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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2일 월요일

양젖

유리잔이 있다. 거기에 물을 따르면 물이 차오른다. 그렇게 담겨 있는 물을 나는 나의 임의로 마셨다. 그리고 한 번 더 따라 마셨다. 나는 목이 말랐다. 그러니 한 번 더. 그러니 한 번 더. 이젠 목이 마르지 않았으나 나는 입안에 물을 넣고 가글을 하다가 버렸다. 나는 물과 놀고 있었다. 물을 좋아하는가? 물으면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물은 친근하면서 동시에 낯설고, 이 나라에서는 값이 싸고, 너무 필요한 것이어서 이미 익숙한 것이다. 필수적인 것들은 자신에 의해 잠식되고 장악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물을 따라서 그대로 싱크대에 버린다는 결정도 해봤는데, 거기에 별로 의미는 없었다. 이 놀이의 마지막 광경을 뭘로 하면 좋을지 생각을 하다가 아까처럼 유리잔에 물이 반쯤 차올라 있도록 해두었다. 물은 차오르는 것. 입을 대고 마실 때는 줄어드는 것. 물을 엎지르던 때를 기억한다. 사물에 대한 관심은 지루할 때 갖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지루한가? 물으면, 마치 물이 엎질러지면서 반짝이는 물의 조각들이 비산하듯이 ‘그렇다’라고 하여야 한다. 나에게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샤워하면서 내 몸에 뿌려지는 물을 입에 담고 있었다가 뱉었다. 수영장에 갔던 때를 기억한다. 그 냄새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면서 동시에 수영장에 가보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수영장이 누군가에겐 그 자신의 열망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카모메 식당에서 본 그 수영장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엔 물이 많고 그 위에 떠다니는 사람들도 꼭 수도꼭지에 흘러나오고 있는 물 같다.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것은 강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흐르기, 강의 유속이 강해지는 구간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높기 때문이고 다시 아까 말한 열망이라는 감정과 닮은 데가 있다. 열망은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높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퇴적물처럼 어떤 바라는 마음들이 쌓인 것이다. 쌓여서 강의 둑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터진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그것이 저 멀리로 작은 점이 될 때까지 흙물이 되어 흘러간다. 흘러간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렇게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쓸려간다고 해야 한다. 열망을 갖고 있는 인간은 강의 수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있는 댐이고, 쓸려간다는 것은 과도한 물의 압력으로 인해 아래에 있는 퇴적물들의 지형에 영향이 가는 것을 말한다. 그 열망이란 자기에게 퇴적된 지형에, 그러니까 관련된 것이다. 열망은 모두가 다르다. 어떤 열망은 그것을 닮지 않았다. 강일 수 있고 유리컵에 반쯤 차오른 물일 수도 있다. 그 물을 담고 있는 것은 잔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잔이다. 나는 한가로웠고, 내 열망이 자극되지 않는 한 나는 그것을 잊어버린 채였다. 높이 쌓여 있는 것을 모르고서. 지루했다. 정말 지루하였다. 왜 어떤 인간적인 상황이나 조건들은 높이를 가지는가? 왜 어떤 것은 판타지가 되고, 어떤 것은 우울감이 되는 걸까? 그 모든 것들이 계속되었다. 가령 예를 들면 수영장에서 코로 물이 들어올 때가 있다. 한번쯤 겪어봤을 것……. 그럼 좀 맵고,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떠오르나? 아무 생각 없었을 개연성이 크다. 수영에 더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물에는 몰입할 수 없다. 너무 단순하고, 용도적이다. 그것 없이 살 수는 없지만 정작 그것에 몰입할 순 없다.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것들은 사실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다. 나는 강에 몰입하였다. 그리고 유리잔에 몰입을 한다. 그리고 내 열망에 몰입했다. 아마도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으므로, 제대로 몰입이 되진 않았다. 나는 사물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지루함 때문에 생긴 비약이었다. 그것이 그것의 연장일지라도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 몰입이 가능하다. 내 원망은 어떤 것이 결국 물인 데에 있었고 내가 흐르고 있는 강은 유속이 잔잔했다. 내가 잊어버린 것들이 아래로 퇴적이 되어 있었다. 비도 오지 않는 날이었다. 따라서 내 열망도 자극될 리 없다는 것 따위를 떠올리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비장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는 임의적인 어떤 마음. 마음이 아니라 마음가짐. 마음가짐에 대한 가짐. 대한……. ~에 대한……. 어떤. 어떤 생각들은 연속되었는데, 그것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가 몇 개 이상의 강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이전에 비해선 좁은 너비가 되어 가다가 끊어졌다. 나는 내가 물 말고는 원하는 것이 없다고 자각했다. 내 몸이 모래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럼 흘러갈 수 있고 손 틈 사이로 비어져 나올 수 있을 텐데. 내 열망은 내 존재에 관련된 것이었다. 유리잔에 물이 반쯤 차올라 있다. 나는 거기에 물을 다시 따른다. 넘칠 때까지 따른다. 유리잔이 내게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지루하였다. 그래서 유리잔의 말을 만들었다. ‘생각 외로 부끄러운 일이야, 그건.’ 그렇다. 내게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맛보며 웃었다. 무미였다. 맛이 없다는 게 무의미하기도 했다. 부끄러움을 맞는 순간 나는 몸이 곤두서는 듯했다. 그것은 내가 잊어버린 희극이었고 날은 순식간에 비 오는 날이 되어 유속이 빨라졌다. 나는 강가로 걸어 나와 퇴적들이 전부 쓸려나가는 걸 보면서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의 안위가 나로 인해 지켜졌다.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위험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내 몸에 줄을 걸고 미궁에 들어섰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줄밖에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 부끄러움 때문에 나는 모험을 나온 것이 되었다. 나는 물과 부끄러움으로 관계했던 것이다. 물이 어서 이리로 오라고 날 끌어당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수영장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수영장에는 물이 많고 이 잔에 들어 있는 물의 양은 그보다 너무 적다. 나는 물을 더 따랐고 가득 차 오른 물의 표면이 완만한 곡선을 이뤘다. 나는 부끄러움을 발견했지만 아직 재미가 없었다. 손으로 물의 끝을 찍자 손가락 끝에 물이 묻었다. 그리고 잔 옆에 물이 흘러내려 묻었다. 내가 그것을 재미있다고 여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쌓은 퇴적들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고 생각하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자 비 오는 날은 점점 더 극심해졌으며. 그리고 비가 멈추자 이름 모를 마을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돼지를 구웠다. 불이 비에 젖으면 꺼지게 된다. 비는 불을 피한다(접근한 것들은 뜨거움에 흔적이 없어지게 된다). 그 단순한 관계 속에 사람들의 생활이 있었다. 그 생활은 이전에 판단이었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의도이자 선택, 혹은 결정이었다. 통로의 끝에 보물이 없는 지하 미궁이 무가치한 것처럼 나는 그 마을에 가고 싶었다. 거기서 내가 모르는 언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부끄러움 때문에 거세졌던 비가 그쳤다. 오로라인 것처럼 일그러지고 납작 눌린 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 마을의 중앙에는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수로가 있다. 거기서 아이들이 뛰논다. 나는 아까 내가 느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반팔 티를 걸치고 그 물 안에 뛰어들었다. 아이들이 신나는 비명을 질렀다. 몸이 물에 젖어서 윤곽이 보였다. 물이 크게 너울졌다. 그 물이 수로 바깥으로 튀었다. 미궁 끝에 누군가 잠들어 있다. 그 사람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웃었으면 좋겠다. 강에 내 열망의 흔적들이 퇴적되어 있다. 무지개가 끝나고 밤이 왔다. 다시 내일 아침이 올 것이고. 유리잔을 품에 안은 채로 나는 잠들었다. 유리잔은, 거기에 물을 따르면 물이 차오른다. 그렇게 담겨 있는 물을 마신다. 이 마을에서는 물 대신 양젖을 마신다. 냄새가 심하고 역할 것 같다. 나는 혼자…… 혼자서 양젖을 마셨다. 코를 집게손가락으로 막고서. 그때 다가온 아이들이 날 보며 웃었다. 바보 같다고 했다.

2023년 4월 27일 목요일

망각

자연재해가 나오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있다. 집에 두고 온 식탁은 조용한 크리스마스 전야를 위한 것이다. 으레 그렇듯 완고한 성격의 고지식한 할아버지가 나오고 있다. 이 영화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자연재해가 나오는 영화를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자연재해 자체에 주목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다. 자연재해는 인상적일 수도 있음을 전자가 보여준다면 후자는 전자보다 재미있다. 통속적인 재미라는 것은 영화를 고를 땐 지나치기 쉬운데(아름다움이나 미감을 우선시하는 취향) 일단 영화관에 앉아서 나가기가 어렵게 되면 중요해진다. 재미라는 것은 내 생각엔 편안함과 비슷한 영역에 있다. 재미보다도 더 재미있는 것이 편안함이다. 그것은 매번 같은 얼굴이 나오는 꿈인데 그 같은 얼굴을 보더라도 아무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거나 같은 골목을 수십 번, 수백 번을 돌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편안함은 길을 잃은 것이고 그것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도하는 기질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그런 편안함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더라도 지치지 않게 해준다. 내가 영화관에 갔다는 것은 거짓말인데,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영상을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서 아쉬운 점은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영화관에도 갈 일이 없다는 것이다. 편안한 영화는 그나마 볼 수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그런데 편안함이라는 것은 사실 행위의 정도가 미약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지 않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일, 보지 않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영화가 편안한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통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저항이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생기는 것 같은데, 그 저항이 사실은 행위의 강렬도다. 그러한 행위들이 나중에도 기억이 나게 된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해도 편안함, 잊힌 편안함은 희끄무레하게 그 사람을 이끈다. 사람들이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다. 나도 그들 중에 하나다. 나는 자연재해가 수단으로 격하되는 걸 보고 싶고, 보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영화를 보고 싶다. 사실은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고 싶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들, 그러니까 편안한 것들은 어떤 느낌이 있다. 영화의 2분짜리 광고를 넘기지 않고 다 볼 때에는 그 편안함에,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그런 거에 어쩌다 보니 매료되어서다. 그러니까 다 보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 편안함이란 결국 말 없는 것들에 대한 희망, 침묵, 살아도 살지 않는 것과 다름없음을, 아주 조용하게 그쪽 가까이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걷고 있다. 조금 긴 어두운 통로다. 그 밖에는 크리스마스 전야제가 있다. 그때까지(다 걸을 때까지)는 어둡다. 영화관처럼. 나도 다 보려고, 그러니까 결말을 위해 무언가를 보는 족속 중 하나이고 올해같이 편안한 크리스마스엔 모든 TV 채널에서 기이하게도 거의 다가, 지나간 명화를 틀고 있다. 그 영화들은 그런데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 내용이 생소하고, 옛날 것들인데 그런 게 있다는 게 이상하다. 따듯한 성탄 전야였다. 나는 통로를 지나왔고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발밑이 조금 차갑다. 나는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2023년 3월 5일 일요일

하늘 끝을 잡았으니까

이 일련의 넘버들은 규산과 강철의 혼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거푸집 안에 들어 있는 칼들은 대장장이에게 있어 마주 다가온다. 시선을 거기로 향하면 자세히 들여다 보이고 결함품은 부러뜨려 녹인다. 칼을 부러뜨릴 때는 주의해야 한다. 칼을 돌 사이에 넣고 발로 밟아 부러뜨린다. 그러면 잘 만들어진 칼만 진열할 수 있다. 너무 많이 만들지는 않지만 불이 식도록 적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래 만들어오고 있다. 이 도시의 직업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루어지고 대장장이는 7년 동안 도제 생활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무뚝뚝했는데 장인들은 무뚝뚝해도 된다. 오히려 그런 장인들에겐 믿음이 간다. 말이 너무 많은 대장장이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쇠에게는 자주 말을 걸어야 한다고 스승은 말했다. 대장장이의 스승은 그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했는데 언젠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은 하늘 끝을 잡았노라고. 그때부터 대장장이는 하늘 끝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가령 이 칼은 하늘 끝을 잡을 수 있는 칼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부러뜨리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잘 만들어진 칼인 것은 분명하기에. 대장장이는 하늘 끝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 말을 위주로 칼을 만들었다. 어쩌면 스승도 뭘 알고 한 말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스승은 그렇게 말하고서 1년 동안 칼을 만들다가 이젠 더 이상 칼을 만들지 않고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만화 그리기였는데 스승을 만나러 가면 타츠키라는 만화가에 대한 얘기만 했다. 자기는 지금 행복하며 타츠키의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스승은 칼 만드는 일이 막힌다면 재료의 비율을 처음부터 바꿔보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내가 칼 만드는 일이 막혔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대장장이는 그러나 스승의 조언대로 비율에 관심을 갖고 변경해 봤다. 이제 그다음의 넘버들에는 흑수정이 조금 들어가게 되었고 만들어진 후의 칼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칼은 조금 더 매끄럽게 되었다. 그렇담 이것은 하늘 끝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하늘 끝을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의외로 지상에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야 하늘의 끝은 지상이니까. 하늘 끝을 잡으면 스승처럼 칼 만드는 일을 이내 그만두게 될까? 지금 칼을 안 만드는 스승은 그의 말대로 행복한가? 칼을 부러뜨릴 때마다 대장장이는 점점 더 무감하고 칼을 진열할 때마다 대장장이는 점점 더 무뚝뚝해진다. 하늘 끝을 잡는 것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서커스에서 기수들이 눈에 안 보이는 줄에 의지해 공중을 유영하고 있다. 지상과 실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하늘 끝을 잡은 것이었던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대장장이는 알 수 있었다. 저게 아닌 것은 분명하다, 대장장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맞는 것은 뭐지? 칼은 가죽을 무두질하는 도구가 될 수도, 만든 이의 심상을 구현하는 캔버스가 될 수도 있다. 스승이 하늘 끝을 잡았다고 말한 이후의 넘버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 칼들은 판매되지 않고 협회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냥저냥 만든 칼은 아니었나 보지. 그곳으로 가보니 ‘하늘 끝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대장장이가 만드는 칼들과 경향이 비슷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있었다. 물론 칼이 우주의 심처에서 색이 혼합되는 듯이 미묘한 반사광을 냈지만 그런 기술은 대장장이도 할 줄 알았다. 더 복잡한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대장장이는 칼을 보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느꼈다. 그건 단순히 뭐가 뛰어나고 장점은 이렇고의 문제가 아니라, 칼끝에 천사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들어보니 천사는 다소 민망한 불협화음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미세한 불협화음이기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그것만을 의도한, 파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알아채는. 그러니까 하늘 끝의 정체는 이 경우만 보자면 불협화음을 구성해 천사를 그곳에 붙잡아 두는 것이고 천사의 성격을 알 수 없으니 그건 거의 운에 달린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늘 끝을 잡는다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된 대장장이는 좀 황당했다. 민망함과 황당함, 제임스의 시집에 자주 나오는 감정인 이것은 교양과 예술의 관계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든다. 저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아이들은 다소 민망하게 한 사람을 지향하고, 다소 황당하게 서로들 대화를 나누므로, 하늘 끝을 잡았다기보단(천사를) 하늘 끝에 닿은 이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늘 끝을 잡았으니까. 내가 산 책의 귀퉁이에 접혀진 페이지가 보인다. 이것은 천사가 접은 것일 수도 있다.

2023년 2월 19일 일요일

셰익스피어의 신발

그러니 부서지지 말아. 네가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라. 바람이 불어도 미끄러지지 않고. 눈이 와도 무뎌지지 않고. 그리고 비가 와도 끄떡없는 사랑으로. 네가 그대로 있는 것은 작은 동물들이 널 눈여겨본다는 뜻. 인간의 몸이 아닌 그늘을 만들어주는 보금자리나 기대어 올라설 수 있는 장소로서 인성이 작용할 거리가 없는 거라는 거. 넌 거기 혼자 있으면서 대낮과 심야의 구분이 없는 작은 오후 6시경으로 웃을 수 있어. 네 옆에 있는 골목들. 새벽에 그 거리를 걷고 있는 낯선 이들. 나도 그중에 하나였어. 망부석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셰익스피어는 어깨에 견장을 차고 있군. 새벽에 그렇게 걷고 있는데 다른 이의 발걸음 소리가 나고. 나는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어. 왜 이런 곳에 나 말고 사람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났어. 그와 나는 결국 같이 걷고 있었어.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질 모르고. 네가 생각하는 세상의 기묘하고 그걸 생각해낸 사람이 귀여워지는 함수 관계들을 엮으면 거미줄이 되길. 여기 거미줄이 있고 시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거미가 있지. 그 거미와 같다. 그 거미줄과 같이 우리는 내부에서 건물을 높이 올리는 사람들. 네가 장소로 기능할 즈음부터 해서 숲속에는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도어락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나길래 왜 사람들은 새소리들을 유용하게 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 씨알들이 땅속 깊이 잠겨 있고 그것들이 자라날 즈음부터 해서 잡초들이 무성히 엉긴 네 신발 밑으로 저벅저벅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 그러니 부서지지 말아. 부서진다는 것은 우선 풍화를 견디지 못한 것들이 돌가루를 날리기 시작한다는 뜻. 그것은 곧 비가 내려 돌가루들이 다시 씻겨내려갈 것을 말하고. 한번 부서진 것은 다시 부서지기 쉬우니까. 웃김과 같지. 넌 웃긴 얘기를 많이 생각하고. 넌 그대로 있고. 평소에는 무거운 발이 셰익스피어 같았어. 왕이 노하였다. 신분이 높은 이들은 허름한 의복을 입고. 신분이 낮은 이들은 잘 다려진 군복을 입고. 중간의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이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네. 다른 성별의 옷으로 바꿔 입었지. 어울리지 않았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한 사람 덕분에 연회의 면이 살았지. 아니, 이렇게 잘 어울린다니! 왕의 기분을 풀어주는 연회였어. 사치를, 허영을, 격식을, 교양을 왕에게 가르친 이들은 꼭 그만큼의 명예가 있었고 다행히도 셰익스피어는 그중 하나였다. 넷 중에 뭐인지는 몰라도.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어. 왕에게 그렇게 하듯.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 바뀐 옷에 어울리는 단 한 사람은 거기서 구혼을 받기도 했는데, 허름한 옷을 입은 귀족들이 주위에서 품위 있게 웃었지. 물론 장난 같은 인사였을지도 몰라. 그런데 거기서 딱 한 사람만큼은 진심이었어. 그게 나였어. 그러니 부서지지 말아. 우리는 옷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었어. 돌가루를 흘리지 말아. 부서지지 말아. 내가 진심이었듯이.

2023년 2월 17일 금요일

어릿광대의 웃음

언젠가 헤살 놓는 일이 어러워졌을 즈음부터 해서 그 시절이 익살맞아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이 종이배를 놓으면 그중에 몇 개가 이 시절로 도착했다. 그랬으니만큼 내 얼굴에 수심을 띤 것을 거울로 보고 내 얼굴의 가장자리로 손을 가져갔을 때 거울 속에 있던 나는 웃었다. 어떤 사람들은 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사람들은 그 부분을 건드려주기만 해도 운다. 그러나 운다는 것은 그 당사자가 결정하는 일임이 맞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울지 않는데 신은 그런 사람들이 쓰고 있던 안경들을 수집한다. 안경점에 갈 때마다 헌것은 버리고 오는 나날들. 그 나날들 또한 익살맞아지기 시작했다. 어릿광대가 누워서 잠자고 있다. 동물처럼. 가끔 몸을 뒤집어서 배 부분을 긁기도 한다. 나도 어제 배 부분으로 눈물을 닦았어. 그것이 광대의 레퍼토리.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고 광대가 되기 위해선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어떤 어릿광대들은 서로의 귀를 잡고 있고 어떤 어릿광대들은 자연 풍광을 보고 몰라 한다. 그런데 내 얼굴에 어린 수심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혹시 울고 싶은 건 아닌지? 손끝을 건드려. 그게 신호야. 울어도 된다는 신호. 요정들이 그렇게 속삭인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하지만 눈물을 닦으면서 울어야 해. 자기 얼굴에 신경 안 쓰다간 부끄러워질 수도 있으니까. 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울음이 터져 나오는지 모르는 채로 운다. 나는 그런 순간을 안겨주고 싶은데. 왜인지 모르게. 나는 눈물이 나기도 한다. 나도 울고 싶은 사람이었을지 몰라. 신에게 내가 인간임을 납득시키기 위해. 나는 울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자신이 신임을 납득시키지 않아도 된다. 인간에게 납득이 필요한 이유는 안 그러면 너무 가벼워져 날아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번 날아오른 사람은 영원히 무거워질 수 없대. 그러니 웃는 것에도 조심을. 웃는 건 가벼워지는 일이니까. 가벼워지면 코미디언들은 더 무게를 잡으려 들지. 더 웃게 하려고. 웃는 사람들을 더더욱. 그래야 그 사람들은 돈을 버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의 레퍼토리에 울음은 없을걸. 사람은 꼭 혼자서만 울어야 하지. 안 그럼 부끄러우니까. 그렇지만 웃음 근처에 울음이 있는 것은 맞아. 웃음은 일단 사람들을 넘어오도록 만들지. 그때 노래를 불러주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울게 돼. 울음은 어쩌면 웃음과 마찬가지로 울수록 가벼워져서. 그래서 날개 달린 천사가 되는지도 모르는 일이야. 중앙에 있는 어릿광대가 만족해하며 웃고 있다. 위와 같은 레퍼토리를 생각하고서.

2023년 2월 11일 토요일

책을 읽는 나날

책을 읽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내가 책을 읽는 방에는 주황색 조명이 있고 오렌지 주스를 항상 컵에 따라놓는다. 유리컵의 안에는 물기가 조금 맺혀 있다. 책은 읽는 사람들을 낮은 데로 이끈다. 저자의 의도라는 것은 결국 해석하기에 달렸는데 나는 그 해석을 어떤 책임감 없이 방기한다. 그리하여 낮은 데에는 웃음 또한 있다. 저속한 앎을 의도했을 때 웃음이 뒤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내가 읽는 글에도 그렇지만 분명한 건 코미디언들이 자신의 대본을 읽으면서 웃는다는 것이다. 웃음은 그런 것이다. 고상하기도 한 웃음. 자신이나 타인이 낮을 때를 기억하게 한다.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책은 극본이나 작품 같은 것이 아니어서 저속한 앎을 유도하지 않는(읽는 내내) 경우가 많다. 어떤 작가의 경우 숭고의 감정이 있는데 내가 해석하기로 그것은 HBO에서 만들어지는 대규모 스릴러 극과 구분되기 어렵다. 텍스트는 더러 판타지(동화적)일 때가 있고 일상을 다룬 책을 나는 거의 읽지 않는다. 패러디 또한 읽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와 관련해서 나는 단단히 판타지를 갖고 있다. 읽는 책은 오로지 내가 고른 것으로만 한정되며, 그것은 나만의 집 이 장소여야만 하고, 내가 직접 사 온 오렌지 주스를 따라 마신다는 것이다. 사실 이 방에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생활을 가끔 떠올리기만 했었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나날을 나는 아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결코 짧아져 나에게 돌아온 적이 없었고 다소 필요에 의해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는 일이 굴절된 채로 과거의 인상에 계속 남아 있었다. 내가 책을 읽는 나날을 판타지로 만든 건,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하여 나에게 도달하는 일이 없도록 만든 건 책이 나에게 있어 더는 매력을 끼치지 않게 만들고 싶어서였다. 더는 어떤 책도 나에게 도달하지 않았고 나는 이 외로운 장소에서 의자에 앉아 손님들이 내게 권하는 책들의 서지정보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만 하면 되었다. 나는 낮은 데로 가기 싫노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은 사실 더 분별없는 데로 향하라고, 더 그런 데가 있노라고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하지만 오렌지 주스를 따라놓고 마시지 않는, 내게 영원히 도달하지 않는 이 오후 8시의 시각이 난 마음에 들었다. 돈이 없어서 오렌지 주스를 살 여유가 되질 않았고, 그 즈음에 난 항상 옆으로 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오늘 나는 책 하나를 구했는데, 과거에 있었던 판타지였다. 그를 위해 오늘 8시의 시간을 비워두었다. 하늘에 떠 있던 성 같은 환상을 나는 포집할 수 있다.

2023년 2월 2일 목요일

노래하는 소녀

애쓰던 사람은 이제 없고 저마다 방 안에 누워 휴대폰을 보거나 잠 속을 깊게 유영했다. 애쓰던 사람이 이제 없다는 사실은 이제 사람들의 머릿속에 없는 듯했다. 사람들은 어색한 순간에 웃었다. 그 웃음은 그 소녀가 슬퍼했던 것이다. 잠을 청하지 못하는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하는 그 시간에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아이들은 꾸벅 졸았다. 내가 아는 사람은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의 잠을 깨우지 않는다는 것으로 무언가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잠을 자지 못하거나 깊게 잠들지 못한다. 그것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다. 애를 쓴다는 것은 일정 부분 소진한다는 것이고, 방 안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 사람들은 그 일을 하면서. 누워 있는 사람의 머리 옆에 있는 그 휴대폰에서 노래가 나온다. 어제 산 책은 읽기에 어렵지 않다소설이라기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나 혹은 건물에 가깝다그런데 사람들은 이미지만으로는 건물을 잘 짓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것의 어떤 부분을 줄글이나 산문으로 불렀는데, 그러면 혼자서 애를 쓰게 됐기 때문이다애쓰던 사람이 이제 없는 지금, 나는 에고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에고는 사라진 자아의 흔적이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고 사실은 뭔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리듬이나 혹은 폐건물. 여기는 마천루가 높이 솟은 광경이 되고 싶어 한다. 거기에는 근미래 기술이 쓰이며(스팀펑크), 시점은 과거의 것이다. 애쓰던 사람이 모두 사라진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며 당신은 한순간 다시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놀라울 정도로 그 사람들은 미형이었고 그 사실이 왠지 어색했다. 내 시점은 애쓰던 사람이 사라지기 전의 것이어서. 이미 그렇게 애쓰던 사람이 사라졌는데도. 미래에 폐허로 발견되는 기계 도시 문명처럼 나는 여전히 작동한다. 나는 그리 애쓰던 사람이 아닌데도. 애쓰던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다는 사실은 나를 잔잔한 쾌락에 젖게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 평화로움 안에서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노래는 다른 사람들의 잠자는 일이 완성시킨다. 헤어지고 나서 자동차에서 울리는 배기음처럼. 애쓰던 사람들이.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