도놈이라고 비난하지만, 언제나 나는 내가 당신들보다 훨씬 더 낫다고 여겨왔어요.“

울컥하고 대장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대장이 성큼성큼 고더린에게로 걸어 들어갔다. 고더린은 대장과 자신까지의 걸음을 읽어내며 한 발에서 두 발, 절제된 보폭으로 물러났다.

“당신이 공주에게 씌워준 투구를 가져가 내다 팔 거예요. 아뇨, 공주의 시체도 팔 겁니다. 모든 것을 노략하고 모든 것을 능욕할 거예요. 한때 왕국의 기사였던 강도. 그 같은 악명을 거머쥐고, 내게 오는 모든 이들을 받아주며, 폐허에 군림한 다음 포도주로 된 목욕물에 몸을 씻을 거예요. 말하고 보니 왕과 다를 바 없네요. 내게 충성하겠다면 지금이 기회랄 수 있어요, 대장. 그러니까 검을 버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더린의 왼손이 날아올랐다.

2024년 6월 11일 화요일

포도 기사 ❶


“이제 어떻게 살지?”

살해당한 공주의 시체 앞에서 그의 동료 하나가 물었다.

“글쎄, 당장 떠오르는 건 강도야.”

“입 다물어라, 고더린.”

격추하듯 대장이 쏘아붙였다. 기사 몇 명이 거기 반응해 웃었다.

대장은 검집 끄트머리로 꽁꽁 언 땅을 두드리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더린은 별 대꾸 없이 가만히 대장을 노려봤다. 그는 대장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고더린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하고 고지식한 인간. 무력으로는 내가 당신만 못하지.

하지만 맞붙는다고 하면 이길 자신이 있다.

기사가 되기 전에, 그러니까 고더린이 과수원 아들 놈일 때, 포도를 훔쳐가는 몸집 좋은 깡패 다섯과 싸웠을 적에 그가 이겼고 전부 다 죽였다. 수적, 신체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 죽였다. 마술사가 필요할 정도로 다쳤지만, 어쨌든 이긴 것은 그였다. 실제로 그는 열세에 강했다. 패색 짙은 싸움이 아니면 피가 돌지 않았다. “죽어도 못 이겨.” 그런 생각이 쳐들어오는 순간, 군신이 몸에 깃들어 장검을 대신 휘두르는 것 같았다. 반대로 승산 있는 싸움에서는 그가 가장 못했다. 눈빛은 흐리멍덩했고, 낚싯대 휘두르듯 검을 휘둘렀다. 그러한 성정이 그를 평가할 때 좋게 작용하기는 어려웠다. 고더린은 이렇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매 전투에서 진심을 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공적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진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더린은 돋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는 동료의 죽음에 무심합니다.’ 만약 고더린이 사회성 좋은 기사였다면, 자신의 평판에 대해 신경을 기울이면서 자기를 관리하는 기사였다면 평가는 제법 달라졌을 것이다. ‘일견 설렁설렁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 것 같은 싸움도 뒤집어버리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우린 최강의 강도가 될 수 있을걸. 되려고만 하면.’

고더린이 실없이 히죽 웃었다. 그 사이 대장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묻기도 데려가기도 마땅찮다고 판단한 대장은 이곳에서의 예우나마 다할 생각이었다. 대장은 투구를 벗어 공주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관을 대신하는 그 투구는 작달막한 공주의 머리를 덮고서도 어깨까지 크기가 남았다.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고더린만 제외하고. 고더린은 엉뚱하게도 지난날 키우던 포도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떠날 때 나라였던 것이 돌아오자 얼음이야. 이제부터 모든 사람이 가진 것을 꽁꽁 싸매 꺼내지 않겠지. 심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종자라도 좀 비축해둘 걸 그랬어. 그래, 와인이라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도원이나 성당을 턴다면 말이다. 서둘러야 할 텐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땡중 놈들이 팔아치울 수도 있어. 모르긴 몰라도 비싸게 팔 거다. 싸구려 한 잔에 쇠붙이 몇 장을 갖다바쳐야 할지도 몰라. 에라이, 씨발. 이 원정에 끼는 게 아니었어. 오는 중에 더 추워질 줄이야. 먹고 싶다, 포도. 우리 밭 것은 흑보석이라 불리지. 황제도 먹었고 왕자도 먹었고 여기 이 막내 공주도 먹었을 거다. 밭에 계속 있었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말리고 어머니가 말리고 여동생이 말렸는데, 그 좋은 땅을 검이랑 갑옷 사려고 팔아버렸다니. 고작 기사가 되려고!’

격분한 고더린은 철구두로 땅을 걷어찼다. 마침 좋게 걷어차인 납작돌 하나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돌은 공주께로 날아가 공주가 쓰고 있던 투구에 맞아 떨어졌다. 경망스럽게 쇠 때리는 소리가 났고 진동하며 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대장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고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이 말했다.

“검을 들어라, 고더린.”

대장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예?”

어안이 벙벙해 고더린은 대장에게 물었다.

“방금 그건 실수였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근처에 있던 기사 하나가 경멸조로 내뱉었다.

“어차피 넌 죽일 생각이었어. 돌아오자마자.”

“죽이다니? 그토록 생사고락을 함께했는데?”

“기사가 강도로 전락하는 꼬라지는 못 보겠다.”

“왜 그래요, 대장. 내가 자주 하는 농담이잖아요. 강도라니, 고결하지 못해요!”

“네 물욕에 대해서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안다. 넌 몇 번이고 우리 물자를 빼돌렸어.”

악행을 들킬 때의 쾌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투구 속에 있는 고더린의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이제 뒷감당을 할 차례였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그러나 이내 비릿하게 고더린이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임을 미리 예감한 듯 익살스런 투였다.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더린은 눈으로 자신의 동업자를 찾았다. 무스트는 언제나 찾기 좋게 맨 앞에 있었다. 고더린이 말했다.

“무스트, 네 생각도 같아?”

작달막한 기사 무스트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릴 뿐이었다.

고더린은 칼 손잡이에 새겨진 포도 덩굴 음각을 매만졌다. 요행을 바랄 때 하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저 자식이 일러바쳤구만. 그거야 전부 예정된 일이었지. 이제 정말로 요행이 필요할 때가 왔다. 삶을 지나간 모든 요행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요행이. 고더린이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에 쇠가 스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좋은 장검이었다. 밭을 판 돈의 대부분을 사용한. 고더린이 투구의 쇠를 조이면서 가볍게 목을 돌렸다. 다른 기사 몇 명이 검집에 손을 올린 것을 본 그는 가볍게 이런 말을 던졌다.

“명예를 아는 분들이시니, 떼로 덤비지는 않겠죠?”

“끝까지 비꼬는군.”

대장을 제외한 기사들이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나라가 망하기 전의 방식이었다. 결투자를 제외한 모두가 입회자였고 그들은 입회자 역에 익숙했다. 결투는 좋은 것이다. 결투는 하여간 신명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섬기는 다른 것이 또 하나 있기에 그렇다. 세상에는 쇠붙이의 신이 있다. 그것은 야간에, 피를 뒤집어쓰고 나서, 가장 큰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 고개를 쳐들 때 보이는 별이다. 철별, 절대로 구부러지지 않는 별. 기사는 많은 순간 인간이 아니라 쇠붙이다. 결투는 그 신에 대한 공물이다. 기사 모두는 그 신을 입에 담아 노래했다. 패자도 승자도 죽어 거기서 만날 터였기에.

‘우리는 철로 된 악단 같아.’

고더린은 대장의 손목과 발을 주시하며 움직일 준비를 했다. 훈련 때 몇 번 대장의 타격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거목과 싸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더린도 게으르지는 않았다. 다른 기사들이 하는 만큼은 훈련했고 싸웠으며 죽였다, 십 년 가까이.

지겠지?

그렇기 때문에 이길까?

문득 머릿속에서 물음 하나가 순환했다. 대장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 용사에 이른 기사다. 단순히 승패를 점친다면 무참하게 패배할 거야.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나는 오직 패배할 싸움에서만 승리를 거머쥐는 고약한 놈이다. 그러니까 이기겠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패배할 싸움이 아니라 이길 싸움이었던 거 아닌가? 그러면 다시 못 이길 텐데? 그래서 다시 이길 것이고. 이런 생각은 처음이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거였어.

한 번도.

알게 될 기회다.

고더린은 앞으로 나섰다.


2024년 5월 1일 수요일

카프키피안 송가

 


바다를 건넌 바다에 대해 들어보셨어요? 벌써 몇백 년 전의 이야기인데, 요즘 시인들은 이 이야기를 잘 모르더라고요. 하기사 주술사들에 대한 노래는 주류였던 적이 없죠. 

영원히 노래될 것 같았던 인간 찬가가 무너지고, 기사와 황제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이제 구닥다리 퇴물 취급을 받아요. 최신곡 대부분은 우울과 무력감을 담고 있어요. 가사의 화두는 겨울과 마술사고요. 어쩔 수 없는 흐름이죠. 노래라는 게 다 인간을, 당대의 화제를 담뿍 담는 거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망해가고 있으니까요.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까지 다 알게 됐잖아요.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세상이 어째서 점점 더 얼어붙고 있었던 건지 알게 되었잖아요. 마술사들. 그들이 세계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으며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기정사실인 종말적 미래, 멈출 수 없는 말에 올라탄 우리에게는 회한이 마약이죠. 그러니 그런 음악이 팔릴 수밖에요. 솔직히 잘 몰랐어요. 그 아름다운 기적들, 마술을 부릴 때마다 세계가 조금씩 냉랭해지고 있었다니. 뭔가의, 뭔가의 은유 같기도 하고. 마술사들은 알았을까요? 알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겠지만, 그들은 말하지 않았어요. 몰랐던 건지, 모르는 척했던 건지. 거기에는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전쟁 이야기를 먼저 좀 해봅지요. 마술사들이 세계를 바꾸어 놓았듯, 전쟁 또한 마술사들을 바꾸어 놓았으니까요.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만약 당신이 메시아이고 기적을 행할 줄 알아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만들며 눈이 먼 자의 눈을 고칠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복을 불러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당신의 존재를 믿고 끊임없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며 멀쩡한 자의 다리를 잘라낸다면 그것은 복을 뒤트는 일이겠습니다.

여섯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할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하면서 백 년 가까이 전쟁을 하고 있지요(그러니 실은 열여덟). 그들은 이기고 싶고 끝내고 싶고, 지고 싶고 계속하고 싶어서 마술사를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을 뒤틀기 시작한 겁니다. 본질적으로 마술은 자연을 거역하는 힘입니다. 허공에서 숲을 꺼낸다든지 바다를 반으로 가른다든지 하는즉 그것은 ‘없을 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마술사들이 병사가 되면서부터 엄청나게 많은 없을 일들이 있게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세기에 사용된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마술이 부려졌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아무런 대가도 없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게 된 것입니다.

마술은 세상의 열을 포식합니다.

우리 세대에 이르러, 마술은 우리에 와 닿는 햇빛의 속도와 수량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열을 먹어치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여야 했기 때문에.

졸고 계신 건 아니죠?

회담 얘기를 빼먹었군요. 재작년 한 곳에 모인 왕들은 모든 마술사를 추적해 살해하기로 약조했습니다. 마술사가 전부 다 죽을 때까지 전쟁은 잠시 휴전입니다. 어쨌든 세상을 지켜야 한다나요. 그들을 불러놓고서 써먹고 싶은 대로 실컷 써먹고서. 자신들 책임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것이 황당하죠? 그때의 학살로부터 이 년째, 살아남은 마술사들은 숨어있는 듯 해요. 당시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강을 핏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왕들도 어떤 의미로는 마술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들 얘기는 관두고 시점을 옮겨볼까요. 마술사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는 사실 딱 하나뿐입니다. 그들은 어째서 왕들의 명령을 순순히 따른 것일까요? 그들은 어째서 무참히 죽어가고만 있을까요? 어떠한 변명도, 사죄도 하지 않고 저항도 복수도 하지 않고. 잡히면 잡혔나 보다, 죽으면 죽이나 보다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사람들은 추측합니다. 마술사들에게는 무언가 완수해야만 하는 단일한 임무가 있다는 얘기가 자자합니다. ‘초목표’라고 불리는 어떤 공통된 목적이 있다죠. 안타깝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답니다. 어떤 이의 말로는 마술사들이 돈에 미쳐 있었다고 하던데.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들고 싶었고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거예요. 하지만 난 달리 생각해요. 돈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이유로 지목하면 모든 것이 말이 돼요. 눈에 선한 은폐죠.

여기까지가 은화 한 닢으로 드릴 수 있는 정보입니다. 아시겠지만 서비스 많이 넣어드렸어요. 더 알고 싶으면 두 닢을, 됐고 노래나 한 곡 들으시려면 한 닢을 더 주세요.

노래라! 좋죠. 초장에 말하다 말았는데, 나는 오직 주술사를 노래하는 노래만을 노래합니다. 수요가 없진 않습니다만, 선호도는 확실히 떨어지죠.

아는 곡이 없으실 테니 제가 찾아 부르겠습니다. 은화를 먼저 주시겠어요?

아까 것까지 같이... 예, 예.

감사합니다. 이게 참, 예전에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훨씬 더 컸는데 말이죠. 어느새 노래는 뒷전이고 말팔이, 소문팔이, 장사치가 다 되었어요. 어쩌겠습니까, 시국이 이런데. 하여튼 한 곡 맛깔나게 뽑아보겠습니다. 카프키피안 송가입니다. 연인과 헤어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곡이죠. 개연보다는 파연에 어울리는 그런 곡입니다.


해변을...

괴롭히듯 애무하고 있는 파고

과연 그렇겠지만 당신은 남겠다 말하지 않네요

비참히 패해 몸 부서지는 흑물결의 포말이

그대 것이던 붉은 뺨 넓게 펴바르는 걸 보면서도 

그대는 잡거나 잡히거나 울거나 웃지 않네요 

심장이 가슴 밖에 있는 사람처럼 그러네요

가슴이 심장 안에 있는 사람처럼 그러네요

손을 넣으면 내 손 적시던 당신의 어깨

거기서 건져 올렸던 작고 예쁜 산호초 미역들

그것들 전부 다 당신인 어둠

어둠인 당신 어둠일 당신 속에서

다 녹고 사람인 당신마저 녹네요

바다가 되어가고 있네요

당신은 바다가 되어가고 있네요

바다를 건너기 위해 바다가 되어가고 있네요

그것을 지나기 위해 그것이 되어가고 있네요

당신은 바다가 되어가고 있네요

이제 안 보이네요


......예에. 이 노래에는 비화가 있습니다. 먼 옛날 이곳으로부터 남서쪽 멀리 떨어진 해안가에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의 주술사들이 살았대요. 그들은 둘째 주술사 갈가노아의 후손으로, 바다를 몸에 들일 수 있는 지형 주술사들이었어요. 카프키피안, 그들은 카프키피안이라 불렸어요. 평화를 사랑하는 카프키피안들은 만족을 모르며 땅을 확장해가는 영주와 왕들, 도시민들과의 갈등을 피해 맑은 날이면 작게 보이는 먼 곳의 섬을 향해 영원히 떠날 계획을 세웠죠. 떠나는 날 그들은 주술을 부렸고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고 합니다. 서서히 녹는 가루와 같이, 소금기 띤 물결로 변해 거칠고 험한 바다를 넘어갔대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아요. 바다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또 어떤 느낌일지. 노래에 등장하는 청년처럼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떠났다는 섬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나저나 문신이 참 아름답네요. 어디서 왔어요?

섬?

어떤 섬을 말하는데요?

노래에 나온? 

푸하하,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받은 은화를 고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피부가 살짝 거뭇하기는 하지만, 나 같은 도시민과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거든요. 아니, 이제 보니 확연히 다르게 보이네. 행색이 많이 독특하시긴 해요. 안 추워요?

피가 섞여요?

누구? 노래에 등장한 그 남자?

바다가 얼어 붙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올라왔다고요?

잠시만요.

이것 참. 저만큼이나 말주변이 좋으시네요.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시인은 아니시죠? 다른 재밌는 얘기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이야기꾼은 또 반기는 체질인지라. 

손가락을 넣어보면 알 수 있어요?

그거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다른 의도가 있으신 거라면 돌려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아아, 네. 싫지는 않지만 그런 뜻은 아니시라고요. 그럼요, 그럼요. 농담 한 번 해봤습니다. 하여튼 글쎄요. 그렇게 눈을 빛내면서 이야기하시니 한번 속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좋아요. 까짓 거 뭐 살아온 얘기, 들어드릴 수 있죠. 그 전에 잠깐, 시킨 술은 다 마시도록 해요. 잔을 비운 다음 내가 잡은 방으로 올라갑시다. 저쪽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아까부터 우리를 응시하고 있거든요.

빙터


구하기 위해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상처 줘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세계를...

느슨한 고증의 대안 판타지 산문입니다. 과거에 연재했던 시리즈 빙터의 리부트이기도 합니다. 1부는 세상이 망하기 직전의 이야기를, 2부는 세상이 망한 이후의 이야기를, 3부는 생전세계와 사후세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게시 순서와 작중 시간선은 무관합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