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3일 일요일

서재 안의 겨울

서재에 겨울이 있다. 반쯤 눈에 파묻힌 책들이 고즈넉하게 보인다. 누가 서재로 겨울을 들여왔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겨울이 이성의 소산이며 악하기만 한 것이라는 것도 나는 잘 모른다. 겨울이니만큼 더 심하게 난로 안에 나뭇짐들을 넣어야 한다. 벽난로에서 타닥, 하는 소리가 난다. 밖은 겨울이 아닐 수 있다. 나가본 지가 오래되어 정확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서재의 구석에 거미가 줄을 치고 있다. 걷어내지 않고 그냥 놔뒀다. 거미와 친구는 될 수 없지만. 여기에서 나는 약간의 외로움을 느낀다. 내 주위는 이성으로 가득하다. 나는 나이를 먹은 것이고 어떤 사람이 보기엔 초라하거나 무미건조할 수도 있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 소년은 그 여왕에게 반하지 않는다. 아름다움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연정, 반함이라는 감정일 수 있다. 소년은 미리 다른 대상에게 반했던 것이다. 눈 안으로 들어간 얼음조각 때문에 그렇게 반한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다. 그러면 안 됐는데. 물론 이야기의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지만 그 실수는 인상 깊은 것이었다. 어쩌면 소년이 기억 못 할 수 있는 그런 불온한 언행은 소년 자신이 저질렀기 때문에 용납받을 수 있는 것이리라. 그 행위와 이야기의 당사자였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얼음 여왕은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춥고 차가운 겨울이다. 서재를 나가기만 해도 온도가 달라진다. 몹시 따뜻해진다. 나는 지금 욕조 안에 앉아 있고, 내 일과는 우선 이렇게 씻은 다음 서재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책을 읽다가 몸이 차가워지면 난로 앞으로 다가간다. 거기서 더 차가워지면 서재에서 나와 다시 씻는다. 그것을 반복한다. 이러한 일상은 사실 별 볼일이 없다. 나는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죽은 내 딸이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 안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딸이 나를 찾을 때 좀 더 만면에 미소를 띨 것 같았다. 난 재주가 없으므로 서재에 겨울을 들여올 수 없었으나 생각은 그렇게 해 보았다. 서재에 겨울을 들이면 좋겠노라고. 그리고 딸이 죽은 다음 그 생각은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금쯤은 슬픈 일이고, 나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힐끔 비쳐 보이지는 않았으나, 결국 남은 사실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딸아이의 죽음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아이에 대한 회한으로 이 서재 안의 겨울은 온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인간적인 여지와 소중한 감정을 연료로 저 벽난로는 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쯤은 이 입장 이외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죽을 용기는 없으며 인간들에게 닥치는 비극과 불행에 대한 합리화를 이미 마친 뒤였다. 조금 더 우습게도 이 겨울은 눈 내리고자 하면 나리게 할 수 있다.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다. 나는 이야기 속의 얼음 여왕과 비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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