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9일 토요일

온천 여행

살구나무 위에 앉아 있다. 손차양을 하고 멀리 내다보고 있다. 어딜 보는 걸까? 나무 밑에서 나는 그런 궁금증을 가진 채였다. 담장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천사가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순간 살구나무가 살짝 흔들리면서 살구 하나를 떨궜다. 나는 그쪽으로 가서 살구를 줍는다. 그리고 입에 넣어 맛본다. 천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천사님. 네? 무얼 보고 계시는. 이 생각을 끝으로 나는 온천으로 돌아왔다.

온천에 발을 담그고 있다. 주위에는 가운을 걸친 내가 아는 사람들. 그들의 주변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우리는 대화 같은 걸 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이 온천을 점거하고 있다는 인상이 남기도 한다. 온천 여행은 다들 사는 곳에서 멀리 있는 곳에 오기로 정했다. 일본 식의 찬합에 담긴 식사도 나왔다. 아직 먹기 전이었지만 말이다. 카탈로그엔 그렇게 안내되어 있었고 밖의 커다란 유리 너머로 눈이 오는 것이 보였다. 눈이 오고 있다. 다 같이 놀러 온 이런 날에. 우리는 온천에서 나온 다음 테이블에 앉아 TV를 틀었다. 그리고는 보드게임을 하거나 음료를 마셨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이번 여행에서는 무알콜 음료만 먹기로 했다. 몇몇이 모여 탁구를 하고 돌아왔고, 전자 담배나 연초를 피우는 사람들은 옥상에서 피웠다. 총 아홉 명이 같이 온 것이었고 그중에는 크툴루 관련으로 TRPG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5명이서 일부가 탁구하러 나간 동안 그것을 했다. 재미있었다. 게임이 살짝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게임을 하나 다 만들고 단체로 놀러 온 것이었다.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종류의 게임은 아니었다.

그 게임에는 아까 생각한 천사도 나온다. 타인의 집의 담장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별다른 외부적인 설명이 있지 않다. 살구나무 위에 앉아 있던 천사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하나를 따온 것이다. 성격을 따온 것은 아니고 상황을 가져온 건데, 그는 어릴 적 살구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못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천사가 내 옆에서 물에 고개 밑까지 푹 담그고 있다. 여기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건 천사로 오해된 내가 아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는 살구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천사로 오해된 그 사람은 양털처럼 머리가 곱슬이고…… 우리는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온천에서도.

다시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발을 담그고 있다 보면 한통속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식으로 물과 한통속이라는 느낌을 간직하면 좋은 사람은 몰라도 나쁘지 않은 사람, 일견 눈길을 끄는 사람은 될 수 있겠지. 밖의 커다란 유리 너머로 눈이 오는 것이 또 보였고, 물의 표면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나는 혼자 있어서 그런지 조금 적적한 기분이 들었다. 발은 따뜻했다. 나는 나와서 여기서 준 의복을 걸치고 아까 눈 내려오던 마당에 갔다. 여기는 눈이 아주 많이 내려오고 있었다. 처마 끝으로 그 눈들이 날리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눈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실내에 있는 아까 본 탁구대 근처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외치는 소리가 이쪽까지 들렸다.

까만 밤이 왔고 나는 이부자리에 누워 생각을 좀 하다가 다시 온천으로 갔다. 밤이어서 밖의 배경이 검었고 아직 나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진 채였다. 살구나무 위에 앉아 있는 천사가 이쪽을 보며 눈이 웃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여기서(온천 여관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게임은 재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 없을 수도 있겠지.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기 전의 날짜였다. 일정이 촉박하였고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가상의 나날이었다. 게임은 눈이 내리는 유리 너머가 배경이었고 온천 안에는 살구나무가 자라 있다. 나무는 온천수 아래로 뿌리를 뻗고 있고 그 광경은 조금 기이하다. 살구나무 위에는 천사가 있고 그 천사를 누르면 “…….”라는 대사가 나온다. 

2023년 4월 28일 금요일

초월일기 7

 

요즘엔 뭘 쓰려고 하면 불안하다 

줄타기를 시작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조금만 잘못 타도 떨어질 것 같고 떨어지면 아플 것 같다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될 것 같고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보여줘야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시시껄렁한 말이 될까 봐 말을 아예 못하고 있는 것 같고 

말을 아예 못 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 것 같다 쓰는 재미가 

예전에는 내가 말하면 뻔한 말도 안 뻔하다는 확신 내지 자신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오글거릴 것 같고 

유치할 것 같고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주춤하게 된다 멈칫하게 되고 

그러다 완성한 글은 

나 이런 거 할 수 있다 어때 넌 할 수 없지 이런 것에 치중해서 쓴 글 같고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글은 보여주기만을 위해 신경 쓴 글 증명을 위한 글은 내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나는 감동하지 못하고 나는 감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좌절하는 느낌 우울한 느낌 슬프고 피곤하고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이런 마음을 어디에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선 안 되는 것이고 


뭐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이지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왜 이렇게 됐지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이런 말을 내가 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반복된다 





2023년 4월 27일 목요일

망각

자연재해가 나오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있다. 집에 두고 온 식탁은 조용한 크리스마스 전야를 위한 것이다. 으레 그렇듯 완고한 성격의 고지식한 할아버지가 나오고 있다. 이 영화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자연재해가 나오는 영화를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자연재해 자체에 주목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다. 자연재해는 인상적일 수도 있음을 전자가 보여준다면 후자는 전자보다 재미있다. 통속적인 재미라는 것은 영화를 고를 땐 지나치기 쉬운데(아름다움이나 미감을 우선시하는 취향) 일단 영화관에 앉아서 나가기가 어렵게 되면 중요해진다. 재미라는 것은 내 생각엔 편안함과 비슷한 영역에 있다. 재미보다도 더 재미있는 것이 편안함이다. 그것은 매번 같은 얼굴이 나오는 꿈인데 그 같은 얼굴을 보더라도 아무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거나 같은 골목을 수십 번, 수백 번을 돌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편안함은 길을 잃은 것이고 그것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도하는 기질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그런 편안함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더라도 지치지 않게 해준다. 내가 영화관에 갔다는 것은 거짓말인데,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영상을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서 아쉬운 점은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영화관에도 갈 일이 없다는 것이다. 편안한 영화는 그나마 볼 수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그런데 편안함이라는 것은 사실 행위의 정도가 미약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지 않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일, 보지 않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영화가 편안한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통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저항이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생기는 것 같은데, 그 저항이 사실은 행위의 강렬도다. 그러한 행위들이 나중에도 기억이 나게 된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해도 편안함, 잊힌 편안함은 희끄무레하게 그 사람을 이끈다. 사람들이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다. 나도 그들 중에 하나다. 나는 자연재해가 수단으로 격하되는 걸 보고 싶고, 보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영화를 보고 싶다. 사실은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고 싶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들, 그러니까 편안한 것들은 어떤 느낌이 있다. 영화의 2분짜리 광고를 넘기지 않고 다 볼 때에는 그 편안함에,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그런 거에 어쩌다 보니 매료되어서다. 그러니까 다 보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 편안함이란 결국 말 없는 것들에 대한 희망, 침묵, 살아도 살지 않는 것과 다름없음을, 아주 조용하게 그쪽 가까이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걷고 있다. 조금 긴 어두운 통로다. 그 밖에는 크리스마스 전야제가 있다. 그때까지(다 걸을 때까지)는 어둡다. 영화관처럼. 나도 다 보려고, 그러니까 결말을 위해 무언가를 보는 족속 중 하나이고 올해같이 편안한 크리스마스엔 모든 TV 채널에서 기이하게도 거의 다가, 지나간 명화를 틀고 있다. 그 영화들은 그런데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 내용이 생소하고, 옛날 것들인데 그런 게 있다는 게 이상하다. 따듯한 성탄 전야였다. 나는 통로를 지나왔고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발밑이 조금 차갑다. 나는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2023년 4월 24일 월요일

햄릿 연극

급조된 티가 나는 의자에 앉아서 햄릿의 대사를 말한다. 이 무대 위의 모든 것이 엉망이다. 배우들이 낄낄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미니 버번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난 저걸 마실 거고, 난 취할 거야. 인사불성이 될지도 모르지. 배우들의 억양과 제스처는 너무 배고파서 소시지 빵을 먹는 듯이 그들의 욕망에 기초해 있다. 그럼 욕망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에 가서 따듯한 욕조에 기대고 누워 그날 있었던 하루의 일을 반추하고 싶겠지. 그러나 이 배우들이 모인 건 어떤 번들거리는 노골적인 욕동 때문이라 원한다고 해서, 그리고 원하는 사람도 없었고, 자리를 벗어날 순 없었다. 배우들이 원하는 건 연극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잘 모르면서 술을 퍼부어 마셨다. 자기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해야 할 것이 자기소개라면 그런 따위의 사회적 예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햄릿의 대본을 고른 건 연출가의 지시였다. 물론 배우들은 햄릿의 대본을 연습해오지 않았다. 햄릿의 대본을 숙지하지 않은 이는 여기에 없었다. 배우들이 연극에서 맡는 역할은 유화 그림으로 따지자면 기름 물감과 실물의 팔레트, 그리고 수정 용액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별것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것이 맞다면 예전에 비해 축소된 것이다. 그 예전이란 언제지? 고대 그리스 시대? 특히 이 문화 산업 안에서는 그 빌어먹을 운이란 게 크게 작용했다. 작품을 볼 줄 모르는 배우는 운이 중요하기 때문에 고사에 열중해야 된다고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약간 부자연스러운 어조였다. 다 이름이 이미 알려진 이들이었고 연극의 일부가 되는 것이 예전엔 좋아서 뛰어든 이들이었다. 연극에서 만날 일은 서로 없었던 게, 다들 주연을 맡을 만큼의 이들이었다. 그들은 설정상, 모여서 취미로, 무대에 올리지 않을 극을 연습하고 있는 중이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햄릿의 대사를 주워섬기며 술에 취할 정도로 마셔댄다. 조금 어이없는 것은 감 같은 것이 다 있어서 실제 연극 같기도 하단 것이고, 그때마다 객석에 앉은 단독의 연출가가 박수를 쳤다. 이게 뭐람? 직업이 인간에게 주는 안정감은 심히 큰 것이고 그들에겐 인사불성이 되어가며 좀 더 자연스럽게 된단 것이 직업적인 만족감을 주고 있다. 안 맞는 옷을 억지로 끼어 입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다. 예술 고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학생들끼리 기악 합주를 하는 듯한 자연스러움. 연출가가 주문한 건 그거였고 그들은 사실 이러한 사정을 각자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외면을 잘해야만 연기를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어려웠다. 어떤 연출가가, 성질 더러운 것으로 유명한 그가 이러한 어정쩡한 욕망 위주의 연극을 기획했고 배우들은 찾아온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게 잘될지는 모르겠군. 참여한 걸 후회하는 이도 있다. 연출가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이것이 아주 제대로 된 방법이라고 혼자 생각한다. 무대 위를 어지럽히는 일은 직접 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2023년 4월 23일 일요일

서재 안의 겨울

서재에 겨울이 있다. 반쯤 눈에 파묻힌 책들이 고즈넉하게 보인다. 누가 서재로 겨울을 들여왔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겨울이 이성의 소산이며 악하기만 한 것이라는 것도 나는 잘 모른다. 겨울이니만큼 더 심하게 난로 안에 나뭇짐들을 넣어야 한다. 벽난로에서 타닥, 하는 소리가 난다. 밖은 겨울이 아닐 수 있다. 나가본 지가 오래되어 정확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서재의 구석에 거미가 줄을 치고 있다. 걷어내지 않고 그냥 놔뒀다. 거미와 친구는 될 수 없지만. 여기에서 나는 약간의 외로움을 느낀다. 내 주위는 이성으로 가득하다. 나는 나이를 먹은 것이고 어떤 사람이 보기엔 초라하거나 무미건조할 수도 있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 소년은 그 여왕에게 반하지 않는다. 아름다움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연정, 반함이라는 감정일 수 있다. 소년은 미리 다른 대상에게 반했던 것이다. 눈 안으로 들어간 얼음조각 때문에 그렇게 반한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다. 그러면 안 됐는데. 물론 이야기의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지만 그 실수는 인상 깊은 것이었다. 어쩌면 소년이 기억 못 할 수 있는 그런 불온한 언행은 소년 자신이 저질렀기 때문에 용납받을 수 있는 것이리라. 그 행위와 이야기의 당사자였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얼음 여왕은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춥고 차가운 겨울이다. 서재를 나가기만 해도 온도가 달라진다. 몹시 따뜻해진다. 나는 지금 욕조 안에 앉아 있고, 내 일과는 우선 이렇게 씻은 다음 서재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책을 읽다가 몸이 차가워지면 난로 앞으로 다가간다. 거기서 더 차가워지면 서재에서 나와 다시 씻는다. 그것을 반복한다. 이러한 일상은 사실 별 볼일이 없다. 나는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죽은 내 딸이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 안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딸이 나를 찾을 때 좀 더 만면에 미소를 띨 것 같았다. 난 재주가 없으므로 서재에 겨울을 들여올 수 없었으나 생각은 그렇게 해 보았다. 서재에 겨울을 들이면 좋겠노라고. 그리고 딸이 죽은 다음 그 생각은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금쯤은 슬픈 일이고, 나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힐끔 비쳐 보이지는 않았으나, 결국 남은 사실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딸아이의 죽음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아이에 대한 회한으로 이 서재 안의 겨울은 온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인간적인 여지와 소중한 감정을 연료로 저 벽난로는 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쯤은 이 입장 이외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죽을 용기는 없으며 인간들에게 닥치는 비극과 불행에 대한 합리화를 이미 마친 뒤였다. 조금 더 우습게도 이 겨울은 눈 내리고자 하면 나리게 할 수 있다.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다. 나는 이야기 속의 얼음 여왕과 비슷해졌다.

2023년 4월 22일 토요일

열차와 아이들

열차가 가라앉고 있다. 그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어떤 경위로 열차가 가라앉고 있는 것인지, 그게 진짜이긴 한지가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열차의 죽음, 12량 정도의 수압으로 인한 폐쇄가 조금 안온해 보인다. 열차에 들어간 강철 등이 점진적인 손실이 되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열차에 따개비들이 붙을 것이고 해초들이 자라나 덮을 것이다. 열차 안에서 바다거북이가 몸을 숨기고 누워 있을 수도 있다. 근처의 생태계가 열차의 침몰 때문에 조금 변화한다. 바다 아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또한 있을 수 있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뭔가가 바뀌었긴 하나 못 받아들일 정도는 아닌. 동물들은 그런 변화를 잘 받아들인다. 별 생각 없이. 자연에는 그런 비정상적인 일들이 가끔 일어나고 열차의 좌석에는 승객들이 급하게 내리다가 두고 간 소지품들이 꽤 있을 수 있다. 거기까지 잠수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다이버들의 몫이 될 수도 있다. 여기는 수심 60m이고 오전 6시가 되면 동쪽의 바다 천장에서 햇볕이 비추기 시작하는데, 그 시간 즈음이 되면 대규모의 정어리 떼가 체온의 상승을 위해 바다 표면까지 접근해 햇볕을 받는다. 해안가에는 벌써부터 일어난 인간들이 선크림을 바르고 그 햇빛 아래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혹은 서성거린다. 여기는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고 근처에는 섬이 있다. 그 섬도 해안에서 멀지 않다. 따라서 보트를 타고 그곳까지 나아갈 수 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사면으로 펼쳐진 바다 안쪽에서 식량이나 주거 자원 등을 구비해놓는다. 일하기 좋은 이상적인 시간대는 오전 10시경, 혹은 오후 4시경이다. 바다에 인접한 지역은 그만큼 햇빛이 강렬하다. 가라앉은 열차는 아무도 그 때문에 슬퍼하거나 하진 않는 듯하다. 그것을 인양하여 거기 들어간 광물 자원을(이제 열차라는 용도로는 못 쓰게 되었다) 재사용하자는 말도 안 나오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열차는 사람들의 뇌리에 처음부터 깊이 박히지도 않았고, 이내 잊혀졌다. 원한다면 그 날짜의 짤막한 기사를 열람할 수 있다. 이것이 한 열차의 운명이라면 그것도 받아들여 볼 만한 것이리라. 가라앉기 전에 모두 하차하여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점이 다행이고, 그러한 탈출이, 혹은 열차의 존재였던 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역시 의심스러우나, 찬성과 반대 등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는 듯이 저 아래에서 이미 해초들로 뒤덮여 있는 열차는 보란 듯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몸이 이완된다. 왜냐하면 열차는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침묵과 존재의 몰락은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다. 다른 세계에 이 열차가 초대된다. 열차는 초대에 응한다. 다른 세계로 떨어진 아이들 앞에 해초와 따개비 등에 뒤덮인 열차가 떡하니 있다. 갑자기 나타난 해안의 열차 몇 량. 열차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들어와서 쉬라고. 마찬가지로 그곳도 해안이고 신기한 식생들이 여럿 있는데 아이들로서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열차로서도 모험을 동경했고, 아이들의 경우 지금 당장 쉴 곳이 필요했다. 아이들은 열차 안에 들어간다. 

2023년 4월 21일 금요일

작약과 여인

작약 한 그루가 있다. 바람결이 찬 이 언덕에 당신은 무변하게 앉아 있다. 앉아서 곰방대를 피운다. 작약 하나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성한 가지들 주위로 당신의 머리가 있다. 우습게도 사람 키 높이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거기엔 열매라고는 믿기 싫을 정도로 시큼하고 텁텁한 맛이 나는 것들이 달려도 있다. 당신이 앉은 자리보다 작약은 아래에 있다. 핏방울이 맺히면 동그랗게 보이듯이 이 언덕은 둥근 원형으로 솟아 있는데, 당신은 눈에도 동그란 권태의 기색이 끼어 있다. 그러면서 곰방대를 피운다. 작약은 한 가지 사물 이상인 것 같기도 하고 꽤나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제시간에 왔다면 꽃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아쉬운 눈길로 손을 들어 가지들 사이를 만진다. 바람이 불어 가지들이 자기들끼리 얽히려고 움직인다. 당신은 열매 하나를 따서 입에다 넣고 빨리 과육을 씹은 뒤 손바닥에 입안에 남은 씨알들을 뱉는다. 그리고 날아가라는 듯이 저 아래에 던진다. 당신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으나, 오늘 내일 중으로 이것의 모든 열매를 이렇게 하여 땅 밑 적당한 깊이에 묻어 두어야 한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다. 씨앗이 싹트기 나쁘지 않은 별들의 운행이 조금 저문 저녁 위로 대강 비쳐 보였다. 천문을 볼 줄도 알지만 거기엔 그리 좋은 노력을 통했던 것이 아니다. 이 녀석은 과육을 먹어주지 않고 씨알에 이빨로 손상을 주지 않으면, 씨 안의 진짜 씨들이 땅에서 싹트지 못해 이렇게 남의 입안을 강제로 버리게 하는, 물론 먹다 보면 그것도 못 먹을 정도만은 아니었으나, 그래 사람으로 따지자면 까다롭고 무성의한 그런 이였다. 배곯는 사람들의 우상을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을 일부러 폄하하지 않아도 당신은 배곯는 일이 싫었고, 그렇지 않아도 은전은 그리 없었다. 이것의 열매라도 얼마 간의 포만감을 줬는데, 게다가 그렇다고 감사해지지도 않았다. 당신은 그저 열매를 먹고 또 뱉고 먹고 또 뱉으며 입안이 쓴맛으로 그렇게 되고 있을 때마다 이것이 미식인가? 하는 괴악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것도 먹는 재미라면 먹는 재미였다. 다시 말하지만 못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동생이 있었고 그 동생에게 갖다 줄 열매들을 오른손에 챙겨둔 이후였다. 너도 먹어보라고. 동생은 남을 원망 안 했다. 당연한 거라면 당연한 거겠으나 살아 오는 중에 비애도 있었고 없는 이의 권태와 오만도 있었다. 당신과 동생 모두. 그런 것들도 곰방대를 불면 잠시 잠깐 날아간다. 당신은 쓸데없다는 듯 희게 웃는다. 이걸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눈과 고양이

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이 어설픈 눈은 네가 입은 겉옷에 그런대로 묻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의 등에도 눈이 쌓인다. 하얀 눈은 점점 더 늘고 있다. 그칠 기색이 없다. 골목을 걷는 사람들. 지나가며 한 번씩 돌아본다. 네 외양이 조금 아름답기 때문인가? 검은 고양이가 네 주위에서 골골거린다. 아마도 넌 뭔갈 기다리고 있다. 가령 이 바보 같은 눈이 그치기를. 그 전까지 넌 모자 안으로 쌓인 눈을 털지 않고 있을 것이다. 골목에 있는 의자, 넌 거기 앉아있다. 내리고 있는 눈이 네 주위를 한적하고 여유롭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눈의 존재에 조금 너는 신경을 내어주고 있다. 너는, 이러한 여유, 평화로운 느낌을 느껴본 지 오래되었던 것일지도. 이 주택가에 곧이어 사람들이 한 명씩 나와 자기 집 앞길을 빗자루로 쓸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눈을 두고 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불편함을 주는 눈은 조금 아름답다. 새하얀 유백색의 눈. 점점 눈을 맞다간 약간의 변화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건 눈이 좋고 재미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아이들의 손길을 통해서 네가 눈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눈이 내리면 도로 사정이 안 좋아지고. 이처럼 집 앞의 눈을 쓸어야 하고. 예전에 나도 그렇게 쓸어봤었다. 눈이 내릴 때마다 그것이 덮여서 얼음이 되지 않도록. 아직 눈일 때. 빗자루로 쓸었다. 너는 조금 멍해 보인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 어설프기도 한 눈을? 그보다도 사랑스러운 것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 중에 하나인 너의 동생. 언니, 거기 앉아서 뭐하고 있어요? 뭔가 신경 쓸 일이 있나요? 언니는 고개를 젓고 네 쪽을 바라보며 빙긋 웃는다. 언니는 하얀 눈이다. 내 주위에 언니는 없다. 오직 눈들뿐이다. 온 세상이 하얗다. 눈이 하얗다. 내 볼 주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나도 이러한 식으로 하얀 눈에 젖어들고 있다. 어쩌다 언니의 생각이 났는지 모르는 채로. 언니가 내 뒤로 가디건을 덮어주고 있다. 언니는 없지만 지금은 있다. 언니가 만들어준 하얀 가디건. 내 뒷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까르륵 웃는다. 눈이 덮였다고. 치울 줄도 모른다고. 어느샌가 그 아이들도 주위에서 없어지고. 나는 눈물을 닦으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골목 벽에 붙어 서 있는 고양이를. 고양이가 자기 손을 혀로 핥는다. 손을 내밀자 이쪽으로 다가와 내 손을 핥는다. 핥는 것을 좋아하는 고양이구나. 검은 고양이의 등에 묻은 흰 눈들을 살살 쓸어주었다. 털 아래에서 온기를 갖고 있는 피부. 네가 고양이였구나. 

초월일기 6

 

정말 그냥 일기를 써보려고... 요즘에는 일기를 너무 안 쓰거나, 혼자만 볼 수 있게 쓰는데, 그러니까 뭐랄까... 관심을 갈망하는 마음이 좀 사라진 것 같기 때문이다. 관심을 갈망하는 마음... 줄여서 <관종력>이 사라지는 것은 좋은 일이면서 나쁜 일인 것 같다. 관종일 때는 어쩐지 관종이 별로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관종일 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랄까, 생각이랄까 할 수 있는 말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난 요즘 너무 관종력이 바닥을 치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해도 신경이 너무 많이 쓰인다. 쓰고 보니까 오히려 관종력이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하네. 


요즘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오 

피곤하다 


인 것 같다. 피곤해 피곤해. 이렇게 피곤할 수가 있는 거야?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카페인에 의존하고 카페인에 의존하니까 더 피곤해지는 것 같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가 좋아지기를 반복하는데, 지금은 좋다. 음악을 듣고 있어서..... 음악은 정말 아주 빠르게...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것 같다. 음악만이 유일한 마약? 이런 거 이해함... 이해한다......


음...... 할 말이 없군 

난 더는 다른 사람들을 웃기고 싶거나 즐겁게 해주지 않은 걸지도 몰라.


무언가 가라앉는 느낌

계속 말이 더 없어지는 느낌 


물성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고...... 그냥... 누워있고 싶고 관념들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네. 내가 쓰는 시나 소설이 좀 변한 것 같아. 그런데 이게 20대 초반의 어떤 텐션이랑은 좀 비슷한 것 같다. 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일까. 학교라는 규칙적인 공간이 나를 바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평가라는 시스템이 나를 바꾸고 있는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곡물창고 너무 좋다... 여기에 쓰면 

별로 보는 사람이 없고

누가 보는지도 모르겠고 

일단 지인들이 안 보는 것 같아서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음. 블로그에 팔로워 별로 없었을 때 아무 말이나 쓰던 일기장 같다.


일기는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 제일 편하게 쓸 수 있는 것 같다. 일기가 좋아. 일기는 정말... 아무렇게나 써도 되잖아.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네. 오... 너무 피곤했기에. 









2023년 4월 18일 화요일

돌말

창립자 고향의 뭔가와 관련된 사명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떠나온 고향이 어쨌거나 존재하는 나의 부모 세대와 달리 내게는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고 하면, 사실이지만 영 고리타분한 얘기 같다. 고리타분이란 단어부터가 고리타분하다. 무슨 고향이 있다고 없다고 새삼 주워섬기는 것도 한가한 사정에 다다라야 가능한 일이다. 젖은 눈으로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야 예전부터도 영 광대짓처럼 느껴졌다. 광대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농 삼고 한탄하는 모양을 구경하며 아무 뜻있는 데도 닿지 않은 채 으스러져 가고 있는 나 고향 없는 세대의 맘속 어딘가에 항상 쭈그린 생각은 ‘개새끼들...’이다. 여기에, 머리통 속에 ‘개새끼들...’이 있다. 그게 내 고향이다. 어디의 어느 개새끼들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개새끼들이 있고, 그들은 짖고, 죽고, 태어나고, 개새끼들이 개새끼들을 짓누르고, 개새끼들은 사라진다. 개새끼들이 개새끼들 속에서 나온다. 나타난다. 아무리 떠나가도 그것은 너무 많다. 내 부모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전후 세대 노동계급이다. 그들이 성년이 될 즈음 그들의 고향에는 문자 그대로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수도로 가는 열차와 버스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논밭에서 공장으로’였고, 탈출이었고 축출이었다. 그들은 수도에서 일을 시작해 그야말로 죽도록 일했다. 그들은 죽도록 일하면서 점점 수도 바깥으로 밀려나 I시까지 나갔는데, 나는 그렇게 밀려 나가게 된 까닭 중 하나였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수도와 I시와 어머니의 고향에 흩뿌려져 있다. 여름마다 갔던 어머니의 고향에는 냇가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 옛날 살았던 수도에는 언덕이 있었고,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 I시에는... 내 고향은 그 기억들의 총합으로 이 머리통 속에 있다. 내 부모는 I시에서 여전히 죽도록 일하고 있다. 이제는 나도 이 수도에서 그렇다. 나는 그럼 언제 밀려 나갈 것인가? 내 부모가 어느덧 몇 십 년째,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 I시의 동네의 옛날 이름이 ‘돌말’이다. 돌이 많다고 해서. 돌을 캐기라도 했다는 걸까? 어쨌든 그 단어가 사명으로 붙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창립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창립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개새끼들을 그냥 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복수할 것이다. 뭘 복수한다는 건가? 나는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2023년 4월 6일 목요일

보석내장

T-종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먼 옛날 S-종족이 직접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S-종족에 대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꿈꿨던 지상과 공중에서의 영예를 위해서는 지하의 것들이 많이, 정말로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손발에 더러운 것을 묻히거나 직접 갱도를 기거나 숨통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말없는 지하로부터 귀중한 광석과 보석들을 캐내기 위해, 그들은 간교한 마법적 지식과 기예를 총동원하여 T-종족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종족이 모욕받았고, 벌레 두 종류, 나무 한 종류, 버섯 세 종류가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T-종족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 사람보다 거의 두 배는 큽니다. 오래된 그루터기 같은 두 다리, 짐수레를 세워놓은 듯한 몸통, 창백하고 단단한 거죽은 어떤 상처가 나도 금방 아물며, 나무 뿌리처럼 억센 팔이 무릎까지 닿습니다. 거대한 호박 덩어리 같은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입, 그 안에는 자갈 같은 이빨들이 가득합니다. 그 위엔 코털이 잔뜩 삐져온 코, 그 위엔 단추 같은 눈, 귀는 당나귀귀 같습니다. T-종족의 가장 주된 습성은 굴을 파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본능을 따라 광맥이 흐를 만한 적당한 장소, 깊은 골짜기나 구릉 지대에 모입니다. 그리고 초기 T-도구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나무를 지렛대로 나무를 쓰러뜨리고 바위로 바위를 깨뜨리며 가장 좋은 땅을 골라 터를 잡습니다. 그리고 아래로 아래로 파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작업을 시작한 곳은 그대로 광산이 됩니다. 그들은 어설픈 도구로도 절묘한 솜씨로 공동과 갱도, 경사로와 방들을 만듭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야광버섯처럼 침침한 빛을 내며 가치 있는 광물과 광석들을 캐 모읍니다. 방들 중 하나는 대장간으로 꾸며지고, 그곳에서 철을 제련해 그 어떤 종족의 것보다도 견고한 고급 T-도구―곡괭이와 삽, 정과 망치 따위―를 만듭니다. 물론 그들 외엔 사용할 수 없는 크기로요. 그 다음부터는 난쟁이들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규모와 양식을 갖춘 광산이 됩니다. 깊은 곳에 있는 보물방은 T-종족의 근면함에 힘입어 수년 안에 광석과 보석, 보물들로 가득 찹니다. 그들은 서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그 방을 지킵니다. T-종족은 보통 돌을 먹는다고 전해집니다만, 그보다도, 모으지 않는 것은 전부 먹는 편입니다. 보물을 노리고 침입한 모험가들이 그들의 별식이 될 뻔했다가 무슨 돌이 가장 맛있는지 토론을 시킨 틈에 도망쳐 나오는 노래가 유명하지요. 오직 S-종족만이 T-종족의 광산에 들어가 주괴와 보물들을 유유히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S-종족이 T-종족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대대손손 새겨놓은 공포심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그러나 S-종족은 깊은 지하에 광물 말고도 온갖 것들이 묻혀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T-종족이 도대체 뭘, 언제 파냈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까마득히 깊은 지하에서 뭔가를 발견했고, 그날부터 그들의 탁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들은 묘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긴 해도 분명히 노래입니다. 한 대담한 음유시인이 그 노래를 배워왔습니다. 그 노래는 ‘보석내장(寶石內臟)’으로 불리는데, ‘보석내장으로... 보석내장으로...’ 하는 후렴이 강렬하고 인상적이기에 붙은 제목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냈다’, ‘우리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와 같은 표현이 그 노래에 직접 나옵니다. 노래에는 ‘마술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세워놓고 보물을 훔쳐가는 녀석들’도 등장합니다. ‘그들을 씹은 다음 뱉어버릴 것’이라고요. ‘금강석 몸을 완성하는 날에 그날에’ 말입니다. 처음엔 음유시인의 창작으로 여겨졌습니다만, 당시 모험가들 상당수가 T-종족이 부르는 이 노래를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지금 이 노래는 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노래의 가사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금강석 몸과 복수라는 테마는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과연, 대부분의 T-광산에서는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크기의 팔, 다리, 머리, 뼈 따위의 공예품이 발견됐습니다. 정말 T-종족이 만든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보석으로 만든 내장(그들이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을)이라고 볼 만한 것이 발견된 적은 없기 때문에, 보석내장이란 지능과 슬기를 뜻하는 비유, 또는 그들이 발견한 특별한 유물이라는 가설도 세워졌습니다. 후자를 지지하는 상당수의 학자들은 ‘보석내장’이 일종의 마도서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오늘날 T-종족은 만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하로 너무 깊이 내려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발 아래, 까마득히 먼 심연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을까요? 어둠 가운데 금강석 몸을 완성한 그들이, 언젠가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들 종족의 새로운 몸이 햇살 아래서 찬란하게 빛날까요? 그들의 배 속에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하고 투명한 보석내장들이 들어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손에 마도서가 들려있을까요? 하지만 알다시피 씹은 다음 뱉어버릴 S-종족은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합니다. T-종족이 이미 예전에 금강석 몸과 보석내장을 얻었고, S-종족이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수수께끼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2023년 4월 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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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월간으로 발행되는 <비장르 문학>의 창립자이자 LGBT 활동가, 패션 사진가, 비건 행동주의의 리더, 그리고 시인이기도 하다.

시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창립한 월간지 <비장르 문학>에 <이것은 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혹은 어떤 때는 시이고 어떤 때는 시가 아닌>를 발표하면서 등장했다. 그의 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순식간에 인스타그램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팔로워가 10만으로 늘었고, 그의 일상 생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커밍아웃을 했다. 가족들은 한 치의 놀람도 없었고, 그의 가족들은 녹색당의 당원들로, 자신의 아들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행인 일이지만 그는 어쩐지 가족들의 놀람과 걱정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에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가족들 모두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고, 가족들은 퀴어 퍼레이드가 기독교 단체에 의해 저지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아직 세상에 동성애를 혐오하는 집단들이 많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하지만 너의 가족이 항상 네 편에 서 있다는 걸,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네 편에 서 있다는 걸 기억하라고 말했다. 그는 알겠다고 했다.

또한 그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지에서 자신의 사진을 다수 전시했고, 미국에서는 젊은 사진가에게 주는 New York Young Awards 2018 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고등학교 때 혼자 유학을 떠나고 싶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고,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기뻤지만 어쩐지 모든 일이 너무 순탄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금전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으며,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 지냈다. 공부를 그렇게 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들이 자신을 좋아했고, 그가 사진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그를 지원해주겠다고 했고, 사진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뭐가 되든 안 되든 우리는 네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잘 알겠다고 했다.

유학 생활 동안 그는 약간의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주위에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유학 생활 동안 잘 지낼 수 있었다. 다른 한국 유학생들 중에는 용돈을 벌기 위해 식당이나 카페, 혹은 호스텔에서 알바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그들이 열심히 사는 것 같고 또 그것이 왠지 좋아 보여 자신도 스스로 용돈 벌이를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식당이나 카페에서 하는 일은 힘들 것 같았다. 그는 통역하는 일을 찾아서 통역 알바를 하며 용돈을 벌었지만, 사실 그는 부모님에게 받은 돈이 있었고, 그걸 모아 애플 스토어에서 새로 나온 맥북과 옷을 샀다. 사람들은 그의 스타일을 보고 어쩐지 예술적인 일에 종사할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는 그 예측과 일치했다.


악력

1996년 6월 서울 출생

시카고 예술대학 졸업

시집 <추상> 2016, <사각형과 반문학> 2018, <직선보다 점선, 점선보다 나선> 2020

전시 <post and west> 2015, <riverside and suicide> 2016

잡지 <비장르 문학> 2016-현재



2023년 4월 2일 일요일

23년 3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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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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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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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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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284,593원 (0원 + 284,097원 + 496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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