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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30일 수요일

플루크스

요즘 다른 대표들 만나면 그저 부동산 얘기뿐이다. 책을 아무리 팔아도 부동산 대박 한 번에 미치지 못한다는 거. 어디 출판사 누구가 어디를 샀는데 어디가 어떻게 되어서 어쨌고 그걸로 어째서 또 어째저째 하는데 정권이 어쩌고 저쩌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출판을 한다는 것들이 말야, 천박하기 짝이 없는 얘기를 철면피로 한다. 책 만들고 싶은 기분이 안 난다는 쪽은 차라리 양반이다. 세상이 다같이 미쳤어도, 분위기가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자존심이, 출판윤리라는 게 있는 법인데. 우리는 우리 우리의 사명, 직업을 소중히 여기고 충실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매주 월요일 아침 우리 사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자신들의 사명을 인지하고 있어야 됩니다. 수많은 출판사들이 있고 그보다 많은 책들이 있다. 그 여러 종류의 책들에는 다 나름의 방식으로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중에 우리가 만들려는 책, 그것은 특별한 책이다. 그것은 딱 한 권의 책이다. 우리가 맡은 사명은 바로 세상을 바꾸는 한 방, 한 권의 책을 ‘터뜨리는’ 것이다. 딱 한 권이면 족하다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 하나만 터뜨리면, 하나만 걸리면 된다. 하나만! 딱 하나! 이 판을 떠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즉 책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 각자의, 여러분이 살게 될 인생을, 바로 그 세상을 바꾼다는 뜻이다.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이 만들 마지막 책을 만들어라. 온 정신을 한 점에 집중시켜라. 한 점. 일점一點, 정점頂點으로. 이 세계가 원하는 바로 그 책을 향해. 판을 뒤엎는다는 것은 역사에 기억된다는 뜻이 아니다. 역사 속에 기억되는 책은 좋은 책이다. 물론 그런 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식의 좋은 책이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터진 책이 좋은 책’이다. 판 자체를 기울이는 책을 만드는 게 아니다. 기울어진 판의 가장 낮은 곳에 책을 올려두는 것이다. 역사에 올라타는 것이다. 뒤집어지고 있는 판의 축으로 가라! 그다음부터는 흐름을 타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내려오기 마련이다.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아니다. 꼭대기로 가는 게 아니다. 꼭대기가 되는 곳에 있어야 한다. 머릿속에 깔때기 모양을 그려라.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법칙이다. 법칙을 찾아서 거기로 가라! 중력이 센 곳을 찾아라! 나는 사원들에게 중력 모형을 보여준다. 그것을 위아래로 뒤집어가며, 그리고 사원들의 자리를 한 바퀴 돌아가며 위치에 대해, 우리가 꿈꾸는 출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없으면 이 친구들을 대체 어찌할까? 힘차게 구호 한 번 외치고 한 주를 시작해 보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만! 하나만! 하나만! 야!

2023년 8월 29일 화요일

토렴집

우리의 머리는 식은 밥알이다
책은 뜨거운 국물이다
그릇에서 수저로 우리는 오른다
씹어 삼켜지려고
마음에게

종이컵 커피를 마신 다음
마음은 이쑤시개로 이를 쑤신다
사탕을 빨며 배도 든든한데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식인 다음에

쓰러진 마음은 토막 된다
오래 끓인 죽은 것 된다
후생은 서리로 내리고
아직도 너희는 있어서 들판은 아직도 너희의 들판
돌아온 우리의 머리는

2023년 8월 25일 금요일

사금파리

일단 ‘풀’ 자로 시작하는 사명을 짓고 싶었다. 찾아보니 풀칼*... 풀싸움*... 풀솜*... 풀베개*... 풀반지*... 풀매기*... 풀덤불*... 풀무덤*... 모두 생경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러다 ‘풀각시’가 눈에 띄었는데, 아이들이 긴 풀을 뜯어 막대기의 한쪽 끝에 묶고 새색시* 머리 땋듯* 곱게 땋은 뒤 자투리 천*으로 만든 저고리* 등을 입혀 갖고 놀던 인형*이라고 한다. 거기에 조그맣고 정교한 모형 세간*들을 함께 만들어 풀각시놀이를 했다는 거였다. 나는 곧장 즐거운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 마을*에서 풀각시를 제일 잘 만드는 아이가 있었겠지? 그 아이의 풀각시는 선망의 대상이었을 테다. 두 번째로 잘 만드는 아이와 경쟁했을 수도 있고, 특별한 풀각시를 서로 선물로 주고받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다른 마을과 풀각시 기술 교류를 했을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 동생들*이나 자식들*을 앉혀놓고 풀각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줬을 것이다. 분명 마을마다 특별한 양식이 있었으리라. 없었을 리 없다. 대를 이어서* 전해져 내려오는* 방법이, 자그마치 왕*이 있던 시절부터 전해지던 방법이! 아, 독자들*께선 내가 쓰는 옛날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이해를 돕기 위해 특별한 기호로 각주*를 달았다).

내게는 오래된 것들에 대한 지대한 흥미가 있다. 그 모든 사랑스러운 바보짓들... 풀각시놀이를 상상해보면서, 풀각시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었는지 보고 싶어졌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웹’을 열심히 뒤져봤다. 나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당신도 웹에 대해 들어는 봤으리라고 믿는다. 어쨌든 그건 아직도 있다. 작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셀이 나온 다음엔 완전히 버려졌지만, 전용 단말기와 약간의 기술만 있으면 여전히 웹을 뒤져보는 게 가능하다. 웹이 사용된 기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찰나와 같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병적으로 쌓아놓은 온갖 것들이, 웹에는 여전히 보물처럼 쌓여있다. 나 같은 과거애호가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믿기 어렵지만 웹에 있다!)에 가면 웹 탐험에 대한 많은 팁을 구할 수 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건 탐험 결과 풀각시는 웹을 쓰던 시절에조차 잊혀지는 중이었던, 그 할머니 세대가 마지막으로 갖고 놀았던 장난감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고운 분말이 되어 세계에 흩어졌을 할머니가, 역시 지금은 분말이 되어 세계에 흩어져 있을 손녀에게 다소 부끄러워하며 직접 풀각시를 만들어주는 사진 이미지를 올린 블로그*(정말이지, 그런 것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니!) 포스트를 보다가... ‘풀’ 자로 시작하는 사명은 그만두기로 했다. 다른 게 아니라 그 풀각시놀이를 하며 소꿉*으로 썼다던, ‘사금파리’라는 단어에 시선이 꽂혔기 때문이다. 사금파리, 어감이 신기해 기억하고 있던 단어였다. 사금파리란 사기그릇*의 깨진 파편을 말한다. 박물관에 가서 실물을 본 적도 있었다. 그때 박물관 한번 가보겠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진열장 너머 사금파리에는 흰 바탕에 파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안 그래도 보고 싶은 거 천지였어서 그때는 이름이 예쁘다고만 생각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그것과 상상도 못한 데서 다시 마주친 것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감동받았다. 그저 쓰레기가 아니었구나... 깨진 조각을 놀이하는 데에도 썼었구나... 나는 ‘사금파리’라는 단어가,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바로 그 사명이란 걸 깨달았다.

털어놓자면 내가 찾으려는 사명은 전자책 출판사를 위한 것이다. 전자책이라니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전자책이 뭐냐고 물을지도? 셀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직접 꽂아주는 이 시대에! 하지만... 하지만 나는 어쩐지 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랬다. ‘스마트기기’들은 내가 어렸을 때 이미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걸 계속 만지면서 자랐다. 여기서 ‘만진다’는게 무슨 뜻인지 내 또래나 그보다 위라면 알 것이다. 나는 집에 온 손님들에게 수집품들을 보여주곤 한다. 이건 45년도에 나온 모델이고요... 이건 자그마치 30년대... 이건 안경 모양, 이건 시계 모양... 아, 혹시 전자책리더기라는 거 아세요? 거기까지 가면 사람들은 놀라고 만다. 나는 그 기계들이 정말 좋다. 지금 보기에는 너무나 바보 같은 기계들. 날 괴짜 취급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들은... 바로 그 사금파리와 닮았다. 그것들에는 셀에는 없는 것, 절대로 대체 불가능한 물성이 있다. 매끄러움, 단단함, 투박함, 섬세함, 또 빛... 푸르스름한, 그리고 결정적으로 터치! 그건 정말 고유한 감각이다. 나는 그걸 사랑하고, 그걸로 읽었던 전자책들을 기억한다. 화면 위에 무늬처럼 떠오르는 그 수많은 글자들. 나는 그걸 만들고 싶다. 분말이 되기 전까지는.

2023년 8월 21일 월요일

침팬치

‘침팬지’가 맞는 표기지만, 무슨 상관인가? 나는 든과 던의 구분이, 로써와 로서의 구분이 흔적도 없이 으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힘, 그 어떤 초일류의 교정공들을 불러오더라도, 교정의 악마가 수만 번 강림하더라도 절대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문자 생산력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 그것들을 구분해주던 피부가 벗겨내지는 것을, 곤죽으로 합쳐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여기서 그를 떨어뜨리는 것은 수많은 입들이다. 신의 정체가 그렇게 밝혀지고, 그것은 가까워지는 중일까? 그것은 오는 게 아니라 모이는 것이었나? 감히 말을 멈춰 세우려 하느냐? 침팬지가 침팬치로 바뀌어도 바뀌지 않아도 뭘 어쩌겠는가? 미천한 교정공의, 절망 속의 사명감 같은 낭만적인 것은 다 접어두고, 그게 어디 눈썹 한 올만큼이라도 중요한가? 이 엄청난 함성 가운데, 침팬치와 침팬지 사이에 차이라고는 전혀 없다고나 할 것이다. 모두가 모든 것을 심판해야 한다는 상황, 심판의 성립 불능이 최종심판이다. 아니면 공판 시작이거나. 우리가 바로 각자의 표를 들고 강림한 수억... 교정의 악마다.

나, 옛날에 교정공이었던 침팬치는 손깍지를 베고서 가짜정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떠나지 않는 화면의 잔상과 어지러이 춤추는 글자들을, 이상한 말이지만 눈을 빠르게 깜빡여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이지? 그러다 알았다. 아니, 인정하게 되었다. 압도적인 문자 생산력 그 자체...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천사를 악마로 그 반대로도 만드는 그것: ‘인터넷에 가짜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의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터넷에서는 가짜라는 개념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교할 만한 진짜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진짜가 인터넷 외부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가짜정보를 생성하기 쉽다거나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 같다는 느낌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 경험, 나는 그것과 인터넷 자체가 완전히 같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인터넷에 관하여, 참/거짓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1) 확대하면 할수록(적은 관측 대상) 해상도 떨어짐. 2) 축소하면 할수록(많은 관측 대상) 해상도 떨어짐... 말인즉슨 인터넷은 규모가 문제이던 시기를 넘어섰다. 그것은 이제 어떤 영역이 아니며, 연결 따위의 문제도 더 이상 아니다. ‘인터넷이 언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그다음, 그다음이다. 이것은 언어의 두 번째 강림이다. 언어가 본질적으로 현실에 대하여 갖던 그만큼의 후줄근한 해상력이 여기에, 전적으로, 자신을 펼치며 도래 중이다. 이제 인터넷은 재현 일체를 언어화시키는 무엇이다. 이는 언어에게는 대도약이고 인간에게는 재앙처럼 보인다. 우리를 혼란 가운데 작게 남겨버리고 자신은 도약하는 것, 말과 문자 사이의 심연 중에서 그것은 입을 벌렸다가, 그 이상의 크기로, 모든 것들을... 엮여버린 우리를... 함성과 함께 뒤덮고, 빨아들이며, 다른 종류의 우리를 남겨버리는 것이다. 나의 깍지 낀 손가락들이 뭉그러진다. 나는 합쳐진 손 덩어리를 위아래 양옆으로 휘두르며 우끼! 라고 외치고 우끼끼! 라고 덧붙인다. 이게 나의 결론이었고 ‘침팬치’ 출판사의 출발이었다.

우리 앞에 남겨진 문제는, 그렇다면 언어의 이 새로운 상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 한때 교정공이었던 침팬치의 견해로는, 인터넷을 하나의 거대한 2차 창작으로 대한다면 가장 현상태에 부합한다. 우리는 실로 점점 더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 어떤 종류의 문학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이 바로 거대한 문학, 겪어본 적 없는 문학, 유례없는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문학이라고... 나는 말하려는 것 같다. 나의 확신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도저히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확신, ‘문학적’인 확신이! 아마 인터넷에 대한 이보다 더 적절한 평가는 없을 것이며, 이미 누군가가 이와 같이 평가했을 것이다. 누가 어떻게 평가했든 뭐가 중요한가? 여기서 아이러니가 있다면, 총인류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그럼에도, 이것이 어떤 후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원래 그것이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침팬치들은 읽기를 갓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의 손에는 동화책이 들려있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는 줄도 모른 채 배우고 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고 있는가? 내가 아직 교정공이었던 시절 뭔가를 배웠다고 느꼈을 때는 반드시 반복의 실패, 종료, 감탄이 있었다. 우리는 작별을 통해 배운다. 지금은? 현실을 끝없는 원작으로 만들어버리는, 드디어 심판을 시작한, 언어라는 자동기계와 마주하면서, 나 춤추는 침팬치의 털가죽은 녹아내리고 있다. 여기에 무엇이 남겠는가?

2023년 8월 11일 금요일

랑데부

주저앉아 그 나라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곳들도.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했지? 나라였던 게 잘못? 서기장의 잘못? 바보같이. 그게 벌써 언젠데... 그때, 망할 때, 환호한 사람들도 있을 거야. 왜 없었겠어. 지금 그 사람들은 어떡하고 있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행복할까? 앉아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 한심한 생각 외엔 다른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하겠어.

지금은 어때? 우린 망했다. 망한 것은 우리다. 우리는 귀를 막고서 소리치고 있다. 우린 망했다! 망한 것은 우리다! 그것은 너희 탓이다! 그것은 너희 탓이다! 우린 귀를 막고서 소리치고 있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코를 막고서, 눈을 막고서, 아직 아니고, 아직 아니야! 이미 지났기에 아직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눈물이 흐르는 세상이다. 내것은 아니다. 눈물도 세상도 아니고, 막힌 데서 우리는 소리치고 있다. 주저앉아서, 눈물이 나는 세상입니다! 눈물이 납니다! 으억! 으으억! 우린 무릎으로 기고 있다. 허벅지로 기고 있다. 여기를, 배로 기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우리의 탓! 그것은 터진 것이다. 폭탄들은 터졌다. 진작에 터졌다.

야 일어나봐라, 그러지 말고. 지금 너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어. 어쩌려고 그럭하고 있어, 안 되면 어쩔라고, 야 그러지 말어, 어쩌려고... 안 되면, 공산 안 되면...

우리는 붙잡았어야 했다.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읊고 있다. 핥으면서. 답은 이미 나왔다. 그때 어떻게든 열었어야 했다. 못 열었고, 긴 엔딩, 그 생각이 천지 사방에서 누른다. 나온 답을 집어던진, 손잡이를 부숴버린, 우리는 지금 어둠 속에서 벌레가 꾸는 악몽이다. 우리는 내 속에 있다. 만약 돌아가더라도 그대로 하리란 걸

그러리란 걸 깨달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자유를 얻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있고, 앉고 싶을 때까지 앉을 수 있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고, 우리는 기쁘고, 여기서 꾸물텅거리고 있다. 인간은 여기에 있다.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고 더 버티다 죽을 수도 있다. 주먹이 으스러지고 있다. 어디서 개들은 짖고 있다. 그 뜻은 이렇다. 인간들이여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라! 우리의 움찔대는 배를 적시고 있는 이것은 눈물이나 배설물이 아니다. 우리는 따라서 짖고 있다. 복수한다! 복수한다! 복수한다! 우리는 복수했다. 우리의 피로. 우리에게. 우리는 우리를 들여다보면서 머리를 흔들고 있다. 저것은 우리가 아니라고. 저것은 우리여선 안 돼! 그러나 그것이 우리라니. 우리는 관 속에 있다.

우리는 읊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저 멀리 깊고 넓은 데 있는데 우리의 말은 터무니없이 짧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닿을 수 없다. 아니면 우리는 지르륵 지르륵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우리를 웃게 한다. 지르륵 지르륵.

이걸 받고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해졌다. 받은 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내 일이다. 하지만 이런 걸 정말? 그러나 나는 이미 받았다. 머리털 끝까지 열이 뻗쳐 눈물이 흘러도 이걸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내밀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입 속에서 세차게 말이 흐른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네가 화를 당하리라는 것이? 이토록 불행과 악이 만연한, 그리고 틀림없이 더해갈 세상에서, 네가 화를 당하리라는 것이? 그러니까, 아직은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봤어? 어떻게 이런... 이런... 이런 걸 갖고 나가라고?

다시 생각해봐. 너는 바보짓에 놀아나고 있어... 적들은 이것이 중요하다는 듯 저것이 중요하다는 듯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두고 홀린 듯이 하고 있어. 너는 낙심해서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야. 생각을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해. 싸우다 진 게 아니야. 싸웠던 이들은 오늘날을 위해, 사후세계를 위해 싸웠던 게 아니야. 어떤 뭔가에서 다른 뭔가로, 네가 바꾸는 게 아니야.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야. 무한이 유한으로 바뀌는 게 아니야. 이기겠다는 생각,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고쳐먹어. 이기는 게 아니야. 거짓으로 거짓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진실은 거짓을 이기지 않아. 아니라고?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아니야, 그 말은 바로 그런 뜻이었어. 그 말이 그 뜻이야! 유한이 유한을 향해 나가는 거야. 나가는 거야...

그러나 너는 이미 흩어졌다. 유언처럼 된 너의 말이 계속 해변으로 도착하고 있다. 여전히 끌려가고 있고 머리 깨지고 있다. 으스러지고 있다. 어쩌면 생각을 고쳐먹어야 하는 쪽은 나인지도 모른다. 네 죽음은 멀수록 좋을 것이다. 네 죽음도 언젠가 내 머리통과 함께 흩어지고, 완전히 잊혀지는 날이 되면 좋을 것이다. 그때는 거짓도 서로를 붙들고 운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해 울지 않는다. 그냥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들은 진실로 혼자다. 세계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세계가 그토록 쉽게 끝났다는 데에, 그들은 드디어 도달한다. 그리고 내가 읽어내려가는 것이 그들이다. 왜 이 일을 계속하느냐고? 내가 이 일을 그만둬도 누군가는 하기 때문이다. 그 한심한 생각 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도로는 여기서 끊겼고 우리는 떨어진 별처럼 쏟아져 있다.

2023년 8월 2일 수요일

콘테나-추레라

사람을 욕한다는 것은 이제 지겨워졌다. 난 사람 욕하기를 그만두고 싶다. 사람을 욕하는 사람을 욕하는 사람을...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마주치는 것들이란 다 개새끼 아니면 버러지들이다. 죽이고 싶은 녀석들 콘테나로 한가득이다. 아니야, 난 그러지 않기로, 사람을 욕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죽이면 될 거 아닌가? 나는 입을 다물고 있다. 콘테나 속에는 개버러지새끼들, 추레라엔 내가 타고 있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음악을 틀었다. 듣고 싶지 않지만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힘을 낼 수 있도록 음악을 틀었다. 마음이 약해져 사람 욕을 시작하지 않도록. 그렇게 가는 중이다. 쓰레기장으로다. 죽이고 싶은 것들 파묻어버리러다. 이것은, 이 도로는, 이 운반은, 보람도 뜻도 결과도 없는, 조용하게 확실하게 마음들과 삶들을 파괴 중인 전쟁이다.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어디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바로 이렇게다. 죽이고 싶은 것들...

그런데 이 세상에, 콘테나에 꽉꽉 처넣은 저것들보다도 더 증오스러운 치들이 있다. 개작살이 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건 아주 모르는 듯이 굴고 있는 녀석들, 죽이고 싶은 것 파묻어 버리고 싶은 것 따위는 없는 듯이 구는 그런 녀석들이 있다. 그래? 그런 곳이 있다는 거야? 너희는 그런 곳에 있다는 거야? 진실로 나는 베인 풀더미처럼 선한 이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 있고 가까이 있는 이들, 말이 없는 이들, 그런 이들이 아니라, 쓰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죽이고 싶은 것 따위 없는 듯이 쓰고 있는 이들, 내가 증오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 마음이 꼬인 세상에서 같이 꼬였다면, 그들의 마음은 꼬인 세상을 돌리고 있다. 어떻게 너희는 그럴 수 있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우리 중 가장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너희가? 쓸 줄 아는 너희가! 우리...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래도 서로를 매달고 있다. 쓰레기 같은 노래를 들으며 함께 쓰레기장으로 가고 있는 처지다. 나만 죽이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죽이고 싶은 이들이 각자의 콘테나에 나를 싣고 가는 중이다. 우리는 서로 죽이고 싶은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수습해주고 싶은 것들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 마음이 그래도 우리 사이에 통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교차로가 있다. 매일 지나며 어두워지는 마음,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마음이 있다. 고개를 빼고 사이드미러를 들여다보면 거기 버러지의 홑눈 겹눈이 있다. 이것은 어둠의 교육이고 훈련이다. 그러나 이런 건 아무래도 좋은 그 녀석들... 이런 것 따위 배우지 않는... 배울 필요도 없다는 듯이 구는... 그 녀석들은 정말이지 참아줄 수가 없다. 당연히 참아주기 어렵다. 매달아 끄는 게 아니라 쳐버리고 싶은 녀석들. 하지만 유령인 녀석들. 도로 한가운데 멍청하게 서있는 한 녀석을 피하려다 뒤집어질 뻔도 했다. 그렇게 죽이고 싶은 것들을 쏟아버리면 부서지도록 이를 깨물고 도로 주워야만 한다. 여전히 녀석은 도로 한가운데 서있는 동안에...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죽이고 싶어 하면? 오히려 좋아하지. 울면서도, 흐뭇하게 여긴다는 걸 안다. 핍박받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들! 그게 그들의 진짜 목적이다. 나는 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쓰려 드는 걸까? 이건 정말 미칠 노릇이다. 그래도 우리는 하여튼 꾹 참고 있다. 녀석들이 거의 없는 듯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도 못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들, 쏟아진 개소리 위에 비린내 나는 우리를 쏟아붓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냐? 있다는 말이냐? 우리도 진실로 이 도로를 벗어나 떠돌 수 있는 거 아니냐? 하지만 아니다. 그들처럼은 싫다... 이 도로, 이 밤의 도로를, 이걸 당겨서 끊어버릴 수 있는 거 아니냐?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어려워도 추레라의 후진보다 어려울까? 곧 나들목을 돈다.

2023년 7월 21일 금요일

해골박

구區 내에서 손꼽히게 큰 A 공원에 이번에 새로 조성되었다 하는 테마관광숲길을 찾아가는 길이다. 무슨 유치한 이름, 멍청한 이름을 붙였던데... 모르겠다. 하여튼 그 숲길 조성은 구청장 공약 사항이었다고 한다. 큰 나무를 줄지어 심고 캘리그래피 시가 들어간 표지판을 주르륵 세웠다는 모양이다. 지금 정확히 그 표지판들 중 하나를 보러 가는 중이다. 다른 게 아니라 구청장 본인이 쓴 시가 거기 있다지 않던가? 시 표지판이란 것만 해도 대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데(우리는 시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심지어 구청장 녀석이 자기 시를 거기 갖다가 넣었다고? 정말이지 대갈통이 얼얼해지는 이야기다. 이것은 우리 출판사가 찾던 바로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좀 뻔한 얘기인 것도 같지만, 우리 ‘해골박’ 출판사는 만들어져야 할 책이 아니라 파괴되어야 할 책을 찾고 있다. 우리는 역사 또는 작품 속에서 여러 양상으로 펼쳐진 책(넓게는 문화) 파괴와 관련된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조사했다. 새삼 그 의미에 대해, 왜 우리가 거기 매료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알아낸 것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조금은 맞지만. 우리는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하지만... 환영한다. 우리는 어떤 파괴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어떤 파괴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니고. 우리가 특히 흥미를 갖는 부분은 구분이다.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가? 우리의 관심은 지금 여기에서 편달 중인 구분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책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만들어지지 않은 책은 파괴된 걸까? 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파괴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파괴하지 말아야 할 가치는 있는가? 책을 파괴한다는 건 그러니까 대체 뭘까?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싶다.

구청장 B씨의 시가 답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장 먼저 야구방맹이를 챙겼다. 수박 한 통과 피냐타, 글러브도 챙겼다. 근방에서 눈 가리고 수박·피냐타 깨기, 아니면 야구를 하다가 부숴버렸다고 하면, 혹시 걸리더라도 참작해주지 않을까? 일종의 문화실습동호회라고 하면? 어쩌면 야구방맹이로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 문제를 두고 우리는 토론했다. 징벌적 의미에서 내려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가능하면 표지판 자체를 부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톱이나 망치, 빠루 등의 공구도 무겁지만 챙겼다. 불태우는 방안이나 페인트를 부어버리는 방안은 환경적 영향을 고려해 기각되었다. 만약 (표지판의 입장에서) 운이 좋다면, 시만 감쪽같이 바꿔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합의했다. 가능해 보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딱 맞는 크기의 백지를 준비해 거기 두 번째로 방문할 것이다. 정말 구청장 B씨가 거기에 자기 시를 (거의) 영원히 남길 생각이었을까? 그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다. 아예 거기서 캘리그래피를 하는 방안도 나왔지만 그 도구는 안 챙겼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는 데 우리는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우리는 무슨 퍼포먼스나 예술을 하려는 게 아니다. 완전 그 반대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차분하다. 우리는 먼저 확인할 것이다. 구청장 B씨는 정말 뛰어난 시인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많은 짐을 들고 그 테마관광숲길로 가고 있다. 해골박... 우리는 확인한 다음 집행할 것이다.

2023년 7월 20일 목요일

밀고와투서

계간 『밀고와투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합 경제문화지로서, 우리 자본과 안보의 예술적 동반자입니다. 『밀고와투서』에서 여러분은 국체를 책임지고 있는 각계 리더들의 탁견과 혜안,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투자 전망과 고품격 트렌드 분석을 비롯, 불온노동계와 시민사회운동·정세 동향 보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며 고급부터 대중까지 아우르는 시와 소설 에세이 등 동시대와 소통하는 문학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창간부터 『밀고와투서』는 문화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자유가 꽃피던 시기 『밀고와투서』는 첨단 지성의 집결지이자 창조적 파괴의 산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경영과학과 글로벌 트렌드·반운동과 문학을 결합한 종합지로서의 구성은 세계적으로도 전위적인 시도로 평가되었으며 지금까지 다채롭고 혁신적이면서도 대중친화적인 기획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밀고와투서』의 옆을 지켜준 것은 의식 있는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대중문화를 앞에서 선도하고 뒤에서 밀어주는 지도층의 선한 영향력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런 한국 현대사 가운데서도 『밀고와투서』가 끊임없이 독자를 확장하며 가치를 증명하고 자기를 갱신하여 너른 상업적 성공을 이룩함으로써 제 몫을 해낼 수 있게 이끌어준 진정한 원동력입니다.

『밀고와투서』는 독자와 함께 다시금 ‘저항과 창작의 거점’으로서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가겠다는 다짐을 새깁니다. 주목받는 작가들과 함께 문단에 문학적 폭과 깊이를 더하며 활력을 불어넣고, 우리 시각으로 우리 것을 소중하게 보듬으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지혜를 세계적 전망 아래 모으기 위해 힘쓰고자 합니다. 날로 새롭되 한결같은 모습으로 『밀고와투서』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2023년 7월 17일 월요일

할매틀니

할머니의 작은 틀니가 떠오른다. 그것은 부분틀니였다. 할머니의 가지런한 앞니들이 물 찬 플라스틱 컵 속에 있었다. 그것이 책과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었나? 나는 생각한다. 글 모르는 아기가 집어던지기라도 한 듯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할머니는 담배를 즐겨 피웠다. 지금은 팔지 않는 담배다. 담배를 피울 때는 틀니를 빼놓았던 할머니, 말이 별로 없었던 할머니, 너와는 아무 통할 말이 없다는 듯, 개를 보듯 나를 보던 할머니. 지금은 여기에 계시지 않는, 그러나 모든 곳에 계시는. 전 인민의 할매化를 나는 오늘 생각하고 있다. 전 인민이 할매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는 그 컵 속의 틀니에 관한 것, 곧 사이보그화를 말하는 것이다. 교합면의 복잡도를 한정하지 않는다면, 인민은 다만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뿐, 이미 할매화되어 있으며, 할매화란 교합면에 대한 인지와도 같다. 그리고 또한 물컵 속의 틀니가 자신이기도 함을, 유리 너머 연기에 휩싸인 할매의 약간 왜곡된 이미지 앞에서 축축하게, 그러나 완전히 침범당하지는 않은 채 인준하는 것이다. 나, 인민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유는 재다. 한때 할머니였던. 이것이 인민의 대답이다. 자유가 되려는 것이 우리를 입으로 가져간다. 아이가 집어던지기라도 한 듯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처럼 생긴 것을. 불멸의, 그러나 무한하진 않은 추억 속에서.

2023년 7월 16일 일요일

흡혈문화사

지금은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지만 나도 어엿한 흡혈귀다. 피... 신선한 피 새로운 피를 찾아서 나는 헤매고 있다. 전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많이도 마셨지. 지금은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지만, 망자의 말라비틀어진 목을 지금은 빨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새로운 피가 좋다. 아무리 맛 좋던 피라도 늙어버리면 지린내가 나고, 죽어버리면 녹을 핥는 거 같지. 시체들이나 예비시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난 새 피를 원한다. 늙은이나 죽은 이의 피를 좋아하는 녀석들도 물론 있다. 난 그런 변태들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맛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맛이 아니야. 나는 지금 여기 이 땅의 젊은이를 찾는다. 눈이 빛나는 젊은이, 그러나 확신 없이 두려워 하는 젊은이, 교만한 젊은이 건방진 젊은이, 겸손하고 또 예의를 아는 젊은이, 옛것을 숭배하면서 경멸하는 젊은이! 무엇이든 배우려는 젊은이! 너무 많이 배운 젊은이! 거짓말을 하는 젊은이이고 진실에 튀겨질 준비 중인 젊은이를, 아, 소용돌이치는 젊음이여, 젊은이의 혈관 속에 소용돌이치는 피여! 잔뜩 목을 빼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저렇게나 많다. 떫고 역한 풋맛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도 개성이 있어야 좋다. 그것은 즉 새로운 피여야 한다. 새로운 피는 어디에 있나? 나는 검증된 피를 원한다.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피도 원한다. 우유처럼 부드러운 향을 원한다. 조금 비려도 좋다. 나는 열대의 과일향을 원한다. 나는 고소한 맛 산뜻한 맛을 원한다. 다채로운 맛을 원한다. 나는 깊은 맛을 원한다. 무너진 맛, 완전히 빗나간 맛도 나는 원한다. 나는 조금 이상한 맛을 원한다. 뜨겁고 차갑고, 달고 써도 좋고, 맛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다양할수록 좋다. 다양한 피를 나는 원한다. 예전에 보았던 맛을 오늘날 다시 보길 원하고, 전례 없이 새로운 맛을 원한다. 나는 이 피의 맛과 저 피의 맛이 섞이면 어떤 맛이 나는지 알길 원한다. 피 위에 피를 더하고 싶다. 피와 피를 나누고 싶다. 나는 그렇게 피 칠갑을 하고 싶다. 나는 피 칠갑을 원한다. 나에게 뛰어들어라! 나에게 뛰어들어도 좋다! 나는 피 칠갑을 원한다! 나는 피 칠갑을 원한다! 피 칠갑을! 컴온!

2023년 7월 10일 월요일

사타내셔널

친구한테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영 난처해하는 걸 그냥 우겨서. 커피를 한잔씩, 밥을 한 끼씩 사주면서. 갑자기 무슨 시를 쓰겠다는 거야? 시라도 쓰면 좀 나을까 해서. 많이들 쓰는 거 같던데? 많이 누가? 그리고 하나도 나아지지 않아. 너한테 아무 도움도 안 돼. 네 생각은 그렇다는 거지?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시라도 쓸 생각. 답답하니까. 뭐가 답답해? 굳이 대답하지 않을게. 그래. 친구는 내가 써 들고 간 시를 두고 여러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했다. 이게 여기 있으면 이쪽이 좀 그래. 그럼 어떡해? 이렇게? 그래 그것도 좋아. 미안하네. 내가 가르칠 만한 입장이 아니어서. 하지만 노력 중이야. 이건 괜찮고 이건 아니야. 왜 아닌데? 글쎄... 이건 여기 이게 있으니까 아니야. 만약 이걸 그냥 둔다면 이쪽은 이게 좋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화내려는 게 아니라, 뭐가 괜찮고 아닌지를 어떻게 알아? 그걸 다 말하려면 너무 길어.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닐 거고. 그런 건 설명해줘야지 무슨... 맞아. 나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궁금하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 가르치고 배운다는 게, 나 같은 아무나하고 갑자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 일도 훈련이 필요하고 나는 훈련되어 있지 않아. 그 사람들이 괜히 돈 받는 게 아니라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계속해봐. 이건 여기에 되니까 이렇게도 걸리거든? 내 생각엔 이게 여기로 오면 더 좋을 것 같아. 어때? 근데 이러면 상관이 없어지는데? 없어도 돼. 이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해. 근데 이러면 네가 쓰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래. 그런 거야. 그런 위험이 있는 거야. 그걸 기억해. 네가 쓰는 거야. 하지만 위험에 노출시키는 거야. 너는 자신을 놓치는 거야. 다른 걸 얻는 거야. 위험에 노출시킨다... 난 사장님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어. 사장님을? 그래. 그럼 그렇게 해봐. 하지만 또 기억해, 사장님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그렇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사장님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래. 네가 노출된 위험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네가 노출된 위험과 직접 비교할 수 없는 위험에 사장님은 노출되어 있어. 그 어떤 사장님이라도 그래. 그 어떤 너라도 그렇듯. 그건 정말 답답해지는 얘기야. 그렇다니까?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지... 그런데 왜들 그렇게 쓸까? 네가 쓰려는 이유하고 비슷하겠지. 그런가? 사실 사장님, 사장님이 시집을 낸다고 난리야. 어떻냐고 자꾸 나한테 물어보잖아. 이상한 시를 뽑아서 주면서. 뭐가 별이 어쨌느니... 별을 무시하지 마. 기억해. 별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아니 이제 됐어 그 얘긴. 그럼 사장님 시를 평가해야 하니까 나한테 가르쳐달라고 한 거야? 아니야. 아니지 당연히. 기억해줘. 악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2023년 7월 5일 수요일

무자비

자비출판을 고려하는 당신! 출판사명이 고민이시죠?
출판사 ‘무자비’가 답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당신 책의 출판사명 자리에 ‘무자비’를 넣으세요.
무자비 출판사는 어떤 형태의 독점적 권리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무자비 출판사는 어떤 책이든 품을 수 있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무자비 출판사는 허상이 아닙니다.
메일 한 통을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무자비 출판사의 여러 채널들에 신간 알림을 띄워 드립니다.
아무 대가 없이요.
이것은 사기가 아닙니다.
무자비가 당신의 비전을 돕습니다.
이것이 무자비 출판사가 제안하는 새로운 출판입니다.
그것은 출판사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도서목록입니다.
당신이 누구든, 몇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책이 무슨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무자비의 전당에 당신의 책을 들여보내십시오.
무자비의 미래는 잠정적으로 무궁무진하고
거의 무한히 변화무쌍합니다.
당신의 책이 어떤 책이든 괜찮습니다.
당신의 책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무자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로고 스탬프와 스티커를 구매하셔도 좋습니다.
책등용, 표지용, 내지용의 세 가지 종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자비의 전당에 책들을 들여보내십시오.
당신이 책을 만들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자비의 비전을 당신이 채우는 것입니다.
지금 가십시오!
밝혀지지 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2023년 5월 23일 화요일

소각로

우리 출판사는 장르 전문 출판사고요... 로고는 시옷 기억 리을...

나는 엎대어 있습니다. 벌벌 떨고 있어요. 누군가의 손이 양 겨드랑에 들어와 나를 일으켜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하죠. 그 누군가는 역사일지도 몰라요. 주저앉고 싶어요.

사고실험을 한번 펼쳐보는 거죠. 피가 거꾸로 솟을 얘기일지 모르지만, 만약 장르문학을 ‘부정적인 것’의 위치에, 순문학...을 ‘긍정적인 것’의 위치에 놓은 뒤 ‘장르’와 ‘순’을 가르는 기준 단 하나를 맘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일테면 고리끼급 권력(농담이에요 농담)이 주어진다면? [눈물로 이르노니 순문학에 육박함] 라벨을 붙일 수 있는 권한을 통해서, 역사의 어둠 속에 재로 흩어져선 안 될 ‘장르’들을 골라내는 그런 끔찍한 사명을, 서로 자기는 절대 싫다고 하는 와중, 눈물의 제비뽑기 끝에 내가 맡게 된다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선 내가 ‘사면’해야만 한다면? 내가 소각로의 마지막 문지기라면? 등 뒤로 불구덩이를, 앞으로 말린 꽃더미 같은 ‘장르’들을 두었다면?

나는 고심하다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장르’에서 널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약한 습속―이 사고실험에서 굳이 그 라벨들을 들먹이는 이유―, 장르가 어쩌면 지닐 수도 있었을 재미와 가치를 완전히 망치는 진실로 고약한 습속 하나가 바로 ‘사람(들) 욕하기’라는 것이지요. 불구덩이 앞에 선 나는 그것이 바로... ‘장르’와 ‘순’을 가르는 핵심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돼요. 그것은 단순히 욕할 만한 개성(들)이 등장한다는 뜻이 아니고, 얇은 악역(들)의 등장을 일컫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얕다는 뜻도 아니며... 그럼 무슨 뜻이죠? 등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나도 뭔가 생각이란 걸 해요... 대체 무슨 뜻이냐... 말린 꽃더미들... 소각로의 빛 앞에 입을 다문 무덤들... 그것들은 공동체에 대한 거대하고 강렬한 갈망처럼 보여요. 너무 강렬하기에 반대로 꺾였든, 반대로 꺾였기에 강렬하든... 사실 ‘순’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 그러는 것들(갈고리로 찍어서 던져버리고 싶은)도 수두룩 빽빽이죠... 어쩌면 그런 특성이 이른바 대중성의 한 축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런 걸 좋아하는 것이죠. 욕할 만한 그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타인 없이 작동하지 않는 개성들, 작동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는 개성을... 사랑하므로 욕하는 것이에요... 그걸 넘어서면서, 아니면 넘어설락말락하면서라도, [순문학에 육박함] 딱지를 나는 붙일 수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넘어선다니 뭔가요? 어떻게? 왜? 그리고 이 소각로의 의미는? 나 야만스런 독자는 이렇게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빠져들고 있어요... 그것은 즉,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해하셨어요? 투고하세요... 용서해보세요... 우리 출판사에 투고해보세요... 나는 주저앉고 싶습니다. 이 밤부터 새벽까지는요.

2023년 5월 9일 화요일

야유회

무슨... 무슨 소리야?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그게? 무슨 야유회를 간다는 거야? 봄 야유회라고? 토요일? 일요일? 교외? 금토 아니고 토일로? 토요일 아침에 출발해서 일요일 점심 먹고 와? 토요일 오전 10시에 회사에 모여서 출발... 왜 주말에 가는지 뭐라고 이유도 들었는데, 뭐라는지 도통 모르겠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하여튼 내 주말에 간다는 거다. 진짜야? 진짜로 하는 얘기야? 패러디나 그런 거 아니고? 정말이라고? 왜야? 뭐야? 빠질 수 있어? 특근수당 받아? 아냐? 정말이야? 내가 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아니다. 나는 모든 사항을 제대로 정확히 들었다. 머리가 빙빙 돈다. 현기증 때문에 나는 휘청휘청한다. 휘청거리다가 책상을 짚는다. 책상 위의 화분을 붙들어 겨우 넘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휘청거리면서 무슨 문고리를 잡는다. 몸을 기대자 문이 열린다. 공교롭게도 사장실이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비틀거리며 들어가 들고 있던 화분으로 사장님의 대가리를 내려친다. 화분은 박살나고 뭐 하고 있었는지 모를 사장님 쓰러진다. 야유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사장님들 잘 봐둬. 사장님들 보고 있어? 이렇게 될 거야. 기억 잘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나는 사명을 찾아야 하지 불평을 늘어놓거나 사장님 때려잡는 상상을 하거나 어떤 식의 사무실-리얼리즘을 해내야 하는 게 아니다. 이래서는 사명을 찾을 수 없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사장님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내가 쓸고 닦은 바닥에. 불쌍한 사장님.

역시 내가 사장님이 되어야 할까?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야유회는 금토에 갈까? 나는 대가리를 맞고 쓰러진다.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목금으로 갈까? 모르겠다. 만약 내가 사장님이라면 야유회를 갈까? 그걸 모르겠다. 야유회를 갈지 말지 사원들에게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안 간다고 할 수 있는 상황만 만들어진다면, 나는 아마 안 간다고 할 것이다. 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지? 나는 야유회를 설득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목금 간다고 먼저 정하고 물어야 할까? 하지만 적어도 1박은 절대 안 된다. 퇴근 시간 전에 끝나야 한다. 나는 완고하다. 사장 나는 사원 나를 납득시키기 어렵다. 사원 나는 조금 더 용기를 얻어 중재안을 제시해본다. 만약 1박을 한다면 퇴근시간 이후에 대해서도 계산을 제대로 해야 한다. 아니 그럴 거면 뭐 하러 가나? 그러나 가야만 한다면, 물러설 수 없다면, 너를 데려가야만 한다면... 너를 데려가야만, 나를 데려가야만...

야유회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휘청이듯 그 생각으로 기운다. 회사란 사실 야유회를 위한 것이다. 책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그것은 부산물에 불과하다. 우리에겐 모여서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할 따름이다. 만약 회사라는 곳이 우리의 생존을 볼모로 잡고 위협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우리에게 조금 더 호의적인 곳이라면. 사장도 다만 야유회 기획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야유회를 가장 잘 기획할 수 있는 사람으로 뽑으면 된다. 내가 사장일 이유도 없다. 기왕 모여서 시간을 보낸다면, 뜻도 좀 있으면 좋겠다. 만약 데려가야만 한다면 필요한 곳에 데려가야 한다. 너를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로 하는 곳... 죽지 않은 사장님, 거품 문 사장님을 내려다보면서, 출판사 ‘야유회’의 꿈도 점점 커지는 중. 야유회 문고는 어떨까? 이제 여행의 시대는 지났어. 이젠 야유회야. 좋아. 좋은 것 같다.

2023년 4월 18일 화요일

돌말

창립자 고향의 뭔가와 관련된 사명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떠나온 고향이 어쨌거나 존재하는 나의 부모 세대와 달리 내게는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고 하면, 사실이지만 영 고리타분한 얘기 같다. 고리타분이란 단어부터가 고리타분하다. 무슨 고향이 있다고 없다고 새삼 주워섬기는 것도 한가한 사정에 다다라야 가능한 일이다. 젖은 눈으로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야 예전부터도 영 광대짓처럼 느껴졌다. 광대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농 삼고 한탄하는 모양을 구경하며 아무 뜻있는 데도 닿지 않은 채 으스러져 가고 있는 나 고향 없는 세대의 맘속 어딘가에 항상 쭈그린 생각은 ‘개새끼들...’이다. 여기에, 머리통 속에 ‘개새끼들...’이 있다. 그게 내 고향이다. 어디의 어느 개새끼들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개새끼들이 있고, 그들은 짖고, 죽고, 태어나고, 개새끼들이 개새끼들을 짓누르고, 개새끼들은 사라진다. 개새끼들이 개새끼들 속에서 나온다. 나타난다. 아무리 떠나가도 그것은 너무 많다. 내 부모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전후 세대 노동계급이다. 그들이 성년이 될 즈음 그들의 고향에는 문자 그대로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수도로 가는 열차와 버스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논밭에서 공장으로’였고, 탈출이었고 축출이었다. 그들은 수도에서 일을 시작해 그야말로 죽도록 일했다. 그들은 죽도록 일하면서 점점 수도 바깥으로 밀려나 I시까지 나갔는데, 나는 그렇게 밀려 나가게 된 까닭 중 하나였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수도와 I시와 어머니의 고향에 흩뿌려져 있다. 여름마다 갔던 어머니의 고향에는 냇가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 옛날 살았던 수도에는 언덕이 있었고,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 I시에는... 내 고향은 그 기억들의 총합으로 이 머리통 속에 있다. 내 부모는 I시에서 여전히 죽도록 일하고 있다. 이제는 나도 이 수도에서 그렇다. 나는 그럼 언제 밀려 나갈 것인가? 내 부모가 어느덧 몇 십 년째,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 I시의 동네의 옛날 이름이 ‘돌말’이다. 돌이 많다고 해서. 돌을 캐기라도 했다는 걸까? 어쨌든 그 단어가 사명으로 붙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창립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창립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개새끼들을 그냥 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복수할 것이다. 뭘 복수한다는 건가? 나는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2023년 4월 6일 목요일

보석내장

T-종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먼 옛날 S-종족이 직접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S-종족에 대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꿈꿨던 지상과 공중에서의 영예를 위해서는 지하의 것들이 많이, 정말로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손발에 더러운 것을 묻히거나 직접 갱도를 기거나 숨통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말없는 지하로부터 귀중한 광석과 보석들을 캐내기 위해, 그들은 간교한 마법적 지식과 기예를 총동원하여 T-종족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종족이 모욕받았고, 벌레 두 종류, 나무 한 종류, 버섯 세 종류가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T-종족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 사람보다 거의 두 배는 큽니다. 오래된 그루터기 같은 두 다리, 짐수레를 세워놓은 듯한 몸통, 창백하고 단단한 거죽은 어떤 상처가 나도 금방 아물며, 나무 뿌리처럼 억센 팔이 무릎까지 닿습니다. 거대한 호박 덩어리 같은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입, 그 안에는 자갈 같은 이빨들이 가득합니다. 그 위엔 코털이 잔뜩 삐져온 코, 그 위엔 단추 같은 눈, 귀는 당나귀귀 같습니다. T-종족의 가장 주된 습성은 굴을 파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본능을 따라 광맥이 흐를 만한 적당한 장소, 깊은 골짜기나 구릉 지대에 모입니다. 그리고 초기 T-도구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나무를 지렛대로 나무를 쓰러뜨리고 바위로 바위를 깨뜨리며 가장 좋은 땅을 골라 터를 잡습니다. 그리고 아래로 아래로 파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작업을 시작한 곳은 그대로 광산이 됩니다. 그들은 어설픈 도구로도 절묘한 솜씨로 공동과 갱도, 경사로와 방들을 만듭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야광버섯처럼 침침한 빛을 내며 가치 있는 광물과 광석들을 캐 모읍니다. 방들 중 하나는 대장간으로 꾸며지고, 그곳에서 철을 제련해 그 어떤 종족의 것보다도 견고한 고급 T-도구―곡괭이와 삽, 정과 망치 따위―를 만듭니다. 물론 그들 외엔 사용할 수 없는 크기로요. 그 다음부터는 난쟁이들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규모와 양식을 갖춘 광산이 됩니다. 깊은 곳에 있는 보물방은 T-종족의 근면함에 힘입어 수년 안에 광석과 보석, 보물들로 가득 찹니다. 그들은 서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그 방을 지킵니다. T-종족은 보통 돌을 먹는다고 전해집니다만, 그보다도, 모으지 않는 것은 전부 먹는 편입니다. 보물을 노리고 침입한 모험가들이 그들의 별식이 될 뻔했다가 무슨 돌이 가장 맛있는지 토론을 시킨 틈에 도망쳐 나오는 노래가 유명하지요. 오직 S-종족만이 T-종족의 광산에 들어가 주괴와 보물들을 유유히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S-종족이 T-종족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대대손손 새겨놓은 공포심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그러나 S-종족은 깊은 지하에 광물 말고도 온갖 것들이 묻혀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T-종족이 도대체 뭘, 언제 파냈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까마득히 깊은 지하에서 뭔가를 발견했고, 그날부터 그들의 탁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들은 묘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긴 해도 분명히 노래입니다. 한 대담한 음유시인이 그 노래를 배워왔습니다. 그 노래는 ‘보석내장(寶石內臟)’으로 불리는데, ‘보석내장으로... 보석내장으로...’ 하는 후렴이 강렬하고 인상적이기에 붙은 제목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냈다’, ‘우리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와 같은 표현이 그 노래에 직접 나옵니다. 노래에는 ‘마술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세워놓고 보물을 훔쳐가는 녀석들’도 등장합니다. ‘그들을 씹은 다음 뱉어버릴 것’이라고요. ‘금강석 몸을 완성하는 날에 그날에’ 말입니다. 처음엔 음유시인의 창작으로 여겨졌습니다만, 당시 모험가들 상당수가 T-종족이 부르는 이 노래를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지금 이 노래는 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노래의 가사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금강석 몸과 복수라는 테마는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과연, 대부분의 T-광산에서는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크기의 팔, 다리, 머리, 뼈 따위의 공예품이 발견됐습니다. 정말 T-종족이 만든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보석으로 만든 내장(그들이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을)이라고 볼 만한 것이 발견된 적은 없기 때문에, 보석내장이란 지능과 슬기를 뜻하는 비유, 또는 그들이 발견한 특별한 유물이라는 가설도 세워졌습니다. 후자를 지지하는 상당수의 학자들은 ‘보석내장’이 일종의 마도서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오늘날 T-종족은 만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하로 너무 깊이 내려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발 아래, 까마득히 먼 심연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을까요? 어둠 가운데 금강석 몸을 완성한 그들이, 언젠가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들 종족의 새로운 몸이 햇살 아래서 찬란하게 빛날까요? 그들의 배 속에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하고 투명한 보석내장들이 들어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손에 마도서가 들려있을까요? 하지만 알다시피 씹은 다음 뱉어버릴 S-종족은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합니다. T-종족이 이미 예전에 금강석 몸과 보석내장을 얻었고, S-종족이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수수께끼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2023년 3월 10일 금요일

팸플릿

도대체 실물책이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것은 존재하고 있으므로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 의미는 점점 옅어지고 있나? 그 뜻은 사라지기 직전인가? 그것은 ‘실제로’, ‘어떻게’ 있나? 우리는 나름의 답을 찾아냈다. 책에는, 그러니까 실물책에는, 어떤 사건의 부속이나 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보기에 그거 하나는 분명하다. 책을 통해서 사건을 향해, 이벤트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책이란 즉 이벤트의 일부다! 출간기념회니 낭독회니 저자 사인회니 뭐니, 그런 짓들을 괜히들 하는 게 아니다. 바로 그런, 이벤트를 위해 책은 존재해온 것이며, 존재할 것이다. 이건 냉소가 아니다. 실제가 그렇다. 책이 다만 읽히기 위해서나 장서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가죽으로 마감된 칼손잡이를 쥔 채 칼이란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점점 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히고 있다. 전자문자의 대폭발 속에서, 책은 원래부터 사건과 관계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책 그 자신이 이벤트가 되건 이벤트의 건더기가 되건 그렇다. 어떤 이벤트에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면, 책은 첫 다섯 자리의 안쪽에 놓일 만하다. 그것이 책의 의미다. 책은 이벤트에 고유한 성질을 부여할 수 있는 물건이다. 바꿔 말해 고유한 성질이 요구되는 이벤트라면 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벤트가 있는 한 책도 있다. 이런 시대에 실물책을 대체 왜 만드느냐고 묻는다면, ‘이벤트를 위해서’라고 하면 된다. 그게 우리의 결론이다.

이벤트는 무엇인가? 자꾸 주인공 행세를 하려고 들면서 영 방해가 되는 저자들을 잠시 치워놓고 보면, 여러 형태의 독서모임을 그런 이벤트의 대표격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려고 모이는 동시에 모이기 위해 읽는다, 감상회부터 세미나까지. 우리는 모임에 나가기 전 어떤 책을 읽거나 책을 읽은 다음 어떤 모임에 나갈 수도 있다. 여기서 이벤트는 집합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차점이다. 책은 어떤 이벤트가 지나간 후 그 연장으로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벤트에 대한 기다림일 수도 있다. 그 이벤트가 까마득히 오래되었거나 사실은 없었더라도 그렇고, 이 생 안에든 영영이든 아주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렇게 이벤트와 엮이는 여러 방법들을, 책은 동시에 종합할 수 있다. 책이라는 종족을 통해서다. 그런데 책이 아니라 전자문서라면, 적어도 이 측면에서 그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교실에서 실물 교과서가 사라진다면 그것이 목표로 했던 이벤트의 성질도 바뀔 수밖에 없다. 시험이든 졸업이든 시절이든. 그것은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영영 끝나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당신 집의 그 책, 그 책이 왜 거기에 있는가, 그 책이 가리키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이벤트가 있기에, 심지어 당신의 뜻이나 책의 내용과도 무관하게,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그 이벤트의 표지가 실제로(시공독점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서전이 반드시 실물책이어야 하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자신의 삶을 사건으로 만들고 싶다면... 즉 이벤트 아닌 채 지나갈 시공을 이벤트로 만들고 싶을 때에 책은 유력한 방도다. 우리가 무슨 소릴 하려고 했지?

이런 식의 이야기는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의 몸뚱이가 하나이고 생이 한 번이고 모든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고 영원한 세계가 영원히 한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있다가 없어지는 세계에 여러 인간들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태생적으로 이를 거스르려는 문자와 관련된 영역에서 이상한 구석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이상한 구석의 적층, 쌓여있는 책들이 구조상 이벤트의 부속물로 기능한다는 점, 이벤트를 위해서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으며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 이것이 우리가 이해한바 물성 타령의 번역이다. 과연 실제의 출판사들은 점점 더 큰 공간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벤트를, 행사를, 사건을 벌일... 덩달아 서점들도 그런 공간을 자처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출판사가 행사기획사를 겸하고 서점이 공간대여업을 겸해가는 것은 총문자문화 영역의 업무분장 변화에 따른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자본 아래서 책이 목표로 하는 사건이 다만 구매의 발생으로, 마케팅이나 프로모션 정도로 왜소해지고 구부려진다고? 그것은 우리가 신경 써서 어떻게 될 일도 아니고 우리가 알 바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왜 이 일이 여전히 가능하고 왜 이 일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어쩌면 우리만 몰랐던 것도 같다.

우리 ‘팸플릿’ 출판사는 아예 처음부터 사건을, 이벤트를 먼저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벤트를 먼저 기획한다. 책을 만들기 시작한 다음엔 늦는다. 어떤 이벤트가 지금 필요한지를 먼저 이야기한 다음 그 이벤트에 필요한 책을 찾는다. 우리가 꾀하는 출간기념회, 저자와의 대화, 낭독회의 목표 인원수는 만 단위다. 우리는 강조한다. 만 단위로 모을 생각을 해라, 만 단위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므로, 아쉬운 대로 우리 쪽에서 만 단위의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 간다. 나갈 때마다 우리는 책을 만든다. 변화무쌍한 상황에 맞추자면 기동성이 필요하므로 부피와 무게는 최소화한다. 책등과 표지 디자인을 수집성 있게 만드는 건 필수다. 가장 도전적인 부분이다. 원고는 어떻게 하지?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그렇다면 낱장들이 있을 필요도 없다. 1페이지로 끝장을 낸다. 만 명에게 주려면 5박스 정도로 될 것이다. 여러 사정들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가 원고를 구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책은 종족이라고 했다. 우리의 책에는 책들의 목록만 적혀있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2023년 3월 3일 금요일

눈보라산장

‘눈보라’ 출판사가 버려진 산장에 들어앉은 지도 어느덧 삼 주째. 아직까지 손님이라고는 몇 마리 장님거미밖에 없었던 이곳에, 드디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파묻어버릴 기세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에서, 드디어 불 켜진 산장, 아니 출판사로 발굴되듯 들어온 이 사람은, 머리털과 어깨 눈썹에 가득 달라붙은 눈도 털지 않은 채, 지고 온 배낭부터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뭔가를 꺼내려 한다. 빵빵한 배낭 깊숙한 곳에서. 어쩐 일이십니까? 물으니 그는 안녕하세요, 한다. 목소리가 이상하다. 잘 보니 그는 울고 있다. 눈가부터 뺨까지 그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얼어붙어 있다. 얼어붙은 눈물 위로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다. 괴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광경이다. 그는 추위로 빨개진 얼굴을 찡그렸다 풀었다 한다. 얼어붙은 눈물이 우수수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멈추질 않네요. 정말 그랬다. 한참 배낭 속을 헤집던 그가 드디어 건넨 것은 두툼한 서류봉투인데, 그토록 깊숙한 데서 나왔음에도 얼음장처럼 차갑고 슬프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까지 이렇게 찾아올 사람들이란. 그의 눈물이 멎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그를 난로 앞으로 안내한다. 막 켜진 난로의 요란한 소음도 이제 잦아들고, 우리는 오랜만의 온기에 목소리가 난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의자에 몸을 묻고 눈 감은 그에게 우리는 수건을 준다. 바짝 마른 수건은 거의 바스라질 것 같다. 그걸로 얼굴을 닦으면 피가 날지도 모른다. 당신이 우리 후손들의 자매나 형제입니까? 우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는 여기까지 왔고 우리도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난로 속의 일렁이는 불꽃, 매캐한 석유 냄새, 미친 바깥으로 비집고 나가려는 소리, 들어오려는 소리, 농담 유령들이다. 그의 원고를 읽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다. 우리의 일이다. 그의 원고는 읽을 필요도 없다. 창밖엔 눈보라다. 우리는 피눈물을 흘리며 읽는다. 헷 헤 웃음이 난다.

2023년 2월 10일 금요일

눈보라

 어젯밤 책에 물을 엎질렀다. 한장 한장 수건으로 눌러 닦아 냉동실에 넣어두고 나왔다. 견디기 어려운 시기다. 점심 시간 끝나자마자 잠이 쏟아진다. 해방된 인민들처럼.

 너는 오열을 넘어서자고... 그뿐으로는 못한다, 그렇게 말해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불파의 오열담당관을 반드시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타협하지 않는... 죽어도 절대로 않는?

 우는 일을 사명으로 하는 그것은, 왜 울고 있어 여기서?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을 왜 묻고 있어? 왜 그것을 묻고 있어? 하는 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감히 이르기를 없어져야 할 것들, 그런 것이 있다는 듯 울어서 없애버리겠다는 듯.

 지금 말 아는 이 모두가 명운을 걸고 반전시켜야 할, 진실로 심각하며 화급한 우리의 맘에 대해, 낙담에 대해 네가 말하려 한다고? 쟤를 데리고서? 그것은 주제를 넘어서려는 짓이야. 그릇의 모양에 대하여 말하려니 무늬에 대하여 말하려니, 한 개의 목구멍을 넘어오려는 것이 둘 되고 천 되고 억 되는데

 두 개의 눈구멍을 넘어오려는 것이... 있어야 할 것들이 있게, 여기로 그것들은 넘어져온다. 맘들이, 야 정신 좀 차려봐라 무슨 소리니? 너는 산 자들의 어깨를 붙들고 있다. 놓치고 있다. 붙들고 있다. 차례로, 차례로, 우리는 얼어붙고 있다. 많은 영혼들이 서로 부딪고 으스러지는 것이 들린다. 입 속에서 많고 쓸모없는 영혼들이. 쓸모없는 세상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영혼들이, 파도가 흔드는 모래알이고 가루다. 많은 영혼들이 서로 부딪고 으스러지는 것을 듣는다. 네가 어깨를 짚으며 짚으며 입에다 처넣어준 것들이

 담당관들이
 얼어붙은 우리가 기대어지면서, 망치는 이빨들을 향해 휘둘리고
 펴지고 있다.

 저것은 발목까지 젖는 해변이다, 검은 해빙이다. 이 모든 일들은 출발에 불과하다. 우리는 꽤 길게 고통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고통받아온 그만큼이다.
 이전에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이후를 향해 녹아내리고 있는
 이들이 편에 선다면, 이들이 편에 선다면, 두렵지 않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두렵지 않네. 흐흐흐... 흐흐...

‘눈보라’ 출판사는 시집만 낸다. 축시를 받았다.

2023년 1월 16일 월요일

납골당

부러 틀린 소리를 끌어다 대며 시작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뭔가를 부정하거나 반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쉽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다. 우리가 시작을 위해 고른 틀린 소리는 ‘독서는 듣기에 가깝고 출간은 말하기에 가깝다.’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어쩌면 공간이 아직 있거나).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니다. 따라서 ‘독서 인구는 줄어드는데 신간의 종수는 늘어나는’ 현상은, 들으려는 이는 점점 줄어들고 말하려는 이는 점점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독서는 오늘날 뭔가를 듣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독서는 대단히 외로워지길 자처하는 일, 장롱 들어가기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 독자들이 그토록 독서모임(이나 그에 거의 준하는 것들)을 찾아 헤매고 자신의 독서 경험을 어떻게든 표현하려는 것이 아닌가? 독서를 통해 이루려는 목표를 하나 꼽는다면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손에 넣기 위해 독서한다. 외롭게 두지 않는 주변을 벗어나기 위함이든 외로움에 기대어 뭔가를 만나기 위함이든 그것은 둘째고, 먼저 외로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그에 비하면 말하기와 짝을 이룰 만한 ‘듣기’의 범주에 들어가는 종류의 읽기는, 우리가 보기엔 지나치게 만연하며, 아무 처음도 끝도 없이, 너무 짧게 너무 많다는 점이 오히려 문제(소음공해)에 가깝고, 독서와 같은 외로움도 제공하지 않는다.

한편 오늘날 출간은 뭔가 하니, 여러 의미 있겠으나 일차로는 관 짜기다. 출판사의 의뢰로든 저자의 의뢰로든. 죽는 날은 정해져 있고 누울 곳이 필요하다... 이 허망하고 고된 세상에서, 내가 뭘 아무리 만들고 일해도 명함 한 장 남기기 쉽지 않은데, 만약에 내 이름 적힌 책 하나 있다면, 누구한테 소개까진 못하더라도, 일테면 돌아가신 할머니 영전에라도 바치면, 일단 좋다? 뭐가 좋냐면, 모든 것이 그렇듯 생산물은 공동의 연합적 생산교환물일 때 힘이 서리는데, 도서는 그 자체로 교환되리라고 믿어지기 위한 종류의 생산물이고, 저자의 이름까지 적혀 봉인된다. 절대 열리지 않더라도, 저장소나 지성소로서. 따라서 출간 역시 독서와 유사한 맥락에서 ‘말하기’보다는 말을 그만두기나 줄이기에 좀 더 가깝다. 너무 많은 말들 가운데 말을 좀 더 낫게, 더 나은 말을 해보려는 것이다. 더 낫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 대신 세워놓으려고. 그러다 혹시 아나? 가계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외로움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죽고 싶은 사람은 점점 많아진다. 이제 출판 산업은 죽고 싶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파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 뭔가는 죽고 싶은 사람 그 자신의 저서다. 대개 사람들은 옛적으로부터 꾸준히 저서를 갖고 싶어했다. 아니면 남의 저서에서라도 자신의 생이 다뤄지기를. 거기 들어가자마자 낙심하든 더 깊이 들어가려 눈 벌개지든, 어떻게 보든... 그것은 관에서 빠져나오려는 발버둥처럼도 보이고 관에 들어가기를 준비하려는 일처럼도 보인다. 출간은 그 비슷한 종류의 업(인간 재생산을 정점으로 하는 장례-유산 관련업)들 중에서는 그나마 쉬운 편이고, 그에 대한 참가도 점점 쉬워지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독서의 줄어듦에서 기인한 인쇄출판업의 사업 모델 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출판을 현상태에 맞게, 도서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출간 행위 자체(더 넓게는 쓰기 행위)에 대한 믿음을 판매하는 것으로 다시 정의해 본다면, 정녕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의 책을 만들거나 팔지 않아도 된다. (통신업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것이 읽기가 소음 노출로, 독서가 장롱 들어가기로 된 까닭이다.) 예를 들어 책은 저자가 직접 만들고, 우리는 돕기만 하면 그만이다. 당신의 출판사를 가져라! 하지만 당신도 책을 직접 만드는 게 아직 부담스럽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원고만 달라. 우리가 다른 출판사에 투고를 해주겠다. 눈에 불을 켠 편집자들이 쓸 만한 원고들을 얼마나 찾아 헤매고 있는지! 그들에게 보낼 출간기획서를 우리가 만들어줄 수 있다. 저자 소개도 우리가 공들여 다듬어줄 것이다. 원고를 같이 볼 수도 있다. 어차피 책을 파는 쪽은 저자다. 책을 쓴 자신을 파는 것일 수도 있고, 책을 쓰는 방법을 팔 수도 있고, 어느 쪽이건 좋다. 출간기획서 쓰는 방법과 저자 소개 쓰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마케팅하는 방법도 알려주겠다. 원고 쓰는 방법도 다 알려주겠다!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 어떤가?

...농담이다. 우리 ‘납골당’의 방식은 그렇게 비열하지 않다. 우리는 그 다음을 준비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자료를 넘겨받을 것이다. 당신이 쓴 것은 물론이고 찍은 사진, 영상, 그린 것, 녹음한 것, 무엇이든, 당신이 주기 원하는 자료를 우리는 전부 다 받는다. 우리는 당신의 자료를 디지털화(어차피 대부분 디지털 자료겠지만)한 뒤 AI 편집기를 거쳐 머리통 크기의 양자 크리스털 코덱스에 정리하여 집어넣을 것이다. 가격에 따라 용량과 외관도 당연히 선택할 수 있다. 서비스를 미리 구독하면 계약 기간 동안의 자료를 자동으로 업로드할 수도 있고, 코덱스 안쪽에 당신의 유골 구슬을 담을 서랍을 만들 수도 있다. 특정 ‘독자’들에게만 전달되는 코드가 있고... 후손이나... 하여튼 우리는 바로 그것을 당신에게 안겨줄 것이다. 그냥 외장하드 아니냐고? 아니다. 이것은 통신업이나 교육업과 구분되는 다음 시대의 출판이다. 출판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다음 세대가 알아서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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