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7일 월요일

할매틀니

할머니의 작은 틀니가 떠오른다. 그것은 부분틀니였다. 할머니의 가지런한 앞니들이 물 찬 플라스틱 컵 속에 있었다. 그것이 책과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었나? 나는 생각한다. 글 모르는 아기가 집어던지기라도 한 듯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할머니는 담배를 즐겨 피웠다. 지금은 팔지 않는 담배다. 담배를 피울 때는 틀니를 빼놓았던 할머니, 말이 별로 없었던 할머니, 너와는 아무 통할 말이 없다는 듯, 개를 보듯 나를 보던 할머니. 지금은 여기에 계시지 않는, 그러나 모든 곳에 계시는. 전 인민의 할매化를 나는 오늘 생각하고 있다. 전 인민이 할매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는 그 컵 속의 틀니에 관한 것, 곧 사이보그화를 말하는 것이다. 교합면의 복잡도를 한정하지 않는다면, 인민은 다만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뿐, 이미 할매화되어 있으며, 할매화란 교합면에 대한 인지와도 같다. 그리고 또한 물컵 속의 틀니가 자신이기도 함을, 유리 너머 연기에 휩싸인 할매의 약간 왜곡된 이미지 앞에서 축축하게, 그러나 완전히 침범당하지는 않은 채 인준하는 것이다. 나, 인민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유는 재다. 한때 할머니였던. 이것이 인민의 대답이다. 자유가 되려는 것이 우리를 입으로 가져간다. 아이가 집어던지기라도 한 듯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처럼 생긴 것을. 불멸의, 그러나 무한하진 않은 추억 속에서.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