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1일 금요일

작약과 여인

작약 한 그루가 있다. 바람결이 찬 이 언덕에 당신은 무변하게 앉아 있다. 앉아서 곰방대를 피운다. 작약 하나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성한 가지들 주위로 당신의 머리가 있다. 우습게도 사람 키 높이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거기엔 열매라고는 믿기 싫을 정도로 시큼하고 텁텁한 맛이 나는 것들이 달려도 있다. 당신이 앉은 자리보다 작약은 아래에 있다. 핏방울이 맺히면 동그랗게 보이듯이 이 언덕은 둥근 원형으로 솟아 있는데, 당신은 눈에도 동그란 권태의 기색이 끼어 있다. 그러면서 곰방대를 피운다. 작약은 한 가지 사물 이상인 것 같기도 하고 꽤나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제시간에 왔다면 꽃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아쉬운 눈길로 손을 들어 가지들 사이를 만진다. 바람이 불어 가지들이 자기들끼리 얽히려고 움직인다. 당신은 열매 하나를 따서 입에다 넣고 빨리 과육을 씹은 뒤 손바닥에 입안에 남은 씨알들을 뱉는다. 그리고 날아가라는 듯이 저 아래에 던진다. 당신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으나, 오늘 내일 중으로 이것의 모든 열매를 이렇게 하여 땅 밑 적당한 깊이에 묻어 두어야 한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다. 씨앗이 싹트기 나쁘지 않은 별들의 운행이 조금 저문 저녁 위로 대강 비쳐 보였다. 천문을 볼 줄도 알지만 거기엔 그리 좋은 노력을 통했던 것이 아니다. 이 녀석은 과육을 먹어주지 않고 씨알에 이빨로 손상을 주지 않으면, 씨 안의 진짜 씨들이 땅에서 싹트지 못해 이렇게 남의 입안을 강제로 버리게 하는, 물론 먹다 보면 그것도 못 먹을 정도만은 아니었으나, 그래 사람으로 따지자면 까다롭고 무성의한 그런 이였다. 배곯는 사람들의 우상을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을 일부러 폄하하지 않아도 당신은 배곯는 일이 싫었고, 그렇지 않아도 은전은 그리 없었다. 이것의 열매라도 얼마 간의 포만감을 줬는데, 게다가 그렇다고 감사해지지도 않았다. 당신은 그저 열매를 먹고 또 뱉고 먹고 또 뱉으며 입안이 쓴맛으로 그렇게 되고 있을 때마다 이것이 미식인가? 하는 괴악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것도 먹는 재미라면 먹는 재미였다. 다시 말하지만 못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동생이 있었고 그 동생에게 갖다 줄 열매들을 오른손에 챙겨둔 이후였다. 너도 먹어보라고. 동생은 남을 원망 안 했다. 당연한 거라면 당연한 거겠으나 살아 오는 중에 비애도 있었고 없는 이의 권태와 오만도 있었다. 당신과 동생 모두. 그런 것들도 곰방대를 불면 잠시 잠깐 날아간다. 당신은 쓸데없다는 듯 희게 웃는다. 이걸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헤매기