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0일 화요일

문학

내면성이란, 어떤 위해나 폭력 혹은 속임수, 혹은 권력에 의해서도 침해받을 수 없는 한 개인의 권리와, 그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 제도를 말한다. 외면성이란, 한 개인에 의해 실행되지 않은, 자연물과 재난 같은 성격을 띤다. 결국에, 어떤 사람이 원하는 바나 하는 말을 가감 없이 들을 능력, 그것이 상실된 경우에 내면성의 부재라 말할 수 있고, 혹은 이것에서 어긋나게 되어 타인에게 실수를 저지른다면(이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개인 간 관계의 제대로 된 성립이 아니다. 혹여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순수하게 면책된다. 이 면책됨의 성질을 의식하여 일부러 외면성의 성격을 띤 행위들을 할 수 있고, 이에는 만약, 타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한 경우,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도 눈감아버리는 일이 정당화되어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실제로 피해자는 남아 있는 것이다.

보다 순수한, 혹은 발전된 내면성에 있어서 그러한 피해자가 남아 있는 일, 혹은 기억하고 있는 일 등은 한 개인의 책임 있는 발화와 행위로서 그곳 근저에 자리 잡아 사회적인 실권을 형성한다. 이 사회적인 실권에 대하여, 어떤 식의 침해 행위도 있을 수 없다. 이는 법으로써 보장하고 있는 내면성의 보호 관련으로 인해 이르게 되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귀결이다. 이 사회적인 실권에 <이끌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계속 거기로 되돌아오게 됨을 의미하며, 살아 있는 개인이 아닌 그의 발화나 행위에 묶여 있는 경우이므로 제대로 된 주체 간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적인 실권을 다루는 한 개인의 책임 있는 행위들, 곧 내면성의 발현은 어떤 식으로든 지탄받을 수 있다. 이것은 꽤나 애매모호한 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개인은 거부했을 뿐인데, 그 거부라는 행사가 실로 책임 있는 내면성의 발현이므로 사회적인 실권으로까지 즉시 형성되는 것이다. 갖가지 난립하에 형성되는 이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말과 행위들, 실로 그 수준에 있어 근본적인 격차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말과 행위들의 낙차>들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문학과 다를 게 무엇인가?

다를 게 무엇인가? 문학은 이름 없는 것이다. 반면 이 <말과 행위들의 낙차>들은 그 이면에 있는 것들로서 단지 기능과 효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가? 여기에서 문학이 <말과 행위들의 낙차>가 아니게 되려면 그러한 기능과 효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것을 거부하거나 무화시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 <말과 행위들의 낙차>들은 아니어야 할까? 혹은, 둘 사이의 동일성이 성립하지 않거나, 내면성이 있어야 할까? 이것은 다시금 내면성의 작동 원리와 같은 것으로, 곧 내면성이 있으려면 그것은 내면성으로써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단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한 개인의 독립적이고 가치 있는 의견을 형성하는 것이다 라고, 자연물과 재난 같은 것들, 에서 동일시되지 않고 있고, 구분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법 조항과 같은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한 항거 의견이 되기도 하고, 준수하자는 사람들의 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규정하고 설명하며, 묘사해내고 있다는 의견은 일견 타당하다. 결국, 바로 이러한 외부적인 조건에 의하여서 <문학>이라는 이름 없는 것과 <말과 행위들의 낙차>는 구분되고 있는데,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 있어서 그러한 조건과 접촉이 가능하다면 언제 어느 때에라도, <문학>과 <말과 행위들의 낙차>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곧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있음을 뜻하며, 다시금 내면성을 규정하고 있는 총합들과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이것을 <자의성>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자의성>이란, 보장되지 않으나 내면성 및 외면성에 근거하여 판단되지 않고, 사회적인 실권과도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자의성은 단순히 생명이 있는 것만이 아닌, 생명의 위에 있음을 뜻하고, 이는 권력이나 갈등, 충돌 관계가 아닌 휩쓸려 다니지 않는 개인의 가치 있는 기억과 의식이다.

2021년 3월 29일 월요일

장난감 권총

누가 내 머리 뒤에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그 권총이 환상 같지는 않았습니다. 탈칵, 하는 권총의 공이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나고 나는 약간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권총은 장난감 권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총을 들고 나의 머리 뒤에 겨눈 것은 내 친구였습니다. 내 친구의 이름은 이나테입니다. 그가 권총을 내 머리 뒤에 겨눈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심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군요.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이유는 내 머리 뒤에 권총을 겨누고 있는 이 상황에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일까요. “꼭 진짜 같아.” 내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뭐.” 드디어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습니다. “이거 진짜 권총이야?” “아니, 장난감 권총이야. 네가 좋아하는.” 그랬습니다. 나는 장난감 권총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겉보기에는 진짜 권총 같고, 권총이 발사될 때 BB탄이 튕겨 나오는 딱, 딱, 하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앗, 따가워라! 그가 내 머리에 겨눈 권총을 발사했습니다. 진짜 권총은 아니지만 실제로 BB탄을 맞아보니 이것도 꽤 아프군요.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왜 이런 장난을 했니.” 그가 말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따가웠지? 이건 너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야.” 무엇을 일깨워 준다는 말이었을까요. “무엇을 일깨워 주려고?” “장난감 탄환이라도 맞으면 아프다는 사실. 넌 오늘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어. 넌 모를지 몰라도.” “미안해.” 나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권총이 정말 진짜 같구나.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그런데 그걸 맞았을 때는 꽤 아팠어.” “그래.” 그가 말했습니다. “권총을 맞아본 기분은 어때?” “장난감이지만.” 내가 말했습니다. “네가 왠지 좀 차가워 보였어. 말해주렴. 네가 왜 상처를 받았었는지.” “안 말해줄래. 왜냐하면 장난감이지만 네가 이 권총을 맞았으니까. 내 마음은 풀렸어.” 그렇다는군요. 하지만 난 궁금한데. 나는 웬만하면 저 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잘 안 하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파이를 구우려고 하는데, 너도 먹을래?” “그럼, 좋지. 넌 파이를 맛있게 구우니까. 하지만.” “응?” “미안하다는 말은 한 번 들어야겠어.”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시 권총의 공이를 잡아당겨 탈칵, 하는 소리를 내곤 내 머리에다 다시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이거 별로 안 아프다는 걸 나도 이제 아는데.” 그가 말했습니다. “됐으니까 빨리 나한테 사과해. 이게 어디서 넘겨 먹으려고.” 난 사실 남에게 사과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래도 저 권총을 또 맞기는 싫으니 빨리 난 말했습니다. “미안.” 그가 말했습니다. “이제 빨리 파이 구워 줘.” 네, 네.

2021년 3월 26일 금요일

필자 모집 홍보 문안

팀 블로그 ‘곡물창고’가 ○○○○(*새천년, 2사분기, 노동절 등)을 맞아 새로운 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곡물창고는 구글 블로거(Blogger.com) 서비스를 기반으로 합니다. 곡물창고의 필자는 스스로 정한 연재 기획에 따라 자신만의 태그를 정하고, 1계절에 1편 이상의 글을 업로드(‘입하入荷’)합니다. 필자들이 함께 연재하는 태그도 있으며, 함께 연재하는 태그를 직접 만들 수도 있습니다. 참여할지 말지는 각자의 뜻에 달렸습니다. 곡물창고는 기본적인 규칙과 틀, 상호작용의 가능성만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필자들은 ‘왜 굳이 팀 블로그여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곡물창고의 필자가 되려 하나요?

노동자와 산업예비군, 문예인과 생활인;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개인블로그는 좀 아닌 것 같고 다른 마땅한 공간도 없으신 분, 딱히 보여주고 싶은 것은 없지만 필히 쓰고 싶은 것이 있으신 분, 공짜 볼거리 제공에 관심이 있으신 분, 뭐든 판매해버리는 시대에 의식적으로 역행하고 싶으신 분, 돈 받는 원고 말고 돈 안 받는 원고도 써보고픈 이상한 기분이신 분, 연재 양식을 직접 기획 체험해보고 싶으신 분, 계절 마감의 장기적 압박을 원하시는 분, 가이드라인이 없이도 안심 콘텐츠(아슬아슬도 OK) 작성 가능하신 분, 콘텐츠라면 이제 신물이 나시는 분, 더는 잃을 것이 없으신 분, 뭔가 잃을 것이 많으신 분; 필자 자격으로의 자유로운 드나듦, 단타 연재 및 단편 게재도 환영, 전문가의 교정 서비스 제공, 최고의 정예 독자진(바로 당신) 완★비.

곡물창고 필자 등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단 하나의 자격 요건은 곡물창고의 독자가 되는 것이며, 다만 자신이 통과하거나 하지 않게 될 다음의 관문들이 있습니다.

1) 사용조례를 1회 이상 읽었는가?
2) 필자 등록 절차를 끝까지 마무리했는가?
3) 필자 등록 후 연재를 시작했는가?
4) 연재 소개 작성 이후 3편 이상 연재했는가?
5) 완결을 냈는가?

곡물창고의 필자로 등록하시겠습니까?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 이메일 또는 알림판으로 DM·멘션 주십시오.

2021년 3월 25일 목요일

놀이공원

놀이공원에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에서 나는 회전목마를 탔다. 회전목마를 타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쳐다봤다. 해가 너무 쨍쨍해서 고개를 완전히 다 치켜들 수가 없었다. 회전목마에서 익숙한 클래식 선율이 들려 왔다. 회전목마가 끝나고 나는 왼손에 장난감, 그리고 오른손에 클러치 백을 들고 잠시 서 있었다. “놀이공원에 정말 아무도 없군.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나는 듣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서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놀이공원 중심부에 있는 식당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경양식 돈까스를 하나 시켰다. 놀랍게도, 식당 안에는 대여섯 명의 종업원들이 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돈까스를 시키면서 나는 종업원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아무도 없더라고요, 놀이공원에... 그래서 혼자 클래식 선율을 들으며 회전목마를 타고 온 참이랍니다.” “아” 하고 이십대 후반 남짓 되어 보이는 종업원이 말했다. “가끔 그런 분들이 계세요. 자유이용권을 끊고 입장했는데(그래서 사람들이 많을 거로 기대했는데) 그럼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텅 빈 놀이공원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고 말하시는 분들이요.” “가장 최근에 그런 사람이 나타난 건 언제쯤이던가요? 그리고 이 식당만이 특이하게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에서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글쎄요. 9개월 전쯤에 그런 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만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최소한의 인원은 필요해서가 아닐까요.” “게다가” 그가 말했다. “음식을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곧 괜찮아질걸요? 전에 오셨던 분도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속에 뭐가 얹힌 것처럼요. 곧 내려가겠죠.” 식당에서 돈까스를 먹고 터벅터벅 걸어 나온 뒤 약 십 분쯤이 지나자 다시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으나 이 이후로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을 터벅터벅 걷는 기분. 그것은 그리 유쾌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그 기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관람차를 타고, 또 아쉬운 마음에 롤러코스터를 탔다. 한결 아쉬움이 덜해졌다.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놀이공원에 잘 도착했으며, 자유이용권을 끊었으니 해가 어두워질 때까지 놀다 가겠다고 말했다. 다시 하늘을 보니 아까 전보다 태양의 열기가 조금 덜한 것 같았다.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가느다란 원통에 사탕들이 들어 있고 손잡이 부분엔 날개가 달려 있다.

2021년 3월 24일 수요일

악몽 수집가

△월 ○□일

그의 머리맡을 꿈전등으로 비춰봅니다. 저런, 나쁜 꿈을 꾸고 있네요. 그는 꿈속에서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어요. 탑승 중이던 배가 난파되었는지 배의 잔해들과 함께 표류하고 있네요. 저 악몽을 더 꾸게 두었다간 그의 내일은 뱃멀미하는 것처럼 온종일 어지러울지도 몰라요. 그의 머리맡에 진정의 향수를 뿌립니다. 그의 꿈속에 일던 풍랑이 잦아들고, 그의 표정이 점점 편안해지네요.

악몽 수첩에 그의 꿈을 기록하고 떠납니다. “표류하는 꿈.” 오늘도 한 건 해결!


○월 □△일

그의 머리맡을 꿈전등으로 비춰봅니다. 저런, 나쁜 꿈을 꾸고 있네요. 그는 불타는 집에 갇혀 있어요. 불이야! 하고 외치고 싶지만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네요. 어떻게든 소리를 내보려고 용을 쓰는 모양인지, 현실 속 그는 으… 어… 으… 으… 하고 괴로운 신음 중이에요. 저 악몽을 더 꾸게 두었다간 내일 그의 목은 완전히 잠겨 있겠죠. 그의 머리맡에 진정의 향수를 뿌립니다. 그의 꿈속에 소방대가 출동하고, 그는 온몸이 젖은 채 소방대원에게 구출됩니다. 고맙습… 니다. 잠꼬대이지만 저한테 하는 인사라고 생각하니 뿌듯하네요.

악몽 수첩에 그의 꿈을 기록하고 떠납니다. “불타는 꿈.” 오늘도 한 건 해결!


□월 △○일

그의 머리맡을 꿈전등으로 비춰봅니다. 저런, 나쁜 꿈을 꾸고 있네요. 그는 꿈속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그가 방문을 잠그고 나와도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벽을 뚫고 쫓아옵니다. 쫓기고 쫓기다 벼랑 끝이네요. 저 악몽을 더 꾸게 두었다간 그의 이부자리가 축축하게 젖을 수도 있겠어요. 그의 머리맡에 진정의 향수를 뿌립니다. 갑자기 그의 어깨놀이에 날개가 돋아나네요. 그는 날아서 검은 정장들을 따돌립니다. 하늘을 나는 기분 어떤가요?

악몽 수첩에 그의 꿈을 기록하고 떠납니다. “쫓기는 꿈.” 오늘도 한 건 해결!


△월 □○일

그의 머리맡을 꿈전등으로 비춰봅니다. 저런, 나쁜 꿈을 꾸고 있네요. 그는 꿈속에서 다른 시대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걸 현재의 자신으로서 지켜보고 있어요. 현재의 그는 다른 시대의 그에게 다가가 그를 위로하려 하지만, 다른 시대의 그 또한 그이기에 위로는커녕 그 슬픔이 시대를 넘어 현재의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저 악몽을 더 꾸게 두었다간 그의 눈언저리도 쓰라릴 테고, 밖에 나가기 민망할 만큼 눈이 퉁퉁 붓겠죠. 그의 머리맡에 진정의 향수를 뿌립니다. 다른 시대의 그가 그 시대를 초월해 미래 시대의 연인이 되어 미래 시대의 그와 만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그는 다른 시대의 그들이 서로 다른 시대에서 나고 죽고 경계를 넘어 순환하며 다시 만나게 되는 합일의 이치를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꿈인지…….)

악몽 수첩에 그의 꿈을 기록하고 떠납니다. “헤어지는 꿈.” 오늘도 한 건 해결!


○월 △□일

광합성 중입니다.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거의 눕듯이 앉아,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습니다. 베란다에 식물들이 많아요. 물을 잘 주는데도 조금씩 썩어가는 것 같습니다. 물을 너무 많이 준 탓일까요? 머리가 맑지 않네요. 생각을 밝혀주는 차를 마셔도 효과가 없습니다. 진정의 향수라도 뿌려보려는데… 늘 넣어 다니는 주머니 속에 향수가 없네요. 어디에 흘린 것일까요?

그리고 깜빡 졸았던 모양이에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월 □□일

그의 머리맡을 꿈전등으로 비춰봅니다. 저런, 나쁜 꿈을 꾸고 있네요. 그는 악몽 속에서 악몽을 꾸고 있어요. 어려운 경우예요. 악몽의 이유를 알아야 악몽을 다스릴 수 있으니까요. 마침 진정의 향수도 아직 찾지 못했네요. 이럴 때는 꿈의 문지방을 밟아 꿈속으로 직접 들어가야 해요. 악몽의 원인을 찾아 제 손으로 직접 없애는 수밖에 없죠. 

악몽 속에서 악몽을 꾸고 있는 그의 악몽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의 악몽 속으로 들어갑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그를 발견했어요. 그의 머리맡을 꿈전등으로 비춰봅니다. 저런, 나쁜 꿈을 꾸고 있네요. 악몽 속에서 그는 악몽을 꾸는 악몽을 꾸고 있어요. 이러면 또다시 꿈의 문지방을 밟아 더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많이 어려운 경우예요.

악몽 속에서 악몽을 꾸는 악몽을 꾸고 있는 그의 악몽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의 악몽 속의 악몽 속으로 들어갑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그를 발견했어요. 그의 머리맡을 꿈전등으로 비춰봅니다. 저런, 나쁜 꿈을 꾸고 있네요. 악몽 속에서 악몽을 꾸는 악몽 속에서 그는 악몽을 꾸는 악몽을 꾸고 있어요. 이러면 또다시 꿈의 문지방을 밟아 더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아주 많이 어려운 경우예요.

악몽 속에서 악몽을 꾸는 악몽 속에서 악몽을 꾸는 악몽 속에서 악몽을 꾸는 악몽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네요. 이 악몽은 몇 겹의 악몽인 걸까요? 저는 그의 악몽 속의 악몽 속의 악몽 속의 악몽 속의 악몽 속의…… 악몽 속을 헤집다가 악몽의 원인을 찾기도, 악몽에서 헤어나기도 포기한 채 악몽을 꾸고 있는 그의 곁에 모로 누웠습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죠.


“당신은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이 악몽에서 깨어나게 된다면 당신의 악몽 속에 갇혀 있는 나도 악몽과 함께 사라지게 되는 걸까? 마치 처음부터 내가 당신의 악몽이었던 것처럼?”


어느 지옥에서 헤매느라 듣고 있지도 못할 그에게 나는 오래오래 소곤거렸어요.




*엄주, 『악몽 수집가』.


검열사

이것은 단순한 社名을 넘어 하나의 신사업 모델이다. 잘 들어 보라. 요지는 간단하다. 우리 ‘검열사’는 상시 원고 투고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투고작에 대해 1개월 내로 리뷰를 보내준다. 우리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 몇을 리뷰어로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성공할 것이다). 어차피 글값이 똥값이라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흔하게 작가일 수도, 뭐시기 비평가일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만 명 중에서 세 명 정도는 알 만한 사람들이어야 된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댔다. 우리는 공개적이다. 리뷰의 양은 A4 반 바닥? 한 장? 두 장? 리뷰어 쪽에서 분량을 선택하는 것도 좋겠다. 리뷰해줄 사람을 투고자가 지목할 수도 있다. 당연히 투고비를 받는다. 투고비는 각 리뷰어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받을 만한 고료를 고려하여 아주 적절하게 책정되어 있다. 만약 그 리뷰어가 도저히 뭔가 써주지 못하겠다면 투고비의 95%를 환불해준다. 5%는 읽어준 데 대하여 낸 값이다. 물론 우리 검열사도 아주 약간의 수수료를 받아야 한다. 구체적인 숫자들은 절충하면 된다. 투고자는 단순한 감상문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리뷰어의 뜻에 따라 일종의 첨삭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 강의... 강의 같은 번거로운 절차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원한다면 누구나 검열사의 리뷰어로 등록할 수 있다. 리뷰어 등록을 위한 페이지와 등록한 리뷰어 모두를 볼 수 있는 페이지도 마련되어 있다. 리뷰어로 지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만약 만 명 중에서 여덟 명 정도가 당신을 안다면, 힘들게 출강 같은 걸 하느니 이걸로 소일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당신이 유명하지 않고 내세울 것이 없더라도 좋다. 자신감을 갖고서 어필이 되는 프로필을 만들면 된다. 사진도 좋게 찍고! 아니면 그림이나 뭐 그런 걸 사용하든가. 일단 무료 리뷰로부터 출발해보자. 투고자의 책 출간은 어떻게 하냐고? 되면 하는 거고... 안 하는 편이 낫겠지만... 누차 말하는데 그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이 나와바리에서 최고로 진솔한 모델이다. 우리는 독자를 판매할 것이다.

2021년 3월 23일 화요일

장갑

그리고 스피커는 다시 얼음광산에 있다. 루틀리지는 죽었지. 게친도 죽었어. 그는 이제 낡고 헐거운 장갑을 손목 위로 끌어당긴다. 루틀리지가 만들어 준 장갑. 이 장갑을 끼고 있는 한, 스피커의 모든 주술적 역량은 0이 된다. 그가 들은 소리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장갑을 벗어야만 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 몇 초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뜻이었다. 그 몇 초는 제법 길게 느껴졌고 종종 중요하게 작용했다. 스피커는 사형수에게 물었다. “살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형수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순간이 종종 있죠. 내게도 몇 번 그런 순간이 있었고요.”

스피커는 편지를 잘 접어 허리춤에 달린 복대에 넣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후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사후세계에서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사후세계에 있는 동안 분노와 억울함 같은 게 사그라들어서, 자신을 죽인 당신을 용서하거나 못 본 척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통은 그렇지 않고, 당신이 죽인 사람은 사후세계의 입구에서 당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과거를 잊어도, 과거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는 격언을 알 겁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인 거죠. 그런데 죽은 사람이 죽은 당신을 한 번 더 죽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나도 몰라요. 주술사들은 사후세계에 가면 그곳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이곳 지상으로 전달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일만 명이 넘는 주술사가 죽는 동안, 그곳에 대해 알게 된 정보라고는 그곳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스피커는 속으로,

게친은 아주 강했다. 게친은 공간을 당기거나 밀칠 수 있었어. 그건 게친에게 있던 사후세계 물건 중 하나의 힘이었지. 그래서 게친은 사후세계에 가서, 그 물건을 잔뜩 모은 다음 사후세계와 지상의 거리를 당기겠노라고 했어. 거기와 여기를 볼 수 있어야, 오갈 수 있어야 사람들이 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이 세계를 좋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러나 게친이 죽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세상은 얼음이 되었고 사후세계는커녕 사후세계에서 보내오는 신호조차 한참 전에 끊겨버리고 말았다. 주술사 학살도 있었지. 몇 명이 남았는가? 아무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걸 얘기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사형수가 물었다.

스피커는 대답했다.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 해서요. 아마 광산장을 죽여야 할 것 같아요.” “왜요?” “그는 내가 누군지 알아요.” “그럼 사후세계의 광산장이 당신을 죽일 것 아닙니까?” “괜찮아요. 한참 뒤일 테니까.”

그리고 스피커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무언가 해내려면, 이 편지에 적힌 것처럼 내가 하게 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야 죽게 될 거야. 과정은 몰라도, 어쨌든 내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 사후세계도 무엇인가 점유하고 있는 물질된 공간이라는 것을 게친을 만났을 때 알게 되었으니까. 그곳은 관념이 아니며, 나는 언제나 마지막이니까.

사후세계까지 한참 걸린다는 사실을 예상해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스피커에게 내려진 저주의 좋은 점이었다.

2021년 3월 22일 월요일

전화

전화가 울리는데 아무도 그것을 받지 않는다. 휴대폰에서 울리는 전화다. 누군가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그곳에는 휴대폰이 없다. 그 사람은 고개를 들어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방향을 쳐다본다. 그 사람은 가만히 있다. 도통 전화벨이 울리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지 않는다. 잠시 끊겼던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그 대화란 누군가가 사업상의 용무로 사무실을 차렸는데 아직 고용한 인원이 얼마 없어 사무실의 절반가량이 빈자리이고, 그래서 휑뎅그렁하다는 것이다. 누군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도 전화는 울리고 있다(아까 끊어졌다가 다시 울리는 모양이다). 이제 누구의 전화가 울리는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전화의 주인은 윌리엄스다. 그는 중절모에 실크 재질의 스카프를 두르고 검은 선글라스를 꼈다. 그는 전화벨이 울리는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서 휴대폰 말고 손수건을 꺼낸다. 그러고 보니 실내에는 꽤 덥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흐른다. 그는 꺼낸 손수건으로 땀이 나 반들반들한 자신의 이마를 닦는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인원들이 흐릿한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마침내 그, 윌리엄스는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손동작이 꽤 신속한 것이, 마치 그렇게 되기를 기다린 듯하다. 전화의 내용은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아직도 사무실의 절반가량이 빈자리인데, 혹시 여기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아까 대화 자리에서 나왔던 이야기인데.’ 윌리엄스는 생각했다. 그는 아까 대화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층계참에서 이 전화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아까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처럼 나머지 사람들이 연기로 화해 실내에 혼자 남게 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무실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전화의 제안은 꽤 괜찮은 것이었다. 아까 그 대화 자리에서도 그는 그 대화를 잠시 멈추고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려다가 말았다. 그가 그러한 의견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실내에서는 덥고 탁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고, 그는 즉석에서 성냥개비들을 몇 개 들고 테이블에 놓으면서 모양을 만들었다. 그것은 그가 하는 오래된 장난 같은 것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손수건으로 다시 땀이 난 자신의 이마를 닦으며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테너, 모리아스, 이나벨, 데니얼... 그리고 바로 나. 자신. 윌리엄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 자신도 연기로 화해 사라졌고 실내에는 벨 소리가 울리는 휴대폰만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2021년 3월 17일 수요일

서가행

어제 온종일, 편집 오류가 난 도서의 박스와 랩핑을 뜯고 1권과 2권을 따로 분류해 파렛트(표준어는 ‘팰릿’)에 쌓는 노역에 차출됐다. 오늘 나의 상태는 영 좋지 않다. 허리도 안 펴지고 문장도 잘 안 만들어지고... 그렇다고 쉴 수는 없는데, 이미 화요 연재에서 수요 연재로 한 번 밀었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하면 아주 가볍게 쓰고 말거나 나중에 고치는 한이 있더라도 속도를 유지하는 편이 좋다. 곡물창고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연재의 세 고비: 소개(기획)를 작성할 수 있는가? 소개 작성 후 세 편을 쓸 수 있는가? 어떤 식으로든 완결을 낼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내용이 아닌 발행 형식으로 텍스트를 분류하여 ‘연재물’이라는 갈래를 본다면, 이 장르는 등장한 지 30년쯤 된 전자지면-네트워크 단말기라는 매체에 실려 내용 불문 폭발적으로 부흥 중이며, 그 자신의 압도적인 양을 통해 전체 문자 문화를 주도하고(또는 파묻어 버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때 출판은 발행과 점점 구분되고(구분되지 않고), 서가와는 거의 구분할 수 없이 가까워진다(서가를 해체해 버린다). 말인즉슨 우리는 서가를 빼놓고서 출판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출판은 다른 무엇보다 서가라는 구성체의 구성물을 제작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 제한된 규모의 삶만을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있는 개돼지들에게까지 무차별 보급되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듯한 ‘물리 서재’에 상대하여, 한 인간만의 서가란 날이 갈수록 더 엄청나고 대단한 낭비 사치로 느껴지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지 공유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지고 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값비싼 책을 파는 것으로 유명할 출판사 ‘서가행’이 내세우는 굿즈는 여러 색과 사이즈의 책장이다. 동종 계열 후보로 꼽힌 ‘책시렁’은 이미 존재.

도시 전설

도시에 그늘이 있다. 나는 그늘 안에 들어가 날 가린 나무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나무 밑에 그늘이 있다. 그늘에 음악이 흐른다. 그것은 내 그늘과 겹쳐 있다. 손동작과 그러한 음악은 마치 현대에 생긴 도시 전설 같은 느낌이다. 도시 전설이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고 있다. 도시에 그늘이 있다.... 로부터 생겨나는 도시 전설들은 현대에 와선 잘 찾아볼 수 없다. 현대의 인터넷은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무의미한 담화들을 품는다. 마련한 그늘이 엷어지고 있다. 저 사라짐은 뭘까. 대낮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뜻인 걸까.

2021년 3월 15일 월요일

반딧불

반딧불 하나가 어둠 속에 있다. 그 반딧불은 드넓게 펼쳐진 밤의 수해를 가로지르며 앞으로 이동한다. 한 사람이 천천히 앞으로 걷는 것과 같은 속도이다. 그 반딧불은 거대한 나무의 나뭇가지들 사이로 안착한다. 그 반딧불을 따라가던 나는 그 반딧불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십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다. 그 반딧불이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앞으로, 저 앞으로 간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 반딧불의 뒤를 따라가지만 그 반딧불이 내가 십 분 전에 따라가던 반딧불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내가 왼쪽 손을 펴고 위로 올린 자세로 걷자 이내 내가 쫓던 반딧불이 내 왼쪽 손 위로 올라온다. 그 반딧불은 너무 작고 미세해서 손에 올린 감촉이 없다.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지만 크게 빛나는 것은 아니고, 조금의 열기도 없다. 반딧불은 왜 빛나는 걸까. 나는 반딧불이 올려져 있는 나의 왼손 끝을 조금만 움켜쥐었다가 편다. 반딧불이 다시 저 앞으로 날아간다. 이번에도 나는 저 앞으로 이동하는 반딧불이 지금까지 내가 쫓던 반딧불인지 확신할 수 없다. 곧 숲과 나무들의 수해가 끝나고, 인적이 드문 교외에서 다시 주거 건물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로 이동한다. 내가 쫓던 반딧불은 불 켜져 있는 가로등들의 불빛의 세기에 밀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꼭 그 반딧불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그들의 일부로서 되려는 것처럼 날벌레들이 가로등 안으로 솟구치고 있다. 나는 그러한 장면을 간직한 한 가로등 밑에 서 있다. 지금은 밤이고, 이 가로등이 켜져 있는 시간은 새벽까지다. 새벽이 지나면 모든 가로등은 꺼지고, 하늘에는 빛나는 태양의 구가 떠오르게 된다. 그 시간이 되면 나는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반딧불의 뒤를 따라갈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반딧불의 뒤를 따라갔던 것은 단순히 반딧불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숲의 밖에서 그 빛에 이끌려 그 숲을 모두 지나왔고, 이제는 불 켜진 가로등들 사이에서 그 반딧불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어 쫓는 일을 그만두고, 단순히 서 있는 중이다. 단순하다. 가만히 서 있는 일은 단순하다. 내가 반딧불의 뒤를 쫓았던 것은 그 반딧불이 앞으로 이동하는 도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 사람이 천천히 걷는 속도라고 하더라도 공중에서 움직이는 존재의 뒤를 쫓는 일은 지상의 장애물들에 이따금씩 가로막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내가 서 있던 가로등의 불빛 안에서 아주 미약한 불빛 하나가 분리되어 튀어나온다. 나는 그 불빛이 반딧불인지, 작은 먼지 조각인지, 아니면 내가 반딧불을 쫓던 이 한 밤의 여정이었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앞으로 걷는다.

2021년 3월 12일 금요일

황야 풍경

크로키 노트에 황야가 그려져 있다. 가령 난을 그리는 것은 황야를 그리는 것과는 다르다. 난을 그리는 것은 동양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들이 하는 일이다. 그것도 옛날에 그랬다. 지금 크로키 노트에 그려져 있는 황야의 풍경은 우선 좌우로 비쩍 마른 나무 두 그루가 있고, 그 사이에 적막한 황야가 그려져 있다. 내가 그린 것은 아니고,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그려 놓은 것이다. 크로키 노트의 총 페이지 수는 80 정도이며, 반 정도가 누군가가 그린 황야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그 그림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황야를 그린 것이다. 나는 이 노트를 구석진 골목의 책방에서 샀다. 내가 치른 값은 5천 원이었다. 책방에는 구제 옷을 입은 노인이 카운터에 서 있었다. 내가 그 크로키 노트를 골라 값을 치르려고 할 때 노인이 말했다. “그걸 사시오?” “네.”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거의 한 개인의 기록인데... 마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일기장과 같지. 내가 그것을 거기에 놓아둔 건.” 하고 노인은 그 노트가 놓여 있던 책장 쪽으로 눈짓을 했다. “누군가 필요한 이가 있을 것 같아서였소.” 하고 그 노인은 말했다. “네.” 하고 나는 답했다. “그것은 황야들이 그려져 있는 노트인데, 그것이 필요하시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면 가져가세요.” 노인과 그런 대화를 나눈 후에 그 노트를 가져왔던 것이다.

나는 노트의 비어 있는 부분에 하루에 하나씩 난 그림을 그렸다. 난을 친다, 고도 한다. 내가 난을 그렸던 것은 별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황야의 풍경들이 가득 그려져 있는 노트에다 나 자신의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나는 난을 잘 그릴 줄 몰랐으나, 내가 갖고 있는 어느 음악가의 앨범 표지에 바로 그러한 난들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앨범을 옆에다 두고 조심스럽게 난을 따라 그렸다. 난을 그리고 있으려니까 동양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가 된 것 같기도 했고, 별생각이 없기도 했다. 가끔씩 나는 그 크로키 노트의 첫 장부터 전체의 반절이 되는 부분까지 그려져 있는 황야의 풍경들을 넘겨봤다. 이것은 어떤 이의 비밀스러운 기록, 보다는 마치 심부름할 것을 적어 놓은 메모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래서 넘겨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왜 노트에다가 황야의 풍경들을 그렇게 계속해서 그려다 놓은 것일까? 내가 노트 너머로 보는 그 황야의 풍경들은 정말로 황야의 풍경인 것처럼 그것들을 닮고 또한 근접해 있었다. 왜 나는 이 노트를 골랐으며 5천 원이라는 값을 치르고 사기까지 한 걸까? 나는 눈을 감았다.

2021년 3월 10일 수요일

오른날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어떤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 요즘이야 그런 비슷한 얘기조차도 안 하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꽤 자주 듣던 소리고, 많은 이들이 그럴싸하다고 느꼈는지(또는 그럴싸하게 들릴 거라고 느꼈는지) 너도나도 주워섬겼던 소리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가 하면, 右회전ONLY 토네이도가 전 세계를 휩쓸며 모든 것을 개박살내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본래 깃털 뽑힌 싸늘한 몸통이었고, 다만 공중에서 죽음의... 혼란한 춤을 추어 왔을 따름인데, 날개를 치면서 날아가고 있다고(날아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 아니냐? 우리가 무슨... 어떤... 실패라도 ‘할 수 있다’는 믿음마저, 날개를 갖는다든가 날개를 가지지 못했다든가 날개가 한쪽이라도 있다든가... 그런 것조차도 오만한 인식 아니었던가 생각된다는 이야기다. 또 비슷하게 오래 들은 속담(?)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비유도 있다. 지면이 기울었으니 깎고 덮어 평탄화를 해줘야 한다는 소리...도 언뜻 직관적일지 모르겠으나, 나―무산계급의 감각으로는 좀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굳이... 공을 차야 하나? 이 세계는 일테면, 어느 방향에서든 미끄러져 내리고 마는 깔대기 모양으로 느껴진다. 혹시 공차기 경기도 그러한 미끄러짐 속에서의 착각(또는, 무슨 경기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가 미끄러짐) 아닌가? 우리는 골대를 향해 공을 찬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미욱한 시야에, 세상사의 한심 참혹한 흐름을 겪으면 겪을수록, 우리의 짜릿한 미끄러짐―익스트림 인생(다시 말해 ‘운동’)을 중단시킬 만한 방도는, ‘우리’의 둘레를 극도로 좁혀 그 밖은 그냥 모른 척하거나, 아니면 깔대기 전체를 거꾸로 세워 버리는 것 외엔 없는 듯이 생각되고 만다. 거꾸로 세운다니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당연히 나는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길게 한탄을 늘어놓으려는 것도 아니다. (社名을 찾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한국 개돼지 정치사회학 3대 속설 중 마지막 것인, 극과 극은 통한다를 곰곰 떠올리고 있다. 대충 극단적인 것은 피해야 한다는 그 말의 취지와 달리, 과연 극과 극이 통하는 것이라면 진실로 중심(또는 중심이라는 진실) 역시 없어진다고 할 것이다. 물고 문 그 고리의 어딘가에 서서 누가 무엇이 옳다 그르다 주장해도, 그저 아... 하고 말지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어쩌면 바로 그러한 상태(모두가 어떤 이유에서든 고리로부터 벗어나려는 상태)가 이 파괴적인 회전력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루고 싶은 것은 그냥 어디 좀 편하게 눕는 것이다. 평화이고 단절선이다. 어디서 자를 참인가? 가장 오른쪽 극단에서 딱 한 발짝 더 오른쪽으로 간 다음 왼날개를 찾아보겠다는 것이 출판사 오른날개의 (뒤틀린) 기치다. 로고 모티브로는 직각삼각형, 나사산...

2021년 3월 9일 화요일

자기말소 ― 낯선 이름들의 전이

 각자의 새벽


“모든 것을 섭렵하는 광폭의 분절법”

왜 득실의 논리로는 해결이 안 될까?


시론

세대론


“내가 내 안에 멜로디를 가지고 다닌다는 걸 알아 그리고 난 그걸로 겁먹지 않아”


Vado, ma dove?


청승 떨지 않기 위해 자기말소의 편을 들고 싶은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그 마음에 충실하자면 우선 입을 닫고 쌓이는 것이 생기려는 족족 그것을 쳐내야 할 텐데. 입을 닫는다, 그러니까 침묵한다...의 효용, 그리고 아름다움, 무엇보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지. 알지. 잘 알지만... 

영원히 입을 닫아 버리면 정말 큰일이 일어나니까. 

말의 반대 항인 침묵이 아니라 말의 안쪽인 침묵을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기말소를 

자신에게 

부과해야

한다


양옆을 살펴요

모범이면서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영화관은 좀 더 위에 있지.” 

시공간의 기억, 혹은 기억의 시공간을 교정하기.(애정을 가지고. 오해를 떠안고.)


“생애의 시기가 아닌 유년기, 지나가지 않는 유년기. 그것은 담론을 놓아주지 않는다.”


무질서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탄생도.

 

2021년 3월 8일 월요일

포도나무

그것은 썩고 있다. 그것은 내 생각 속의 밭에 있다. 그것은 썩어서 거름이 된다. 그것은 거름이 되어 식물의 생장을 돕는다. 그것은 다 큰 과일나무의 밑에 있다. 그것은 모여 있지 않고 드넓게 헤쳐져 있다. 한 사람이 다가와 그것을 삽으로 옮긴다. 그것의 생김새는 흙과 유사하지만 흙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삽으로 파낼 수 있다. 그것이 말한다. “나는 썩고 있었어. 저 밑에서, 저 밑에서. 이제는 어떤 사람이 삽으로 나를 파내는군. 파내어서 다른 곳으로 옮길 작정이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파고 있는 사람이 말한다. “난 널 파내어서 다른 곳으로 옮길 거야. 넌 내 생각을 아는군.” 그것은 흙과 유사하지만 말을 할 줄 알고 생각도 한다. 내 생각 속의 다 큰 과일나무 아래에서 그것은 말한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숨을 내뱉는다. 그것이 내뱉는 숨은 다시 거름이 되어 식물의 생장을 돕는다. 작은 새끼 멧돼지 하나가 다가와 그것 위에 있는 작은 풀을 뜯는다. “먹지 마!” 그것이 말한다. “그거 내가 키운 거야.” 그것이 소리친다. 소리치다가 두 발로 선다. 그것의 몸체가 일어나 멧돼지를 쫓는다. 멧돼지가 도망간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생각 속의 밭에 있는 다 큰 과일나무에서 과일 하나가 떨어진다. 그것은 포도이다. 다 큰 과일나무는 포도나무이다. 그것은 포도를 먹는다. 포도를 한 알 먹을 때마다 그것은 씨를 뱉는다. 그것은 씨를 먹지 않는다. 사람들 중에서도 포도의 씨를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것은 흙과 유사하지만 말과 생각을 할 줄 알고 사람처럼 포도를 먹을 때마다 씨를 토해낸다. 그것이 내뱉는 씨는 땅에서 자라나 다시 포도나무 묘목이 되고 다 큰 나무로 생장한다. 그것은 농부인가? 그것과 사람들, 농부들은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썩고 있다. 그것은 내 생각 속의 밭에 있고 썩어서 거름이 된다. 그것은 두 발로 일어설 줄 알고, 멧돼지를 쫓는다. 자신이 먹여 키운 식물을 지키기 위해. “먹지 마!” 그것이 말한다. 그것이 키운 식물을 망치는 것은 그것이 싫어하는 일이다. 마치 농부들처럼.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지키려는 것을 두 발로 일어서면서까지 지킬 줄 안다. 마치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것은 삽으로 파내어서 조금씩 옮길 수 있다. 마치 흙처럼. 그것이 말한다. “귀찮아! 날 옮기지 마.” 귀찮아하는 그것은 농부들과, 사람들과, 흙과는 다르다. 그것은 다 큰 과일나무의 아래에 있다.

2021년 3월 3일 수요일

사무원

0 또는 1이 모니터 화면의 상단에서 내려온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그럴 때 나는 다른 사무실에서 숫자를 보내오는 상사를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상사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게 전달하고 있는 이 숫자들은 보이지 않는 클라이언트의 지옥 같은 아가리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이제 곧 나의 손을 거쳐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관례적으로는 옳아 보이는 활자 건물 한 채가 될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허물어질 빌딩과도 같아서 거기에 입주한 증권사들은 모조리 망하겠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사무의 틈을 벌려 빌딩 옥상으로 올라온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동료들이 사라지는 연기를 내뱉고 간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다. 그러한 흔적들로 인해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뿐, 나에게 확신은 없다. 그러한 불안정이 고용 문제로 이어지며 나에게 태업의 욕망을 부추긴다. 이 건물에 버리고 간 담배 꽁초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이 될 것인가. 그런 결정이 내 능력만으로 이루어질 리 없다. 보이지 않는 관계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연결될 것이고, 강화될 것이며, 끊어질 것이다.

되거나 안 되거나. 갖거나 못 갖거나. 남거나 떠나거나. 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야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휴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연봉 인상,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외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출장,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감시 카메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직,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화 연결,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점심 메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파티션에 무언가를 붙여두는 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출입문 쪽으로 등과 모니터를 노출시키고 앉는 것,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접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장기자랑,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무실의 화분이 썩어가는 것,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뛰어내리면 온몸이 바스라질 높이에 위치한 사무실의 통유리를 통해 스모그에 가려진 다른 빌딩들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일하고 있을 보이지 않는 동료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는 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무실 바깥을 나서면 펼쳐지는 초원의 자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정,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럴 때 나는 나를 세상에 보낸 존재를 생각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보낸다.

이 메시지가 보인다면 엿이나 드세요.

끝나지 않는 일을 끝내기를 끝내며 나는 빌딩을 내려온다. 


2021년 3월 2일 화요일

파산사

다음의 여섯 글자,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입에 담기에 아주 신물이 난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지겹고 메스껍고 돌아버릴 것 같고... 하여튼 그냥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 도대체 언제쯤? 그런데 만약에 마지막으로,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것이 무엇인지 묘사해야 하는 독배가 내게 주어진다면, 피할 수 없이 나는 우리-무산계급의 견지에서 입을 열게 될 것이다. 이 자본주의 사회의 무산계급으로서 체감하는 인간의 삶이란? 그것은 이름처럼 돈으로 돈을 만드는 삶(자본화)이라기보다는 다만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빚 갚기 그뿐이다. 사태에 맞게 말하자면 이것은 부채주의 사회의 부채주의 삶이다. 그야말로 인간사의 거의 모든 일이 부채를 통해서만(아주 부드럽게, ‘신용’이라는 우스꽝스런 단어로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이루어진다. 비유가 아니다. 빚을 내서 살고, 빚을 내는 것이 삶이다. 빚을 내서 일을 구하고, 빚을 갚기 위해 임금을 받는다. 무슨 대단한, 문자 그대로 죽음에 달하는 악전고투로 염병할 평균 월수를 아무리 올린다 하더라도 부채를 갚아 나가야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현재의 사회 상태에서는 그 어떤 좋은 것이라도 부채를 통하지 않고서는 점유할 수 없기 때문이며, 월수에 알맞은 ‘더 좋은 것’이 반드시 준비되어 턱밑까지 들이밀어지기 때문이다. 하여튼 살아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빚을 내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확히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만 한다는 집단적 믿음(망상?)과, 그 증거인 듯한 추상적 기호(숫자)와, 그것들이 초래하는 병적 상태에 젖어가고 있다. ‘스스로를 서민이라고 여기는 중상계층의 한심한 자의식’이란 전형 역시 더 언급하기 짜증스러울 정도지만, 그 전형은 다만 다른 스케일로, 모두에게서 반복되고 있다. 이는 ‘다양한 월수의 피라밋 층층과 노동 양태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들에게 저마다의 사악함이 있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다. 그 개개인들의 모임들이, 구멍가게에서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주민센터에서부터 전 세계로까지... 반복되며 개개인들뿐 아니라 사회-자신들까지도 부채 존재라는 동일한 상태로 나라시 쳐버려~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이 사태를 직관 수준에서 익히고 있다. 모든 것이 금액으로 측량되는 현상태에서 사회적 존재들의 생존은 부채라는 양식에 반드시 붙들려 있다. 즉, 얼른 느끼기에 우리가 빚을 갚기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하게는 언제나 딱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의 임금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촘촘한 무엇을 넘어서 우리가 딛고 선 물질계 그 자체인 이 프랙털 어쩌고...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나의 모든 빚을 청산하고도 주체할 수 없는 돈!)는 것은 억세게 운수 좋은 이야기, 기적 같은 이야기,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이야기로 들린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적 체험에 대한 뻔뻔하고도 암묵적인 간증과 전승이 오늘날 (공교육과 대비됨으로써 존재하는) 사적교육의 요체가 아닌가? 인간으로서 돈을 더 만들 생각이 없니? 그것은 다만 부채의 80년 행진이란다! 만약 빚을 갚고도 나머지가 생긴다면 그 돈은 돈을 만드는 돈 속에 바쳐야만 하는 거야, 돈은 모으면 모을수록 그로부터 돈을 만들기 쉬우니까, 그래야만 결국에 빚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바침이 모두의 부채감을 유지시키고 있는 지옥에서의 약속이다. 빚이 싫다면 무조건, 약한 것부터 강한 것까지 어떤 종류의 도박을 하거나... 아니면 한마디로... 세계는 우리에게 자살을 권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다채로운 정신병의 생산라인이며, 이곳이 바로 죽은 악인들의 유산 그 자체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이보다 더 침착하게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또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세계가 부채 위에 부채를 더해감에 따라 반드시 질적 변화(자본주의의 끝)를 맞이하리라 보는데, 그 변화는 아마도, 내 생각에는, 빚으로부터의 해방 같은 것이 아니라,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채권자가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를 말하는 거야? 돌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우리다. 이러한 상황을 따라, ‘파산사’라는 사명은...

21년 2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5 (42)
―――
미아와 접시: +1 (3)
박물지: +1 (4)
직업 전선: +1 (4)
예쓰 예쓰 티쳐: +1 (4)
모금통: +1 (1)


이달의 총격려금

13,00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25일 / 5,000원 ― 미아접시
25일 / 2,000원 ― 박물지
25일 / 2,000원 ― 직업전서ㄴ
25일 / 2,000원 ― 옛스티처
25일 / 2,000원 ― 모금통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미아와 접시 [入] ☞ 5,000원
박물지 [入] ☞ 2,000원
직업 전선 [入] ☞ 2,000원 (기금기부)
예쓰 예쓰 티쳐 [入] ☞ 2,000원
모금통 [入] ☞ 2,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144,515원 (2000원 + 142,447원 + 68원)

2021년 3월 1일 월요일

조경

“조경이 뭐죠?” “풀 잘라서 모양 내는 거요.” 나는 조경사에게 그렇게 물었고 조경사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우리는 정원에 있었고, 조경사가 풀들을 매만지며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정원 벤치로 고용인이 쟁반에 다과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조경사를 부른 다음 다과를 권했다. 조경사가 나에게 말했다. “어떠신가요, 이 정원의 조경은.” “아름답군요.” 이렇게 말하면 끝인 것 같다. “풀은 왜 자르는 거죠?” 나는 조경사에게 물어보았다. “자라는 대로 멋대로 내버려 두면 관리가 안 된 것처럼 보이니까요.” 관리...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조경사는 부업으로 저택의 일을 돕기도 한다. 우리는 저택에서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내가 조경에 관해 갖고 있는 지식은 조금 추상적인 것이었다. “저번에는 들짐승이 나타나서 잔디를 먹어 치웠어요.” “그래서요?" “쫓았죠.” 저번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벨벳 나무 앞에 있는 벤치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나는 이 저택의 주인이었지만 저택에 갇혀 있기에는 갑갑했다. 나는 자주 정원으로 나와 쉬곤 했다.

내 친구 중에는 탐정이 있었는데, 그는 마침 이 저택의 식객으로 와 있었다. 나는 그를 불러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 친구의 이름은 릭이었다. “릭 씨.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하고 그가 말했다.” “이 벨벳 나무 앞에 아침이면 담배꽁초들이 버려져 있곤 해요. 딱히 나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버린 걸까요?” 하고 고용인이 탐정에게 물었다. “그건 내가 버린 거예요.” 내가 말했다. “탐정이 추리를 하길 기대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 되었군요.” 하고 조경사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정원에서는 딱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농담 같은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겨 갔다. 조경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다음으로는 탐정이, 그리고 다음으로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으로 들어갔다. 고용인은 뭘 하는지 먼저 저택으로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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