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8일 금요일

책쾌

책은 누구나 펼칠 수 있어야 하지요. 남자든 여자든, 어리든 늙었든, 귀하든 천하든…… 읽고 싶다면 누구라도 읽을 수 있어야 책이지요. 책이 필요하십니까? 저를 찾아주시지요. 저는 책쾌(冊儈)라고 합니다. 누구는 책거간(冊居間)이라고도 부르고, 또 어떤 이는 매서인(賣書人)이라고도 하지요. 어떤 이름으로 저를 부르든 저는 도성과 팔도를 돌며 책을 사고파는 사람이지요. 제 소맷자락이 코끼리의 귀처럼 넓은 이유를 아십니까? 품속에 수많은 책을 넣어 다니다가 소매에서 슥 꺼내기 때문이지요. 그 책은 당신이 찾던 책이거나, 당신에게 지금 꼭 필요한 책이거나, 지금은 하등 쓸모없어 보여도 언젠가 당신이 어둠에 파묻혀 길을 잃었을 때, 당신에게 방향을 일러줄 잔불이 되어줄 책입니다. 어떻게 이토록 자신하여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까? 저는 책에 관한 한 팔도의 누구들보다 잘 알지요. 선비가 다독한다고 해서 책에 관해 더 잘 알게 되는 건 아니지요. 책을 읽는 것과 책을 파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이지요. 지식을 익히는 일과 지식을 거래하는 일이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지식을 익히는 일은 한 인간의 정신과 품성을, 때로는 성과를 드높이는 일이지만 지식을 거래하는 일은 한 사회의 감수성과 논점과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 일이지요. 규방은 고독한 처소입니까? 시간의 허무를 견디기 위해 기나긴 이야기가 필요하십니까? 제 넓은 품 안에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책이 있지요. 180권이나 되어 아무래도 몰래 읽기에는 곤란할 정도이지요. 누가 썼는지도 언제 썼는지도 모르는 책이지요. 권수가 너무 많아서 수많은 필경생들의 손을 거쳐야 했던 책이지요. 이런 기나긴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손대면 큰일이 나는 금서를 필요로 하십니까? 억울한 표정을 하고서 굴러다니는 수백의 머리통들과 저잣거리로 흘러가는 검붉은 개울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마저도 구해드릴 수 있지요. 당신이 필요하다면, 아아, 당신이 정녕 책을 필요로 한다면! 

2021년 5월 25일 화요일

한 여름 밤, 농담들

미디액트 <한 여름 밤, 농담쓰기> 강좌가 처음 열린 건 2017년 8월이다. 첫 외부 강의라 커리큘럼을 짤 때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시에 접근할 수 있을까? 당시에 나는 시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가볍게 쓰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한 여름 밤, 월요일에 모여 시를 씁니다. 시 같은 농담을 써도 됩니다. 자신의 농담 같은 시를 찾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시 주변에서 어슬렁대며 한 줄 이상을 공들여 쓰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당신은 여유가 있어야 하고 자신과 상대방의 거리, 기분, 취향을 빠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해와 애정이 바탕이 돼야 자연스러운 농담이 만들어집니다. 설명하고 싶은 욕망도 억누를 줄 알아야 하는 섬세한 작업입니다. 강의는 그런 태도로 진행됩니다. 몇 가지 사항은 즉각적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농담이라는 가벼움을 내세웠지만 여성들의 시집을 매주 강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멍하니 여름밤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좋다고 덧붙였던 건 수업 도중에 그런 틈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사는 게 너무 재미가 없어서, 이 강의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가장 재미없는 사람을 위한 농담을 써봅시다, 라고 썼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수명 시인의 시집과 정한아 시인의 시집, 에밀리 디킨슨,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타인의 목소리로 듣는 시간은 밤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왜 여기 모여 있는 걸까 생각했다.


Q.1. 왜 이 수업을 듣나요?

― 머리를 비우고 가볍게 써보고자 합니다. 요즘의 생활이 좋습니다.
― 자신의 취향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점점 알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서.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안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 재밌을 것 같아서. 개그 욕심이 있어서.
― 강의는 많이 듣지만 실제로 글쓰기는 어려워하는 사람이에요.
― 살기 위해 홀로 새벽에 끄적였던 소수의 글을 제외하면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저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 시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요.
― 시를 한 줄도 쓰지 않는데, 시를 쓴다,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하면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요. 거짓말쟁이로 살고 싶지는 않았네요.
― 다른 사람이 어떤 농담을 쓰는지 궁금하다.
― 멋진 농담을 하고 싶어서.



Q.2. 싫어하는 것 or 이것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 갑자기 다가오기.
― 집에 같이 가기.
― 딱히 없음.
― 엄청 진한 초코 브라우니를 다른 사람 혼자 먹는 걸 바라보게 하는 것.
― 등단이 목표가 아니어서 고강도의 합평은, 괜찮습니다. (사양해요.)
― 직장 상사.


책상 안쪽에는 그들이 적어서 준 메모가 아직도 있다. 이 강의는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총 4년이나 진행됐다. 수업을 하면서도 언제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이 여름의 농담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왔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있었고, 보기 좋게 뒤뚱거리는 농담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의 문장처럼, 우리는 밤에 앉아 저마다 농담을 나누고 반복되는 여름 없이 헤어졌을 것이다. 



소송

아이들은 법 앞에 서 있다.

최근 아이들은 주식을 하고 공매도를 걱정하고 테슬라의 주가를 물어본다. 초등생의 눈높이에 맞게 저금통의 예시로 설명하시오, 라는 글자를 보면서 한선생은 그들에게 가상화폐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잠시 생각한다. 물론 생각을 할 뿐이다. 통장에 부모가 넣어준 돈이 충분한, 저 선한 표정의 아이를 바라보면서.

경제 관념이 달라졌듯이 아이들의 싸움 양식도 달라졌다. 옛날과 비슷한 점이라면 역시 애들 싸움은 치열한 구석 한 부분에서 뭔가 맹한 맛이 있다는 점이다.

선생님, 쟤가 그랬어요. (울먹)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 앞에 CCTV가, 법이 놓여 있다는 것이겠지. 도둑질이나 폭력, 욕설의 경우 처벌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간혹 애매한 것들이 문제다. 상대방이 나를 기분 나쁘게 한다는 것, 욕은 아니지만 욕에 가깝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 옆 아이의 목소리가 커서 자신의 목소리가 묻혔다는 것, 그리고 이런 아이들의 반복된 마찰이 부모에게 들어가 결국에 부모의 싸움이 된다는 것.

특히 저학년이 그렇다. 초등학교 2학년의 아이들은 선과 악의 개념이 없어 보인다. 의자가 다리에 닿지 않아 동동 흔들고 있는 뒷모습. 부모가 정성껏 입혔을 카디건이나 재킷은 집 안방인 양 바닥에 널부러져 있고 저마다 사이좋게 가방도 떨어져 있다. 

한없이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가도 세상 서럽게 우는 것도 잘한다. 부딪히는 일도 잦고 서로 누가 잘못했는지 구분을 짓는 것도 못한다. 세상 영특하다가도 셈을 못해서 손해도 곧잘 본다. 가끔은 자신이 즐겨 앉던 자리를 두고 싸우고 말을 밉게 했다는 일로도 싸우고 화해도 잘하고 이르기도 잘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부모의 귀에 들어가는 날, 이제 다른 문제로 변할 것이다.

소송이요?

이유가 뭐래요?

B가 A를 주눅 들게 했대요. 

A는 법조계 집안의 아이였고 B는 대대로 부잣집 아이였다. 한쪽이 법을 들고 오자 한쪽은 하면 되지,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한선생은 그 사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고 있는 A와 B를 보았다.

옆 반 걔 별명이 뭔지 알아요? 원펀맨*이래요.

아이가 직접적인 폭력을 쓰게 되는 경우, 이제는 모두의 문제가 된다. 그 반의 부모들, 선생, 저 멀리 그 아이의 얼굴을 모르는 한선생까지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한선생의 어린 시절은 어땠더라? 아이들은 그저 해맑게, 오늘은 복수의 날이야, 라고 떠든다. 그들에게 복수라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날일 것이다. 

A와 B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펼치면서 묻는다. 

선생님. 몽테예요? 몬테예요?

그저 발음이 궁금한 아이들을 앞에 두고 한선생은 칠판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대머리에 맹한 얼굴, 다소 촌스러운 복장을 한 사이타마는 아무리 봐도 유약한 소시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혹독한 훈련을 거쳐 비현실적인 힘을 손에 넣은 인물이다. 그 힘을 이용해 어떤 괴수나 로봇도, 심지어 외계인까지 주먹 한 방으로 해결해 버리는데.

2021년 5월 19일 수요일

30대 여성의 몸



최근에 도수치료를 받고 있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일단 턱을 집어넣고 허리에 힘을 주어 자세를 바르게 하시길 바란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근육의 문제, 자세의 문제, 식습관, 스트레스, 운동, 수면 부족, 모든 생활 패턴이 연결되어 통증이 생긴다. 나는 어떤 것에도 의아한 부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몸에게 했던 모든 것이 되돌아온 셈이다. 특히 작가들의 경우 일자목은 흔한 증상이라고 보인다. 가끔 작가들의 목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운다. 외국 프로게이머와 한국 프로게이머가 서 있었을 때, 앞으로 쏠린 목을 보는 순간 바로 깨닫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일터에서 주변 선생님들의 몸을 보면서도 격한 감정이 생긴다. 대부분은 허리 디스크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수술을 경험한 여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몸이 그렇다면 나는 괜찮다고 볼 수 있나?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룰렛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턱관절에 문제가 있었고, 스트레스로 인해 배 부분이 딱딱했고, 허리 관절이 약간 비틀려 있고, 일자목이라 머리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있으며 허리 역시 일자인지라 충격 완화가 어렵다는 평을 받았다. 목을 고치고 싶다면 허리의 힘을 길러야 하고, 허리의 힘을 기르고 싶다면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전체적인 생활 태도와 습관을 고쳐야 한다는 근본적인 이야기를 듣고 오는 셈이다. 

최근에는 “제때 샐러드를 먹고 있어요.” 라는 변명을 한다. 선생님은 30년 동안 누적된 걸 생각하셔야죠, 웃으면서 대답한다.

조금이라도 다리가 올라가면 선생님은 웃으면서 답한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 

그 칭찬이 뭐라고 약간의 힘을 얻게 된다. 그는 어떤 운동이라도 하라고, 근육이 붙기만 하면 된다고, 균형은 그 다음 문제라고 말한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글에 대한 생각이 동시에 불어났다. 나의 삶은 글과 노동의 균형 사이에 있다. 글을 쓰지도 않으면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나? 작가라고 말을 할 수는 있는 걸까? 재빠르게 나는 노동자야, 라고 덧붙였던 건 퇴근 후 후진 글을 쓰고 있을 내가 괴로웠기 때문이다.

작가 테오도르는 <다시 쓸 수 있을까>에서 “글을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도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글을 시원찮게 썼더라도 내가 그걸 알아차리기나 할까? 아니면 내 책을 내줄 너그러운 출판사가 대신해서 벌벌 떨게 될까?”라고 말했다. 죽어서도 후진 글은 쓰기 싫었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지만 후진 글이라도 써서 정확하게 엎어지겠다는 마음가짐이 지금의 내게 필요한 처방일 것이다. 

도수 치료를 받고 나서는 매일 글을 쓴다. 근육이 붙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산문을 쓴다는 건, 시를 쓰는 것과는 다른 일이라고 느낀다.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고 균형은 나중에 생각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 아마 도수치료 선생님과는 헤어져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가 얼마나 일을 했는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아내의 직업은 무엇인지, 어떤 환자를 만나 힘들었는지, 어떤 체격을 가졌고, 어떤 운동을 좋아하는지는 안다. 그가 내게 어떤 용기를 불어 넣어줬는지도.

치료가 끝나면 달라져 있을까? 30대의 몸과 헤어진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내리막으로 향하는 코스의 속도를 늦추는 것을 목표로, 주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여성의 몸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으니까.

2021년 5월 18일 화요일

식물의 기억



식물을 처음 키우는 이들이 고심하는 부분이라면 물 주는 방법일 것이다.

“겉흙이 마르면 물을 주세요.”

화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면 겉흙을 눌러도 축축한지 모르고 속을 깊게 파도 알 수가 없다. 과하게 애정을 주면 과습으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원망하듯이 축 처져 죽는 식물의 세계. 빛이 좋지 않으면 색이 변색되고 과하면 타버리고 통풍이 좋지 않으면 시들해진다. 바짝 마른 미라의 일부분을 화분에서 만나고 싶지 않다면 물을 주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언제 물을 주면 될까?

어제 잎의 각도와 오늘 잎의 각도가 멀어져 힘이 없다고 느껴질 때, 나는 물을 준다. 어제의 각도를 알아야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애매한 레시피 같은 말이다. 이틀에 한 번 정오에 50ml의 물을 흠뻑 주면 된다, 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식물에게는 그런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은 퇴근 후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왔니? 신경 안 쓰면 확 죽어버린다?”

여름이 되면 방법은 더욱 난해해진다. 어제의 주기와 오늘의 주기가 빠르게 바뀐다. 주기는 짧아졌다가 비가 쏟아지면 다시 길어졌다가 반복된다. 

몬스테라, 호프셀렘, 스파티필름, 더피고사리, 뱅갈고무나무, 튤립, 체리세이지, 고수, 로즈메리, 라벤더, 고구마, 대파, 당근, 상추. 식물의 이름을 부르면 식물의 기쁨을 알려준 박지혜 시인이 떠오르고 그의 손길이 닿은 식물의 표정이 생각난다. 식물에게는 사람의 그림자가 남아 있기 마련이다.

엄마는 이사를 가면서 모든 화분을 정리했다. 다시는 식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했지만 최근에는 동생이 심은 아보카도를 영양제까지 주면서 기다란 나무 마냥 키워 놓았다.

무심하고 다정한 사람이 식물을 잘 키우는 것 같아요.

당신이 이런 말을 건넸을 때, 나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사람이 떠날 때 가장 먼저 버려지는 식물을 생각한다. 텅 빈 화분을 떠올린다.

꽤 많은 식물을 죽였다. 세로그라피카가 아름다워 들였다가 곰팡이가 슬어 버린 날을 기억한다. 장수 식물로 수명이 20년이었으나 1년을 채 못 살았기에 한 잎 한 잎 떨어질 때마다 울적함을 떨칠 수 없었다. 변산에서 만난 장미 허브도 생각난다. 장미 허브 화분을 들고 해안 일대를 산책하며 허브에게 강인한 이름도 붙여 주었다. 

술자리에서 “식물 물을 줘야 해서요.”라는 말을 하고 떠났을 때, 다들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택시를 타고 급하게 돌아가 물을 주고 편히 잠들었던 건 식물만이 아는 기억이다. 목화의 꽃이 오전과 오후가 다르다는 것도 시인이 준 씨앗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나는 식물을 말했는데, 사이에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집 식물에도 나의 기억이 스며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 화분들과는 어떻게 헤어지게 될까?



2021년 5월 17일 월요일

은경이


불안은 편지를 쓸 때의 기분과 닮아 있다. 그때의 기분을 기록한다는 게, 한 사람을 위해서 말을 건다는 게 내게는 힘든 일이다. 은경에게는 하루에도 두 번에서 세 번 정도 편지를 썼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열네 살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편지 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편지에는 줄곧 뭐하니, 나는 마음이 아파, 이런 말들이 가득하다. 왜 그렇게 마음은 아팠을까? 왜 그때도 맞춤법을 신경 썼을까? 왜 쓸 말도 없으면서 글을 쓰듯이 끄적였을까. 왜 스티커 사진은 붙여둔 걸까?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건 내가 그에게 보낸 편지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전학을 가는 날, 은경은 울먹이며 그동안 받은 편지를 모두 돌려주었다. 선물로 다시 돌려준다고 했다. 작은 낙서까지 버리지 않고 모은 편지를 박스에 담아 다시 돌려준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받으라니 받았다. 편지는 20년이 넘도록 처박혀 있었고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중학생 때의 나를 본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은경이 준 건 그 당시의 나의 모습이다. 한 장씩 찢거나 불태우고 싶은 기록이다. 그럼에도 왜 은경이를 못 잊나. 그는 쾌활했고 유머가 있었다. 단발이 잘 어울렸던 은경, 긴 눈으로 곧잘 웃었다. 앞니가 조금 튀어나온 그와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코카콜라 병에 담고서는 깔깔댔던 적도 있다. 그 물고기는 어디로 갔더라?


온갖 불분명함 속에 은경이가 돌려준 내가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편지를 찾았으나 아무리 뒤져봐도 없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발견될지 모른다. 나는 편지를 쓸 때마다 생각한다. 이번 편지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사춘기

우리 애가 사춘기라서요.

한선생은 아이를 들여다본다. 아이도 한선생을 들여다본다. 여기 심연에 빠진 사춘기가 길게 늘어져 있나? 아이는 키가 조금 컸다. 흔히 코로나 이후 아이들이 빌드업 되었다고 표현하는데 예전에는 통통했다면 지금은 책상이 작아 보이는 정도다.

선생님. 저 살쪘어요?

한선생은 살이 토실하게 올라온 볼의 움직임을 본다. 오동통한 팔뚝이 근심스럽게 한선생을 바라보는 듯하다. 한선생은 그저 많이 먹어두라고 말할 뿐이다. 성장판이 열려 있을 때, 많이 먹어두라고. 

하루는 다른 선생님들이 반에 앉아 있는 한선생을 쳐다보고는 “선생님이 생각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던데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덩치 큰 아이들 속에 작은 의자에 앉아 생각하는 한선생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가 온 것이다.

저는 사춘기가 오고 있어요.

다온의 말에 한선생은 사춘기의 몸짓이 궁금해졌다. 사춘기는 어떻게 오나. 스멀스멀 기어오나. 재빠르게 달려드나. 아무도 다온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아이들답다. 그들은 비가 온다며 창문을 열고 우산 걱정만 할 뿐이다.

다온은 부모님이 말하는 사춘기는 부모의 말을 안 듣기 시작할 때이며 자신은 자신의 생각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가 사춘기라고 느낀다고 말한다. 사춘기는 느낌에 가까운 형상 같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주변 반응에 따라 자신이 사춘기구나, 깨닫는 것이거나 학습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그들이 두려운 건 중2병이지 사춘기가 아니다. 

어디선가 ‘흑염룡, 내 손안의 흑염룡’ 보란 듯이 주문 거는 소리가 들린다.  중2병? 말하는 순간 ‘크큭’ 웃는 소리와 손가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몸짓을 볼 수 있다. 너 변성기 오면 정말 이상할 것 같아. 한선생과 몇 명의 아이들은 눈을 가리면서 웃었다.

문득 김행숙 시인의 사춘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얘들아, 뭐하니? 나는 두 눈을 바깥에 줘버렸단다. 얘들아, 얘들아, 어딨니? 같이 놀자.” 시인의 말을 떠올리자 반쯤 눈을 가린 어린 친구들의 사춘기가 한선생을 보고 있다.

2021년 5월 14일 금요일

사이버 무당

우리의 신들이 전승을 통한 믿음의 합일체라는 것은 다들 아실 테지요. 그 합일체는 문화 속에서 파편화되어 유통되며 민족의 의식 속에 녹아듭니다. 달리 본다면 사망 이전에 최후의 숨결을 인터넷으로 흘려보낸 철학처럼, 믿음 또한 의식화라는 과정을 거치는 파편적인 데이터 속에서 일정량의 정보값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신은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도 있고, 전산망 속에도 계신다는 말입니다. 분산된 바이트 조각들로서요.

오늘의 스트리밍을 시도합니다. 타임라인 속으로 점괘들이 흘러갑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사건과 운명이 쏟아집니다. 시청자들은 나를 중개하여 신과 통합니다. 나는 열병처럼 70시간가량 잠도 없이 딥웹을 헤매다가 앓아눕고 힘을 체득했습니다. 딥웹 속에서 천 개의 손에 달린 천 개의 눈을 보았지요. 그 눈동자 속에서 과거의 나들을 보았고, 미래의 나들을 보았으며, 현재의 나와 나의 가능성인 잔상들과 일별했습니다. 그 모든 나들이 신의 제자로 살고 죽음을 보았으니, 내가 짊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요. 내가 얻은 힘은 나 개인에게 주어진 힘이 아닌 집단의 힘. 천 개의 손바닥에 달린 눈 하나인 나. 그 힘은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이어가며 민족과 세계를 가로지릅니다. 이미 오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생될 가능성이 우리들에게 제시되어 있지요. 우리의 미래는 모니터 위에서 점멸합니다. 나는 점멸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미래의 길을 보고, 탄지경간에 그 길을 다 걸어봅니다. 아아, 시청자 1의 인생이란 이다지도 슬프군요. 이 복잡한 생사의 실타래를 풀어내려면 정성이 필요하겠군요. 정성을 얼마나 들여야 하느냐고 묻지 마세요. 그 물음에서 이미 해야 되는 만큼만 하려는 얕은 마음이 제 눈에도 보이는데, 밤에도 낮에도 감기지 않는 신의 손바닥에 달린 그 눈동자를 피할 수가 있을까요.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는 것이 정성입니다. 이미 미래를 들여다보았으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미래가 결정한 과거의 길을 따라 걷는 일뿐이군요. 다행히도 행복의 가능성은 다중우주 속에서 진동하고 있군요. 오행을 살피니 금을 가까이 하면 화를 입겠어요. 이미 오래간 그래왔네요. 그 금들을 별풍선화하여 신의 일부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오늘은 우리 신께서 기뻐하시도록 백두산에 한번 올라봅시다. 다들 아시겠지만, 집단의 힘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니까요.


2021년 5월 12일 수요일

그 여름, 산타


산타를 믿으세요?

도를 아십니까, 와 비슷한 질문처럼 들린다. 이럴 때는 대답을 하지 않고 신중하게 되묻는 편이다. 

넌 믿어?

질문을 걷어내면 친구의 믿음이 보인다. 기가 차다는 듯이 혀를 차는 아이와 열혈 신도가 6:4의 비율로 나뉜다. 열한 살. 믿음을 논하기엔 애매한 나이다.

요즘의 산타 할아버지는 꽤 바빠 보인다. 저는 아이패드를 받았어요. 저는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가족이랑 호텔 여행을 갔는데 혹시라도 산타 할아버지가 저를 찾을까봐 편지를 남기고 갔어요. 신기하게 호텔에 선물이 도착했고 제 침대에 프린트된 편지가 답장으로 놓여 있었어요. 

산타 목격설도 종종 들린다. 밤 12시에 눈을 떴더니 창문을 통해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어요. 승강기에서 만난 애들도 있는 걸 보니 시대가 바뀌긴 한 것 같다. 프린트를 하고 아마존에서 아이패드를 구매할 줄 아는 할아버지는 무슨 세대일까. 

사실은,

한선생이 입을 떼자 구석에서 한 친구의 동공이 매우 흔들리고 두 손을 꼭 모은 채 서서 소리를 지른다.

“동심 파괴하지 마세요!”

뒤에서 우리 엄마는 산타가 없대, 중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한선생은 느릿하게 미국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AD)의 산타 위치추적 서비스 주소를 칠판에 적어주었다.* 올해 산타는 코로나 19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했다는 말도 건네주었다. 

아이가 자신의 집 근처에 와 있는 건 아니냐고 물었고 한선생은 겨울이 되면 찾으라고 말했다. 만약 네가 이 여름을 잊지 않는다면. 



*24일 https://www.noradsanta.org 페이지에서는 산타의 현재 위치, 다음 행선지, 지금까지 배달한 선물 개수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한다.

생각의자

요 몇 년 미술계(?)에서 출판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것 같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야기할 재간은 내게 없다. 어디 무슨 커리큘럼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원래 그쪽에서는 관심 많았는데 내가 관심이 없었던? 그냥 부수입 열풍으로 평균적인 관심도가 높아진? 역시 체감에 따르면, 문학 쪽에선 누가 이걸 썼느냐 어떻게 얼마나 읽었느냐가 더 중요하지 출판 그 자체로 표현되는 의미에 대한 ‘공식적인’ 흥미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일테면 ‘공식적이라니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는 편을 더 선호하고 있다는 얘기로, 하여간 책이 나오거들랑 축하를 해 주고, 이 부분이 특히 좋았고, 하여튼 축하를 하고... 책이 예쁘게 잘 나왔고... 어느어디 출판사가 좋고... 그뿐이면 족하지 그 이상의 관심을 이런 초분업시대에 굳이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 감각 가능한 형상을 만든다는 면에서, 따지자면 출판은 문학보다 미술에 더 가까운 일이 맞겠다. 한편 도서가 아닌 텍스트의 생산에 관하여서는, 나의 너무나 짧은 식견으로도, 미술계에서 나왔다 하는 글들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대체로 끔찍한 수준(미안합니다)이었는데, 옳게 쓴다는 데 대한 무신경함이야 차치하고, 가치 있는 글에 대한 감각을 다같이 통째로 어디다 내버린 듯한, 그런 게 있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구는 그런... 즉 문학계 저자의 글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교정했지만 미술계 저자의 글은 밖으로 눈물을 흘리며 교정했다는 말이다. 내가 너무 성급히 일반화를 하고 있나? 누구나 모든 걸 조금씩은 안다 하며 누구나 모든 걸 조금씩은 말하려는 시대, 석박사니 교수들이니 기라성이니 하는 이들조차 개소리를 서슴지 않는, 다같이 성급한 초비상시대(이게 도대체 무엇에 대한 비상함인지?)이니 나의 성급함도 약간 상쇄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는 결국, 만약 우리 출판사에서 ‘뭐 이 정도면 됐군’ 하면서 책이랍시고 대충 만들어서 냈다가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어떤 하찮은 미술계 독자 나부랭이가 그 만듦새를 보고 나와 똑같이 느낄 수가 있다는 뜻이겠다. ‘美的으로 끔찍한 수준이야...’ 그런 건 참을 수 없다. 나는 참을 수 있어도 우리는 참을 수 없다! 나는 출판에 관여하는 여러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 중에서도 특히 저자와 디자이너 사이의 그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 ‘생각의자’ 출판사 특색의 도서 생산 시스템은 직무순환제다. 그것은 우리의 노동계약서(우리는 ‘근로’라는 단어를 지양하기 때문에)에 명시되어 있다. 생각의자 출판사에서는 교정 편집 기획 홍보 디자인... 모든 직무를 구성원들(대표 포함)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 못하면, 서로 이를 악물고 가르쳐서라도 한다. 생각의자 출판사 최대의 목표는 직무순환제의 제한 없는 확장이다. 인쇄, 포장, 운송, 환경관리... 예외적으로 여기서는 당신의 책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저자도 돌아가면서 할 테니까.

시간을 나눈 만큼 우리는 친밀해질까?

J는 왼쪽 유리 가벽에 기대앉는 걸 좋아한다. 뒤에는 Y가 앉아서 긴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다. 옆에는 K가 앉아 허리를 튕기듯이 웃고 있다. 그들은 다른 빛을 뽐내는, 꼭 맞게 끼운 스테인드글라스 같다. J의 각진 안경테와 맞춘 듯이 J는 글씨도 반듯하다.

종이를 던진 아이가 모른 척하지만 그 안에 적힌 글씨체를 확인하면 범인을 알 수 있다. 이름이 없는 노트의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쉽다. 아이들은 신기해한다. 제 글씨도 알아보세요? 아이들의 눈빛이 빛날 때, 언제나 수업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걸 느낀다.

이들을 갑자기 만나 익숙해졌듯이 헤어짐도 익숙한 것처럼 반응해야 한다. 시간표가 맞지 않거나 학습의 변화가 필요하거나 선생님이 바뀌거나. 이유는 타당하기에 능숙하게 헤어짐의 말을 준비할 차례만 남았다. 하필이면 말 많던 아이는 왜 이때 침묵을 할까.

괜찮아. 다시 만날 날 있겠지.

기껏 꺼낸 말이 이거라니. 우리는 매주 2시간씩 만났다. 웃고 쓰고 묻고 시간을 보냈다. 한 선생님의 통계에 따르자면 나는 아이의 시간에서 15% 정도 관여한 것이라고 한다. 

통계는 몰라도 J가 여전히 맨 왼쪽에 앉을 것은 안다. Y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것이다. K는 여전히 허리를 튕기면서 몸 전체로 웃고 있겠지. 헤어짐에 익숙해진다는 말이 나에게 거는 암시에 가깝게 느껴진다. 

어딘가 자리 잡고 있을 유리 조각 같은 아이들. 
그런 아이들과 헤어진 날에는 공원 흔들의자에 앉아 이팝나무를 들여다보았다.

문득 궁금하다. 아이들은 어떻게 헤어지는 걸까.

“아휴. 그러다 보니 십 년이 지났지 뭐야.”

선생님들의 말을 떠올리면서 아이들의 숙제 노트를 잘 포개두었다.

2021년 5월 11일 화요일

흑요석

흑요석은 돌의 일종이다. 다이아몬드보다는 값이 싸고,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보다도 값이 싸다. 지금 내 발밑에 그 흑요석들이 몇 개 놓여있다. 나는 허리를 접어 고개를 아래로 하고 그것들을 집어 든다. 그리고 이리저리 손으로 만져본다. 나는 이 흑요석들을 팔려고 분수대 앞으로 가서 노점을 열었다. “이거 얼만가요?” 노점을 연 지 30분 정도 되었을 무렵 누가 와서 내게 물었다. “3만 원이요.” “너무 비싸네요. 좀 깎아주실 수 없으신가요?” “죄송합니다. 못 깎아드려요.” “네...” 그렇게 말하고 그 사람은 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 뒤돌더니 이리로 와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흑요석이었다! “혹시 이것과 이것, 그러니까 흑요석들끼리 바꾸지 않으실래요?” “네?” 하고 나는 약간 당황스러워서 되물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것.” 그 사람은 자기 품 안에 든 흑요석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것.” 그 사람은 노점 위에 놓인 내 흑요석을 가리켰다. 기이하게도 그 두 흑요석의 모양과 크기는 거의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흡사했다. “바꾸지 않으시겠냐고요.” 나는 눈동자에 이채를 띠고 답했다. “네, 이것과 이것이라면. 바꿔요. 좋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품에 있던 흑요석 하나를 이쪽으로 건넸다. 나도 내가 가지고 있던 흑요석을 그 사람에게 건넸다. “그런데” 내가 말했다. “왜 품속에 흑요석을 넣고 다니시는가요?” 그 사람이 한쪽 눈을 크게 뜨고 내게 말했다. “이렇게 바꾸면, 그러니까 동일한 것끼리 물물교환을 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처음에는 돈으로 사려고 했잖아요?” “그렇죠, 뭐.” 나와 그렇게 잠깐 동안 대화를 나눈 그 사람은 나와 성별이 같았고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였다. 그 사람이 내게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아까 바꾼 것이 모양과 크기가 흡사해 보였더라도,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그 사람의 말을 끊고 내가 말했다. “네, 더 비쌀 수 있는 법이죠. 아무리 모양과 크기가 흡사해 보였더라도” 내 말을 끊고 그 사람이 말했다. “보는 안목에 자신이 있나 봐요?” 내가 말했다. “아뇨, 자신은 없어요. 전 단지...” 내 말을 끊고 그 사람이 말했다. “그렇군요... 당신은 내 눈을 보고 있었어요. 그건 내가” 그 사람의 말을 끊고 내가 말했다. “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내 말을 끊고 그 사람이 말했다. “세상에나. 그걸 분간할 수 있다고요?” “아뇨.” 내가 이어서 말했다.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바꿔봤어요.” 그 사람은 꾸벅, 내게 인사를 하곤 사라졌다. 그리고 나머지 흑요석들을 다 팔기까지는 약 다섯 시간 정도가 걸렸다. 흑요석들을 사 간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이것으로 반지를 만들겠다는 사람부터 이것을 베개에 넣고 잠들 거라는 사람까지. 나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하나같이 웃는 낯으로 흑요석을 팔았다. 그리고 그 도중에 아까 흑요석으로 흑요석을 교환해갔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리고 노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중에 그 사람이 내게 찾아왔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저, 이건 아까 까먹고 못 드렸던 말씀인데요. 혹시 저랑 알고 지내지 않으실래요? 그러니까 저, 친구요.” “좋아요.” 나는 대답했다.

2021년 5월 9일 일요일

故 한선생



“선생님. 스승의 날 선물 줘도 돼요?”

한선생은 책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다온은 그를 쳐다보고는 뒷말을 이어갔다.

“어린이날 선물 주실 거죠?”

보통 진실은 뒤에 있는 편이다. 

오늘은 윤동주의 삶에 대해 배웠다. 윤동주의 시가 쉽게 읽히지만 어렵다, 라는 표현을 할 때마다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조선어 수업을 아주 열심히 들었다. 최현배 선생은 철저한 원칙을 지키느라 학점을 박하게 주는 편인데도 윤동주는 100점을 맞았다. 혹시 아느냐. 너희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 이 수업 때만큼 한선생이 점수를 잘 주었다, 라는 말이 기록될지 모를 일이라고.”

다온은 목을 가다듬고 자신이 성공해서 연설을 하게 되는 날,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故 한선생님은 제가 질문을 할 때마다 창의적이라며 칭찬을 해주셨죠.”

그는 덧붙였다.

“제가 성공할 때쯤이면 저도 육십은 넘었을 테니까요.”

생략된 죽음 앞에서, 한선생은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장례식에 아이들은 올 수 없을 것이다.

다온의 창의성이라......

그는 예전부터 좋은 답을 잘 이끌어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는 축구를 하고 싶고 한 친구는 보드게임을 하고 싶고 한 친구는 영화를 보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보통은 다수결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수가 모두가 아니라는 의견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몫을 포기하거나 하고 싶은 것을 택한다. 혹은 문제를 안 푸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다온은 다른 문제를 풀지 않고 그 문제를 오래 고민했다.

“선생님 저는요, 친구들한테 축구 보드 게임을 하면서 영화를 틀어 놓자고 말할 거예요.”

고민하면서 친구가 이런 방법을 건넨다면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까. 아니면 더 좋은 의견을 내야 하는 부담이 생길 것이라 예상한다. 

그는 공리주의 선택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한다. 앞에 있는 뚱뚱한 남자를 밀어서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다면?

보통은 기분이 나쁘다, 죄책감이 든다, 라는 말로 자신의 감정에 빠지는 반면, 다온은 또 고민한다.

“만약에 밀었다가 뚱뚱한 남자까지 죽으면 총 여섯 명이 죽잖아요. 그러면 더 잘못된 거 아니에요?”

그는 문제에서 강요하는 대답을 알고 설득하는 방법을 취한다. 숙제를 안 해서 결석한다는 친구가 있으면, 나는 숙제를 안 해도 얼마나 당당하게 오는데, 혼쭐내는 아이.

비가 오는 바다, 라는 말을 듣자마자 시의 한 구절 같다고 떠드는 아이. 윤동주에 대해서 분석하는 글을 잘 써놓고는 아래에는 이런 뉴스를 슬쩍 적어 놓는 아이. 



 

 “죽은 줄 알았던 시인 윤동주가 비밀스럽게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 그는 요양 병원에서 힘들게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제목은 ‘미스터리한 나의 삶’이었다. 그 시는......” 딴딴!


그의 창의성은 뛰어나다. 
하지만 문학은 안 하는 것이 낫겠다고 故 한선생은 생각했다. *










*다온이 친구들과 쓴 즉흥시. (그날은 비가 많이 와 아이들의 바지가 온통 젖었고 다들 우울해 하던 날이었다. 이 시를 한 줄씩 즉흥적으로 만들고는 즐거워했으니까 된 걸까?)

비가 오는 바다.
친구가 바다에 빠졌네.
고래가 친구를 삼켰네.
비가 오는 바다에
갑자기 
영웅이 등장했네.
고래의 배를 갈랐네.
비가 오는 바다.

2021년 5월 6일 목요일

세네갈식 부고

선생님은 바쁘세요. 세네갈식 부고를 작성 중이시거든요.

(젊은이는 의심스러움과 자랑스러움이 반씩 깃든 얼굴 일부만을 문틈으로 빼꼼 내놓은 채 당신을 상대하고 있다.)

아 세네갈식 부고가 뭔지 궁금하시겠죠. 세네갈이라는 나라에서는 말이죠, 누군가의 죽음을 품위 있게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의 도서관이 불탔다는 말을 한다고 하네요.

(당신은 그쯤은 알고 있다고 말하려다 만다. 말을 많이 하느라 방심해서인지 젊은이가 문틈 공간을 아주 조금 더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여행 중에 책으로 된 나무를 본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나무로 된 책이라 해야 할까요? 선생님이 쓰신 표현은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런데 이미지가 강렬해서 그건 기억이 나요. 잎사귀 하나하나에 선생님이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된 아름다운 문장이 새겨져 있었대요.

(당신은 빙긋 웃는다. 선생은 왜 그것이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달린 나무라 생각지 않고 책이라고 생각했을까?)

읽을 수 없었다 하셨으니 문장의 뜻이 아름다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가 조형적으로 아름다웠다는 뜻이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그 나무를 책이라 한다면 어떤 잎사귀를 먼저 읽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어떤 잎사귀를 먼저 만졌는지와 별개로 그 잎사귀들의 모임은 나무가 확실하잖아요. 그건 분명……

(젊은이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당신은 박물학자가 그를 귀애하는 까닭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책일 거예요.

그런 책들로만 이루어진 도서관이 있어도 좋겠지요. 그리고, 그런데, 그런 도서관이 불탄다면…… 그건 누구의 부고가 되는 걸까요?

(……)

그건 그렇고, 선생님은 역시 바쁘세요. 오늘 만나시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요. 어떤 일로 오셨다고 전해드릴까요?

(당신은 지금 박물학자가 쓰고 있는 부고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불타오른 도서관에 대하여 열심히 쓰고 있을 박물학자와 당신은 오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입이 없다. 손이 없다. 몸이 없다. 둥둥 유영하는 당신의 몸에서 발하는 푸르스름한 빛은 문 뒤에서 얼굴만 내놓고 있는 젊은이의 코와 눈 사이 우묵한 부분을 속절없이 훑고 있다.

……

곧 박물학자가 직접 나올 것이다.

……

기다려 볼까?)

2021년 5월 1일 토요일

21년 4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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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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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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