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6일 목요일

돈버는방법

‘내 꿈은 돈벌이’라는 이야기가 종일 머릿속에 맴돌아, 핵전쟁을 겪은 듯 아주 쓴 입맛으로 잠들었던 간밤. 꿈에 다리 많은 벌레가 나왔는데 우리 사이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움직임이나 기색이나, 벌레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느낌이란 게 있었다. 우리는 서로 피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잘 지냈다. 벌레도 내 표정을 읽진 못했겠지만, 느꼈을까? 회사에 나와서 앉은 지금 벌레의 다리들보다 많은 돈 얘기를 읽고 들으며 내 꿈은 핵전쟁이 되어 가고 있다. 줄지은 벌레들이 눈알 위로 지나가고 있다, 귓속으로 입속으로 드나들고 있다. 나는 이제 꿈속의 벌레에게도 거의 우정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돈 버는 방법을 직간접적으로 알려주겠다며 쏟아져나오는 저 수많은 쓰레기 책들과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지 모르고, 나를 어떻게 갈아버릴까 호시탐탐인 사장에게도 거의 우정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빨간 교정 표시들이 뽈뽈대며 모였다 흩어진다, 사장실로부터 찍찍대는 소리 층층 겹겹... 이거다! 도저히 벌레가 되어주기를 바랄 수는 없다면, 그러니까 저자가 벌레 같은 저자여서는 안 되고, 물론 벌레 같은 책이어서도 안 되고,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피할 수도 없다면, 서로 느껴야만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그 짐을 출판사가 짊어지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무거운 그 짐... 그야말로 오물 더미 같은 그 짐! 우리의 사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책등에, 표지에, 아니면 어디에라도, ‘돈버는방법’이라고 쓰여있으면 한 번은, 그래도 한 번은 펼쳐보지 않겠나? 우리의 희생을 통해 있어도 될 만한 책을 드디어 만들 수 있게 될는지 모른다. 돈 버는 방법 따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 일과 근본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책, 그놈의 돈 버는 방법과는 절대적으로 무관한 책을 만들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나의 임금에 드디어 만족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그리고 나의 임금에 만족한다는 것이, 더 이상 어떤 종류의 도피를, 내가 원했던 적 없는 종류의 도피를, 뜻하지 않게 되는 건지도 모르고...

2022년 5월 25일 수요일

잠들어 있는 여름

우리가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여름은 펜글씨 교본처럼 우릴 따라 하고 있다. 딸기가 올려진 케잌같이 중요해 보이는 이 여름의 우릴 따라함은 사실 여름이 덧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덧없는 그것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마지막 매력인 밤의 시간이 오자 옷을 벗는 듯 그것은 더위와 상관없어진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 등의 식기를 갖춘 것처럼 여름의 밤은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채로 식탁 앞에 앉아서 미묘해진다. 우리는 식탁 앞에 앉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여름의 키는 이 식탁의 높이에 대해서라면 미묘하게 낮고 안 맞는 것이라, 식사 예절을 차릴 수도 없이 먼 데에 위치한 맛있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누군가가 신경 써서 덜어줘야 한다. 사람들이 식탁에서 전부 나갔다. 여름은 자기 자신의 시간이 본질적으로는 낮이라는 걸,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옷을 헐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가끔은 자신의 더위가 몸이 약한 사람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혼자인 식탁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본다. 여름은 제가 부리는 일사병의 요정들을 맞은편 식탁에 앉히고 혼낸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일사병의 요정들은 입을 내민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여름도 안다. 여름은 자연스럽게 바닷가를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이 외로워하는 여름은 사람들이 놀러 오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물을 데울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사람은 계절과는 상관없는 듯이 편한 차림을 하고 바닷가의 물에 몸이 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공놀이를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인스타에 올릴 자기 자신의 사진을 찍고 있다. 여름도 초코가 올라간 와플처럼 자기 자신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고 싶다. 그런데 이 어린 성정의 여름은 사진 찍히는 걸 부끄러워하고 까르륵 웃는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을 튀기면서 놀고 있고, 튀는 물에 여름이 입은 옷이 젖는다. 이런 여름의 뒷모습을 아직 다가오지 않은 가을과 겨울이, 그리고 이미 지나버린 봄이, 유난히 신경을 쓰며 몰래 지켜보고 있다. 사계 중에서 여름은 장난기가 있고 혼자 있을 때 외로워하며 그중 나이가 제일 어리다. 그래서 여름은 가장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별 이유가 없어도 혼자 웃는다. 가끔 울상이 될 때도 있다. 왜냐하면 활동적인 여름은 자주 넘어지기 때문이다. 팔꿈치가 다 까졌다. 여름의 넘어짐은 장마가 되어 꽤 긴 기간 동안을 집요하게 사람들을 따라다닌다. 어떤 사람은 ‘이거 실은 저 구름이 날 따라오는 것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반쯤은 맞는 말이다. 여름은 시선이 간 인간들한테 눈독 들이기도 한다. 여름이 흘리는 눈물은 떨어지면서 굳어져 우박이 된다. 여름 중에서 우박이 쏟아지는 날은 며칠 없으므로, 여름도 자주 울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여름은 제가 흘린 눈물을, 굳어진 그것을 손에 들고 다른 이에게 가져다주려고 한다. 흘러내리는 것은 손안에 컴팩트하게 쥘 수가 없으므로, 그리고 평범한 빗물이 굳어진 것인데도 여름은 어리니까 가치의 경중을 잘 모른다. 그저 가져다줄 수 있기에 가져다주는 것이다. 여름에게는 그 우박 보석을 가져다줄 만한 이가 있다. 그것은 여름의 언니이다. 여름에게 있어서 언니란 자주 보지 못하고 친구 같으며 별것 아닌 일로도 재잘재잘 말하곤 하는, 없는 부모와 비슷한 이라고 볼 수 있다. 여름의 언니의 이름은 세실이고 여름은 혼자 지붕 위에, 여름밤의 한중간에 앉아 있는 세실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주변 마을은 축제 준비를 마쳤고 거기선 얇은 망으로 금붕어를 건져 올릴 수 있으며 탕후루를 팔기도 하고 꼬치에 자꾸 양념 붓으로 맛있는 양념을 덧바르며 굽기도 한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장난감과 인형이 기다리고 있는 사격을 할 수도 있고 언니의 손을 여름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위에서 잡고 있다. 잘 외로워하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도 여름은 어쩐지 곤란하다. 그런 여름의 얼굴을 세실은 바라보며 웃는다. 여름은 세실의 웃음을 좋아하고, 왠지 좋아할 것 같아서 한 번 일부러 넘어져 봤다가(자주 그러는 것처럼) 절대 그러지 말라는 언니의 당부를 듣는다. 그러다 크게 다치면 무지무지 아플 거란 말에 여름은 침을 삼킨다. 여름의 언니는 여름의 머리 위를 잔잔하게 쓸며 여름에게 고민은 없는지 물어본다. 여름이 꺼내놓은 고민에 세실은 다시 한번 웃는다.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은 잠 속에 빠지거나 다른 계절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재밌는 일은 없는지 구경만 해야 한다는 건데 졸려 하고 있을 여름에게 잠을 깨울 수 있는 방법, 역시 세실에게도 없다. 그럼 책을 써보면 어떻겠니? 네가 잠들어 있어도 사람들이 읽어줄 텐데. 정말로 사람들이 읽어줄까요? 제가 쓴 것을?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네가 잘 쓴다면 읽어주겠지. 여름은 오늘 밤 반복적으로 졸고 있다. 여름이 꾸는 꿈은 미몽에서 벗어나려고 불을 한없이 뒤쫓는 벌레들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그리고 여름이 잠들어 있을 때는 세실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사실 세실은 여름의 언니인 것처럼 여름 앞에서 굴어보기도 하지만 그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어느 여름날, 장마가 한참 내리던 시절 어느 처마 밑에 있는 아이, 비를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를 세실은 눈여겨보았었다. 그 아이가 지금 잠들어 있는 여름이었고 세실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 졸고 있는 것을 깨웠다. 여기서 잠들면 여름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면서.

2022년 5월 23일 월요일

장미 모양 초대장

내던져진 장미 모양 장식은 덧없는 것처럼 곡선을 그리며 공중에서 휘돌다가 떨어졌다.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것은 모험이 아닌 듯이 제 자리에, 지상의 바닥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물로 입수했다……. 옆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저 밑 물이 있는 곳에서 헤엄치고 있자 오히려 그들과 나의 사이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무도 이 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고, 나는 아래에서 소리쳤다. “내려와! 한 명이라도!” 내가 먼저 했으니 너희들도 하란 것은 내가 좋아하는 초대장의 글자 형식이 아니었으나 나는 이 순간이 완벽한 것 같았기에, 뛰어내리기 전의 망설임을 아직 안고서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그 순간 한 명이 내 말을 따라 뛰어내렸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위에서 걸어 내려와 이 물가의 쪽으로 가까이 왔다. “적어도 한 명은 왔군!”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들과 별로 친하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아무 의미 없는 일에 더 몰입할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물가에서 내가 걸어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내게 수건을 건넸다. 나는 그 수건을 이용해 몸을 닦고 물었다. “불 피워 놓은 곳은 어디에 있지?” ‘몸이 차군’ 나는 중얼거리며 안내해 주는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처음에 나 대신 내던졌던 장미 모양의 장식이 떠올랐다. 우리는 불가에 앉아 생선을 구웠고 그러다가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꾼 꿈의 내용이고 그 문제의 장미 모양 장식은 테이블 위에 비슷한 생김새를 갖고 놓여 있다. 꿈에 나온 게 아주 완벽히 이것은 아니겠으나 어차피 난 실내에서 혼자였으므로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이빙을 하자는데 안 한 적이 있었다. 어릴 때는 물에 들어가길 거부하니까 물속으로 내던져진 적도 있었고. 오래된 일이라서 그때 느꼈던 두려움은 희미하다. 내게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먼저 뛰어내린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한 명이라도 내려오라고 소리친 점이다. 뭔가 의미심장한 것 같았다. 난 꿈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데, 오늘 꾼 꿈은 희한하게도 장 보고 있을 때도 생각나고 내 뇌리에서 없어지질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내가 먼저 했으니 너희들도 해.’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런 요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각자의 마음이란 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는데 비둘기 떼가 모여서 음식물 쓰레기봉투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됐다. “지금 나는 비둘기들을 보고 있어. 그러다가 생각난 건데, 혹시 괜찮다면 오늘 사람들끼리 모이지 않을래?” “우리가 비둘기라는 거니? 너의 그 말버릇은 여전하구나. 비하하는 듯하면서 친근하게 구는. 그러나 조심하는 게 좋을걸. 그건 어쩌다가 모욕이 될 수도 있으니까.” “유념하지.” 사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생쥐이고(이 사실을 숨기려고 해본 적은 없다), 작은 생쥐가 아니라 생쥐의 머리를 하고 있는 인간에 가깝다. 이런 존재들을 ‘생쥐 인간’이라고 부르며 나는 같은 생쥐 인간들이 머무르는 데로 갔다. 그러니까 일종의 파티 장소로 나는 향했다. 맨홀 뚜껑을 열고. 아까 가지고 나온 장미 모양 장식은 내 바지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오늘도 그럴듯한 레퍼토리의 치즈 파티였는데, 우리는 치즈에 감싸여져서 그 안에서 진동하는 치즈 냄새와는 다른 냄새, 그러니까 빈 공동의 냄새를 맡아 거기로 향해야 했다. 물론 치즈를 그렇게 많이 준비할 수는 없었으므로 치즈 가루를 뿌린 스티로폼 안에 우리는 들어가야 했으며, 그것을 뚫고 올바른 장소에 도착하면 온전한 치즈 몇 덩이가 접시에 놓여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치즈를 찾아갔다……. 이것이 우리의 파티이다. 생쥐 머리를 인간의 머리로 바꿀 수도 있는데, 물론 우리들이 원천은 인간이니만큼 사실 우리가 하는 일은 생쥐 모양의 가면, 탈을 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완전한 인간은 적성에 안 맞아서, 그리고 지하를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식성을 갖고 있으므로 이 치즈가 담긴 접시는 우리들이 좋아서 덤벼드는 것이라기보단 생쥐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를 상징화한 것에 가깝다. 한 명도 빠짐없이 남김없이 치즈가 담긴 접시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냄새를 잘 맡지 못하면 생쥐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이러한 이벤트는 단지 명목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두운 빈 공동에 나와서 잠시 휴대폰을 꺼내는데 전화가 왔다. 나는 받았다. “그게 네가 날 내던진 모험이니? 어쩌면 긴장감이 없는걸.” 잠에서 깨어나 탁자 위를 보니 아까보다 그 장미 모양 장식과 덜 비슷하게 생긴, 그러나 그 장미 모양 장식임을 확신할 수 있는 열쇠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물론 나는 생쥐 인간이 아니었고……. 두 차례의 연속된 꿈을 나는 곧 잊게 된다.

2022년 5월 16일 월요일

일망타진

한 번의 그물질로 싸그리 잡는다, 투망일까? ‘일망타진’은 좋아하는 사자성어 중 하나다. 출판사 이름을 일망타진으로 하자는 데에는 내가 좋아한다는 것 외 아무 뜻이 없다. 하지만 출판사 이름이 일망타진이라면 그건 무슨 뜻일까? 일망은 뭘 뜻하는 거고, 싸그리 무엇을 잡는다는 뜻일까? 씨줄과 날줄은 무엇이며 그물코는 무엇일까? 그물이 책이라면... 낱장이 씨줄이고... 출판이 그물이라면... 고기는 우리다... 그물이 독자라면... 날줄은 국어... 고기가 책이라면... 그물은 노동이다. 고기가 책이라면... 고기가 책인 편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씨줄은 독자의 노동이고 날줄은 나의 노동이다. 잡는다는 건 뭘까? 읽는다는 걸까? 산다는 걸까? 잡지 못한다는 건 뭘까? 너의 노동과 나의 노동 끝에도 책을 잡지 못한다는 건? 타이밍이 문제였을까? 그물코가 너무 컸나? 책이 너무 작았나? 잡았다가 놓아줄 수도 있을까? 고기는 잡았더라도 놓아줘야만 하는 것이라 치자.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투망은 이상하다. 족대면 모를까. 일망타진이면 놓아줄 수 없다. 뭘 잡고 놓는 것은 수량과 관련된 문제일까? 하나를 잡으면 놓아줄 수 있지만 너무 여럿을, 모조리 잡으면 못 놓는다? 한 권을 읽었다면 놓아줄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권을 읽었다면? 이런 식의 접근은 일망타진 출판사의 방향성과 썩 맞진 않는다. 어렸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바닷가로 소풍을 갔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풀어놓고 한 시간쯤 놀게 했고, 그사이 우리는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줍고 잡았다. 나는 플라스틱 생수통에다 소라게를 몇 마리 넣었다. 시간이 잘 갔다. 다시 버스에 모인 우리는 각자 잡은 것을 비교해 보았다. 나는 많이 잡은 편도 적게 잡은 편도 아니었다. 한 친구가 내게, 소라게들을 놓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어째서? 나는 소라게들을 위해 특별히 입구가 넓은 통을 주웠다. 모래와 자갈도 좀 넣어주었다. 그때 그 친구가 내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뭐라 열띠게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설득당했고, 나처럼 설득당한 몇 명의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한테 가서 이것들을, 불쌍한 소라게 따위를 놓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이미 늦었다고 했다. 이미 늦었다. 이미 버스는 출발했다.

2022년 5월 11일 수요일

시키노모리 인술도장 청소년닌자연무단 「팀 KOTENGU」의 인술 시범

2022년 5월 6일 금요일

신의 형상

아직까지는 신을 만나볼 수 없었다. 편지, 안부 인사, 인터뷰 요청, 선물, 윽박지르기, 애원하기, 젠장 그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지금까지 취해온 행동의 가짓수만 열거해보아도 자명해지지 않는가 이 열렬한 관심,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한 ‘한동안 무심을 가장하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연락하기’까지 포함해 나의 모든 제안과 요청이 거절당했고, 조금은 비참한 심정마저도 들려 하므로 유형별 시도의 횟수는 첨언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언제인가부터는 나도 헤아리지 않고 있다.

그가 그러는 이유도 <논리>적으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A가 B를 만나는 것이 A에게 아무 이득도 되지 못하는데 어째서 A가 굳이 B를 만나야 하는가, 신과 박물학자(인 나라는 일인칭)의 입장을 익명의 존재들로 치환하면 이를 수 있는 가까운 결론이다. (여기에서 이득이란 누군가를 만나고 소통함으로 얻는 최소한의 심리적 만족감까지를 포함한다.)

하지만 그는 이잖아? 즉 그의 소유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잖아? 사랑한다는 것은 응답한다는 거잖아? / 하지만 나는 박물학자잖아? 즉 존재한다 여겨지는 모든 것을 탐구하기로 했잖아? 모든 것이란 모든 것이잖아?

독자들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선행 연구들에 대한 재탐색 외에는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그의 오랜 무응답을 그의 부재(애초부터의)로 해석하지 않기로 전제할 때…… 내가 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권에 따라 신의 장애를 상상한(혹은 증언한) 사례도 이미 있다. 독자들도 잘 아는 사례를 꼽자면 눈을 가린/때로 눈이 먼 정의의 여신이 대표적이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은 정말로 앞을 보지 못할까? 신인데? 애초에 그에게 가릴 눈과 저울 들 팔이 필요했을까? 그가 취한 자세는 인간들이 알기 쉽게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가깝지 않을까?

신은 인간의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눈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보고 있다. 신에게는 다리가 없다. 걷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어디에나 누구보다도 빨리 갈 수 있다. 그에게 음성 언어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입과 귀의 기능도 장담할 수 없다. 그와 소통한 이들이 <들었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 그의 목울대를 거쳐 발성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의사를 전달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목격담 또는 그림을 통해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그의 형상에 이목구비와 수족은 늘 빠짐없이 있다. 아름답게 있다. 필요도 없는데 있다. 나는 그것을 그의 취미로 여기고 싶다. 인간이 TPO에 맞게 때로 기능보다 장식에 치중한 옷을 고르듯…… 그도 드물게 인간을 만날 때는 육신을 입을 것이다. 그의 옷장에 한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는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그의 형상은 현재 기준으로 최소 70억 가지가 존재한다. 흑인이고 백인이며 황인이기도 한 그는 때때로 여성, 가끔은 남성이며 어린아이이기도 하지만 노인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경우 신체적 결함이 있다. 유일신 신앙의 특징은 그 하나뿐인 신에게 모든 권능이 집중되는 것이고, 함정은 완벽한 신의 형상이 한 가지라 믿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왜 전변하지는 못하겠는가. 그의 모습이 겨우 70억 가지에 불과하겠는가. 한편 장자 우대의 관습을 지닌 유목 문화에서 발생한 아브라함계 종교에 기반하여,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뚜렷한 장애가 없는 남성으로 설정하는 것에는 모순이 없는 듯하지만, 그 형상의 피부색이 흴수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비웃음 없이는 마저 쓸 수 없으므로 생략하겠다.

역사상 가장 신에 가까웠다고 기록된 이가 자기 입으로―인간의 입으로― 말했다. “너희 중 가장 낮은 이가 바로 나다.” 후대의 화가들은 대체로 그를 미형의 백인 남성으로 묘사했다. 그려진 그에게는 장애가 없다. 보통의 인간과 다른 점이라곤 후광뿐이다. 그것을 장애의 일종이라 말해도 좋을까? 남들에게는 없는 것이기에. 앞서 나는 우리가 취한 신의 형상(아브라함계 종교적 전제 안에서) 대부분에 결함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결함은 장애로, 어떤 결함은 장애로 분류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장애라고 봐도 좋을까?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없게 만드는, 즉 일상생활에 방해가 되었을 그 머리 뒤 빛의 다발 혹은 고리를.

일전에 신을 모독하려 했다면 먼저 그에 대해 말할 것이라 예고한 바 있다. 이 글은 그를 모독하려는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불쾌하다면 연락이 오겠지, 바라던 바라고 하겠다. 보고 계시다면 연락에 응답 좀 하십시오.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한테는.

결론이자 전제이고 (아브라함계 종교의) 그가 그랬듯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 하나, 신에 대한 연구와 논의를 방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그가 <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이잖아?’ (‘울트라맨이 개미에게 질 리가 없잖아?’ 같은 어조로) 그러나 혹은 그러니 반박도 같은 방식으로 가능하다. 그래, 그는 신이잖아.

그래서? 왜 그를 우리 유한한 존재의 인식 안에 가두려 하지?

2022년 5월 4일 수요일

외삽연극

현실에 없는 연극 또는 연극제를 있다 치고 소개합니다. 이 기획에서 연극이라는 단어는 유사한 영역과 형식을 너그럽게 포괄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지켜보는 사람, 관객은 존재할 것입니다.

2022년 5월 3일 화요일

금치산미디어

나는 멍하니 누워 있다. 왜 내가 나의 재산을 멋대로 다룰 수 있는 거지?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지 않던가? 도대체 어떻게, 나의 재산에 대한 나 자신의 엉망진창 재산 관리가 금지되어 있지 않은 걸까? 재산이란 게 정말 중요한 거라면, 거기 어떤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재산이란 것에 물론 의미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다들 재산 생각들을 한다. 왜 아니겠나? 다시 말해, 무의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건 내 재산이란 것을 내가 멋대로 해버리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다. 그럼 멋대로 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 그건 고민해볼 만한 일이다. 어쨌든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해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한계 있는 사람인데 나의 재산 다루기에 한계가 없다면 이상하다. 한계가 있어야 한다면 그 한계는 분명 내가 아닌 것, 나 이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냥 형식적인 몇 가지 제한이 아니라, 내가 아닌 뭔가가 나의 재산에 전격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 세계가 가능하지 않으리란 말이다. 왜 가능하지 않냐면, 이미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절대로 결단코 금지될 수 없는 듯이, 내가 내 재산의 가능적 무제한성에 딸려붙는 일은 금지되어야 한다. 재차 왜냐하면, 나의 재산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생각에 쥐꼬리만큼이라도 동의할 수 있는 이에게, ‘금치산미디어’는 활짝 열려 있다.

경제의 자유? 무슨 그런 말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별 씨 개 같은 소리들... 이런 건 어떨까? 아무리 봐도, 저 녀석이 멋대로 자기 재산을 처분하고 엉뚱한 데에 써버리도록 그냥 두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저 녀석에겐 그럴 만한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저 녀석의 탓이 아니다,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이든 저 녀석의 한계를 넘어서고 마는 그토록 거대한 권한이, 저 녀석에게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나? 만약 저 녀석의 초과된 권한을 부드럽게 덜어주기 위해 정당한 책임 나누기의 일환으로 내 재산의 처분과 관리 역시 나로부터 어느 정도 금지되어야 한다면, 그래도 좋다. 글쎄 그래도 된다지 않아! 이미 그렇다니까! 바꿔 말해 이럴 수도 있다. 정말이지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재산 처분과 관리에 대한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재산의 처분과 관리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일이다, 참을 수 있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런, ‘사람 취급’이라는 이 패습, 재산이라는 매개를 통해 삶의 형태가(‘자유’가) 결정되고 사람으로 감각되는 이 세계에서, 한편 어떤 이들에게는 아예 처분하고 관리할 재산 자체가 없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며 무슨 뜻일까? 이 생각은 사람 아닌 것들에 대한 생각과 그것들이 다뤄지는 방식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없는 것처럼이 아니라 ‘있는 것처럼’ 다뤄지는 그 방식에 대한 생각, 금치산미디어는 바로 그 금지된 생각들과 함께 간다. 어디로 간다는 것일까? 어떻게 금지한다는 걸까? 개가 자신의 녹색 인형을 물고 온다.

2022년 5월 1일 일요일

22년 4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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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57,115원 (0원 + 256,929원 + 186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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