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1일 금요일

부簿

이름 적는 문서를 뜻하는 한자 부簿에는 다스리다, 통솔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름을 묻는다, 이 행동의 뜻이 또한 그러하다. 이름을 알겠다는 것은 그 존재를 그것이 속한 종족과 구분되는 개체로 파악하겠다는 의지. 나아가 그 특정한 존재에 일정 이상 간섭하거나 그를 일부 종속할 권리까지 요청하는 행위로 파악할 수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름을 날 것 그대로 부르지 않는 문화를 놀라울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해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직함(부장)이나 작위(공작), 경력(선배), 연소 연로를 알 수 있는 호칭(언니) 등을 붙여 생 이름을 부르지 않는 문화, 자字나 호號를 따로 지어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은 함부로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는 문화. 이름을 함부로 불리는 사람은 부르는 사람보다 아래에 있다는 믿음. 

지배권이 그 이름 부른 자에게 있음을 증명한다는 믿음은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72악마에 대한 전설에서도 나타난다. 지혜의 왕이라 불린 솔로몬은 악마들의 이름과 징표를 낱낱이 알아냈고 이름이 노출된 악마들은 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전설. 

후세의 어느 작가가 고대와 우주의 힘 있는 존재를 묘사하며 그들에게 ‘인간의 발성기관으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한 것도 그 막강한 권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리라. 

하지만 알 수 없어서 또는 발음할 수 없어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있다면 새 이름을 지으면 된다. <난쟁이 이름 맞히기>와 관련된 농담을 소개한다. 독일 민화에 나오는 이 난쟁이 요정의 이름은 잘 알려져있듯 룸펠슈틸츠헨(또는 룸펠슈틸츠킨)이다. 허풍선이 농부의 딸로 태어났으나 지푸라기를 황금실로 자아낼 수 있다는 사기를 쳐 왕과 결혼한 여인은 난쟁이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할 시 자신의 장자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1. 왕성 뒷산의 바위로 가득한 공터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마법생물을 관련 행정처에 신고한다. 

2. 근위병들을 동원해 난쟁이 신원 확인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이름을 알아낼 가능성도 있으나, 높은 확률로 난쟁이는 달아날 것이다. 

3. 신원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난쟁이의 부동산 점유 상태가 적법하지 않음을 고지한다. 난쟁이를 쫓아내기 위해서? 아니, 그 빌어먹을 요정이 그곳에 계속 그대로 살 권리를 주기 위해서. 

4. 적당히 기억에 잘 남는 이름을 지어 성내 토지 소유자 장부에 기록한다. 왕성 뒷산 바위로 가득한 공터를 점유하고 있는 난쟁이의 이름은 이제부터 그것이다.


이름은 지어지는 순간부터 일종의 유령이 되어 그 이름을 부여받은 존재와 쌍을 이룬다. 폐기되어 더 이상 짝 지을 존재가 없어진 이름은 소멸된다. 가엾은 룸펠슈틸츠헨(또는 룸펠슈틸츠킨), 물론 박물학자로서 내가 가엾다 하는 쪽은 한때 그 이름으로 불리던 난쟁이가 아니라 폐기되었을 그 이름이다. 이름이라는 개념 자체는 사실 박물학과는 크게 연이 없다. 한 존재가 속한 종목과 그 개체를 구분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름은 박물학적 세계관과는 오히려 대치되는 지점에 있다. 박물학은 무릇 개체를 보면서도 보편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러나 수많은 박물학자가 유령으로서의 이름에 매혹되어 그것을 탐구하려는 의욕을 내비친 바 있다. 나를 그 무리와 구별 지을 특징은 딱히 없다. 나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나를 박물학자라 부른다. 이름을 쓰지 않는 이름 매혹자 가운데에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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