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8일 화요일

상담사 고블린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고 수화기를 든 채로 아주 오랫동안 그대로 있으면, 운이 좋은 날에는, 상담사 고블린이 전화를 받는다. 전혀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묻는다.

어떻게 전화를 거셨나요?

그러면 나는 고민을 이야기한다.

상담사 고블린은 참을성 있게 사연을 들어준 다음 아무 해답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고블린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사실 상담사 고블린을 실제로 만난 적은 없기 때문에 그가 정말 고블린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냥 내가 고블린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는 고블린이다.

기분이 나쁜 날은 고블린 떼를 상상한다. 경찰 고블린. 소방관 고블린. 발명가 고블린. 여행 칼럼니스트 고블린. 제복을 입고 뚱한 표정으로 태업에 매진중인 고블린. 상태가 나쁠수록 많은 고블린을 동원해야 한다. 길을 건너는 고블린. 줄을 서는 고블린. 잘 나오지 않는 펜을 흔들다 잉크를 뒤집어쓰는 고블린. 옷을 사 입는 고블린. 임대차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고블린. 벽에 머리를 찧는 고블린. 순간이동하는 고블린. 커피를 내리는 고블린. 유리창에 푸르고 투명한 세정제를 뿌리는 고블린. 흙장난하는 고블린. 의자를 드르륵 소리 내며 끄는 고블린. 정원수를 파내고 뿌리 밑에 숨겼던 것을 찾아내는 고블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고블린. 전화를 받는...... 상담을 하는 고블린.

오늘 상담사 고블린은 ...... 아주 늦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단 한 마디를 했다.

“제 조수가 미친 것 같아요.”

평소라면 그대로 전화를 끊었을 상담사 고블린은 전처럼 퉁명스러운, 하나도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단 한 마디만을 말했다.

“그것 참 큰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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