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일 수요일

사무원

0 또는 1이 모니터 화면의 상단에서 내려온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그럴 때 나는 다른 사무실에서 숫자를 보내오는 상사를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상사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게 전달하고 있는 이 숫자들은 보이지 않는 클라이언트의 지옥 같은 아가리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이제 곧 나의 손을 거쳐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관례적으로는 옳아 보이는 활자 건물 한 채가 될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허물어질 빌딩과도 같아서 거기에 입주한 증권사들은 모조리 망하겠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사무의 틈을 벌려 빌딩 옥상으로 올라온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동료들이 사라지는 연기를 내뱉고 간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다. 그러한 흔적들로 인해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뿐, 나에게 확신은 없다. 그러한 불안정이 고용 문제로 이어지며 나에게 태업의 욕망을 부추긴다. 이 건물에 버리고 간 담배 꽁초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이 될 것인가. 그런 결정이 내 능력만으로 이루어질 리 없다. 보이지 않는 관계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연결될 것이고, 강화될 것이며, 끊어질 것이다.

되거나 안 되거나. 갖거나 못 갖거나. 남거나 떠나거나. 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야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휴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연봉 인상,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외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출장,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감시 카메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직,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화 연결,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점심 메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파티션에 무언가를 붙여두는 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출입문 쪽으로 등과 모니터를 노출시키고 앉는 것,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접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장기자랑,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무실의 화분이 썩어가는 것,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뛰어내리면 온몸이 바스라질 높이에 위치한 사무실의 통유리를 통해 스모그에 가려진 다른 빌딩들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일하고 있을 보이지 않는 동료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는 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무실 바깥을 나서면 펼쳐지는 초원의 자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정,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럴 때 나는 나를 세상에 보낸 존재를 생각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보낸다.

이 메시지가 보인다면 엿이나 드세요.

끝나지 않는 일을 끝내기를 끝내며 나는 빌딩을 내려온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