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2일 금요일

황야 풍경

크로키 노트에 황야가 그려져 있다. 가령 난을 그리는 것은 황야를 그리는 것과는 다르다. 난을 그리는 것은 동양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들이 하는 일이다. 그것도 옛날에 그랬다. 지금 크로키 노트에 그려져 있는 황야의 풍경은 우선 좌우로 비쩍 마른 나무 두 그루가 있고, 그 사이에 적막한 황야가 그려져 있다. 내가 그린 것은 아니고,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그려 놓은 것이다. 크로키 노트의 총 페이지 수는 80 정도이며, 반 정도가 누군가가 그린 황야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그 그림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황야를 그린 것이다. 나는 이 노트를 구석진 골목의 책방에서 샀다. 내가 치른 값은 5천 원이었다. 책방에는 구제 옷을 입은 노인이 카운터에 서 있었다. 내가 그 크로키 노트를 골라 값을 치르려고 할 때 노인이 말했다. “그걸 사시오?” “네.”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거의 한 개인의 기록인데... 마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일기장과 같지. 내가 그것을 거기에 놓아둔 건.” 하고 노인은 그 노트가 놓여 있던 책장 쪽으로 눈짓을 했다. “누군가 필요한 이가 있을 것 같아서였소.” 하고 그 노인은 말했다. “네.” 하고 나는 답했다. “그것은 황야들이 그려져 있는 노트인데, 그것이 필요하시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면 가져가세요.” 노인과 그런 대화를 나눈 후에 그 노트를 가져왔던 것이다.

나는 노트의 비어 있는 부분에 하루에 하나씩 난 그림을 그렸다. 난을 친다, 고도 한다. 내가 난을 그렸던 것은 별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황야의 풍경들이 가득 그려져 있는 노트에다 나 자신의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나는 난을 잘 그릴 줄 몰랐으나, 내가 갖고 있는 어느 음악가의 앨범 표지에 바로 그러한 난들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앨범을 옆에다 두고 조심스럽게 난을 따라 그렸다. 난을 그리고 있으려니까 동양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가 된 것 같기도 했고, 별생각이 없기도 했다. 가끔씩 나는 그 크로키 노트의 첫 장부터 전체의 반절이 되는 부분까지 그려져 있는 황야의 풍경들을 넘겨봤다. 이것은 어떤 이의 비밀스러운 기록, 보다는 마치 심부름할 것을 적어 놓은 메모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래서 넘겨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왜 노트에다가 황야의 풍경들을 그렇게 계속해서 그려다 놓은 것일까? 내가 노트 너머로 보는 그 황야의 풍경들은 정말로 황야의 풍경인 것처럼 그것들을 닮고 또한 근접해 있었다. 왜 나는 이 노트를 골랐으며 5천 원이라는 값을 치르고 사기까지 한 걸까? 나는 눈을 감았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