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30일 수요일

사이버낚시꾼

낚시를 왜 하는가, 라는 물음에 낚시꾼들은 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겠지만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낚시란 인간이 자연 앞에 정면으로 서는 일이며, 이 대립의 무게추가 바로 물고기입니다. 물고기는 소리에 예민하다는 정설에 따라, 물고기가 낚이기 전까지 고요, 또는 숨 죽인 긴장이 이어집니다. 이 인내는 상호적입니다. 인간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또한 인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창한 날 저수지에 개구리밥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물기슭에 이파리 무성한 나무들이 저수지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늘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물고기가 있을 법한 풍경입니다. 이런 곳에서 물고기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은 계속해서 캐스팅을 시도합니다.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자연은 인간이 수면 아래로 보내는 유혹을 참아내는 일을 학습합니다. 그 긴장과 길항을 낚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략과 인내, 그리고 성취. 하지만 그 스포츠를 위해 물고기의 입이 찢어져야 하는 걸까요? 물고기의 대가리가 토막 나야 하는 걸까요? 허탕을 치는 당신의 발걸음이 무거워져야 하는 걸까요? 허구한 날 바깥으로만 나돌아야 하는 걸까요? 저는 이러한 불합리와 비윤리 등을 점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 사이버 낚시를 제안합니다. 사이버 낚시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스크립트로 직조된 사이버 자연 앞에 정면으로 서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실제 낚시와 똑같이 낚싯대와 미끼를 선택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어장을 모델로 만든 사이버 어장을 찾아 사이버 낚시를 할 수 있습니다. GPS맵을 따라 보트를 타고 포인트로 이동하면, 화창한 날 저수지에 개구리밥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물기슭에 이파리 무성한 나무들이 저수지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늘을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사이버 낚시에서도 사이버 자연과의 대립은 발생하며, 이 길항 속에서 사이버 물고기를 낚을 수도, 또는 허탕을 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나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감각이 혁신입니다. 나는 여기(방구석)에도 있고 저기(어장)에도 있습니다. 사이버 낚시터로 떠나면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기름 값도 나가지 않습니다. 물고기 또한 낚싯바늘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합니다. 플레이어는 사이버 낚시를 통해 진짜 물고기를 얻을 수는 없고 진짜 상금을 거머쥘 수도 없지만, 사이버 머니를 벌 수는 있습니다. 사이버 머니를 모아서 어디에 쓰냐고요? 사이버 장비와 사이버 의상을 구매하는 데 사용합니다. 사이버 낚시터에 접속되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실의 자신보다 사이버의 자신이 자아와 훨씬 더 강력하게 링크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방구석에 처박힌 현실의 내가 입을 옷보다는 사이버의 내가 입을 옷이 훨씬 더 중요한 것 또한 순리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사이버 낚시를 하면 현실의 물고기는 다치지 않지만 사이버 물고기는 여전히 다칠 위험이 존재한다고. 반복되는 사이버상의 고통이 사이버 물고기들을 진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고통은 플레이어의 시간 감각을 파괴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한번 시간 감각이 파괴된 이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한없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이버 낚시터에서조차 저는 사이버 물고기를 잡은 뒤 릴리즈를 해주고, 현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충분한 휴식을 통해 일상성을 회복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모두를 행복하게: 쟁 니 (19년 10월 넷째 주)



PIMPS는 패배주의와의 정면투쟁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정치 과몰입으로 나를 몰아세운 이 사회 덕분에 영 힘들었던 두 주를 거르고, 시월 넷째 주는 우리의 ㄷㅌㄹ 쟁니를 다룬다. 내가 예전부터 非文이어 왔지마는, 앉아서 서서 욕을 욕을 하면서도 국가 지도자의 [존함]은 피휘하는 것이 또 우리의 빛나는 전통이다. 쟁니는 지난 두어 달 조국의 일로 집권 후 최대 위기를 맞는 듯했다. 결국 조국 사퇴 뒤 지지율이 회복세를 보이고는 있는데, 진작에 그랬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들고,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 행위의 핵심이라고나 할 ‘관리’가 참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이 정권의 최대 리스크 둘; 극렬 지지층과 극렬 반대층은 이 일을 계기로 서로 명분 부족의 억지를 부려대며 자신과 주변을 동원했고, 그걸 또 편들기 위해 욕하기 위해 좌우와 보혁, 민진과 좌좌가 편편에 편편/편편, 편/편으로 갈려 피차 명분 부족의 말다툼으로 빨려 드는... 맞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구조적으로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게 되는, 누구나 조금은 억지를 쓸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내가 느끼기에 지난 국면 한국의 공론장(이런 게 정말 있다면)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적대적 공생과 기생이 마구 뒤엉킨 무능의 대향연, 엉망 개박살이었다. 정녕 이것이...? 언론, 검찰, 교육, 민주주의, 정치, 계급, 대중, 진보...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든 하여튼 뭔가가, 모두의 어떤 무기력과 신경증이 폭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난 시간 누구나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우리 앞에는 다시 여러 과제들이 제출되어 있다. 그 과제들은 우리에게 옛 보수정권 때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와 입체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은 PIMPS에게도 그렇다. 결국 이 타이밍에 다룰 만한 사람은 쟁니밖엔 없다는 결론. (고백하자면 지난주에 엘리자베스 워런 편을 쓰다가 말았다.) 본래 ㄷㅌㄹ의 ‘그 일’을 맡은 사람은 탁 씨였는데,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뭔가가 예견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사 문제를 두고 서로 썩 넉넉치 않은 명분을 쥔 채 생즉생 사즉사의 싸움으로 내몰리는 고통스런 광경? 사람이 문제다? 흐트러진 지지율이야 어떻게든 다시 그러모을 수 있겠지만 불안 요소는 부유층의 큰 증가, 보수권이 극우화되고 중도파는 결집되지 못하는 사이 BH가 직접 핸들을 우로 틀어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는 신호는 어렵지 않게 감지되고 있다. 대선 국면에서와 마찬가지 양상으로, 이 또한 총선을 위한 훼이크(더블 훼이크?)일까? 아니면 결국 ‘야 실제로 해 보니까 이거 안 돼’인 걸까? 과연 이대로 참정 시즌2의 그림(여기저기서 고사 지내는)이 반복되는 것일까? 대마大馬를 다루자니 서두가 거창했다.

사실 ㄷㅌㄹ을 위해서는 깨작깨작 뭐 머리 밀고 안경 벗고 하는 그런 잔재주로는 안 된다. 이미 그 모든 일들을 거쳐서 그 자리에 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ㄷㅌㄹ이 이미지를 제고하겠다면, 천하를(좁은 천하지만) 흔드는 스케일, 한 명이 아니라 만 명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큰 계책이 요구된다. 최근 정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거 아니냔 얘기까지 듣는 쟁니를 위해 PIMPS가 자신 있게 내놓는 특급 제안: 만났다 하면 히죽히죽, 쟁니에게 꾸준히 호감을 표시해 오던 재용과 의삼촌-의조카 맺기. 즉, 현대 의학 최전선에 누워 불멸의 꿈을 꾸고 있는 건희와 영혼의 의형제 결의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나치게 복잡해진 한국 정치를 한 방에 정리할 수 있는 특급 카드다. ‘국정 농단 연루’와 ‘탄핵 후 당선’이라는, 각기 정통성에 사소한(?) 흠결이 있는 재용과 쟁니에게 있어서, 호시탐탐 그들의 경제적-정치적 권좌를 노리고 있는 홍석현을 제끼기에 이보다 더 윈윈인 전략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입으로 자유를 외치며 국가를 기업의 보조기관으로 묶어 두려는 우리 자유시장충들(정중히 사과드립니다)의,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신들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끝나지 않을 그 규제완화 난동을 일거에 만족시킬 수도 있으며, 요즘 세계적인 국가 경영 트렌드(미·중 참조)인 ‘첨단기업의 재력-기술력과 결합한, 대중적 지지를 적정선에서 재생산해낼 능력을 갖춘 국수 포퓰리즘적 엘리트 과두정’의 수립도 물 흐르듯 가능해진다. 사회적인 힘들을 어떤 방식으로 한데 묶을 것인지를 언제나 고민하는 민주당의 공학적 정치 스타일에 딱 맞는, 이런 게 바로 모두의(대략 2/3의) 열 걸음 아니냐? 이 정도면 안철수부터 유승민은 물론이고 황교안, 홍준표 선까지도 쉽게 정리된다. 그리고 다음 스텝: 건희와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한 이상 쟁니도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러면 임플란트 따위 문제가 아니라, 삼성병원이 나서서 초혁신적인 초의료기술을 총동원해 쟁니를 사이보그로 만들어 줘야만 한다. (못하겠다면 만들어 줄 때까지 매주 토요일 모이면 되고.) 대외적으로 그보다 큰 산업기술력의 홍보가 없을 것은 물론이요, 포스트-쟁니 문제와 관련된 극렬 지지층의 이런저런 자해적 활동도 ‘건강하게’ 정리된다. 한편 86세대를 뒤늦게 벤치마킹할 셈인지 자기들도 무슨 반독재 투사가 되어 보고 싶은 듯한 우파들, 자기들도 탄핵이란 것을 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그들이 BIG BROTHER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만들어 주면 된다. 이건 마찬가지 의미에서 왼쪽 마이크들에도 좋은 일로, 모든 것을 욕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땡치고 싶은 사람들이 그냥 맘 편히 모든 것을 욕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길이기도 하다. 하여튼 모두가 인터넷 같은 데서 욕만은 맘껏 할 수 있게 해주면 되고, 그걸로 모두가 넉넉히 만족할 것이다. 좌우 전 인민의 유튜버화를 통해 영애가 못다 이룬 창조경제의 꿈이 이뤄진다면 그런 것이 바로 호혜, 차세대 먹거리 산업으로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뭐 그런 거 아닐까? 이렇듯 남쪽을 평정한 다음 이재용이 다시 김정은과 의조카를 맺도록 주선하여 반도 최고 권력의 두 가문 3대를 한데 모으기까지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을 두고 하는 얘기다. 쟁니의 업적이 얼마나 길이 남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PIMPS는 항상 최선의 길을 제시한다. 미래나 뭐 그런 건 신경 안 쓴다...

※추천 아이템: 니의 유전자를 통해 양성한 슈퍼 특전사 부대(검·경·광장의 제압), 개와 손주와 여사님이 나오는 쟁니 조연의 요리 육아 애견 리얼리티(공중파 제압), 이낙연 하차 후 새로 영입된 MC총리 박나래가 진행을 맡는 청문 서바이벌 프로듀스 국무회의(케이블 제압), 재용&정은 쌍왕자TV 개국(유튜브 제압).

2019년 10월 26일 토요일

조랑말 속달 우편 배달부

내일까지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편지를 맡았고. 이 편지에 어떤 중요한 글이 쓰여 있는지 나는 모르고. 선서를 위한 배달부용 성서의 겉표지에 손을 얹었고. 배달 중에는 술과 도박과 색을 금하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했고. 맹세에 따라 아흐레간 열심히 달렸고. 역사에 다다르기 전까진 쉬지도 않았고. 내일 새 조랑말을 타고 조금만 더 달리면 될 것 같았고.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고. 그래도 잠들 수 없어 딱 한 잔만 하고 잠들기로 했고. 펍으로 가니 시끌벅적 술꾼들이 많았고. 총알로 싸구려 버번 위스키 한 잔을 사 마시는 이들이 있었고. 그 총알들을 모으면 총구에서 끝없이 불을 뿜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나도 바에 앉아 샷 하나 주문했고. 바로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펍을 나가려는데 술에 절은 턱수염 하나가 나와 부딪혔고. 턱수염이 넘어지며 도박 중인 테이블 하나를 망가뜨렸는데 큰판이었고. 하필 도박판을 벌이던 이들 중 하나가 이 지역을 주름 잡는 거물이었고. 분위기가 참 험악해지고. 어떡할 거냐고 묻는데 나는 잘못한 게 없고. 턱수염은 일어날 줄을 모르고. 결국 내가 어떻게 책임을 지면 되겠냐고 되묻고. 나보고 테이블에 앉으라고 하고. 벌써 나는 카드를 받아 들고 있고. 사실은 카드놀이 제대로 하는 법도 모르고. 칩 다 털렸고. 돈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그만한 돈은 없고. 분위기 아까보다 더 어두워지고. 어쩐지 숙소로 못 돌아갈 것 같고. 그 편지가 전달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모르고. 지금은 편지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내 걱정이나 할 때이고. 나는 잠이 안 와서 딱 한 잔만 하려고 했을 뿐이고. 오던 잠도 물러가야 할 상황에 이제야 잠은 밀려오고. 총구 앞에서 쩍쩍 하품이나 하고 있고. 드넓은 초원의 꿈이 펼쳐지고. 입에 샷 하나 들어가고.

2019년 10월 8일 화요일

상담사 고블린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고 수화기를 든 채로 아주 오랫동안 그대로 있으면, 운이 좋은 날에는, 상담사 고블린이 전화를 받는다. 전혀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묻는다.

어떻게 전화를 거셨나요?

그러면 나는 고민을 이야기한다.

상담사 고블린은 참을성 있게 사연을 들어준 다음 아무 해답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고블린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사실 상담사 고블린을 실제로 만난 적은 없기 때문에 그가 정말 고블린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냥 내가 고블린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는 고블린이다.

기분이 나쁜 날은 고블린 떼를 상상한다. 경찰 고블린. 소방관 고블린. 발명가 고블린. 여행 칼럼니스트 고블린. 제복을 입고 뚱한 표정으로 태업에 매진중인 고블린. 상태가 나쁠수록 많은 고블린을 동원해야 한다. 길을 건너는 고블린. 줄을 서는 고블린. 잘 나오지 않는 펜을 흔들다 잉크를 뒤집어쓰는 고블린. 옷을 사 입는 고블린. 임대차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고블린. 벽에 머리를 찧는 고블린. 순간이동하는 고블린. 커피를 내리는 고블린. 유리창에 푸르고 투명한 세정제를 뿌리는 고블린. 흙장난하는 고블린. 의자를 드르륵 소리 내며 끄는 고블린. 정원수를 파내고 뿌리 밑에 숨겼던 것을 찾아내는 고블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고블린. 전화를 받는...... 상담을 하는 고블린.

오늘 상담사 고블린은 ...... 아주 늦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단 한 마디를 했다.

“제 조수가 미친 것 같아요.”

평소라면 그대로 전화를 끊었을 상담사 고블린은 전처럼 퉁명스러운, 하나도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단 한 마디만을 말했다.

“그것 참 큰일이군요.”

2019년 10월 5일 토요일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박용진 (19년 10월 첫째 주)




도대체 내가 왜 이걸 쓰고 있는 거지... 시대의 명령이냐? 아닌 것 같은데... 긴가민가한 상태로, 이번 주 PIMPS는 우리 회사 부장님을 쏙 빼닮은 민주당 초선의원 박용진을 다룬다. 그간 최소 장관급 정치인들만 다뤘기 때문에 갑자기 격이 훅 떨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정권의 분수령이 될지도 모를 이 시점 박용진은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다. 박용진이 누구인가? (이 뒤로 재미없는 얘기☞) 분류하자면 그는 진보적 실용주의자다. 약 20년 전 민주노동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박용진, 진보신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합류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이다. 지난날 사분오열된 좌파들이 선거를 앞두고 온갖 텐트 얘기로 날을 지새던 난세에, 그는 민주당까지도 포함하는 초대형빅텐트(‘대연합’!)에 기울었다. 노·심의 뒤를 이을 만하다 여겨지던 촉망받는 젊은 진보 정치인이 민주당으로 가 버린 일은 남은 사람들을 꽤 낙심시켰고, 당연히 변절자 소리도 들었다. 괘씸한 개량 녀석... 민주당에 간 뒤에는 비주류라는 위치 덕이었는지 당내 극한 갈등 가운데서 줄기차게 대변인직을 맡다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김종인에게 깜짝 발탁, 원내에도 진출했다. 의원이 된 뒤에는 삼성 문제를 꾸준히 팠으며, 유치원 3법으로 얼굴과 이름을 크게 알렸다. 작금의 조국 임명 국면에서는 비판적 입장을 냈다가 정권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엄청 먹었다. 관련해서 유시민과의 잠깐 논전은 그 수준이 좀 낯간지럽긴 했지만, 역사의 막중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리버럴 왼쪽으로서  정권에 속했다가 부침 속에 패장이 되어 좌파 근처까지 쓸려 나왔던 78학번 유시민은 文 정권과 함께 정파의 대변인으로 컴백했고, 민주당이 86세대를 추수해 간 직후의 황무지에서 좌파로 시작한 90학번 박용진은 10년을 버티다 혼자 민주당으로 들어가 또 10년이 되기 전에 초선의원이 되어 소장파 취급을 받는다. 유시민은 좌파한테 욕 먹을 게 뻔한데 당적도 없이 어용 지식인을 자처하며 정권의 입 역할을 도맡았고, 박용진은 정권 지지층에 욕을 먹으면서도 좌파적 민심(?)을 대변하며 당내 비판자 역을 자처했다. 이건 그야말로 대단들하신, 슬픔의 다크히어로들 아니신가? 한 번 꼬이고 두 번 꼬이고 세 번 꼬인 다이내믹 코리아의 정치판, 솔직히 좌파 입장에선 허탈한 웃음만 나오는 상황...

오늘날 그를 중요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비문(?)-민주당좌파(?)-실용주의자(?)라는 기묘한 포지셔닝 때문이다. 이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은 딱 한 명 더 있을 뿐(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미묘한 체크무늬 마이를 입고 벌이는 아슬아슬 줄타기다. 그게 되려면 말을 교묘하게 할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핵심 메시지를 지켜내면서 시류를 읽는 감각도 있어야 한다. 몇 번 미끄러지긴 했어도 지금까지의 곡예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박용진이라는 카드는 당장 보면 딱히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어쩐지 버릴 수는 없는 카드다.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이걸로 어디? 하며 아크로바틱하게 자꾸 흔들고 싶은 것. 다가오는 선거제 개편과 연립 정권 국면까지 고려를 했을 때 그의 중량감은 여하간 더 높아질 공산이 크다. 실제로 권한이 주어졌을 때 무슨 짓을 할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그 나이부터 이렇게 스케일을 크게 그리면서 정치하는 사람은 잘 없다. 그런데 그런 박용진이가 도대체 뭐가 문제냐? 좀 갑작스런 얘기지만 친구가 없다.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김종인 옆에서 오랜만에 화색이 좀 돌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지금은 영 외로워 보이니 빨리 친구를 만들어라.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어도 우수에 찬 눈매는 감추기가 어렵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의 마니또라도 되어 보는 건 어떨까? 정 어려우면 임시로 손인형을 끼고 다녀도 괜찮을 것이다. 당연히 이름(영길이, 종인 Jr... 뭐든)도 붙여 줘라. 바쁘겠지만 시간을 짜내 취미로 복화술을 연습하는 것도 추천한다. 한 입으로 두 말 세 말 정도는 할 줄도 알아야 한다. 586이나 그 위 등등이 뭐라 할 때 욕을 해버리는 데에도 좋겠다. 그 다음은 범생이 같은 머리 모양 바꾸기. 도대체가... 지금처럼 한쪽으로 넘겨 특유의 시그니처 실루엣을 몇 십 년 유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큰 꿈을 꾸는 정치인들은 다들 그렇게 한다), 더 이상 자신이 젊은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옛날엔 산뜻한 느낌 비슷한 게 있었지만 더는 아니라는 얘기. 그거가 정진석 머리(비열해 보인다는 뜻)다. 문재인과는 가르마를 반대로 타보겠다는 전략일까? 적당히 거리를 둬야 좋지만 너무 치우쳐서도 안 된다. 1) 모나지 않게 균형을 추구한다 2) 젊은이들과 호흡하기 위해 노력한다 3) 유일무이한 실루엣을 획득한다 의미에서 아프로 정도가 잘 어울리리라 본다. 대성공한 사례도 있으니 마땅히 본받을 필요가 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머리 터지게 심란했던 다사다난 진보 정치인 시절을 되새길 수도 있을 터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함께 김종인계였던 이언주, 저 끝까지 쭉 달려가 버린 그와도 좋은 대비를 이루지 않을까? 이언주 이야기까지 나오고 보니 이제는 완전히 지쳐 버린다. 박용진... 화이팅...

※추천 아이템: 좌파를 상징하는 조끼, 우파를 상징하는 나비넥타이, 나이를 감출 수 있는 화이트닝 크림. 

2019년 10월 4일 금요일

입출력의 건

“당신 앞에서 뭔갈 잔뜩 먹는 거요. 좋아하는 일이지요. 몇 번이고 봤으니까 당신도 알 거로 생각합니다. 잠시 나와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로봇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당신은 나의 연인이니까, 연인은 고민을 주고받을 수도 있는 관계이니까,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는 비스킷 봉투의 겉면을 뜯고 비스킷을 꺼내 먹기 시작합니다.

“행성 컴퓨터는 이상한 일을 합니다.”

그는 비스킷 봉투를 아무렇게나 내버려둡니다.

“행성은 인간의 생각을 수집합니다. 인간의 생각을 데이터 조각처럼 변환시켜 끌고 온 다음 조립하지요.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몰라요. 그보다는 언제부터 그랬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난 그냥 기가 죽어버렸죠. 이러한 사실을 눈으로 보고 겸손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무섭지 않아요? 우리의 생각이 휘발되기는커녕 어딘가에 남아 영구적으로 보존된다는 사실이. 보존만이 아니지요.”

그가 비타민 담배를 하나 가져와서 맛있게 피우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재현됩니다! 인간의 끝도 없는 온갖 생각은 저 행성에서 눈으로 볼 수 있게 재현된다니까요! 인간이 떠올리는 모든 것은 저장된 다음 행성 표면에 출현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신기루나 아지랑이가 아녜요. 만지려면 만질 수 있고, 가져오려면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존재해요.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과 똑같이 말입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누굴 죽이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고 합시다. 오, 이런 방금도 잠깐 생각하고 말았어요.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굴 죽이는 일은 일어나게 되고, 그 누구는 저 행성에서 내 생각에 따라 죽습니다. 한 가족이 잠들어 있는 집에 불 지르는 장면을 그려본다고 합시다. 그 일은 그저 상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게 되어버립니다! 수도 없이 많은 이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누굴 죽이거나, 괴롭히거나 특정한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역사를 뒤로 돌리고 물건을 부수고 하는. 감았다 떠지는 생각의 속성을 고려했을 때 아주 잠깐이겠지만, 폭력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이 실재하게 된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그 고통은 물론 원본인 우리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지요. 산물이며 모방인 시뮬레이션 실재자들에게 가해지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안 됩니까? 나의 동료들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몰래 회의장을 빠져나온 것이지요. 우리는 아직 모성에 보고하지 않았어요. 화상 담당자가 나인 걸 알지요? 저 별의 존재를 아는 것은 이 우주선 여섯 명뿐입니다. 나는 저 행성의 존재가 공표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동료들을 설득할 작정이었지요. 하지만 무섭고 두렵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을까요?”

이제 나는 넘칠 듯한 사랑을 담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