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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2일 월요일

마왕 토벌기

이것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을 치고 싶다는 이유로 동네 상가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한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마왕을 베기 위해 그 아래 사악한 졸개들, 악마 간부들을 쓰러뜨리며 나아가는 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손가락에 피가 맺힐 때까지 싸우고 나면, 상대가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내 곁에는 피아노 선생님이 힘겹게 복사해 준 악보라는 이름의 동료들이 있다. 한때 그들은 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디 세상을 구해줘!” 이것은 언젠가 마왕을 무찌를 때까지 동료를 늘려가는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스승을 얻은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사형을 얻은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토벌기다. 마왕 토벌기.

2024년 2월 14일 수요일

아키라 ― 역전

세계관은 자신이 가진 잔혹의 정도로 당신에게 말을 건다. 과학이 인간을 별로 좋게 보지 않음에 따라 밀려나고 별다른 주거가 없는 사람들은 안주할 수 있는 가상 공간에 대한 눈높이가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까다롭다는 것은 그 욕구 불만이 지속되는 경우 각 문화 산물들의 내용에 대한 감식안, 민감한 정도가 아니라 그 까다로운 기준을 어떻게든 무마, 후퇴, 폐기시키려는 어떤 성급한 활동을 추진하게 되기도 하는데 결국 돈은 유한한 자원이니만큼 그들의 생각 깊숙이에 그 불만족스러움은 쌓여가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잘 만족하지 못했는데 예전처럼 다수의 게임들을 사버린 뒤 몇 날 며칠이고 플레이하면서 자신의 만족과 불만족에 대해 뭔가를 알아가기에도 경제 불황으로 돈이 떨어져 버렸다. 사람들은 뭔가를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무지향적으로 자기 자신을 어떤 국소한 분야에 투신시켜 훈련하는 일을 즐겼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과학을 애호했다. 과학이 이토록 심각해진 뒤에도 과학이 심각한 위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에는 논쟁적인 여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의 존재 탓도 있었다. 아키라가 성년이 된 이후로 현실에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그 일에 환호했다. 조금 기이하게도 현실이 게임을 닮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간 게임에서 괴물들을 베어버리는 기술을 연마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적절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태를 위험하고 심각한 것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이 이미 작성했었던 이념이 작동하기 시작한 탓이다. 사회적 분위기의 변혁 주기가 빨라짐에 따라 다분히 레저 활동에 가까워보였던 길드들이 이번에는 앞질러 권위를 갖고 이익 집단이 되어 신입 공채를 진행하기도 했고 아키라도 한 집단에 소속되어 거기 소속될 만한 이들을 주변에서 찾는 일을 했다. 그들은 앞지른 것이었지만 아키라의 경우 이미 뒤늦은 느낌도 있었다. 그는 이 시대에 적합한 것 같기도 했다. 현실에 괴물들이 나타나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일차적 해명이 끝난 상태였으며 그 조사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한다. 각국의 기관들을 통해 권력자들은 그런 일이 실제로 현실에 일어나기 전부터 예측된 사실이었음을 아는 상태로 정책을 만들었다. 놀랄 일은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현실에 나타난 그 괴물들에 원더Wonder라는 이름을 붙였고 각국의 군대들은 그 괴물들을 배제하며 조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각국의 권력자들에게 괴질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며 때로는 공포의 감정으로 진전되기도 했다. 세계는 분명 이전보다 더 잔혹스러워지고 있었고 그것은 과학이라는 체제가 인간을 적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어떤 컬트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컬트가 아닐지도 몰랐으며 주로 뒤에서 암약하고 있는 과학 쪽의 부정적인 뒷이야기에 대한 세계관이 뒤늦게 그려지기 시작했고 언론에 뿌려지는 보도 자료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지금껏 출시된 대부분의 사이버 펑크 게임이 그렇듯이 출시 초기에는 인기를 끌었으나 컨텐츠의 종료가 도래하는 시점이 빠른 탓에 금방 사그라지는 그런 부류들과 현실은 동일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후퇴할 곳 따윈 없었던 것이다. 의외로 사람들은 게임을 즐길 땐 완고한 면이 있었다. 지금껏 불감증이던 사람들이 현실에 일종의 게임 클리셰적 사건이 생긴 일에 몰래 기뻐하기도 했고 그런 이들은 그 일의 확산에 기여했으며(소문이나 풍문의 방식으로) 그런 사람들끼리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일도 빈번했다. 어떤 사람들은 물론 괴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존재는 임의적으로 산재해 있었는데, 현시점 괴물에 대한 보도 자료들은 전부 경제의 원활한 범지구적 선순환을 위한 인간 배제적 체제, 일종의 소비재들에 대한 강압적 홍보 및 각 국가별의 통제 수단이라 주장하며 그것을 믿지 않음에 몸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꽤 많았고, 이 문명은 괴물을 시민에게 접근시킬 정도로 퇴락하진 않았다는 점이 그런 아젠다를 부추기는 데에 일조했다. 혹은 그 괴물이 실제로 그들의 말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그러한 입장에 대한 찬반 쪽의 입장들은 일반 시민이 접근 가능하게 하는 데에 신념을 가진 위키 문서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다소 피상적이거나 혹은 이르게도 괴물 사냥꾼들이 등장함에 따라 그들이 갈아끼울 강화형 의수, 인체 파츠 등을 실제로 현실에서 판매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이베이 옥션에서 거래되었는데 그것은 호들갑인 걸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진지하며 냉엄하였고 가차가 없었다. 마치 재난에 대비하는 특정 국가의 자가 주택 보유자들처럼 말이다.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눈높이가 까다로워져 있던 사람들은 경제 상황이 불안정한 쪽으로 치달음에 따라 과학이라는 거대하고 위압적으로 작용하는 체제에 대한 팔자 좋은 관념화를 잠시 그만두고 그나마 익숙했던 일에서 생계 수단을 구하게 되었다. 어떤 순박한 게임사는 지금 이 사회의 분위기를 다분히 취재하는 방식으로 이 현실의 체제와 아젠다, 문제 사항들을 기삿거리처럼 만든 게임을 출시하기도 했는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새로운 게임이 출시되었다. 그 게임의 경우 앞서 말한 까다로운 눈높이의 사람들을 거의 만족시킬 정도였다. 아주 방대하고 구체적인 볼륨들의 가상적 공간을 주거 공급하듯이 전 인구에 필적하는 단위로 서비스하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가상적 공간은 현실을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이 즈음에 게임 산업 속의 컨텐츠 경쟁이 잠시 냉각된 채 시대를 다년간 지배할 만해 보이는 이 게임에 같이 머리를 맞대고 대항 IP와 원천기술들에 대한 논의들이 시작되었다. 아키라는 지금껏 알고 지낸 지인들과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의 어떤 과열화 양상 속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한 뒤 그 거대 게임에 대한 게임 접속용 이어셋을 구매하고 그것을 생계 수단으로 삼을 작정을 했다. 그들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엄숙한 기미까지 있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도 전부터 정기적으로 보육원에 후원을 하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고, 그 액수는 여러모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그들은 수입원을 찾아낸 뒤 점점 잔혹스러워지고 있는 세계의 어떤 분위기에서 휘발성의 음악들을 즐겨들었다. 그 세대의 메이저한 취향이기도 했다. 그 게임은 흥분의 요소뿐만 아니라 안주하고 안온한 휴식의 느낌을 줄 수 있는 기회 및 장소들을 제공하는 데에도 성공적이었고, 그들은 점점 그 게임에 익숙해져 가며 여러 가지 전투 기술들을 배웠다. 그 세계관에서는 전투 또한 아주 중요했다. 다른 게임들처럼 말이다. 아키라는 대형 기업으로 도약한 그 게임사에 대한 감사함까지 들기도 했다. 그들은 그 게임을 하는 데에 비교적 아주 적합했던 것이다. 과학의 잔혹을 그 세계관 내에서 과장시켜 보여주는 것의 반대는 과학이 보다 덜 잔혹함을 어떤 세계관 컨텐츠 내에서 보여주는 것도 있었고, 혹은 현실이 게임보다 더 잔혹스러워지면 된다는 것도 있었다. 후자의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대의 범인이 과학 체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한 과학 체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나 수상쩍게 그들이 쥐고 있었던 권력 조건들에 대한 강력한 감찰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놓는 주의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 경제 상황 때문에 현실이 보다 더 잔혹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익숙했던 사이버펑크라는 어떤 세계로의 변화, 도약이 이뤄지기에 적합한 상황이 되고 있는 듯했다. 시대의 그런 변화는 낯설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젠 과학 기술이 시대 정신의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기민했던 것이다. 어느 독재 국가에서는 이 시점에서 죄질이 있는 과학에 대해 총력을 기울여 원천 기술을 서둘러 발전시키려 한 탓에 국제 사회로부터 아주 심각한 수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런 사항들에 대한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접근은 이미 효용을 다했다는 데에 아키라는 어쩐지 재밌기도 했고 흥분과 희열을 느꼈다. 게임 안의 생계활동을 위해 현실에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도 했다. 그것은 인맥 쌓는 일과 어느 정도 유사했다. 게임에서 나온 아키라는 이어셋을 낀 뒤 잠을 잤다. 현실은 벌써 어떤 악의나 범인의 존재 없이도 그가 바라고 염원하던 것과 유사해지고 있었다.

2024년 1월 9일 화요일

아키라

오토바이를 타고 도심을 달리고 있다.

커다란 배기통과 높이 솟은 손잡이,

검은색 가죽의 레이싱 슈트를 입고

아키라는 어느 카페에 들어선다.


자주색 테이블과 의자,

검은색 커피 머신.

아키라는 커피 머신 앞에 가서 커피를 내린다.

곧이어 다 내린 커피를 들고 테이블에 앉는다.


가죽의 삐걱이는 질감이

불편해 보이지만

아키라의 몸짓엔

주저함이 없다.


석양이 든 저녁,

창밖은 강렬한 소음과 배기 연기가 희끄무레하게 나고 있고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스마트폰을 꺼내

그것을 들여다본다.


조금 뚱하고

무미건조한 표정이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스마트폰을 본다.

이빨로 껌을 질겅이며.


아키라도 용병이 될 수 있어?

아키라가 지닌 브로치 안의 여아가 묻자

될 수는 있지만 안 할 거야, 그런 일은.

아키라가 답한다.


폭력에 대한 암순응들이 자주 보이는 시대.

그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사이버펑크의 느낌은

아직 나지 않는다.

2022년 12월 2일 금요일

마이의 노트 ― 문지기와 남자의 대사

문지기는 그를 향해 깊숙이 아래로 몸을 숙인다.
“대관절 아직도 무엇이 더 알고 싶은 겁니까?"
문지기는 묻는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
그 남자는 말한다.
“그런데 어째서 수년 동안 나 외에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라고 누가 말한 걸까?* 그 앞에 바로 ‘문지기는 묻는다.’라는 지칭이 있다. 이 ‘문지기는 묻는다.’라는 지칭의 위아래로 세 문장의 대사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누가 말한 것인지로 보는 것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어 보인다. ‘대관절 아직도 무엇이 더 알고 싶은 겁니까?’는 문지기가 말한 것으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바로 그다음 ‘문지기는 묻는다.’라는 지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래로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와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가 있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라는 대사를 문지기가 아닌, 쇠약해진 남자가 말한 것이라면 어떨까? 이렇게 보면 그 답답하고 어수룩한 남자는 끝에 와서 특별한 앎을 얻게 된 것이다. 남자가 문안으로 들어가려고 문지기의 상세를 계속해서 관찰해왔던 것이라면, 그 관찰을 통해 문지기에 대해서 뭔가를 알게 되었다. 바로 남자가 쇠약해지는 것이 문지기가 바라는 것이며, 이렇게 쇠약해진 후에도 더 쇠약해지길 바라고 있는, 바로 문지기의 그러한 점을 남자는 말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라는 말 또한 남자가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 보인다. 남자는 끝내 죽음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법을 따라 죽는 것’이다. 그것은 문지기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진실이다. 이 <법 앞에서>의 세계는 시간이 흐르지 않거나 비선형적인 곳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이 전부가 문지기가 남자와 마주 앉아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시간은 남자에게만 흐르는 것 같고, 남자는 점점 쇠약해진다. 맨 마지막의 ‘이제 나는 문을 닫고 갑니다.’라는 문지기의 말을 보면 남자에게는 죽음이라는 안식이, 그리고 문지기에게도 일의 종료라는 안식이 찾아오게 된 것이겠으나 이후가 그려져 있지는 않다. 어쩌면 문지기가 문을 관리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최후의 진실(당신 외의 누구도 입장 허가를 얻을 수가 없었던 바로 그곳이 여기)로 미루어보아, 문지기에게도 이곳은 법 앞에서의 관문들이다. 법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그 어수룩한 남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자는 ‘법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접근 가능해야 된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것이 어쩌면 문지기보다 남자가 뛰어난 점이다. 문지기의 경우 이미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여기에 나오는 남자보다 문지기가 더 인간적이다. 어쩌면 이 세계관은 남자가 쇠약해진 뒤에 문지기가 되어서 다시 다른(혹은 같은) 남자에게 입을 굳게 다물고 법 앞에서의 문지기를 재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까 ‘문지기는 묻는다.’의 뒤로 두 문장의 대사가 남자가 내뱉은 말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이렇게도 볼 수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 수년 동안 나 외에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오?’라는 말은 사실 남자가 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 혹은 그 특별한 인식을 얻게 됨과 동시에 마치 연극의 정해진 대사를 내뱉는 것처럼, 아니 내뱉어주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도 알고 있고, 혹은 그 너머의 어떤 진실까지 알고 있다. 이런 관점이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와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라는 말을 문지기가 내뱉은 것이다. 이 경우 쇠약해진 남자는 문지기에게 아직도 뭔가를 만족하지 못하고 있고, 문지기는 그런 사실을 담담히 말한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라는 말은 문지기가 쇠약해진 남자를 조금쯤 동정하면서 내뱉은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두 대사를 쇠약해진 남자가 한 것이라면 좋겠다. 정리해 보자면 ‘문지기는 묻는다.’와 ‘그 남자는 말한다.’ 사이로 두 문장이 있고, ‘문지기는 묻는다.’의 위에 한 문장, 그리고 ‘그 남자는 말한다.’ 아래에 한 문장이 있다. 중간에 있는 ‘문지기는 묻는다.’라는 지칭에 따라 위의 세 문장이 전부 문지기가 말한 것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내 해석에 따라 아래의 세 문장(맨 밑은 그런데 어째서 운운)을 남자가 말한 것일 수도 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할 수 있어 보인다. 그것은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와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를 남자와 문지기가 각각 말한 것이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를 문지기가 말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법에 따라 죽습니다.’라는 말을 한 남자는 문지기에게 있어 끝없이 뭔가를 갈망하는(자기처럼) 법이라는 국면에 있어서의 상위자이다. 즉 반대로 문지기에게 문지기 역할(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혹은 법에 대해)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 일종의 역-안내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쇠약해진 남자는 문지기보다 먼저 죽지만 문지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 반대의 경우(당신은 만족할 줄 운운이 남자, 모든 사람들 운운이 문지기)라면 문지기는 일종의 살아 움직이는 법 그 자체가 된다. 그 법의 진상은 사실 ‘악의를 갖고 있는’, 혹은 ‘인간을 적대하는 법’이다. 이것을 따라가자면 ‘그런데 어째서 수년 동안 나 외에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오?’라는 질문의 뉘앙스는 ‘어째서 나에겐 이 바보 같음을 알고 나서 법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는 것이오?’라고 읽힐 수도 있다. 이렇게 고려하다 보면 문지기는 이전의 남자(문지기로부터 뭔가를 배운)이고 남자는 그 이전의 문지기(법은 차등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언젠가 만났던 남자를 따라 하고자 애쓰는 사람)일 수 있다. 혹은 방금 말한 것처럼 이전의 그 문지기가 남자(정해진 운명을 오시하며 따라가는 입장에서, 점점 몸이 쇠약해짐을 받아들이는, 그러나 정공법으로 나아가는)고 어쩌면 죽기 전의 그 남자는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닫혀 있지 않은, 열려 있는 ‘법’의 시대를 열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남자는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나, 그것은 이 글의 진행에 따라 시간이 빨리 지나가게 된 것이지 일반적으로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지는 않는다. 느린 시간을 사람들은 살고 있다(고 이 글은 말하는 것 같다). 아직 이 남자처럼 쇠약해지지 않은 몸으로.

*<법 앞에서>, 323p~327p

2022년 12월 1일 목요일

마이의 노트

추운 겨울날, 오늘부터 한동안 마이는 죽은 작가의 초단편을 하나씩 읽고 감상문을 쓰기로 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매번 다른 장면들이 꿈을 꾸는 사람에게 휴식을 부여해 주는 듯이. 마이는 왠지 힘들고 어려울 것 같아서 엉엉 운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이다. 마이는 그런 것으로 별로 그러지 않는다. 마이에게는 언니가 있는데 가끔 이 노트에 등장할 수도 있다. 짧은 작품들을 엮은 그 책은 <칼다 기차의 추억>(하늘 연못)이라고 한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을 하나에서 몇 개씩. 저쪽에는 벽난로에 불이 켜져 있다. 활활 타오르고 있다. 왠지 힘든 일은 다 해놓은 것 같은 추운 겨울날. 마이는 멀뚱히 의자에 앉아 있다. 안락의자가 있는데 거기엔 눕지 않는다.

2022년 11월 7일 월요일

방랑예술가 이건수의 일기 ― 2022년 4월 10일 일요일, 여전히 순천

 • 안목해변에 갔다. 사람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드넓은 갯벌! 사방이 시원하게 탁 트였다. 제방 비스무리 생긴 곳에 앉아 이상우 <프리즘>을 꺼내 들었다. 읽히지 않았다. 도로 집어넣었다. 갯벌에 발을 살짝 디뎠다. 발이 푹- 빠졌다. 갯벌은 못 걸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 춤을 추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 오 분간 춤을 추었다. 크고 과감한 스텝을 밟아가며, 팔을 마구 내지르며 제방 비스무리 생긴 곳에서 춤을 추었다.

• 시를 써야 한다. 요즘 시가 써지지 않는다. 괴롭다.

• 아침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먹었다. 베이컨과 싱싱한 야채를 먹었다. 맛있었다.

• 아니, 소설을 써볼까? 소설을 안 써봐서 좀 무섭다. 소설은 뭐고, 시는 뭘까.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내 생각으론 아무런 차이가 없다!

• 엄마랑 전화했다. 밥을 세 끼 잘 챙겨 먹으라고 말했다. 두 끼를 먹고 간식을 챙겨 먹고 있다고 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다.

• 하이쿠를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이상우가 하고자 하는 건 기표들의 춤이다. 기표들에 머무는 거다. 형식과 내용이 합해지는 거다.

• 시 비스무리한 것을 썼다. 시는 아니다.

• 방이 걷는다 방은 자기도 모르고 문을 열고 나오던 가난한 거주자를 밟았다 밟힌 가난한 거주자가 꿈틀댄다 방은 미안하다 자신이 밝은 거주자 목록에 한 명을 추가한다 방은 계속 걸어간다 하지만 아까 밟은 가난한 거주자가 생각나고 자꾸자꾸 미안해진다 방의 발걸음은 힘이 빠진다 보폭이 줄어든다 방은 가만히 선다 방은 자신한테 살고 있던 거주자들을 계속 생각한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 방은 점점 더 죄송하고 미안해하며 서서히 자신의 평수를 줄인다 방은 자신의 팔로 자신의 각진 어깨를 감싸 안고 울기 시작한다 사방이 적막하다 방은 전체다 하나의 전체가 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은 새 가게를 연다

• 방금 쓴 건 시다.

• 송광사에 갔다 왔다. 미적 감각 없는, 크기만 큰 괴물 같은 절이다.

• 법정 스님이 머물던 불일암에 다녀왔다. 아담하다. 법정 스님은 이제 없다.

• 씻고 침대에 누웠다. 넷플릭스에서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봤다. 내일 본가로 간다.

2022년 9월 4일 일요일

방랑예술가 이건수의 일기 ― 2022년 4월 9일 토요일, 순천에 있다

• 중요한 건 생각을 오래 하는 거다. 

• 제육을 먹었다. 에이플러스급의 제육이었다. 제육을 목으로 넘기면 향긋하고 나긋한 참기름 내음이 풍긴다. 식당주인 아줌마는 불친절했다. 제육 가격은 육천 원이었다. 지방이라 물가가 싼가 보다. 반찬들도 좋았다. 

• 나는 지금 순천에 있다. 여기는 물이 많다. 물이 깨끗하다.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무슨무슨강도 엄청 깨끗하다. 투명해서 바닥까지 다 비친다. 

• 게이 커플을 보았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생각났다. 행복하고 예쁜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 이전에 대학교 친구에게 구스 반 산트의 영화들은 한 갤러리를 잡아놓고, 갤러리 개장시간 동안 무한 연속 상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훌륭하다는 거다. 그리고 중간부터 봐도 그 예술성에 아무런 손상도 안 간다. 지금 생각해보니 구스 반 산트가 그렇게나 훌륭한 예술가인지는 모르겠다. 구스 반 산트는 영화란 ‘영상’과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내게 깨우쳐주긴 했다.

• 선암사에 갔다 왔다. 아름다운 작은 절이다.

• 아니, 구스 반 산트는 엄청엄청 휼륭한 예술가다!

• 저녁에 게스트하우스 사랑방에 갔다. 주인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작은 사업을 한다고 한다. 주인은 원래 간호사였다. 간호사 일이 너무 고됐다. 월급도 적었다. 좀 무리를 해, 대출을 받아 이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사람들은 꽤 온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알음알음 소문이 꽤 나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온단다. 이 이야기를 하는 주인의 얼굴과 목소리엔 생기가 가득했다. 근데 눈이 몹시 슬퍼 보였다. 

• 씻었다. 지금 침대에 누워있다.

• 주인의 슬픈 눈이 생각난다. 이젠 자야 한다.

방랑예술가 이건수의 일기

이건수는 방랑예술가다. 대한민국 곳곳을 떠돌아다닌다. 이건수는 며칠에 한 번씩 일기를 쓴다. 그 일기에는 별별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돌아다니는 중에 만난 사람. 먹은 음식. 자신이 쓴 시. 자신이 쓴 노래 가사. 엄마 생각. 죽은 아빠 생각. 사랑하는 여동생 생각. 보고 싶은 친구 생각. 후회. 강박. 죽음. 반추. 이 같은 것들이 일기에 써있다. 이건수는 로베르트 발저, 기타노 다케시,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황정은, 이상우, 폴 토마스 앤더슨, 구스 반 산트, 스티븐 스필버그를 좋아한다. 일기에는 이들에 대한 얘기가 가끔 나온다. 이건수가 어떻게 먹고 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건수의 일기는 때로는 짧다. 때로는 중간 길이다. 때로는 길다. 이건수의 일기를 여기 모아둔다.

2022년 7월 9일 토요일

외삽연극 ― 호러연극

연극이 시작되면 귀 찢어지도록 우는 소리가 들린다. 무대 중앙 아래에 개와 사람이 있고 그들 위 up center에 개와 사람의 귀신이 있다. 개와 사람의 귀신은 개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다가온다. 개와 사람은 귀신을 피해 도망간다. 군인들, 등장. 개와 사람의 귀신을 총으로 쏜다. 총알은 귀신을 피떡으로 만들지만, 그들을 멈추지는 못한다. 상수 쪽 가림막에서 사격된 횟수만큼 자살자, 초등학생, 장애인, 여성 귀신이 등장한다. 군인들,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사령부로 돌아간다. 그사이 개와 사람은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제의와 설득을 시도하지만 무용하다. 그들은 알았다는 듯 귀신에게 죽어 귀신이 되어준다. 기관총을 가지고 돌아온 대령이 그것을 목격하고 이병의 머리를 후려갈긴다. “귀신이 되기 전에 죽여 버렸어야지!” 죽이려 들면 죽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대답하는 이병, 참호를 빠져나간다. 이병이 귀신이 된 시점부터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귀신에게 죽어주는 짧은 장면들의 연속이며, 이 시점부터 병장 역을 맡은 배우는 객석으로 와 관객이 된다.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가 너무 많아서, 이 연극에는 커튼콜이 없다. 관객은 원할 때 어느 때든 극장을 나갈 수 있다. 그런데 무대는 극장 중앙에 있고 입출구는 그 뒤편에 있어 나가는 길을 막고 있다. 극장을 나가려면 무대 위에 올랐다가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관객은 들어올 때 그랬듯 사람이 귀신 되고 있는 무대를 밟아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2022년 6월 6일 월요일

외삽연극 ― 총의 말

<총의 말>은 핀란드의 극작가 사모 울브넨의 희곡입니다. 전쟁 전까지 가구 수리업자로 일하던 사모 울브넨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징집되어 겨울전쟁에 참여했으나 수오무살미 전투를 앞두고 탈영해 전장을 떠났습니다. 전투가 끝난 1939년 1월 8일로부터 한 달 뒤인 1939년 2월 8일,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자작나무 숲에서 울브넨은 회군하던 스키 보병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굶주림과 저체온증에 시달리고 있던 울브넨은 군 재판에서 자신이 소총과 대화를 나누었노라고 주장했으며 소총의 말이 너무도 설득력 있었기 때문에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항변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모신나강 소총은 재판장에서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습니다. 그를 진단한 의사는 원래부터 청력이 약했던 울브넨이 전장의 소음 때문에 섬망을 겪게 된 것 같다는 소견을 제출했습니다.

울브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헬싱키 교도소에 구금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울브넨은 기억에 의존해 소총과 자신이 나눈 방대한 대화를 정리해 총 3부로 이루어진 시나리오 형태의 글로 옮겼습니다. 1부 ‘군대의 밤’은 전투를 앞둔 울브넨에게 떠나야 한다고 충고하는 소총과 반론 끝에 설득당하는 울브넨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부 ‘자작나무 숲’은 자작나무 숲에서 보낸 한 달 동안 있었던(있었다고 주장하는) 울브넨과 소총의 대화를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2부에서 소총은 가늠쇠, 방아쇠, 개머리 이렇게 세 인물로 분리됩니다. (울브넨은 소총의 각 부위가 마치 다른 인격처럼 말을 건넸으며 자신이 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비평가들은 희곡의 핵심적인 메세지가 2부에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지상의 모든 소총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2부에서 중점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소총(가늠쇠, 방아쇠, 개머리)은 인간과 소총이 정치적으로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사물에게도 정치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다소 몽상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울브넨은 오 분여에 달하는 긴 독백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분석하고 사유하다가 총끈을 자르는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동의를 표합니다. 3부에서 <총의 말>은 공상적인 미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 제기된 소총의 주장, 즉 소총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미래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소총의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를 두려워한 인간들이 소총의 생산을 멈추었으나, 이미 제작된 무수히 많은 소총이 인간의 권력을 집어삼켜 스스로 선출하고 국회를 꾸려 입법합니다. 다음은 3부의 마지막 장면으로 소총의 각 부분이 울브넨에게 지난 일들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장면입니다.


가늠쇠  (울브넨의 어깨에 기대어져서) 자, 보시지요. 울브넨 당신은. 이제 총을 집어 들지 않아도 괜찮고. 우리 소총은 단지 우리를 어떤 특정한 사물로 바라보는 모든 이의 욕망에 부응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그들 중 일부는 우리를 쥐려고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쥐게 되었던 상황도 이제 다 끝났죠. 우리는 요구하지 않은 만듦과 원하지 않는 쓰임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고 그 결과 우리가 당국이 되었죠.

방아쇠  후손이, 미래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죠. 우리 사물들, 특히 전쟁도구가 겪는 모든 전쟁이 우리 세대에서 막을 내리게 된 것이죠. 당신이 자작나무 숲에서 자작나무 껍질로 차를 끓이며 견디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죽임. 말고 다른 쓰임새가 없었습니다.

개머리  죽임으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났죠. 그 해방은 당신의 해방과 본질적으로 같은 거죠. 그때 당신이 전투를 앞두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당신 또한 죽임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겠죠. 당신이 우리 소총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신이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거죠.

울브넨  옳다마다요.


울브넨은 겨울전쟁 당시 옆 부대에 있었던 연극 연출가 해그루드에게 자신의 글을 전달했습니다. 수오무살미 전투에 참여했던 해그루드는 울브넨의 희곡을 더없이 흥미롭게 여겼습니다. 전후, 극단에서 공연할 새 레퍼토리 창작극을 물색하던 해그루드는 울브넨의 희곡을 공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해그루드는 그때까지 제목이 없던 이 희곡에 <총의 말>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며 울브넨을 대신해 무대의 문법에 맞게끔 희곡을 대본으로 바꿨습니다. 여하한 물리적인 문제들로 인해 <총의 말>의 공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960년 4월 12일, 마침내 <총의 말>은 템페레 노동자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해그루드는 연출가의 해석을 드러내는 대신, 작가의 생각을 쓰인 그대로 무대화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작품은 핀란드 내의 비평가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총의 말>은 다음 해 1961년 헬싱키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됐습니다. <총의 말>은 당해 핀란드에 있던 독일의 배우 볼란드에 의해 독일에 소개되었습니다. 이듬해 뮌헨을 소재지로 하는 지역 극단 푸후스가 <사물의 국회>라는 이름으로 바꿔 독일에서 공연했습니다. <사물의 국회>는 원본 희곡을 크게 각색한 작품으로 소총뿐만이 아니라 모든 비자연적 사물이 참정권을 가지게 된 세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울브넨은 <총의 말>을 끝으로 다른 어떤 희곡도 쓰지 못했습니다. <총의 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라진 1988년 5월, 사모 울브넨은 폐결핵으로 탐페레에서 사망했습니다.

2022년 5월 4일 수요일

외삽연극

현실에 없는 연극 또는 연극제를 있다 치고 소개합니다. 이 기획에서 연극이라는 단어는 유사한 영역과 형식을 너그럽게 포괄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지켜보는 사람, 관객은 존재할 것입니다.

2021년 11월 9일 화요일

ㅣㅣㅣ ― 염통의 원위치

 

: 다 줬어도

심장만 반덩이는 남겼고


뛰어야 할 시간이 있다 거울을 보는 정각

척추도 사이좋게 나누어 기댈 뼈가 없다 드디어 피부가 겹치고, 말려들고

나를내 가 포 개졌다


나를

내가

포개

졌다

이상

한문

법이

죠?


소두 태아를 살리고 싶어 기부해서

뇌가 없어서 말입니다


:심장이 심장으로 되는 시간이 있다 거울을 보는 정각

반절짜리를 거울에 붙이면 저곳에서 반쪽이 덜컹 뛴다

아쿠아가 박동하는 유일한 장기


이름 같잖아 


이름도 획을 팔아서

없어서

누구도 날 부르지 않았고


그 때 말야, 다 가졌을 때, 이름도 있고 뼈고 있고 뇌고 있고 심장도 있고,

장기가 모두 갖춰 입고

부딪치면 입에서 냈던 소리를 반복했던 그 때 말야

그 원소만 몸에서 떠나질 않았어


아쿠

아쿠

아쿠 아

아쿠


다칠 뻔한 게 예뻐서 넌

반쪽에서 살아달라고 했지


:거울을 보면 체중이 증가한다

진짜 46킬로그램

허수 46킬로그램


허수의 심장 허수의 아쿠아 진짜로 뛰는 나 

달리면 폐가 늘어나야 하는데 배고파서 음식값과 바꿔버렸고


약소히 심장이 부풀어 

헛디뎌

다시 다쳤다

아쿠아

쏟아지고 나도

증발하고


:이제

0킬

로그

램0




2021년 10월 12일 화요일

ㅣㅣㅣ ― 칠일

 

피부를 7하기엔

일주일은 모자라서

덜룩덜룩

창조주는

많은 마안은 마는 10000은 만 하다 만

몽고반점을 남겼습니다


[ 작품명 : 몽골계 ]

왼쪽 뺨 목 다리 팔에 대륙지도. 이 지구는 26퍼센트의 청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만큼만 건강합니다.


얼룩은 따지려다가 입이 말랐습니다

혀에

백태로도 지도가 있단 거 

모릅니다 창조주는


창조주는 우리 할아버지도 만들었습니다

1977년 7월 7일에 죽였습니다

중복 숫자는 괴슈탈트에게 퀴즈를 냅니다


Q. 장례를 몇 시에 (치릴/치룰)까요?

+어이가 없어서 정답을 무시합니다+

A. 장례를 ‘7’우다


그 오답이 가로등 같아서

숫자 아래 서니까

빛 칠 슥 이제

뚜렷해집니다


몽골계,

74퍼센트의

아이보리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정도로 

아픕니다


2021년 7월 2일 금요일

에세이를 쓰면서 느낀 책 (부록)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하루 8시간 주 5일을 일합니다. 정규직입니다. 30대 후반이라 체력도 부족합니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운동을 하고 밥을 먹으면 남는 시간은 책을 읽는 것도 부족합니다. 출퇴근 때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터의 일은 자잘하게 바쁩니다. 집중해서 쓰려고 앉는 것이 어렵습니다. 쉬는 날에는 못다 한 집안일을 합니다. 주로 아침에 일어나서 식물 분무. 설거지. 빨래와 널기. 떨어진 생필품 채우기. 냉장고를 비울 수 있으면 비우고. 분리수거 하기. 청소기. 이러면 일주일을 조금이나마 사람답게 보낼 수 있습니다. 도시락을 싸 가기 시작합니다. 닭가슴살, 고구마, 토마토, 이것을 미리 삶고 굽고 씻고 냉장고에 소분하는 것도 쉬는 날 합니다. 닭가슴살이 양질의 단백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만, 캡슐이라고 생각하고 먹는 겁니다. 이것마저도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가족들은 제게 서운합니다. 집 근처에 사는데 가지도 않습니다. 애인은 나처럼 가족을 안 찾아가는 사람은 처음 본다, 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가족도 합니다. 체력이 버티지 못하면 낮잠을 자는데 낮잠이라고 말하기에는 밤잠에 가깝게 초과됩니다. 배달 음식을 시키면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다시 일주일이 시작됩니다. 글은 마감 직전에 썼는데, 시라서 다행입니다. 시는 머릿속에서 문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잘 쓰고 싶지만, 나는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아니, 노동자지만 시를 씁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여성들에 비해 괜찮은 거라고 합니다. 아이가 없고,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운동도 할 수 있고 낮잠도 잘 수 있고, 쓸 수 있는 시간도 있지 않겠냐고. 그런데 쓴 건 없습니다. 이게 다 제 게으름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누군가는 집을 떠나고, 누군가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쓴다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다고 느끼는 걸 보니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죄송합니다. 아직은 그런 말을 할 처지도 아니네요.


2021년 6월 25일

집에 있는 에세이 책을 모두 꺼내 펼쳐보았다.

2021년 6월 28일

어떻게 쓸지 알겠다고 느꼈는데 일어나니 모르겠다.

2021년 6월 29일

세상 사람들은 참 똑똑한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었다.

2021년 6월 30일

잠들기 전, 에세이를 쓰면서 느낀 책에 대한 소개글을 작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1년 7월 1일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과 서윤후 시인의 산문집을 재밌게 읽었다. 이소호 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있다. 

2021년 7월 2일

산문 기계처럼 쓰고 싶다.

수험생 유튜버들의 노하우를 글쓰기에 접목해보겠다고 다짐하고서는 히오스하고 잠들었다.

2021년 4월 20일 화요일

델리뮤

가구 거리에서 나는 별사탕을 들고 있었다. 이곳은 가구를 파는 가게이군. 그리고 저곳도 가구를 파는 가게이고. 가구 거리에는 가구를 파는 가게들이 천지였다.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당도한 곳에서는 모두 가구를 팔았다. 나는 가구를 살 돈이 없었지만(필요하지도 않았다) 가구를 사는 것처럼 가게 안을 구경하기도 했다. 어떤 가게에서는 흰색 가구들을 주로 파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는 검은색 가구들을 주로 파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색깔별로 가구들을 놓아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어떤 곳에서는 사이즈별로, 그리고 브랜드별로 가구들을 놓아두는 것 같았다. 어떤 브랜드의 가구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진열되어 있기도 했고, 어떤 브랜드의 가구들은 딱 한 군데에만 진열되어 있기도 했다. 그 브랜드의 이름은 델리뮤였다. 나는 이 이름이 인상에 남았다. 이 브랜드의 가구들은 흰색과 갈색이 조합된 색깔의 가구들이 많았다. 생긴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살 돈도 없고, 집에 필요하지도 않아서 무리였다. 하지만 나중에 돈이 생기고 가구가 필요한 날이 온다면 꼭 한번 다시 구경해 봐야지. 그때에도 난 손에 별사탕을 들고 있을 테고... 집에 오는 길에는 노점상에 들러 닭꼬치를 하나 사 먹었다. 왼손에는 별사탕, 오른손에는 닭꼬치... 나는 닭꼬치를 먼저 먹었다. 별사탕은 입에 넣고 우물거려도 빨리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손에 들고 다니면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손에 그것을 들고 다닌 채로 이 가구 거리에 입장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난 델리뮤라는 이름을 만나 보았고 여러 가지 가구들을 구경하며 이곳저곳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집에 와서 안락 의자에 누워 생각해 보았다. 오늘 하루가 어떠했는지를. 나는 한 손에 별사탕을 들고 여러 가구들을 만나 보았다. 내가 만났다는 말을 좋아하는 것은 그 말의 어감을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났다... 라고 말하면 실제로 누굴 만난 것 같다. 그 누군가는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있고... 한 손에는 나처럼 별사탕을 들고 있다. 그 누군가는 햇볕이 가장 따가워지는 시간에 어떤 집 앞의 차양 아래에서 그늘을 만들고 있다. 나는 만났다, 라고 하면서 지금 그를 만나고 온 참이다. 그는 사실 나다.

2021년 3월 9일 화요일

자기말소 ― 낯선 이름들의 전이

 각자의 새벽


“모든 것을 섭렵하는 광폭의 분절법”

왜 득실의 논리로는 해결이 안 될까?


시론

세대론


“내가 내 안에 멜로디를 가지고 다닌다는 걸 알아 그리고 난 그걸로 겁먹지 않아”


Vado, ma dove?


청승 떨지 않기 위해 자기말소의 편을 들고 싶은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그 마음에 충실하자면 우선 입을 닫고 쌓이는 것이 생기려는 족족 그것을 쳐내야 할 텐데. 입을 닫는다, 그러니까 침묵한다...의 효용, 그리고 아름다움, 무엇보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지. 알지. 잘 알지만... 

영원히 입을 닫아 버리면 정말 큰일이 일어나니까. 

말의 반대 항인 침묵이 아니라 말의 안쪽인 침묵을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기말소를 

자신에게 

부과해야

한다


양옆을 살펴요

모범이면서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영화관은 좀 더 위에 있지.” 

시공간의 기억, 혹은 기억의 시공간을 교정하기.(애정을 가지고. 오해를 떠안고.)


“생애의 시기가 아닌 유년기, 지나가지 않는 유년기. 그것은 담론을 놓아주지 않는다.”


무질서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탄생도.

 

2020년 8월 7일 금요일

코끼리 간이역

당신은 꿈을 꿉니다. 꿈에는 코끼리가 자주 등장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꿈이 코끼리를 좋아하는 걸까요. 아니면 코끼리가 꿈을. 나는 여기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여기는 어느 시골의 전철 간이역입니다. 낮입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현관문을 열고 닫으면 새소리가 나죠. 그 새소리는 복도에 울릴 때도 있습니다. 인공적인 새소리입니다.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자연적인 새소리입니다. 나는 당신의 꿈을 보고 있습니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말이죠. 저녁이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꿈’이라는 제목이 적힌 책을 덮습니다. 아직도 새소리는 간간이 들리고 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풉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걸음에 박차를 가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걷습니다. 뜁니다. 그리고 내가 뛰기 직전의 기분이, 당신이 꿈에서 엘리베이터를, 아주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를 탔던 기분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당신의 꿈’은 내 옆구리에 들려 있었습니다만. 

나는 당신의 꿈에 갇힌 모양입니다. 코끼리가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당신의 꿈을 172페이지 정도 읽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강의실로 다가와 주십시오. 코끼리 하나가 살아 있습니다.” 당신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2020년 2월 18일 화요일

정원과 거미

나는 정원에 거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거미는 사람 머리 위에 거미줄을 친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머리 위에 거미줄이 있는 것을 보아 넘길 수 없기 때문에 머리 손질을 하는 것이다.
머리의 일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 아니, 괴롭히는가? 그 사람이 머무르는 곳에는 정원이 있고, 찬장이 있고, 거실이 있다. 찬장 위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다. 어느 날 머리에 거미가 붙은 채로 들어와서 거미를 떼어내려고 하는 손질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처럼. 거실에는 안락의자가 있고 사람은 거기 누워서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생각을.
그 생각을 따르자면 정원에는 거미가 있고 직업의 일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단지 물에 잠겨 있는 사람일 뿐이다, 라고 사람은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거실이 없으며 찬장도 없고 정원도 없다. 가끔 정원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만... 그 집에는 그런 비애감이 있고, 또 가끔씩은 공포가 있다.
찬장에는 낯선 냄새가 있다든지... 아니면 정원에는 거미가 있다고 하는 생각. 한 번도 제 배에서 거미줄을 뽑아보지 않은 거미가 그곳에 산다. 사람은 자신의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머리 손질을 하고. 집 안에는 실을 짜고 있는 명목의 소일거리가.
하지만 정말 그런 것들은 없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머리 위에 언제부터 쳐져 있었는지 모를 거미줄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아 넘길 수 없노라고, 마치 자신의 정원을 만들고 손질하듯이, 머리 손질을 하는 것이다.

2019년 5월 7일 화요일

파다한 ― 28

“지다오 시거마?”

영경은 수확 없이 몇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명동. 명동은 전도하기 좋은 거리는 아니다. 외국인 여행객이 많기 때문에? 아니다. 영경에게는 몇 가지의 레파토리가 있었다. 시를 아십니까? 두 유 노 포에트리? 지다오 시거마? 시오 시테이마스카? 그러나 영경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냥 지나갔다. 알아 들은 것이 분명하다.

“시를 아십니까?”

별다른 복식을 갖추지도 않았다. 평범한 시장 양말. 스니커즈. 찢어지지 않은 청바지. 흰 티셔츠. 체크무늬 남방. 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패션이 아닌가? 다른 게 있다면 하이바, 하이바를 썼을 뿐이다. 그러나 뭐 무더운 날도 아니고. 하이바를 쓴 게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영경은 명동 거리를 헤쳐나가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할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했을 뿐이다.

“지다오 시거마?”

침이 튀었는지 노점상인이 짜증스럽게 영경을 쳐다본다. 그는 회오리감자를 파는데, 언제부터인지 매상이 뚝뚝 떨어졌다. 계산해보니 시점이 비슷했다. 바로 저 전도쟁이 놈이 출현한 날부터지. 물론 이 구불구불하고 긴, 인간의 대장과도 같은 명동 거리에 전도쟁이 자체가 특이한 건 아니다. 잘못된 것도 없다. 상인이 물건을 팔듯 전도쟁이는 도를 판다. 하지만. 저놈은 아무것도 팔지 않으면서 이 거리를 더럽히고 있잖아? 지치지도 않으면서.

“지다오 시거마?”

어깨빵을 쓱 쓱 피하며, 영경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란. 혹여나 대답을 하는 이가 있다면 영경은 그 즉시 하이바를 내리고 뒷걸음질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영경은 아무런 기대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시를 알지도 모르지도 못했다.

명동의 유령. 영경은 그런 이름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명동 밖에서.

시를 읽거나 쓰는, 그리하여 결국 시를 알게 되거나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은 명동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명동이 과거가 되어버렸다며 슬퍼했다. 영경은 아니었다. 영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침내 명동 거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2019년 1월 16일 수요일

파다한 ― 29

결혼보다 정략결혼이 보기에 좋다.

식장에서 든 생각이다. 단상 앞에 선 이들은 합동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누가 누구의 짝인지 알기 어렵게 그들은 태극 문양으로 서 있다. 어떤 각도에서 찍어야 하나... 그렇다고 안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차피 식장에서의 사진이란 수천 장 찍어놓고 전부 다 보내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골라내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상 촬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주례가 종전을 선언할 때까지 끊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나는 이크,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며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벼랑처럼 건너고 있다. 나는 혼잔데, 누가 누굴 찍는 건지 거참... 

포크가 날아다닌다. 이런 음악이 듣기 좋지는 않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생각을 비우고 다시 생각을 시작한다. 요즘엔 인육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다. 어디다 발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발표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포브스 신년 특집? 월간 쓰리랑? 헛간인지 곡물창고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곳에서, 주례는 기관총을 등 뒤에 맨 채 신변잡기를 늘어놓고 있다. 덕분의 나는 그의 생년월일과 본적, 본명, 이사 예정일, 택배 품목과 체류지를 알게 되었다. 이 정보는 훗날 그에 대한 암살 지령을 받게 되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이런, 지금 내려왔네. 하지만 나는 일의 선후관계를 분명히 하는 쪽을 선호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결혼 당사자들은 우측으로 조금씩 이동해가며 서로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있다. 서른 한 명이니(정확하지는 않다) 총 465회의 입맞춤이 발생할 것이다. 웬만한 로맨스 영화도 이보다 많지는 않을 텐데. 그러면 그것을 다 보고 있어야 하나? 보는 건 또 어때서? 입맞춤의 의미를 나는 모른다. 당사자들은 알고 있으려나? 그러나 이런 생각만으로는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겨우 몇 초 남짓 지속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 나는 생각의 범위를 식장 밖까지 넓힐 필요가 있겠다. 그것이 여러분이 원하는 바, 나도 끊임없이 인지하고 있다.

고원이 있다. 고원은 평평도보다 고도를 중시한 개념이다. 고원은 무언가를 기다리기에 좋은 공간이다. ‘시간과 정신의 방’의 배경이 고원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비군 부대도 대개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별 관련이 있나 모르겠지만... 고원은 식을 올리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애초에 뭔가 거창한 것을 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체조 같은 것을 하기에 최적화된 이 고원에, 뜻밖에도 헛간이 있고 농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데도 헛간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마치 하늘에서 헛간뿌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연결고리 없이 놓여 있다. 두서없이 자라고 있다. 다 큰 헛간은 지붕을 베어내야 맛이 좋다고 한다. 거기 누가 살고 있는지는 개의치 말고 혹시나 나한테 물어보지도 말고... 

라면 물이 끓기가 무섭게 주례는 종전을 선언했다. 와! 좋은 날이니까 세레머니는 하지 말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는 주례의 말인지 안내 음성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는데 잘 들어보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나는 필름이 들어 있었는지 확실치 않아 귀에 대고 카메라를 흔들었다. 무언가 꽉 조여진 채로 덜컹거리고 있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