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7일 목요일
녹, 구멍 그런 것들
2026년 8월 21일 금요일
개저씨 탈락쇼
호랭이 물어갈 놈, 느자구 없는 새끼, 씨팔조팔. 자꾸 욕을 해서 미안합니다. 개저씨들이랑 일하다보면 저절로 욕이 늡니다. 아줌마는 멸칭이 되고 아저씨는 보통말인 세상에서 개저씨라고 또 구분을 지어 욕을 해야 하는 게 매우 열받는 일이지만 개저씨만큼 존딱인 단어도 없습니다. 개저씨들에게는 한순간에 좋은 분위기를 좆창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저씨와 개저씨는 스펙트럼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아개저씨, 개아저씨 같은 것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 여자들이 어디 가서 일당으로 이 정도 돈을 받으려면 몸을 파는 수밖에 없다.
- (잘 지냈냐는 물음에) 아니, 우리가 사귀는 사이야? 누가 들으면 오해해.
- 걔는 내가 아는 일본 여자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하니까 정색하더라. 애가 뻣뻣해.
- 저 여자랑 어깨빵하면 뒤지겠다. 얼굴도 무기야.
- 운전 드럽게 하네. 여자인가? (확인하고 남자면 입 싹 닫음.)
- (잡기를 보여주며) 300만 원 주고 배웠어, 룸에서 ㅎ
- 저 살 많이 빠졌죠? (그렇네요.) 그쪽이랑 데이트 하고 싶어서요. (20살 이상 차이 나는 유부남의 농담)
- (새로 온 여성인 매니저를 앞에 두고) 내 새로운 마누라야.
그밖에 지역혐오, 인종차별, 끝도 없는 자기자랑, 맨스플레인 등이 개저씨들의 특징입니다. 이런 거 저런 거 너무 많아서 다 들이받자면 생계가 불가능한 지경입니다.
개저씨들의 시대는 어디에서 멈춰 있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최소한 10년 전? 진짜 차라리 10년 전이면 다행이고, 가끔은 근세나 근대사회에서 출현한 듯한 개저씨를 만나기도 합니다.
현 시대의 윤리는 누군가를 나락 보내고 싶을 때만 동원됩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도긴개긴 개저씨들은 서로가 조만간 성희롱, 성추행 등으로 잡혀갈 거라 생각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일까 싶습니다.
개저씨들이 반성하는 날이 올까요? 부계 중심 사회에서 오냐오냐 하며 지나치게 허용적으로 자란 탓인지 죄다 허깨비라도 씌인 것처럼 도무지 시대에 발맞출 생각을 하지 않는데요. 일단 소통조차 불가능한데요.
수년 전에 대형 면허를 따러 갔습니다. 대형 면허 시험은 도로주행 없이 기능 시험만 통과하면 돼서 가르쳐준 대로만 하면 됩니다. 시험 순서를 기다리면서 개저씨들끼리 가속 구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얘기하는 걸 듣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강사가 알려준 방법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각자의 방법을 창조해 떠들어댔습니다. 아무도 강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거지요. 뻥 안 치고 그 토론에 참여한 개저씨들은 전부 시험에서 탈락했습니다.
당시 저는 제 눈앞에서 벌어진 탈락쇼가 그저 우연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씨들과 동료로 지내고 우애를 다지며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개저씨들은 자기 안에서 생성된 무언가만을 기준으로 삼고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대화 상대에게 바라는 건 인정과 리액션뿐입니다(캬~ 크~ 오~ 세 가지 추임새로 영원히 대화 가능). 물론 언니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 중 개저씨들의 비율이 압도적이고 어떤 파훼법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보아 알고 있습니다. 개저씨들은 모두 탈락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디 본 것을 믿으십시오.
2026년 8월 17일 월요일
인생은 부메랑
어쨌든 사회는 상호 간의 믿음으로 이뤄져 있다. 하다못해 떡을 살 때도 식용이 가능한 상태라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파트는 떡보다 더 복잡한 믿음의 구조로 쌓아 올려진다. 토목을 믿고, 건축을 믿고, 감리를 믿고, 시공을 믿고, 인테리어를 믿고, 모델하우스를 믿고, 부동산이 오를 거라고 믿고... 등등의 믿음으로 세워진다.
그러나 믿음을 저버리는 일들이 너무나도 만연하다. 뉴스에는 철근이 누락되고 외벽과 발코니가 무너지고 1년이 넘도록 누수를 보수받지 못하고 보일러 배관이 누락되고... 등등의 사건사고가 보도된다.
아파트가 온갖 규제를 통해 위험을 줄여 왔다고, 공급 호수 대비 사고율의 통계를 들이민들, 몇 대에 걸쳐 쌓아온 불신을 손쉽게 해소할 수는 없다. (게다가 외벽이 무너지고 발코니가 떨어져 나간 건 최근의 일이다. 좀 나아질 만하면 새로운 불신이 업데이트된다.)
그러니 우리를 부르는 마음이 불안에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애초에 불안하지 않다면 우리를 부를 이유도 없다. 게다가 저잣거리의 흉흉한 소문은 끝이 없지 않은가. 업체가 시공사와 담합을 하고 일부러 파손을 시키고 눈탱이를 치고... 등등의 두려움들은 너무도 흔하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을 나조차 여럿 겪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폭염이 한창이던 때에 내가 사는 집 거실과 서재 에어컨의 상태가 기묘했다. 온도를 아무리 낮춰도 시원해지지 않아서 사람을 불렀다.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지만, 기사는 한사코 나에게 함께 실외기를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절대 같이 가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기사를 따라 옥상으로 따라갔다.
기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매니폴드 게이지였다. 수치를 확인하니 거실 에어컨은 냉매가 아예 없었다. 기사는 친절하고 세세하게 에어컨의 ATOZ를 모두 알려주었다. 그제서야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글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냉매가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속여 돈을 더 청구했다는 어떤 인터넷 기사에 대한 글이었다.
그런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당장의 손익을 따져서 이득을 챙기려는 일명 체리피커, 한국말로는 얌체, 개자식, 호랑이 물어갈 놈... 등등의 것들은 설령 세상이 좋아져도 0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들이 망쳐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모두의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게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뭐 어떡하겠나. 부메랑이 돌아가는 자리는 꼭 제자리가 아닐 수 있다. 내가 던지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돌아온 부메랑을 맞았다면 눈앞에 놓인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노력 또한 부메랑이 돼서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돌아갈 것이다. (생각해보면 선의, 호의, 배려... 등등의 부메랑들의 수혜로 이만큼 버티며 살고 있는지도?!)
점검을 모두 마치고 나는 기사에게 이온음료를 건넸다. 씨부럴 화이팅! 하는 마음을 담았다.
2026년 8월 13일 목요일
움직여 몸
평소 우리 신체의 움직임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마지막으로 완전히 쪼그려 앉아본 적이 언제이고 허리를 뒤로 젖힌 적, 팔을 완전히 뻗어본 적은 언제인가. 하다못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것은 언제가 마지막인가. 이곳에서 일하면 많은 신체적 움직임을 회복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일하기로 했다면 그게 누구든 일단 매니저가 된다. 매니저는 육안소장의 보조격으로 하자를 순서대로 사진에 담는 게 기본 업무다. 그러나 그다지 우습게 볼 일은 못 된다.
육안소장은 크게 구역을 나누어 바닥, 천장, 벽의 하자를 잡는다. 숫자가 적힌 스티커에 내용을 적어 하자를 표시한다. 매니저는 숫자를 따라다니며 하자마다 멀리서 한 장, 가까이서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 멀리서 찍은 사진에는 위치가, 가까이서 찍은 사진에는 내용이 보이도록 한다. 가까이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언제나 노력이 필요하다.
1번 하자가 ‘바닥 타일 깨짐’이라면 처음에는 단순히 허리를 굽혀 사진을 찍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리를 굽히는 행위는 허리 부담을 가중시켜 디스크를 부를 수 있다. 바닥에 있는 하자가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자세를 고안해야 한다. 스쿼트다. 허벅지 힘으로 바닥에 가까워지면 허리 부담이 줄어들고 하체 근력에 도움이 된다.
2번 하자는 ‘천장 오타공’이다. 천장에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천장에 위치한 하자를 찍는 행위는 굽은등과 거북목에 탁월하다. 허리를 젖히고 팔을 뻗으면 요추가 신전되고 견갑골이 전인되면서 후면의 협력근들이 활성화된다. 뒷목에 통증이 느껴진다면 척추부터 이어진 뼈들이 견인되고 있지만 무리라는 뜻이다. 한 방에 해결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조금씩 자세를 바꿔나가며 조금씩 적응해가길 바란다.
3번 하자는 ‘벽 도배 파손’이다. 벽에 있는 하자는 앞서 바닥과 천장에 위치한 하자보다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저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별것 아닌 움직임들처럼 보여도, 개인적으로는, 복싱 체육관 삼 개월을 다닌 것보다 이곳에서 한 달을 일한 것이 체력 증진 및 신체 능력 향상에 더 큰 기여를 했다. (여담으로 한쪽 무릎을 꿇을 때 자세를 잡고 무게를 지지하기 위해 오른쪽 발가락들은 무난히 접혔지만 왼쪽 발가락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신경이 교착된 듯 왼쪽 발가락들이 매우 고통스러워 충격이 있었다. 이를 회복하는 데는 세 달이 넘게 걸렸다.)
물론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면 되레 신체가 고장 나지는 않는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실제로 나는 최근 몇 달간 족저근막염으로 고생을 한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다.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어딘가가 아파오기 시작한다면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나 다름없다. 나의 족저근막염의 원인은 고관절 근육의 미사용 및 종아리 근육 과사용이다. 고관절을 사용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다 보니 종아리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수축하면서 족저근막염을 불러온 것이다. 고관절 운동을 병행하고 종아리 근육을 풀어주면서 족저근막염은 개선된다. 완치가 아닌 것은 아직 둔근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건강한 신체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한다. 특히 우울감과 무기력증,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슬픔에 가까이 흘려보내는 사람이라면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해보길 추천한다. 노동이 인간을 해금시켜 준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26년 8월 10일 월요일
쥐 마술 ❷
게친이 방을 나가는 소리에 고야의 어깨가 움찔했다. 고야가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11년 된 시야 속에 게친의 뒷모습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먹을 걸 좀 가져올게. 목소리가 와서 말했다. 머뭇거리던 고야가 다시 루틀리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는 아직 뒤에 둔 채였다. 루틀리지는 재촉하지 않았다. 눈동자까지 돌아온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마술 얘기부터 해야겠구나. 마술사를 본 적 있니?”
고야가 손가락을 들어 루틀리지를 가리켰다. 루틀리지가 웃었다.
“어떤 이는 평생 서넛 보기도 어렵다지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대개 마술사도 한둘 있기 마련이야. 나타난 지 오래됐으니 본 적은 없어도, 모르는 사람은 없지. 하지만 마술에 대해서는 대개 제각각 상상하고는 하더구나. 일반적으로는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을 먼저 떠올리는 듯해.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숲을 불태우는 스펙터클한 거. 있긴 하지만 그게 주류는 아니야. 마술사는 연구자나 학자에 가깝단다. 강조하고 싶은 건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는 거야.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어 의지와 무관하게. 뭐가 됐든 계속 어른거리는 유별난 것이란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 작아서 살점째 도려내지 않는 한 계속 남는 가시 같은 거. 모든 마술사에게는 그런 게 있단다. 예를 들어볼까?”
고야는 발 하나를 뒤로 뺀 자세 그대로였다.
“어떤 마술사는 손바닥 위의 조개 껍데기를 볼 때마다 금화 한 닢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누군가는 절망을 느낄 때마다 타들어가는 개를 본단다. 어떤 자의 머릿속에서 돌은 움직여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야. 그들 머릿속에 왜 그런 생각이 있는지는 몰라. 그건 오직 당사자만이 알고 있고 알 수 있을 일이지. 그래서 마술이란 무엇일까? 조금 어려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내 결론은 그렇단다. 마술은 사물에 대한 강령술이야.”
루틀리지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말은 탁월하게도 많은 것을 설명해준단다.”
조금 춥다고 느낀 고야가 팔을 어루만졌다.
“마술이 강령술이란 것은, 고야. 옳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야. 마술은 거스름돈을 버려야 하는 교환이란다. 차를 우린다고 해서 잎이 몽땅 물이 되지 않듯 말이다. 물 밑에는 예외 없이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지. 마찬가지로 마술 또한 사용할 때마다 찌꺼기가 남아. 그 찌꺼기를 앙금이라고 부르는 거고. 앙금은 실체가 존재하는, 물질이란다. 무겁고, 끈적하고, 쌓이고, 달라붙는 성질을 가졌어. 앙금은 마술사를 파괴해. 모든 마술사는 수명이 짧단다. 그래서 마술사들은 좀처럼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지. 일찍 죽기 때문에. 그뿐이면 얼마나 좋겠니? 마술은 타인 또한 파괴해, 고야.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몸에 앙금을 수집하지. 그 결과가 괴사 중인 네 손가락이야.”
고야가 자기 약지를 옷소매 안으로 감췄다. 다 해진 옷소매가 덜렁거렸다. 게친이 빵 두 개를 들고서 돌아왔다. 방금 감춘 손을 다시 꺼내어 고야는 빵을 받았다.
“누군가가 사용한 마술이 앙금을 만들어냈고 그게 네게 간 거야. 누가 널 미워했다는 뜻은 아니란다. 네 잘못이 아니란 소리야. 그저 불운이란다. 많은 이들이 이 현상을 연구했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법칙도 없었어. 그냥 네가 당했을 뿐. 널 그렇게 만든 마술사조차 자신이 누굴 죽이고 있는지 몰라. 나도 그래. 내가 만든 앙금이 누구에게 갔는지 모르지. 몇 명인지도 모르고 만나도 알아볼 수 없어. 그러나 모든 마술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우울증에 걸릴 만큼 오래토록. 지금도 하는 중이야, 알겠니?”
고야는 받아 든 빵을 먹지 않고 내려다보았다.
“모든 마술사는 다른 마술사의 피해자이고, 모든 마술사는 다음 마술사의 원인이란다. 다른 경우는 없어. 그래서 우린 어린아이를 반드시 구해내야 한다는 강령을 만들었단다. 외면을 외면하자는 강령. 죽거든. 내버려두면 죽어. 손가락에서 시작하지만 얼마 안 가 몸 전부가 괴사하니까. 그게 네 손가락을 잘라내야 하는 이유란다.
하지만 끝은 아냐. 잘라낸 자리와 잘라낸 약지 사이에 이걸 끼워서 봉합할 거야. 마술 원반이라는 건데, 마술 반지라고 부르기도 하지. 괴사를 해제한 다음, 네 몸에 흐르는 앙금을 조절해 마술을 부릴 수 있게 해줘. 앞서 말한 모든 것을 감안한 후에도, 그럼에도 네가 마술을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 그때 네가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줘. 이 반지가 우리가 발명한 윤리란다. 마술 윤리. 나도 네 나이쯤 이걸 했지. 어떤 마술사가 나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왔거든. 심지어 그는 나보다 어렸어. 그때는 나도 너처럼 이게 다 무슨 소린가 했단다. 무섭지, 고야. 무서워해도 돼. 우리가...”
말하려다 말고 루틀리지가 침을 삼켰다.
“아니, 네 공포는 어차피 지나갈 무서움이니까. 손가락을 내밀어 주겠니?”
“그런데 왜.”
고야가 말했다.
“키울 수는 없다고 말한 거예요?”
루틀리지는 놀랐다.
“우린... 그냥... 형편이 좋지 않거든.”
민망했고 슬펐다. 고야의 얼굴에 수많은 얼굴이 겹쳐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부모가 되어줄 사람을 찾아줄 거니까.”
“저는 두 개예요.”
“두 개?”
게친이 먹던 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빵은 데굴데굴 굴러서 루틀리지의 발에 닿아 넘어졌다. 게친이 멍청한 표정으로 넘어진 빵을 바라보았다. 빵이 여전히 손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친이 앞으로 걸어갔다. 넘어진 빵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양손에는 베어 문 자국까지 똑같은 빵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다른 손에도 있어요.”
루틀리지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 직전이었다. 둔탁하게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빵에서 빵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을 때리면서 툭, 투둑, 툭툭. 이제 모두 열 개가 된 빵이 데구르르 구르다가 제 풀에 멎거나 서로 부딪혀 나뒹굴었다. 고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왼손과 마찬가지로 표백된 듯 새하얗게 멍든 약지가 있었다. 그리고 열 개의 빵에 털이 돋아났다.
2026년 8월 9일 일요일
세 사람, 당신까지 네 사람
만약 당신이 사전점검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업체를 부른다면 당신의 세대에는 세 사람이 방문한다.
1. 육안점검 소장
세대 내 하자 전반을 확인하는 사람으로, 사실상 팀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보통 도는 순서는 현관부터 공용욕실, 침실3, 침실2, 거실, 침실1, 발코니, 안방욕실, 주방, 발코니다. 대부분의 아파트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 아무튼 육안점검 소장은 세대 내 모든 공간을 돌며 하자를 잡는다. 구체적인 방문 일정 공유 또한 소장의 역할이다.
2. 매니저
육안점검 소장과 함께 다니는 보조다. 육안점검 소장이 하자를 잡으면 순서대로 사진을 찍고 내용을 정리하는 게 주된 업무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못하다. 들뜬 곳이 있는지 바닥 점검, 공기질 체크, 콘센트 접지 확인, 욕실 등에 물을 뿌리기 등등 여러 일들을 도맡는다.
세 사람이 방문한다고 했는데 두 사람밖에 없어서 당황했는가? 그러나 육안점검팀이 사전점검의 메인 멤버다. 이들은 점검 시간 내내 세대에 머물며 당신과 함께한다. 당신이 지루해하며 잠깐 외출이라고 하고 올까? 싶을 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장비 소장이다.
3. 장비 소장
장비 소장은 벽체 수직, 바닥 수평, 단열 등을 확인한다. 보일러가 들어오면 보일러 배관이 어떻게 깔려있는지 보여주고 사진도 찍어준다. 점검을 위해 열화상 카메라와 레벨기 등의 장비를 지참한다. 장비가 필요한 항목만을 집중적으로 점검하기에 체류 시간이 짧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보편적 진리에, 그에 상응하는 말로 인생은 복불복이라는 말을 더하고 싶다. 인생은 복불복. 같은 시공사여도, 같은 아파트여도, 심지어 같은 라인이어도 세대 내 컨디션은 저마다 차이가 있다. 세상 만물이 전부 확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확률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느새 하자 점검이 전부 끝났다. 하자가 예상보다 적은가? 예상만큼인가? 예상보다 많은가? 뽑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열심히 보수를 받아보는 수밖에 없다.
바로 당신까지, 우리는 한 팀인 거다.
2026년 8월 7일 금요일
수요일
오늘은 수요일이다. 빨래를 돌리는 중이다. 이웃에게 고양이를 봐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없는 동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떠나는 건 다음주 수요일이니까 아직 일주일이 있는데, 벌써 열쇠를 주고, 이웃집 고양이 구경도 하고, 나중에 혹시 네가 떠나게 되면 내가 네 고양이 봐줄게, 그렇게 인사하고, 고양이도 안녕, 사람도 안녕, 집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가구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혼자 있으면 불안한데, 오늘은 이상하게 이렇게 빈 공간들이 있어서 가벼운 기분이다. 가벼운 기분.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누군가와 긴 대화를 나누었고, 대화를 나눈 뒤에는 나는 내 삶이 있어, 가 아니라, 나에게는 어떤 삶이 있어,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너는 네 삶이 있겠지. 너만의 고유한 삶. 너의 특별한 삶. 네가 놓치고 싶지 않은 삶. 너의 파란만장할 삶. 너의 성공적인 삶. 네가 꿈꾸는 너의 삶. 네가 계속 믿으면 이루어지는 삶. 네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삶. 하지만 나는 단지 une vie가 있어,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2026년 8월 5일 수요일
"서정시"-북쪽 답사를 권함
겨울에는 고구려 성에 가볼 것을 권합니다.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 당신이 갈 수 있는 곳까지. 북으로 갈수록 눈밭일 겁니다. 어쩌면 너무 낯설거나 한가한 제안인가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석축의 둘레가 크지 않고 도처가 붕괴되었으며 축성 시 기도 알 수 없는 몇 채의 성을. 사방에서 피로한 공격을 받았으나 훼손된 채로 하던 일을 고 스란히 계속하는 성들을 알고 있으시지요? 당신의 삶도 퍽 그러하시지요?
해가 저물 무렵 가보십시오.
자유로를 따라 북으로, 북으로! 달려보십시오.
라디오를 켜면 지역 방송이 잡힙니다. 가끔 약한 신호, 소리가 물에 잠긴 듯 눌려 있으나 이마저도 눈보라 치는 소리 같은 것입니다. 라디오니까요! 그것도 바람 속을 시원하게 달리는 차 속의…
한참을 달리면 〈아! 고구려〉 간판과 만날 겁니다. 주말에 가신다면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 인들이 가족과 함께 〈한탄강 오두막골〉이나 〈아우라지매운탕〉 〈망향비빔국수 본점〉 같은 델 가고 있습니다. 민물매운탕이나 가물치구이를 드셔보셨거나 좋아하세요? 선의로 들르시거나 마음대로 지나쳐 가십시오.
막상 도착하면 그저 작은 언덕일 겁니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 유속이 느려지는 여울목 에 세운 삼각형의 낮은 보루일 겁니다. 세상은 사람과 건물로 꽉 들어차 있는데 거기만 평지 에서 휙 솟아서 돌출된 고공을 얻습니다. 찬 바람이 강합니다. 살을 에는 밤, 당신이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잔뜩 얼어서 빛나는 별이 보입니다.
한국의 겨울 새들이 날아갈 겁니다. 우는 소리로 당신의 귓속을 채우지 않고 유유히 브이 자로 날아갈 겁니다. 그러니까 일하고, 사람들 하고 살다가 기어이 억울하면 거기 가보십시오.
책장에서 『한국의 새』라는 책을 꺼내어 보여드릴게요. 흰 이마를 가진 기러기부터 드물게 관찰되는 줄기러기까지, 겨울마다 한반도로 돌아오는 기러기의 생태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추우면 추울수록 반드시 돌아오는 그 새가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해 목적지를 정한다는 이야기. 당신도 당연히 좋아하실 겁니다.
쇠락한 지 천삼백년이 지난 고구려 성들은 점점 망가지고 있는 우리를 묶어줄 겁니다. 성곽 아래엔 죽은 고구려 사람들이 누워 있어서 혼자 여행하더라도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지요. 최근엔 조선 왕실의 행사를 그린 도록을 뒤적이다가 1828년 6월 1일 초연됐다는 고구려 춤 기록을 보았습니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고구려」를 바탕으로 연행한 춤이라지요. 이백은 금으로 꾸민 꽃을 매단 모자를 쓰고 백마에 올라 머뭇거리는 고구려 유민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가 넓은 소매를 휘날리며 춤추는 모습이 꼭 고구려에서 날아온 새 같았답니다.
“무용수 여섯이 나와 선다. 이백의 「고구려」를 노래한다. 여섯 명의 무용수는 둘씩 서로 상대하여 춤춘다. 등지기도 하고 마주보기도 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고, 돌면 서 춤을 춘다. 춤을 마치면 물러나 퇴장한다.”
이제는 무너진 성에서 계속되는 춤을 떠올릴 수밖에요. 조각난 기와, 소, 말, 개, 노루의 뼈, 탄화된 곡물, 발이 세 개 달린 벼루, 커다란 밥공기, 흙으로 빚은 북, 화살촉, 금동불상, 저울 추 같은 것들이 출토되었고, 지금은 도로 묻어 풀밭이 되었다는데요,
나는 죽은 이들이 꼭 으스스하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영가들이 구름 신발을 신고 무너진 성벽을 타며 춤추는 상상. 그들을 만나러 가는 우리. 생각만 해도 경쾌하지요. 나는 한 없이 어두운 마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밝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툭 끊기고, 갑자기 오래된 노래 한 곡이 흘러나오 면 당신은 모르는 채로 계속 들으시지요? 너무 오래되어서 긁힌 듯한 잡음만 기억에 남아도 전혀 괜찮으시지요?
한탄강처럼 이렇게 흘러가도 좋은 삶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행자는 바뀌어 당신은 침착한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북쪽의 고구려 성에 다녀오면요.
그리고 다시 안부 전해주십시오.
당신을 아끼는
김깃 拜上
"서정시"-수국
"서정시"-골분
시공사가 펜이 잘 나옴
주말에는 아랫지방에 다녀왔다. 도착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 태양 아래서 타 죽어가는 뱀파이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고 기온 39도. 올여름이 앞으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고 과학자들이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사전점검 기간에 사용되는 전기료와 가스비는 시공사에서 부담해야 한다. 때문에 여름에도 세대 내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 현장들이 더러 있다.
시공사A는 여러모로 악명이 높은데, 이제껏 여름에 에어컨을 가동해 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도 그중 하나다. (다행히 이번 현장에서는 예외적으로 틀어줬다.)
그러나 에어컨 하나 틀어주었다고 시공사A의 악명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다. 풍문에 의하면 시공사A는 흔히 건설사 설립 일화라고 할 때 떠오르는 전철을 모두 밟았다고 한다. 깡패 출신의 회장이 임대업을 하다가 건설업이 돈이 된다는 걸 깨닫고 시공사A를 차리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회장으로부터 내려오는 조직 문화는 조폭과 같아서 신축 아파트 현장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현장 분위기는 살벌하다. 사전점검 대행업체와 관련해 시공사와 입주민 측의 사정이 다른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시공사A는 과도한 대응으로 문제가 되곤 한다. (다른 시공사들은 고객의 권리를 우선시 해 대행 업체를 쫓아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가령, 입주예정자와 가족 관계인 사람이어도 가족관계증명서를 지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경우를 본 적도 제법 있다. 그뿐인가. 고객들이 하자를 신청해도, 다른 시공사였다면 충분히 보수를 받았을 법한 하자를 처리해주지 않는 등의 문제도 심각했다. 그나마 주택법이 개정되고 시행되면서 시공사A의 보수율도 높아졌다. 이런 걸 보면 역시 기업은 합의가 아니라 규제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시공사A는 유난히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뭐 우리야 현장 상황이 어떻든 고객의 요청에 따라 점검을 해야 하므로, 어떻게든 입장하고, 쫓아오면 도망가고, 쫓겨나면 다시 고객과 동행해 들어가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며 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도 화장실도 못 쓰게 하는 건 정말 너무하다 싶지만, 백 한 번 양보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보지만, 그래도 그건 진짜 너무하다는 생각이 무한반복 된다.
그래도 시공사A의 좋은 점을 꼽아보자면, 그곳에서 나눠주는 펜이 참 좋다는 것이다. 과거보다 훠얼씬 너프되었음에도 술술 써지는 그 펜만큼은 모두가 입을 모아 최고라고 얘기한다.
2026년 8월 1일 토요일
26년 7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0―――
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71,313원 (0원 + 370,918원 + 395원)2026년 7월 31일 금요일
2026년 7월 22일 수요일
폭염
선풍기 매진. 판매량 급증. 바짝 마른 곡식들. 식량의 없음. 그런 와중에 선풍기도 없는 집에. 건물의 가장 위층에. 땀을 흘리면서 밥을 먹고. 밥을 먹은 뒤에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아마도 이 폭염이. 짧게 잠이 들었을 때.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있는 공간을 감각하기가 어려웠고. 내가 발코니에 있는지. 언젠가 갔던 모래사장 위에 누워 있는지. 차가운 풀 위에 누워 있는지. 나를 가족처럼 대해줬던 어떤 사람들의 집 소파에 누워 있는지. 그 사람들이 나를 위해 이불보를 세탁해놓았고, 이불보에서는 깨끗한 세제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고. 그러는 가운데 이곳이 어디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졌다. 아마도 예전에 천사를 생각하며 잠이 든 어떤 침대에서, 그 침대에서 뒤척이는 게 아닌가. 천사를 생각하는 동안 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는데, 내 주위에 갑자기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고, 불안함 때문에,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불안함 때문에 잠에서 깨기가 두려웠는데. 이곳은 식량 부족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시대일 수도 있다. 내가 누웠던 모든 더운 공간들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면서 어떤 때는 더운 것이 싫었고 어떤 때는 더운 것이 좋았다.
2026년 7월 20일 월요일
목적을 위한 장마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비가 멈추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지
그래서 구름이 창문이
당신이 쉽게 도망가도 모습은
이상하지 않지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건
그저 혼자서 쓸 수밖에 없는 우산
멈추지 않는 날씨를 흔들어본다
내려오는 습기를 세워본다
손바닥을 펼쳐 미래를 닦아본다
아무것에도 부딪히지 않는 장마
그래도 날씨는 만들어진다
머릿속에서 가득 차는 물체들
우리의 비를 버린 당신은
팔을 휘적이며
우산의 목적을 찾지
그래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고
당신이 미래를 받으려 돌아다닌다
내 마음의 죽은 우산을 뒤집어쓰고
우산의 목적은 마치
누군가를 찌르는 풍경
쥐들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젖어 들 수밖에 없는 장마의 날들
할 수 없는 일을 알게 되는 일이 좋아
할 수 없어서 결국 놓아버릴 수 있게 되는 일을 알게 되어서 좋아
나는 결국 당신을 말할 수 없었지만
비가 내리기 전과 내린 후의 풍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조금도 부끄럽지 않고
이상하지 않은 마음을 갖고 싶어
비는 아직 그곳에 있으므로
2026년 7월 1일 수요일
26년 6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1―――
이달의 총격려금
20,000원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5일 / 20,000원 ― 사명찾아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社名을 찾아서 [入] ☞ 20,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70,918원 (0원 + 370,438원 + 480원)2026년 6월 30일 화요일
교환회
여기까지 말했을 때,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최근 1년 사이 우리는 자의로 타의로 하던 일을 그만둔 처지였다. 우리 또래가 다 이런가? 어쩌다 보니 책 근처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친구들. 이 바닥에서도 무슨 셀렙이 나왔다고? 작가는 아니고 평자도 아닌데? 그러나 명의 있음 자체가 암의 있음을 가리키는 법... 뭐라뭐라 줮까는 소리들 주워섬기는 거도 지겹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역시 사업을 펼쳐야 할까?
최근 몇 달 불교계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교정하며 읽는 불교 이야기는 흥미롭다. 특히 윤회는 기가 막힌 발명 같다. 사제들의 발명이고 인민의 발명이다. 불교라는 비유 보따리를 풀어 헤친 다음 기독교라는 보자기로 다시 감싸 보면, 윤회는 사탄의 위상과 유사하게, 열반은 대속의 위상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예수가 대속과 부활을 통해 유일한 1윤회를 수행했다면 석가모니는 열반과 입멸을 통해 심판의 날을 개인화한 셈이다. 과연 사탄과 윤회가 대등한 위상이라면, 예수는 결국 1사탄 한 것이고, 석가모니는 저승의 개인화를 중단시킨 것이다. 각자가 부정하고 나온 토양에 따라 평등 문제를 푸는 해법이 음각이거나 양각, 어느 쪽이건 일자一者라는 정신병적 막무가내를 통해 평등을 상상시켰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 시절엔 정녕 그 방법밖에 없었는가? 그럼 지금은? 왜 이런 얘길 하지? 내가 뜻 없는 뇌내연구에 홀려 잠꼬대 늘어놓는 ‘바로 그런 아저씨들’이 되어 가는 걸까?
말하기가 그렇듯 쓰기에도 무작정 아름답고 권할 만한 면모만 있는 게 아니다. 추하고 어두운 면모도 있다. 오해, 몰이해, 교만, 합리화, 낭만화, 평면화, 일반화, 과대화와 과소화, 거짓... 파괴적인, 본래적으로 반존재적인 면모도 있다. 그런 특성들은 남뿐 아니라 쓰는 자신도 해코지할 수 있다. 부지불식간이다. 말은 그래도 어지간하면 앞에 듣는 이가 있다. 쓰기로 말하자면 제일 먼저 읽는 이는 나다. 쓰이는 것이 나의 것이 아닌 줄도 잊은 채 쓰고 만다. 쓰기의 어두운 면모들은 쓰는 이의 서투름이나 악의만으로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쓰기 자체에 포함된 고약한 가능성이고 부작용이다. 글과 세계 사이에는 그 특질상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둠의 불꽃이 있으며, 그 불꽃은 쓰기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경계될 필요가 있다. 인정되어야 하고 가다듬어져야, 통제되고 닦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일테면 ‘한 순간 존재하는 모든 글의 총합’으로서 총텍스트라는 것을 상상해 보자. 문학은 그가운데서 어둠의 불꽃의 캠프였다.
쓰기가 거의 모두의 것으로서 집체통신과 AI에 힘입어 자신의 제대로 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만방에 녹아든 오늘날에 이르러, 쓰기는 자신의 어두운 특성에 집어삼켜지고 있다. 쓰기가 쓰는 이를 집어삼킨다. 써야 하는 것이 있고, 써도 되는 것이 있고, 쓰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진대... 그 모두의 무차별 뒤섞임 속에 쓰기는 문학화되고 있다. 쓰인 것이란 근본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쓰기와 읽기를 통해서만 소통한다면 우리의 총영혼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상적으로 들리는 ‘누구나 쓸 수 있다 / 누구나 읽을 수 있다’의, 이 현실 속에서 종합은 ‘아무나가 아무렇게나 쓴 것을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읽은 다음 부지불식간에 아무렇게나 써서 또 아무에게나 읽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는 고래로부터 문제였다. 특히 종교와 읽기는 역사를 통틀어 떼어놓을 수 없었다. 모두가 아무것이나 읽지 못하도록 교도들이 기울여 온 넓고 깊은 노력을 톺아보면, 오늘날의 상황은 지옥 그 자체다. 그리고 더 더할 말이 없다. 우리의 사업 계획은 이렇다. 진실로 이 세계에 새로운 책을 더하고 싶지 않다면, 이미 충분히 괜찮은 책이 차고 넘치도록 많다면, 책들을 굳이 창고에서 꺼내지 않아도 된다면, 출판사라는 개념을 별로 앞세울 이유도 없다면, 우리에게 적절한 물리적 공간과 집기들이 주어진다면, 바로 그 공간과 집기들로만 지속될 필요도 없다면... 만약 우리의 사업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그러나 우리가 느끼기에 분명히 필요한 사업이라면, 그냥 그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판사 교환회의 등장이 이와 같다.
처음에는 하루면 될 것이다. 참가자 다섯 명만 모아도 된다. 남 주고 싶은 책을 집에서 가지고 온다. 테이블 다섯 개는 필요하다. 의자도 다섯 개 필요하다. 의자는 더 많아도 좋다. 펴놓고 서로의 책을 읽어 본다. 가져가고 싶은 책은 가져간다. 단, 가져온 책과 가져가는 책의 수량은 같아야 한다. 책을 가져오지 않는 참가자도 있을 수 있다. 대환영이다. 그 참가자가 가져가는 책만큼 집에는 덜 가져가도 된다. 처음에는 한 달 정도의 준비와 홍보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참가자들이 책을 고르고 그 목록을 교환회에 넘긴다. 교환회에서 만드는 책은 전자책이다. 이 페어에 참가하는 모든 책의 목록이다. 그 책이 티켓이다. 사업 목표는 2박 3일 규모가 되는 것. 천막들과 텐트들을 치는 것. 행사명은 책 지옥전... 책 연옥전... 책 윤회전... 책 부활전...
2026년 6월 29일 월요일
벼랑 아래
A와의 결혼식 전날 밤. 식을 취소했다. 그 비용으로 인터넷을 통해 벼랑 아래의 길을 다듬어 줄 작업자를 찾아 방문 상담을 요청했다. 늦은 시간인데 곧바로 작업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사돈에다가 팔촌까지 다 데리고. 결혼을 미리 축하하려고 온 나랑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심각해졌다. 오래전 연락조차 끊긴 B까지 와 있었는데, B에 대한 반가움과 A, B, C, D 모두를 실망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뒤로 하고 나는 작업자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어떤 길이지?”
“벼랑 아래입니다. 다양한 모양의 바위가 깔려 있고요, 물이 조금 흘러요.”
“빠르게 마칠수록 비용은 올라가.”
“정말요?”
“정말이야. 나는 국제적으로 위상이 높은 인물이거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제발 다들 멈춰! 내가 여기 주인이야!”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음악을 틀었다. 아주아주 크게 틀었다.
2026년 6월 17일 수요일
[25호 서신]
*26년도 하계 진입
- 기후위기로 인한 생활 변화에 요주의
- 개인 위생 관리
- 격화되는 국내외 정세 대비(주변 연락망 조직화/참여)
- 좋은 것을 공유하기
- 충분한 휴식
*운영 10년차까지 반년 앞으로, 현황 보고
- 지금까지의 모든 필자 수: 23인
- 현 필자 수: 9인
- 모든 태그의 수: 36종
- 입하 중인 태그의 수: 11종
- 저장고로 들어간 태그의 수: 20종
- 총 게시물 수: 746편
- 총 읽힘 수: 216,703회
- 현재 기금: 370,438원
*이메일 구독 방식 변화
- 창고관리인 신상 변화로 관리노동 저감 불가피, 보름간 폐지
- 자동화 이메일 발송 기능 추가
- 새로운 입하가 있으면 다음 날 아침 메일 발송
- 시스템상의 문제로 구독자 제한 100명
- 구독자 수 100명이 넘으면 열독률 체크를 통해 주기적 정리
- 필자는 주소록에 기본 등록
*권장사항
- 공용태그 작성
- 월 1회 입하
- 투고 권유
- 기금 사용 방안 모색
이상
2026년 6월 15일 월요일
쥐 마술 ➊
펜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이제 막 첫 대사를 쓰려던 참이었다. 깃털펜 끝에서 잉크가 번져 작은 검은 별이 되었다. 루틀리지는 그 별을 잠시 노려보았다. 직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실이 맥없이 탁 풀렸다. 또 망했군. 하긴 늘 망한다. 게친이 망칠 빌미를 주는 건지, 망하는 핑계를 게친에게서 찾는 건지. 아마추어 극작가인 그는 늘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는 의자를 뒤로 물리며 한숨과 함께 일어선 다음 쏘아붙일 말을 고르며 눈을 잔뜩 조였다. 그 눈으로 문간에 서 있는 아이가 들어왔다. 덥수룩하게 엉킨 머리가 작은 얼굴의 절반을 덮었고, 그 틈으로 두 눈만 지나치게 컸다. 맨발 밑엔 흙인지 때인지 모를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야위었는데도 말랐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웬 쥐 한 마리가 서 있어? 아이를 둘이나 키워보았으니 나이는 대충 가늠이 되었다. 여덟 살, 아니 아홉 살 정도 됐겠네.
“잠깐 이리 와봐, 게친.”
게친이 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어깨에 얹혀 있던 한 손을 살포시 떼면서. 게친이 다가오는 것은 바깥이 다가오는 일과 같았다. 그녀한테는 항상 자신과 다른 냄새, 바깥 냄새가 났으니까. 신선한 풀과 흙, 아무것도 한 곳에 고이지 않도록 바람이 몸 이곳저곳을 두드리고 지나간 냄새. 내 옆에 있으면 게친도 나의 냄새를 맡겠지.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사람의 조용하고 눅눅한 냄새. 닫힌 방과 식은 찻잔과 오래 접어둔 담요 같은 냄새. 그러나 게친은 섬세하지 않은 편이어서, 들리고 보이고 만져지는 것 이외에는 무심했다. 그건 흠도 아니고 단점도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게친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루틀리지를 내려다보았다. 잘했지? 미소는 하강하며 그런 말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머리 하나 정도로 키 차이가 났다.
“약속했잖아.” 루틀리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화를 내봤자 소용없음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맡을 생각은 아니지?” 그 말의 그림자에서 자식이라는 단어가 부풀어올라 두 사람 사이 찬 공기 속에 풍선처럼 떠 있었다. 웃음은 여전히 게친 입가에 머물렀지만 눈에서는 사라졌다. 당혹감과 함께 떠나간 것이다. 게친은 몸을 돌려 문간의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든 달아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한 발을 뒤로 살짝 빼고 있는 저 아이, 자신이 주워온 저 아이에게.
“약속 같은 거 안 했어.”
“했어.”
“솔직히 기억 잘 안 나.”
“게친.”
“버리고 왔어야 한다는 거야?”
“구하지 말자는 게 아냐. 그런데 우리가 키울 수는 없어. 기억하고 있느냐는 거야.”
게친이 문간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고야. 널 소개할 차례야.” 아이는 화들짝 놀라 주춤하다가, 이내 허둥지둥 달려와 게친 뒤로 숨었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얼굴을 빼꼼 내밀어 루틀리지를 훔쳐보는 것이었다. 정찰을 하듯. 아이가 가까워지자 루틀리지는 불만스럽게 입을 닥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뭐니?”
루틀리지가 물었다. 고야는 대답하는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게친을 올려다 보았다.
“고야라고 했잖아.”
“그래, 고야. 성은?”
“프리올.”
“그래, 프리올이구나. 그런데 게친, 애가 말하도록 내버려두면 안 돼?”
“시간 아깝잖아. 할 게 많아. 가르쳐 줄 것도 많고, 밥도 먹여야 돼.”
루틀리지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주무르다가 말했다.
“그래, 고야 프리올. 좋은 이름이네. 아무튼 우린 널 보살펴 줄 거야. 그러니까 편안하게 있어도 돼. 네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말이야.”
“앞으로 항상.”
“적어도 몇 달은. 몇 살이니?”
열한 살이라는 대답에 루틀리지는 깜짝 놀랐다.
“열한 살이라고? 몸집이 굉장히 작구나.”
루틀리지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긁으며 말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감안하더라도 작아. 손을 내밀어보렴. 손가락을 볼 테니까.”
잠깐이었지만 루틀리지는 고야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읽어냈다. 손을 내민 고야는 시선을 내렸다. 손도 아니고 바닥도 아닌, 그보다 아래에 있을 밑바닥을 바라보듯. 그 사이 루틀리지가 고야의 손을 들고 살폈다. 하나가 달랐다. 앙금이 내려앉은 왼손 약지가 납처럼 창백한 하얀색으로 변해있었다. 죽은 손가락처럼 차가웠다. 그도 어렸을 때 그랬고 누군가에게 거두어졌다. 이런 일은 겪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설명해줄게. 너도 이제 우리가 될 테니까.” 고야가 눈을 깜박였다. “마술사, 우리가 된다는 것은 마술사가 된다는 거야.” 그래, 마술사. 세계에 칼집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 게친이 왼손 약지를 고야에게 보여줬다. 오래 손때를 먹어 거뭇하게 바랜 은이 정확히 약지를 반으로 나누는 곳에 끼워져 있었다.
“네 손가락을 잘라낼 거야.” 게친이 성급하게 말했다. 고야가 처음으로 루틀리지를 정면으로 올려다봤다.
2026년 6월 11일 목요일
개, 오각별, 수도원 ❷
그런데 소렌샤의 팔은 당겨지지 않았다. 비스듬히 꺾어 힘을 주고 있는데, 고통스러울 텐데 움직이지 않았다. 엄지 밑에서 맥이 잡혔다. 빠르지 않았다. 느린 편이었다. 한 박자, 또 한 박자.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의 맥이었다.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이대로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데 그 앙상한 것이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손아귀 안에서 조금도 떨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그의 손이 아니라 그의 눈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입꼬리가 한쪽만, 천천히 올라갔다.
고더린은 묘한 생기가 피어오른 소렌샤의 눈에서 성별과 체격이 아무런 변수도 될 수 없음을 읽었다. 자신이 지금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더 크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곰이나 사자, 호랑이라 하더라도 소렌샤는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개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한 마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또 한 마리는 뒷발로 귀 뒤를 긁다 말고 다시 머리를 발 위에 얹었다. 제 주인이 낯선 사내에게 손목을 잡혔는데도, 일곱 마리 중 누구 하나 일어서지 않았다.더러운 기분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그가 남성이기 때문에 겪는 훼손이었다. 비루한 거였다. 고더린은 언제나 거리낌 없이 내밀고 이용해오던, 높은 확률로 이득을 가져다 주던 자신의 남성됨이 분개하는 것을 느꼈다.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라는 사실을 밑천처럼 굴려온 남자였으니까. 가장 낮은 남자조차 거저 받는 남자를.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 패는 좋은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이 여자 앞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소렌샤는 고더린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에는 경계도 감탄도, 하다못해 혐오도 없었다. 소렌샤가 그를 보는 눈은, 작고 어설픈 것이 제 딴엔 사뭇 진지하게 구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런 눈이었다. 신발 끈을 물고 늘어지는 강아지를 볼 때의 눈. 위협이 아니라 구경거리를 볼 때의 눈. 고더린은 손을 슬쩍 더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자신보다 강한 남자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 왜 자신보다 강한 여자 앞에서는 이토록 불편해지는가?
고더린은 소렌샤의 손목을 천천히 놓고 뒤로 물러나며, 펼친 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올렸다. 소렌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방금 뭐 한 거예요? 지금은 또 뭐하는 거고요?” 밀빛 머리칼이 찰랑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허리춤의 장검이 살짝 흔들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고더린이 말했다. “나한테 줘요.” 애꿎은 개 한 마리의 꼬리를 밟았고 봉변을 당한 개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짖었다. “뭘 달라는 건데요? 정확히 말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고더린이 포도주라고 대답하자 소렌샤는 의아하다는 듯, 열린 나무 선반 안의 짙은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포도주?”저걸 저렇게 보관하다니! 고더린이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채 닿기도 전에 개 한 마리가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떠밀듯이가 아니라, 우연히 거기 멈춰 선 것처럼 태연하게. 고더린은 손을 거두고 반대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소렌샤가 빙그르르 돌았다. 맨발이 바닥을 쓸며 도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그녀는 선반과 그 사이에, 병을 등 뒤로 감춘 채 서 있었다. 고더린이 왼쪽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이쪽?” 그녀가 같은 박자로 따라 돌았다. 한 손밖에 없는 남자가, 한 손으로 가능한 모든 각도를 시도했다. 위로, 옆으로, 어깨 너머로. 그때마다 소렌샤는 손을 뻗기도 전에 거기 없었다. 개들이 거들었다. 한 마리가 고더린의 발치에 드러눕고, 한 마리가 무릎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며, 그가 디디려는 자리를 매번 한 발 먼저 차지했다. 다같이 추는 춤이었다. 소렌샤만 스텝을 아는 춤. 돌 때마다 밀빛 머리칼이 한 박자 늦게 따라 돌았고, 고더린이 헛손질을 할수록 그녀의 눈은 더 환해졌다. 마침내 고더린이 남은 무게를 전부 실어 소렌샤에게로 파고들었다. 소렌샤는 한 걸음 물러서며 그 기세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가 균형을 되찾기도 전에 포도주를 선반에 다시 집어넣고 탁, 미닫이문을 닫았다. 그녀의 손바닥 밑에서 춤의 마지막 박자가 정확하게 끝났다.
소렌샤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빙그레 웃었다.
“술이랑 여자 앞에서 난폭해진다는 건, 당신이 최악의 남자라는 뜻이겠네요.”
“최악이라뇨. 한 병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어서. 무심코.”
“무심코? 당신은 무심코 여자를 위협하나요?”
“잠깐 잡았다가 놓은 건데요, 뭐.”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아픈데요. 손목이 얼얼해요. 자국까지 남았는걸요.”
“저게 나한테 중요한 거라서요.”
“포도주가? 다른 것들보다 더?”
“항상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판에 박힌 말을 하는군요.”
“사과하고 싶습니다.”
“하시면 될 일 아닌가요? 왜 굳이 그런 말을 꺼내시는 거죠?”
“죄송합니다. 무례했어요.”
고더린은 감정을 억누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포도주는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소렌샤가 머리를 쳐들어 깔깔깔 웃고는, 얼굴을 찡그린 뒤 먼지를 털듯 머릴 흔들었다.
“원하는 걸 얻어내는 방법을 전혀 모르시네. 간절하다는 걸 알면 주고 싶지 않게 되잖아요. 게다가 난 이걸 나누려고 했었다고요.”
“몇 모금을 원하는 게 아니라요. 통째로 한 병을 원하는 겁니다.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않은 온전한 한 병을.”
“왜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한 병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요?”
소렌샤가 두 걸음, 세 걸음 고더린에게 다가갔다. 막힘없는 걸음이었다. 소렌샤는 머리칼 끝을 빙빙 돌리던 손가락을 앞으로 뻗어, 고더린의 가슴팍을 꾹 누르며 말했다.
“싫다면 어쩔 건데요?”
한 번, 두 번, 세 번째로 손가락 끝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꾸욱 눌렀다. “화났어요?” 그 말이 귓가에 들리는 순간 고더린의 남은 손은 이미 옆구리 뒤로 가 있었다.
왜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았지?
지레 겁먹고 있었던 거 아냐? 그래서 얼마나 강한 건데? 오각별 마술사라는 게?
물론 마술은 무섭지. 하지만 그건 거리가 있을 때 얘기야.
이렇게 숨이 닿게 붙어버리면 결국 몸이다. 내가 위일 게 분명하잖아.
게다가 남자도 아니고.
고더린의 눈이 소렌샤의 가는 손목으로 내려갔다.
이 여자가 실제로 나보다 강하다면 나는 약자야.
약자가 기습 한 번 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어디 피해봐라.
고더린은 단숨에 자세를 낮추고 옆구리 뒤 단검을 챘다. 잡은 즉시 빼 올려 벴다. 쇄골 아래가 길게 열릴 궤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엉뚱하게도 방금 그 소동이 떠올랐다. 선반을 두고 투닥거리던, 춤을 추는 것 같았던 그 소동이. 그 순간 고더린은 자기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저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제발 이 여자가, 정말로 무시무시하게 강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칼이 닿지 않기를 바랐다. 손이 무거워졌다.
“아아악!”
손이 무언가에 이끌려 아래로 떨어졌다. 치아가 살을 파고들어 짓이기는 순간, 손목이 뒤틀리며 저절로 경련이 일었고, 통증이 팔 전체로 퍼졌다. 고더린은 고통에 경망스럽게 소리질렀다. 그가 쥐던 것은 온데간데없고 검은 개 한 마리가 그의 손을 콱 문 채 노려보고 있었다. 곧 이빨을 얻은 주방이 달려들었다. 먼지에 파묻힌 채 바닥에 떨어져 있던 포크가 먼저였다. 다음은 철솥. 주걱이, 국자가, 깨진 사발과 벽에 걸린 냄비들이 차례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짖어대며 달려들었다. 성화가 그려진 창문마저, 지조 없이 개로 화해 고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슴팍을 밀어 그를 자빠뜨렸고, 등에 차가운 돌바닥이 닿았고, 그 위로 주방 한 채만큼의 개가 실렸다. 개들은 턱이 들어가는 모든 곳을 끊어내기 직전까지 문 채, 휘파람 한 번이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도록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악의 남자 맞네요.” 소렌샤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며 걸어왔다.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방 하나를 짐승 소굴로 바꿔놓고도, 컵에 물 한 잔 따른 사람처럼.
“방금 이걸로 수명이 꽤 줄었어요.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갑자기 오한이 서렸다. 고더린은 떨지 않았다. 떨기에는 너무 많은 송곳이 몸에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소렌샤는 쪼그려 앉아 고더린의 머리칼을 쓸었다. "당신 같은 남자들은 그냥 칼을 휘두르면 된다고 생각하나 봐요. 방금은 정말 좀 그랬어요.” 손이 머리칼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서늘해진 방 안에서 그 손만 따뜻했다.
고더린이 고통으로 끙끙대며 말했다.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전술적인 얘기죠.”
“그게 뭔데요?”
“여자 손목을 함부로 잡고 비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고더린은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수명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일 년 남짓. 왜 물어요?”
“남을지 말지 계산해야 하니까.”
소렌샤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내가 잠든 사이 날 죽이고 포도주를 훔쳐가려고요?”
“그러면 포도주밖에 안 남잖습니까.”
소렌샤는 고더린을 빤히 바라봤다.
“어차피 못할 거예요. 난 잠에 들지 않으니까. 뇌 속에 마술 찌꺼기가 너무 많거든요.”
개들의 턱힘이 천천히 풀렸다. 살을 붙잡고 있던 송곳니가 하나둘, 미련 없이 물러났다. 그를 짓누르던 무게가 걷혔지만 개들은 흩어지는 대신 소렌샤에게로 모였다. 한 마리가 일어나 소렌샤의 무릎께에 턱을 괴었고, 또 한 마리가 등 뒤로 몸을 말았다. 사병들이 도열하듯 개들은 그녀를 둘러 앉았다. 고더린의 입김이 허옇게 떠올랐다 흩어졌다. 그러나 이 추위의 한가운데 개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 년 뒤에 죽을 여자는 조금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개들의 군주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저런.”
고더린은 일어서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바닥은 차갑고 딱딱했고, 그는 아직 거기 누워 있었으며, 굴욕적이지 않았다.
“포도주가 그렇게 좋아요?”
소렌샤는 한참 고더린을 보았다. 서늘한 눈으로. 죽이고 나면 이후의 시간을 감당할 수 없겠지. 게다가 이 남자는 남을지 말지 계산한다고 말했다. 그녀도 계산을 했다. 죽임과 쓰임새에 관한.
“줄게요, 포도주.”
고더린의 귀가 곤두섰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그녀는 무릎의 개를 한 손으로 쓸면서, 다른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눌렀다. 두통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개들이 그녀 쪽으로 조금 더 붙었다.
“남편이 필요해요. 개 같은 남편.”
그녀가 옅게 웃었다.
“오라면 오고, 공을 던지면 물어오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나를 돌보기 위해 나를 섬기는 남편이죠.”
고더린이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미간을 찡그리는 동안,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어갔다.
“난 내 삶에 완전히 지쳤어요. 할 수 있는 건 할 만큼 했고, 이제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어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요. 그러니까 일 년간 내 수발을 들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떠오고, 내 얼굴을 닦고, 발을 씻겨요. 끼니를 차리고, 불을 꺼뜨리지 말고, 장작이 떨어지면 패다 놓고. 빨래를 하고, 마르면 개어요. 이 수도원을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어요.”
소렌샤의 목소리에 다시 희미한 장난기가 생겨났다.
“머리가 자주 아파요. 아프면 관자놀이를 눌러주고, 목덜미를 주물러요. 세게 말고, 적당히. 어디가 시원한지는 하다 보면 알게 돼요. 머리는 매일 빗겨야 해요. 엉키지 않게, 끝부터 천천히. 약초를 달이는 법도 가르쳐줄게요. 불 조절을 잘못하면 쓴맛만 나니까 옆에서 지키고 서서 저어요. 손톱도 깎아주고. 내가 부르면 와요. 날 심심하게 두지 마요. 당신은 재밌어야 해요. 매일. 무슨 수를 써서든. 노래를 하든, 이야기를 지어내든, 우스운 표정을 짓든. 내가 웃으면 잘하고 있는 거고 시들해 보이면 더 애써야 하는 거예요. 내가 듣기 싫은 소리는 하지 말고,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서 해요. 비위를 맞추라는 거예요. 새장 속 종달새처럼. 그리고 당신 때문에 생긴 이 아이들 말인데요.”
소렌샤가 서른 마리 남짓한 개들을 둘러보았다.
“밥을 주고, 씻기고, 매일 산책시켜요. 한 마리도 빠뜨리지 말고. 싸우면 말려요. 엉킨 털을 빗기고,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줘요. 이름을 붙이고 외워요. 서른 마리 다. 이름을 다 정했으면 그때부터 내게 말해줘요. 오늘은 어떤 녀석이 무슨 말썽을 부렸는지.”
그녀는 등을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긴 목록을 읊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 듯했다.
“당신이 좀 멍청하고 사악하긴 하지만, 이 정도 얘기했으면 알아들을 것 같네요. 내가 죽으면, 선반을 열어 포도주를 가져가요.”
고더린은 누운 채로 천장을 보았다. 죽어가는 여자의 수발 일 년, 짐승 서른 마리의 똥오줌, 그 끝에 포도주 한 병. 세상 누구도 이걸 성공한 강도짓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더린은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부탁했는데 당신이 아직 안 해준 게 하나 있죠.”
“세상 돌아가는 얘기?”
소렌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동안 개들밖에 없었거든요.”
*
그날부터 고더린의 남은 손은 평생 해본 적 없는 일들을 날마다 했다. 해도 표가 나지 않고, 안 하면 금세 티가 나는 일들이었다. 물을 길었고, 장작을 팼고, 서른 개의 이름을 지어내고 외웠다. 거미줄을 치우고, 방과 복도의 먼지를 털었다. 식탁을 닦았다. 약초를 태우면 다시 달였고,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기면 손등을 맞았다. 소렌샤가 씻는 것을 도왔고 발을 닦아주었으며 식사를 준비했다. 밤마다 전쟁과 포도 얘기를 해줬다.그녀는 끝내 잠들지 않았고,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말이 적어졌다.
일 년 후 고더린은 포도주 한 병을 쥐고 수도원을 나왔다. 굴뚝에서는 더 이상 연기가 나지 않았지만, 장작은 아직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강도였고, 그 점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턱을 넘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멈춰 수도원을 돌아봤다.
개들은 숲으로 갔다. 이름을 하나씩 가진 채로.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다. 그런대로 살 수 있었다.
2026년 6월 10일 수요일
음모론 교정
음모론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향한 픽션의 역류다. 다 그렇듯 메이저가 있고 마이너가 있다. 만약 우리가 진실로 음모론에 개입해야 한다면 누구나 쉽게 욕할 수 있는 마이너한 것보다는 그 뭔가를 함께 욕하고 있는 최대 다수가 신봉하는 메이저한 것에 대해서부터 개입하는 쪽이 더 끌리기 마련이다(‘多와 少’라는 긴장감으로부터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진실의 속성상 그렇다). 음모론을 중심에 두고 말해 보자. 픽션이란 ‘소화된’ 음모론이다. 어떤 음모론들이 문학화되지 못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뭔가를, 뭔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이렇게 막돼먹고 무책임할 리가 없다는 생각... 이 세계가 합리로써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합리가 독점 가능하다는 생각, 그런데 그 합리가 적들의 것이라는 생각... ‘적들’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재하는 적들. 음모론은 이해의 한계선에서 받아들일 수 없음이라는 밧줄을 붙잡고 미지로 뛰어내림이다. 미지의 적들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적들을 향해.
현시대 최고의 메이저 음모론을 꼽자면 단연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와 역사의 최후 형태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적은 바로 자본주의의 종료다. 자본주의라는 음모론의 결론은 자기파괴로 흐른다. 솔직히 자본주의 얘기는 진짜 지겹다. 그리고 그 지겨움까지가 자본주의 음모론을 구성한다. 온당하게 말해, 이 자본주의라는 음모론은 이미 너무 예전에 파산했는데도 너무 오래 작동 중이라는 점에서, 또한 多와 少라는 개념 그 자체를 다루는 음모론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시대 음모론들을 자본주의의 빗나간 파훼로서 키우는 양분이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적극적으로 음모론들을 독려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음모의 현현인 지배층이다. 더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지배층은 음모론을 자동화·상설화·산업화하는 데 이르렀다. 한 번 더 공정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지배층들마저 자신들의 음모론에, 과대망상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 조잡스런 사실 조각만을 던져주며 그 파편들을 음모론의 형태로 갖고 놀도록 장려하는 피투성이 먹이 공급 장치를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고 들어앉은 셈이다.
좀 갑작스러운 것 같지만 사주팔자 얘기를 해보자. 한국에서 사주팔자가 유행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 어째 갈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그에 맞춰 AI들도 아주 대단한 사주쟁이들이 되어 가고 있다. 얼마만큼의 불안이 꾸준히 세대를 이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기술봉건주의의 신자유노예들에게 제공되어야만 하는 경험일 것이다. 시험 삼아 사주를 교정해 보면 어떨까? 적절한 자리를 주기 위해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사주는 [문학]이다. 그것은 ‘캐해생성’이라는 장르의 중세문학이다. “재미로만 보라”는 말이 그 뜻이며, “어? 이거 내 얘긴데”가 바로 그 뜻(문학)이다. 한편 사주의 본이 되는 주역은 [세계관집]이라는 장르의 고대문학이다. 따라서 주역, 오행, 사주, 풍수, 수상, 작명 등등으로 이어지는 이 극동아문학복합체는 일종의 TRPG 룰북으로 보면 정확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타로는 [상징학]이다. 착상 제공에 특화되어 있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미술비평]이다. 와꾸에 대한 판단이 와꾸의 의미를 만든다. 신점은 [비과학적 상담심리학]이다. 상담가가 의학무당이듯 그렇다. 과학은 대체 어디에? 그간 나는 “별자리 성격이 바로 [과학]”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 왔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아기로서 1년 동안 겪는 기후와의 상호작용이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아기를 키워 보니 역시 확신이 든다. 색깔을 구분하고 눈을 마주치고 옹알이를 하고 몸을 뒤집는 그 모든 정해진 발달단계와 계절 사이가 무관할 리 없다! 물론 남반구의 경우 반대로 작동하며, 고위도나 저위도 지역의 경우에도 잘 맞지 않는다. ‘심리점성술(Psychological astrology)’로도 불리는 이 별자리 성격이 70년대부터 태동했다는 것으로 보아 냉난방 사정이 달라진 요즘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고, 기후에 대한 문화권별 계층별 상호작용 방식에서 기인하는 차이도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나? 거기다 기후위기까지 고려하면... 그러니까 애초에 행성들의 위치 같은 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아다리가 맞은 것뿐. 물론 농담이다.
이 순간 가장 핫한 음모론은 부정선거다. 자본주의 위기 가운데 민주주의는 위협당한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한 명의 인간 키워내기를 수없이 실패시키면서부터다. 부정선거 음모론의 밑에는 자본주의-실패에 대한 공포감이 자리한다. 그게 민주주의든 중공이든 가정이든 하나님이든 인생이든 뭐든... 그런 면에서 사주팔자와 별반 다르지도 않다. 위정자들과 자본가들이 점술이나 종교에 자꾸 기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여러 형태의 ‘뽕맛’ 산업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황과 최근 이룩된 다중-대량-소통 환경에서 피해망상과 편집증, 증오가 증폭·집단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중-대량-소통을 일으키거나 다뤄야만 했던 어떤 역사적 운동이 안 그랬겠냐마는, 현대의 특징은 방향이 반대라는 점, 즉 대중의 주된 경험 세계를 다중-대량-소통 자체가 대체하려 든다는 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첫째로, ‘믿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신화적 금언이 악몽판으로 도래한다. 집단은 그 외부로부터 믿어지는 바로 그것이 된다.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서로가 서로를 만져주고 만들어주면서다. 극우파가 되고 공산당이 된다. 부정선거나 전체주의 같은 것도? 서로의 한마디에 대해 한마디를 더하면서, 서로로부터 벽돌을 하나씩 빼주면서 와르르 도래한다. 일테면 부정한 것과 부실한 것을 서로가 구분하지 않게 되면서다. 부실하기 때문에 부정하고,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실하지 않다. 부정하다고 하기 때문에 부실함은 눈감고, 부정하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부실함은 눈감는다. 각자에게 가장 유리한 뭔가를 눈에 불을 켜 찾아내고 집요하게 편집한다. 누군가 뭔가를, 어쩌면 자신을 제발 좀 해쳐주기를, 간절히 은연히 여럿이 바라면서다. 자유주의자가 파시스트 되고 리버럴리스트가 전체주의자 된다. 다름 아닌 적들을 위해서, 적들에 대한 증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면서다. 자신들이 무엇이 되는지는 아무 상관 없이, ‘스스로 완전히 정당하게’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는 둘째로, 모든 진실한 것의 실체인 표현 불가능성이 크게 위협받는다. 진실은 속성상 신비로운 것이다. 아직 표현되지 않은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신비다. 신비는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뭔가, 표현으로부터 소외된 뭔가다. 많은 것이 적은 것 되고 적은 것이 많은 것 되도록 이끄는, 이 신비는 오늘날 억압당한다. 강제된 침묵이나 마찬가지인 너무 많은 말들 속에서다. 아무것도 ‘되질’ 않는다. 나쁜 일들만, 가장 다행인 경우라도 쓸데없는 일들만 일어난다. 문학은 표현으로부터의 소외를 공전하며 진실을 양각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반면, 읽기의 총체적 실패인 음모론은 운명을 독점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우스움을 향해 대가리부터 돌진한다. 망상적 진지함으로, 자포자기의 도박 유희로, 둘의 뒤섞임으로. 과연 우리가 어떤 백신-허구를 투입할 수 있을까? 증오에 대한 이 뜨거운 진짜 사랑을 버릴 수 있을까? 거짓으로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진실은 거짓을 이기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극우파의 지구적 대두는 진정한 행성사회주의 도래를 앞당기려는 자연의 설계이고 공작이다. 그것은 서기로 따지면 1807년 또는 1812년부터 시작되었다.
2026년 6월 8일 월요일
까마귀들과의 대화
까마귀 롯테: 이곳은 어두워. 비밀을 간직한 곳이군. 주위를 보면 나무들, 넝쿨들이 서로 얽혀 있어. 난 잠자야 하는데. 이곳은 너무 어두워서 걱정이 돼. 잠들면 다시 못 일어나는 게 아닐까?
까마귀 나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걸. 왜냐하면 너는 지금도 까만 네 날개로써 눈 앞을 가리고 있잖아. 시간이 밤이거나, 이곳이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라서 어두운 게 아냐. 너는 스스로 네 밝은 세상을 가려버린 다음 날개를 치우는 것을 깜빡했을 뿐이지.
까마귀 믄지에: 졸려워. 그리고 외롭다.
에피: 이봐들, 내가 보여?
까마귀 롯테: 넌 인간인가?
에피: 그래. 내가 보이는가 보구나.
까마귀 롯테: 저 말을 듣고 내 날개를 치웠어도 어둡군. 세계가 잘 보이지 않아. 단지 목소리가 나는 위치로 짐작했을 뿐. 보통 목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물들은 별로 없거든. 인간을 제외한다면. 두 발로 선.
까마귀 나니: 인간, 안녕. 넌 특이하게 생겼구나.
에피: 너희들은 숲에 가려져서 지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
까마귀 믄지에: 소란이군. 아무나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에피: 너희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
까마귀 롯테: 우리가 왜 까마귀인지 물어보려는 거야?
까마귀 나니: 까마귀가 왜 우리들뿐인지를 의아해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까마귀 믄지에: 난 예전에 알들을 낳았어. 그리곤 쏜살같이 다른 데로 날아가버렸어.
에피: 궁금한 것이 있어. 마법이 뭐라고 생각해?
까마귀 롯테: 마법?
에피: 응. 반짝이는 물건을 좋아하고, 우리네 아이들 정도로 똑똑하다고 하는 너희들에게 물어보는 거야. 어릴 때에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거든. 마법이 그쪽에 있을지도 모르지.
까마귀 나니: 대답해주지. 전에 생각해본 적이 있었으니까. 마법이란 건, 우리들 까마귀 시점으로 보면 반짝이는 물건의 반짝임과 비슷한 거야. 거기서 순서는 올바르게 짜여 있지. 우리들은 반짝이는 물건을 수집하고, 너희 인간들은 물건의 반짝임을 좇는다고 할 수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에피: 잘 모르겠어. 어려워.
까마귀 나니: 숙모라고 할까? 숙모가 숙모가 되기 전에는 어떤 존재였을까? 너 같은 조카가 있기 전에는. 그냥 소녀였을 거야. 눈이 반짝이는. 그런 것과 비슷해.
에피: 이름은 그대로고, 그때의 직함만이 바뀐다는 건가?
까마귀 나니: 그렇지. 언제나 그대로인 것은 물건의 모양이나 물건의 성질이 아니야. 너와 그 물건 사이에 오간 라포가 진짜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하나지.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인연, 혹은 인과라고 할 만하지. 누굴 중심으로, 어떤 것을 어떻게 속일까? 혹은 어떻게 감쪽같이 그것이 있던 자리에 무언가를 갖다 놓을까? 하는 문제야. 마법은.
까마귀 믄지에: 칠흑 같이 어두운 여기선, 유망한 마법사들도 헤엄치는 걸 마음대로 하지 못해. 수족관에 갇힌 상어처럼. 난 그 사실이 어쩐지 혹은 지독히도 슬퍼.
에피: 잘 모르겠군.
까마귀 롯테: 그런데 우리에게 마법은 왜 물어보는 거지?
에피: 잘 모르거든.
까마귀 롯테: 넌 네 자신에 대한 소개를 아직 하지 않았어.
에피: 그렇담 왜 질문에 답을 해준 거지?
까마귀 롯테: 네 소개를 들으려고.
까마귀 나니: 난 저런 식의 질문이 좋아. 평소에 생각이 많거든.
에피: 마법, 마법……. 난 그걸 봐왔어. 어릴 때부터. 어릴 때의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좀 달라졌지만. 그러고서 난 나이를 꽤 많이 먹었지. 난 그런 사람이야.
까마귀 나니: 왜 마법에 대해서 궁금한 거지?
에피: 대부분의 것들이 마법 같아서 말야.
까마귀 나니: 용도가 있는 마법이로군.
에피: 어떤 데에서는, 현대 기술로 이룰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을 마법이라고 하고,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마술이라고 했어.
까마귀 나니: 그것은 우리가 먹이를 잡아채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 먹이들은 죽으면 다시 저 모습 그대로 태어나거든.
까마귀 믄지에: 우리들의 몰이해로군. 우리들……, 나한테도 친구가 있었을지도. 그럼 내가 잊어버린 건가?
에피: 또 다른 어떤 데에서는, 게임 얘기를 했어. 게임에 나오는 점프가 마법이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인상 깊은 말이었어.
까마귀 나니: 너 자신이 마법사가 된다면 무슨 마법을 쓰고 싶어?
에피: 하늘을 나는 마법.
까마귀 나니: 그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에피: 어릴 때부터 생각했던 거야. 과학 기술이나 너희처럼 날개로 만들어진 기관으로 나는 것 이외의 활공을, 나는 오래도록 동경했었어.
까마귀 나니: 동경해왔다고? 넌 오랜 염원이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마법을 조사하려는 건가?
에피: 마법이 숨쉬듯이 할 수 있는 일이라야만 한다는 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조금 어려운 정도, 어느 정도 신경 쓸 수 있는 것들을 신경 쓰면서 한다면, 즉 연습을 한다면, 인간도 하늘을 날 수 있지 않을까?
까마귀 나니: 그건 불가능해.
에피: 어째서지?
까마귀 나니: 그건 마법이 다루는 영역이거든. 마법은 피상적인 불가능을 구체적인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야. 넌 그런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고.
에피: 너희들은 마법을 쓸 줄 알아?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까마귀 나니: 환상, 이야. 마법은.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처럼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꾸며내는 게 마법이야. 그걸 우리들은 환상이라고 불러.
에피: 없었던 일로 만든다……. 있었던 일로 만드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까마귀 나니: 우리 사이에 오간 대화도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게 네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라도.
에피: 대포알을 쏘는 마법보다는 조금 낭만적이군.
까마귀 나니: 그런데 이곳은 어디지?
에피: 네 마법 속일지도.
까마귀 믄지에: 그게 비밀이었어. 너희들이, 나한테 숨기는.
까마귀 롯테: 난 자야겠어.
까마귀 나니: 이곳은 어디지?
에피: 혹은 내 마법 속.
2026년 6월 1일 월요일
26년 5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0―――
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70,438원 (0원 + 370,093원 + 345원)2026년 5월 31일 일요일
고양이 낮잠
고양이들은 자고 있다. 날이 더워서 축 늘어져 있는데 나도 더워. 비가 왔으면 좋겠다.
A는 하우스 파티에 초대받아서 갔고, 나는 A에게 한 말들에 대해 앉아서 생각한다.
나는 A와의 관계에서 우위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 것 같다. 적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A의 성취를 달갑게 보지 않는 부분이 있다.
A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데, 내 앞에서는 자신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자신이 얼마나 더 대단한 것을 성취할 것인지, 최고가 될 것인지, 언젠가 유명해질 것인지 얘기하는데
나는 그것들이 내 관심 밖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A와 비교하면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A의 꿈에 대해 약간은 현실적이고 비판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있다.
A는 불안하다.
나도 불안하다.
A의 불안은 그렇게 세계 최고의 말들로 드러나고 내 불안은 그를 깎아내리려 하는 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내 삶에서 자주 반복해왔기 때문에. 자꾸 같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더 나아지지 않은 느낌이다.
2026년 5월 28일 목요일
아기를 즐겁게 돌봐요!
모든 아기는 웁니다.
어떤 아기는 훨씬 많이 울 수도 있습니다.
아기를 달래려는 노력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엄마나 아기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가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아기가 많이 울더라도,
절대 아기를 흔들면 안돼요!
ourbaby.seoul.kr
서울아기 건강 첫걸음 사업
2026년 5월 27일 수요일
비밀 유지 서약서
(타이틀) 오늘
장면 1. 출근 직후, 회의실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자국이 있는 비밀 유지 서약서를 내미는 Y.
대표, 당황한다.
Y
(대표를 똑바로 쳐다보며 유창하게) 사연이 있습니다.
Y, 말이 끝나자 눈을 바닥으로 내리는데 왠지 연극적이다.
Y
애인이랑 어제 길게 대화하면서 다투는 중에, 애인이 책상 위에 있는 아무 종이나 집어서 손으로 계속 구깃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가더라고요.
Y
전 그게 이 서류일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죄송합니다.
(타이틀) 어제
장면 2. 퇴근 직전, 회의실
대표와 Y, 서로 근로계약서에 서명한다.
다음으로 대표가 비밀 유지 서약서를 건넨다.
대표
이건 집 가서 읽고 서명해서 내일 가져오시면 돼요.
Y는 네–대답하고 비밀 유지 서약서를 받아 뒤돈다.
대표
아! 파일도 줄게요. 안 구겨지게.
Y
감사합니다~
대표
그리고, 건강보험 득실 확인서도 부탁드립니다.
Y는 잠시 침묵한다.
Y
혹시 어떤 부분 확인을 위해서 필요하실까요? 그게 조회 선택지가 다양하더라구요. 그래서..
대표
혹시 이중가입이라든가 세금 관련해서 몰래 투잡을 뛴다든가, 그런 경우 때문에 저희 쪽에서 미리 방지하는 겁니다.
Y는 머뭇거리며 말한다.
Y
직전 직장에서 아직 직장가입 상실 처리를 안 해줬을 거라.. 안 그래도 노동부에 신고하려고는 했는데.. 혹시 문제가 될까요?
대표의 표정이 이상하다. 이상해하는 이상한 표정이다.
대표
오늘 날짜 기준으로 가져오시면 돼요.
Y
저 혹시 상실 안 되어있으면 일 못하나요?
대표
그렇진 않습니다.
장면 3. Y의 귀갓길, 길가
Y, 폰으로 급히 건강보험 득실 내역을 확인한다.
인상을 찌푸리며 폰을 스크롤 하는 Y.
내역이 너무 많아 끝까지 다 내리지도 않고 화면을 끄는 Y. 한숨.
Y, 다시 폰 화면을 켜 구직 사이트 지원 내역에 들어가 지원했던 서류를 확인한다.
화면 맨 아래 작은 문구를 확대해서 본다.
‘위 내용이 허위일 경우 채용이 취소될 수 있음에 동의합니다.’
Y가 들고나온 가방은 작다. 그래서 비밀유지 서약서가 든 파일을 손에 들고 걷는다.
Y, 대표에게 문자를 보낸다.
“건강보험 직장가입 상실 잘 되어있네요! 현재 상태만 pdf로 제출해도 괜찮으실까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남아있는 대표와 이사.
대표
거짓말쟁이랑 일하냐 마냐야..
이사
오늘 편집한 영상은 괜찮았어?
대표
그건 문제없어
이사
그럼 그냥 예스 해! 직장가입자도 아닌 상태고, 사람 또 뽑을 여유 없어
대표
거짓말쟁이랑 일하냐 마냐인데...
장면 5. Y의 귀갓길, 지하철 안
지하철에서 손의 거스러미를 뜯고 있던 Y. 문자 알림이 울린다. Y는 서둘러 확인한다.
대표
“전체 내역을 제출해 주실 수 있나요?”
[픽스 / 롱 테이크]
Y는 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는다.
내리는 문은 오른쪽이고 틈이 넓으니 발을 조심하라는 지하철 안내음
[팔로우 / 원 테이크]
Y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하철에서 내린다.
파일에서 비밀 유지 서약서를 뺀다.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파일을 버린다.
[컷 전환]
서서 손에 남은 비밀유지 서약서를 보는 Y.
한 번 접는다. 절반으로.
그리고 앞으로 걷는다.
걸으면서 두 번째로 접는다. 또 반으로.
조금 더 빨리 걷는다.
주먹으로 콱 구긴다. 주머니에 넣는다. 우뚝, 걸음을 멈춘다.
Y, 길가 구석으로 간다. 짝다리를 짚고 폰을 꺼내 대표의 문자를 빤히 보다가, 답장을 보낸다.
“넵”
Y
그리고 이건 건강보험 득실 확인서예요.
Y가 서너 장쯤 되어 스테이플러가 찍힌 서류를 내민다.
대표, 한번 훑으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두 번째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찬찬히 살펴본다.
Y
짧게 일한 건 이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이력서에 기재 안 했었습니다. 혹시 허위 이력서라고 여겨진다면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대표
요청드린 거 다 가져오셨네요.
Y
저 일할 수 있나요?
대표
비밀 유지 서약서가 저렇게까지 구겨진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Y
아까 말씀드린 대로인데요.
대표, “믿겠냐?”를 뜻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Y
비밀로 해두고 싶습니다.
대표가 표정을 풀고 말한다. “앞으로는 거짓말 안 하시면 좋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2026년 5월 2일 토요일
꽃병을 위한 꽃꽂이
나는 당신이 무엇이 사올지도 궁금하지만
화병에 얼마나 많은 꽃을 꽂을 수 있을지도 궁금해 계속해서 꽃을 꽂았다
꽂을수록 꽃들은 뻣뻣해졌고 꽃과 꽃 사이의 거리도 좁아져서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라지는 않지만 갈수록 짙어지는 나무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도 여기에 꽃을 꽂을 수 있다는 것을
소국, 튤립, 작약, 거베라 미소, 애정, 수줍음, 수수께끼
무얼 가져와도 서로 머리 정도는 맞댈 수 있을 텐데
당신의 기분이 겨울이라도 불쏘시개 정도는 만들 수 있을 텐데
그저 당신은 이것저것 가져오기를 좋아해서
그래서 나도 꽃다발 사이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 나를 어딘가에 꽂아보고 싶다는 생각
셀 수 없이 많은 꽃 중에서 더 이상의 꽃을 견디기 힘든 꽃
혼자가 더 이상 혼자를 견디기 힘들 때 꽃병은 깨지겠지 꽃병에서 꽃이 쏟아지겠지
꽃을 꽂을 꽃병이 깨지면 당신은 어떤 것을 또 사오려나요
꽃꽂이가 이뤄진 꽃병이 아니라 쓰러진 꽃들과 깨진 꽃병을 위해서
당신은 어떤 것을 또 사오려나요
2026년 5월 1일 금요일
26년 4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1―――
이달의 총격려금
50,000원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11 / 50,000원 ― jan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곡물창고 ☞ 50,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70,093원 (50,000원 + 319,750원 + 343원)나중에 속을 수도 있는 일 ― 엘로이
온라인 게임은 아니었으면 한다. 우연히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그건 NPC.
어색하기만 했던 그들이 점점 내게 마음 여는 걸 보고 싶다.
저녁쯤 술집에 가면 항상 있는 그 녀석에게
기분을 내어 맥주 한잔 사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가의 수면 위로 별 쏟아지는 걸 보고 싶다.
그런 게임이 있기는 있다.
방금까지 난 그 게임을 떠올렸던 것이었고
그건 『스타듀 밸리』라는 이름의 게임이다.
어렵지 않고 공략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은 게임.
하지만 난 그걸 하면서 공략도 보고 치트도 쓰고 모드도 깔았다.
모드는 직접 만들기도 했다.
내가 만들었던 모드는 건물 리텍스처 모드로,
내 캐릭터의 농장에 설치할 수 있는 모든 건물을
미국의 시골 느낌 디자인에서
완벽한 프로방스 스타일로 교체한 것이었다.
그때 난 프로방스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 ‘프로방스 풍’이라는 말이 주는 노스탤직한 느낌을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아주 아름다운 이국의 풍경들을 만났고
그게 프로방스 스타일이라는 걸 알았다.
파스텔 색조의 창문 셔터들,
균일하지 않은 크림색 돌들로 이루어진 담벽들,
섬세하게 다듬어진 램프와 계단의 난간들,
양각과 음각이 조화를 이룬 아치형의 대문들….
그건 기본 스타듀 밸리의 쨍한 색감과는 어우러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DaisyNiko라는 유저가 만든 리컬러 모드를 사용하면 되었다.
Gweniaczek 님의 <중세 건물> 모드가
Latteholn 님의 <이탈리안 컨트리사이드 빌딩> 모드가
내가 <프로방스 건물> 모드를 만드는 데 많은 참고가 되었다.
Latteholn 님은 건물 리텍스처 모드를 시작으로 다양한 모드를 만들었는데,
하나는 <골든 아워>라는 모드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창문의 색감이 달라지게 하여
집 바깥이 아니라 집 내부에서도,
아침의 따뜻한 빛과 저녁빛의 서늘한 질감을 은은하게 체험하게 하는 그런 모드였다.
Latteholn 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을에 자기만의 NPC를 추가하는 모드도 만들었다.
NPC 추가 모드는 스타듀 밸리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모드의 종류 중 하나였고,
아마 스타듀 밸리 유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스타듀 밸리는 그런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NPC를 만나서 상호작용하는 것이 더 즐거운…,
난 Latteholn 님의 궤적이 이해가 갔고,
그를 따라 하고 싶었다.
건물의 스킨을 덧씌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외부의 빛을 내부로 들여오는 것으로,
빛을 들여오는 일에서부터
새로운 관계 하나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는
그 창작의 루트가, 아주 필연적인 연결이라고 생각했다.
<프로방스 건물> 모드를 만들고 나서 나는
곧바로 다른 모드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농장 외부에 설치할 수 있는 가구 아이템으로,
캐릭터가 그 구조물 아래를 직접 통과할 수 있는,
일종의 프레골라 형태의 커버형 구조물이었다.
정자와 유리온실, 두 가지 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보통 스타듀 밸리에서 온실은,
입구에서 워프하여 별도의 온실 맵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었는데,
내가 만들고 있는 아이템의 경우, 워프라는 과정 없이 바로 입장하여
반투명한 덮개 안에서 캐릭터가 이동할 수 있고 작물도 심을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온실의 경험을 만들어내려는 기획이 있었다.
난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캐릭터가 실제로 앉을 수 있는 의자,
수영할 수 있는 물가,
통과할 수 있는 구조물….
도트 게임에서 사물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경우의 가짓수란
어떤 사물을 맞닥뜨렸을 때 그것에 가로막혀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인 그 제약을,
아주 조금씩만 비틀어보며 아주 조금 다른 종류의 경험을 추가할 수 있는,
그 단순한 확장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소꿉장난 키트에 딸린 냉장고 모형의 문이,
실제로 열리기만 했는데도 가슴을 뛰게 했던 것처럼…….
그것을 한창 만들고 있을 때쯤, 넥서스에 새 NPC 추가 모드인 <엔야>가 올라왔다.
제작자는 Latteholn 님이었다.
막 올라온 상태라서 한글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 모드를 실행해 볼 수는 없었지만,
혼자 Latteholn 님과 모종의 공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극을 받아버린 나는,
만들고 있던 프레골라 아이템 모드를 중단하고
나 역시도 NPC 추가 모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추가 NPC의 이름은 ‘엘로이’였다.
다른 NPC들은 보통 플레이어가 머무는 농장의 외부에 살고,
워프와 맵 이동을 통해서만 그들의 집을 방문할 수가 있었는데,
엘로이는 플레이어가 머무는 바로 그 농장에, 처음부터 함께 사는 NPC였다.
(아마 이 아이디어는 내가 최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로서는…. 지금은 모른다.)
이 기획을 구현하기 위해 나는 커스텀 농장 맵도 만들어야 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농장에 자동으로 스폰되는 자원들을 막아야 했고,
충돌 마스크를 복잡하게 설정해서 캐릭터끼리 동선이 꼬이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내 캐릭터의 농장을 위아래로 이등분하여,
엘로이와의 만남 이벤트는 플레이어가 농장에 이주한 첫날부터 발생한다.
그 이후로 엘로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엘로이는 플레이어와 한 농장에 사는데도
농장 구석의 우물가에 서 있는 엘로이와 두 번째 만남 이벤트를 겪게 된다.
(이것은 내가 기술적인 한계를 맞닥뜨리고 추가한 설정이다.)
막상 농장에서도, 그는 자기 집과 자기 집 주변 정도를 벗어나질 않기 때문에,
다른 NPC와도 만나야 하고,
씨앗을 사러 나가기도 해야 하고,
낚시와 벌목도 해야 하기에 바쁜 플레이어는,
하루 종일 농장에 있지 않는 이상 좀처럼 엘로이를 만날 수 없다.
엘로이는 모든 선물을 좋아하도록 설정되어 있고,
심지어는 바다에서 낚은 쓰레기나 신문지 같은 것을 줘도 ‘좋아하도록’ 되어있고,
그러나 모든 선물을 사랑하지는 않도록 설정되어 있다.
(스타듀 밸리의 NPC들은 ‘좋아하는’ 선물과 ‘사랑하는’ 선물이 각각 정해져 있다.)
그러나 싫어하는 선물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슬라임 점액질이다.
엘로이는 자주 사라진다.
플레이어와 다투고 나서는
아예 한 달간 마을에서 사라지고 농장에서도 사라진다.
자기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그동안 엘로이 집 주변의 꽃들은 시들고,
벤치에는 먼지가 쌓이고,
관리되지 않은 잡초가 무성히 자란다.
그 변화들을 플레이어는 무력하게 바라보게 된다.
문을 두드려도,
‘집 안에서 기척이 들리지만, 반응이 없다…….’라는 텍스트 창이 뜰 뿐
엘로이를 만날 수 없다.
하지만 후속 이벤트를 통해 언젠가 화해를 하긴 하고,
호감도가 쌓이면 엘로이와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있다.
결혼하게 되면, 플레이어의 집에 엘로이가 들어와 살게 된다.
(스타듀 밸리의 기본 결혼 시스템이 그렇다.)
그럼 원래 있던 엘로이의 집은 빈집이 되어,
농장 아래의 한구석에, 그저 존재하기만 하게 된다.
이 모든 걸 계획해 놓았지만 나는,
스타듀 밸리라는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여전히 사랑하지만
다른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게 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 모드를 만들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