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3일 수요일

별빛 나무

오래된 나무가 빛을 발하며 서 있습니다. 나무의 죽음이 가까워져 온 것이죠. 나무의 명예는 오랜 기간 동안 흙 속에서, 제 자신의 뿌리 언저리에서 자리를 지키며 있었답니다. 그런데 서기관 또한 이 자리에 서 있군요. 군밤 모자를 쓴 서기관은 나무의 길지 않은 생애(서기관은 이 나무보다 오래 살았습니다)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합니다. 주로 이 나무의 생존과 관련된 일들이었죠. 한 차례의 대위기가 있었던 이후로 이 숲에 사는 나무들은 약 300년 동안의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중에서도 이 나무는 평화로움을 사랑하는 성향이 짙었다고 하는데요. 주변의 다른 나무보다 이르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은 그러한 성향 탓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 또한 서기관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에 얽힌 주변 다른 나무들의 가지와 뿌리들은 빛나지 않고 잠시 몸을 떠는군요. 그것들도 오래된 나무들이지만 아직 죽음의 때가 가까워져 오지 않은 것이죠. 나무가 별을 닮아 스스로 빛을 내기도 한다는 것은 이 숲에 사는 이들에게 알려진 지식입니다. 더 할 말은 없군요.

(멎는다)


지금 별빛 속에서 새로운 나무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선 나무의 인명부에 등록을 하고, 나무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폴리에틸렌 보온재를 밑동에 감싸줍니다. 그 자리에 있어 온 제멋대로인 나무들도 뿌리가 닿는 교신을 통해 어린아이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새로 나무가 태어나는 자리와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군요. 아무래도 초조한 모양입니다. 나무의 현자들, 아주 오래 살아 온 9명의 나무들이 숲 깊숙한 곳에서 제각기 다른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무들의 회합’을 하고 있습니다. 회합 자리에는 성별이 모호한 미형의 인간이 가장 상석에 앉아 있고 좌우로 네 명씩, 각각 노인, 젊은이, 사제, 우두머리 등이군요. 듣기로는 이들의 외형을 담은 카드들이 알음알음 퍼져 인간들 사이에서는 점을 보는 물건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 중에는 서기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다섯이고, 나머지 넷은 서기관과 안면이 없다고 합니다. 우선 그 아이를 감싸고 있는 별빛, 그 별빛의 문제가 거론됩니다. 문제는 없느냔 식입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사람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말을 듣고 나머지 나무들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입니다. 한 나무가 뒤이어 말합니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나무 또한 말을 섞습니다. “우리들은 나무들의 전쟁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의 현자들 중 가장 어린, 그리고 온건파에 속해 있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무들의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이 사회의 족적에 상흔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의례화된 문구이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계는 크게는 서기관을 지배자로 여기는 인간들의 사회와, 이 9인회로 대표되는 나무들의 나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는 해도, 예전에 한 번 전쟁이 일어났으니만큼 각종 알력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겠죠. 그러나 지금 전쟁이 벌어진다면 인간 진영과 나무 진영의 싸움이 아닌, 각종 이권에 엮여 있는 인간, 나무 연합 진영이 혼잡하게 섞인 아전 투구의 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아전 투구라. 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멎는다)


새롭게 태어난 나무는 전에 죽은 나무의 명예를 이양받아 평화로움을 중시하는 성격입니다. 온몸에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처럼, 마치 야구경기장의 7판 조명인 것처럼 별빛에 둘러싸여 있군요. 생후 15년 정도까지는 이러한 별빛이 나무를 뒤따르게 됩니다. 이 별빛을 자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인간 사회의 값비싼 보석임과 동시에 자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소속 여부야 나무에 달린 것일지라도, 지금 인간의 어린아이의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나무가 인간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나무의 뒤를 따르고 있는 고용인이 빵칼로 별빛을 잘라내 그릇에 담고 나무에게 먹이고 있군요. 대부분의 나무들은 이렇게 자신을 뒤따르는 별빛을 잘라내 먹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멎는다)


명예라는 말이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군요.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명예와 그리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 인간들이 붙인 말이니까요. 우리는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사소한 외양 하나는 낚아챘다는 그런 자부심이 드는 언어 사용을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말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이 나무는 이유식보다는 별빛을 잘라낸 치즈를 더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귀여움이 큰 화젯거리가 되고 이목을 끄는 것은 저 나무들의 양식에도 다르지가 않아서, 여기저기 기생뿌리가 이 자리에 지금도 닿고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저것은 사진을 찍는 요식 행위와 비슷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니까 이 나무들의 사회의 의사 소통망은, 파란 색의 새를 배경으로 하는 것과 유사한 데가 많다고 말해두지요.

(멎는다)


나는 명예관리국의 일원입니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마법 적성이 요구되죠. 나는 예언 쪽이었습니다만 동료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실 예언가들의 외양에 대한 잘못된 소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중요한 세미나가 열린다고 해서, 그곳엘 찾아가는 중입니다. 그곳에는 어린나무들도 몇 찾아올 거라고 하더군요.

(멎는다)


어린나무들은 대학 생활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멎는다)


나무들이 자신의 가지로 숲에 쌓인 담배꽁초들을 주워서 한군데로 모으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꽁초를 버려선 안 되지만, 문득 이런 광경으로 부모를 채근하여 관광 오게 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답니다.

(멎는다)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부레옥잠 같은 것

아현시장의 화원을 찾았다. 주인에게 부레옥잠이 있냐고 물었다. 어제까지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고 했다. 찬바람이 불면 쉽게 죽는다고. 근처의 다른 화원들도 찾아가봤지만 다들 미련 없는 얼굴로 없어요 없습니다 말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연희동 화원에 전화를 걸었다. 어김없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덧붙이기를 종로의 수족관거리에 가보라고 했다. 거기 가면 물에 사는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고, 물에 사는 것을 위해 필요한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찾아가보니 가게마다 늘어놓은 고무통 속에 부레옥잠이 가득 있었다. 찬 기운에 멍든 것들 중에 가장 색이 밝고 둥근 것을 하나 골랐다. 점원은 물과 함께 투명한 비닐봉지에 그것을 담아주었다. 끝을 묶어주는 손이 너무 빨라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여기 처음 와본 셈이지만 그는 수백 번도 더 이걸 해봤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종일 오가며 본 일들을 떠올렸다. 아주 다른 생각을 하기엔 손에 든 것이 있어 조심스러웠다. “가슴에 안은 게 뭐예요,” 옆자리 노인이 물어보기에 나는 봉지 끝을 조금 풀었다. “보이시지요?” 묻자 그는 “아니,” 하며 조금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좀 더 보여주고 싶어졌다. 헤맨 일에 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아서 이번엔 내가 그의 얼굴쪽으로 봉지 든 손을 가까이 했다.

2022년 2월 17일 목요일

모자 같은 것

자영이는 모자의 안쪽을 자주 만진다. 거기에는 오늘 하루 자영이에게 일어난 일들이 조금 묻어 있다. 자영이는 모르는 사람 옆에 찾던 사람 있고 특히 그 사람 옆에 미운 사람도 있는 사무실에서 일한다. 사무실에는 빈츠나 마가렛트가 비치되어 있고 자영이는 그걸 가끔 먹는다. 자영이의 동료들은 점심마다 일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뒷마당에 찾아온 새를 보러 간다. 새를 말하고 새를 생각한다. 그러다 때가 되면 다시 자리로 돌아와 혼자 일한다. 그의 일을 모르고 나의 일을 말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영이의 동료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자영이. 자영이의 모자 안쪽에는 부드러운 소재가 덧대어 있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만지는 자영이. 자영이는 세상 따위는 현관 밖 문고리에 걸어두고 집 안의 토끼들에게 맛있는 아스파라거스만 주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남은 아스파라거스는 자기가 먹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겨울이 끝날 때쯤 새들은 날아간다. 새들은 사무실 옥상에 어두운 회합의 그림자를 새기고 날아가는데 그 대형은 자영이도 알고 당신도 아는 아주 일반적인 V자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자영이는 모자를 벗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이것을 흩뜨려 놓는다. 항상 이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한다. 자영이에게는 생활이 중요하고 이 모자는 자영이가 생활할 때 자주 쓰는 모자다. 동료들은 자영이가 모자를 쓸 때마다 “자영씨, 그 모자 참 잘 어울리네요”라고 말해준다.

[21호 서신]


*전환기
- 겨울~봄 환절기 건강관리: 충분한 휴식·수면, 영양 및 수분 공급, 스트레스 컨트롤
- 22년도 한반도 정치상황 변동에 유의
- 코비드19 출구 국면~기후위기 새일상 물리/정신적 준비

*2021년 결산
- 입하량: 149편(전년 대비 +35편)
- 읽힘: 약 2.8만회
- 최고읽힘: 216회, 최소읽힘: 16회

*현황 보고
- 현재 필자 수: 8인
- 연재 중인 개인 태그: 8개
- 저장고로 들어간 태그: 12개
- 공용 태그: 4개
- 알림판 팔로어: ±240인
- 곡물창고 보름간 발송 1년째, 24호까지 발송 완료, 현재 구독자: 63인

*사용조례 개정
- 오래된 규정을 현행에 맞도록 수정
- 관리인 권한 관련, 개인/공용 태그 관련, 저장고 관련 업데이트

*기타
- 모금통 공개장부 페이지 제작
- 레이아웃 소폭 변경
- 매월 둘째주 수요일(즈음)을 곡창 정기홍보의 날로 지정, 관리인 업무에 추가
- 알림판에 하루 하나 랜덤 게시물 올리기, 관리인 업무에 추가
- 기금 사용 관련 구상 진전 無

이상

2022년 2월 14일 월요일

월요일 아침

월요일 아침이 제일 팍팍하다. 모름지기 컴퓨터도 전원 꺼뒀다가 켜면 정신 차리는 데 오래 걸린다. 사람이라고 별로 다를 바 없다. 윤회와 같은 순환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풀면,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것이나 진배없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아기처럼 약해져 있는 것이다... 응애. 하지만 진실된 아기라면 커피 따위 탐하면 안 된다. 나는 기계가 내려준 카페인 국물을 갈망한다. 그것을 꿀꺽 들이삼키면, 머잖아 내 전신의 피는 회전을 가속하기 시작하고, 불현듯 나는 과거생의 기억을 모조리 되찾게 되며, 삽시간에 몰락한 아저씨로 삭아버리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내 존재의 자기동일성, 생활의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감사한 메커니즘이다...
그렇지만 프로 아저씨에게도 사무실은 삶을 영위하기 적합한 공간이 아니다. 끝없는 고난과 절망의 판도를 뒤집어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기 위하여, 사무실 동료에게 DULTON사의 알루미늄 바인더 하나씩 장만하자고 꼬셨다. 물론 사무실은 본디 철저히 기능주의적 공간이다. 판때기가 종이만 받쳐주면 되지, 무슨 재질이 철일 필요가 있냐... 합판도 감지덕지다. 아니 그렇게 협소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사람아, 받침판이 고급스러우면 똑같은 종이도 더 있어 보이는 거야! 어차피 비품 구매 및 관리는 그의 업무이므로 나는 입만 놀려대면 그만이다. 과연 그는 나의 팍팍한 직장생활에 한 줄기 설렘을 보태줄 것인가...

2022년 2월 12일 토요일

돼지와 개

돼지와 개가 서로 앞다리를 맞대고 뒷다리로 일어선 실루엣이 출판사 ‘돼지와 개’의 로고다. 당신이 한 마리의 돼지라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다음엔 한 마리의 개라고 생각해보라. 돼지와 개 출판사는 오로지 그 생각을 향해 돌진한다. 그 외 다른 특별함은 없다. 이것이 돼지와 개 출판사다. 당신이 한 마리의 돼지라고 생각해보라. 그다음 한 마리의 개라고.

어디서 일하십니까? 돼지와 개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돼지와 개 출판사다. 어디서 나온 책입니까? 돼지와 개 출판사에서 나온 책입니다, 이것이다. 안녕하세요? 돼지와 개 출판사입니다, 안녕하세요? 돼지와 개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습니다. 책을 왜... 출판사에서는 온갖 메일을 다 받는다. 언젠가 이런 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하나도 재미없어요, 재밌나요? 돼지와 개? 우리 출판사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재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한 마리의 돼지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다음 한 마리의 개라고...

돼지들에 대해 개들에 대해, 돼지와 개 출판사에서는 요즘 생각해보고 있다. 여러 생각의 돌진 끝에 한 마리라는 제한 속에서는 그들을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은 것이다. 당신이 이제 돼지를 대표한다고, 그다음엔 개를 대표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또는 어떤 돼지와 개가 당신을 대표한다고, 당신을 대표하여 어딘가로 나아간다고. 당신이 대표되기 위해 돼지들과 개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 속에 돼지들이 있다고, 그다음엔 개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돼지들의 머리 머리 위에 임한다고, 그다음엔 개들의 머리 위에, 둥글고 뜨거운 머리들 위에, 안에, 아래에, 앞에, 뒤에.

당신이 뭔가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당신이 돼지들이라고 생각해보라. 그 다음엔 개들이라고. 돼지와 개 출판사의 생각에 가장 가까이 있는 감정은 슬픔이다. 따라서 돼지와 개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로부터는(책이 나올 수 있다면) 그 내용이 어떻건 ‘문학적’ 뉘앙스가 느껴지는데, 만약 슬픔보다 다른 뭔가가 앞선다면 그것은 돼지와 개 출판사의 고뇌의 결과일 것이다. 결론이건 항복이건 그렇다. 서로 앞다리를 맞대고 뒷다리로 일어선... 돼지와 개 출판사는 결론도 내지 않고 항복도 하지 않는다. 고뇌의 행진을 끝없게, 그리고 슬픔을 맨 앞에 세우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돼지와 개 출판사다. 미래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과거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를 입에 물려는 것은 우리의 과거에 대하여 유일하게 수긍할 만한 대항이다. 순간적인 망각을 제외한다면 그렇다. 돼지와 개 출판사는 이런 식으로 재미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죽었다. 그다음에 목숨을 건졌다. 돼지와 개 출판사는 냄새를 맡고 있다. 먹을 것이나 쌀 곳을, 아니면 다른 뭔가의 냄새를. 돼지와 개 출판사는 웅덩이에서 구른다. 물었다가 놓는다. 삼키거나 받는다. 돼지와 개 출판사는 쫓아간다. 돼지와 개 출판사는 앉는다. 눕는다.

2022년 2월 11일 금요일

부簿

이름 적는 문서를 뜻하는 한자 부簿에는 다스리다, 통솔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름을 묻는다, 이 행동의 뜻이 또한 그러하다. 이름을 알겠다는 것은 그 존재를 그것이 속한 종족과 구분되는 개체로 파악하겠다는 의지. 나아가 그 특정한 존재에 일정 이상 간섭하거나 그를 일부 종속할 권리까지 요청하는 행위로 파악할 수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름을 날 것 그대로 부르지 않는 문화를 놀라울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해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직함(부장)이나 작위(공작), 경력(선배), 연소 연로를 알 수 있는 호칭(언니) 등을 붙여 생 이름을 부르지 않는 문화, 자字나 호號를 따로 지어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은 함부로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는 문화. 이름을 함부로 불리는 사람은 부르는 사람보다 아래에 있다는 믿음. 

지배권이 그 이름 부른 자에게 있음을 증명한다는 믿음은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72악마에 대한 전설에서도 나타난다. 지혜의 왕이라 불린 솔로몬은 악마들의 이름과 징표를 낱낱이 알아냈고 이름이 노출된 악마들은 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전설. 

후세의 어느 작가가 고대와 우주의 힘 있는 존재를 묘사하며 그들에게 ‘인간의 발성기관으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한 것도 그 막강한 권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리라. 

하지만 알 수 없어서 또는 발음할 수 없어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있다면 새 이름을 지으면 된다. <난쟁이 이름 맞히기>와 관련된 농담을 소개한다. 독일 민화에 나오는 이 난쟁이 요정의 이름은 잘 알려져있듯 룸펠슈틸츠헨(또는 룸펠슈틸츠킨)이다. 허풍선이 농부의 딸로 태어났으나 지푸라기를 황금실로 자아낼 수 있다는 사기를 쳐 왕과 결혼한 여인은 난쟁이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할 시 자신의 장자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1. 왕성 뒷산의 바위로 가득한 공터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마법생물을 관련 행정처에 신고한다. 

2. 근위병들을 동원해 난쟁이 신원 확인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이름을 알아낼 가능성도 있으나, 높은 확률로 난쟁이는 달아날 것이다. 

3. 신원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난쟁이의 부동산 점유 상태가 적법하지 않음을 고지한다. 난쟁이를 쫓아내기 위해서? 아니, 그 빌어먹을 요정이 그곳에 계속 그대로 살 권리를 주기 위해서. 

4. 적당히 기억에 잘 남는 이름을 지어 성내 토지 소유자 장부에 기록한다. 왕성 뒷산 바위로 가득한 공터를 점유하고 있는 난쟁이의 이름은 이제부터 그것이다.


이름은 지어지는 순간부터 일종의 유령이 되어 그 이름을 부여받은 존재와 쌍을 이룬다. 폐기되어 더 이상 짝 지을 존재가 없어진 이름은 소멸된다. 가엾은 룸펠슈틸츠헨(또는 룸펠슈틸츠킨), 물론 박물학자로서 내가 가엾다 하는 쪽은 한때 그 이름으로 불리던 난쟁이가 아니라 폐기되었을 그 이름이다. 이름이라는 개념 자체는 사실 박물학과는 크게 연이 없다. 한 존재가 속한 종목과 그 개체를 구분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름은 박물학적 세계관과는 오히려 대치되는 지점에 있다. 박물학은 무릇 개체를 보면서도 보편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러나 수많은 박물학자가 유령으로서의 이름에 매혹되어 그것을 탐구하려는 의욕을 내비친 바 있다. 나를 그 무리와 구별 지을 특징은 딱히 없다. 나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나를 박물학자라 부른다. 이름을 쓰지 않는 이름 매혹자 가운데에 나는 있다. 

2022년 2월 9일 수요일

과거학회2

초기 과거학회는 동호에 의해 결성된 모임이었다. 취미가 양식화되는 과정들과 마찬가지로 과거학회 또한 자기 자신의 누림을 위한 노동과 여가 시간의 선용으로 작동했다. 지금은 딱히 그렇지만도 않게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그 취미의 정신 정도는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것 같다. 학회를 탈퇴하려는, 이 글의 저작자인 나는 상임 기술자 윤진(Yoon-jin)이다. 원전 사고로 직업을 잃은 이후 투신하듯 학회에 들어왔고 피프르(fipr) 담당장으로 오십사 년 일했다. 이 글은 나 다음 이 일을 맡을 사람을 위한 안내 책자다. 누가 나를 대신하게 될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오고 있다고 한다. 내게는 그가 아직 추상적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빈 화면에 어렴풋이 드리우는 실루엣이다. 온다고만 하는 그 실루엣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

2022년 2월 4일 금요일

1.5달마다 가는 미용실 같은 것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다녀왔다. 직원이 자주 들고 난다. 갈 때마다 진, 민희, 찬, 하는 이름의 새로운 담당 디자이너가 명함을 준다. 사람이 계속 바뀌고 코로나 시국 이후로 더 자주 바뀐다. 새로운 사람에게 머리를 맡길 때마다 어떻게 다듬으면 좋을지(ex. 귀 파주시고요, 투블럭은 9mm로, 겉 머리가 덮이도록, 숱 많이 쳐주세요 등등), 내 머리를 다룰 때 주의할 점(ex. 너무 짧게 자르면 귀 뒷머리가 잘 뻗쳐요.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지는 편이에요. 가르마는 이렇게, 저렇게 등등)을 설명한다. 이렇게 쓰고 나니 나는 요구사항이 많은 손님 같다. 매번 똑같은 설명을 하지만 디자이너에 따라 결과물은 다르다.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단 한 번도 똑같은 모양으로 머리를 자른 적이 없다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디자이너들 사이에 어떤 기본이 공유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 긴 머리가 아니라서 다 자를 때까지는 삼십 분 정도 걸린다. 여기에 또 다른 기본이 있다면 남자들보다 돈을 이삼천 원 더 많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쉽지만 직원에게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거길 간다. 이 정도가 나의 기본이다.

2022년 2월 3일 목요일

22년 1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3 (51)
―――
~같은 것 +1 (1)
곡물창고 +1 (17)
바리에테 +1 (6)


이달의 총격려금

53,00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11일 / 1,000원 ― 같은것같은
17일 / 50,000원 ― 최형욱
26일 / 2,000원 ― 바리에테 돌진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같은 것 [入] ☞ 1,000원
바리에테 [入] ☞ 2,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46,564원 (50,000원 + 196,395원 + 169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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