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30일 화요일
교환회
여기까지 말했을 때,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최근 1년 사이 우리는 자의로 타의로 하던 일을 그만둔 처지였다. 우리 또래가 다 이런가? 어쩌다 보니 책 근처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친구들. 이 바닥에서도 무슨 셀렙이 나왔다고? 작가는 아니고 평자도 아닌데? 그러나 명의 있음 자체가 암의 있음을 가리키는 법... 뭐라뭐라 줮까는 소리들 주워섬기는 거도 지겹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역시 사업을 펼쳐야 할까?
최근 몇 달 불교계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교정하며 읽는 불교 이야기는 흥미롭다. 특히 윤회는 기가 막힌 발명 같다. 사제들의 발명이고 인민의 발명이다. 불교라는 비유 보따리를 풀어 헤친 다음 기독교라는 보자기로 다시 감싸 보면, 윤회는 사탄의 위상과 유사하게, 열반은 대속의 위상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예수가 대속과 부활을 통해 유일한 1윤회를 수행했다면 석가모니는 열반과 입멸을 통해 심판의 날을 개인화한 셈이다. 과연 사탄과 윤회가 대등한 위상이라면, 예수는 결국 1사탄 한 것이고, 석가모니는 저승의 개인화를 중단시킨 것이다. 각자가 부정하고 나온 토양에 따라 평등 문제를 푸는 해법이 음각이거나 양각, 어느 쪽이건 일자一者라는 정신병적 막무가내를 통해 평등을 상상시켰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 시절엔 정녕 그 방법밖에 없었는가? 그럼 지금은? 왜 이런 얘길 하지? 내가 뜻 없는 뇌내연구에 홀려 잠꼬대 늘어놓는 ‘바로 그런 아저씨들’이 되어 가는 걸까?
말하기가 그렇듯 쓰기에도 무작정 아름답고 권할 만한 면모만 있는 게 아니다. 추하고 어두운 면모도 있다. 오해, 몰이해, 교만, 합리화, 낭만화, 평면화, 일반화, 과대화와 과소화, 거짓... 파괴적인, 본래적으로 반존재적인 면모도 있다. 그런 특성들은 남뿐 아니라 쓰는 자신도 해코지할 수 있다. 부지불식간이다. 말은 그래도 어지간하면 앞에 듣는 이가 있다. 쓰기로 말하자면 제일 먼저 읽는 이는 나다. 쓰이는 것이 나의 것이 아닌 줄도 잊은 채 쓰고 만다. 쓰기의 어두운 면모들은 쓰는 이의 서투름이나 악의만으로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쓰기 자체에 포함된 고약한 가능성이고 부작용이다. 글과 세계 사이에는 그 특질상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둠의 불꽃이 있으며, 그 불꽃은 쓰기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경계될 필요가 있다. 인정되어야 하고 가다듬어져야, 통제되고 닦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일테면 ‘한 순간 존재하는 모든 글의 총합’으로서 총텍스트라는 것을 상상해 보자. 문학은 그가운데서 어둠의 불꽃의 캠프였다.
쓰기가 거의 모두의 것으로서 집체통신과 AI에 힘입어 자신의 제대로 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만방에 녹아든 오늘날에 이르러, 쓰기는 자신의 어두운 특성에 집어삼켜지고 있다. 쓰기가 쓰는 이를 집어삼킨다. 써야 하는 것이 있고, 써도 되는 것이 있고, 쓰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진대... 그 모두의 무차별 뒤섞임 속에 쓰기는 문학화되고 있다. 쓰인 것이란 근본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쓰기와 읽기를 통해서만 소통한다면 우리의 총영혼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상적으로 들리는 ‘누구나 쓸 수 있다 / 누구나 읽을 수 있다’의, 이 현실 속에서 종합은 ‘아무나가 아무렇게나 쓴 것을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읽은 다음 부지불식간에 아무렇게나 써서 또 아무에게나 읽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는 고래로부터 문제였다. 특히 종교와 읽기는 역사를 통틀어 떼어놓을 수 없었다. 모두가 아무것이나 읽지 못하도록 교도들이 기울여 온 넓고 깊은 노력을 톺아보면, 오늘날의 상황은 지옥 그 자체다. 그리고 더 더할 말이 없다. 우리의 사업 계획은 이렇다. 진실로 이 세계에 새로운 책을 더하고 싶지 않다면, 이미 충분히 괜찮은 책이 차고 넘치도록 많다면, 책들을 굳이 창고에서 꺼내지 않아도 된다면, 출판사라는 개념을 별로 앞세울 이유도 없다면, 우리에게 적절한 물리적 공간과 집기들이 주어진다면, 바로 그 공간과 집기들로만 지속될 필요도 없다면... 만약 우리의 사업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그러나 우리가 느끼기에 분명히 필요한 사업이라면, 그냥 그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판사 교환회의 등장이 이와 같다.
처음에는 하루면 될 것이다. 참가자 다섯 명만 모아도 된다. 남 주고 싶은 책을 집에서 가지고 온다. 테이블 다섯 개는 필요하다. 의자도 다섯 개 필요하다. 의자는 더 많아도 좋다. 펴놓고 서로의 책을 읽어 본다. 가져가고 싶은 책은 가져간다. 단, 가져온 책과 가져가는 책의 수량은 같아야 한다. 책을 가져오지 않는 참가자도 있을 수 있다. 대환영이다. 그 참가자가 가져가는 책만큼 집에는 덜 가져가도 된다. 처음에는 한 달 정도의 준비와 홍보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참가자들이 책을 고르고 그 목록을 교환회에 넘긴다. 교환회에서 만드는 책은 전자책이다. 이 페어에 참가하는 모든 책의 목록이다. 그 책이 티켓이다. 사업 목표는 2박 3일 규모가 되는 것. 천막들과 텐트들을 치는 것. 행사명은 책 지옥전... 책 연옥전... 책 윤회전... 책 부활전...
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사명을 찾아서』 인터뷰
유리관 작가의 작업실 - 『사명을 찾아서』
만약 당신이 ‘교정의 요정’을 만난 적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기다렸을 것이다. 지옥에서 온 시뻘건 블랙코미디 노동문학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으므로. 『교정의 요정』이 교정공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사명을 찾아서』는 문자 그대로 출판사의 사명을 찾는 이야기다. 가상의 출판사 62곳의 사명에 얽힌 사연을 읽는 동안 종종 책 표지 생각이 났다. 표지에는 강렬한 빨간 폰트로 화면 가득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그 문장은 “책으로 세상을”에서 뚝 끊긴다. 책으로 세상을...책으로 세상을...그다음 말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이 책은 책으로 세상을 어떻게 할지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잠깐, 혹시 사명을 찾아서는 사명(使命)을 찾아서였을까? 라는 말장난을 하게 될 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책의 독자는 “○○으로 세상을”에서 ○○의 자리에 한 번쯤 책을 가져다 놓았던, 놓은, 놓을 사람들이 아닐까. “책으로 세상을”이라는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늘 그렇듯 깃발 아래에는 구호에 동의하는 누구든 함께 할 수 있다.
「도서출판 리뷰단」
Q.
『사명을 찾아서』 작업을 마친 후기를 들려주세요.
『사명을 찾아서』는 21년부터 23년까지 짬짬이 썼습니다. 출간을 앞두고 교정본다고 오랜만에 다시 읽는데 첫 번째는 그럭저럭 재밌었고 두 번째는 꼴도 보기 싫었어요. 두 번 읽히기는 힘든 책인가 싶어 약간 의기소침해졌습니다. 하지만 또 2년 정도 지나면 읽을 만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책을 만들게 둬서 배드베드북스에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어떻게든 1쇄라도 소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인쇄 감리를 따라가 구경한 다음 블로그에 후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 스스로 리뷰단이 되는 수밖에는 없다’입니다.
「유리관」
Q.
『사명을 찾아서』에는 각개 분투하는 수많은 출판사의 사명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각자의 사정이 깃든 출판사 이름들을 보며…문득 유리관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짓게 되셨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전자책도 책이라면 모든 인터넷 화자들의 이름은 하나씩의 출판사명임을 서문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명도 쓰고 별명도 쓰고 익명도 쓰지만 어쨌든 그 이름들은 저자명을 넘어서 출판사명으로 봐야 합니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출판사와 저자가 공적 사명을 함께 자아내듯, 인터넷 환경이 우리 모든 화자들에게 자동으로 공적 사명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인터넷 문제’ 전부는 그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적 사명은 반드시 인간을 쪼개어놓고, 그 점은 외면될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다뤄져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착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제가 지금 이렇게 함부로 쓰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사명을 찾아서』의 「유리관」 편을 쓰자면... 이 이름은 블로그를 쓰는 화자의 사명으로 지었습니다. 너무 고유명사이면 안 되고 너무 일반명사여도 안 되고 뭔가 여러 뜻이 담긴 주머니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화자이기 때문에 인명처럼도 읽혀야 하고요. 간단하게는 세 글자를 목표로 일반명사 두 개를 붙여볼 수 있습니다. 유리는 흔하지만 필요하고, 만들어지지 않으면 있기 어렵고, 빛은 통과시키되 대기는 막고, 보호하는 것이면서 위험하고, 왜곡하고 전달하고, 액정을 들여다보는 일이 종족의 주요 취미가 된 이 시기에는 의미심장한 물질입니다. 관은 속이 빈 대롱, 머리에 쓰는 쓰개, 시체를 담는 궤입니다. 특히 마지막 것이 유리로 되어 있어 있다면 백설공주의 것과 공산권 지도자들의 것으로 나뉩니다. 그런 게 다 무엇이 좋은가 하면, 없는 것이면서 있는 것이 좋습니다. 붙은 적 없지만 쪼개지지도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열어야 하지만 부서져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같을 수 없지만 다를 수 없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사장해방」
Q.
현실의 일부를 조금씩 뜯어내 각각의 출판사를 빚어냈고 워낙 묘사가 구체적이다 보니, 마치 소설 속 공간처럼 출판사들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았습니다. 책을 완성한 이후에도 머릿속에 달라붙어 자꾸만 생각나는 출판사가 있을까요?
「국립출판사」입니다. 국립출판사는 제가 처음으로 다녔던, 사장님과 저 단 둘뿐이었던 출판사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등장하는 ‘젊은 직원’도 저 자신입니다. 출판에도 빛의 출판이 있고 어둠의 출판이 있다는 생각인데요, 저는 그곳에서 어둠의 출판으로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사장의 일이고 무엇이 사업의 일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사적인 것과 아닌 것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1대 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일까요? 그 후로 지금까지 사장님들의 통치는 어디에서건 잊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장님들은 거기서 일하는 저를 대표해주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출판사를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대표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장님들은 뭔가 다른 것을 대표했습니다. 만약 사장님이 왕이라면 왕립출판사일 겁니다. 폭정을 일삼는 사장님을 참수(비유입니다)할 수 있다면? 사장님을 투표로 뽑는다면? 내가 사장님으로 선출된다면? 저도 생각이란 걸 해봤습니다. 사장님이라는 존재는 다른 뭔가가 아니라 돈으로 돈 벌기를 대표합니다. 어떤 사장님이건 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사장님들은 사장님이라는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국립출판사라는 사명에는 그런 문제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담겨 있습니다.
「거인의유년」
Q.
책을 읽으며 출판업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톱니에 짓눌리고, 짓눌렸지만 틈새 사이로 튀어나오고, 튀어나온 책의 체액이 끈질기게 흘러 누군가에게 닿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만남이 있다면, 어떤 종류의 책을 만나고 싶으신가요?
재밌는 상상입니다. 저는 재밌는 책이 좋습니다. 하지만 재미가 무엇인지는 제가 정해야 합니다. 이런 오늘날과 조화하지 않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재밌게 읽을 수는 없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이와 적은 이, 가진 이와 아닌 이에 대한 이중의 긴장감이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답만 요구받고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의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질문만 할 수 있고 대답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의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쓰라고 명령한 적 없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름의 사명을 띤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통해 자신을 넘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했으면 좋겠고 의심했으면 좋겠고 등등... 아무튼 그러면서 재밌어야 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상상을 조금 다르게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 역사의 머리 위에 출판이라는 거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요. 지금 거인은 자본주의라는 오물을 조몰락거리고 있습니다만, 결국 그것도 어린 시절의 재밌었던 코쓱 추억이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사이킥하우스」
Q
책은 곧 언어의 교환이기 때문에 정치적이기도 합니다. 가령 ‘말이 통하지 않는 완전한 바깥으로 나아가고 다시 돌아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나오기도 하죠.(「탐침」) 두 권의 책을 쓰면서 어떤 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으셨나요?
너무 짧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데 대개의 대화는 너무 짧습니다. 하지만 충분할 정도로 긴 대화는 짧은 대화들을 억압합니다. 이런 폭력적이고 항구적인 상황을 돌파하려는 시도가 모든 책들의 정체라고 해봅니다. 탐침은 찔러 넣는 종류의 것입니다. 싸우는 사람들, 싸우다 지친 사람들, 싸우고 싶은 사람들과 싸움의 끝에 대한 텔레파시를 나누고 싶네요. 이걸 읽고 계신 여러분도 초보적인 수준의 텔레파시에 참여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이 끝난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고용원」
Q
책에 유일하게 실존하는 출판사 한 곳이 등장합니다. 『사명을 찾아서』를 출간한 배드베드북스죠. 작가님이 진행한 배드베드북스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작가님의 마지막 질문을 돌려드려 봅니다. “자신만의 출판사를 차리고 싶은 많은 분들께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사업이란 노동의 창출입니다. 출판사를 차린 다음 저를 고용하십시오!
「선동토템」
Q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_ ]
24년도 기후정의행진(*2022년부터 매해 9월, 기후위기에 대한 정의로운 사회적 대응을 요구하며 펼쳐지고 있는 집회입니다) 때부터 ‘피크민 블룸’이라는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식물과 벌레와 노동자를 한데 섞어놓은 것 같은 색색 캐릭터들과 함께 걷는 만보기 게임입니다. 기왕 행진하는 김에 재미도 챙겨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 하고 있지만 재밌는 게임은 전혀 아닙니다. 그 게임에 나오는 빨강 피크민의 인형을 저의 배우자님이 선물로 주었습니다. 점잖게 옷도 입히고 이런저런 액세서리도 달았습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24년 12월부터는 집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번 그 인형을 가방에 매달고 갔습니다. 집회는 언제나 씁쓸한 애증의 시공입니다. 출판과도, 노동과도, 쓰기와도 비슷합니다. 진짜 맘에 안 듭니다. 제발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 인형이 나를 선동하고 조종하여 데려간다고 생각하면 모쪼록 의지가 됩니다. 지금까지도요. 그게 ‘작업’이랑은 대체 무슨 관계일지? 하여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펜무덤」
Q
작업실을 소개해 주세요.
작업실은 따로 없습니다. 책의 대부분은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아니면 중간에 뜨는 업무시간에 몰래 썼습니다. ‘일하기 싫어 모음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퇴근하고서는 있는 힘을 다해 가사를 하고 쉬고 놀아야 합니다. 이 경우 작업은 실외배변 같은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몰래」 출판사를 쓸 때 가장 짜릿했던 것 같네요. 도의상 문제적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저에 대한 사측의 도의적 잘못들을 많이 눈감아줬으니 비겼습니다. 어쨌건 그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지도 반년이 지났습니다. 도의의 총체적 파탄이었던 의료대란으로 인한 경영악화 때문이었지, 딴짓하다 걸려서 잘린 건 아닙니다. 저의 몰래 작업실 추억은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 쓴 펜 무덤입니다. 교정공으로 일하면서 다 쓴 펜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통입니다. 내가 일한 흔적이나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게 영 분해서요. 딴짓(=’작업’)만 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마감열차」
Q
마감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A.
저에게는 마감이 ‘하고 싶은 일을 막는 뭔가’가 아닙니다. 어떤 다른 일이 저의 하고 싶은 마감을 막는 편입니다. 그야말로 일들이요. 그리고 그런 일들이 없으면 쓰고 싶은 것도 써야 할 것도 없겠습니다. 이건 제가 실제로 작가가 아니고,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 마감 후에는 ‘배드베드북스 화이팅’을 외쳐주고 싶었네요. 단톡방에서도 뭐만 얘기만 했다 하면 계속 외친 것 같습니다. 배드베드북스 화이팅!
「回光返照社」
Q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작업 중 특히 재밌게 본 타인의 작품은 무엇인가요?
A.
가라타니 고진의 『힘과 교환양식』이 재밌었습니다. 늙은 철학자가 일생의 연구를 정리하며 인간의 영혼과 힘이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두고 혼신의 뇌피셜을 펼치는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제가 읽은 바에 따르면, 힘과 영혼은 교환으로부터, 더 구체적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주는 데서부터 조성됩니다. 따라서 영혼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입니다. 책에서는 그 사회적 빚의 양상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는데요, 구체적인 것은 직접 확인해 보시길... 어쩌면 그에게 있어 갚을 수 없는 빚이란 독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2023년 8월 30일 수요일
플루크스
2023년 8월 29일 화요일
2023년 8월 25일 금요일
사금파리
내게는 오래된 것들에 대한 지대한 흥미가 있다. 그 모든 사랑스러운 바보짓들... 풀각시놀이를 상상해보면서, 풀각시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었는지 보고 싶어졌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웹’을 열심히 뒤져봤다. 나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당신도 웹에 대해 들어는 봤으리라고 믿는다. 어쨌든 그건 아직도 있다. 작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셀이 나온 다음엔 완전히 버려졌지만, 전용 단말기와 약간의 기술만 있으면 여전히 웹을 뒤져보는 게 가능하다. 웹이 사용된 기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찰나와 같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병적으로 쌓아놓은 온갖 것들이, 웹에는 여전히 보물처럼 쌓여있다. 나 같은 과거애호가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믿기 어렵지만 웹에 있다!)에 가면 웹 탐험에 대한 많은 팁을 구할 수 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건 탐험 결과 풀각시는 웹을 쓰던 시절에조차 잊혀지는 중이었던, 그 할머니 세대가 마지막으로 갖고 놀았던 장난감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고운 분말이 되어 세계에 흩어졌을 할머니가, 역시 지금은 분말이 되어 세계에 흩어져 있을 손녀에게 다소 부끄러워하며 직접 풀각시를 만들어주는 사진 이미지를 올린 블로그*(정말이지, 그런 것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니!) 포스트를 보다가... ‘풀’ 자로 시작하는 사명은 그만두기로 했다. 다른 게 아니라 그 풀각시놀이를 하며 소꿉*으로 썼다던, ‘사금파리’라는 단어에 시선이 꽂혔기 때문이다. 사금파리, 어감이 신기해 기억하고 있던 단어였다. 사금파리란 사기그릇*의 깨진 파편을 말한다. 박물관에 가서 실물을 본 적도 있었다. 그때 박물관 한번 가보겠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진열장 너머 사금파리에는 흰 바탕에 파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안 그래도 보고 싶은 거 천지였어서 그때는 이름이 예쁘다고만 생각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그것과 상상도 못한 데서 다시 마주친 것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감동받았다. 그저 쓰레기가 아니었구나... 깨진 조각을 놀이하는 데에도 썼었구나... 나는 ‘사금파리’라는 단어가,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바로 그 사명이란 걸 깨달았다.
털어놓자면 내가 찾으려는 사명은 전자책 출판사를 위한 것이다. 전자책이라니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전자책이 뭐냐고 물을지도? 셀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직접 꽂아주는 이 시대에! 하지만... 하지만 나는 어쩐지 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랬다. ‘스마트기기’들은 내가 어렸을 때 이미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걸 계속 만지면서 자랐다. 여기서 ‘만진다’는게 무슨 뜻인지 내 또래나 그보다 위라면 알 것이다. 나는 집에 온 손님들에게 수집품들을 보여주곤 한다. 이건 45년도에 나온 모델이고요... 이건 자그마치 30년대... 이건 안경 모양, 이건 시계 모양... 아, 혹시 전자책리더기라는 거 아세요? 거기까지 가면 사람들은 놀라고 만다. 나는 그 기계들이 정말 좋다. 지금 보기에는 너무나 바보 같은 기계들. 날 괴짜 취급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들은... 바로 그 사금파리와 닮았다. 그것들에는 셀에는 없는 것, 절대로 대체 불가능한 물성이 있다. 매끄러움, 단단함, 투박함, 섬세함, 또 빛... 푸르스름한, 그리고 결정적으로 터치! 그건 정말 고유한 감각이다. 나는 그걸 사랑하고, 그걸로 읽었던 전자책들을 기억한다. 화면 위에 무늬처럼 떠오르는 그 수많은 글자들. 나는 그걸 만들고 싶다. 분말이 되기 전까지는.
2023년 8월 21일 월요일
침팬치
나, 옛날에 교정공이었던 침팬치는 손깍지를 베고서 가짜정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떠나지 않는 화면의 잔상과 어지러이 춤추는 글자들을, 이상한 말이지만 눈을 빠르게 깜빡여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이지? 그러다 알았다. 아니, 인정하게 되었다. 압도적인 문자 생산력 그 자체...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천사를 악마로 그 반대로도 만드는 그것: ‘인터넷에 가짜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의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터넷에서는 가짜라는 개념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교할 만한 진짜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진짜가 인터넷 외부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가짜정보를 생성하기 쉽다거나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 같다는 느낌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 경험, 나는 그것과 인터넷 자체가 완전히 같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인터넷에 관하여, 참/거짓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1) 확대하면 할수록(적은 관측 대상) 해상도 떨어짐. 2) 축소하면 할수록(많은 관측 대상) 해상도 떨어짐... 말인즉슨 인터넷은 규모가 문제이던 시기를 넘어섰다. 그것은 이제 어떤 영역이 아니며, 연결 따위의 문제도 더 이상 아니다. ‘인터넷이 언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그다음, 그다음이다. 이것은 언어의 두 번째 강림이다. 언어가 본질적으로 현실에 대하여 갖던 그만큼의 후줄근한 해상력이 여기에, 전적으로, 자신을 펼치며 도래 중이다. 이제 인터넷은 재현 일체를 언어화시키는 무엇이다. 이는 언어에게는 대도약이고 인간에게는 재앙처럼 보인다. 우리를 혼란 가운데 작게 남겨버리고 자신은 도약하는 것, 말과 문자 사이의 심연 중에서 그것은 입을 벌렸다가, 그 이상의 크기로, 모든 것들을... 엮여버린 우리를... 함성과 함께 뒤덮고, 빨아들이며, 다른 종류의 우리를 남겨버리는 것이다. 나의 깍지 낀 손가락들이 뭉그러진다. 나는 합쳐진 손 덩어리를 위아래 양옆으로 휘두르며 우끼! 라고 외치고 우끼끼! 라고 덧붙인다. 이게 나의 결론이었고 ‘침팬치’ 출판사의 출발이었다.
우리 앞에 남겨진 문제는, 그렇다면 언어의 이 새로운 상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 한때 교정공이었던 침팬치의 견해로는, 인터넷을 하나의 거대한 2차 창작으로 대한다면 가장 현상태에 부합한다. 우리는 실로 점점 더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 어떤 종류의 문학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이 바로 거대한 문학, 겪어본 적 없는 문학, 유례없는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문학이라고... 나는 말하려는 것 같다. 나의 확신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도저히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확신, ‘문학적’인 확신이! 아마 인터넷에 대한 이보다 더 적절한 평가는 없을 것이며, 이미 누군가가 이와 같이 평가했을 것이다. 누가 어떻게 평가했든 뭐가 중요한가? 여기서 아이러니가 있다면, 총인류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그럼에도, 이것이 어떤 후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원래 그것이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침팬치들은 읽기를 갓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의 손에는 동화책이 들려있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는 줄도 모른 채 배우고 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고 있는가? 내가 아직 교정공이었던 시절 뭔가를 배웠다고 느꼈을 때는 반드시 반복의 실패, 종료, 감탄이 있었다. 우리는 작별을 통해 배운다. 지금은? 현실을 끝없는 원작으로 만들어버리는, 드디어 심판을 시작한, 언어라는 자동기계와 마주하면서, 나 춤추는 침팬치의 털가죽은 녹아내리고 있다. 여기에 무엇이 남겠는가?
2023년 8월 11일 금요일
랑데부
주저앉아 그 나라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곳들도.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했지? 나라였던 게 잘못? 서기장의 잘못? 바보같이. 그게 벌써 언젠데... 그때, 망할 때, 환호한 사람들도 있을 거야. 왜 없었겠어. 지금 그 사람들은 어떡하고 있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행복할까? 앉아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 한심한 생각 외엔 다른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하겠어.
지금은 어때? 우린 망했다. 망한 것은 우리다. 우리는 귀를 막고서 소리치고 있다. 우린 망했다! 망한 것은 우리다! 그것은 너희 탓이다! 그것은 너희 탓이다! 우린 귀를 막고서 소리치고 있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코를 막고서, 눈을 막고서, 아직 아니고, 아직 아니야! 이미 지났기에 아직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눈물이 흐르는 세상이다. 내것은 아니다. 눈물도 세상도 아니고, 막힌 데서 우리는 소리치고 있다. 주저앉아서, 눈물이 나는 세상입니다! 눈물이 납니다! 으억! 으으억! 우린 무릎으로 기고 있다. 허벅지로 기고 있다. 여기를, 배로 기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우리의 탓! 그것은 터진 것이다. 폭탄들은 터졌다. 진작에 터졌다.
야 일어나봐라, 그러지 말고. 지금 너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어. 어쩌려고 그럭하고 있어, 안 되면 어쩔라고, 야 그러지 말어, 어쩌려고... 안 되면, 공산 안 되면...
우리는 붙잡았어야 했다.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읊고 있다. 핥으면서. 답은 이미 나왔다. 그때 어떻게든 열었어야 했다. 못 열었고, 긴 엔딩, 그 생각이 천지 사방에서 누른다. 나온 답을 집어던진, 손잡이를 부숴버린, 우리는 지금 어둠 속에서 벌레가 꾸는 악몽이다. 우리는 내 속에 있다. 만약 돌아가더라도 그대로 하리란 걸
그러리란 걸 깨달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자유를 얻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있고, 앉고 싶을 때까지 앉을 수 있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고, 우리는 기쁘고, 여기서 꾸물텅거리고 있다. 인간은 여기에 있다.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고 더 버티다 죽을 수도 있다. 주먹이 으스러지고 있다. 어디서 개들은 짖고 있다. 그 뜻은 이렇다. 인간들이여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라! 우리의 움찔대는 배를 적시고 있는 이것은 눈물이나 배설물이 아니다. 우리는 따라서 짖고 있다. 복수한다! 복수한다! 복수한다! 우리는 복수했다. 우리의 피로. 우리에게. 우리는 우리를 들여다보면서 머리를 흔들고 있다. 저것은 우리가 아니라고. 저것은 우리여선 안 돼! 그러나 그것이 우리라니. 우리는 관 속에 있다.
우리는 읊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저 멀리 깊고 넓은 데 있는데 우리의 말은 터무니없이 짧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닿을 수 없다. 아니면 우리는 지르륵 지르륵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우리를 웃게 한다. 지르륵 지르륵.
이걸 받고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해졌다. 받은 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내 일이다. 하지만 이런 걸 정말? 그러나 나는 이미 받았다. 머리털 끝까지 열이 뻗쳐 눈물이 흘러도 이걸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내밀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입 속에서 세차게 말이 흐른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네가 화를 당하리라는 것이? 이토록 불행과 악이 만연한, 그리고 틀림없이 더해갈 세상에서, 네가 화를 당하리라는 것이? 그러니까, 아직은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봤어? 어떻게 이런... 이런... 이런 걸 갖고 나가라고?
다시 생각해봐. 너는 바보짓에 놀아나고 있어... 적들은 이것이 중요하다는 듯 저것이 중요하다는 듯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두고 홀린 듯이 하고 있어. 너는 낙심해서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야. 생각을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해. 싸우다 진 게 아니야. 싸웠던 이들은 오늘날을 위해, 사후세계를 위해 싸웠던 게 아니야. 어떤 뭔가에서 다른 뭔가로, 네가 바꾸는 게 아니야.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야. 무한이 유한으로 바뀌는 게 아니야. 이기겠다는 생각,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고쳐먹어. 이기는 게 아니야. 거짓으로 거짓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진실은 거짓을 이기지 않아. 아니라고?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아니야, 그 말은 바로 그런 뜻이었어. 그 말이 그 뜻이야! 유한이 유한을 향해 나가는 거야. 나가는 거야...
그러나 너는 이미 흩어졌다. 유언처럼 된 너의 말이 계속 해변으로 도착하고 있다. 여전히 끌려가고 있고 머리 깨지고 있다. 으스러지고 있다. 어쩌면 생각을 고쳐먹어야 하는 쪽은 나인지도 모른다. 네 죽음은 멀수록 좋을 것이다. 네 죽음도 언젠가 내 머리통과 함께 흩어지고, 완전히 잊혀지는 날이 되면 좋을 것이다. 그때는 거짓도 서로를 붙들고 운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해 울지 않는다. 그냥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들은 진실로 혼자다. 세계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세계가 그토록 쉽게 끝났다는 데에, 그들은 드디어 도달한다. 그리고 내가 읽어내려가는 것이 그들이다. 왜 이 일을 계속하느냐고? 내가 이 일을 그만둬도 누군가는 하기 때문이다. 그 한심한 생각 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도로는 여기서 끊겼고 우리는 떨어진 별처럼 쏟아져 있다.
2023년 8월 2일 수요일
콘테나-추레라
사람을 욕한다는 것은 이제 지겨워졌다. 난 사람 욕하기를 그만두고 싶다. 사람을 욕하는 사람을 욕하는 사람을...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마주치는 것들이란 다 개새끼 아니면 버러지들이다. 죽이고 싶은 녀석들 콘테나로 한가득이다. 아니야, 난 그러지 않기로, 사람을 욕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죽이면 될 거 아닌가? 나는 입을 다물고 있다. 콘테나 속에는 개버러지새끼들, 추레라엔 내가 타고 있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음악을 틀었다. 듣고 싶지 않지만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힘을 낼 수 있도록 음악을 틀었다. 마음이 약해져 사람 욕을 시작하지 않도록. 그렇게 가는 중이다. 쓰레기장으로다. 죽이고 싶은 것들 파묻어버리러다. 이것은, 이 도로는, 이 운반은, 보람도 뜻도 결과도 없는, 조용하게 확실하게 마음들과 삶들을 파괴 중인 전쟁이다.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어디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바로 이렇게다. 죽이고 싶은 것들...
그런데 이 세상에, 콘테나에 꽉꽉 처넣은 저것들보다도 더 증오스러운 치들이 있다. 개작살이 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건 아주 모르는 듯이 굴고 있는 녀석들, 죽이고 싶은 것 파묻어 버리고 싶은 것 따위는 없는 듯이 구는 그런 녀석들이 있다. 그래? 그런 곳이 있다는 거야? 너희는 그런 곳에 있다는 거야? 진실로 나는 베인 풀더미처럼 선한 이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 있고 가까이 있는 이들, 말이 없는 이들, 그런 이들이 아니라, 쓰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죽이고 싶은 것 따위 없는 듯이 쓰고 있는 이들, 내가 증오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 마음이 꼬인 세상에서 같이 꼬였다면, 그들의 마음은 꼬인 세상을 돌리고 있다. 어떻게 너희는 그럴 수 있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우리 중 가장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너희가? 쓸 줄 아는 너희가! 우리...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래도 서로를 매달고 있다. 쓰레기 같은 노래를 들으며 함께 쓰레기장으로 가고 있는 처지다. 나만 죽이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죽이고 싶은 이들이 각자의 콘테나에 나를 싣고 가는 중이다. 우리는 서로 죽이고 싶은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수습해주고 싶은 것들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 마음이 그래도 우리 사이에 통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교차로가 있다. 매일 지나며 어두워지는 마음,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마음이 있다. 고개를 빼고 사이드미러를 들여다보면 거기 버러지의 홑눈 겹눈이 있다. 이것은 어둠의 교육이고 훈련이다. 그러나 이런 건 아무래도 좋은 그 녀석들... 이런 것 따위 배우지 않는... 배울 필요도 없다는 듯이 구는... 그 녀석들은 정말이지 참아줄 수가 없다. 당연히 참아주기 어렵다. 매달아 끄는 게 아니라 쳐버리고 싶은 녀석들. 하지만 유령인 녀석들. 도로 한가운데 멍청하게 서있는 한 녀석을 피하려다 뒤집어질 뻔도 했다. 그렇게 죽이고 싶은 것들을 쏟아버리면 부서지도록 이를 깨물고 도로 주워야만 한다. 여전히 녀석은 도로 한가운데 서있는 동안에...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죽이고 싶어 하면? 오히려 좋아하지. 울면서도, 흐뭇하게 여긴다는 걸 안다. 핍박받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들! 그게 그들의 진짜 목적이다. 나는 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쓰려 드는 걸까? 이건 정말 미칠 노릇이다. 그래도 우리는 하여튼 꾹 참고 있다. 녀석들이 거의 없는 듯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도 못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들, 쏟아진 개소리 위에 비린내 나는 우리를 쏟아붓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냐? 있다는 말이냐? 우리도 진실로 이 도로를 벗어나 떠돌 수 있는 거 아니냐? 하지만 아니다. 그들처럼은 싫다... 이 도로, 이 밤의 도로를, 이걸 당겨서 끊어버릴 수 있는 거 아니냐?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어려워도 추레라의 후진보다 어려울까? 곧 나들목을 돈다.
2023년 7월 21일 금요일
해골박
좀 뻔한 얘기인 것도 같지만, 우리 ‘해골박’ 출판사는 만들어져야 할 책이 아니라 파괴되어야 할 책을 찾고 있다. 우리는 역사 또는 작품 속에서 여러 양상으로 펼쳐진 책(넓게는 문화) 파괴와 관련된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조사했다. 새삼 그 의미에 대해, 왜 우리가 거기 매료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알아낸 것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조금은 맞지만. 우리는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하지만... 환영한다. 우리는 어떤 파괴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어떤 파괴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니고. 우리가 특히 흥미를 갖는 부분은 구분이다.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가? 우리의 관심은 지금 여기에서 편달 중인 구분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책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만들어지지 않은 책은 파괴된 걸까? 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파괴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파괴하지 말아야 할 가치는 있는가? 책을 파괴한다는 건 그러니까 대체 뭘까?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싶다.
구청장 B씨의 시가 답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장 먼저 야구방맹이를 챙겼다. 수박 한 통과 피냐타, 글러브도 챙겼다. 근방에서 눈 가리고 수박·피냐타 깨기, 아니면 야구를 하다가 부숴버렸다고 하면, 혹시 걸리더라도 참작해주지 않을까? 일종의 문화실습동호회라고 하면? 어쩌면 야구방맹이로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 문제를 두고 우리는 토론했다. 징벌적 의미에서 내려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가능하면 표지판 자체를 부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톱이나 망치, 빠루 등의 공구도 무겁지만 챙겼다. 불태우는 방안이나 페인트를 부어버리는 방안은 환경적 영향을 고려해 기각되었다. 만약 (표지판의 입장에서) 운이 좋다면, 시만 감쪽같이 바꿔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합의했다. 가능해 보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딱 맞는 크기의 백지를 준비해 거기 두 번째로 방문할 것이다. 정말 구청장 B씨가 거기에 자기 시를 (거의) 영원히 남길 생각이었을까? 그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다. 아예 거기서 캘리그래피를 하는 방안도 나왔지만 그 도구는 안 챙겼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는 데 우리는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우리는 무슨 퍼포먼스나 예술을 하려는 게 아니다. 완전 그 반대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차분하다. 우리는 먼저 확인할 것이다. 구청장 B씨는 정말 뛰어난 시인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많은 짐을 들고 그 테마관광숲길로 가고 있다. 해골박... 우리는 확인한 다음 집행할 것이다.
2023년 7월 20일 목요일
밀고와투서
창간부터 『밀고와투서』는 문화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자유가 꽃피던 시기 『밀고와투서』는 첨단 지성의 집결지이자 창조적 파괴의 산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경영과학과 글로벌 트렌드·반운동과 문학을 결합한 종합지로서의 구성은 세계적으로도 전위적인 시도로 평가되었으며 지금까지 다채롭고 혁신적이면서도 대중친화적인 기획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밀고와투서』의 옆을 지켜준 것은 의식 있는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대중문화를 앞에서 선도하고 뒤에서 밀어주는 지도층의 선한 영향력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런 한국 현대사 가운데서도 『밀고와투서』가 끊임없이 독자를 확장하며 가치를 증명하고 자기를 갱신하여 너른 상업적 성공을 이룩함으로써 제 몫을 해낼 수 있게 이끌어준 진정한 원동력입니다.
『밀고와투서』는 독자와 함께 다시금 ‘저항과 창작의 거점’으로서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가겠다는 다짐을 새깁니다. 주목받는 작가들과 함께 문단에 문학적 폭과 깊이를 더하며 활력을 불어넣고, 우리 시각으로 우리 것을 소중하게 보듬으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지혜를 세계적 전망 아래 모으기 위해 힘쓰고자 합니다. 날로 새롭되 한결같은 모습으로 『밀고와투서』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2023년 7월 17일 월요일
할매틀니
2023년 7월 16일 일요일
흡혈문화사
2023년 7월 10일 월요일
사타내셔널
2023년 7월 5일 수요일
무자비
출판사 ‘무자비’가 답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당신 책의 출판사명 자리에 ‘무자비’를 넣으세요.
무자비 출판사는 어떤 형태의 독점적 권리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무자비 출판사는 어떤 책이든 품을 수 있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무자비 출판사는 허상이 아닙니다.
메일 한 통을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무자비 출판사의 여러 채널들에 신간 알림을 띄워 드립니다.
아무 대가 없이요.
이것은 사기가 아닙니다.
무자비가 당신의 비전을 돕습니다.
이것이 무자비 출판사가 제안하는 새로운 출판입니다.
그것은 출판사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도서목록입니다.
당신이 누구든, 몇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책이 무슨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무자비의 전당에 당신의 책을 들여보내십시오.
무자비의 미래는 잠정적으로 무궁무진하고
거의 무한히 변화무쌍합니다.
당신의 책이 어떤 책이든 괜찮습니다.
당신의 책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무자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로고 스탬프와 스티커를 구매하셔도 좋습니다.
책등용, 표지용, 내지용의 세 가지 종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자비의 전당에 책들을 들여보내십시오.
당신이 책을 만들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자비의 비전을 당신이 채우는 것입니다.
지금 가십시오!
밝혀지지 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2023년 5월 23일 화요일
소각로
나는 엎대어 있습니다. 벌벌 떨고 있어요. 누군가의 손이 양 겨드랑에 들어와 나를 일으켜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하죠. 그 누군가는 역사일지도 몰라요. 주저앉고 싶어요.
사고실험을 한번 펼쳐보는 거죠. 피가 거꾸로 솟을 얘기일지 모르지만, 만약 장르문학을 ‘부정적인 것’의 위치에, 순문학...을 ‘긍정적인 것’의 위치에 놓은 뒤 ‘장르’와 ‘순’을 가르는 기준 단 하나를 맘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일테면 고리끼급 권력(농담이에요 농담)이 주어진다면? [눈물로 이르노니 순문학에 육박함] 라벨을 붙일 수 있는 권한을 통해서, 역사의 어둠 속에 재로 흩어져선 안 될 ‘장르’들을 골라내는 그런 끔찍한 사명을, 서로 자기는 절대 싫다고 하는 와중, 눈물의 제비뽑기 끝에 내가 맡게 된다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선 내가 ‘사면’해야만 한다면? 내가 소각로의 마지막 문지기라면? 등 뒤로 불구덩이를, 앞으로 말린 꽃더미 같은 ‘장르’들을 두었다면?
나는 고심하다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장르’에서 널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약한 습속―이 사고실험에서 굳이 그 라벨들을 들먹이는 이유―, 장르가 어쩌면 지닐 수도 있었을 재미와 가치를 완전히 망치는 진실로 고약한 습속 하나가 바로 ‘사람(들) 욕하기’라는 것이지요. 불구덩이 앞에 선 나는 그것이 바로... ‘장르’와 ‘순’을 가르는 핵심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돼요. 그것은 단순히 욕할 만한 개성(들)이 등장한다는 뜻이 아니고, 얇은 악역(들)의 등장을 일컫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얕다는 뜻도 아니며... 그럼 무슨 뜻이죠? 등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나도 뭔가 생각이란 걸 해요... 대체 무슨 뜻이냐... 말린 꽃더미들... 소각로의 빛 앞에 입을 다문 무덤들... 그것들은 공동체에 대한 거대하고 강렬한 갈망처럼 보여요. 너무 강렬하기에 반대로 꺾였든, 반대로 꺾였기에 강렬하든... 사실 ‘순’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 그러는 것들(갈고리로 찍어서 던져버리고 싶은)도 수두룩 빽빽이죠... 어쩌면 그런 특성이 이른바 대중성의 한 축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런 걸 좋아하는 것이죠. 욕할 만한 그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타인 없이 작동하지 않는 개성들, 작동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는 개성을... 사랑하므로 욕하는 것이에요... 그걸 넘어서면서, 아니면 넘어설락말락하면서라도, [순문학에 육박함] 딱지를 나는 붙일 수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넘어선다니 뭔가요? 어떻게? 왜? 그리고 이 소각로의 의미는? 나 야만스런 독자는 이렇게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빠져들고 있어요... 그것은 즉,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해하셨어요? 투고하세요... 용서해보세요... 우리 출판사에 투고해보세요... 나는 주저앉고 싶습니다. 이 밤부터 새벽까지는요.
2023년 5월 9일 화요일
야유회
나는 사명을 찾아야 하지 불평을 늘어놓거나 사장님 때려잡는 상상을 하거나 어떤 식의 사무실-리얼리즘을 해내야 하는 게 아니다. 이래서는 사명을 찾을 수 없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사장님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내가 쓸고 닦은 바닥에. 불쌍한 사장님.
역시 내가 사장님이 되어야 할까?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야유회는 금토에 갈까? 나는 대가리를 맞고 쓰러진다.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목금으로 갈까? 모르겠다.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야유회를 갈까? 그걸 모르겠다. 야유회를 갈지 말지 사원들에게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안 간다고 할 수 있는 상황만 만들어진다면, 나는 아마 안 간다고 할 것이다. 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지? 나는 야유회를 설득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목금 간다고 먼저 정하고 물어야 할까? 하지만 적어도 1박은 절대 안 된다. 퇴근 시간 전에 끝나야 한다. 나는 완고하다. 사장 나는 사원 나를 납득시키기 어렵다. 사원 나는 조금 더 용기를 얻어 중재안을 제시해본다. 만약 1박을 한다면 퇴근시간 이후에 대해서도 계산을 제대로 해야 한다. 아니 그럴 거면 뭐 하러 가나? 그러나 가야만 한다면, 물러설 수 없다면, 너를 데려가야만 한다면... 너를 데려가야만, 나를 데려가야만...
야유회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휘청이듯 그 생각으로 기운다. 회사란 사실 야유회를 위한 것이다. 책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그것은 부산물에 불과하다. 우리에겐 모여서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할 따름이다. 만약 회사라는 곳이 우리의 생존을 볼모로 잡고 위협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우리에게 조금 더 호의적인 곳이라면. 사장도 다만 야유회 기획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야유회를 가장 잘 기획할 수 있는 사람으로 뽑으면 된다. 내가 사장일 이유도 없다. 기왕 모여서 시간을 보낸다면, 뜻도 좀 있으면 좋겠다. 만약 데려가야만 한다면 필요한 곳에 데려가야 한다. 너를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로 하는 곳... 죽지 않은 사장님, 거품 문 사장님을 내려다보면서, 출판사 ‘야유회’의 꿈도 점점 커지는 중. 야유회 문고는 어떨까? 이제 여행의 시대는 지났어. 이젠 야유회야. 좋아. 좋은 것 같다.
2023년 4월 18일 화요일
돌말
2023년 4월 6일 목요일
보석내장
T-종족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 사람보다 거의 두 배는 큽니다. 오래된 그루터기 같은 두 다리, 짐수레를 세워놓은 듯한 몸통, 창백하고 단단한 거죽은 어떤 상처가 나도 금방 아물며, 나무 뿌리처럼 억센 팔이 무릎까지 닿습니다. 거대한 호박 덩어리 같은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입, 그 안에는 자갈 같은 이빨들이 가득합니다. 그 위엔 코털이 잔뜩 삐져온 코, 그 위엔 단추 같은 눈, 귀는 당나귀귀 같습니다. T-종족의 가장 주된 습성은 굴을 파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본능을 따라 광맥이 흐를 만한 적당한 장소, 깊은 골짜기나 구릉 지대에 모입니다. 그리고 초기 T-도구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나무를 지렛대로 나무를 쓰러뜨리고 바위로 바위를 깨뜨리며 가장 좋은 땅을 골라 터를 잡습니다. 그리고 아래로 아래로 파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작업을 시작한 곳은 그대로 광산이 됩니다. 그들은 어설픈 도구로도 절묘한 솜씨로 공동과 갱도, 경사로와 방들을 만듭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야광버섯처럼 침침한 빛을 내며 가치 있는 광물과 광석들을 캐 모읍니다. 방들 중 하나는 대장간으로 꾸며지고, 그곳에서 철을 제련해 그 어떤 종족의 것보다도 견고한 고급 T-도구―곡괭이와 삽, 정과 망치 따위―를 만듭니다. 물론 그들 외엔 사용할 수 없는 크기로요. 그 다음부터는 난쟁이들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규모와 양식을 갖춘 광산이 됩니다. 깊은 곳에 있는 보물방은 T-종족의 근면함에 힘입어 수년 안에 광석과 보석, 보물들로 가득 찹니다. 그들은 서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그 방을 지킵니다. T-종족은 보통 돌을 먹는다고 전해집니다만, 그보다도, 모으지 않는 것은 전부 먹는 편입니다. 보물을 노리고 침입한 모험가들이 그들의 별식이 될 뻔했다가 무슨 돌이 가장 맛있는지 토론을 시킨 틈에 도망쳐 나오는 노래가 유명하지요. 오직 S-종족만이 T-종족의 광산에 들어가 주괴와 보물들을 유유히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S-종족이 T-종족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대대손손 새겨놓은 공포심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그러나 S-종족은 깊은 지하에 광물 말고도 온갖 것들이 묻혀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T-종족이 도대체 뭘, 언제 파냈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까마득히 깊은 지하에서 뭔가를 발견했고, 그날부터 그들의 탁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들은 묘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긴 해도 분명히 노래입니다. 한 대담한 음유시인이 그 노래를 배워왔습니다. 그 노래는 ‘보석내장(寶石內臟)’으로 불리는데, ‘보석내장으로... 보석내장으로...’ 하는 후렴이 강렬하고 인상적이기에 붙은 제목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냈다’, ‘우리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와 같은 표현이 그 노래에 직접 나옵니다. 노래에는 ‘마술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세워놓고 보물을 훔쳐가는 녀석들’도 등장합니다. ‘그들을 씹은 다음 뱉어버릴 것’이라고요. ‘금강석 몸을 완성하는 날에 그날에’ 말입니다. 처음엔 음유시인의 창작으로 여겨졌습니다만, 당시 모험가들 상당수가 T-종족이 부르는 이 노래를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지금 이 노래는 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노래의 가사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금강석 몸과 복수라는 테마는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과연, 대부분의 T-광산에서는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크기의 팔, 다리, 머리, 뼈 따위의 공예품이 발견됐습니다. 정말 T-종족이 만든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보석으로 만든 내장(그들이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을)이라고 볼 만한 것이 발견된 적은 없기 때문에, 보석내장이란 지능과 슬기를 뜻하는 비유, 또는 그들이 발견한 특별한 유물이라는 가설도 세워졌습니다. 후자를 지지하는 상당수의 학자들은 ‘보석내장’이 일종의 마도서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오늘날 T-종족은 만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하로 너무 깊이 내려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발 아래, 까마득히 먼 심연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을까요? 어둠 가운데 금강석 몸을 완성한 그들이, 언젠가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들 종족의 새로운 몸이 햇살 아래서 찬란하게 빛날까요? 그들의 배 속에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하고 투명한 보석내장들이 들어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손에 마도서가 들려있을까요? 하지만 알다시피 씹은 다음 뱉어버릴 S-종족은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합니다. T-종족이 이미 예전에 금강석 몸과 보석내장을 얻었고, S-종족이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수수께끼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2023년 3월 10일 금요일
팸플릿
이벤트는 무엇인가? 자꾸 주인공 행세를 하려고 들면서 영 방해가 되는 저자들을 잠시 치워놓고 보면, 여러 형태의 독서모임을 그런 이벤트의 대표격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려고 모이는 동시에 모이기 위해 읽는다, 감상회부터 세미나까지. 우리는 모임에 나가기 전 어떤 책을 읽거나 책을 읽은 다음 어떤 모임에 나갈 수도 있다. 여기서 이벤트는 집합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차점이다. 책은 어떤 이벤트가 지나간 후 그 연장으로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벤트에 대한 기다림일 수도 있다. 그 이벤트가 까마득히 오래되었거나 사실은 없었더라도 그렇고, 이 생 안에든 영영이든 아주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렇게 이벤트와 엮이는 여러 방법들을, 책은 동시에 종합할 수 있다. 책이라는 종족을 통해서다. 그런데 책이 아니라 전자문서라면, 적어도 이 측면에서 그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교실에서 실물 교과서가 사라진다면 그것이 목표로 했던 이벤트의 성질도 바뀔 수밖에 없다. 시험이든 졸업이든 시절이든. 그것은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영영 끝나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당신 집의 그 책, 그 책이 왜 거기에 있는가, 그 책이 가리키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이벤트가 있기에, 심지어 당신의 뜻이나 책의 내용과도 무관하게,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그 이벤트의 표지가 실제로(시공독점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서전이 반드시 실물책이어야 하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자신의 삶을 사건으로 만들고 싶다면... 즉 이벤트 아닌 채 지나갈 시공을 이벤트로 만들고 싶을 때에 책은 유력한 방도다. 우리가 무슨 소릴 하려고 했지?
이런 식의 이야기는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의 몸뚱이가 하나이고 생이 한 번이고 모든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고 영원한 세계가 영원히 한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있다가 없어지는 세계에 여러 인간들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태생적으로 이를 거스르려는 문자와 관련된 영역에서 이상한 구석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이상한 구석의 적층, 쌓여있는 책들이 구조상 이벤트의 부속물로 기능한다는 점, 이벤트를 위해서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으며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 이것이 우리가 이해한바 물성 타령의 번역이다. 과연 실제의 출판사들은 점점 더 큰 공간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벤트를, 행사를, 사건을 벌일... 덩달아 서점들도 그런 공간을 자처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출판사가 행사기획사를 겸하고 서점이 공간대여업을 겸해가는 것은 총문자문화 영역의 업무분장 변화에 따른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자본 아래서 책이 목표로 하는 사건이 다만 구매의 발생으로, 마케팅이나 프로모션 정도로 왜소해지고 구부려진다고? 그것은 우리가 신경 써서 어떻게 될 일도 아니고 우리가 알 바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왜 이 일이 여전히 가능하고 왜 이 일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어쩌면 우리만 몰랐던 것도 같다.
우리 ‘팸플릿’ 출판사는 아예 처음부터 사건을, 이벤트를 먼저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벤트를 먼저 기획한다. 책을 만들기 시작한 다음엔 늦는다. 어떤 이벤트가 지금 필요한지를 먼저 이야기한 다음 그 이벤트에 필요한 책을 찾는다. 우리가 꾀하는 출간기념회, 저자와의 대화, 낭독회의 목표 인원수는 만 단위다. 우리는 강조한다. 만 단위로 모을 생각을 해라, 만 단위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므로, 아쉬운 대로 우리 쪽에서 만 단위의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 간다. 나갈 때마다 우리는 책을 만든다. 변화무쌍한 상황에 맞추자면 기동성이 필요하므로 부피와 무게는 최소화한다. 책등과 표지 디자인을 수집성 있게 만드는 건 필수다. 가장 도전적인 부분이다. 원고는 어떻게 하지?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그렇다면 낱장들이 있을 필요도 없다. 1페이지로 끝장을 낸다. 만 명에게 주려면 5박스 정도로 될 것이다. 여러 사정들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가 원고를 구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책은 종족이라고 했다. 우리의 책에는 책들의 목록만 적혀있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