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7일 목요일
녹, 구멍 그런 것들
2026년 8월 21일 금요일
개저씨 탈락쇼
호랭이 물어갈 놈, 느자구 없는 새끼, 씨팔조팔. 자꾸 욕을 해서 미안합니다. 개저씨들이랑 일하다보면 저절로 욕이 늡니다. 아줌마는 멸칭이 되고 아저씨는 보통말인 세상에서 개저씨라고 또 구분을 지어 욕을 해야 하는 게 매우 열받는 일이지만 개저씨만큼 존딱인 단어도 없습니다. 개저씨들에게는 한순간에 좋은 분위기를 좆창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저씨와 개저씨는 스펙트럼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아개저씨, 개아저씨 같은 것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 여자들이 어디 가서 일당으로 이 정도 돈을 받으려면 몸을 파는 수밖에 없다.
- (잘 지냈냐는 물음에) 아니, 우리가 사귀는 사이야? 누가 들으면 오해해.
- 걔는 내가 아는 일본 여자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하니까 정색하더라. 애가 뻣뻣해.
- 저 여자랑 어깨빵하면 뒤지겠다. 얼굴도 무기야.
- 운전 드럽게 하네. 여자인가? (확인하고 남자면 입 싹 닫음.)
- (잡기를 보여주며) 300만 원 주고 배웠어, 룸에서 ㅎ
- 저 살 많이 빠졌죠? (그렇네요.) 그쪽이랑 데이트 하고 싶어서요. (20살 이상 차이 나는 유부남의 농담)
- (새로 온 여성인 매니저를 앞에 두고) 내 새로운 마누라야.
그밖에 지역혐오, 인종차별, 끝도 없는 자기자랑, 맨스플레인 등이 개저씨들의 특징입니다. 이런 거 저런 거 너무 많아서 다 들이받자면 생계가 불가능한 지경입니다.
개저씨들의 시대는 어디에서 멈춰 있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최소한 10년 전? 진짜 차라리 10년 전이면 다행이고, 가끔은 근세나 근대사회에서 출현한 듯한 개저씨를 만나기도 합니다.
현 시대의 윤리는 누군가를 나락 보내고 싶을 때만 동원됩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도긴개긴 개저씨들은 서로가 조만간 성희롱, 성추행 등으로 잡혀갈 거라 생각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일까 싶습니다.
개저씨들이 반성하는 날이 올까요? 부계 중심 사회에서 오냐오냐 하며 지나치게 허용적으로 자란 탓인지 죄다 허깨비라도 씌인 것처럼 도무지 시대에 발맞출 생각을 하지 않는데요. 일단 소통조차 불가능한데요.
수년 전에 대형 면허를 따러 갔습니다. 대형 면허 시험은 도로주행 없이 기능 시험만 통과하면 돼서 가르쳐준 대로만 하면 됩니다. 시험 순서를 기다리면서 개저씨들끼리 가속 구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얘기하는 걸 듣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강사가 알려준 방법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각자의 방법을 창조해 떠들어댔습니다. 아무도 강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거지요. 뻥 안 치고 그 토론에 참여한 개저씨들은 전부 시험에서 탈락했습니다.
당시 저는 제 눈앞에서 벌어진 탈락쇼가 그저 우연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씨들과 동료로 지내고 우애를 다지며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개저씨들은 자기 안에서 생성된 무언가만을 기준으로 삼고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대화 상대에게 바라는 건 인정과 리액션뿐입니다(캬~ 크~ 오~ 세 가지 추임새로 영원히 대화 가능). 물론 언니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 중 개저씨들의 비율이 압도적이고 어떤 파훼법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보아 알고 있습니다. 개저씨들은 모두 탈락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디 본 것을 믿으십시오.
2026년 8월 17일 월요일
인생은 부메랑
어쨌든 사회는 상호 간의 믿음으로 이뤄져 있다. 하다못해 떡을 살 때도 식용이 가능한 상태라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파트는 떡보다 더 복잡한 믿음의 구조로 쌓아 올려진다. 토목을 믿고, 건축을 믿고, 감리를 믿고, 시공을 믿고, 인테리어를 믿고, 모델하우스를 믿고, 부동산이 오를 거라고 믿고... 등등의 믿음으로 세워진다.
그러나 믿음을 저버리는 일들이 너무나도 만연하다. 뉴스에는 철근이 누락되고 외벽과 발코니가 무너지고 1년이 넘도록 누수를 보수받지 못하고 보일러 배관이 누락되고... 등등의 사건사고가 보도된다.
아파트가 온갖 규제를 통해 위험을 줄여 왔다고, 공급 호수 대비 사고율의 통계를 들이민들, 몇 대에 걸쳐 쌓아온 불신을 손쉽게 해소할 수는 없다. (게다가 외벽이 무너지고 발코니가 떨어져 나간 건 최근의 일이다. 좀 나아질 만하면 새로운 불신이 업데이트된다.)
그러니 우리를 부르는 마음이 불안에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애초에 불안하지 않다면 우리를 부를 이유도 없다. 게다가 저잣거리의 흉흉한 소문은 끝이 없지 않은가. 업체가 시공사와 담합을 하고 일부러 파손을 시키고 눈탱이를 치고... 등등의 두려움들은 너무도 흔하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을 나조차 여럿 겪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폭염이 한창이던 때에 내가 사는 집 거실과 서재 에어컨의 상태가 기묘했다. 온도를 아무리 낮춰도 시원해지지 않아서 사람을 불렀다.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지만, 기사는 한사코 나에게 함께 실외기를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절대 같이 가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기사를 따라 옥상으로 따라갔다.
기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매니폴드 게이지였다. 수치를 확인하니 거실 에어컨은 냉매가 아예 없었다. 기사는 친절하고 세세하게 에어컨의 ATOZ를 모두 알려주었다. 그제서야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글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냉매가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속여 돈을 더 청구했다는 어떤 인터넷 기사에 대한 글이었다.
그런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당장의 손익을 따져서 이득을 챙기려는 일명 체리피커, 한국말로는 얌체, 개자식, 호랑이 물어갈 놈... 등등의 것들은 설령 세상이 좋아져도 0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들이 망쳐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모두의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게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뭐 어떡하겠나. 부메랑이 돌아가는 자리는 꼭 제자리가 아닐 수 있다. 내가 던지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돌아온 부메랑을 맞았다면 눈앞에 놓인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노력 또한 부메랑이 돼서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돌아갈 것이다. (생각해보면 선의, 호의, 배려... 등등의 부메랑들의 수혜로 이만큼 버티며 살고 있는지도?!)
점검을 모두 마치고 나는 기사에게 이온음료를 건넸다. 씨부럴 화이팅! 하는 마음을 담았다.
2026년 8월 13일 목요일
움직여 몸
평소 우리 신체의 움직임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마지막으로 완전히 쪼그려 앉아본 적이 언제이고 허리를 뒤로 젖힌 적, 팔을 완전히 뻗어본 적은 언제인가. 하다못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것은 언제가 마지막인가. 이곳에서 일하면 많은 신체적 움직임을 회복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일하기로 했다면 그게 누구든 일단 매니저가 된다. 매니저는 육안소장의 보조격으로 하자를 순서대로 사진에 담는 게 기본 업무다. 그러나 그다지 우습게 볼 일은 못 된다.
육안소장은 크게 구역을 나누어 바닥, 천장, 벽의 하자를 잡는다. 숫자가 적힌 스티커에 내용을 적어 하자를 표시한다. 매니저는 숫자를 따라다니며 하자마다 멀리서 한 장, 가까이서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 멀리서 찍은 사진에는 위치가, 가까이서 찍은 사진에는 내용이 보이도록 한다. 가까이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언제나 노력이 필요하다.
1번 하자가 ‘바닥 타일 깨짐’이라면 처음에는 단순히 허리를 굽혀 사진을 찍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리를 굽히는 행위는 허리 부담을 가중시켜 디스크를 부를 수 있다. 바닥에 있는 하자가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자세를 고안해야 한다. 스쿼트다. 허벅지 힘으로 바닥에 가까워지면 허리 부담이 줄어들고 하체 근력에 도움이 된다.
2번 하자는 ‘천장 오타공’이다. 천장에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천장에 위치한 하자를 찍는 행위는 굽은등과 거북목에 탁월하다. 허리를 젖히고 팔을 뻗으면 요추가 신전되고 견갑골이 전인되면서 후면의 협력근들이 활성화된다. 뒷목에 통증이 느껴진다면 척추부터 이어진 뼈들이 견인되고 있지만 무리라는 뜻이다. 한 방에 해결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조금씩 자세를 바꿔나가며 조금씩 적응해가길 바란다.
3번 하자는 ‘벽 도배 파손’이다. 벽에 있는 하자는 앞서 바닥과 천장에 위치한 하자보다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저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별것 아닌 움직임들처럼 보여도, 개인적으로는, 복싱 체육관 삼 개월을 다닌 것보다 이곳에서 한 달을 일한 것이 체력 증진 및 신체 능력 향상에 더 큰 기여를 했다. (여담으로 한쪽 무릎을 꿇을 때 자세를 잡고 무게를 지지하기 위해 오른쪽 발가락들은 무난히 접혔지만 왼쪽 발가락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신경이 교착된 듯 왼쪽 발가락들이 매우 고통스러워 충격이 있었다. 이를 회복하는 데는 세 달이 넘게 걸렸다.)
물론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면 되레 신체가 고장 나지는 않는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실제로 나는 최근 몇 달간 족저근막염으로 고생을 한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다.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어딘가가 아파오기 시작한다면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나 다름없다. 나의 족저근막염의 원인은 고관절 근육의 미사용 및 종아리 근육 과사용이다. 고관절을 사용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다 보니 종아리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수축하면서 족저근막염을 불러온 것이다. 고관절 운동을 병행하고 종아리 근육을 풀어주면서 족저근막염은 개선된다. 완치가 아닌 것은 아직 둔근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건강한 신체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한다. 특히 우울감과 무기력증,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슬픔에 가까이 흘려보내는 사람이라면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해보길 추천한다. 노동이 인간을 해금시켜 준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26년 8월 10일 월요일
쥐 마술 ❷
게친이 방을 나가는 소리에 고야의 어깨가 움찔했다. 고야가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11년 된 시야 속에 게친의 뒷모습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먹을 걸 좀 가져올게. 목소리가 와서 말했다. 머뭇거리던 고야가 다시 루틀리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는 아직 뒤에 둔 채였다. 루틀리지는 재촉하지 않았다. 눈동자까지 돌아온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마술 얘기부터 해야겠구나. 마술사를 본 적 있니?”
고야가 손가락을 들어 루틀리지를 가리켰다. 루틀리지가 웃었다.
“어떤 이는 평생 서넛 보기도 어렵다지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대개 마술사도 한둘 있기 마련이야. 나타난 지 오래됐으니 본 적은 없어도, 모르는 사람은 없지. 하지만 마술에 대해서는 대개 제각각 상상하고는 하더구나. 일반적으로는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을 먼저 떠올리는 듯해.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숲을 불태우는 스펙터클한 거. 있긴 하지만 그게 주류는 아니야. 마술사는 연구자나 학자에 가깝단다. 강조하고 싶은 건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는 거야.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어 의지와 무관하게. 뭐가 됐든 계속 어른거리는 유별난 것이란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 작아서 살점째 도려내지 않는 한 계속 남는 가시 같은 거. 모든 마술사에게는 그런 게 있단다. 예를 들어볼까?”
고야는 발 하나를 뒤로 뺀 자세 그대로였다.
“어떤 마술사는 손바닥 위의 조개 껍데기를 볼 때마다 금화 한 닢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누군가는 절망을 느낄 때마다 타들어가는 개를 본단다. 어떤 자의 머릿속에서 돌은 움직여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야. 그들 머릿속에 왜 그런 생각이 있는지는 몰라. 그건 오직 당사자만이 알고 있고 알 수 있을 일이지. 그래서 마술이란 무엇일까? 조금 어려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내 결론은 그렇단다. 마술은 사물에 대한 강령술이야.”
루틀리지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말은 탁월하게도 많은 것을 설명해준단다.”
조금 춥다고 느낀 고야가 팔을 어루만졌다.
“마술이 강령술이란 것은, 고야. 옳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야. 마술은 거스름돈을 버려야 하는 교환이란다. 차를 우린다고 해서 잎이 몽땅 물이 되지 않듯 말이다. 물 밑에는 예외 없이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지. 마찬가지로 마술 또한 사용할 때마다 찌꺼기가 남아. 그 찌꺼기를 앙금이라고 부르는 거고. 앙금은 실체가 존재하는, 물질이란다. 무겁고, 끈적하고, 쌓이고, 달라붙는 성질을 가졌어. 앙금은 마술사를 파괴해. 모든 마술사는 수명이 짧단다. 그래서 마술사들은 좀처럼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지. 일찍 죽기 때문에. 그뿐이면 얼마나 좋겠니? 마술은 타인 또한 파괴해, 고야.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몸에 앙금을 수집하지. 그 결과가 괴사 중인 네 손가락이야.”
고야가 자기 약지를 옷소매 안으로 감췄다. 다 해진 옷소매가 덜렁거렸다. 게친이 빵 두 개를 들고서 돌아왔다. 방금 감춘 손을 다시 꺼내어 고야는 빵을 받았다.
“누군가가 사용한 마술이 앙금을 만들어냈고 그게 네게 간 거야. 누가 널 미워했다는 뜻은 아니란다. 네 잘못이 아니란 소리야. 그저 불운이란다. 많은 이들이 이 현상을 연구했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법칙도 없었어. 그냥 네가 당했을 뿐. 널 그렇게 만든 마술사조차 자신이 누굴 죽이고 있는지 몰라. 나도 그래. 내가 만든 앙금이 누구에게 갔는지 모르지. 몇 명인지도 모르고 만나도 알아볼 수 없어. 그러나 모든 마술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우울증에 걸릴 만큼 오래토록. 지금도 하는 중이야, 알겠니?”
고야는 받아 든 빵을 먹지 않고 내려다보았다.
“모든 마술사는 다른 마술사의 피해자이고, 모든 마술사는 다음 마술사의 원인이란다. 다른 경우는 없어. 그래서 우린 어린아이를 반드시 구해내야 한다는 강령을 만들었단다. 외면을 외면하자는 강령. 죽거든. 내버려두면 죽어. 손가락에서 시작하지만 얼마 안 가 몸 전부가 괴사하니까. 그게 네 손가락을 잘라내야 하는 이유란다.
하지만 끝은 아냐. 잘라낸 자리와 잘라낸 약지 사이에 이걸 끼워서 봉합할 거야. 마술 원반이라는 건데, 마술 반지라고 부르기도 하지. 괴사를 해제한 다음, 네 몸에 흐르는 앙금을 조절해 마술을 부릴 수 있게 해줘. 앞서 말한 모든 것을 감안한 후에도, 그럼에도 네가 마술을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 그때 네가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줘. 이 반지가 우리가 발명한 윤리란다. 마술 윤리. 나도 네 나이쯤 이걸 했지. 어떤 마술사가 나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왔거든. 심지어 그는 나보다 어렸어. 그때는 나도 너처럼 이게 다 무슨 소린가 했단다. 무섭지, 고야. 무서워해도 돼. 우리가...”
말하려다 말고 루틀리지가 침을 삼켰다.
“아니, 네 공포는 어차피 지나갈 무서움이니까. 손가락을 내밀어 주겠니?”
“그런데 왜.”
고야가 말했다.
“키울 수는 없다고 말한 거예요?”
루틀리지는 놀랐다.
“우린... 그냥... 형편이 좋지 않거든.”
민망했고 슬펐다. 고야의 얼굴에 수많은 얼굴이 겹쳐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부모가 되어줄 사람을 찾아줄 거니까.”
“저는 두 개예요.”
“두 개?”
게친이 먹던 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빵은 데굴데굴 굴러서 루틀리지의 발에 닿아 넘어졌다. 게친이 멍청한 표정으로 넘어진 빵을 바라보았다. 빵이 여전히 손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친이 앞으로 걸어갔다. 넘어진 빵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양손에는 베어 문 자국까지 똑같은 빵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다른 손에도 있어요.”
루틀리지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 직전이었다. 둔탁하게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빵에서 빵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을 때리면서 툭, 투둑, 툭툭. 이제 모두 열 개가 된 빵이 데구르르 구르다가 제 풀에 멎거나 서로 부딪혀 나뒹굴었다. 고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왼손과 마찬가지로 표백된 듯 새하얗게 멍든 약지가 있었다. 그리고 열 개의 빵에 털이 돋아났다.
2026년 8월 9일 일요일
세 사람, 당신까지 네 사람
만약 당신이 사전점검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업체를 부른다면 당신의 세대에는 세 사람이 방문한다.
1. 육안점검 소장
세대 내 하자 전반을 확인하는 사람으로, 사실상 팀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보통 도는 순서는 현관부터 공용욕실, 침실3, 침실2, 거실, 침실1, 발코니, 안방욕실, 주방, 발코니다. 대부분의 아파트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 아무튼 육안점검 소장은 세대 내 모든 공간을 돌며 하자를 잡는다. 구체적인 방문 일정 공유 또한 소장의 역할이다.
2. 매니저
육안점검 소장과 함께 다니는 보조다. 육안점검 소장이 하자를 잡으면 순서대로 사진을 찍고 내용을 정리하는 게 주된 업무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못하다. 들뜬 곳이 있는지 바닥 점검, 공기질 체크, 콘센트 접지 확인, 욕실 등에 물을 뿌리기 등등 여러 일들을 도맡는다.
세 사람이 방문한다고 했는데 두 사람밖에 없어서 당황했는가? 그러나 육안점검팀이 사전점검의 메인 멤버다. 이들은 점검 시간 내내 세대에 머물며 당신과 함께한다. 당신이 지루해하며 잠깐 외출이라고 하고 올까? 싶을 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장비 소장이다.
3. 장비 소장
장비 소장은 벽체 수직, 바닥 수평, 단열 등을 확인한다. 보일러가 들어오면 보일러 배관이 어떻게 깔려있는지 보여주고 사진도 찍어준다. 점검을 위해 열화상 카메라와 레벨기 등의 장비를 지참한다. 장비가 필요한 항목만을 집중적으로 점검하기에 체류 시간이 짧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보편적 진리에, 그에 상응하는 말로 인생은 복불복이라는 말을 더하고 싶다. 인생은 복불복. 같은 시공사여도, 같은 아파트여도, 심지어 같은 라인이어도 세대 내 컨디션은 저마다 차이가 있다. 세상 만물이 전부 확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확률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느새 하자 점검이 전부 끝났다. 하자가 예상보다 적은가? 예상만큼인가? 예상보다 많은가? 뽑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열심히 보수를 받아보는 수밖에 없다.
바로 당신까지, 우리는 한 팀인 거다.
2026년 8월 7일 금요일
수요일
오늘은 수요일이다. 빨래를 돌리는 중이다. 이웃에게 고양이를 봐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없는 동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떠나는 건 다음주 수요일이니까 아직 일주일이 있는데, 벌써 열쇠를 주고, 이웃집 고양이 구경도 하고, 나중에 혹시 네가 떠나게 되면 내가 네 고양이 봐줄게, 그렇게 인사하고, 고양이도 안녕, 사람도 안녕, 집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가구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혼자 있으면 불안한데, 오늘은 이상하게 이렇게 빈 공간들이 있어서 가벼운 기분이다. 가벼운 기분.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누군가와 긴 대화를 나누었고, 대화를 나눈 뒤에는 나는 내 삶이 있어, 가 아니라, 나에게는 어떤 삶이 있어,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너는 네 삶이 있겠지. 너만의 고유한 삶. 너의 특별한 삶. 네가 놓치고 싶지 않은 삶. 너의 파란만장할 삶. 너의 성공적인 삶. 네가 꿈꾸는 너의 삶. 네가 계속 믿으면 이루어지는 삶. 네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삶. 하지만 나는 단지 une vie가 있어,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2026년 8월 5일 수요일
"서정시"-북쪽 답사를 권함
겨울에는 고구려 성에 가볼 것을 권합니다.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 당신이 갈 수 있는 곳까지. 북으로 갈수록 눈밭일 겁니다. 어쩌면 너무 낯설거나 한가한 제안인가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석축의 둘레가 크지 않고 도처가 붕괴되었으며 축성 시 기도 알 수 없는 몇 채의 성을. 사방에서 피로한 공격을 받았으나 훼손된 채로 하던 일을 고 스란히 계속하는 성들을 알고 있으시지요? 당신의 삶도 퍽 그러하시지요?
해가 저물 무렵 가보십시오.
자유로를 따라 북으로, 북으로! 달려보십시오.
라디오를 켜면 지역 방송이 잡힙니다. 가끔 약한 신호, 소리가 물에 잠긴 듯 눌려 있으나 이마저도 눈보라 치는 소리 같은 것입니다. 라디오니까요! 그것도 바람 속을 시원하게 달리는 차 속의…
한참을 달리면 〈아! 고구려〉 간판과 만날 겁니다. 주말에 가신다면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 인들이 가족과 함께 〈한탄강 오두막골〉이나 〈아우라지매운탕〉 〈망향비빔국수 본점〉 같은 델 가고 있습니다. 민물매운탕이나 가물치구이를 드셔보셨거나 좋아하세요? 선의로 들르시거나 마음대로 지나쳐 가십시오.
막상 도착하면 그저 작은 언덕일 겁니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 유속이 느려지는 여울목 에 세운 삼각형의 낮은 보루일 겁니다. 세상은 사람과 건물로 꽉 들어차 있는데 거기만 평지 에서 휙 솟아서 돌출된 고공을 얻습니다. 찬 바람이 강합니다. 살을 에는 밤, 당신이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잔뜩 얼어서 빛나는 별이 보입니다.
한국의 겨울 새들이 날아갈 겁니다. 우는 소리로 당신의 귓속을 채우지 않고 유유히 브이 자로 날아갈 겁니다. 그러니까 일하고, 사람들 하고 살다가 기어이 억울하면 거기 가보십시오.
책장에서 『한국의 새』라는 책을 꺼내어 보여드릴게요. 흰 이마를 가진 기러기부터 드물게 관찰되는 줄기러기까지, 겨울마다 한반도로 돌아오는 기러기의 생태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추우면 추울수록 반드시 돌아오는 그 새가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해 목적지를 정한다는 이야기. 당신도 당연히 좋아하실 겁니다.
쇠락한 지 천삼백년이 지난 고구려 성들은 점점 망가지고 있는 우리를 묶어줄 겁니다. 성곽 아래엔 죽은 고구려 사람들이 누워 있어서 혼자 여행하더라도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지요. 최근엔 조선 왕실의 행사를 그린 도록을 뒤적이다가 1828년 6월 1일 초연됐다는 고구려 춤 기록을 보았습니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고구려」를 바탕으로 연행한 춤이라지요. 이백은 금으로 꾸민 꽃을 매단 모자를 쓰고 백마에 올라 머뭇거리는 고구려 유민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가 넓은 소매를 휘날리며 춤추는 모습이 꼭 고구려에서 날아온 새 같았답니다.
“무용수 여섯이 나와 선다. 이백의 「고구려」를 노래한다. 여섯 명의 무용수는 둘씩 서로 상대하여 춤춘다. 등지기도 하고 마주보기도 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고, 돌면 서 춤을 춘다. 춤을 마치면 물러나 퇴장한다.”
이제는 무너진 성에서 계속되는 춤을 떠올릴 수밖에요. 조각난 기와, 소, 말, 개, 노루의 뼈, 탄화된 곡물, 발이 세 개 달린 벼루, 커다란 밥공기, 흙으로 빚은 북, 화살촉, 금동불상, 저울 추 같은 것들이 출토되었고, 지금은 도로 묻어 풀밭이 되었다는데요,
나는 죽은 이들이 꼭 으스스하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영가들이 구름 신발을 신고 무너진 성벽을 타며 춤추는 상상. 그들을 만나러 가는 우리. 생각만 해도 경쾌하지요. 나는 한 없이 어두운 마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밝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툭 끊기고, 갑자기 오래된 노래 한 곡이 흘러나오 면 당신은 모르는 채로 계속 들으시지요? 너무 오래되어서 긁힌 듯한 잡음만 기억에 남아도 전혀 괜찮으시지요?
한탄강처럼 이렇게 흘러가도 좋은 삶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행자는 바뀌어 당신은 침착한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북쪽의 고구려 성에 다녀오면요.
그리고 다시 안부 전해주십시오.
당신을 아끼는
김깃 拜上
"서정시"-수국
"서정시"-골분
시공사가 펜이 잘 나옴
주말에는 아랫지방에 다녀왔다. 도착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 태양 아래서 타 죽어가는 뱀파이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고 기온 39도. 올여름이 앞으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고 과학자들이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사전점검 기간에 사용되는 전기료와 가스비는 시공사에서 부담해야 한다. 때문에 여름에도 세대 내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 현장들이 더러 있다.
시공사A는 여러모로 악명이 높은데, 이제껏 여름에 에어컨을 가동해 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도 그중 하나다. (다행히 이번 현장에서는 예외적으로 틀어줬다.)
그러나 에어컨 하나 틀어주었다고 시공사A의 악명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다. 풍문에 의하면 시공사A는 흔히 건설사 설립 일화라고 할 때 떠오르는 전철을 모두 밟았다고 한다. 깡패 출신의 회장이 임대업을 하다가 건설업이 돈이 된다는 걸 깨닫고 시공사A를 차리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회장으로부터 내려오는 조직 문화는 조폭과 같아서 신축 아파트 현장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현장 분위기는 살벌하다. 사전점검 대행업체와 관련해 시공사와 입주민 측의 사정이 다른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시공사A는 과도한 대응으로 문제가 되곤 한다. (다른 시공사들은 고객의 권리를 우선시 해 대행 업체를 쫓아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가령, 입주예정자와 가족 관계인 사람이어도 가족관계증명서를 지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경우를 본 적도 제법 있다. 그뿐인가. 고객들이 하자를 신청해도, 다른 시공사였다면 충분히 보수를 받았을 법한 하자를 처리해주지 않는 등의 문제도 심각했다. 그나마 주택법이 개정되고 시행되면서 시공사A의 보수율도 높아졌다. 이런 걸 보면 역시 기업은 합의가 아니라 규제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시공사A는 유난히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뭐 우리야 현장 상황이 어떻든 고객의 요청에 따라 점검을 해야 하므로, 어떻게든 입장하고, 쫓아오면 도망가고, 쫓겨나면 다시 고객과 동행해 들어가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며 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도 화장실도 못 쓰게 하는 건 정말 너무하다 싶지만, 백 한 번 양보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보지만, 그래도 그건 진짜 너무하다는 생각이 무한반복 된다.
그래도 시공사A의 좋은 점을 꼽아보자면, 그곳에서 나눠주는 펜이 참 좋다는 것이다. 과거보다 훠얼씬 너프되었음에도 술술 써지는 그 펜만큼은 모두가 입을 모아 최고라고 얘기한다.
2026년 8월 1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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