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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9일 수요일

과거학회2

초기 과거학회는 동호에 의해 결성된 모임이었다. 취미가 양식화되는 과정들과 마찬가지로 과거학회 또한 자기 자신의 누림을 위한 노동과 여가 시간의 선용으로 작동했다. 지금은 딱히 그렇지만도 않게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그 취미의 정신 정도는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것 같다. 학회를 탈퇴하려는, 이 글의 저작자인 나는 상임 기술자 윤진(Yoon-jin)이다. 원전 사고로 직업을 잃은 이후 투신하듯 학회에 들어왔고 피프르(fipr) 담당장으로 오십사 년 일했다. 이 글은 나 다음 이 일을 맡을 사람을 위한 안내 책자다. 누가 나를 대신하게 될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오고 있다고 한다. 내게는 그가 아직 추상적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빈 화면에 어렴풋이 드리우는 실루엣이다. 온다고만 하는 그 실루엣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

2022년 1월 19일 수요일

과거학회1

우리는 과거의 스케일에 매료되어 있다. 다가올 미래를 모두 합해도 누적될 과거의 양에 미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우리가 보기에, 가장 클 것은 과거의 규모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모든 행성과 힘과 원자가 죽음의 신에 의해 지나간 시간에 속하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가 극한에 다다르면 현재와 미래가 끝난다. 시간의 화살이 나아감을 멈추는 그 순간, 만사만물은 붕괴한다. 만사만물의 모든 속성은 폐기된다. 남는 것은 되감아보아야만 무언가였음을 알 수 있는 입자 미만의 물질들. 만물은 그렇게 ‘-였음’이라는 단일 범주로 통폐합되고, 그 후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통폐합의 순간에 와서야 세계의 존재 이유가 드러나는데, 세계란 저 ‘-였음’이라는 휴거의 도래를 위해 미리 마련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사물은 저 마지막 순간을 위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각자의 역사를 쌓아갔던 것이다. 그 역사‘였던 것’이 되기 위해서. 이것이 과거학회의 생각이며, 내 생각이다.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불로초를 바라는 듯이

불로초를 바라는 듯이 황제는 '시'를 가져오라고 했다. 눈앞으로, 그것을 만질 수 있게. 이제 거의 골동품에 가까운데도, 황제의 전자 두뇌는 멀쩡했다. 오히려 정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최신예의 해킹 공격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두뇌는 함락되지 않았다. 고물상에서도 값을 쳐주지 않을 것이 어찌 저리 굳건할 수 있을까. 융성과학자이자 빛 미장이인 덴트로비는 무릎을 꿇으며 양손을 바닥에 붙였다.

덴트로비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융성과학자였다. 거리상으로도 그랬고, 감정적으로도 그랬다. 은덕을 입지 못했다면, 덴트로비는 상인들에 의해 우주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부젓가락으로 뇌를 헤집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황제의 타락과 악업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향한 사랑은 한참 전에 그의 목숨값으로 지불이 끝난 뒤였다.

하지만 빛 미장이로서 덴트로비의 의무는 황제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빛 미장이들은 노선을 돌려 해킹 작전을 포기하고 물리적 파괴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역할의 수행자가 덴트로비였다. 그로 인해 그는 괴로웠다. 역할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여덟 명이 그의 역할을 대신 거부해주어야 덴트로비는 자신의 역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언뜻 이해되지 않겠지만, 빛 미장이들에 대해서는 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리에 대해 안다면 당신 또한 덴트로비의 고뇌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덴트로비는 황제의 네 가지 방어막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네 가지 단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각각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 벼려진 물건으로 황제를 지키는 네 가지 방어막의 성질과 일치했다. 성찬식은 만 년에 한 번 있었고 내일이 그날이었다. 덴트로비는 황제의 전선을 교체하게 될 것이었고, 그때가 황제를 네 번 찌를 기회였다.

2021년 9월 1일 수요일

로봇 꿈

진짜 이상한 꿈으로 이어졌는데 나 빼고 다 로봇이야. 엄마도 로봇이고 아빠도 로봇이고 조상 대대로 로봇이고 애인도 로봇이고 구 애인도 로봇이야. 무슨 계기가 있어서 알아차리게 됐는데... 맞다, 내가 누굴 봤어. 그때 그 작자가 무언가를 한 거야. 절대로 인간의 것일 수 없는 괴이한 행동이었어. 동작으로 따지자면 사소하고 작았지. 무슨 행동이었는지 나도 몰라. 그건... 그건 묘사하지 못하겠어. 하여튼 그걸 본 충격이 너무 컸어. 잠깐 내가 죽은 줄 알았다니까. 

정신을 차리고 달아나려고 했지. 왜 달아나냐고? 몰라, 이 자식아. 무서워서 그랬겠지. 웃긴 게 뭔지 알아? 뛰기 시작한 순간 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문자와 전화가 쏟아지는 거야. 아빠가 차에 치였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래. 엄마가 집에 불이 났대. 애인이 오늘 완전 할 마음이래. 또 뭐 친구들, 술을 먹자느니, 네가 바람을 피우는 걸 봤다느니, 복권에 당첨되었다느니. 말이 돼? 일생에 한 번 있기도 어려운 사건들이 어떻게 이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냐고. 날 붙잡으려는 것처럼?

때마침 사람들이 쫓아오는 거야. 집에서 나오고 학교에서 나오고 관공서를 나오고 길거리에서. 아파트에서 나오고 빌라에서 나오고 편의점에서 나오고 이마트를 나와서 쫓아오는 거야. 한참을 뛰었어. 뛰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나한테 문자나 전화를 안 한 사람. 그 사람은 로봇이 아닐 거야. 그 사람은 사람이 맞을 거야. 뛰면서 확인했지. 정말 있었어. 여동생. 여동생한테는 전화나 문자 온 게 없었어. 희망을 찾은 것 같았지. 날 도와줄 것 같았어. 떨리는 맘으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하니 곧장 받더라. 그런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미안, 오빠. 나도 로봇이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어.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니? 꿈이라고 영원히 뛸 수 있어? 얼마 못 가 잡혔어. 이 다음부터는 순식간에 일어났지. 그들은 내 장기를 다 뜯어냈고, 파이프와 튜브를 삽입한 다음 나를 프레임으로 만들었어. 머리에 변속기를 달았고, 어깨와 골반 사이에 체인을 걸었지. 쇄골부터 코에 이르기까지 꿰매 앞바퀴, 배꼽부터 샅까지 꿰매 뒷바퀴를 끼우고... 나를 자전거로 만들었어.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선물했지. 그 아이가 나를 타고 집에 돌아갔어. 훔쳐갈 수도 있으니까 집에 들이라는 말에 현관에 나를 내려놓고 씻으러 갔지. 

현관에 세워진 나는 멀리 거실에 둔 티브이를 봤어. 티브이를 보니까 지구도 로봇이고 우주도 로봇이고 공기도 로봇이래. 주기율표에 있는 게 다 로봇이래. 축구공도 로봇이고 윷놀이도 로봇이래. 꿈속에서 로봇 아닌 게 없는데 나만 그냥 사람이었던 자전거야. 오늘 밤에 이어서 꾸기로 했으니까, 내일 전화를 해서 알려줄게. 어떻게 되었는지. 꿈을 계속 이어 꿀 수 있어서 편하다.

2020년 12월 30일 수요일

갱 단원

수염 긴 남자는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수염 긴 남자는 갱 단원이다. 역마차를 털어 반을 조직에 던 다음 나머지 반을 넝마주이 같은 자신의 코트에 욱여넣는다. 거물은 아니지만, 현상 수배 전단 뭉치 어디쯤에는 그를 수배하는 전단이 있다. 보안관에게는 그를 잡을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들은 수염 긴 남자가 마셔온 브랜디처럼 사라져 버렸다.

수염 긴 남자는 수납장에서 브랜디를 꺼내 마신다.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그의 수염을 다 적셔 놓는다. 그는 병을 벽에 집어 던지고 더러운 침대에 눕는다. 천장을 본다. 전쟁은 이십 년 넘게 끝나지 않았고, 그의 머릿속에서 그는 갱이 아니라 병사다. 많이 죽였다. 전쟁이니까. 그는 교수대에 갈 기회를 놓쳐왔고 그가 속한 갱에는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기병대로부터 빼앗은, 이제 쓰레기가 되어버린 모자로 그는 얼굴을 덮는다. 그는 멋 내지 않는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전쟁통에 무슨 결혼이람? 그러나 전쟁통에도 결혼한 사람들이 있음을 그는 안다. 그들은 죽거나 전부 죽었다.

모자에서 나는 악취에도 불구하고, 수염 긴 남자는 자신이 죽지 않는 사람 같다. 썩어 달랑거리는 이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도 자신을 죽일 수 없을 것 같다. 죽을 기회를 이미 다 쓴 거라면 어쩌지, 섬망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아래층의 총소리를 듣는다. 동료 갱 단원들의 비명이 들리고, 조금 뒤에 그가 있던 방의 문이 열린다. 수염 긴 남자는 얼굴에서 모자를 내린다. 문턱에 있는 것은 노예놈도, 현상금 사냥꾼도, 그가 죽인 사람도 아니다. 그는 다른 갱의 남자다. 반다나로 얼굴을 가려도 알 수 있다. 목에 오천 달러가 걸려 있다는 거물 자식. 수염 긴 남자는 키득키득 웃다가 침대 위에 내던져 놓은 리볼버를 집는다. 라이플이 수염 긴 남자를 겨누고 있다. 수염 긴 남자는 약실에 탄약을 채우며 말한다. 죽을 기회가 와서 좋구나, 목 매달릴 자식아. 그는 손톱 없는 검지를 당겨 자신의 관자를 쏜다. 수염이 뒤로 젖혀진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죽인 모든 사람을 본다. 그들 머리의 뚫린 구멍 속으로 뛰어가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본다.

2020년 10월 8일 목요일

아이들

“그리고 몇 가지 제합시다. 누가 저것을 만들었느니 하는 얘기를요. 우리 아닌 문명, 우리 아닌 존재, 신? 그런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중요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다른 대원들 얘기도 중요하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할 것은 여러분을 다소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각자의 태도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는 그런 시선이 어려운지 원탁을 내려다봅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쳐들어요.

“저 별에 대해 알고 난 이후로 난 생각을 검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옳지 않은 생각, 악한 꿈을 꾸게 될까 두려웠던 겁니다. 생각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전에는 사실 생각을 많이 했지요.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거요. 사람을 죽여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머릿속에서요. 이 안에는 제가 죽여버린 대원도 몇 명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살인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코로 맡을 수 있고, 아까 꺼낸 사과와 같이 만져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머릿속에는 애걸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가엽고 눈물겨울수록 그들을 해치는 내 상상은 더 즐거워져요. 그들은 말하지요. 멈춰달라고, 괴롭다고,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이보다 더한 생각도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안 좋습니다. 대원들은 험악한 상을 하고서 당장이라도 그의 입을 틀어막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했던 것 중에 가장 추악하고도 정당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었죠?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억에서 사라졌어도, 그것은 생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은 이뤄졌어요. 박해자가 등장하면 다행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무고한 희생양들이 서식합니다. 저 별에서 피와 살을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내겐 그것이 영화 속의 일처럼, 연출된 일처럼 여겨지지 않아요.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일과 같이. 그리고 이제 모르게 되었어요. 나와 여러분이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난 같다고 느껴요. 알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묻어 넘길 자신이 있어요? 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저들은 구별되지 않으니까요. 이제 나는 인간이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별을 다림대로 하여 우리의 영혼을 고르게 펴야 한다고요. 삶이 곧 수양일 수 있도록. 그를 위해서 우리는 윤리를 다시 얻어야 합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 아이들

2020년 7월 29일 수요일

화염구 캐치볼

잘 단련된 마법사들은 화염구 쓰는 것 하나만 봐도 그 역량을 넉넉히 파악할 수 있다. 구속(pitch speed)은 물론 회전을 싣느냐 마느냐, 직선으로 묵직하게 때려 박을 것이냐 측면 혹은 위아래로 휘게 만들 것이냐 하는 모든 방면에 마법사의 재능과 경험이 반영된다. 마법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일에 예민한 게임 센스가 필요하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대다수의 마법사들이 노는 날이면 오손도손 모여 화염구 캐치볼을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염구를 받아내는 것도 좋은 훈련이 된다. 초기에는 마력을 이용한 원격 조종 능력을 훈련할 요량으로 마법의 손을 사용했다. 마법의 손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손을 불러내는 마법으로 마법사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원하는 동작을 취할 수 있다. 마법사들은 마법의 손으로 날아오는 화염구를 움켜잡았다(그래서 캐치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됨에 따라 마법의 손으로는 화염구를 받아내기 어려워졌다. 화염구가 거의 무한히 강해질 수 있는 데 반해 마법의 손은 성장 한계가 명확했던 것이다. 너무 빨라서 맞아 죽고 마법의 손을 뚫고 들어오는 화염구에 불타 죽고 하면서 마법의 손을 사용하는 캐치볼은 이제 마법 노인정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실천적 실험단계가 있었다. 주문 반사나 역재생 마법으로 지근거리에서 튕겨내 상대에게 돌려주는 유형(자연스런 공수전환)이 있었고 감속 마법이나 시간 지연 마법으로 속도를 늦추는 유형도 시선을 끌었다. 몸에 보호막을 두른 다음 몸을 던져 잡아내는 유형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마법의 손과 같은 이유로 이내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유형이 공존하며 취향껏 화염구를 주고 받는다. 비록 ‘잡는다’는 의미는 많이 사라져버렸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마법의 손의 상위 마법인 타오르는 손을 사용하는 형태가 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타오르는 손은 이미 불타고 있어서 화염이나 폭발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최근 많은 아카데미에서 화염구 캐치볼을 전교생의 공통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려고 한다. 이미 시범 교과목으로 편성된 아카데미도 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아주 좋다고 들었다. 자신과 자신의 연장을 다루는 일은 즐겁다. 즐거움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기쁘다. 화염구 캐치볼은 즐겁고 기쁜 행위고, 마법사들은 화염구 캐치볼을 사랑한다. 어제도 많은 마법사들이 뒤뜰이며 공터에서 화염구를 주고 받았다. 살갑고 진지한 얼굴로. 언제 타 죽더라도 괜찮다는 얼굴을 하면서 말이다.

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윤리의 감각

여기 모인 대원들은 그에게 자주 윽박지르고는 했지요. 그가 어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되는 사람이었어요. 무엇이든 적응을 어려워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사람. 괜스레 생각만 많아져서, 그 생각이 자신의 안과 밖을 검게 물들여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자신이 가장 보잘것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사람. 다가올 내일을 두려워하며 지나간 지난날에 골몰하다가 사실 그때 죽었으면 어떨까 자주 생각하는 사람.

그럴 때마다 저 별에도 우두커니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타났을 테지요.

그는 그러나 하려던 말을 물리치지는 않습니다. 그는 제 나름의 표정을 지어요. 이 사람은 그가 가끔 내게 보여주었던 모습, 이 사람을 좋아하게끔 만들어 주었던 그런 모습을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려고 하고 있어요.

“여기서 회의를 끝낼 수는 없어요. 회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알아요. 판단은 우리의 것이 아니죠. 우리는 일개 탐사대원에 불과하고 우리에게는 따르도록 되어 있는 명령 체계가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입장을 가질 수 있어요. 나는 내 입장, 내 말이 첨부될 회의록에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판단 주체가 듣거나 읽을 수 있게요.”

일단은 다들 듣고 있습니다.

“저 별과 별의 행위가 파악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경악과 충격은 단지 그 기술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원들 의견을 귀담아들었습니다만, 저것을 어떻게 쓰겠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런 논의를 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지 않나요? 필요한 것은 윤리의 감각입니다. ‘생각한다’는 의식적-무의식적 행위를 통해 생각 속 객체가 실재하고 또 관측된다는 것은 이 윤리의 감각을 제하고서는 논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것이 우리와 쌍을 이루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것을 윤리로 감각해야 합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27일 월요일

양가감정

대장이 눈쌀을 찌푸립니다. 갑작스레 짜증이 솟구쳐서 나는….

여기 모인 대원들을 죽여버리는 상상을 해봅니다. 톱으로 썬 다음 채칼로 벗겨내는 생각을 해봅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까닭이지요. 로봇에게도 저 별과 같은 슬라이드가 있어서, 무언가를 생각할 때 그것이 실재하게 된다고 한들 대수롭지 않을 거예요. 나는 솜사탕 같은 연인의 머리를 바라봅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는 섬세하고 유약한 사람입니다. 그의 어깨는 매끈한 조약돌처럼 동그랗고 그것이 나는 귀엽습니다. 헛웃음이 나옵니다. 인간은 어째서 자신의 오만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신들이야말로 끊임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아찰나 속 취산된 물질임을 왜 모르고 있을까요? 그것은 엄연한데요. 그 무지(無知)로부터 이런 귀여움이, 멋쩍은 웃음이 나오나요? 참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23일 목요일

갑론을박

그때 누가 입을 엽니다. 정비공 대원의 오른편, 두 칸 떨어진 자리에 앉은 연구자 대원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말할 게 별로 없습니다. 그리 중요한 사람도 아니고요. 여기 내게 중요한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정비공 대원과 비슷한 생각입니다. 예컨대 저 별을, 혹은 저런 기술을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필요에 따라 개인의 생각을 들여다본다고 가정해보자고요. 이것이 정치적 폭압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의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 의견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듣자 하니 아까부터 비약이 심해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들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분명 두 대원의 말대로 악용될 소지가 있고, 서로를 못 믿게 되고 하여튼 안 좋게 끝날 여지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하냐고요. 문제는 언제나 있어요. 그러나 미래에도 여전히 문제일지 우리는 몰라요. 나는 저 행성을 연구하여 인류 발전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어요. 발전의 정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어요.”

“동의합니다. 사실에 집중해봅시다. 누구의 작품이든 간에 저 행성에 깃든 기술은 경이로운 거예요. 그리고 저것 또한 세계의 일부입니다. 옛적부터 우리는 자연에서 배웠고 그 덕택에 발전했어요. 저 별의 기술을 배움으로써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 못 합니까? 한번 되돌아봐요. 원하지 않아도 가지기를 멈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를요. 우리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고 언제나 그 과정 중에 있어요. 물러설지언정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는 않았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기록서기 대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고 말합니다.

“의문이 계속 생깁니다. 생각이라고 일컫는 활동이 우리 몸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우리는 단지 빌려올 뿐으로. 저 행성의 존재가 그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나? 어제의 가설이 틀린 가설이라면. 행성이 우리의 생각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이 이미 우주를 점유하고 있고 수집하는 것이 우리라면? 재현이 앞이고 우리가 뒤라면. 실험을 시도해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저 별에 착륙해 걷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의 머릿속에 내가 떠오르고, 이내 걷기 시작할까요? 만약 저 별에 소행성이 충돌한다면. 핵탄두로 저 별을 파괴한다면. 인간은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실험 같은 건 안 합니다.”

대장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 몫이 아닙니다. 보고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 얘기를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이쯤 하고 보고 절차에 들어갈 것입니다. 늘 하던 것처럼 회의록을 첨부하겠습니다.”

그제서야 내 앞에 있는 나의 사람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립니다. 시선이 쏠리자 호감을 주려는 듯 어색하게 헤헤 웃는 그는 오히려 한없이 어수룩해 보입니다.

“제게도 말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의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12일 일요일

정비공 대원

모두가 정비공 대원을 쳐다봅니다. 정비공 대원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지만, 생각이 조금 엉켰는지 “주목, 주목할 만한,”이라는 말을 두어 번 꺼냈다가 씹어버리고 맙니다. 숨을 고른 다음에는 자신의 말을 궤도에 올려놓았지만요.

“주목할 만한 발견이란 것에는 토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입니다. 나는 정비공입니다. 기계의 작동 구조에 관해서는 여기 누구보다 더 잘 알아요. 저 행성은 지적 설계물입니다. 설계자는 신이거나 신적인 어떤 존재겠죠. 아닐 수가 없습니다. 청원합니다. 저거 건드리지 맙시다. 라디오를 맞닥뜨린 개가 한 번 빙 돌아 그것을 지나치듯이. 내 종교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목울대를 걸걸하게 울린 다음 입을 엽니다.

“여기 여섯 명의 인간이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만 속으로는 어떤 것이든 떠올리고 있을 테고, 무언가를 말해왔을 거고 개중에는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은밀한 것이 숨어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누가 그걸 알아내길 원합니까? 그런 어린애 욕망이 있어요? 은근히 발각되기를 바라는? 집어치워요. 생각은 무조건적, 무제한적인 자유여야만 해요. 언제나 어디서나 그러한 속성을 잃어버려선 안 돼요. 틀려요? 대규모의 재탐사대를 꾸려 저 행성을 연구한다고 칩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설계하고 터득한 기술을 응용할 것 아닙니까? 그 결과에서 낙천적인 미래를 볼 수 있습니까? 따져봐요. 얻을 것은 무엇이죠. 잃을 것은 또 무엇이고 그것은 영영 잃게 됩니까? 내게는 오직 사악하고, 탐욕스런 미래만이 보여요. 알잖습니까 다들? 생각이란 어디까지나 인간 안에 있어야지 유익하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야만 생각이고, 생각이란 그래야 합니다. 희박한 확률일지언정 누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당연히 여겨지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신뢰할 수 없고 누굴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후회할 겁니다. 별은 불신의 씨앗이 될 것이고 인류 쇠퇴의 밑거름이 될 겁니다.”

정비공 대원은 대원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뜸을 들여요.

“솎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입니다. 보고는 올립니다. 다만 다른 보통의 별과 다를 바 없다고 합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저 행성을 묻어두고, 인간이 역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 다음, 해왔던 것을 지속하는 일입니다.”

정비공 대원이 비타민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서 말합니다.

“내 얘긴 이걸로 끝입니다.”

회의실 안에 연기가 퍼져나가지만 다들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연기 속에는 인간의 몸에 좋은 물질이 잔뜩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정비공 대원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말했다기 애매한 말들을 중얼거립니다. ‘하여간, 아무튼….’처럼 큰 의미 없이 자기 자신을 향하는 말들 말입니다. 다른 대원들은 금 막대기를 앙다문 것처럼 입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장은 손으로 턱을 받치고서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대장이 정비공 대원의 말에 크게 감명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쩔까요? 나의 그이가 지금 말을 꺼내면 좋겠습니까? 정비공 대원의 말을 지지하고 있을 그이는 잔뜩 긴장해 있습니다. 사선으로 고개를 움찔대며 살금살금 내 눈치를 보고 있어요. 더 말할 사람이 없다면 그이는 힘을 실어주게 될 겁니다. 정비공 대원이 내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적은 없지만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죠.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1일 수요일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회의를 재개합니다. 화상 담당자는 스크린을 띄우고 Jasper-33a에 좌표축을 맞추어 주세요.”

그이가 조정간으로 가 단추 몇 개를 누릅니다. 허공으로부터 홀로그램 스크린이 쥐어뜯기듯 벌어져 나옵니다. 불쾌한 푸른색의 스크린 속에 그가 말했던 쥐색 행성이 대문짝만한 크기로 나타납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잘 몰랐습니다. 행성은 아름답기를 포기한 것처럼 우두커니 칙칙한 색빛입니다. 사람 눈에는 다르게 보일까요? 순식간에 나는 저것을 불신합니다.

대장이 말을 이어나갑니다.

“Jasper-33a는 지금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활화산처럼 왕성하게요. 알다시피 저것은 지구와 관계 맺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인간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인데, 요는 인류의 생각을 저장한 다음 행성 표면에 투사한다는 것입니다. 일등 탐험 대원, 가져온 것을 이리로.”

일등 탐험 대원은 표본봉투 하나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사과 한 알이 들어 있습니다.

“일등 탐험 대원이 저 행성에서 노획한 사과입니다. 누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사과겠죠. 우리들의 장비로 조사해본 결과, 유기분자구조는 물론 무기성분 조성 칼륨(K) 57%, 인(P) 17%, 칼슘(Ca) 10%, 이하 구성 원소까지 지구의 사과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과입니다. 사과가 그렇듯 맛도 좋을 것입니다.”

“아삭아삭하겠죠.”

일등 탐험 대원이 중얼거립니다. 대장은 그저 입술을 한번 오므리고 맙니다. 그것이 일등 탐험 대원의 말에 대한 반응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생각이라는 것이 현실의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리적 실체라는 것입니다. 은하와 행성을 막론하고 처음 발견한 경이입니다. 천문사, 아니 과학사에 길이 남을 발견입니다. 우리들, 우주선의 이름이 영속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이 행성의 존재를 조기에 보고하고 조기에 귀환하여 대규모의 공학자와 과학자를 동원해 연구 및 재탐사를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들 생각합니까? 빠르고 간략하게 부탁합니다.”

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걸걸한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옵니다.

“께름칙합니다.”

망부석처럼 단단해 뵈는 그의 팔뚝이 테이블 위를 바쁘게 움직입니다. 팔뚝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목에 걸린 조그마한 나무 십자가가 흔들립니다.

“흉측하다 이겁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정비공 대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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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1일 목요일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예?”

화들짝 놀란 그가 비스킷을 떨어뜨립니다. 비스킷 가루가 휘날려요.

“당신 말대로 우리는 연인이 아닌가요? 당신의 편이 되고 싶고 당신의 고민을 부수어 놓고 싶어요. 발에 채인 민들레 머리가 부서지듯이. 나는 발이 되고 싶어요. 눈물을 글썽이지 말아요. 양심적 당신. 당신께 저 행성은 원죄 같은 모양이지만, 죄는 사랑으로 척을 질 수 있다고 익히 들어 알아요. 그러니 함께 갑시다.”

당신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입니다.

“미안해요. 나 바보 같죠. 하지만 용기가 조금 생기는 것 같기도 해요. 대원들을 생각하면 어둠이 몰려오지만서도.”

“어둠은 빛과 별개의 것이 아니에요. 빛이 빠져나간 자리에 불과하죠.”

그가 내 팔 안으로 머리를 파묻으며 말합니다.

“알겠어요.”

내가 한 말이 진심인 걸 알았나봐요. 이제 당신은 눈물을 글썽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회의장으로 걸어갑니다. 자동문이 소리도 없이 열려요. 회의장 끝에는 금속성의 원탁이 하나 있고, 그것을 가운데로 다섯 명의 대원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작업복 차림의 대원들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행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겠지요. 대장이 우리의 도착을 알아챕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화장실에 참 오래도 갔다온다고, 누가 비아냥거립니다. 로봇은 왜 달고 오느냐고 부대장이 퉁명스레 말합니다. 나는 다만 내 사람의 위장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자리에 앉은 그의 곁에 서 있습니다. 대장은 회의를 재개하고자 합니다.

2020년 2월 24일 월요일

너는 만능의 비유를 찾았다

시대 이곳저곳을 오가며 찾아냈다는 만능의 비유를 어제 너는 보여주었다. 말끝에 귀한 웃음을 덧붙이면서 너는, 그것이 발명한 비유가 아니라 찾아낸 비유라고 하였지. 문진처럼 자상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가장 먼저 보게 될 나의 반응이 궁금했다고. 나는 일체의 숨김 없이 내 느낌을 진실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찾아냈기 때문에 여타의 비유는 모두 다 사라질 거예요.”

곱씹어보아도 만능의 비유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중독될 정도로. 온종일 그 비유에 감탄하게 되고. 만사 괴로움에도 그 비유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뿐. 네가 죽어 폐기되었기에 이제 그 비유는 내게만 있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직은. 다만 에둘러 말해보려고 하는데, 그조차 잘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비유에는 우리가 비유를 이해할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효과를 아득히 웃도는 것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낄 보편적인 힘이 존재한다. 그것은 민족을 초월한다. 문화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에 따른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 비유는 과거에 있던 것보다, 미래에 올 것들보다 지적이고 정서적이다. 그것은 무자비하다. 그것은 언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다. 그것은 청자와 독자의 마음에 절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완결성이고 그래서 예술은 무의미해진다. 모든 사람이 그 비유를 알게 되었을 때는.

그래서 생각한 것이다. 네가 죽은 오늘, 나 혼자 알고 있는 만능의 비유를 내일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어떨까 하고. 네 의도와는 아무 상관 없이. 네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처럼. 네가 인류에서 분별한 우리를 꺼내놓은 것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감탄을 자아낸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2020년 2월 4일 화요일

어떤 TRPG PLAY의 로그


플레이어1 : 스푼하임이 드래곤의 눈을 검으로 찌른 다음 막 헤집어 놔요.
GM : 드래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습니다. 매달린 스푼하임을 떨구려고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요.
플레이어1 : 뿔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도록 버텨 볼게요.

⚄⚅ 

GM : 스푼하임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져 나옵니다. 뿔을 붙잡고 버텨내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한편 드래곤은 많이 지친 것 같아요.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서 혀를 쭉 내밀고 헐떡거립니다. 아트만은 어떻게 할 거죠?
플레이어2 : 다시 한 번 드래곤의 정신에 침입해서 그가 지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해볼게요.
GM : 정신 지배 마법을 사용하는 거죠?
플레이어2 : 네.

⚂⚂

GM : 아트만이 조종하는 마법적인 에너지는 높은 탑에 물안개가 드리워지듯이 드래곤의 정신을 천천히 뒤덮어 갑니다. 그런데 순간, 빛에 악령들이 물러가듯 안개가 싹 흩어져 버려요. 드래곤이 아트만의 마법적인 에너지를 역으로 이용해 정신 지배 마법을 되돌려 버린 겁니다!
플레이어2 :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GM : 아트만의 정신은 드래곤에게 귀속되어 버립니다.
플레이어1 : 우리를 공격하나요?
GM : 아뇨, 드래곤은 단지 아트만의 입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드래곤 : 필멸자야, 돌아가라,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플레이어2 : 굉장히 선한 드래곤이야.
플레이어3 : 악 성향인 크루프는 쓰러진 드래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드워프 수장 나쟈에게서 받은 용 살해의 화살을 장전해서 머리에 겨눕니다.
플레이어4 : 비올라는 화살에 무기 축성을 걸어 공격력을 증폭시킬게요. 간편 주문이라서 주사위를 굴리지 않아도 축복에 성공해요.
GM : 용 살해의 화살은 용을 죽이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해졌습니다. 쏩니까?
플레이어3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드래곤 : 인간의 행동에는, 아니, 지성을 가진 모든 존재의 행동에는 각자의 신분에 걸맞는 윤리가 필요하다. 이 앞에 있는 것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윤리다. 

플레이어3 : 말을 끝내기도 전에 쏴 버려요.
플레이어4 : 와. 나쁘다, 약간.
플레이어1 : 크루프는 원래부터 좀 개새끼였어.
GM : 용 살해의 화살이 생물처럼 날아가 드래곤의 두꺼운 머릿가죽을 뚫어버립니다. 화살에 담긴 마력이 보석에 가까운 드래곤의 뇌를 터뜨려 버립니다. 아트만에게 걸린 정신 지배 마법도 풀립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날개 달린 것들의 친구였던 현자 드래곤 수실라를 죽였습니다. 이제 어떡하나요?
플레이어3 : 지체하지 않고 드래곤의 둥지로 갑니다. 드래곤이 막고 있던 종유석 샛길을 지나서요. 그리고 드래곤이 무엇을 지키고 있었는지를 봐요.
GM : 크루프가 달음박질하여 드래곤의 둥지로 갑니다. 평평한 바위 위에 약병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플레이어3 : 그게 다예요?
GM : 네.
플레이어3 : 약병은 다 같은 약병인가요?
GM : 네. 크루프는 차이점을 느끼지 못합니다.
플레이어3 : 약병 세 개를 복대 안의 비밀 주머니에 숨기고 하나만 있는 것처럼 놔둡니다.
플레이어1 : 스푼하임이 뒤따라 들어왔어요. 한참을 둘러보더니 그리고 허탈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스푼하임 : 난 무슨 보물이라도 지키고 있는 줄 알았네!

플레이어4 : 비올라도 말합니다.

비올라 : 고작 이거 한 병뿐이야?

플레이어4 : 그리고 아트만에게 이게 무슨 물약인지 알겠느냐고 물어봅니다.
플레이어2 : 마나 포털에 접속할게요.

⚀⚁⚀

플레이어2 : 검색해도 나오는 것이 없네요.
플레이어3 : 그렇다면 엄청난 아티팩트겠지?
플레이어2 : 아트만이 말합니다.

아트만 : 마나 포탈에서 정보를 찾을 수 없는 물건이라면 값어치를 산정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없다는 거지. 이걸 팔아먹기는 쉽지 않을 거야, 크루프. 그러니 얼른 빼돌린 것을 돌려놔.

플레이어3 : 크루프는 히죽 웃고선 아까 챙긴 약병 하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나머지 두 개는 주머니 안에 그대로 둡니다. 그리고 말해요.

크루프 : 선생님을 속일 수는 없군요. 하지만 똑같은 거예요.

플레이어4 : 그냥 마셔 보는 게 어때?
플레이어1 : 내가 마실까?
플레이어4 : 그게 제일 자연스럽지.
플레이어1 : 드래곤하고 싸우느라 땀을 잔뜩 흘린 스푼하임이 갈증을 못 이기고 약병을 낚아채 꿀떡꿀떡 들이킵니다. 어떻게 되죠?
GM : 음, 좋아요. 무색무취의 물약이 스푼하임의 목구멍을 타고 흐릅니다.
플레이어1 : 그래서요?
GM : 물약이 가진 마법적인 힘이 스푼하임의 체내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물약을 마신 스푼하임은 고양감에 휩싸이며 세계의 비밀 일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내용은 이래요. 스푼하임은 그간의 행동이... 이 세계 바깥에 있는 플레이어의, 주사위의 결과 값에 따라 행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스푼하임은 자신이 행동하거나, 반응하거나, 언급되지 않는 곳에서는 죽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스푼하임은 스푼하임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이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된 것을 종합해 스푼하임은, 자신과 동료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앎들은 모두 스푼하임의 지식, 지능과는 상관없이 직관에다가 직접 꽂아주는 진리입니다. 스푼하임은 이제 플레이어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플레이어2 : 엥?
플레이어1 : 그럼 뭘 하면 되는 거죠?
GM : 뭘 하긴요. 상황에 맞게 대사를 치면 되죠. 티알피지 처음 합니까?

스푼하임 : 어... 음... 능력치의 변동은 없는 거죠?

GM : 그렇습니다.

아트만 : 자네 괜찮은가?
비올라 : 맛이 가버린 거 아닐까요?
스푼하임 : 어... 아니, 할 말을 못 찾겠네요. 이게 룰북에 있는 첫 번째 시나리오라고요?


GM : 네.

스푼하임 : ....5분만 쉬었다 하죠.

2019년 10월 4일 금요일

입출력의 건

“당신 앞에서 뭔갈 잔뜩 먹는 거요. 좋아하는 일이지요. 몇 번이고 봤으니까 당신도 알 거로 생각합니다. 잠시 나와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로봇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당신은 나의 연인이니까, 연인은 고민을 주고받을 수도 있는 관계이니까,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는 비스킷 봉투의 겉면을 뜯고 비스킷을 꺼내 먹기 시작합니다.

“행성 컴퓨터는 이상한 일을 합니다.”

그는 비스킷 봉투를 아무렇게나 내버려둡니다.

“행성은 인간의 생각을 수집합니다. 인간의 생각을 데이터 조각처럼 변환시켜 끌고 온 다음 조립하지요.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몰라요. 그보다는 언제부터 그랬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난 그냥 기가 죽어버렸죠. 이러한 사실을 눈으로 보고 겸손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무섭지 않아요? 우리의 생각이 휘발되기는커녕 어딘가에 남아 영구적으로 보존된다는 사실이. 보존만이 아니지요.”

그가 비타민 담배를 하나 가져와서 맛있게 피우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재현됩니다! 인간의 끝도 없는 온갖 생각은 저 행성에서 눈으로 볼 수 있게 재현된다니까요! 인간이 떠올리는 모든 것은 저장된 다음 행성 표면에 출현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신기루나 아지랑이가 아녜요. 만지려면 만질 수 있고, 가져오려면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존재해요.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과 똑같이 말입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누굴 죽이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고 합시다. 오, 이런 방금도 잠깐 생각하고 말았어요.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굴 죽이는 일은 일어나게 되고, 그 누구는 저 행성에서 내 생각에 따라 죽습니다. 한 가족이 잠들어 있는 집에 불 지르는 장면을 그려본다고 합시다. 그 일은 그저 상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게 되어버립니다! 수도 없이 많은 이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누굴 죽이거나, 괴롭히거나 특정한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역사를 뒤로 돌리고 물건을 부수고 하는. 감았다 떠지는 생각의 속성을 고려했을 때 아주 잠깐이겠지만, 폭력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이 실재하게 된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그 고통은 물론 원본인 우리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지요. 산물이며 모방인 시뮬레이션 실재자들에게 가해지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안 됩니까? 나의 동료들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몰래 회의장을 빠져나온 것이지요. 우리는 아직 모성에 보고하지 않았어요. 화상 담당자가 나인 걸 알지요? 저 별의 존재를 아는 것은 이 우주선 여섯 명뿐입니다. 나는 저 행성의 존재가 공표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동료들을 설득할 작정이었지요. 하지만 무섭고 두렵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을까요?”

이제 나는 넘칠 듯한 사랑을 담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2019년 7월 6일 토요일

수의 무녀

“1611년.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스테파노의 입을 빌어 ‘생각은 자유다’라고 말했지요. 그것은 사실 인간사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통념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지요. 그 전엔 그렇게 적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극작가에게는 좋은 일이었지요. 오, 인간이 생각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부터의 일이지요. 인간은 생각을 은밀하고도 신성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간섭할 수 없었지요. 추궁할 수 없었지요. 독심술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당신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 또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겠지요. (저는 지금 당신을 창피 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없어서 다행입니다.) 끔찍하고 무서운 일. 장막 뒤서 인간은 온갖 것을 다 생각했지요. 정말로 온갖⋯ 지금도 다들 그렇겠지요. 맞습니다. 어제는 참 우울하고 무력했더랬죠. 기분 나쁜 얘길 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헤헤. 저는 제가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괴로운 순간들이 있을 뿐이고, 그런 순간은 저의 연장이 아니므로 결코 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특히 당신은 마음을 좀 편히 가지세요. 아시겠어요? 일단 물을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그가 물을 마시고 옵니다.

“가끔은 내가 환전소에 죽치고 앉아 있는 환전원 같다고 느낍니다. 글말과 생각의 교환비, 오늘 환율 다르고, 어제 환율 다르듯 고정된 값을 기대할 수 없는 거 아닌가. 같은 단어와 문장이라도, 어제 죽으면 천국 가고 오늘 죽으면 지옥을 가는 인간과 같이. 모든 것이 내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도⋯. 그리고요. 포착되기 이전의 생각이라는 것은, 끝없는 변질과 말랑말랑함 속에서 건져지기, 혹은 채굴되기를 기다리는 그 무언가, 그게 과연 뭘까요? 우리 안의 전기 신호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런데 언어 없이도 가능할까요? 이미지? 장면도 이미지도 언어가 아닙니까. 금 간 보석 같은 것을 상상하며 당신 마음을 생각했다고 우겨본다고 한들.”


“우리는 행성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그 행성은 시궁쥐처럼 잿빛입니다. 위성이 보이죠? 마찬가지로 쥐색입니다. 그들은 별이지만, 별인 것만은 아니래요. 아이슬란드어로 컴퓨터는 ‘수數의 무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그는 초조한 듯 헛박수를 칩니다. 엇갈린 손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저 별은 행성 크기의 컴퓨터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기술로 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수의 무녀’가 비유인 것처럼 컴퓨터라는 말도 비유이지요. 그냥 다 비유인 거, 알지요 당신은. 하여간 별의 맨틀은 스크린입니다. 우리도 꽤 잘나가고 있었지요 그쵸. 이메일로 보낸 닭강정을 다운받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진짜 미쳤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행성 크기의 컴퓨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얼마만큼의 미래를 내다보아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아요. 그리고 저 컴퓨터가 하는 일이란 것은 도저히⋯ 우리 수준에선 기획할 수 없는 거지요.  우주적 단위, 못해도 계界 단위의 작업일 겁니다. 그게 무슨 작업인지를 알아내는 것만 해도 풀기 어려운 매듭이었지요.”

그는 주머니를 뒤져 진공포장된 비스킷 하나를 꺼냅니다.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19년 5월 3일 금요일

줄어드는 욥

사금파리로 얼굴을 긋던 욥은 자신이 어떤 언어와 어떤 음성으로 자신의 신을 찬양하였는가를 생각했다. 욥은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행위 자체가 사탄과의 내기 때문에 그토록 충성하였던 그의 자식을 죽이고 패가를 행한 하나님을 더욱 이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욥의 분노와 절망은 욥의 것이지만 욥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육성과 마음을 통해 세상에 더해지는 분노와 절규는 그가 저주하는 하나님의 총량을 더욱 더 늘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 생산하는 것은 뭐든 음한 것과 양한 것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총량에 더해질 것이므로.

하나님의 총량의 증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에게 이로운 일인가?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욥은 억울하고 원통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그 광대함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욥은 그렇게 생각했다. 욥은 미쳐 버렸던 것이다. 허나 저주를 하고 뭘 한들 욥은 종복이었고 평생을 몸담은 양 목장의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것은 욥이 나기 전부터 정해진 일이었고 그가 살아온 삶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었고 현 상태의 행과 불행에 관계없이 절대로 유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컨대 저 배신감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한에서만 생겨나는 것이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들고 있는 기와 조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울분과 절규를 그만 토하는 것이다. 욥은 이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총량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의 자식들의 죽음은 어처구니없는 것이고, 먼 훗날 그가 다시 부귀하며 새 자식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식은 있던 자식이 아니라 없던 자식이며 있던 자식은 천국에서 부활하든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든 하여튼 어쨌든 뭐든 간에 지금 지상에 그의 곁에 없고 없을 것이며 없던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줄어들면 될 일이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것을 세계에서 빼버리면 될 일이다. 하나님의 것인 자신과 자신의 것이 줄어들면 하나님의 총량도 줄어들 것이므로. 그러려면 먼저 아무것도 생산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은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계신다. 때문에 욥이 모든 것을 멈추고 오히려 제 부피를 줄인다고 하여도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손실이 없을 거였다. 그러나 미쳐 버린 욥에게 있어 <무한함>이란 것은 순 모순덩어리였다. 이를테면 욥이 무한대의 공깃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아내에게 줄 때, 무한한 공깃돌 전체를 주면 자신에게 공깃돌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고 네 번째 공깃돌부터 주면 자신에게 세 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공깃돌을 전부 건네 준 첫 번째의 경우 무한대 빼기 무한대는 0이 되고 네 번째 이후의 공깃돌을 다 준 두 번째 경우에서는 무한대 빼기 무한대는 3이 된다.

그러니 당최 그 <무한함>이라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욥은 저 무한의 전제를 없는 것으로 해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여 줄어들지를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재산을 내버리는 일과는 정반대의 성질일 거였다. 더불어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일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을 거였다.

2018년 12월 25일 화요일

다큐멘터리

카메라맨은 그를 찍었다가 나를 찍고 그도 아니고 나도 아닌 사람을 찍었다가 담배를 피우러 간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나, 사십육억 년이다. 동시에 나는 폼페이의 재로 덮인 사람들 중의 한 명이고 그들이 있는 이 섬이 바로 비극스러운 폼페이다. 나는 우리의 비극을 영상 콘티로 만드는 너를 보고 있다.

다시, 나는 예술학교에서 영상 수업을 듣는 학생 한 명을 바라본다. 그는 나이고, 안타깝게 죽어서 사십육억 년에 나의 삶 스무 해 정도를 이어 붙였다. 우리는 포개어졌다. 그였던 나의 바람은 제 장례식을 지켜보는 것이었고 누가 오는지 않는지를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나, 그, 시간은 장례식을 지켜본다.

영상처럼.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기도 있다. 억장이 무너진 네 부모가 세수를 하고 돌아온다. 쟤가 내 상주 노릇을 한다니 놀랍다. 장례식에 있는 다른 인간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여기 있으며, 뇌의 시동이 꺼졌을 때. 손 아래로 흘린 조약돌처럼 사람의 시야가 툭 떨어질 때, 이렇게 된다고. 우리는 먼 미래로 날아와서 미래의 과거의 총합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두려울 것은 없다. 눈을 감고 아득해져서, 우주에 누적된 슬픔의 고저를 헤아릴 필요도 없다.

폼페이, 재와 먼지가 몽둥이처럼 몸을 두들기는 광경, 먼저 죽은 아이들과 공중목욕탕, 석고가 되어버린 나를 찍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우리라고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되지 않을 것은 없다. 느리겠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인간이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면. 저들은 우리를 찍어 영상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폼페이 다큐처럼 지구과학에 속할 것이다. 이제 저 카메라맨은 영상 교수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화산이 깨어날지도 모르니까 촬영이 끝나면 서두르라고. 우스갯소리이지만 그 말대로 죽기 전까진 언제나 무서운 것이 있다.

2018년 11월 3일 토요일

기계광이 기계를 사랑하듯

참관자  독재자가 등장합니다. 어깨에 황금색 주단을 걸치고, 흑색 제복에 홑십자로 된 훈장을 많이도 달고 있어요. 손가락에는 규산염광물로 만든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꺼내 온 원석을 다듬어 만들었다고 하지요. 그는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어요. 저들이 그를 소환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저들을 소환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대법관(기계)  죄목은 다음과 같다.

대법관이 죄를 부른다.

대법관(기계)  이에,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독재자가 손을 들어 올린다.

독재자  나는 내 운명을 안다.

동요하는 기색은 커녕, 만연한 웃음을 무기처럼 내보이며

독재자  가스실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내 법령에 따라 살아 모습 그대로 냉동될 것이다. 그러나 후대, 내 이름은 함성처럼 불거져 나올 것이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손이 말라붙은 내 명예를 우물처럼 되살릴 것이다. 역사가 나의 판단 주체로되 나는 반드시 복권되며. 그때 너희와 너희 자손의 목은 새장처럼 매달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고, 돌에 붙은 너희 살점은 인민들 논과 밭을 참새처럼 뒹굴 것이다. 나를 보아라. 기계광이 기계를 사랑하듯 나 또한 너희들을 사랑했다. 알겠느냐 알아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로운 자들의 편이며, 결국 나는 빛으로 된 화살비를 맞게 될 것임을.

지지자들이 그의 이름을 삼창한다.

대법관(기계)  우체국장은 일어나시오.

우체국장  네.

대법관(기계)  선서하시오.

우체국장  선서합니다.

대법관(기계)  그대는 이 재판의 발생을 후세 역원에게 공표하고 답신을 받기로 되어 있었소.

우체국장  여기 묶인 반서 뭉치가 바로 그 답신입니다.

대법관(기계)  낭독할 준비가 되었소?

우체국장  낭독하겠습니다. 그 전에, 이곳에 계신 참관인들에게 알립니다. 이것은 아직 그 내용을 모르는 전보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과거 세대가 중력자 창문의 풍향계에 실어 후세의 우체국, 혹은 그에 준하는 기관으로 보낸 전보의 답신입니다. 이 전보는 행성 둘레의 알고리즘 기둥에 의해 절대적으로 보호되므로 결코 훼손하거나 왜곡될 수 없음을 전합니다. 또한 전보를 보내기 위해 몹시 많은 자원을 소모한바, 다음 세대의 황금기를 대신 지불해 얻은 이 전보의 중요성과 사건의 중대함을 이해하여 주시고 답신의 내용을 사고 깊숙이 각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읽겠습니다. 우리가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권되었는가?” (지금 우리의 기술 능력으로는 여섯 글자가 한계였음을 말씀드립니다). 날짜의 해석은 우리 시대를 기준점으로 합니다. 처음은 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삼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백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백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일천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천오백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천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일만 이천오백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삼만 팔천이백오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오만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다음은 십오만 이천삼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같은 답신이 반복되니 좀 뛰어넘도록 하겠습니다. 일억 삼천이백십만 팔천이백이십 년 뒤로부터 온 답신입니다. “복권되지 않았다.” 마지막 사십육억 년 뒤로부터 온 답신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어 해석에 애를 먹었습니다만, 우리 연구가들이 동봉된 쪽지를 통해 방금 막 그 의미를 알아냈습니다. 보이십니까?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면 ‘복권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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