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6일 목요일

헛간 다이닝

과거에서 온 악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할머니가 처음으로 초콜릿을 먹은 게 몇살 때 일이게?

내가 검지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자 악마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도 고개를 저었지요. 나는 한살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질문을 하려던 거였으니까요. 악마는 질문 하나를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벌써 태어났나요?

악마는 짜증을 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인가요?  먹을 것과 관계된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거기다 이 얘기엔 악마도 나오고 시간여행도 나오잖아요. 부족한 게 없을 텐데.

일단 들어오세요. 어두워서 미안해요. 나한테 불이 없다는 뜻이 아니니까 그건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세요. 여기서 불이 났었답니다. 창고가 불을 무서워하게 되었을까봐 무서워요. 물론 불을 피우는 일을 끝까지 미룰 수는 없겠지요, 근사한 식사를 하려면 불을 쓰는 편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래도 당장은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은 식탁보도 없고.

여기에 여섯 명쯤 앉히려고 해요. 이 끝이 내 자리가 될 거예요. 집주인은, 엄밀히 말해서 창고 주인은 아니지만, 식사를 대접하는 동안은 그렇다 치고, 어쨌든 주인은 북쪽에 앉는 거라고... 반대인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나리 한 단을 모아 쥔 채로 기도를... 딱히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 근성의 근 자가 미나리를 뜻하는 글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진짜일까요?

테이블을 완전히 덮을 만큼 큰 식탁보는 필요 없어요. 가운데에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정도면 좋겠어요. 주요리 바로 아래에 깔게. 하다못해 쇠여물을 쒀서 올려놓더라도 그런 식으로 식탁보를 깔면 뭔가 있어보인다 이거예요. 기왕이면 체크무늬. 더 욕심을 부린다면 빨간색이 좋겠지요.

왜냐하면 빨간색 체크무늬는 내가 한 번도 안 먹어봤지만 왠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맛의 꼴을 하고 있으니까.  도로시 아줌마가 빨간 체크무늬 앞치마를 입고 만든 크림 스튜. 테오도르 씨가  빨간 체크무늬 오븐장갑을 끼고 사과파이를 꺼내는 광경. 미스 손이 들고 다니는 마호병을 감싼 빨간 체크무늬 스카프.

그건 여기가 식사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가려줄 예쁜 눈속임이기도 한 거예요. 손바닥만한 천조각 가지고 이 넓은 공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구요. 일전에 여기서 일한다는 사람이 두유에 시리얼을 말아먹고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어요. 그건... 말하자면... 과거에서 온 악마가 나한테 카카오톡을 보내왔을 때 느낄 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어요. 현대적이고 울적하고 기계적인 식사. 물론 거기에 식탁보 같은 것은 없었고. 시리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콘플레이크에 성욕을 감퇴시키는 성분이 들어있었다는 얘기를 아세요? 그냥 생각나서 한 말인데요. 지금도 들어 있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요, 들어 있었다고 들었다고요.

짜증내지 마세요. 과거에서 온 악마처럼 보여요.

그건 그렇고 옷이 예쁘네요.

2018년 4월 25일 수요일

루돌프 슈타이너

한참 후에 영화관을 나온 아이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2차원으로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세상이 실제로 평면인 것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움직이는 몸이 자꾸 면으로부터 입체로 눈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무게감에 멀미가 난 아이는 횡단보도에 멈춰 설 때마다 눈을 감았다가 주위 인기척의 움직임이 느껴지면 눈을 떴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들만 밀려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 또한 눈알에 와 부딪히고 있었으며, 과민해진 눈 때문에 그들이 입체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움직임으로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앉기로 결정했다. 결정을 내린 아이는 언제 멈춰야 할지 몰라 계속 걸었다. 세상이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감았다가 뜨자, 아이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괴물의 얼굴 모양으로 튀어나온 벽처럼 느껴지던 울렁임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멈춰 설 이유가 없어진 아이는 계속해서 걸었다.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2018년 4월 18일 수요일

기억해야 할 사항들

1. 필명은 ‘조’로 한다.

2. 연습과 훈련을 위한 글을 올린다.

3. 새 글은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여 올린다. 다만 한 달에 두 번 이하의 빈도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한다.

4. 파일의 저장 위치로는 <바탕화면-기타자료(본명의 이니셜)-delrow-sec>의 경로로 들어갈 수 있다. 같은 폴더에 들어 있는 카드 납부내역도 자주 확인할 것.

5. 띄어쓰기 검사를 할 것.

2018년 4월 13일 금요일

동백

뒷마당에는 딱 사람 키만 한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다. 관리인이 거기에 대고 뭐라고 말하는 걸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이상하게도 잊기 어려운 장면이다.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선 이사야가 그 동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모습 역시,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관리인은 그냥 뭔가를 먹느라 입을 오물거리고 있던 것이고 이사야는 앞에 나는 나방을 보고 있던 것일 수 있다. 우연히 거기에 동백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동백은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다. 두 이미지에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동백이다. 동백이 듣고 있었으며, 동백이 보고 있었다. 동백은 지금도 사람이나 짐승에게 곧 달려들어 죽일 것처럼 그곳에 서 있다. 저 동백이 거의 그에 준하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다들 안다. 죽여주는 생각. 모두가 사랑하는 동백의 잎사귀들 안쪽 어두운 곳에 그런 생각이 고여 있다는 것을, 동백이 엄청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동백의 옆에서 그 잎사귀들을 만져 보며 다들 안다. 동백이 눈 내리는 새벽에 창고 밖으로 걸어나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아니면 창고가 동백을 버려둔 채 기어간 것일 수도 있고. 지금은 봄이다.

2018년 4월 2일 월요일

가죽 포대

여기에 가죽 포대가 있다.
가죽 포대는 가죽 부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어떻게 부를지는 당신 마음이다.
가죽 포대를 가죽 푸대라고도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곡물창고, 혹은 발화자가 지리적인 문제에 엮이게 되는 일이니 주의를 요한다. (당신은 죽을 수도 있다.)
가죽의 재질이 어떠한지는 당신 마음이다.
가죽 포대에 뭔가를 담을 수 있다. 그것은 비어 있기도 하고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가죽 포대에 뭘 담을지는 당신 마음이다.

산역꾼

터로 간다. 아직 세상은 어둡다. 우리들은 지관(地官)을 따라 희푸른 산으로 들어간다.
삽을 들기 전에 산신께 공물을 바친다. 날이 밝으면 손이 올 것이니 그 손을 잘 보살펴달라고. 준비해온 술, 과일, 포 등을 차리고서 우리는 절을 한다. 이를 핑계로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명태를 묶은 삽을 광중(壙中)이 될 자리에 꽂아두고 그 주변에 술을 뿌린다. 광중의 네 귀퉁이에 흙을 한 삽씩 떠내고 공물을 올린 뒤 다시 절한다. 이를 핑계로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주변의 나무들을 벤다. 특히 광중 부근의 나무들은 뿌리까지 캐낸다. 그 뿌리가 자라 광중으로 뻗도록 하지 않기 위함이다. 너무 고되기 때문에 땀을 식히기 위해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삽 댈 부분에 술을 붓고, 지관의 지휘에 따라 삽질을 시작한다. ‘천광(穿壙) 낸다’고 한다. 지관은 패철을 살피며 폭과 길이와 깊이를 알려준다. 역시나 너무 고되기 때문에 이때 삽차가 동원되는 일도 있으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땅을 판다. 구덩이를 판 뒤에는 그 구덩이가 적당하게 깊은지 보며 한숨을 돌린다. 휴식하며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당신이 오기를 기다린다.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오기로 되어 있다. 당신은 세신(洗身)을 하고, 정갈하게 차려입고서 여기로 올 것이다. 후대의 손에 들린 채, 편안하게.
아직 세상은 어둡다. 당신은 당신의 초상과 함께 마침내 여기에 다다를 것이다. 당신은 노래를 들으며 올 것이고 노래를 들으며 떠날 것이다. 당신의 머리는 산봉우리를 향하고 당신의 발은 산기슭을 향한다. 지관은 당신이 좋은지 살필 것이다. 당신은 좋을 것이다.
당신은 흙을 덮을 것이다. 우리는 남은 술을 마저 걸칠 것이다.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볼 만큼 취하고 오늘을 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산에서 하는 일[山役]이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