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과거학회는 동호에 의해 결성된 모임이었다. 취미가 양식화되는 과정들과 마찬가지로 과거학회 또한 자기 자신의 누림을 위한 노동과 여가 시간의 선용으로 작동했다. 지금은 딱히 그렇지만도 않게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그 취미의 정신 정도는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것 같다. 학회를 탈퇴하려는, 이 글의 저작자인 나는 상임 기술자 윤진(Yoon-jin)이다. 원전 사고로 직업을 잃은 이후 투신하듯 학회에 들어왔고 피프르(fipr) 담당장으로 오십사 년 일했다. 이 글은 나 다음 이 일을 맡을 사람을 위한 안내 책자다. 누가 나를 대신하게 될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오고 있다고 한다. 내게는 그가 아직 추상적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빈 화면에 어렴풋이 드리우는 실루엣이다. 온다고만 하는 그 실루엣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
2022년 1월 19일 수요일
과거학회1
우리는 과거의 스케일에 매료되어 있다. 다가올 미래를 모두 합해도 누적될 과거의 양에 미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우리가 보기에, 가장 클 것은 과거의 규모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모든 행성과 힘과 원자가 죽음의 신에 의해 지나간 시간에 속하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가 극한에 다다르면 현재와 미래가 끝난다. 시간의 화살이 나아감을 멈추는 그 순간, 만사만물은 붕괴한다. 만사만물의 모든 속성은 폐기된다. 남는 것은 되감아보아야만 무언가였음을 알 수 있는 입자 미만의 물질들. 만물은 그렇게 ‘-였음’이라는 단일 범주로 통폐합되고, 그 후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통폐합의 순간에 와서야 세계의 존재 이유가 드러나는데, 세계란 저 ‘-였음’이라는 휴거의 도래를 위해 미리 마련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사물은 저 마지막 순간을 위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각자의 역사를 쌓아갔던 것이다. 그 역사‘였던 것’이 되기 위해서. 이것이 과거학회의 생각이며, 내 생각이다.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불로초를 바라는 듯이
불로초를 바라는 듯이 황제는 '시'를 가져오라고 했다. 눈앞으로, 그것을 만질 수 있게. 이제 거의 골동품에 가까운데도, 황제의 전자 두뇌는 멀쩡했다. 오히려 정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최신예의 해킹 공격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두뇌는 함락되지 않았다. 고물상에서도 값을 쳐주지 않을 것이 어찌 저리 굳건할 수 있을까. 융성과학자이자 빛 미장이인 덴트로비는 무릎을 꿇으며 양손을 바닥에 붙였다.
덴트로비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융성과학자였다. 거리상으로도 그랬고, 감정적으로도 그랬다. 은덕을 입지 못했다면, 덴트로비는 상인들에 의해 우주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부젓가락으로 뇌를 헤집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황제의 타락과 악업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향한 사랑은 한참 전에 그의 목숨값으로 지불이 끝난 뒤였다.
하지만 빛 미장이로서 덴트로비의 의무는 황제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빛 미장이들은 노선을 돌려 해킹 작전을 포기하고 물리적 파괴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역할의 수행자가 덴트로비였다. 그로 인해 그는 괴로웠다. 역할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여덟 명이 그의 역할을 대신 거부해주어야 덴트로비는 자신의 역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언뜻 이해되지 않겠지만, 빛 미장이들에 대해서는 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리에 대해 안다면 당신 또한 덴트로비의 고뇌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덴트로비는 황제의 네 가지 방어막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네 가지 단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각각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 벼려진 물건으로 황제를 지키는 네 가지 방어막의 성질과 일치했다. 성찬식은 만 년에 한 번 있었고 내일이 그날이었다. 덴트로비는 황제의 전선을 교체하게 될 것이었고, 그때가 황제를 네 번 찌를 기회였다.
2021년 9월 1일 수요일
로봇 꿈
진짜 이상한 꿈으로 이어졌는데 나 빼고 다 로봇이야. 엄마도 로봇이고 아빠도 로봇이고 조상 대대로 로봇이고 애인도 로봇이고 구 애인도 로봇이야. 무슨 계기가 있어서 알아차리게 됐는데... 맞다, 내가 누굴 봤어. 그때 그 작자가 무언가를 한 거야. 절대로 인간의 것일 수 없는 괴이한 행동이었어. 동작으로 따지자면 사소하고 작았지. 무슨 행동이었는지 나도 몰라. 그건... 그건 묘사하지 못하겠어. 하여튼 그걸 본 충격이 너무 컸어. 잠깐 내가 죽은 줄 알았다니까.
정신을 차리고 달아나려고 했지. 왜 달아나냐고? 몰라, 이 자식아. 무서워서 그랬겠지. 웃긴 게 뭔지 알아? 뛰기 시작한 순간 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문자와 전화가 쏟아지는 거야. 아빠가 차에 치였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래. 엄마가 집에 불이 났대. 애인이 오늘 완전 할 마음이래. 또 뭐 친구들, 술을 먹자느니, 네가 바람을 피우는 걸 봤다느니, 복권에 당첨되었다느니. 말이 돼? 일생에 한 번 있기도 어려운 사건들이 어떻게 이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냐고. 날 붙잡으려는 것처럼?
때마침 사람들이 쫓아오는 거야. 집에서 나오고 학교에서 나오고 관공서를 나오고 길거리에서. 아파트에서 나오고 빌라에서 나오고 편의점에서 나오고 이마트를 나와서 쫓아오는 거야. 한참을 뛰었어. 뛰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나한테 문자나 전화를 안 한 사람. 그 사람은 로봇이 아닐 거야. 그 사람은 사람이 맞을 거야. 뛰면서 확인했지. 정말 있었어. 여동생. 여동생한테는 전화나 문자 온 게 없었어. 희망을 찾은 것 같았지. 날 도와줄 것 같았어. 떨리는 맘으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하니 곧장 받더라. 그런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미안, 오빠. 나도 로봇이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어.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니? 꿈이라고 영원히 뛸 수 있어? 얼마 못 가 잡혔어. 이 다음부터는 순식간에 일어났지. 그들은 내 장기를 다 뜯어냈고, 파이프와 튜브를 삽입한 다음 나를 프레임으로 만들었어. 머리에 변속기를 달았고, 어깨와 골반 사이에 체인을 걸었지. 쇄골부터 코에 이르기까지 꿰매 앞바퀴, 배꼽부터 샅까지 꿰매 뒷바퀴를 끼우고... 나를 자전거로 만들었어.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선물했지. 그 아이가 나를 타고 집에 돌아갔어. 훔쳐갈 수도 있으니까 집에 들이라는 말에 현관에 나를 내려놓고 씻으러 갔지.
현관에 세워진 나는 멀리 거실에 둔 티브이를 봤어. 티브이를 보니까 지구도 로봇이고 우주도 로봇이고 공기도 로봇이래. 주기율표에 있는 게 다 로봇이래. 축구공도 로봇이고 윷놀이도 로봇이래. 꿈속에서 로봇 아닌 게 없는데 나만 그냥 사람이었던 자전거야. 오늘 밤에 이어서 꾸기로 했으니까, 내일 전화를 해서 알려줄게. 어떻게 되었는지. 꿈을 계속 이어 꿀 수 있어서 편하다.
2021년 3월 23일 화요일
장갑
그리고 스피커는 다시 얼음광산에 있다. 루틀리지는 죽었지. 게친도 죽었어. 그는 이제 낡고 헐거운 장갑을 손목 위로 끌어당긴다. 루틀리지가 만들어 준 장갑. 이 장갑을 끼고 있는 한, 스피커의 모든 주술적 역량은 0이 된다. 그가 들은 소리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장갑을 벗어야만 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 몇 초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뜻이었다. 그 몇 초는 제법 길게 느껴졌고 종종 중요하게 작용했다. 스피커는 사형수에게 물었다. “살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형수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순간이 종종 있죠. 내게도 몇 번 그런 순간이 있었고요.”
스피커는 편지를 잘 접어 허리춤에 달린 복대에 넣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후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사후세계에서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사후세계에 있는 동안 분노와 억울함 같은 게 사그라들어서, 자신을 죽인 당신을 용서하거나 못 본 척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통은 그렇지 않고, 당신이 죽인 사람은 사후세계의 입구에서 당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과거를 잊어도, 과거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는 격언을 알 겁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인 거죠. 그런데 죽은 사람이 죽은 당신을 한 번 더 죽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나도 몰라요. 주술사들은 사후세계에 가면 그곳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이곳 지상으로 전달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일만 명이 넘는 주술사가 죽는 동안, 그곳에 대해 알게 된 정보라고는 그곳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스피커는 속으로,
게친은 아주 강했다. 게친은 공간을 당기거나 밀칠 수 있었어. 그건 게친에게 있던 사후세계 물건 중 하나의 힘이었지. 그래서 게친은 사후세계에 가서, 그 물건을 잔뜩 모은 다음 사후세계와 지상의 거리를 당기겠노라고 했어. 거기와 여기를 볼 수 있어야, 오갈 수 있어야 사람들이 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이 세계를 좋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러나 게친이 죽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세상은 얼음이 되었고 사후세계는커녕 사후세계에서 보내오는 신호조차 한참 전에 끊겨버리고 말았다. 주술사 학살도 있었지. 몇 명이 남았는가? 아무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걸 얘기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사형수가 물었다.
스피커는 대답했다.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 해서요. 아마 광산장을 죽여야 할 것 같아요.” “왜요?” “그는 내가 누군지 알아요.” “그럼 사후세계의 광산장이 당신을 죽일 것 아닙니까?” “괜찮아요. 한참 뒤일 테니까.”
그리고 스피커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무언가 해내려면, 이 편지에 적힌 것처럼 내가 하게 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야 죽게 될 거야. 과정은 몰라도, 어쨌든 내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 사후세계도 무엇인가 점유하고 있는 물질된 공간이라는 것을 게친을 만났을 때 알게 되었으니까. 그곳은 관념이 아니며, 나는 언제나 마지막이니까.
사후세계까지 한참 걸린다는 사실을 예상해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스피커에게 내려진 저주의 좋은 점이었다.
2021년 1월 16일 토요일
까마귀
스피커는 호흡을 가다듬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자신의 경험으로, 힘을 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우발적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게친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마침 어디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잘 됐다’고 스피커는 생각했다. 스피커의 손바닥이 하늘로 향했다. 스피커가 손을 움켜쥐자, 천천히 움켜쥔 손으로부터 붉고 찐득한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른 한 손이 오그라들었다. ‘아차.’ 작고 약한 새알을 터뜨린 듯이, 스피커의 손으로부터 붉은 것이 터져 나왔다. 끈적거리는 방울진 것이 게친의 로브에 튀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까마귀 두 마리가 시차를 두고 떨어졌다.
게친은 그것을 심각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어쩐지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스피커는 오므린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리고 기이한 일이 일어났는데, 게친이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허공을 당기자 스피커의 손이 앞으로 당겨져 게친에게 내보여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피칠갑을 한 손을 보며 게친이 물었다.
들은 소리로 죽일 수 있다고 스피커가 말했다.
다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는 않았구나.
누구를요?
모든 사람을.
게친은 스피커의 손을 이끌어 까마귀가 떨어진 곳으로 갔다. 둘은 작은 구멍을 파 까마귀를 묻고 돌로 덮었다. 게친이 또다시 허공을, 왼손이 밀고, 오른손은 당기자 스피커는 흙 묻은 손을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네게는 장갑이 필요하겠어.
다음 날, 게친은 루틀리지를 데리고 왔다.
2020년 12월 30일 수요일
갱 단원
수염 긴 남자는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수염 긴 남자는 갱 단원이다. 역마차를 털어 반을 조직에 던 다음 나머지 반을 넝마주이 같은 자신의 코트에 욱여넣는다. 거물은 아니지만, 현상 수배 전단 뭉치 어디쯤에는 그를 수배하는 전단이 있다. 보안관에게는 그를 잡을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들은 수염 긴 남자가 마셔온 브랜디처럼 사라져 버렸다.
수염 긴 남자는 수납장에서 브랜디를 꺼내 마신다.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그의 수염을 다 적셔 놓는다. 그는 병을 벽에 집어 던지고 더러운 침대에 눕는다. 천장을 본다. 전쟁은 이십 년 넘게 끝나지 않았고, 그의 머릿속에서 그는 갱이 아니라 병사다. 많이 죽였다. 전쟁이니까. 그는 교수대에 갈 기회를 놓쳐왔고 그가 속한 갱에는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기병대로부터 빼앗은, 이제 쓰레기가 되어버린 모자로 그는 얼굴을 덮는다. 그는 멋 내지 않는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전쟁통에 무슨 결혼이람? 그러나 전쟁통에도 결혼한 사람들이 있음을 그는 안다. 그들은 죽거나 전부 죽었다.
모자에서 나는 악취에도 불구하고, 수염 긴 남자는 자신이 죽지 않는 사람 같다. 썩어 달랑거리는 이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도 자신을 죽일 수 없을 것 같다. 죽을 기회를 이미 다 쓴 거라면 어쩌지, 섬망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아래층의 총소리를 듣는다. 동료 갱 단원들의 비명이 들리고, 조금 뒤에 그가 있던 방의 문이 열린다. 수염 긴 남자는 얼굴에서 모자를 내린다. 문턱에 있는 것은 노예놈도, 현상금 사냥꾼도, 그가 죽인 사람도 아니다. 그는 다른 갱의 남자다. 반다나로 얼굴을 가려도 알 수 있다. 목에 오천 달러가 걸려 있다는 거물 자식. 수염 긴 남자는 키득키득 웃다가 침대 위에 내던져 놓은 리볼버를 집는다. 라이플이 수염 긴 남자를 겨누고 있다. 수염 긴 남자는 약실에 탄약을 채우며 말한다. 죽을 기회가 와서 좋구나, 목 매달릴 자식아. 그는 손톱 없는 검지를 당겨 자신의 관자를 쏜다. 수염이 뒤로 젖혀진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죽인 모든 사람을 본다. 그들 머리의 뚫린 구멍 속으로 뛰어가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본다.
2020년 11월 9일 월요일
시녤펜
게친은 스피커에게 읽어주었다. 동화책을 읽듯이.
강령0 가능한 모두를 구한다.
강령1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구한다.
강령2 현실세계에서 사후세계를 가꾸어 놓는다.
강령3 더 이상 세계가 나아지지 않을 때까지 세계를 낫게 만든다.
강령4 신을 찾아낸다.
강령5 오래 살아 되도록 많은 일을 한다.
“모를 소리뿐이에요.” 스피커는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저 문장들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전부 말 그대로의 의미야.” 게친이 말했다. “지금은 모르겠지. 내가 그랬듯. 하지만 알고 있으면, 하고자 하면 자라나듯이 알게 될 거야. 알아내는 것은 도무지 제각각의 몫이라, 내가 네게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여기 쓰인 모든 것이 얼토당토않은 별세계 얘기가 아니란 것. 우리들의 활동으로 증명되고 있어. 아주 느리고 미약하지만, 우리는 꾸준히 가까워지고 있어.” 그리고 게친은 강령이 쓰인 종이를 스피커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주는 거야. 좋은 종이란다. 치명적인 손상은 입지 않도록 만들어졌어. 시녤펜이라는 주술사가 했단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함께하는 한편 모든 것을 제각기 해내. 제각기 해낸 걸 세계가 수렴케 해서, 점점 더 모두의 시야에 들어오게끔 하는 거야. 이제 네가 가진 주술이 뭔지 보고 싶구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눈 다음 네가 마을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보자.”
스피커는 끄덕였다.
2020년 10월 18일 일요일
게친
2020년 10월 8일 목요일
아이들
“그리고 몇 가지 제합시다. 누가 저것을 만들었느니 하는 얘기를요. 우리 아닌 문명, 우리 아닌 존재, 신? 그런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중요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다른 대원들 얘기도 중요하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할 것은 여러분을 다소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각자의 태도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는 그런 시선이 어려운지 원탁을 내려다봅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쳐들어요.
“저 별에 대해 알고 난 이후로 난 생각을 검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옳지 않은 생각, 악한 꿈을 꾸게 될까 두려웠던 겁니다. 생각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전에는 사실 생각을 많이 했지요.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거요. 사람을 죽여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머릿속에서요. 이 안에는 제가 죽여버린 대원도 몇 명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살인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코로 맡을 수 있고, 아까 꺼낸 사과와 같이 만져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머릿속에는 애걸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가엽고 눈물겨울수록 그들을 해치는 내 상상은 더 즐거워져요. 그들은 말하지요. 멈춰달라고, 괴롭다고,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이보다 더한 생각도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안 좋습니다. 대원들은 험악한 상을 하고서 당장이라도 그의 입을 틀어막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했던 것 중에 가장 추악하고도 정당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었죠?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억에서 사라졌어도, 그것은 생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은 이뤄졌어요. 박해자가 등장하면 다행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무고한 희생양들이 서식합니다. 저 별에서 피와 살을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내겐 그것이 영화 속의 일처럼, 연출된 일처럼 여겨지지 않아요.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일과 같이. 그리고 이제 모르게 되었어요. 나와 여러분이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난 같다고 느껴요. 알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묻어 넘길 자신이 있어요? 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저들은 구별되지 않으니까요. 이제 나는 인간이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별을 다림대로 하여 우리의 영혼을 고르게 펴야 한다고요. 삶이 곧 수양일 수 있도록. 그를 위해서 우리는 윤리를 다시 얻어야 합니다.”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 아이들
스피커
스피커는 종이를 한참 들고 여러 번 읽었다. 그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스피커는 어떤 위대한 목적 때문에 광산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주술사 공동체에 몸담고 있었고, 그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벌써 그 일의 실행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제약이 너무나 괴롭고 피곤한 것이어서 의지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위해 실천하는 일 같은 것은 평생 불가능하리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제약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자신은 언제나 마지막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의 삶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제약에서 뜻하는 장소라 함은 예컨대 고유한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가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제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스피커는 아무 생각 없이 잡화점에 들어갔다가 다음 날 주인 내외가 모두 죽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주인의 안부를 살피러 들어간 이웃도 다음 날 죽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마을 사람 다섯 명이 죽었다. 그가 태어난 이래 나가는 사람만 있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주민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 주술과 제약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에 의해 스피커는 지목됐다. 주민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내쫓으려고 하였으나 내쫓긴 곳에서 사람이 죽어 나올 것이므로 내쫓을 수가 없었다. 스피커는 고립되었다. 한편 주민들은 스피커가 가진 주술에 기대를 걸었다. 유식한 사람은 말했다. 제약이 강력할수록 주술의 힘도 강력하다고. 주민들은 스피커의 손에서 토실토실한 암망아지가 히힝 하고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피커가 제약의 대가로 얻은 주술은 역시 위험한 것이어서, 주민들은 이제 그를 진짜 악마로 여기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하나둘씩 다른 마을로 떠났고 그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는 부모도 그를 떠났다. 스피커가 머무는 장소에는 방문자도 재방문자도 영원히 없고 억지로 가려고 하면 그다음 오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 그것이 그의 제약이었다. 그는 주민들이 남기고 간 것들로 연명했다. 몇 년이 지나자 남은 것이 없었다.
잡화점에서 조악한 지도 몇 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제약을 이해하고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근방의 지명을 샅샅이 외웠다. 스피커는 이름 없는 길이나 절벽, 숲만을 골라 돌아다녔다. 마을 근방을 서성이기도 했지만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만 스피커는 멀찍이에서 마을이 내뿜고 있을 활기를, 그들이 누리고 있을 웃음이나 마음 같은 것들을 상상으로 헤아려 볼 따름이었다.
스피커는 그가 걷는 길들에 이름이 붙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피커는 거지처럼 길과 길을 떠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구했다. 마을을 떠난 주민들에 의해 스피커의 이야기가 퍼졌다. 스피커는 돌팔매를 맞거나 기껏 얻은 것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주술사 하나가 그를 만나러 왔을 때 그는 열세 살이었다. 스피커가 목을 매달기 직전이었고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이기 전이었다.
2020년 7월 29일 수요일
화염구 캐치볼
화염구를 받아내는 것도 좋은 훈련이 된다. 초기에는 마력을 이용한 원격 조종 능력을 훈련할 요량으로 마법의 손을 사용했다. 마법의 손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손을 불러내는 마법으로 마법사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원하는 동작을 취할 수 있다. 마법사들은 마법의 손으로 날아오는 화염구를 움켜잡았다(그래서 캐치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됨에 따라 마법의 손으로는 화염구를 받아내기 어려워졌다. 화염구가 거의 무한히 강해질 수 있는 데 반해 마법의 손은 성장 한계가 명확했던 것이다. 너무 빨라서 맞아 죽고 마법의 손을 뚫고 들어오는 화염구에 불타 죽고 하면서 마법의 손을 사용하는 캐치볼은 이제 마법 노인정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실천적 실험단계가 있었다. 주문 반사나 역재생 마법으로 지근거리에서 튕겨내 상대에게 돌려주는 유형(자연스런 공수전환)이 있었고 감속 마법이나 시간 지연 마법으로 속도를 늦추는 유형도 시선을 끌었다. 몸에 보호막을 두른 다음 몸을 던져 잡아내는 유형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마법의 손과 같은 이유로 이내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유형이 공존하며 취향껏 화염구를 주고 받는다. 비록 ‘잡는다’는 의미는 많이 사라져버렸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마법의 손의 상위 마법인 타오르는 손을 사용하는 형태가 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타오르는 손은 이미 불타고 있어서 화염이나 폭발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최근 많은 아카데미에서 화염구 캐치볼을 전교생의 공통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려고 한다. 이미 시범 교과목으로 편성된 아카데미도 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아주 좋다고 들었다. 자신과 자신의 연장을 다루는 일은 즐겁다. 즐거움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기쁘다. 화염구 캐치볼은 즐겁고 기쁜 행위고, 마법사들은 화염구 캐치볼을 사랑한다. 어제도 많은 마법사들이 뒤뜰이며 공터에서 화염구를 주고 받았다. 살갑고 진지한 얼굴로. 언제 타 죽더라도 괜찮다는 얼굴을 하면서 말이다.
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윤리의 감각
그럴 때마다 저 별에도 우두커니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타났을 테지요.
그는 그러나 하려던 말을 물리치지는 않습니다. 그는 제 나름의 표정을 지어요. 이 사람은 그가 가끔 내게 보여주었던 모습, 이 사람을 좋아하게끔 만들어 주었던 그런 모습을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려고 하고 있어요.
“여기서 회의를 끝낼 수는 없어요. 회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알아요. 판단은 우리의 것이 아니죠. 우리는 일개 탐사대원에 불과하고 우리에게는 따르도록 되어 있는 명령 체계가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입장을 가질 수 있어요. 나는 내 입장, 내 말이 첨부될 회의록에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판단 주체가 듣거나 읽을 수 있게요.”
일단은 다들 듣고 있습니다.
“저 별과 별의 행위가 파악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경악과 충격은 단지 그 기술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원들 의견을 귀담아들었습니다만, 저것을 어떻게 쓰겠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런 논의를 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지 않나요? 필요한 것은 윤리의 감각입니다. ‘생각한다’는 의식적-무의식적 행위를 통해 생각 속 객체가 실재하고 또 관측된다는 것은 이 윤리의 감각을 제하고서는 논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것이 우리와 쌍을 이루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것을 윤리로 감각해야 합니다.”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27일 월요일
양가감정
여기 모인 대원들을 죽여버리는 상상을 해봅니다. 톱으로 썬 다음 채칼로 벗겨내는 생각을 해봅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까닭이지요. 로봇에게도 저 별과 같은 슬라이드가 있어서, 무언가를 생각할 때 그것이 실재하게 된다고 한들 대수롭지 않을 거예요. 나는 솜사탕 같은 연인의 머리를 바라봅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는 섬세하고 유약한 사람입니다. 그의 어깨는 매끈한 조약돌처럼 동그랗고 그것이 나는 귀엽습니다. 헛웃음이 나옵니다. 인간은 어째서 자신의 오만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신들이야말로 끊임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아찰나 속 취산된 물질임을 왜 모르고 있을까요? 그것은 엄연한데요. 그 무지(無知)로부터 이런 귀여움이, 멋쩍은 웃음이 나오나요? 참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23일 목요일
갑론을박
“정비공 대원과 비슷한 생각입니다. 예컨대 저 별을, 혹은 저런 기술을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필요에 따라 개인의 생각을 들여다본다고 가정해보자고요. 이것이 정치적 폭압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의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 의견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듣자 하니 아까부터 비약이 심해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들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분명 두 대원의 말대로 악용될 소지가 있고, 서로를 못 믿게 되고 하여튼 안 좋게 끝날 여지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하냐고요. 문제는 언제나 있어요. 그러나 미래에도 여전히 문제일지 우리는 몰라요. 나는 저 행성을 연구하여 인류 발전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어요. 발전의 정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어요.”
“동의합니다. 사실에 집중해봅시다. 누구의 작품이든 간에 저 행성에 깃든 기술은 경이로운 거예요. 그리고 저것 또한 세계의 일부입니다. 옛적부터 우리는 자연에서 배웠고 그 덕택에 발전했어요. 저 별의 기술을 배움으로써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 못 합니까? 한번 되돌아봐요. 원하지 않아도 가지기를 멈출 수 없는 우리의 역사를요. 우리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고 언제나 그 과정 중에 있어요. 물러설지언정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는 않았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기록서기 대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고 말합니다.
“의문이 계속 생깁니다. 생각이라고 일컫는 활동이 우리 몸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우리는 단지 빌려올 뿐으로. 저 행성의 존재가 그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나? 어제의 가설이 틀린 가설이라면. 행성이 우리의 생각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이 이미 우주를 점유하고 있고 수집하는 것이 우리라면? 재현이 앞이고 우리가 뒤라면. 실험을 시도해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저 별에 착륙해 걷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의 머릿속에 내가 떠오르고, 이내 걷기 시작할까요? 만약 저 별에 소행성이 충돌한다면. 핵탄두로 저 별을 파괴한다면. 인간은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실험 같은 건 안 합니다.”
대장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 몫이 아닙니다. 보고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 얘기를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이쯤 하고 보고 절차에 들어갈 것입니다. 늘 하던 것처럼 회의록을 첨부하겠습니다.”
그제서야 내 앞에 있는 나의 사람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립니다. 시선이 쏠리자 호감을 주려는 듯 어색하게 헤헤 웃는 그는 오히려 한없이 어수룩해 보입니다.
“제게도 말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의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12일 일요일
정비공 대원
“주목할 만한 발견이란 것에는 토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입니다. 나는 정비공입니다. 기계의 작동 구조에 관해서는 여기 누구보다 더 잘 알아요. 저 행성은 지적 설계물입니다. 설계자는 신이거나 신적인 어떤 존재겠죠. 아닐 수가 없습니다. 청원합니다. 저거 건드리지 맙시다. 라디오를 맞닥뜨린 개가 한 번 빙 돌아 그것을 지나치듯이. 내 종교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목울대를 걸걸하게 울린 다음 입을 엽니다.
“여기 여섯 명의 인간이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만 속으로는 어떤 것이든 떠올리고 있을 테고, 무언가를 말해왔을 거고 개중에는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은밀한 것이 숨어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누가 그걸 알아내길 원합니까? 그런 어린애 욕망이 있어요? 은근히 발각되기를 바라는? 집어치워요. 생각은 무조건적, 무제한적인 자유여야만 해요. 언제나 어디서나 그러한 속성을 잃어버려선 안 돼요. 틀려요? 대규모의 재탐사대를 꾸려 저 행성을 연구한다고 칩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설계하고 터득한 기술을 응용할 것 아닙니까? 그 결과에서 낙천적인 미래를 볼 수 있습니까? 따져봐요. 얻을 것은 무엇이죠. 잃을 것은 또 무엇이고 그것은 영영 잃게 됩니까? 내게는 오직 사악하고, 탐욕스런 미래만이 보여요. 알잖습니까 다들? 생각이란 어디까지나 인간 안에 있어야지 유익하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야만 생각이고, 생각이란 그래야 합니다. 희박한 확률일지언정 누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당연히 여겨지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신뢰할 수 없고 누굴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후회할 겁니다. 별은 불신의 씨앗이 될 것이고 인류 쇠퇴의 밑거름이 될 겁니다.”
정비공 대원은 대원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뜸을 들여요.
“솎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입니다. 보고는 올립니다. 다만 다른 보통의 별과 다를 바 없다고 합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저 행성을 묻어두고, 인간이 역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 다음, 해왔던 것을 지속하는 일입니다.”
정비공 대원이 비타민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서 말합니다.
“내 얘긴 이걸로 끝입니다.”
회의실 안에 연기가 퍼져나가지만 다들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연기 속에는 인간의 몸에 좋은 물질이 잔뜩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정비공 대원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말했다기 애매한 말들을 중얼거립니다. ‘하여간, 아무튼….’처럼 큰 의미 없이 자기 자신을 향하는 말들 말입니다. 다른 대원들은 금 막대기를 앙다문 것처럼 입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장은 손으로 턱을 받치고서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대장이 정비공 대원의 말에 크게 감명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쩔까요? 나의 그이가 지금 말을 꺼내면 좋겠습니까? 정비공 대원의 말을 지지하고 있을 그이는 잔뜩 긴장해 있습니다. 사선으로 고개를 움찔대며 살금살금 내 눈치를 보고 있어요. 더 말할 사람이 없다면 그이는 힘을 실어주게 될 겁니다. 정비공 대원이 내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적은 없지만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죠.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7월 1일 수요일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그이가 조정간으로 가 단추 몇 개를 누릅니다. 허공으로부터 홀로그램 스크린이 쥐어뜯기듯 벌어져 나옵니다. 불쾌한 푸른색의 스크린 속에 그가 말했던 쥐색 행성이 대문짝만한 크기로 나타납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잘 몰랐습니다. 행성은 아름답기를 포기한 것처럼 우두커니 칙칙한 색빛입니다. 사람 눈에는 다르게 보일까요? 순식간에 나는 저것을 불신합니다.
대장이 말을 이어나갑니다.
“Jasper-33a는 지금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활화산처럼 왕성하게요. 알다시피 저것은 지구와 관계 맺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인간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인데, 요는 인류의 생각을 저장한 다음 행성 표면에 투사한다는 것입니다. 일등 탐험 대원, 가져온 것을 이리로.”
일등 탐험 대원은 표본봉투 하나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사과 한 알이 들어 있습니다.
“일등 탐험 대원이 저 행성에서 노획한 사과입니다. 누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사과겠죠. 우리들의 장비로 조사해본 결과, 유기분자구조는 물론 무기성분 조성 칼륨(K) 57%, 인(P) 17%, 칼슘(Ca) 10%, 이하 구성 원소까지 지구의 사과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과입니다. 사과가 그렇듯 맛도 좋을 것입니다.”
“아삭아삭하겠죠.”
일등 탐험 대원이 중얼거립니다. 대장은 그저 입술을 한번 오므리고 맙니다. 그것이 일등 탐험 대원의 말에 대한 반응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생각이라는 것이 현실의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리적 실체라는 것입니다. 은하와 행성을 막론하고 처음 발견한 경이입니다. 천문사, 아니 과학사에 길이 남을 발견입니다. 우리들, 우주선의 이름이 영속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이 행성의 존재를 조기에 보고하고 조기에 귀환하여 대규모의 공학자와 과학자를 동원해 연구 및 재탐사를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들 생각합니까? 빠르고 간략하게 부탁합니다.”
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걸걸한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옵니다.
“께름칙합니다.”
망부석처럼 단단해 뵈는 그의 팔뚝이 테이블 위를 바쁘게 움직입니다. 팔뚝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목에 걸린 조그마한 나무 십자가가 흔들립니다.
“흉측하다 이겁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정비공 대원입니다.
* 수의 무녀 - 입출력의 건 -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 머릿속 사과, 우리 손에 들어온 - 정비공 대원 - 갑론을박 - 양가감정 - 윤리의 감각
2020년 6월 11일 목요일
신
자네가 누구인지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만.
내가 알아낸 것은 우리가 찾아 헤매던 신이 이곳 광산에 있었단 거야.
불분명하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에 불과하니까.
신이 친절하다는 것을 미리 말할게. 신은 뭇 인간보다 잘 듣는 존재이며 뭇 인간보다 인간을 좋아해. 그래서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준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가 무시한 세계의 법칙은 우리에게로 온다. 우리 주술사들이 대속하는 것은 바로 신이 행하는 기적만큼의 불합리야. 저주라고도 하고 제약이라고도 하는 그거 있잖아, 우리를 죽고 싶게 만드는.
그리고 신은 언제나 99년 전에 있어.
신이 언제나 99년 전에 있기 때문에, 신이 언제나 우리의 뒤에 있기 때문에 그에게 소원을 빌면 99년 뒤에 이루어진다. 신이 여기 오는 데 99년이 걸리는 거야. 알겠지. 초목이 얼음으로 뒤덮이고 대지가 얼어붙어 우리 인간들이 이곳 학살지 시체 매장지에서 나오는 사람 고기로 연명하게 된 것은 언젠가의 99년 전에 누가 빌었던 소원 때문인 거야. 그것은 신의 잘못이 아니야. 따져보면 우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떤 사람이, 세계가 다 얼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대지가 땅이 인간에게 먹을 것을 쉴 곳을 제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야. 어떤 이유에서건 그를 탓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잘 공헌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야 돼. 수습하는 수밖에 없어. 손 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겠어? 나도 먹었고 자네도 먹었겠지만, 학살 피해자를 식량 삼는 일을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는 없어.
신은 소라게의 모습을 하고 있어. 밟아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은 소라게. 그것은 내가 옛 나라의 어떤 노인에게서 들었던 거야. 그가 지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 노인은 그가 지고 다니는 소라에 희끄무레한 오각별 하나가 그려져 있노라고 말해주었지. 자네가 할 일은 그를 찾아내는 거야. 어떻게든 신과 우리 사이에 있는 시간을 좁혀서. 신을 찾아. 99년 뒤에 이루어질 소원을 빌어. 다시 되돌려. 모든 것은 자네의 역량에 달렸어. 왜냐하면 자네는 분명 마지막으로 올 사람일 테니까.
화상 담당자가 유약함
그가 내 팔 안으로 머리를 파묻으며 말합니다.
2020년 4월 19일 일요일
짚이지 않는 사람
사형수가 주술을 걸어주었다. 스피커는 다시금 더워진 몸으로 사형수와 함께 걸었다. 간단한 만큼 효력은 짧았다. 주술이 소용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 몸을 덥힐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물어볼까 했으나 어쩐지 꺼려졌다. 둘은 꽤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앞장 서 걷던 사형수가 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5분 정도를 걸어가자 바닥에서 미세하게 다른 소리가 났다. 사형수가 곡괭이를 휘두르자 죽은 사람의 팔이 드러났고 이내 서넛의 시체가 얼음에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사형수는 곡괭이와 얼음 송곳으로 고고학자처럼 시체를 파냈다. 스피커는 곧잘 따라 했다. 시체가 가진 옷과 물품은 폭이 깊은 대야에 담았다. 유품은 광산장의 소관이었다.
스피커에게는 짚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들, 예컨대 강령은 사형수가 전한 말을 있을법한 일로 생각하게끔 했다. “내가 맞아요.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사형수는 축축한 손을 입에 넣고 후벼대다가 대답했다. “여기엔 죽어나는 사람이 많지요. 그리고 나는 죽여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