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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0일 목요일

‘tㅣ발점’

“선생님은 말투 때문에 지적받은 적 없죠?”

“어조가 차분해서 그럴걸요.”

아이들의 경우도 그렇다. 보통 시끄럽다고 평가를 받는 경우는 목소리가 크거나 억양이 높았을 때 생긴다. (목소리가 큰 건 죄가 아니지만, 상대방이 불편하다는 걸 모르는 건 죄가 된다.) 정작 수다쟁이인 아이들은 나긋하고 조용하게 재잘거린다. 대부분 어디가서나 조용하다고 평가를 받을, 누구보다도 입을 쉬지 않고 떠드는 시환을 보면서 생각한다. 

말의 높낲이는 중요한 것 같다. 한선생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지만 친절하게 말을 해서 그런가, 아니면 마지막에 웃어주면서 마무리해서 그런가, 이 부분에서는 누구도 컴플레인을 건 적이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는 욕할 일도 없고 말이다.

대부분 아이들이 욕을 배우면서 생기는 문제는 이 아이가 어떤 욕을 쓰는지 알려줘야 할 때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거친 걸 알지만 어떤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선생님. 어떤 욕을 썼는지 알려주세요. 제가 정확하게 알아야 아이에게 말을 할 수가 있지 않겠어요?”

“음. 어머님. 형진이는 상대방을 공격하는 욕을 하지 않고요. 본인이 입버릇처럼 붙은 거예요.”

“뭐라고 하던가요?”

이쯤 되면 한선생도 고민이 된다. 학부모한테 욕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 정확한 걸 정확하게 말하는 게 중요한가. 한선생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전달한다.

“어머님. 형진이가 평소에 하는 말은 좆까, 씨발이에요.”

한선생은 아이에게도 욕의 어원이나 (예전 한선생의 국어 선생님이 그랬다. 그는 성기와 패륜에 대해 알려주었다.) 주변의 평가에 대해, 결국에는 타인이 보는 자신의 평가에 대해 알려주었다. 과연 아이는 이해했을까? 아이들이 배우는 신조어나 욕설의 경우, 매체에서 노출된 것이 대부분이다. 마냥 순진해보이는 애들이 ‘선생님, 아편 전쟁 때, 중국 조졌잖아요.’라는 표현을 쓰면 한선생은 “조졌다, 안 된다.”라고 빠르게 경고하는 것이다.

하루는 아이가 엘리베이터에서 시원하게 욕을 하는 걸 보고 타 부모가 대차게 컴플레인을 건 적도 있다. 한선생은 신이 아니기에, 수업 이후의 행동까지는 터치할 수 없다. 다만 그 아이가 어떤 욕을 했는지 궁금하긴 하고, (아주 시원했다고 하던데)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 난감함을 느낀다. 아이들은 대부분 “선생님, 그럼 몰래 해도 돼요? 화장실에 숨어서 하는 건 돼요?” 이 정도의 수준으로 답하기 때문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런 느낌이긴 하지만, 답은 역시 “안 돼.”이다. 너는 모르겠지만 화장실에서도 듣는 사람은 있단다.

아이들이 니 취팔러마를 쓰는 건 고전이다. 대부분 저열하다고, 말하면서 끊는다. 밥 먹었냐라는 뜻인데요 비실비실 웃으면 네가 왜 갑자기 밥 먹었냐고 중국어로 말하니, 다 안다, 라고 끊는다. 근데 여기서 시발점이 나온다면?

시발점에 대한 반응은 둘이 있다.

씨발과 비슷한 단어라 일부러 “쌤, 시발점이 뭐예요?” 묻는 경우.

씨발과 비슷한 발음인데 문제에 나와 동공이 흔들리며 뜻을 묻는 경우.

전자의 경우 “왜? 시발자동차 브랜드도 말하지?”라고 답해주고

후자의 경우 “와, 누구야. 선 넘네.”라고 답해준다. 

“아, 저는 그게 아니라,” 

당황하는 아이를 두고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건 그래도 좋은 풍경처럼 느껴진다. 한선생은 첫출발을 하는 시점을 시발점이라고 말해주고,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발점은 언제부터인지 수업한다. 그래서 우리의 시발점은, 

“쌤, 그만해요. 기분이 이상해요.”

한선생은 정확하게 발음한다. 

“시발점이 왜?” 

“뭔가 아슬아슬하게 발음이 씨와 시 사이란 말이에요.”

아이의 긴장하는 얼굴을 보고 한선생은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는 어떤 욕을 쓰면서 지내게 되는 걸까. 

“선생님은 욕 써본 적 있으세요?”

한선생은 어떨 때는 있지, 라고 답하고 어떨 때는 없지, 라고 답한다. 아이들은 한선생의 욕하는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하다. 글쎄. 한선생의 욕의 시발점은 뭐였을까.

2021년 6월 2일 수요일

넌 착해?

한선생이 줄곧 해오던 말이 있다. 애들은 선과 악이 없다.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됐는지 들어나 보자.

복도에서 쪼로로 달려온 낯선 아이가 물어본다. 

“선생님은 착해요?”

한선생은 질문의 저의를 파악한다.

“넌 착해?”

“네. 전 착해요.”

대답을 하고 싶어서 달려온 건 아닐까. 가끔 그들의 행동과 질문을 통해 인간의 본성은 언제쯤 생기는지 궁금할 뿐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성악설을 좋아한다. 선호에 가깝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토론이 있는 날, 성선설 팀 대표가 패배를 선언하고 토론을 시작한 적도 있다.

“저희가 깊게 고민했는데 셋이 모두 성악설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에 저흰 졌어요. 깔끔하게 숙제 해오겠습니다.”

논리 수업을 할 때도 기억난다. 

“나는 생활 속에서 선후 인과의 오류를 겪었다. 동생은 자신이 견과류를 먹으면 혀가 간지러워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는데 몰래 아몬드가 든 빵을 주니까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다.”

역사 수업을 할 때도 기억난다.

“역사 속 인물과 저녁을 먹을 수 있다면 세종대왕님과의 저녁식사를 하고 싶어요. 한정식 집이 세종대왕님 입에 맞으실 것 같고. 앙부일구를 만들 때 어려웠던 점을 물어보고 싶네요.”

“더 궁금한 건?”

“어릴 때, ‘진짜로’ 태조께서 책을 다 가져갔을 때 울었는지?”

예술 수업을 할 때도 기억난다.

“선생님. 고흐는 마스크를 낄 수 없겠네요.”

저의를 생각하지 않는 게 어른의 배려일까. 

어른들은 귀가 없어도 마스크를 낄 수 있는 방법을 우선하는 사회를 생각하라고 말했고 어른들은 고흐의 귀 모양을 본떠 기념품 지우개를 만들었고 탈부착 가능한 귀가 달린 핀을 만들어 팔았고* 어른들은 인간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고 기록하였다.




*https://philosophersguild.com/products/van-gogh-and-ear-pins





2021년 5월 25일 화요일

소송

아이들은 법 앞에 서 있다.

최근 아이들은 주식을 하고 공매도를 걱정하고 테슬라의 주가를 물어본다. 초등생의 눈높이에 맞게 저금통의 예시로 설명하시오, 라는 글자를 보면서 한선생은 그들에게 가상화폐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잠시 생각한다. 물론 생각을 할 뿐이다. 통장에 부모가 넣어준 돈이 충분한, 저 선한 표정의 아이를 바라보면서.

경제 관념이 달라졌듯이 아이들의 싸움 양식도 달라졌다. 옛날과 비슷한 점이라면 역시 애들 싸움은 치열한 구석 한 부분에서 뭔가 맹한 맛이 있다는 점이다.

선생님, 쟤가 그랬어요. (울먹)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 앞에 CCTV가, 법이 놓여 있다는 것이겠지. 도둑질이나 폭력, 욕설의 경우 처벌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간혹 애매한 것들이 문제다. 상대방이 나를 기분 나쁘게 한다는 것, 욕은 아니지만 욕에 가깝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 옆 아이의 목소리가 커서 자신의 목소리가 묻혔다는 것, 그리고 이런 아이들의 반복된 마찰이 부모에게 들어가 결국에 부모의 싸움이 된다는 것.

특히 저학년이 그렇다. 초등학교 2학년의 아이들은 선과 악의 개념이 없어 보인다. 의자가 다리에 닿지 않아 동동 흔들고 있는 뒷모습. 부모가 정성껏 입혔을 카디건이나 재킷은 집 안방인 양 바닥에 널부러져 있고 저마다 사이좋게 가방도 떨어져 있다. 

한없이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가도 세상 서럽게 우는 것도 잘한다. 부딪히는 일도 잦고 서로 누가 잘못했는지 구분을 짓는 것도 못한다. 세상 영특하다가도 셈을 못해서 손해도 곧잘 본다. 가끔은 자신이 즐겨 앉던 자리를 두고 싸우고 말을 밉게 했다는 일로도 싸우고 화해도 잘하고 이르기도 잘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부모의 귀에 들어가는 날, 이제 다른 문제로 변할 것이다.

소송이요?

이유가 뭐래요?

B가 A를 주눅 들게 했대요. 

A는 법조계 집안의 아이였고 B는 대대로 부잣집 아이였다. 한쪽이 법을 들고 오자 한쪽은 하면 되지,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한선생은 그 사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고 있는 A와 B를 보았다.

옆 반 걔 별명이 뭔지 알아요? 원펀맨*이래요.

아이가 직접적인 폭력을 쓰게 되는 경우, 이제는 모두의 문제가 된다. 그 반의 부모들, 선생, 저 멀리 그 아이의 얼굴을 모르는 한선생까지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한선생의 어린 시절은 어땠더라? 아이들은 그저 해맑게, 오늘은 복수의 날이야, 라고 떠든다. 그들에게 복수라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날일 것이다. 

A와 B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펼치면서 묻는다. 

선생님. 몽테예요? 몬테예요?

그저 발음이 궁금한 아이들을 앞에 두고 한선생은 칠판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대머리에 맹한 얼굴, 다소 촌스러운 복장을 한 사이타마는 아무리 봐도 유약한 소시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혹독한 훈련을 거쳐 비현실적인 힘을 손에 넣은 인물이다. 그 힘을 이용해 어떤 괴수나 로봇도, 심지어 외계인까지 주먹 한 방으로 해결해 버리는데.

2021년 5월 17일 월요일

사춘기

우리 애가 사춘기라서요.

한선생은 아이를 들여다본다. 아이도 한선생을 들여다본다. 여기 심연에 빠진 사춘기가 길게 늘어져 있나? 아이는 키가 조금 컸다. 흔히 코로나 이후 아이들이 빌드업 되었다고 표현하는데 예전에는 통통했다면 지금은 책상이 작아 보이는 정도다.

선생님. 저 살쪘어요?

한선생은 살이 토실하게 올라온 볼의 움직임을 본다. 오동통한 팔뚝이 근심스럽게 한선생을 바라보는 듯하다. 한선생은 그저 많이 먹어두라고 말할 뿐이다. 성장판이 열려 있을 때, 많이 먹어두라고. 

하루는 다른 선생님들이 반에 앉아 있는 한선생을 쳐다보고는 “선생님이 생각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던데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덩치 큰 아이들 속에 작은 의자에 앉아 생각하는 한선생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가 온 것이다.

저는 사춘기가 오고 있어요.

다온의 말에 한선생은 사춘기의 몸짓이 궁금해졌다. 사춘기는 어떻게 오나. 스멀스멀 기어오나. 재빠르게 달려드나. 아무도 다온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아이들답다. 그들은 비가 온다며 창문을 열고 우산 걱정만 할 뿐이다.

다온은 부모님이 말하는 사춘기는 부모의 말을 안 듣기 시작할 때이며 자신은 자신의 생각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가 사춘기라고 느낀다고 말한다. 사춘기는 느낌에 가까운 형상 같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주변 반응에 따라 자신이 사춘기구나, 깨닫는 것이거나 학습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그들이 두려운 건 중2병이지 사춘기가 아니다. 

어디선가 ‘흑염룡, 내 손안의 흑염룡’ 보란 듯이 주문 거는 소리가 들린다.  중2병? 말하는 순간 ‘크큭’ 웃는 소리와 손가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몸짓을 볼 수 있다. 너 변성기 오면 정말 이상할 것 같아. 한선생과 몇 명의 아이들은 눈을 가리면서 웃었다.

문득 김행숙 시인의 사춘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얘들아, 뭐하니? 나는 두 눈을 바깥에 줘버렸단다. 얘들아, 얘들아, 어딨니? 같이 놀자.” 시인의 말을 떠올리자 반쯤 눈을 가린 어린 친구들의 사춘기가 한선생을 보고 있다.

2021년 5월 12일 수요일

그 여름, 산타


산타를 믿으세요?

도를 아십니까, 와 비슷한 질문처럼 들린다. 이럴 때는 대답을 하지 않고 신중하게 되묻는 편이다. 

넌 믿어?

질문을 걷어내면 친구의 믿음이 보인다. 기가 차다는 듯이 혀를 차는 아이와 열혈 신도가 6:4의 비율로 나뉜다. 열한 살. 믿음을 논하기엔 애매한 나이다.

요즘의 산타 할아버지는 꽤 바빠 보인다. 저는 아이패드를 받았어요. 저는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가족이랑 호텔 여행을 갔는데 혹시라도 산타 할아버지가 저를 찾을까봐 편지를 남기고 갔어요. 신기하게 호텔에 선물이 도착했고 제 침대에 프린트된 편지가 답장으로 놓여 있었어요. 

산타 목격설도 종종 들린다. 밤 12시에 눈을 떴더니 창문을 통해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어요. 승강기에서 만난 애들도 있는 걸 보니 시대가 바뀌긴 한 것 같다. 프린트를 하고 아마존에서 아이패드를 구매할 줄 아는 할아버지는 무슨 세대일까. 

사실은,

한선생이 입을 떼자 구석에서 한 친구의 동공이 매우 흔들리고 두 손을 꼭 모은 채 서서 소리를 지른다.

“동심 파괴하지 마세요!”

뒤에서 우리 엄마는 산타가 없대, 중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한선생은 느릿하게 미국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AD)의 산타 위치추적 서비스 주소를 칠판에 적어주었다.* 올해 산타는 코로나 19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했다는 말도 건네주었다. 

아이가 자신의 집 근처에 와 있는 건 아니냐고 물었고 한선생은 겨울이 되면 찾으라고 말했다. 만약 네가 이 여름을 잊지 않는다면. 



*24일 https://www.noradsanta.org 페이지에서는 산타의 현재 위치, 다음 행선지, 지금까지 배달한 선물 개수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한다.

2021년 5월 9일 일요일

故 한선생



“선생님. 스승의 날 선물 줘도 돼요?”

한선생은 책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다온은 그를 쳐다보고는 뒷말을 이어갔다.

“어린이날 선물 주실 거죠?”

보통 진실은 뒤에 있는 편이다. 

오늘은 윤동주의 삶에 대해 배웠다. 윤동주의 시가 쉽게 읽히지만 어렵다, 라는 표현을 할 때마다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조선어 수업을 아주 열심히 들었다. 최현배 선생은 철저한 원칙을 지키느라 학점을 박하게 주는 편인데도 윤동주는 100점을 맞았다. 혹시 아느냐. 너희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 이 수업 때만큼 한선생이 점수를 잘 주었다, 라는 말이 기록될지 모를 일이라고.”

다온은 목을 가다듬고 자신이 성공해서 연설을 하게 되는 날,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故 한선생님은 제가 질문을 할 때마다 창의적이라며 칭찬을 해주셨죠.”

그는 덧붙였다.

“제가 성공할 때쯤이면 저도 육십은 넘었을 테니까요.”

생략된 죽음 앞에서, 한선생은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장례식에 아이들은 올 수 없을 것이다.

다온의 창의성이라......

그는 예전부터 좋은 답을 잘 이끌어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는 축구를 하고 싶고 한 친구는 보드게임을 하고 싶고 한 친구는 영화를 보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보통은 다수결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수가 모두가 아니라는 의견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몫을 포기하거나 하고 싶은 것을 택한다. 혹은 문제를 안 푸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다온은 다른 문제를 풀지 않고 그 문제를 오래 고민했다.

“선생님 저는요, 친구들한테 축구 보드 게임을 하면서 영화를 틀어 놓자고 말할 거예요.”

고민하면서 친구가 이런 방법을 건넨다면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까. 아니면 더 좋은 의견을 내야 하는 부담이 생길 것이라 예상한다. 

그는 공리주의 선택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한다. 앞에 있는 뚱뚱한 남자를 밀어서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다면?

보통은 기분이 나쁘다, 죄책감이 든다, 라는 말로 자신의 감정에 빠지는 반면, 다온은 또 고민한다.

“만약에 밀었다가 뚱뚱한 남자까지 죽으면 총 여섯 명이 죽잖아요. 그러면 더 잘못된 거 아니에요?”

그는 문제에서 강요하는 대답을 알고 설득하는 방법을 취한다. 숙제를 안 해서 결석한다는 친구가 있으면, 나는 숙제를 안 해도 얼마나 당당하게 오는데, 혼쭐내는 아이.

비가 오는 바다, 라는 말을 듣자마자 시의 한 구절 같다고 떠드는 아이. 윤동주에 대해서 분석하는 글을 잘 써놓고는 아래에는 이런 뉴스를 슬쩍 적어 놓는 아이. 



 

 “죽은 줄 알았던 시인 윤동주가 비밀스럽게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 그는 요양 병원에서 힘들게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제목은 ‘미스터리한 나의 삶’이었다. 그 시는......” 딴딴!


그의 창의성은 뛰어나다. 
하지만 문학은 안 하는 것이 낫겠다고 故 한선생은 생각했다. *










*다온이 친구들과 쓴 즉흥시. (그날은 비가 많이 와 아이들의 바지가 온통 젖었고 다들 우울해 하던 날이었다. 이 시를 한 줄씩 즉흥적으로 만들고는 즐거워했으니까 된 걸까?)

비가 오는 바다.
친구가 바다에 빠졌네.
고래가 친구를 삼켰네.
비가 오는 바다에
갑자기 
영웅이 등장했네.
고래의 배를 갈랐네.
비가 오는 바다.

2021년 2월 13일 토요일

호박 고구마 할머니




쉬는 시간이 끝나고 돌아오자 zoom 화면에는 나문희 선생님 얼굴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호박 고구마 할머니라고 불렀다. 한선생은 딱히 금지하는 것이 없는 편이지만 배경으로 깔아둔 저 표정을 보고 수업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시 반의 룰을 정했다.

-돌고래 소리 금지.
-폭력과 욕설 금지.
-줌 수업 때 나문희 선생님 사진 금지.

한선생의 일지가 줄어드는 걸 보면 그동안 아이들과의 만남이 줄어들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똑똑했지만 작년 학생들에 비해 매우 어렸다. 또래 친구들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라지 않다니.

신도 다시 룰을 정하는 걸까?

한선생이 잠시 생각에 빠졌을 때, 아이들은 재빠르게 호박 고구마 할머니의 사진을 껐다 켰다 반복하고 있었다.

2021년 1월 28일 목요일

아이들의 채팅

나 오늘

가래떡에 설탕 뿌려서 

머금


설탕 남은거 먹ㄴ느중


나 오늘

곰탕에 소금 뿌려서

머금


난...크로와상에


와 정유럽


와ㅏㅏ


[여기에 메시지 입력...]

2021년 1월 5일 화요일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이들과 비대면 수업을 진행한 지도 1년이 되어간다. 어른들이 어렵지 아이들은 교육을 시키면 금세 배운다. 일곱 살짜리 아이를 둔 선생님은 코로나 이후 매일 울면서 출근한다고 말한다. 저학년 아이들의 온라인 숙제는 엄마의 몫이며 자신의 삶이란 없다고. 그는 늦지 않았으니 아이를 낳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가 칫솔을 꺼내 들고 화장실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선생은 매일 울면서 출근하는 여성들의 얼굴을 생각했다.

상준이는 쉬는 시간에 카메라 앞에서 먹방을 한다. 그는 양갱을 한 입 물고 카메라에 들이밀고 웃는다. 저 멀리서 손을 쭉 뻗고 내리고 디스코를 추며 다가오기도 하고 인형을 자신의 자리에 꺼내둔다. 가끔은 강비글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면 재희도 지지 않고 인형을 찾는다. 뭐가 즐거운지 모르지만 그들은 즐겁다. 아이들은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쌤. 저 쌤 얼굴 처음 봐요.”

재희는 마스크를 벗은 한선생의 얼굴을 처음 본다. 마찬가지로 한선생도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본다. 묘한 기분이 들 때쯤 상준이는 놓치지 않고 한마디를 던진다.

“잘 봐둬.”

“왜?”

“지금 선생님이 가장 예쁠 때니까.”

세상에. 도대체 저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걸까. 한선생은 타고남이란 무엇인가 싶었다. 공부머리로는 배울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난 너무도 불행했고
난 너무도 종잡을 수 없었고
난 무지무지 외로웠다

그래서 결심했지, 가능하면 오래오래 살아야지 하고
나이 들어서 엄청나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부분, 이바라기 노리코 



이바라기 노리코가 떠오르지만 그는 모르겠지.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병증법이라고 적었던 아이. 한선생이 병이 아니라 변, 변, 변, 이라고 세 번 발음하자 똥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웃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저런 아이들을 보면서 가능하면 오래오래 살아야지 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선생은 잠시 그려보았다. 

2020년 10월 20일 화요일

꽃순이와 개똥이

소싯적에 글 안 써본 사람이 있겠는가. 한선생도 그랬다. 다 지난 일이다. 그는 연애할 때 시를 썼다. 전공을 활용해서 수학 행렬에 자음과 모음을 넣어 고백을 했다. 연인이 기발하다고 시를 쓰는 줄 몰랐다고 하면 그는 조금 으쓱했다. 그것 역시 지난 사람들의 일이었다. 그는 결국 소싯적에 끄적였다가 사라진 선생 중 하나였을 뿐이다.

전쟁 통에도 자기의 잇속만 챙긴 탐관오리를 비판하는 시를 써보시오, 라는 문제가 나왔을 때 한선생은 턱을 괸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고심했다. 그는 탐관오리라는 단어를 설명해주고, 그 당시 백성의 심정으로 쓰면 된다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애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것이나 쓰고 보는 친구들인데 그날은 유독 머뭇거렸다.  

“선생님, 저 시는 정말 못 쓰겠어요.”

차라리 분석하면 안 돼요? 아니면 제가 쓰고 나갈 테니 선생님은 제가 강의실에서 나가면 읽고 제가 들어왔을 때는 시에 대한 한 문장도 이야기하면 안 돼요. 아이들은 으악, 악, 비명을 질렀다. 보통 저학년 친구들은 동시도 곧잘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일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뭐가 부끄럽지. 이들의 괴발개발로 쓴 글은 한두 번 보는 일이 아닌데 새삼스러웠다.

아이들은 양반을 욕하는 시를 <쇼미더머니>처럼 생각했다. 욕 써도 돼요? 안 돼. 그럼 강아지의 아이야, 이런 말은 돼요? 안 돼. 그 당시에도 욕이 있었어요? 저잣거리에 매달릴, 이런 말들은 있었지. 짧게 써도 돼요? 응. 한 줄 써도 돼요? 아니.

몇몇 애들은 이런 표현도 썼다.

“백성들한테 꿀 빠는 양반들아.”

한선생은 그저 마실 나오듯이 그들이 쓰는 걸 구경했다. 몇몇 친구들이 자신이 쓴 걸 확인받았다. 한선생은 와, 잘했네, 괜찮네, 라는 말을 해주면서 그들을 다독였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글은 있었다. 그 시는 <꽃순이와 개똥이>였다.


아버지는 개똥이를 버렸다
사람 먹을 게 없으니 개부터 버려야 한다고
개똥이가 서럽게 울었다

옆집 꽃순이가 죽고
마당에 묻혔다 

꽃순이 아빠는 전쟁터에 나갔다
꽃순이 아빠는 마당이 없어서 울퉁불퉁한 땅에 묻혔다
묻을 땅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기다리자 했다


<꽃순이와 개똥이 부분>


열한 살짜리 아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었고, 한선생은 감동을 느꼈다. 감동적이네, 라고 말하자 옆 친구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못 쓰겠어요, 봐봐, 글씨도 예쁘잖아, 그들은 내가 뭘 읽었는지도 모르면서 말한다. 

한선생은 최근에 본 영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친구와 대화를 나눴었다. 친구는 “이거 정말 찐사랑이구나, 싶더라.” 말했고 그는 “나는 다시 묻게 되더라.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고 부를 건데?” 

그때의 장면이 지나가는 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문득 그는 생각했다. 이 아이가 쓴 게 시가 아니라면 이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꽃순이를 쓴 어린 친구는 한선생의 시선을 느꼈는지 “선생님, 저 시가 아닌 것 같아요, 이래도 돼요?*” 물었다.










2020년 10월 19일 월요일

신의 마음

“선생님, 승려가 뭐예요?”

아이들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신화나 전설이 있음을 배웠지만 아직 승려라는 단어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선생은 스님을 본 적 있는지 물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거나, 포교하는 종교인에 대해 설명하자 석훈은 “쌤, 저 예전에 본 적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한선생은 진도를 나가야 했다. <삼국유사>가 왜 만들어졌는지, 설명을 해야 하는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데요." 

모두가 석훈의 말에 귀 기울였고, 선생은 잠시 들어주기로 했다.

“아줌마들이 스님들 앞에서 빡빡이들아! 교회나 가라! 소리치고 있었어요.”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건 안 된다. 빡빡이라는 단어가 나온 이상, 이 수업은 아득해진 것이다. 저 멀리 ‘대머리’라는 말이 나왔고, 스님들은 원래 대머리예요?부터 교회 욕하지마,까지 순식간에 우리의 역사는 사라지고 그들의 목소리와 해맑은 웃음소리만 가득해졌다. 

한선생은 침착하게 종교인에 대해 설명했고, 그들은 스스로 머리를 체발하여 세속과 구분 짓는다는 것, 그것과는 별개로 누구나 대머리가 될 수 있음도 보너스로 설명했다. 최대한 진지하게 말해야 아이들이 집중한다. 그때 저 멀리 “제가 신이라면 인간들이 짜증났을 거예요. 선생님은요?” 질문이 던져졌다. 둥글고 풍성한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흔들거렸고 한선생은 

개미굴을 지켜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내가 신이라면 글쎄, 인간이...... 가엾지 않을까.” 한선생이 말하자 아이들은 “쌤, 쉬는 시간이요.” 라며 시계를 초롱하게 쳐다보았다. 


2020년 10월 13일 화요일

못 산다 정말

강상준이 숙제를 제출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리포트를 근사하게 썼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펼쳐봤다가 한선생은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선생을 위한 자체 모자이크 처리로 예상된다. 도대체 저 반투명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2020년 10월 2일 금요일

인어의 뼈

이 아이들은 마르크스를 안다. 경제학자 마셜을 안다. 가끔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공자나 순자에 대해 떠들기도 한다. 그런데 왜 고전 동화를 모를까? 
대부분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선생이 말했고 그런 아이들을 두고 고전을 패러디한 작품을 논하자니 영 껄끄러웠다. 영유*를 다녔든 외국 학교를 다녔든 뭔지는 알아야 뭐가 바뀐 건지 찾아낼 수 있지 않나.

분명 아이는 <심청전>을 안다고 했다. 한선생은 들었다.

“옛날 옛적에 심청이가 살았는데, 효녀라서요. 아버지가 앞을 못보니까 눈 뜨게 하겠다고 쌀 삼백석이랑 목숨을 바꿔서 바다에 빠져요.”

“그래. 계속 말해볼래?”

“바다에 빠져서 용왕을 만나는데요. 용왕이 병이 있어 간을 구해오면 아버지 눈을 뜨게 해준다는 거예요.”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토끼를 만나러 다시 육지로 가는데요.”

“진원아. 혹시 자라 등장하니?”

“네? 맞아요.”

한선생은 <별주부전>의 결말과 이본에 실린 몇몇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얼굴이 붉어졌다. <심청전>의 간과 <별주부전>의 간을 엮어 새로운 서사를 만들다니 ‘아주 창의력이 뛰어나구나.’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패러디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심청이는 몰라도 인어공주는 알지 않을까?

“선생님, 저 정말 인어공주 내용을 모르는데요.”

이 한 마디에 애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를 머저리 취급했다. 애들은 저마다 쫑알대며 “책을 읽어.” “너 금붕어냐?” 무해하면서도 순수하게 공격적인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한선생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물어보았다. “인어공주는 보기드문 새드엔딩인데, 알고 있니?”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외쳤다.


“죽어요?”


도대체 뭔 내용을 알고 있는지 예상이 가능하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월트 디즈니를 본 세대인 거다.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된다는 것도 모르겠지. 한선생은 다시 줄거리를 이야기해줬다.

“옛날 아주 옛날에, 그래. 너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래야 동화겠지? 인어공주가 살고 있었어. 그는 우연히 물가 근처에서 왕자를 발견해. 근데 하필 왕자가 멋있었던 거지.”

“선생님. 옆에 하인한테 반하면 어떻게 돼요?”

“왕자 머리 좀 치워 봐. 이런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겠지? 그러나 이런 동화들이 그렇듯 다행히도 왕자는 근사했고 그가 탄 배가 난파되어 인어공주가 구해주게 된 거야”

“근데 좀 이상한 게 왕자들은 물에 빠지면 허우적대지도 않고 왜 바로 기절해서 둥둥 떠요?”

이 말에 몇몇은 한심하다는듯 “생존 수영을 못 배웠나보지.” 떠들었다.

“암튼 그를 구한 뒤 얼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기척이 들리지 뭐야. 그래서 숨어서 봐. 낯선 공주가 왕자를 발견한 거야. 왕자는 그 공주가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하지.”

“와. 공주 에바*다. 속인 거 아니에요? 왕자 조금 모자란가봐.”

“이웃나라 공주도 그리 생각했을 수 있지. 속이려던 게 아니라 조금 어벙하지만 원래 이런 왕자인가 보다 하고.”

한선생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아이들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인어공주는 글을 못 써요? 말을 못하면 읍, 읍, 하면서 몸을 쓰면 되지. 답답해.” “아니, 언니들이 칼을 구해다 줬잖아요. 머리카락과 바꿔서 기껏 구해왔는데 왜 못 찔러요.”

“많이 좋아했나보지.”

“선생님. 저는요. 그 칼로 왕자를 백 번도 더 찌를 거예요.”

“아. 지온아. 백 번은 좀.”

아이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한선생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인어공주의 이야기가 맞긴 한지 의심스러웠다. 너무 오래전에 읽고 본 내용이다. 그들은 상온에서 물거품이 되는지, 아니면 물속에서 공기방울의 형태가 되는지 멈추지 않았고 그때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인어의 뼈는 어떻게 생겼어요?”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인어공주라면 상체는 사람의 뼈와 비슷하고 하체는 물고기 같지 않을까.”

‘예를 들면 고등어 같은?’ 말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 궁금하면 생선 먹을 때 가시를 잘 살펴보렴”

아이들은 저마다 인어공주에 대해 떠들었고 한선생은 그날 고등어조림을 먹으면서 인어의 뼈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영유: 영어 유치원
*에바: 오버하다를 달리 쓰는 말




2020년 9월 27일 일요일

계룡이

 






PLA (PolyLactic Acid) 필라멘트
3D 프린터 제작
2시간 15분 소요

강상준 작품

2020년 9월 18일 금요일

자네, 유령을 아나?



선생의 업무 강도는 높지 않다. 잡무가 많을 뿐이다. 잡무의 연속에서 모든 선생은 자신이 잡무 자체가 되는 걸 깨달으며 교무실에서 아이들의 공책을 뒤적인다. 부모는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선생은 알아볼 것이다. 자신이 뭐라 쓴 건지 모르는 아이들의 글자를 유추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오래 들여다보면 저절로 열리는 글자가 있는 법이다.

첨삭을 하는 것도 잡무에 속한다. 어렵지 않으나 딱히 보람을 느낄 일도 아니다. 가끔 웃기고 가끔 영특한 글을 읽는 재미가 있다. 열 권의 노트를 빠르게 해치우고 다음 공책을 펼친다. 편지 형식의 글을 적으라고 한 적 없는데, 강상준은 보란 듯이 한선생에게, 라고 적은 숙제를 제출했다.

“한선생에게.
나는 상준이야. 자네 유령을 아나?”

아이들의 이상한 화법은 종종 이렇다. ~했습니다, 하다가 바로 했다, 로 변한다거나 선생님, 제가 그랬다요? 꼭 요를 붙여야 존대를 한다고 착각한다거나, “제 동생은 저한테 이것이 제 형이에요.”라고 말한다고 떠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혼란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건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

아무튼 유령이라. 나는 유령이라는 단어를 안다. 단어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다.

“니가 요즘 심심하지? 최근에 내가 책을 하나 읽었는데 말이야. 켄터빌 저택에서 유령이 등장하는 이야기야.”

최근에 우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을 다뤘었다. 그들은 『캔터빌의 유령』외에도 『행복한 왕자』를 읽었지만 제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동상에서 사파이어를 빼가고 제비가 날아다닌 거, 라고 말을 하자마자 어어? 하며 알아들었다. 그들에게는 저자의 이름이나 책의 제목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 바로 그거.

상준은 캔터빌 저택의 유령이 사라졌다지만, 여전히 다른 차원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이미 사라진 존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1차원과 2차원, 3차원과 4차원에서 계단을 이용하듯이 교차하는데 그건 사라진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등장 방식이라고도 말했다.

“유령은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제일 기쁜데 그렇지 않으면 어떻하겠어? 내입장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더 무섭게 할거야. 온갖 전기를 끊어버린다던가, 물어 뜯으러 다닌다던가, 아니면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믿기지 않을 수 있기에 그는 자신이 본 유령의 모습을 그림으로 첨부한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이들의 서사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믿는다. 저절로 만들어지는 유령도 있는 법이다.

한선생은 밑에다가 굳, 이라는 단어를 적어주고는 빠르게 첨삭을 마쳤다.

2020년 9월 1일 화요일

우리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선생님, 우리는 장례식에 왜 못 가요?”

아이는 축구화의 끈을 야무지게 묶다가 묻는다.
“왜 못 가는 것 같은데?”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것. 선생의 답은 단순하다. 몇몇 아이들은 눈치를 보다가 “저희가 뛰어다니고 시끄러우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많은 어른이 그들에게 눈치를 줬을지, 또 그걸 알면서 잘도 뛰어다녔을지 가늠이 되는 대목이다. 그들은 객관화가 제법 이루어지기 시작한 모양이지만 때로는 정서를 보호한다거나 너희의 액운을 면하기 위한 관습이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로 보였다.

“호상이라면 갈 수 있지. 잔치 같은 분위기일 수도 있고.”

처음 질문을 했던 아이는 “저, 사실 가본 적 있네요.” 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느릿하게 꺼냈다.

“증조할머니는 나이가 많으셨는데요, 치매가 있으셨거든요. 다른 가족들은 다 못 알아보는데 저랑 아빠는 알아보았어요. 할머니는 왼손이 없으셨는데.”

“윽? 손이 없어?”

“옛날에는 소에 여물 주다가 그런 경우가 많았대.”

아이들은 모두 집중하고 들었다.

“아이는 저 혼자였어요. 한 손으로 저를 오래 잡았고...... 잊었는데 방금 생각난 걸 보니 묘하네요.”

아이의 묘하다는 표현은 어떻게 해석이 가능할까. 주변 아이들이 공감을 하는 ‘묘하다’에서 선생은 그들이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 그저 어림잡아 짐작해볼 뿐이었다.

마침 며칠 전에 읽은『우리 함께 죽음을 이야기하자』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저자 게어트루트 엔눌라트는 어린 시절 실제 남동생의 사고와 부모의 자살을 겪었다. 그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죽음에 대한 어떤 질문과 답을 하면 좋을지 고심한 흔적이 담겨있는 책이기도 하다. 훗날 도움이 될까 싶어 뒤적여봤지만 애완동물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형제 자매, 예고 없는 죽음, 자살 등, 서양의 문화적 차이나 동양의 문화적 차이를 구분 짓고 이야기를 꺼내기가 만만치 않은 사례가 많았다.

주변의 죽음을 겪은, 아이의 상실에 대비하는 어른의 자세. 선생은 아직 이런 말을 해줄 여력이나 들을 준비도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가볍게 던진다. 캐치볼이라도 하는듯 작은 글러브로 쉽게 받아낸다. 강의실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다시 남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선생님, 그런데 하남집은 좋아하세요?”

하남집은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고심을 하자 옆 친구들이 “아, 하남 돼지 고깃집 말하는 거예요. 거기 유명해요.” 떠들었다. “저는 거길 좋아하는데 엄마는 안 좋아해요.” 그는 재빠르게 죽음을 잊었고 친구들은 “슬프겠네.” 대답해주고는 자신이 먹은 점심 메뉴를 자랑했다.

선생이 떠난 교실에는 “아, 배고프다. 거기 명이나물 맛있는데.”라는 말이 오가고 있었고 선생은 그제야 자신이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20년 8월 26일 수요일

I have a dream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을 어린 친구들과 읽었다. 인권과 비폭력주의와 인종 차별에 대해 설명하자 아이들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꺼냈고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사례를 줄줄이 나열했다.

가끔 이런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미래가 지나치게 밝은 건 아닌지 싶다.

너희는 어때? 개인의 꿈도 좋고, 사회나 인류를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적혀 있는 꿈은 이와 같다.


- 교촌의 허니 콤보와 매운 콤보가 반반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 전복이 없었으면 좋겠다. (많이 먹으면 헛구역질이 남.)

- 거북이가 멸종이 안 되면 좋겠다.



지나치게 밝은 미래들은 신나게 꿈을 적고 다음 연설문을 읽을 사람을 뽑는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위, 바위, 보. 그때 궁금증이 생긴 한 친구가 선생에게 질문을 하려 하자

누군가 “입 닫아.” 소리 지르며 빠르게 가위를 내고 있다.

2020년 8월 10일 월요일

눈술


예쓰, 예쓰, 티쳐 








 선생이란 무엇인가. 아이들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아직 사람은 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다. 어린 친구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서는 쉽게 잊는다. 처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도 이들을 통해서였고 관심이 멀어진 것도 이들을 통해서였다. 잠시 여러분들이 이들과 반나절만 있으면 금세 깨닫고 외치리라.

 “얘는 왜 이러지?”

 아무튼 간에 책상에는 아이가 두고 간 펜이 놓여 있다. 그들은 지우개, 우산, 외투, 끈 등 가리지 않고 잃어버린다. 자신의 사물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적지만 타인이 두고 간 물건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선생님, 이거 가져도 돼요?” 나는 보지 않아도 알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한다. 아, 이거 프린들인데, 그가 외쳤고 나는 프린들을 자리에 놓으라고 말하고는 잊는다.

 방대한 지식을 배우면 바로 써먹는 이들을 언제까지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프린들은 펜의 종류이거나 브랜드 이름이 아니다. 그는 앤드류 클레먼츠가 쓴 『프린들 주세요』에 나온 주인공 닉의 단어를 빌려 쓴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모든 내용은 인류 전체에 공유가 된다고 믿는 듯 생각의 흐름대로 말한다. 물론 설명 또한 하는 법이 없다.

 아이들의 책을 읽지 않는 선생이라면 저 말 또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보통은 책을 펼치지 않을 게 분명하니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는 닉이라는 말썽꾸러기 소년이 ‘펜’이라는 단어 대신에 ‘프린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저자는 학교에서 어떤 소년이 단어가 어떻게 생기는지 질문했을 때,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저자의 즐거운 상상력에 대한 관심보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문하기 위해 말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펜을 프린들이라고 고집스럽게 부르는 닉을 통해, 국어 선생님인 그레인저를 통해 하나의 단어가 어떤 유래를 가졌고 단어를 왜 지켜야 하는지 보여주는 유쾌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펜은 깃털을 가리키는 라틴어 ‘피나’에서 유래되었지만 아이들은 오직 프린들이라는 단어만 기억하고 이것이 실화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허구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

 이 글도 허구라고 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는 작은 형상의 열 살짜리 친구들에게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보라고 실습을 시킨다.

 언어의 창조성, 사회성, 역사성을 담아볼 것.

 그들은 쉽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눈술’이라고 적는다. 프린들에 대적할 만한 단어라고 코 평수를 넓힌다. 눈술은 바로 ‘눈 감고 술래잡기’의 줄임말인데 여기는 논술을 배우는 곳이니 (물론 아니다) 어울린다는 점에서 창의성 1포인트, 이 강의실에 있는 세 친구가 합의한 단어이므로 사회성도 갖춰서 2포인트, 언어는 만들어졌다가 소멸하는 것인데 그들은 셋이서 십 년 정도 이 단어를 쓰다가 다 잊기로 약속했으므로 3포인트 획득이라고 점수도 스스로 정한다.

 새로운 친구가 들어오면? 이 룰을 알려주고 주의사항도 말해주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건 십 년만 써야 해. 그리고 사라질 거야. 동의하니?”

 쉬는 시간이면 그들은 눈술을 한다. “한선생. 저 반은 애들이 참 맑네요?” 이 말은 강의실이 시끄럽다는 뜻이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쉿, 하며 손짓하지만 이건 보이기 위한 쇼일 뿐이다. 애들이 맑아야지, 그럼 누가 맑겠어. 한 명은 눈을 감고 나머지는 강의실의 책상과 의자 사이에 숨거나 따개비처럼 붙어 있다. 왁, 하고 소리 지르다가 웃는 소리. 그들의 웃음은 정말이지 시끄럽고 청량하다. 이런 걸 관찰하는 어른의 삶이라면 썩 나쁘지 않다고도 잠시 생각한다.

 이걸 기록한다면, 그들도 모르게 이 단어가 십 년을 살아남는다면?
 
 암튼 간에 그들이 사라질 말이라고 꼽은 1순위도 있는데 여기에서만 살짝 공개하고자 한다.

 네! 네! 선생님.
 네! 네! 선생님.

 그들이 합창하듯이 정확한 박자로 구령을 외친다.

 나는 또 알아듣지 못하고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이건 유치원 때 선생님이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기본 문구라고 한다. 근데 왜 이게 사라지냐고 옆 친구가 물으니까 그걸 1순위로 뽑은 친구가 한숨을 쉬면서 대답해준다.

 “이제 애들 영유* 다니잖아.” (*영어 유치원의 줄임말)

 그 말을 들은 친구도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그럼 이제 요즘 애들은 예쓰, 예쓰, 티쳐라고 말하나?

 나는 근미래의 언어를 기록하는 자가 된 셈이다.


예쓰, 예쓰, 티쳐

“선생이라는 게 얼마나 고약한 일인 줄 아십니까. 애들이 예뻐요. 그들이 주는 기쁨과 샘솟는 감정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아, 이게 문제라는 거죠.”


이 글은 한선생의 일지입니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어린 친구들은 열 살 언저리의 친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매달 1회 이상 연재하려 합니다. 학부모님의 연락은 지극히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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