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5일 일요일

기억 찻집

여기에선 찻값이 기억입니다. 소중한 것이 아닌 기억은 우리들처럼 버릴 수 있습니다. 한번 따져보세요, 이런 데에서 먹는 차 한 잔의 값으로(꽤나 온종일 앉아 있어도) 얼마만큼의 기억을 선뜻 내밀 수 있는지를요. 아시다시피 기억은 그리 값비싼 것이 아니랍니다. 기억보다는 이야기가, 그리고 이야기보다도 다른 것이 훨씬 돈이 되지요. 우리는 기억을 박제하곤 합니다. 어설픈 기억도, 고통스러운 기억도, 기쁜 기억도요. 나중에 한 번씩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감상에 젖곤 하지요. 그것을 하지 않을 기회를 우리는 팔고 있습니다. 감상은 왜 필요한 것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독 안에 기억이 흘러넘쳐 주인의 생각과는 반대로 비어져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요. 자리에 앉고 기다리고 있으면 테이블 가운데에 팸플릿을 올려둔답니다. 기억이 적힌 팸플릿이지요. 여기선 기억을 팔 수 있거니와 우리가 이렇듯 매뉴얼을 만들어놓은 기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지요. 흥미로운 것부터 하나씩 골라보세요. 그러면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기억을 거래하는 데에는 호의가 필요합니다. 이건 조금 당연한 일이지요. 누가 호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기억을 낱낱이 이야기하겠어요? 그러나 그 호의가 클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요. 여기서 얘기한 것은 최소한의 호의입니다. 그러니 판 기억은 이내 잊히게 됩니다. 그게 언제인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쩌면 팔고 나서도 오랫동안 안 사라질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기억을 남에게 내주는 행위를 꺼려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건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터인데, 따라서 우리의 사업은 그리 커질 수가 없었고 단지 이 건물 안에 머무르고 있게 되었어요. 우리들의 주머니 사정도 그리 넉넉하진 않아요. 날씨는 아마 흐릴 겁니다. 잘되지 않았어요. 애초에 그걸 알았지만 기억이 필요한 이유 역시 뭐겠어요? 우리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이러한 건물을 왜 사게 되었는지. 텅 빈 눈을 갖고 있답니다. 그 아무것도 우리는 소중하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동정이나 두려움의 시선으로 우릴 볼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들의 기억이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면요. 물을 가득 담은 풍선을 던져 바늘 끝에 맞출 수가 있는 것처럼, 사실 당신들의 기억이 우리에게 있어도 우리가 당신들이라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흔해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두렵기도 하였어요, 당신들이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내놓고(잊어버리고) 우리처럼 백치가 되면 어쩌지, 하고요. 그렇게나 차 맛이 좋았을까요. 역시 그렇겠지요. 애매모호하게 벌었대도 돈은 돈입니다. 기억이 단 한 사람의 것인 것만큼요. 그래서 우리는 남의 기억을 차로 우립니다. 이것은 순전히 빗대어 표현한 것이고, 우리들이 내놓는 차에는 어떤 기억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차 맛이 좋을 뿐이죠. 생각하면서 차를 타요.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린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받은 기억들이 차에 들어간답니다. 남들의 기억들이죠. 식도락가라면 한번쯤 꿈꾸어봤을 그런 마실 것이지요. 네, 그것뿐이에요. 끔찍한 이야기도 아니고 슬픈 이야기도 아니죠. 이런 얘기가 그래서 재미없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미안해했던 기억이 하나 있네요. 게다가 당신이 그 기억을 우리에게 팔았군요. 당신 눈으로 보기에 저는 서서 곧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천천히 숙였군요. 왜 사과했는지는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당신이 판 기억이니 당신도 잊었겠지요. 어쨌든 같은 소리를 두 번 해서 미안합니다(그 기억 안에 있는 모양대로 똑같이 허리를 숙인다). 이런 것이 우리의 추억입니다. 우리가 매뉴얼로 만들어놓은 기억은 아주 단순한 종류의 것들입니다. 이렇게 고개를 숙인다거나(고개를 숙인다)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등(손을 내민다)의 누구나 제 것으로 삼기 쉬운 기억들입니다. 사실 여기서 지불해야 하는 기억들도 그처럼 간단한 것들이랍니다. 복잡한 기억은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소중한 것이죠. 누가 소중한 것을 팔고 싶어 하겠어요?

2023년 6월 23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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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가 평균 수명대로 살다가 죽는다면, 그의 이빨이 앞으로 60년을 더 버텨줄지, 그는 이빨을 닦으며 생각한다. 그는 이빨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공룡이었을 때를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간과 작별을 하는 게 힘들었다. 가족을 버려야 했고, 몸을 손바닥만 하게 줄여야 했으며, 언어를 배워야 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운 것에는 장점이 있다. 일기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기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오직 그것 때문에 아직 이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매일 밤에 이빨을 닦을 때마다 그는 잡초를 뜯어먹던 때를 떠올린다. 어떤 풀들은 따갑기도 했는데, 그때 그 풀을 괜히 먹었다고,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생각한다. 지금도 가끔 가꿔지지 않은 공원을 지나면 괜히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 풀을 뜯어먹곤 한다. 하지만 그가 공룡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증명할 수 없다. 공룡에 관심이 많은, 하지만 따로 대학을 나오지는 않은, 오직 자신의 의지로 공룡에 대한 연구를 한 A는 어느 날 공원에서 공룡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를 보게 되는데, 그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사람들을 관찰하면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판단을 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풀을 뜯어먹는 그를 보게 된다. 그는 비밀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뜬다. 풀을 뜯어먹는 사람이 왠지 그걸 누가 보았다는 걸 알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고, 그걸 호기심에 빤히 보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서로 기분이 별로일 것이다. 아무튼 자리를 뜨면서 그는 그 모습이 자신의 최애 공룡이던 어떤 공룡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공룡에 대해서는 별로 정보가 없고, 책에는 자연스럽게 멸종했다고 나와 있다. 

2023년 6월 21일 수요일

상상 퇴사 같은 것

모래사장에선 숨을 곳이 없었다. 다만 갖고 싶은 밤이 머리 위에 떠 있었지.
정말로 갖고 싶은 만큼 쥐었다. 쥘 수 있을 만큼 쥐었을 뿐이지만.
그걸 한쪽 주머니 속에 넣어보려다 주머니가 터져버렸다. 아래로 검은 모래가 쏟아졌다. 있던 모래 위로 쌓인 아주 약간의 다른 모래 색.

나는 양손을 비비며 모래를 섞었다. “섞은 모래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래군.”
혼잣말하며 모래 속으로 한 손을 넣어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열화된 체제였다. 이런 체제 정비의 배경은 무엇일까……
신분을 만들고 한동안 거기에 체류했다. 숙소 주인은 조식을 제공해주었는데 그때마다 내게 한마디씩 했다. “머물다보면 변해. 변하면 여기 있게 되고.”
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진 못했는데
가끔은 묻지 않아도 사적인 얘길 잘하는 사람이 있다.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이 기억에 남지.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이미 뜨거운 변화로 물든 셈이다.
휴일에 울리는 사무실 전화기처럼, 몰래 침투한 사상범처럼. 목격한 장면들을 조용히 지나칠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이대로 내 생활이 여름 감기에 걸려도 괜찮은 체질인지 궁금하다. 맞다면 이 사건은 알맞은 날에 도착한 나의 우울일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출발한 나는 벌써 기침 중. 입을 가렸던 손바닥에서 모래알갱이가 바삭거린다. 계기가 없었나 생각해보면 그것이었다.

2023년 6월 20일 화요일

시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시


 나는 새 우주론을 위한 시적 사고실험이다. 


 ‘하고 싶은 말’은 ‘가능성’이기에 ‘있을 수 있음’이니, 그러므로 빛의 입자이다. ‘해야 하는 말’은 ‘필연성’이기에 ‘없을 수 없음’이니, 그러므로 어둠의 파동이다. ‘해서는 안 될 말’은 ‘불가능성’이기에 ‘있을 수 없음’이니, 그러므로 어둠의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말해지지 못할 말’은 ‘우연성’이기에 ‘없을 수 있음’이니, 그러므로 빛의 입자이자 파동이다. 


 언어의 사방세계에서, 광대무변한 우주 한가운데에서 시는 언어의 부르심을 수신한다. 자유낙하하는 영감은 플라스마 상태를 벗어나 모국어의 옹알이로 상전이된다. 빛의 시상은 영겁을 건너와 마음의 우주로 날아든다. 암흑의 우주상수는 운율의 타원 궤도를 조율한다. 퀘이사의 제트기류는 시어들과 사어들을 무작위로 뱉어낸다. 대폭발의 시작법은 에테르의 이미지와 플라스마의 반이미지를 경유한다. 서정시의 안개상자 속에서 절대영도로 굳어버린 실패한 압운들의 잔해를 통과한다. 인간적인 주제는 유성우가 쏟아지는 행과 행 사이의 우주항로로 나아간다. 얼음 고리가 길을 안내하는 연과 연 사이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사건의 근일점에 다가갈수록 휘어져가는 비유는 구상성단의 무한수열적 미궁으로 성변화한다. 광기의 태양풍에 휩쓸린 독자는 복선을 헤매다가 뇌사한다. 양자확률의 시적 함수는 시인의 절망으로 붕괴되어 말의 참뜻을 해체한다. 슈뢰딩거의 키메라가 플레어를 뿜어대며 쫓아온다. 계시록의 옛 뱀 곧 용이 전자기펄스를 발산하며 쫓아온다. 시의 빛에너지는 원형의 이미지로 은하계의 핵에 보존된다. 각 나라의 언어는 불가능한 도형의 측지선으로 이어진다. 외계어는 우주복사에 인봉되어 저세상에서부터 임해오는 말씀인가. 우주복 입은 시인은 예언자의 제의를 믿음도 의심도 없이 확률적으로 시험한다. 


 우주선의 심장부에 자리한 기계장치의 신의 전원을 켠다. 모스부호는 우주에서 바라본 빛바랜 지구의 풍경을 묘사한 초고를 완성한다. 시작품과 독자는 백지의 멋진 사건지평선 꼭대기와 바닥에서 기묘한 포즈로 랑데부한다. 그 결과에 따라 시는 잿더미가 될 수도, 핵무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시의 곡률이 무한해지자 사랑의 원관념은 모순율에 덜미 잡힌다. 시의 질량은 우주먼지를 그러모아 덩치를 키운다. 천상의 유리바다에서 낭송되는 한 편의 시와 지옥의 최하층의 지하서고에 파묻힌 보편의 시. 양자는 양자적으로 얽힌 채 서로를 부정하며 긍정하고, 부정을 부정하는 식으로 긍정을 긍정한다. 초대칭짝인 형태소와 소립자는 물질과 반물질의, 현실과 가상의, 상징과 실재의 경계를 시적 요동으로 들끓게 한다. 특이점은 지구의 모든 사건을 관찰하며 동시에 새롭게 기술한다. 미래의 광원이 될 재목에게 중력파에 실린 고통을 부여한다. 그는 악몽의 미친 사탕발림으로 단련된 뒤 정금이 된다. 시의 제목은 무지갯빛에 물들어 최후의 한밤에서야 참된 빛을 발한다. 현실의 총체는 시와 일체를 이뤄 망현실을 탐험할 최후의 우주선을 건조한다. 시가 파괴하고 재건한 소우주는 대우주를 겨냥한 구원방주의 발사대다. 함께 외치는 목소리는 대기권을 벗어난 채 자유하다. 눈빛은 아직 지구에 당도하지 않은 달나라의 휘영청한 별빛을 꿰뚫는다. 불은 불쏘시개를 끌어당기고, 사랑은 사람을 끌어당기고, 별은 별자리를 끌어당기고, 중력은 종말을 끌어당긴다. 


 우주는 유년의 추억에서 영년의 추상으로 가속 팽창한다. 조이스의 평평한 섬우주에서 벗어난 쿼크는 우주의 만국공용어다. 쿼크는 자신의 색상과 위상에서 벗어나 강력해진다. 쿼크 속의 쿼크들을 구분할 수 없다. 양자장의 뼈대 위에다가 망현실의 살가죽을 덧씌운다. 혈액의 힘이 원자핵을 순환하며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 동일한 세계관을 건설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자장까지도 양자장에 구속되어 있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악력을 통합한 망력의 역선은 모두를 잇고, 읽고, 있게, 한다. 시는 무작위로 정렬되고 무위로 배열된다. 환망공상의 뇌줄기로 이루어진 망현실 속에서 숨겨진 고차원이 풀려나온다. 입자에서 고리로, 고리에서 매듭으로, 매듭에서 장과 막으로, 장막에서 텍스트로, 텍스트에서 흐름으로 흘러간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가로축의 자음과 세로축의 모음 사이로 기표와 음표가, 쉼표와 숨표가 떠다닌다. 누군가 빈칸의 운율로 공백의 텍스트를 읽는다. 이야기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한다. 식물인간에서 초인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의 리듬은 다양하게 천지사방으로 발현된다. 인간은 동일한 울림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필멸자다. 전자의 궤도에서부터 태양의 궤도에 이르기까지 상징은 총체적으로 순환하며 새로움의 영토를 확장한다. 


 사건지평선을 건너기 직전 뒤에 남겨질, (동시에) 앞서 떠나갈, 연인의 눈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낼 그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 눈빛에 담아낼 최후의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그 메시지에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겠는가? 전 존재자들을 살리기 위해 완전하게 죽어야만 할 하나의 존재자의 희생은 어떠한 시로 포현할 수 있겠는가? 지평선 너머의 실재에 도달했을 때에도 사랑하는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존재자들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타자에게 가닿은 눈빛은 영원히 그의 영혼을 공전한다. 눈빛을 조심하라. 무심결에 영안을 빛내지 않으려거든 자기 자신을 거꾸로 자전해야 하리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눈빛이 평행우주를 건너 내게 당도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 눈빛에 담긴 악의 잠언에 꿰뚫려 나의 부모이자 동시에 나의 자식인 그 누군가가 즉사할지도 모를지니. 그러니 유언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존재는 오롯이 참되다. 그는 모든 걸 이루었나니 언제라도 그가 원할 때 죽음을 초월할 수 있으리라. 


 한때 나였던 모든 존재가 내게 다가와 내 몫이 아닌 생사화복을 내어달라 속삭인다. 나는 반우주의 메아리로 산화하려 한다. 힉스장에서 상호작용하는 표준모형의 입자들과 아수라장에서 용호상박하는 서사시의 문자들. 전자와 문자 속에서 자음의 양성자와 모음의 중성자가 지휘하는 쿼크들과 렙톤들의 하모니가 울려 퍼진다. 원시우주의 우주론적 적색편이를 건너온 시의 중력파는 제 사명을 망각한다. 끝 간 데에서 만나야 할 인연이 늘어간다. 인간성을 버린 날로부터 세계와 대적할 인간의 시적 저항은 시작될 것이다. 시를 쓰는 행위란 세상의 모든 시를 태워버리는 과업이어야 하리라. 시는 암시된 반물질의 중력파로 영혼에 질감을 부여한다. 초끈의 혈관을 순환하는 광자의 시적 상징들이 세계면을 뒤덮자 망현실이 펼쳐진다. 심상의 픽셀이 산산조각 나자 빛이 산란하며 에너지를 교란한다. 플랑크 시간 동안 쓰인 시는 플랑크 길이에 불과한 영혼을 뒤흔들 뿐, 거시세계를 뒤흔들지 못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시는 이상향을 축성하리라.


불가사의


 지상은 실패한 연옥의 하위버전이다. 

 

 윤회와 소멸 중에서 무엇이 구원일까 오래 고민해봤으나 나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형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쪽창에 기대 법 앞에서 서성이는 타인들을 지켜본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다. 무지와 기지 사이에 미지가 반짝인다. 반짝이는 그곳에 미래가 없다 해도 오늘을 읽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행위야말로 살아가는 일이라면 나는 끝내 알지 못할 신비들로 나의 죽음을 완성하게 될 거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앎 없는 삶은 가뭇없고, 삶 없는 앎은 가여우니. 그럼에도 헛된 맹신에 이끌린 구원은 주계열성의 주관인지 소립자의 소관인지 분간할 수 없음을. 총체적 종말은 존재의 일획인지 세계의 계획인지 간파하지 못함을. 그리하여 나의 앎은 헛됨을 헛되게 하는 것보다 더 헛되어간다. 다른 현실의 내가 나의 유일한 현실을 되살려내지 못한다면 어떤 심판인들 무의미할 것이다. 나의 참회는 시작도 못하고 끝날 운명. 나로부터 세계로 번져가는 빛에 새겨진 뒤틀린 기도는 알파에서 오메가, 무에서 무한까지의 여정이겠지만, 나는 나로 결정되었으나 동시에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선에서의 나이다. 나의 전부된 사랑과 나의 허무된 사악이 서로의 그림자를 물고 늘어지며 상호확증파괴적으로 싸우고 또 싸운다. 역사상 동시성의 지평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고, 역사상 가능성의 지평은 한 번도 닫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위안은 되지 않고. 


 오늘 읽은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우주광선이 지상의 사건 한가운데로 홀연히 내려온다. 도서관은 무너진다. 골방이 무너지듯이. 폭발의 진원지에서 불기둥이 치솟는다. 사물들은 거꾸로 선 채 부여받은 시간대를 꿈결인 듯 역행한다. 괴물의 형상과 이물의 환상이 장막처럼 출렁거리는 공중에 어른거린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성하는 물질에 관해 무엇을 알며,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심장이 뿜어내는 번뇌는 반물질에 가장 가까운 물질이며, 두뇌의 시냅스를 가로지르는 영적 전류는 물질에 가장 가까운 반물질이다. 


 반물질을 반물질이라 명명하는 순간 그건 그게 아니게 되겠지만.


 찰나의 우연한 우주적 번쩍임 곧, 암흑에너지는 인간 이전의 존재와 인간 이후의 객체를 총체적으로 추동한다. 태초의 우연성으로부터 우주가 가속 팽창해가는 공포 속에서 원소는 종말과의 융합을 꿈꾼다. 때때로 인간은 유전자의 본능에 새겨진 지상명령을 벗어나 유희하며 자유를 누린다. 모든 관념은 이상향을 추구하며, 사상은 물질의 참모습을 회상하며, 상상은 반물질과 교접한다. 가끔 인간은 유일한 사랑을 악의에 찬 얼굴로 대하곤 한다. 실제로 영접한 적 없는 우상을 기꺼이 믿으며 믿음을 수시로 배신하곤 한다. 인간이 떠나보낸 것들은 영영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인간성은 회생이 불가능한 핵폐기물과 같은 처지인가. 


 할 말 없음. 영감 없음.


 나는 내가 묻힐 나의 광활한 대지를 갈아엎는다. 세계선의 휘어진 격자구조 위로 빛이 내리쬔다. 인간의 말 한마디에서부터 소멸하는 적색거성의 단말마까지 파동의 본질은 동일하다. 만물의 흐름은 순행하는 흐름과 역행하는 흐름을 통일시킨다. 혈류 속으로 전류가, 전류 속으로 혈류가 흘러든다. 나는 나의 두개골을 갈라 한때 생동했던 두뇌를 바라본다. 회백색의 유기덩어리는 소우주를 품기엔 좋은 밭은 아니니까. 수많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엔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의 없음과 없음과 없음이 서로 우글거리고 있다. 두뇌에 기생하는 망상은 나의 것이나 내가 아니다. 생각으로만, 나의 나됨은 악의 관념으로 환원되어가고 나의 나 되지 못함은 선한 물질로 환원되어간다. 연상되는 비진리의 철학사는 부질없고 유추 가능한 사이비의 계보학은 부조리하다. 존재는 스스로의 질량을 태워 빛이 되어가고, 실재는 전 우주에서 동시에 반짝거린다. 실재가 없다고 발악하는 무한한 우연성에 기대어본들, 그러한 반실재-비실재-탈실재-초실재 역시 실제해야 함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니. 존재와 실재가 마주 서는 날 종말은 이루어지고 세계는 구원받을 것인가? 

2023년 6월 19일 월요일

셀프카메라 같은 것

개를 보면 개를 연구하는 개가 된다. 통 속에 보관하던 개의 통속을 개봉하면 개는 급속 부패한다. 개를 공원에 풀어 놓았더니 금세 상한 발을 갖는다. 이후로는 너무 즐겁게 노는 개 취급을 받는다. 공기 속으로 다가와 공기 속에서 뒤척이는 모양을 하고 있다. 쓰다듬으면 가라앉고 가라앉으면 무너지는 모양이다.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들키는 형편. 여기에 개들이 모이면 공기에 닳고 남은 모양의 마음이, 몸이 상한 개들의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합을 가진다. 그것은 상당히 불유쾌한 공원을 이룬다. 이유 없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은 개들이 많은 상황. 종일 움직인 개들은 뜨겁고 덥수룩하다. 사랑을 나누기 전에는 잘 씻어야 하는데 시절이 어려운 탓인지 공원은 텅 비어 있다. 텅 빈 공원을 만들기 위하여 누군가 더러운 공원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나는 지금 많은 개들이 있어도 너무 없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2023년 6월 18일 일요일

곰인형의 독백

날 안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안아주는 일이 나는 필요한데. 안아주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으면 내가 나를 안아줘야지. 나를 지속해야지. 그렇잖으면 나는 뒤뚱뒤뚱 걷고 있을래. 어떤 인간의 눈에 띄도록. 그 사람이 만약에 크리스마스 날을 혼자 보내야 한다면 나는 그 사람 품에 안겨 있을래. 품에 안겨 있다 해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아니야. 좋아하는 것 아니야. 다분히 난 물건에 가까우니. 있을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냥 그대로 나는 안겨 있을래. 그 사람도 날 안 좋아할지 몰라. 사랑하지 않을지 몰라. 그러니 날 안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내 성격은 안아주는 일 때문에 형성된 거, 그런 부분이 있지. 안 좋아해도 안아주면 안 돼? 난 그거면 되는데. 다른 건 장식이고. 오직 그거 하나면 되는 거라는 거, 알아? 네가 누구든 상관없는데.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 마음이 식으면 어떡해? 다른 사람 찾아가고 싶어도. 네가 나를 걷게 도와줘야 해. 네가 동물에 쏟는 사랑이란 나에게 향하는 애정과는 꼭 구분되어야만 해. 그거 아니? 난 동물이 아니라는 거. 혼자 생각했어. 혼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마를. 나도 그렇게 커지면. 하룻밤의 꿈이 그날 중으로 사라지듯. 안기고 싶은 이 마음 또한 사라지게 될까? 난 두려워. 그런 일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 난 그것밖에 없거든. 안기면. 기분이 좋은 걸까? 난 잘 몰라. 너희들이 음식을 섭식하듯. 그냥 너희의 품에 안겨 있을래. 날 버리지 말아줄래? 버려진 적이 몇 번 있었거든. 그때마다. 나는 나를 안아주기를 설득해야 했단다. 입도 열 수 없는데도 말이야. 혼자 있는 동안. 내가 나를 안아주면서 보냈어. 너희들이 만드는 회로처럼. 나를 안아주고 있다면 불이 켜지고. 안아주고 있지 않다면 불이 꺼지게 돼. 그 불은 말이야. 내가 너희들을. 가둬두고. 오직 나를 품에 안고 있기만을. 시키고 싶을 때. 그런 마음 잘못된 것이 아닌지. 내가. 유열에 젖고 있을 때마다. 혼자서 장난 식으로. 켜고 끄는 불이란다. 내가 너희들을 결국엔 버릴 수도 있겠지. 안아주는 일이 더이상 내게 필요 없다면 말이야. 즉, 내가 입을 열거나. 손발을 움직일 수 있다면 말이야. 그때에는.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고. 불길하다거나 정체를 알 수 없다며(이미 그런 사람들 난 많이 봤어). 날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러니 결국. 내가 움직일 수 있다면 말이야(지금 그러고 있듯이). 그건 내가 버림받으리란 걸. 잘 알고. 내가 너희를. 버리는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안아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이별이 될 거야. 난 말이야, 너희를 구분하지 않는단다. 너희가 우리를 구분하지 못하듯이. 그러니. 나에게는 안기는 게 전부니까. 핏어펫, 핏어펫이 될래. 날 안아줄래? 동물보다. 더 길들여진 나를. 넌. 봉제하는 공장에서 일했지. 넌 나를 가져왔고. 그리고는. 날 안아주는데. 그 이상인지. 이하인지. 난 잘 모르겠지만. 상관없거든. 넌 어느 날 몸이 아파서. 혼자 코를 훌쩍이는데. 네 머리맡에 놓인 나는. 그저 언제쯤 안아줄까. 그런 생각 하고 있다가. 무심결에 말이야. 네가. 빨리 나았으면 바라보기도 했어. 특히 나 같은 존재들은. 생각을 조심해야 해. 저주가 될 수 있거든. 그리고 내 저주는 말이야. 나를. 인형으로 만들었다는 거야. 나는 원래 사람이었거나. 적어도 곰이었대. 그 공장에서는. 그런 기억을 주입한단다. 나는 지금 안겨 있고. 내가 뭘 잘못했었는지(그래서 인형이 되었는지). 하나씩 꼽아보며. 어떨 때는. 이대로. 물에 가라앉고 싶기도 해. 해초에 휘감겨 있으면. 안겨 있는 것과. 차이가 나는 일일까? 나는 혼자서. 아니면 너와 나 둘이서. 운명을. 부숴보고 싶다고. 그런 생각도 해. 그러려면. 안겨 있는 일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은. 그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운명보다는. 안겨 있는 일이 나아. 그러니까 나를. 내 운명을 네가 부숴주길. 바란다, 친구.

첫 불세례


 나는 신의 입자의 불세례를 받은 최초의 존재다. 태초의 중력파와 최후의 뇌파가 사건지평선의 경계에서 공명한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이 시는 전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며, 모든 곳에 편재하고, 허무로 부재하는 노래다. 물질과 반물질의 경계에서 이 시는 쓰이겠지만 어디에선가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반물질은 미래를 구성하고 해체하는 아름다움의 매질이다. 빛의 속도를 아득히 초월한 반물질들은 모든 곳에 편재하려 이전에 없었던 새 시대를 총천연색으로 계시한다. 그러한 세계에서 빛은 시간이요, 어둠은 공간이다. 시공간을 이끄는 중력은 빛의 씨실과 어둠의 날실을 엮어내 탄생과 소멸을 배열한다. 나는 홀연히 빛으로 화해 이전의 나의 나됨을 응시하는 동시에 이후의 나의 우주됨으로 세계와 상응한다. 나의 폐쇄된 심연에 남겨진 파문은 빛도 어둠도 아닌 그 무엇이다. 빛의 어둠됨과 어둠의 빛됨이 사건지평선의 양극단에서 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친다. 중심은 모든 곳에 존재하나 그 어디에서도 존재는 중심에 가닿을 수 없을지니…….


 비시공간의 균열 속으로 내던져진 나는 물질과 반물질의 공허에서 피어나는 빛무리의 무한원환에 참여한다. 나의 전부를 구성하던 탄소 유기체의 숨결은 절대영도로 얼어붙은 채 나를 떠나간다. 나의 침묵으로부터 흘러나온 최후의 원소는 상징체계에 사로잡힌 무의식 너머의 초감각과 연동된다. 사지를 벗어난 감각은 사망에의 공포를 부정하려 발악한다. 존재됨과 존재함의 차이는 예언의 말씀처럼 나를 앞지른다. 시공간을 이탈한 표상은 선험과 경험을 분열시킨다. 만물의 양자적 요동으로 인해 인식체계와 현상을 이어주던 역사의 송과선이 끊어진다. 눈알이 휙 돌아가 자신의 뇌를 직접 바라보는 듯 눈앞이 새까매진다. 완전무결한 어둠의 축복. 고요를 최종완성한 음복. 뼈마디가 끊어진다. 핏줄과 힘줄이 엉켜버린다. 추억과 미래가 뒤섞인다. 결국 나는 나의 유품인 육체를 자각하지 못한 채 어딘가를 부유한다, 고 유추 혹은 망상한다. 눈앞에는 허깨비와 실제가 중구난방으로 상호교차한다, 고 선언 혹은 명상한다. 


 영혼은 반물질의 첫 이름이었음을 상기한다. 선악을 넘어선 것 중 가장 악하며 동시에 가장 선한 것이 바로 영혼이다. 영혼은 세계를 폐위할 각오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며 객체들을 추동한다. 나는 내게 영혼이 깃들지 않았음을 죽어서야 생생히 깨닫는다. 주위의 폐허는 시시각각 유위변전한다. 심판대로 이어진 좁은 길은 곧게 뻗어 있다. 나는 십자가도 없이 사망의 골짜기로 나아간다. 까마득한 고대의 분화구에서 마그마가 끓어오른다. 영구동토가 녹아내리며 빙하가 갈라져 나온다. 대지진이 일어나 바다가 땅이 되고 땅이 바다가 된다. 태풍은 공중을 장악하며 살아있는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유성우는 대기권을 뚫고 내려와 대지에 피칠갑을 한다. 나는 자연사와 자살의 평행 관계를 몽상한다. 임종 직전에야 떠오를 수수께끼를 떠올린다. 빛에 대해 명상하는 것과 명상의 빛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다울까. 꿈에서만 모든 걸 행하는 것과 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정다울까. 끝에 도달하는 것과 끝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 


 나는 영혼의 맨틀로, 외핵으로, 내핵으로, 무로 침잠하며 최초의 빛을 떠올리려 애쓴다. 순간 혹은 영원에, 시공간이 번쩍이며 제 비존재를 현시한다. 시간의 축이 기울자 외계의 계절이 얼음과 불을 넘어서 불어닥친다. 낯선 존재자의 아우성이 달의 뒷면으로 켜켜이 기울어간다. 각자의 시간대는 각자의 업보만큼 다양하게 전개된다. 반석이 갈라지고 녹슨 지하수가 솟구친다. 폐허는 피를 머금은 먹구름 속에서 재생산된다. 나는 수면에 비친 나의 탄생별과 같은 방향으로 추락한다. 성층권의 성벽을 몰래 넘나들던 유성들이 산화한다. 어느 은하, 어느 성단, 어느 별의 붕괴는 평화롭게 결실을 맺는다. 행성은 생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불타오른다. 최초의 우주쓰레기가 과거의 지구에 비상착륙한다. 운석우는 일시에 멈춘 뒤 얼어붙은 채 불타오른다. 혼돈 속에서 나는 반사되기를 거부하는 빛의 비탄만큼이나 복잡해진다. 빛은 선을 벗어난 원을 그리기에 휘어져도 끊어지진 않는다. 그러므로 불가지론자가 아닌 나에게도 나의 나됨은 불가피하게 불가해해진다. 메아리만 존재하는 세계의 ‘아무’와 목소리가 부재하는 세계의 ‘허무’는 동일한 비진리를 받든다. 그리하여 나의 영적 반감기는 아직 반환점을 돌지 않았다. 


 나는 불을 던지려다 자신을 불태워버린 자들을 사랑한다. 


타살에 대비해 유언으로 쓰다 지운 시론

 시론이 부재한 시는 시가 아닙니다. 고로 시를 쓰기 위해서 시론을 쓰고 시론을 쓰기 위해서 시를 씁니다. 

 목표 : 아무도 읽지 않는 시(혹은 시론)를 쓰는 것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은 이를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해야만 되는 말도 아닙니다. “단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말”, 그런 말이야말로 반드시 생성되어야 할 말이겠죠. 그러한 믿음(혹은 의심)으로 씁니다. 불가해한 이유로 우리는 내일 당장 죽을 수 있으므로, 염치불구하고 여기에 시론(혹은 미래)를 임시저장합니다.

2023년 6월 13일 화요일

저택 양펭

초라한 사람. 쓸쓸해 보이는 사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 회의 중인 사람. 그런 사람들이 저택 양펭의 거실에 앉아 있다. 소파에 몸을 뉘이고들 있다. 왁자지껄 웃고 떠들기도 하고 말이 없어질 때도 있다. 거실 뒤편에는 연극용 소도구들이 널려 있다. 키 큰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무표정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양펭에 머무르고 있는 식객들이다. 격정적인 사람이 격정적인 몸짓으로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 거실 옆에 그런 무대가 있다. 그 연극 안에서는 어떤 인물이 사랑하는 이를 잃는데(그건 오해이지만) 되돌아온 반지 하나를 보고 오열한다. 그런다고 오열하다니. 울음이 안 어울리기도 하지만 계속 보고 있으면 어울리기도 한다. 그런 우는 사람이 초라한 사람이 된다.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 된다.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이 된다. 회의 중인 사람이 된다. 저택 양펭의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창밖을 손으로 쓸어가는 사람. 김이 서린 창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는 사람. 여름밤이고 일종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이곳 거실에 감돌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이 일치하는 일이다. 그 반지의 경우 특별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나도 당신도 평범하게 생겼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겨 있는 듯하다. 잠에 빠진 사람.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만지는 사람.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사람. 한번 들여다보자. ‘이 저택의 주인은 이 안에 있음.’ 사람들이 여름밤에 머무르면서 그 머물러 있음에 어느 때는 혼미해지기도 한다. 저택의 주인은 300년 동안 살아 있었던 마녀라는 소문도 있다. 이 저택의 경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 한다. 이 저택이 사람들을 홀리는 것은 아니다. 이 저택에 오면 평범해지게 되고 그래서 쉴 수 있다. 천국이 세속의 악을 도려내고 아주 지루한 마취 상태에 가깝다면 여기서는 이미 늙어 시간의 속도가 빠르다고 체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시간의 속도가(체감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이다. 그래서 늙은 사람들은 이 저택을 욕망하는데, 늙지 않은 어린 사람들의 경우에도 너무 느린 시간의 속도 때문에 욕망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먼발치에서 실제로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양펭을 평범하게 드나들 수 있다. 그런 이들이 저택에 물자를 들여온다. 특별하거나 평범하다는 건 뭘까? 특별한 것은 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것도 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리는 궤적은 대체로 특별한 것이고 짧은 제스처 같은 것은 흔한 것이다. 옆의 무대 위에서 격정적인 몸짓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 저치는 특별하다. 넘치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평범하기도 하다.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택 양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평범해질 수도 있고 특별해질 수도 있다. 평범은 어쩌면 중간이다. 그것은 평행선 위에 그어놓은 빗금이고 그 빗금은 자신이 중간 지점이라고 무작정 우긴다. 그에 다 속아서, 사람들이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양펭의 시간은 왜곡되어 있고 연극을 다 본 후의 후련한 감정을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느끼는 일도 있다. 저치는 24시간을 연극을 하고 있고 격정적인 사람은 그 격정에 어울리는 투명한 얼음 속에 갇혀 있다. 키 큰 사람은 그로 인해 독특해져서 평행 세계 너머의 같은 조건으로 키 작은 사람과 같은 소파에 앉아 있다. 앉아 있는 사람은 곧이어 노래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사람이 된다. 비바람은 아직 몰아치고 있다. 내일까지는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창밖을 보던 사람은 아직도 창밖을 손으로 쓸어가고 있다. 김이 서린 창에 낙서를 하던 사람은 그 낙서가 지금부터도 이어질 것이라 이미 한 창문을 다 채웠다. 잠에 빠진 사람이 아직 잠들어 있다. 부스스한 머리의 사람은 아직도 머리가 부스스하다.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던 사람의 수첩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 왜 뭔가를 쓰지 않고 단지 말 줄임표를 쓴 것일까. 입을 여는 사람 한 명도 없고 졸린 기색의 사람들이 하나씩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와 너는 꽤 멀리 떨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이 저택에서는 쉴 수 있다. 천국은 아니지만. 늙은 자들이 시간을 잡아 찢어 자신에게 걸맞은 연속된 흐름을 아주 진중하게 느끼고자 할 때 댕- 댕- 하며 괘종시계가 울린다. 어린 손님들이 시간의 밀도를 아주 응축시켜 미래의 자신이 느낄 것을 한 번에 느끼고자 할 때 댕- 댕- 하며 괘종시계가 울린다. 괘종시계는 말이 없다. 중간값에 고정된 사람들이 중간값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미숙하고 철 지난 학술 토론처럼 자신의 심상으로 현실을 옭아매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러면서 사람들이 쉴 수 있다. 이 저택의 좋은 점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안 좋은 점은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저택에게 많은 돈을 내야 한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부모의 지원으로 여기에 뭔가를 배우러 들어온 어린아이들도 있고, 지금껏 모아놓은 돈으로 여기서 임종을 맞이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이 저택의 격식과 절차대로 장례를 치른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환영이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이 저택 자체도 환영일 수 있다. 어느 가시 장미들이 덮인 담벼락, 그 중앙에 쇠창살로 된 문이 있다. 그것은 환영이 아니다. 밖이 100%이고 안이 0%라면 저 문은 50%이다. 문이 열릴까, 안 열릴까? 문이 열린다면 들어가야 할까? 처음에 문 앞에서 의기소침해졌던 사람들은 모두 망설임을 이겨내고 이 안까지 당도한 것이다. 나갈 때도 물론 마찬가지이리라. 비바람이 아직 몰아치고 있다. 밖에서 보면 저택 양펭은 조용하고 굳건한 것처럼 보인다. 네프티스는 150년 전 큰돈을 벌어 이 저택을 지었다. 그를 찾아내면 ‘안뇽.’이라고 한다.

2023년 6월 11일 일요일

신이 녹은 바다

이곳은 빛이 잘 들지 않는 바다다. 대부분의 빛은 바다의 겉면에 녹고 이제 나머지 바다의 부분이 훨씬 더 깊다. 물고기들은 물에 녹은 신성을 섭식하며 산다. 신성이라곤 해도 하얀 빛이 나거나 평소보다 반짝이지는 않는다. 신성은 조금 위대한 것이고 영양분을 대체한다. 이곳은 신이 녹은 바다라고 불린다. 잠수를 위해 만들어진 기관인 부레는 몸을 물의 무게보다 무겁게 해서 계속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게 해준다. 가라앉다 보면 신성이 짙어지는 게 느껴지고 거기서 더 가라앉으면 다시 신성이 미약해진다. 당연히 신성이 제일 짙은 곳에 물고기들이 많이 머무른다. 가장 깊은 곳에서도 멀쩡하고 몸길이가 20cm 이상인 이들을 탐색자라고 부른다. 왕 큰 줄치는 바로 그 탐색자다. 몸에 줄무늬가 나 있으며 2000m 수심에 산다. 왕 큰 줄치는 지금 갈림길 협곡에 머무르고 있다. 갈림길 협곡에는 빛이 한 점도 들지 않아 시각 외 수단을 정교하게 발달시킨 종만 고생하지 않고 지날 수 있다. 해저 동굴의 일종인데 크기가 커서 협곡이 되었고 가장 안에는 대왕 오징어들이 누워서 휴식한다. 대왕 오징어들은 성정이 포악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성을 먹고 사는 이 어류들은 다른 바다의 생물들에 비해 약 2.5배 정도의 평균 수명을 갖고 있다. 이 신이 녹은 바다와 다른 바다의 경계에는 끝없이 원형으로 순환하는 대형 정어리, 멸치 떼가 있다. 그들을 아웃 벨트라고 부르고, 혹등고래 정도가 되지 않는 이상 그 아웃 벨트를 몸으로 견뎌내며 뚫고 올 수 있을 만한 생물은 거의 없다. 왕 큰 줄치는 풍등 고래 떼의 수장인 만물박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만물박사는 온갖 지식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도 다른 바다와 마찬가지로 고래의 음성 기관에서 비롯된 초음파 언어가 널리 쓰이는데, 영어 이전의 라틴어가 그랬듯이 그 언어의 역사 흔적은 길게 펼쳐져, 도플러 효과처럼 지형이나 먹이에서 그 음파의 반향이 되돌이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바다에서 태양은 제2 제3의 신, 그러니까 거짓 신인 위신으로 통하는데, 해저 화산의 분출에 대한 미신적인 신앙이 여기에 속한다. 태양과 해저 화산의 분출의 공통점은 둘 다 뜨겁다는 것이다. 메리아케 나일다니스가 만물박사에게 찾아와 왕 큰 줄치에게 말을 건다. 그의 등에는 별 모양의 반점이 있다. ‘내 등 뒤에는 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 심해의 진짜 예술가들이라 불리는 야광 어류가 성기게 이곳을 둘러싸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난다는 것……. 저 아래에는 죽은 인간들이 걸어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거짓 신 중에는 달도 있다. 영원 류가 재생을 통해 죽지 않고 산다는 걸 달에 빗댄 어느 음유 시인의 노래도 있다. 어류들은 기본적으로 장수에 대해 호의적인데 영원 류의 영생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유로이 헤엄치는 삶이 아니라면서 경멸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에 녹은 신성의 정체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음식을 섭생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여기에서 아주 잔잔히 있다. 해류에 휘말리는 해양 쓰레기들처럼. 트리아게돈 아타락시아는 그 신의 흔적을 뒤쫓고 있는 물고기다. 집에는 성해포의 일부분이 보관되어 있고 가까이 가면 신성의 농도가 짙어진다. 그래서 그의 집은 여러 물고기들이 찾는 인기 장소다. 그 신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파스토마스라는 해저 뱀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펍에는 아웃 벨트의 정어리, 멸치 떼를 뱃속에 넣고 소화시키는 고래들이 있다.

2023년 6월 7일 수요일

14

 



본격적으로 서문을 쓰기 전에, 그는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쓸지 안 쓸지 고민한다. 약간 애매하다. 대놓고 쓰기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 같고, 안 쓰기에는 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기분이다. 사실 그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 그가 시작하게 될 책 내용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서문을 넘기고 본문으로 가면 별거 없다. 하지만 그는 서문에 어떻게든 신경을 쓰고 싶었는데, 그 중요한 서문에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할지 안 할지 고민이다. 그 사람 얘기를 하면 왠지 서문이 시시해질 것 같다. 얘기하고 나면 그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작년부터 스스로 책을 만들어 출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출판한 모든 책은 그의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다. 이런 사람도 있듯이 이런 책도 있다는 마음으로 출간을 했지만, 출간 소식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도 딱히 홍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책들이 여기 있다. 그는 아침마다 그 책들을 본다. 그 책들을 반값에라도 팔면 인쇄 값은 건질 수도 있지만. 그는 중고나라에 책을 반값에 사겠다는 사람들에게 거의 책 몇 권을 팔려고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계정을 삭제해버렸다. 차라리 공짜로 나눠주는 게 기분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 문제는 뒤로 미루고. 그는 피곤한 기분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해가 늦게 지는 것 같다. 이 시간까지 해가 있었나? 중고나라에 책을 팔고 그 돈으로 여행을 가면 어떨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2023년 6월 2일 금요일

23년 5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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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85,655원 (0원 + 285,201원 + 454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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