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30일 화요일

초월일기 9

5월 30일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벌써 올해의 반 년이 지나갔다니! 두둥, 하지만 6월부터 만 나이가 적용되므로 나의 나이는 되려 한 살 어려진다. 시간을 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뇌는 너무 무지해서 우기면 다 믿는다고 한다. 나는 요즘 생각하는 대로 된다, 라거나 말하는 대로 된다, 같은 것을 꽤나 신뢰하는 편이다. 가령 과제가 하기 싫을 때 나는 중얼거린다. 아 과제하고 싶다. 아 과제하고 싶다. 과제 재밌다. 그러면 일단 어떻게든 하게 된다. 언제 하지. 왜 하지. 이런 말 하면 잘 안 됨. 거짓말이더라도 재밌다. 오 쉽다. 이런 식으로 나를 세뇌시키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임. 근데 문제는 뇌랑 심장은 따로 논다는 것이다. 가령 수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뇌가 원하는 수면 시간과 심장이 원하는 수면 시간이 다르다고 한다. 심장이 더 중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심장이 뇌보다 더 장시간의 수면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중력의 영향을 더 받게 되면 무게가 더 무거워지고 무게가 더 무거워지면 에너지를 더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 수면을 취하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 것임. 아무리 정신 승리로 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도 그러면 결국 병이 나게 된다는 것.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한 아주 많이 쉬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둔다. 틈만 나면 쉬려고 하고 더 자려고 하고 많이 먹으려고 한다. 난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건강하기만 하면, 살아만 있으면, 결국 언젠가 좋은 일이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난 아직도 좋은 일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가? 난 매우 좋은 일을 믿고 기다리고 있다. 난 항상 좋은 것을 믿고 기다린다. 난 항상 내가 그런 것을 믿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2023년 5월 29일 월요일

14






중세에 유명한 한 문학가는 자신을 등산가라고 소개한다. 등산을 취미화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역사가는 쓴다. 그는 집 근처에 있는 뒷산을 자주 오른다. 정상까지 가는 데 딱 30분이 걸리는, 왕복으로 1시간. 점심 먹기 전에 잠시 들렀다 오기 좋은 산이다. 그는 아침을 많이 먹는 편이고, 점심 시간까지 소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화가 되지 않는 그 시간에 그는 A를 향한 사랑의 시를 쓴다. A는 그와 짧은 연애 후 헤어진 연인으로, 사실 A는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연애 기간 동안 A는 그가 출간한 시를 읽었고, 그 시에 나온 대상이 자신인 것 같은 불쾌감, 하얀 속살이니 부드러운 살결이니 하는 단어에 소름이 끼쳤고 다음 날 이별을 통보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고, 그녀를 찬미한 것일 뿐인데. 아무튼 그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고통과 그녀를 잃은 고통을 바꿔치기 하며, 이제 이별에 관해서 쓴다. A는 이별 후에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도시로 가버렸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설명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가난보다 큰 문제냐고 되물었다. 그들은 그녀가 목장에서 계속 일을 해 집안에 보탬이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녀는 싫다고 했다. 그녀는 목장이 적성에 맞지 않으며,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힘들다고, 또 목장 근처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자주 오는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들이 그 공원에 서서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게, 다른 동료들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지만 그녀는 그게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가족들이 자신을 이해하든 말든 그녀는 다른 도시로 갈 것이고 어디로 갈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게 또 소문이 날 테니까. 그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았다. 나중에 발견된 그녀의 동료의 일기에서 그녀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그것이 그녀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걔는 가족도 집도 다 버리고 여기로 와서, 우리 동네의 방언을 배우고 있다. 그녀는 당연히 여기 오래 산 우리보다 말하는 것이 서툴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가 여기 온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그녀는 이 동네 목장에서 일한다. 예전에 목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굳이 자기 동네에서 하던 목장 일을 하러 여기까지 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동네 사람들은 말한다. 사실 나도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 동료이기 때문에, 보란 듯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녀 앞에서는 가장 친한 동료이지만, 한편으로는 동네 사람들과 같은 생각이다. 나는 이 마음 때문에 괴롭다. 

 

 


2023년 5월 25일 목요일

초월일기 8

 

방금 전

엄청나게 감동적인 휴먼다큐를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암으로 떠나보낸 뒤에도 계속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는 다큐였다. 다큐에 나온 그 사람은, 앞으로도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은 없다며, 선녀의 날개가 바위를 스치는 일은 생에 한 번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생에 한 번뿐이라 해도 충분한 것, 그것이 사랑일까?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 헤어지고 지금은 친구로 잘 지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과 처음 헤어졌을 때는 나도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난 너무 좋은 사랑을 했고, 얘보다 내가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사랑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쩌면 또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있지도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건 내가 이 사람과 완전히 헤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최근에는 친구랑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어째서 우리는 뭔가와 헤어지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걸까, 물었지만 나는 헤어지는 데 쏟는 시간들은 항상 짧게만 느껴진다 내 생각에 정말 소중하게 여겼던 뭔가와 헤어진다는 건 내 평생의 시간을 쏟아도 불가능해야 하는 건데, 

생각보다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잊는다 내가 소중히 여겼던 것에 대해 

잊지 않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잊어버렸어 왜일까

그런데 내가 정말 잊었을까?





2023년 5월 23일 화요일

소각로

우리 출판사는 장르 전문 출판사고요... 로고는 시옷 기억 리을...

나는 엎대어 있습니다. 벌벌 떨고 있어요. 누군가의 손이 양 겨드랑에 들어와 나를 일으켜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하죠. 그 누군가는 역사일지도 몰라요. 주저앉고 싶어요.

사고실험을 한번 펼쳐보는 거죠. 피가 거꾸로 솟을 얘기일지 모르지만, 만약 장르문학을 ‘부정적인 것’의 위치에, 순문학...을 ‘긍정적인 것’의 위치에 놓은 뒤 ‘장르’와 ‘순’을 가르는 기준 단 하나를 맘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일테면 고리끼급 권력(농담이에요 농담)이 주어진다면? [눈물로 이르노니 순문학에 육박함] 라벨을 붙일 수 있는 권한을 통해서, 역사의 어둠 속에 재로 흩어져선 안 될 ‘장르’들을 골라내는 그런 끔찍한 사명을, 서로 자기는 절대 싫다고 하는 와중, 눈물의 제비뽑기 끝에 내가 맡게 된다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선 내가 ‘사면’해야만 한다면? 내가 소각로의 마지막 문지기라면? 등 뒤로 불구덩이를, 앞으로 말린 꽃더미 같은 ‘장르’들을 두었다면?

나는 고심하다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장르’에서 널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약한 습속―이 사고실험에서 굳이 그 라벨들을 들먹이는 이유―, 장르가 어쩌면 지닐 수도 있었을 재미와 가치를 완전히 망치는 진실로 고약한 습속 하나가 바로 ‘사람(들) 욕하기’라는 것이지요. 불구덩이 앞에 선 나는 그것이 바로... ‘장르’와 ‘순’을 가르는 핵심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돼요. 그것은 단순히 욕할 만한 개성(들)이 등장한다는 뜻이 아니고, 얇은 악역(들)의 등장을 일컫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얕다는 뜻도 아니며... 그럼 무슨 뜻이죠? 등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나도 뭔가 생각이란 걸 해요... 대체 무슨 뜻이냐... 말린 꽃더미들... 소각로의 빛 앞에 입을 다문 무덤들... 그것들은 공동체에 대한 거대하고 강렬한 갈망처럼 보여요. 너무 강렬하기에 반대로 꺾였든, 반대로 꺾였기에 강렬하든... 사실 ‘순’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 그러는 것들(갈고리로 찍어서 던져버리고 싶은)도 수두룩 빽빽이죠... 어쩌면 그런 특성이 이른바 대중성의 한 축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런 걸 좋아하는 것이죠. 욕할 만한 그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타인 없이 작동하지 않는 개성들, 작동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는 개성을... 사랑하므로 욕하는 것이에요... 그걸 넘어서면서, 아니면 넘어설락말락하면서라도, [순문학에 육박함] 딱지를 나는 붙일 수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넘어선다니 뭔가요? 어떻게? 왜? 그리고 이 소각로의 의미는? 나 야만스런 독자는 이렇게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빠져들고 있어요... 그것은 즉,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해하셨어요? 투고하세요... 용서해보세요... 우리 출판사에 투고해보세요... 나는 주저앉고 싶습니다. 이 밤부터 새벽까지는요.

2023년 5월 22일 월요일

갑자기 같은 것

이 작은 웅덩이는 별것이 아닌데 그가 매일 들여다보고 있어 나도 가끔은 보고 싶어진다. 보고 있으면 둔하게 일렁이거나 한없이 검은 웅덩이인데 말하자면 그가 자신의 일부를 흘려 이 웅덩이를 만든 것이라 나로선 차마 보지 않을 수 없다.
웅덩이의 일부는 어느새 내 발밑까지 흘러와 있으며 흘러와 자주 고여 있다. 이제는 거의 차오른다고 말해야 할 것 같고 결국은 나도 웅덩이를 건너고자 목이 긴 신발을 신어야 할 것 같다. 다짐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미 다짐하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그를 보았다. 그는 긴 막대를 들어 웅덩이 앞을 막고 있었다. 어떤 계기라 할 것도 없이 나는 그에게 준비됐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가 막대를 올리자 나는 뛰어들었고. 등 뒤로 웅덩이는 생각보다 깊을 거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로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늠이 안 되는 웅덩이 속으로 어깨에 바위를 진 채였다.

양젖

유리잔이 있다. 거기에 물을 따르면 물이 차오른다. 그렇게 담겨 있는 물을 나는 나의 임의로 마셨다. 그리고 한 번 더 따라 마셨다. 나는 목이 말랐다. 그러니 한 번 더. 그러니 한 번 더. 이젠 목이 마르지 않았으나 나는 입안에 물을 넣고 가글을 하다가 버렸다. 나는 물과 놀고 있었다. 물을 좋아하는가? 물으면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물은 친근하면서 동시에 낯설고, 이 나라에서는 값이 싸고, 너무 필요한 것이어서 이미 익숙한 것이다. 필수적인 것들은 자신에 의해 잠식되고 장악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물을 따라서 그대로 싱크대에 버린다는 결정도 해봤는데, 거기에 별로 의미는 없었다. 이 놀이의 마지막 광경을 뭘로 하면 좋을지 생각을 하다가 아까처럼 유리잔에 물이 반쯤 차올라 있도록 해두었다. 물은 차오르는 것. 입을 대고 마실 때는 줄어드는 것. 물을 엎지르던 때를 기억한다. 사물에 대한 관심은 지루할 때 갖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지루한가? 물으면, 마치 물이 엎질러지면서 반짝이는 물의 조각들이 비산하듯이 ‘그렇다’라고 하여야 한다. 나에게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샤워하면서 내 몸에 뿌려지는 물을 입에 담고 있었다가 뱉었다. 수영장에 갔던 때를 기억한다. 그 냄새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면서 동시에 수영장에 가보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수영장이 누군가에겐 그 자신의 열망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카모메 식당에서 본 그 수영장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엔 물이 많고 그 위에 떠다니는 사람들도 꼭 수도꼭지에 흘러나오고 있는 물 같다.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것은 강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흐르기, 강의 유속이 강해지는 구간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높기 때문이고 다시 아까 말한 열망이라는 감정과 닮은 데가 있다. 열망은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높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퇴적물처럼 어떤 바라는 마음들이 쌓인 것이다. 쌓여서 강의 둑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터진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그것이 저 멀리로 작은 점이 될 때까지 흙물이 되어 흘러간다. 흘러간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렇게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쓸려간다고 해야 한다. 열망을 갖고 있는 인간은 강의 수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있는 댐이고, 쓸려간다는 것은 과도한 물의 압력으로 인해 아래에 있는 퇴적물들의 지형에 영향이 가는 것을 말한다. 그 열망이란 자기에게 퇴적된 지형에, 그러니까 관련된 것이다. 열망은 모두가 다르다. 어떤 열망은 그것을 닮지 않았다. 강일 수 있고 유리컵에 반쯤 차오른 물일 수도 있다. 그 물을 담고 있는 것은 잔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잔이다. 나는 한가로웠고, 내 열망이 자극되지 않는 한 나는 그것을 잊어버린 채였다. 높이 쌓여 있는 것을 모르고서. 지루했다. 정말 지루하였다. 왜 어떤 인간적인 상황이나 조건들은 높이를 가지는가? 왜 어떤 것은 판타지가 되고, 어떤 것은 우울감이 되는 걸까? 그 모든 것들이 계속되었다. 가령 예를 들면 수영장에서 코로 물이 들어올 때가 있다. 한번쯤 겪어봤을 것……. 그럼 좀 맵고,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떠오르나? 아무 생각 없었을 개연성이 크다. 수영에 더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물에는 몰입할 수 없다. 너무 단순하고, 용도적이다. 그것 없이 살 수는 없지만 정작 그것에 몰입할 순 없다.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것들은 사실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다. 나는 강에 몰입하였다. 그리고 유리잔에 몰입을 한다. 그리고 내 열망에 몰입했다. 아마도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으므로, 제대로 몰입이 되진 않았다. 나는 사물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지루함 때문에 생긴 비약이었다. 그것이 그것의 연장일지라도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 몰입이 가능하다. 내 원망은 어떤 것이 결국 물인 데에 있었고 내가 흐르고 있는 강은 유속이 잔잔했다. 내가 잊어버린 것들이 아래로 퇴적이 되어 있었다. 비도 오지 않는 날이었다. 따라서 내 열망도 자극될 리 없다는 것 따위를 떠올리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비장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는 임의적인 어떤 마음. 마음이 아니라 마음가짐. 마음가짐에 대한 가짐. 대한……. ~에 대한……. 어떤. 어떤 생각들은 연속되었는데, 그것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가 몇 개 이상의 강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이전에 비해선 좁은 너비가 되어 가다가 끊어졌다. 나는 내가 물 말고는 원하는 것이 없다고 자각했다. 내 몸이 모래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럼 흘러갈 수 있고 손 틈 사이로 비어져 나올 수 있을 텐데. 내 열망은 내 존재에 관련된 것이었다. 유리잔에 물이 반쯤 차올라 있다. 나는 거기에 물을 다시 따른다. 넘칠 때까지 따른다. 유리잔이 내게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지루하였다. 그래서 유리잔의 말을 만들었다. ‘생각 외로 부끄러운 일이야, 그건.’ 그렇다. 내게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맛보며 웃었다. 무미였다. 맛이 없다는 게 무의미하기도 했다. 부끄러움을 맞는 순간 나는 몸이 곤두서는 듯했다. 그것은 내가 잊어버린 희극이었고 날은 순식간에 비 오는 날이 되어 유속이 빨라졌다. 나는 강가로 걸어 나와 퇴적들이 전부 쓸려나가는 걸 보면서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의 안위가 나로 인해 지켜졌다.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위험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내 몸에 줄을 걸고 미궁에 들어섰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줄밖에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 부끄러움 때문에 나는 모험을 나온 것이 되었다. 나는 물과 부끄러움으로 관계했던 것이다. 물이 어서 이리로 오라고 날 끌어당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수영장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수영장에는 물이 많고 이 잔에 들어 있는 물의 양은 그보다 너무 적다. 나는 물을 더 따랐고 가득 차 오른 물의 표면이 완만한 곡선을 이뤘다. 나는 부끄러움을 발견했지만 아직 재미가 없었다. 손으로 물의 끝을 찍자 손가락 끝에 물이 묻었다. 그리고 잔 옆에 물이 흘러내려 묻었다. 내가 그것을 재미있다고 여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쌓은 퇴적들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고 생각하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자 비 오는 날은 점점 더 극심해졌으며. 그리고 비가 멈추자 이름 모를 마을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돼지를 구웠다. 불이 비에 젖으면 꺼지게 된다. 비는 불을 피한다(접근한 것들은 뜨거움에 흔적이 없어지게 된다). 그 단순한 관계 속에 사람들의 생활이 있었다. 그 생활은 이전에 판단이었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의도이자 선택, 혹은 결정이었다. 통로의 끝에 보물이 없는 지하 미궁이 무가치한 것처럼 나는 그 마을에 가고 싶었다. 거기서 내가 모르는 언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부끄러움 때문에 거세졌던 비가 그쳤다. 오로라인 것처럼 일그러지고 납작 눌린 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 마을의 중앙에는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수로가 있다. 거기서 아이들이 뛰논다. 나는 아까 내가 느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반팔 티를 걸치고 그 물 안에 뛰어들었다. 아이들이 신나는 비명을 질렀다. 몸이 물에 젖어서 윤곽이 보였다. 물이 크게 너울졌다. 그 물이 수로 바깥으로 튀었다. 미궁 끝에 누군가 잠들어 있다. 그 사람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웃었으면 좋겠다. 강에 내 열망의 흔적들이 퇴적되어 있다. 무지개가 끝나고 밤이 왔다. 다시 내일 아침이 올 것이고. 유리잔을 품에 안은 채로 나는 잠들었다. 유리잔은, 거기에 물을 따르면 물이 차오른다. 그렇게 담겨 있는 물을 마신다. 이 마을에서는 물 대신 양젖을 마신다. 냄새가 심하고 역할 것 같다. 나는 혼자…… 혼자서 양젖을 마셨다. 코를 집게손가락으로 막고서. 그때 다가온 아이들이 날 보며 웃었다. 바보 같다고 했다.

2023년 5월 19일 금요일

13

 



그는 시간이 나면 뭔가를 쓴다. 시간을 내서 쓸 때도 있다. 그가 쓰는 것은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다. 실존 인물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그는 직업상 하루에 많은 사람을 만난다. 역사책에 나오는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도 많다. 그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판매한다. 그는 오늘 만난 사람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대화를 하며 웃다가 갑자기 초점을 잃어버린다. 갑자기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린 듯하다. 내가 왜 여기 있고 이 사람들과 웃고 있는지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 같다. 그는 그 상태로 마치 아직 여기 있는 사람처럼 웃는다. 하지만 웃음만 있고 사람은 없다. 그는 다시 그로 돌아오지 못한다. 나는 갑자기 그에게 물건을 팔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내 태도에 당황하지만 나는 그것이 한편의 연극인 것을 안다. 


그는 물건을 팔지 못하고 돌아온다. 다행히 그는 프리랜서다. 안 팔면 그만이다. 밥을 조금 덜 먹으면 그만이다. 안 사면 그만이다. 그게 뭐든지 소비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사실 굳이 뭔가 살 필요는 없다. 그가 수입이 적지만 프리랜서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소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는 물건을 파는 직업을 가졌다.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지우고 다시 써야 하나? 아니다. 그럴 수 있다. 그는 언젠가 나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그는 긴 여행을 떠날 거라면서 짐을 싸고 있다. 그는 가방에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넣을지 매우 치밀하게 계산한다. 그가 행동하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는 가방 속에 어떤 순서로 무엇을 넣을지 모두 계산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수학을 잘했던 적이 없다. 그가 수학을 했다면 매우 잘했을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이 수학을 잘 못할 거라는 잘못된 계산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수학처럼 모든 게 명확한 세계를 거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신은 매우 계산적이다. 나는 세상에서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수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나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건 나와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나에 대해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런 식으로 한 권의 역사책을 썼고, 이미 방대한 분량이라고 한다. 그가 팔러 다니는 것은 바로 그 책인데, 아직 한 권도 팔지 못했다.

2023년 5월 14일 일요일

12

 



A카페 앞에는 작은 테라스가 있고 지금은 그늘이 져 있다. 그늘 아래서 커피를 마시는 커플이 보인다. 그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고 무언가 대화 중이다. 마침 누군가, 그는 등이 약간 굽어 있고, 그가 다가오자 그들은 그를 뚫어져라 보기 시작한다. 그는 그들의 눈을 피하며, 어디를 보는지 모를 곳을 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그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등이 굽었네, 자세가 나쁘네 하는 얘기들을 주고 받는다. 또 그가 허세가 있어 보인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허세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별로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 없는 사람들을 헐뜯으면서. 별로 자기에게 해가 될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쓰면서. 그냥 재미로. 그는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을 쓴다. 자기의 친구나 아는 사람들을 비꼬면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고, 그 영감을 준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내면서. 관찰하면서.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의 친구인데도 그는 나에 대해 쓰지 않는다. 그건 그가 나에 대해 쓰면 내가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에 나온 어떤 사람을, 너무 비꼬아서 본인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인물을 알고 있다. 그는 눈치를 너무 많이 보다가 결국 자기 눈을 파버리는 인물로 나왔다. 눈을 팠는데도 눈치를 보는 인물. 그건 웃길 수도 있지만 나는 웃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사자가 그걸 알아차리면 상처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본인이 자기가 눈치 보는 걸 농담 삼아 얘기 했었다면 그건 웃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가 아직 그 눈치 보는 일에 대해 극복하지 못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것과 그냥 평생 살아야 하는 관계가 되었을 것이고 그게 또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게 그의 인생의 동반자다. 그는 시선을 자주 피한다. 시간을 피하다 보면 어지러울 때가 있다. 그의 온몸이 긴장하고, 누군가 마주 오면 우선 밤새 쌓인 눈부터 피한다. 그는 세상의 종말을 떠올린다. 세상의 종말에 비하면 그런 눈 굴리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니지가 않다. 그는 집에서 라면 먹을 생각을 한다. 오랜만에 먹는 라면이다. 어제 냄새를 맡은 이후로 그 냄새가 떠나가지 않는다. 그는 갑자기 모르는 사람 앞에서 웃는다. 상대방은 그게 자기 때문에 웃는 것인 줄 알고 기분이 나쁘다.




2023년 5월 12일 금요일

거여와 취문

하나의 존재가 하나를 초과하는 개수의 자아를 소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자극적인 이야기의 소재로 채택되곤 한다. 일명 다중인격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이렇듯 나는 이것을 질환의 일종이라기보다 현상으로서 취급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의료 용어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fy Disorder)라 한다. 개칭에 어떠한 계기가 있는지는 미처 조사해보지 못했으나 (시기상으로는 1990년대라고 한다) 영문 및 한자어 표현에서 인간성(人格, personality)을 의미하는 표현이 빠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로 본다. 오직 인간만이 자아정체감을 가지고 있다는 근대적이고 집단적인 오만으로부터 한 보 벗어나 여전한 미지의 영역에 우리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소개하려는 사례는 그러나, 이 현상의 예외적 존재일 수 있다…… 정신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나 동일하고도 중첩된 위상을 지닌 두 존재는 (내가 제대로 들은 거라면) 각각의 이름을 거여와 취문으로 소개했다. 


나: 녹음기를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거여: 괜찮습니다.

취문: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셋 중에 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두 분의 사례가 어떤 점에서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는 다르다고 생각하시죠?

취문: 저는 바깥쪽에 있죠.

거여: 제가 안쪽.

취문: 둘이 합창도 할 수 있어요.

거여: 그러지 않을 거지만. 

나: 두 분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거여: 그런가요.

취문: 그렇겠죠.

거여: 아무래도 오래됐으니까.

취문: 서로 참을 만해야죠.

나: 두 분의 통합적인 존재라고 할까요…… 대표적인, 혹은 대외적인 명의 같은 것이 있을까요?

거여: 그게 없어요.

취문: 우리 둘 다 필요 없어서. 

나: 필요 없다는 것은?

거여: 우리는 자기가 둘 중에 본체라거나

취문: 내 쪽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 그게 대표 자아의 필요성과 무슨 상관이 있죠?

취문: 대표시키려면 권위를 줘야 하니까.

거여: 권위의 낙차가 발생한다는 거죠.

나: 당장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지만 두 분이 오래 상의한 결과가 그거라면…… 다른 질문, 조금 무례한 질문도 괜찮을까요?

취문: 하세요.

나: 말하자면 가죽을 맡은 내가 더 중요한 쪽이라든지, 내장에 깃든 내가 더 비중이 있다든지……

취문: 아까랑 똑같은 질문 같은데?

거여: 질문은 다르지. 답이 같겠지.

취문: 굳이 따지고 보면 제 쪽이 좀 더 하찮지 않을까.

나: 가죽이라서? 

취문: 그렇기도 하고.

거여: 먼저 생긴 쪽은 저라서겠죠.

취문: 저희는 몸이 붙어서 태어난 쌍둥이에 가까워요. 

거여: 바깥에서 보기에는 하나겠지만.

취문: 동시에 발생한 게 아니라서 쌍둥이 비유도 애매하지만.

나: 계속 무례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음에 양해를 구합니다. 두 분이 느끼는…… 글쎄요…… 존재의 중첩? 이 현상에 있는 장점이나 단점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거여: 장점이 있나?

취문: 아, 나는 단점이 있나? 했는데.

거여: 단점은 없다.

취문: 없어요.

나: 장점은?

거여: 더는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

취문: 아, 그렇다면 단점도.

거여: 더는 혼자 있을 수 없다. 

취문: 다시는.

거여: 영원히.

나: 또 다른 자아가 생길 가능성도 있을까요?

거여: 어쩌면?

취문: 어쩌면.

거여: 혼자서 거의 영원을 보냈다고 생각했을 때 다른 게 생겼으니까.

취문: 글쎄 어쨌든 우리가 짝짓기를 해서 만들 수는 없고.

거여: 그거랑은 다르지.

나: 번식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게 재미있어요. 둘 이상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말씀하신 번식이라든지, 또 단순한 방향으로 싸움이라든지, 음, 자리 바꾸기라든지…… 시도해보신 적, 경험하신 적이 있을까요?

취문: 이제 녹음기는 꺼 주셨으면 좋겠어요. 


대화는 이후로 조금 더 이어졌다. 어느 쪽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위상이 중첩된 두 존재는 내가 예로 든 상호작용 가운데 다수를 시도해보았다고 했다. 두 존재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묻자 한쪽은 다른 하나가 자살하는 것, 다른 한쪽은 추가 자아가 또다시 발생하는 것을 꼽았다.

2023년 5월 9일 화요일

야유회

무슨... 무슨 소리야?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그게? 무슨 야유회를 간다는 거야? 봄 야유회라고? 토요일? 일요일? 교외? 금토 아니고 토일로? 토요일 아침에 출발해서 일요일 점심 먹고 와? 토요일 오전 10시에 회사에 모여서 출발... 왜 주말에 가는지 뭐라고 이유도 들었는데, 뭐라는지 도통 모르겠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하여튼 내 주말에 간다는 거다. 진짜야? 진짜로 하는 얘기야? 패러디나 그런 거 아니고? 정말이라고? 왜야? 뭐야? 빠질 수 있어? 특근수당 받아? 아냐? 정말이야? 내가 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아니다. 나는 모든 사항을 제대로 정확히 들었다. 머리가 빙빙 돈다. 현기증 때문에 나는 휘청휘청한다. 휘청거리다가 책상을 짚는다. 책상 위의 화분을 붙들어 겨우 넘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휘청거리면서 무슨 문고리를 잡는다. 몸을 기대자 문이 열린다. 공교롭게도 사장실이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비틀거리며 들어가 들고 있던 화분으로 사장님의 대가리를 내려친다. 화분은 박살나고 뭐 하고 있었는지 모를 사장님 쓰러진다. 야유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사장님들 잘 봐둬. 사장님들 보고 있어? 이렇게 될 거야. 기억 잘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나는 사명을 찾아야 하지 불평을 늘어놓거나 사장님 때려잡는 상상을 하거나 어떤 식의 사무실-리얼리즘을 해내야 하는 게 아니다. 이래서는 사명을 찾을 수 없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사장님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내가 쓸고 닦은 바닥에. 불쌍한 사장님.

역시 내가 사장님이 되어야 할까?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야유회는 금토에 갈까? 나는 대가리를 맞고 쓰러진다.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목금으로 갈까? 모르겠다.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야유회를 갈까? 그걸 모르겠다. 야유회를 갈지 말지 사원들에게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안 간다고 할 수 있는 상황만 만들어진다면, 나는 아마 안 간다고 할 것이다. 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지? 나는 야유회를 설득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목금 간다고 먼저 정하고 물어야 할까? 하지만 적어도 1박은 절대 안 된다. 퇴근 시간 전에 끝나야 한다. 나는 완고하다. 사장 나는 사원 나를 납득시키기 어렵다. 사원 나는 조금 더 용기를 얻어 중재안을 제시해본다. 만약 1박을 한다면 퇴근시간 이후에 대해서도 계산을 제대로 해야 한다. 아니 그럴 거면 뭐 하러 가나? 그러나 가야만 한다면, 물러설 수 없다면, 너를 데려가야만 한다면... 너를 데려가야만, 나를 데려가야만...

야유회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휘청이듯 그 생각으로 기운다. 회사란 사실 야유회를 위한 것이다. 책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그것은 부산물에 불과하다. 우리에겐 모여서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할 따름이다. 만약 회사라는 곳이 우리의 생존을 볼모로 잡고 위협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우리에게 조금 더 호의적인 곳이라면. 사장도 다만 야유회 기획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야유회를 가장 잘 기획할 수 있는 사람으로 뽑으면 된다. 내가 사장일 이유도 없다. 기왕 모여서 시간을 보낸다면, 뜻도 좀 있으면 좋겠다. 만약 데려가야만 한다면 필요한 곳에 데려가야 한다. 너를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로 하는 곳... 죽지 않은 사장님, 거품 문 사장님을 내려다보면서, 출판사 ‘야유회’의 꿈도 점점 커지는 중. 야유회 문고는 어떨까? 이제 여행의 시대는 지났어. 이젠 야유회야. 좋아. 좋은 것 같다.

2023년 5월 3일 수요일

열하나

 




아침이다. 그냥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5시 25분이었다. 그냥 갑자기 눈이 떠졌다. 어제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서. 그냥 가만히 누워서 앞집에 사는 사람이 소리 지르며 통화하는 걸 듣고.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했고. 햇빛이 있었다 없었다 했는데 그냥 그걸 보면서.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면서. 그래도 잠깐 일어나 점심은 먹고 저녁은 안 먹었다. 저녁에는 정말 누워만 있었다. 배가 고픈 것보다 무기력한 게 더 커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든 것 같다. 꿈을 많이 꾼 것 같다. 그런데 기억은 안 난다. 이 집을 이 주 정도 비웠었다. 어제 나에게 분명 이득일 것 같은 일을 갑자기 취소하고, 왜냐하면 그 일을 하기가 싫었기 때문에. 그걸 그냥 받아들였다면 그냥 괜찮지 않았을까. 그냥 해도 됐을 거 같은데. 나한테 좋을 일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일상적인 느낌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고, 그러면서 왠지 모르게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행복해 할 수도 있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일이 하기가 싫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이미 마음이 떠났다. 그냥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며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도. 그 일이 하기 싫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융통성 없이 삼십 년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 너무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고 또 그에 적절한 논리가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결정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의 삶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해를 해보려고 하면 일부러 그걸 거부하려는 듯이 자신의 논리를 바꾼다. 그는 그렇게 살았고, 또 살아갈 생각인 듯하다. 그 사람과 함께 사는 나로서는 그게 너무 피곤하다. 

23년 4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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