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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2일 월요일

양젖

유리잔이 있다. 거기에 물을 따르면 물이 차오른다. 그렇게 담겨 있는 물을 나는 나의 임의로 마셨다. 그리고 한 번 더 따라 마셨다. 나는 목이 말랐다. 그러니 한 번 더. 그러니 한 번 더. 이젠 목이 마르지 않았으나 나는 입안에 물을 넣고 가글을 하다가 버렸다. 나는 물과 놀고 있었다. 물을 좋아하는가? 물으면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물은 친근하면서 동시에 낯설고, 이 나라에서는 값이 싸고, 너무 필요한 것이어서 이미 익숙한 것이다. 필수적인 것들은 자신에 의해 잠식되고 장악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물을 따라서 그대로 싱크대에 버린다는 결정도 해봤는데, 거기에 별로 의미는 없었다. 이 놀이의 마지막 광경을 뭘로 하면 좋을지 생각을 하다가 아까처럼 유리잔에 물이 반쯤 차올라 있도록 해두었다. 물은 차오르는 것. 입을 대고 마실 때는 줄어드는 것. 물을 엎지르던 때를 기억한다. 사물에 대한 관심은 지루할 때 갖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지루한가? 물으면, 마치 물이 엎질러지면서 반짝이는 물의 조각들이 비산하듯이 ‘그렇다’라고 하여야 한다. 나에게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샤워하면서 내 몸에 뿌려지는 물을 입에 담고 있었다가 뱉었다. 수영장에 갔던 때를 기억한다. 그 냄새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면서 동시에 수영장에 가보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수영장이 누군가에겐 그 자신의 열망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카모메 식당에서 본 그 수영장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엔 물이 많고 그 위에 떠다니는 사람들도 꼭 수도꼭지에 흘러나오고 있는 물 같다.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것은 강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흐르기, 강의 유속이 강해지는 구간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높기 때문이고 다시 아까 말한 열망이라는 감정과 닮은 데가 있다. 열망은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높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퇴적물처럼 어떤 바라는 마음들이 쌓인 것이다. 쌓여서 강의 둑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터진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그것이 저 멀리로 작은 점이 될 때까지 흙물이 되어 흘러간다. 흘러간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렇게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쓸려간다고 해야 한다. 열망을 갖고 있는 인간은 강의 수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있는 댐이고, 쓸려간다는 것은 과도한 물의 압력으로 인해 아래에 있는 퇴적물들의 지형에 영향이 가는 것을 말한다. 그 열망이란 자기에게 퇴적된 지형에, 그러니까 관련된 것이다. 열망은 모두가 다르다. 어떤 열망은 그것을 닮지 않았다. 강일 수 있고 유리컵에 반쯤 차오른 물일 수도 있다. 그 물을 담고 있는 것은 잔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잔이다. 나는 한가로웠고, 내 열망이 자극되지 않는 한 나는 그것을 잊어버린 채였다. 높이 쌓여 있는 것을 모르고서. 지루했다. 정말 지루하였다. 왜 어떤 인간적인 상황이나 조건들은 높이를 가지는가? 왜 어떤 것은 판타지가 되고, 어떤 것은 우울감이 되는 걸까? 그 모든 것들이 계속되었다. 가령 예를 들면 수영장에서 코로 물이 들어올 때가 있다. 한번쯤 겪어봤을 것……. 그럼 좀 맵고,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떠오르나? 아무 생각 없었을 개연성이 크다. 수영에 더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물에는 몰입할 수 없다. 너무 단순하고, 용도적이다. 그것 없이 살 수는 없지만 정작 그것에 몰입할 순 없다.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것들은 사실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다. 나는 강에 몰입하였다. 그리고 유리잔에 몰입을 한다. 그리고 내 열망에 몰입했다. 아마도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으므로, 제대로 몰입이 되진 않았다. 나는 사물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지루함 때문에 생긴 비약이었다. 그것이 그것의 연장일지라도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 몰입이 가능하다. 내 원망은 어떤 것이 결국 물인 데에 있었고 내가 흐르고 있는 강은 유속이 잔잔했다. 내가 잊어버린 것들이 아래로 퇴적이 되어 있었다. 비도 오지 않는 날이었다. 따라서 내 열망도 자극될 리 없다는 것 따위를 떠올리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비장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는 임의적인 어떤 마음. 마음이 아니라 마음가짐. 마음가짐에 대한 가짐. 대한……. ~에 대한……. 어떤. 어떤 생각들은 연속되었는데, 그것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가 몇 개 이상의 강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이전에 비해선 좁은 너비가 되어 가다가 끊어졌다. 나는 내가 물 말고는 원하는 것이 없다고 자각했다. 내 몸이 모래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럼 흘러갈 수 있고 손 틈 사이로 비어져 나올 수 있을 텐데. 내 열망은 내 존재에 관련된 것이었다. 유리잔에 물이 반쯤 차올라 있다. 나는 거기에 물을 다시 따른다. 넘칠 때까지 따른다. 유리잔이 내게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지루하였다. 그래서 유리잔의 말을 만들었다. ‘생각 외로 부끄러운 일이야, 그건.’ 그렇다. 내게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맛보며 웃었다. 무미였다. 맛이 없다는 게 무의미하기도 했다. 부끄러움을 맞는 순간 나는 몸이 곤두서는 듯했다. 그것은 내가 잊어버린 희극이었고 날은 순식간에 비 오는 날이 되어 유속이 빨라졌다. 나는 강가로 걸어 나와 퇴적들이 전부 쓸려나가는 걸 보면서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의 안위가 나로 인해 지켜졌다.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위험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내 몸에 줄을 걸고 미궁에 들어섰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줄밖에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 부끄러움 때문에 나는 모험을 나온 것이 되었다. 나는 물과 부끄러움으로 관계했던 것이다. 물이 어서 이리로 오라고 날 끌어당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수영장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수영장에는 물이 많고 이 잔에 들어 있는 물의 양은 그보다 너무 적다. 나는 물을 더 따랐고 가득 차 오른 물의 표면이 완만한 곡선을 이뤘다. 나는 부끄러움을 발견했지만 아직 재미가 없었다. 손으로 물의 끝을 찍자 손가락 끝에 물이 묻었다. 그리고 잔 옆에 물이 흘러내려 묻었다. 내가 그것을 재미있다고 여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쌓은 퇴적들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고 생각하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자 비 오는 날은 점점 더 극심해졌으며. 그리고 비가 멈추자 이름 모를 마을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돼지를 구웠다. 불이 비에 젖으면 꺼지게 된다. 비는 불을 피한다(접근한 것들은 뜨거움에 흔적이 없어지게 된다). 그 단순한 관계 속에 사람들의 생활이 있었다. 그 생활은 이전에 판단이었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의도이자 선택, 혹은 결정이었다. 통로의 끝에 보물이 없는 지하 미궁이 무가치한 것처럼 나는 그 마을에 가고 싶었다. 거기서 내가 모르는 언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부끄러움 때문에 거세졌던 비가 그쳤다. 오로라인 것처럼 일그러지고 납작 눌린 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 마을의 중앙에는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수로가 있다. 거기서 아이들이 뛰논다. 나는 아까 내가 느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반팔 티를 걸치고 그 물 안에 뛰어들었다. 아이들이 신나는 비명을 질렀다. 몸이 물에 젖어서 윤곽이 보였다. 물이 크게 너울졌다. 그 물이 수로 바깥으로 튀었다. 미궁 끝에 누군가 잠들어 있다. 그 사람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웃었으면 좋겠다. 강에 내 열망의 흔적들이 퇴적되어 있다. 무지개가 끝나고 밤이 왔다. 다시 내일 아침이 올 것이고. 유리잔을 품에 안은 채로 나는 잠들었다. 유리잔은, 거기에 물을 따르면 물이 차오른다. 그렇게 담겨 있는 물을 마신다. 이 마을에서는 물 대신 양젖을 마신다. 냄새가 심하고 역할 것 같다. 나는 혼자…… 혼자서 양젖을 마셨다. 코를 집게손가락으로 막고서. 그때 다가온 아이들이 날 보며 웃었다. 바보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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